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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고고학사 연구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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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고고학사 연구하기

1장에서 브루스 트리거는 고고학사에 대한 정의와 고고학사를 연구하는데 관련이 있는 부분 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본문이 시작하기 전에 “사회과학자들이 어떻게 하면 순수 과학자가 될 수 있는지를 말해 주 는 학문 방식이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그 정도의 연구 업적을 내면서도 인간과 사회에 대한 연구는 과학적일수 없을 것이라고 보는 또 다른 방식이 존재한다.”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이 문구는 사회학자인 ERNEST GELLNER의 문구를 인용한 것이다. 이것은 이 장에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를 보여준다.

저자는 역사(학사)적인 시각을 채택하여 고고학적 해석과 그 사회 및 문화적 환경 사이의 변화하는 관계를 아주 좋은 위치에서 고찰할 수 있다고 믿는다.

1. 고고학사를 보는 시각들

1950년대 이후 고고학을 해석하는 방법에는 단지 기술하는 것에 집중하는 문화사 접근 방 법에서 과정주의, 탈과정주의로 변화해 왔다. 변화하는 과정에서 고고학사를 보는 시각들도 많이 다양해졌다. 철학자이자 고고학자였던 콜링우드는 “그 어떠한 역사적인 문제도 그것에 대한 사상의 역사를 연구하지 않고서는 연구할 수 없다”라는 말을 하였고, 이에 동의하는 고 고학자들도 늘어나고 있다. 브루스 트리거도 이러한 학사적인 접근방법을 채택하였다. 그는 이 방법을 통해서 이 책에서 고고학적 해석과 그 사회 및 문화적 환경 사이의 변화하는 관계 를 아주 좋은 위치에서 고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학사적인 방법과 반 대 의견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나타났는데, 이것은 현재까지 고고학사를 보는 시각들이 여러 관점에서 제시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단선적인 시각

단선적이라는 일련의 단계를 거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윌리와 새블로프, 더글러스 슈워츠는 미국 고고학의 역사를 몇 단계로 나누었다. 이들은 구체적인 것에서 일반화를 이끌어내는 베 이컨 식의 귀납적인 모델을 따라 과학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고고학이 발달을 해왔다고 보았 다. 데이비드 클라크도 이들과 의견을 함께하는데 하나의 수렴 모델을 제안한 바 있다.

·패러다임과 고고학사

또 다른 시각은 토머스 쿤의 패러다임이다. 많은 고고학자들이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고고학의 발달을 이해하여 왔다. 패러다임이란 어떤 한 시대 사람들의 견해 나 사고를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테두리로서의 인식의 체계, 사물에 대한 이론적인 틀이 나 체계를 말한다. 쿤이 설명하고 있는 패러다임도 비슷하다. 쿤의 패러다임은 “특정 일관된 과학 연구의 전통”에 모델을 제공하는 법칙, 이론, 응용, 제도 등 과학을 하는 관행으로 받아 들여지고 있는 규준이다. 쿤에 의하면 과학공동체가 패러다임과 이론들, 그리고 둘 사이에서 발생하는 절차들을 발전시킨다고 본다. 따라서 쿤의 패러다임들은 단지 과학 이론들을 넘어서 과학 공동체의 문화를 구성하는 믿음 체계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쿤에 따르면 패러다임이 이 동을 하게 되면 예전의 패러다임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대체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극단적 인 상대주의 측면에서 해석하는 것으로 새로운 것이 등장함에 따라 이전의 낡은 것들은 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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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다고 주장한다.

쿤의 과학혁명 개념을 단선 진화론적 관점과 접목시키는 몇몇 고고학자들도 있다. 이들은 고고학 이론의 발달에서 단계들이 패러다임이라 생각할 수 있는 통일성을 보여주며 한 패러다 임을 다른 패러다임이 대체하는 것은 과학 혁명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삼시대체계를 고안한 크리스티안 톰센, 형식 분류를 시도한 오스카 몬텔리우스, 신석기 혁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고든 차일드와 같은 혁신가들은 당시의 고고자료에 대한 관습적인 해석들에 자신만의 조사연구 방법을 고안하여 고고학 연구의 방향을 크게 바꾸어 놓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조한 사람이 된다. 하지만 단선적인 관점들은 왜 공통된 상위이론을 가지지 못 하고 있는지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많은 학자들이 관심분야가 다르고 자료를 바 라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학자들의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상위이 론들이 많이 생겨나게 된 것이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상당한 편견을 가지고 상이한 학파들을 지지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쿤의 과학혁명을 긍정적으로 보는 학자들이 있는 반면에 혁명적인 변화라는 개념의 적절성 에 대한 문제제기도 있다. 이런 학자들은 고고학의 이론이 변화는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것과 급격한 변화로 보이는 것조차도 쿤의 혁명의 개념과 일치하는지에 문제제기를 하였다. 왜냐하 면 쿤은 새로운 것은 낡은 것은 폐기하며 대체된다고 설명하였는데, 실제로 많은 이론들과 개 념들은 폐기되지 않고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거릿 매스터맨은 패러다임 개념을 포괄하기 위해서 형이상학적 패러다임, 사회학 적 패러다임, 구성적 패러다임과 같은 세 가지 패러다임의 형식을 구분하였다.

숀 하이즈와 이안모리스는 푸코의 에피스테메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고고학의 발달을 이해하 려 시도한 바 있다. 푸코의 에피스테메는 특정한 시대를 지배하는 인식의 무의식적 체계 혹은 특정한 방식으로 사물들에 질서를 부여하는 무의식적인 기초라고 할 수 있다. 즉 모든 사물이 나 사고방식에 특정한 규범,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다. 쿤의 패러다임과 푸코의 에피스테메는 학문적 해석의 발달에서 일반적인 단계들을 특징화시키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는 공통점은 있 지만 고고학 해석의 발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선진화적인 관점을 넘어서지는 못하였다. 과 학은 혁명을 거친다기보다는 점진적인 변화나 진전을 겪어왔고, 고고학사는 초기부터 현재까 지 과거에 대한 지식을 점진적으로 축적함으로써 성장해 왔다고 학자들이 제시하였기 때문이 다.

·순환론적인 시각

순환론적인 해석은 고고학자들이 고고학 해석이 합리론과 낭만주의라는 인간행위에 대한 대 립적인 관점들에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생겨났다. 이러한 시각은 스튜어트 피고트와 글 린 대니얼로부터 시작되었다. 피고트와 대니얼은 인간의 행위는 예측 불가능하여 완전히 이해 를 할 수 없다고 한다. 고고학 해석들은 사회적 맥락과 그 당시에 주도하는 지성사를 포함하 고 있는데 이 역시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료의 축적을 제외하고 과거 를 이해하는데 어떠한 진전이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축적된 자료들은 오랜 시간이 지 난 뒤에 다시 찾게 되는데 고고학자들도 동일 경향을 갖는다는 것이다. 고고학 해석에 있어서 도 도돌이표 현상이 반복되어 발달해 왔다고 보는 것이다.

이를 입증해주는 것이 고고학자들은 경제학자 에스터 보서럽의 연구(1972)에서 알 수 있다.

보서럽의 연구를 통해서 인구밀도의 증가가 노동 집약적인 식량생산 형태를 가져왔다고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서 주장되었는데 실제로 고고학자들은 훨씬 이전부터 보서럽의 주장을 해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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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 예로 1843년 스웨덴의 고고학자 스벤 닐손은 선사시대 스칸디나비아에서 인구 증가는 유목에서 농경으로의 생활 변화를 가져왔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러한 개념은 라파엘 펌펠 리가 설명하고 해롤드 키프와 플류어, 그리고 나중에 고든 차일드가 채택하였던 식량 생 산의 기원에 대한 “오아시스”설에서도 함축적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서아시아에서 후빙기의 건조화로 인해 사람들은 잔존한 수원지에 모여 살게 되었으며, 거기에서 높아진 밀도의 인구 를 먹여 살리기 위해 혁신을 일으켜야 했다고 제안한 바 있다.

이렇듯 고고학 해석을 하기 위한 이론들이나 생각들은 끊임없이 지속되고 반복되어 발달되 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과거의 생각들은 각 시기의 한 부분으로서 계속해서 고찰되어 야 한다. 왜냐하면 특정한 생각에만 중요성을 부여하게 된다면 전체적인 맥락을 보지 못하고 지나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고고학사의 주된 목적은 어떻게 고고학적 개념과 이해들이 시 간의 흐름에 따라 바뀌어왔는지를, 당연한 것이나 현재의 상태대로 그냥 주어진 것으로 받아 들이지 않도록 비판적으로 연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고학의 지역 전통과 교류

지역적 다양성의 존속도 고고학 해석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인데, 레오 클레인, 트리거와 글로버는 고고학사를 지역 학파의 학사로 고찰한 바 있다. 그 이유는 나디아 아부 엘하지의 주장에서 알 수 있다. 엘하지는 고고학의 이해를 위해서는 고고 자료가 발견된 그 지역의 사 회 및 정치적 조건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그리고 사회의 변화에 따라 어떻게 변모하 고 형성되는지를 고찰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로버트 더넬은 고고학사는 단계적으로 발 달한 것이 아니라 지역 학파의 다양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고고 학 해석에 지역적인 전통들이 과거에도 존재했고,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각각은 독특한 특 성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전문화와 미시적 접근들

고고학에서 학문의 전문화는 고고 자료가 해석되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고전 고고학, 이 집트학, 아시리아학은 역사학의 틀 안에서 금석학 및 미술사적인 연구에 크게 집중되었다. 중 세 고고학은 기록 자료에 바탕을 둔 연구를 보완해 주는 물질 자료들을 연구함으로써 발달하 였다. 구석기 고고학은 역사 지질학이나 고생물학과 나란히 발달하였다. 이에 반해 구석기 이 후의 선사시대에 대한 연구는 흔히 언어학, 민족학, 생물 인류학, 비교 민족학 등 다른 많은 학문들로부터 온 정보를 고고학적인 발견과 결부시킨다. 미시적인 접근들에는 전기나 자서전 을 예로 들 수 있다. 미시적이라는 것은 사회현상을 설명할 때 개인의 의지를 중요시 하는 것 이다. 전기나 자서전은 개인의 의지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고고학에 대한 전문화와 미시적 접근의 시각들은 상호 보완적이기는 하지만, 구체적인 접근 들은 서로 모순되는 점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타당할 수는 없다.

2. 사회적 맥락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고학을 연구하는데 많은 요인들로부터 영향을 받는데 사회적 맥 락이 가장 큰 영향을 준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있던 고고학자들은 자신들이 살 고 있는 사회의 상황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상대주의의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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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고고학은 합리적으로 객관적인 작업으로서 과학의 개념에 반대하는 상대주의자들의 공격에 큰 영향을 받고 있다. 이러한 공격은 그 뿌리가 범마르크스주의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반실증주의에 있는데, 월터 벤야민, 위르겐 하버마스, 허버트 마르쿠제 등으로 대표된다. 이 철학자들은 사회 조건이 어떤 자료가 중요하게 생각되고 또 어떻게 해석되는지에 영향을 미친 다고 강조하였다.

상대주의자들은 가장 기초적인 고고 자료조차도 정신적인 구성물이며, 따라서 자료가 만들 어지고 이용되는 사회적 환경과 떨어져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극단 상대주의자들은 고고학 해석이란 객관적인 증거가 아니라 전적으로 사회적 맥락을 통해 결정 된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런 상대주의자들의 과학에 대한 비판은 극단적이고 일관성도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주관적인 편견을 깨닫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장점이 있다.

·고고학의 성장과 사회적 맥락

서양사회에서 고고학은 중간계급의 힘이 성장한 것과 시간적으로 일치한다. 15세기 이전의 고고학 후원자들은 귀족계급이었지만 15세기 이후 물질 자료를 적극적으로 연구한 사람들은 주로 중간계급이었고 17세기 이후로는 모든 학문적 분야들이 이들의 후원 아래 이루어졌다.

또한 중간계급은 시간상 또는 어떤 한 사회에서도 동일한 현상으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중간 계급의 관심사와 발달 정도는 나라마다 굉장히 달랐다. 고고학도 그 안에서 수많은 세분화로 나뉘어져 있고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다양한 이론이 생성되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중간계급 과 고고학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하부 중간계급에 속하는 것은 실제 삶에서는 넘을 수 없는 한계를 마음속에서도 넘어서지 않으며, 이론적으로는 물질적 이 익과 사회적 위치로 주어지는 문제들과 사회적 위치를 토대로 사고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말 의 의미는 중간계급은 사회적 상황에 따라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고고학이 현재까지 성장 하게 된 배경도 사회적 상황에 따라 다양한 이론들의 개발과 연구 방법들이 축적되었기 때문 이다.

하지만 고고학의 발달이 중간계급의 시간상 발달과 일치되어 왔다고 해도 물질 자료를 어떠 한 방법으로 수집하는지의 문제는 여전히 특정 고고학자가 무엇을 중시하고 어떤 이론에 영향 을 받는지에 달렸다. 그러나 새로운 시각으로 새로운 조사연구의 길이 열리기도 한다. 예를 들어 그레이엄 클라크는 중석기시대의 생계경제에 관심을 가져 당시의 자료로는 답할 수 없었 던 질문들을 던질 수 있었고, 취락고고학에 대한 관심은 고고학 지표조사에 혁명적인 변화를 몰고 왔다.

·다른 학문들과의 맥락

고고학에서 20세기가 되기까지 학문적으로 교육을 받은 고고학자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다 양한 분야와 업종들에 얻은 기술과 관점들이 고고학에 적용되기 시작하면서, 고대에만 관심을 가지던 시각에 첨가되어 크리스티안 톰센, 존 에번스 및 다른 초기 고고학자들에 의한 형식학 과 순서배열법의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가장 큰 영향을 받았던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방사성탄소를 통한 연대측정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써 처음으로 유물에 실년대에 근접한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컴퓨터를 이용 한 자료 처리는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 못지않게 고고학 분석에 변화를 몰고 왔다. 이제 엄청 난 자료를 비교하는 것이 일상적으로 가능하게 된 것이다. 또 지리학, 사회학, 경제학, 정치학 등에서도 고고학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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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학사를 보는 시각

고고 자료의 해석은 그동안 축적되어온 고고학적 기록으로부터 현재의 해석에 영향을 준다.

그렇다고 과거에 어떤 특정한 관점이 다시 고찰되거나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학자가 현재 해석하려는 관점에 포용되거나 참고가 되는 정도이다. 즉, 무비판적으로 수용된다는 것 이다. 따라서 고고학자의 과거에 대한 이해는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 환경의 영향을 받지만, 학문으로서 고고학의 지속적인 발달과 관련된 많은 요인의 영향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고고학사는 크게 내재적 접근과 외적(맥락적)접근이라는 두 가지 방법으로 나누어 볼 수 있 다. 내재적 접근은 고고학 해석에 있어 만들어낸 이론들이나 논쟁들로 접근하는 것이다. 외적 접근들은 사회, 경제, 정치적 환경의 변화와 관련지어 고찰한다. 하지만 외적 접근들이 보수적 인 고고학자들과 과학자들에게 사변적이고 이데올로기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진다고 비판을 받 기도 한다.

고고학자들이 고고학 해석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점은 바로 현재주의이다. 과거의 발달을 현재의 학문적 실제와 믿음의 측면에서 판단하는 일을 피해야 한다. 더 좋은 결과를 얻기 위 해서는 과거 사건들을 그 자체의 맥락에서, 그리고 학문뿐만 아니라 과거 사회 및 정치적 맥 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3. 고고학 해석

·과학과 이론

고고학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과학과 이론의 결합이 필요하다. 고고학을 흔히 과학에 연결시 키는데는 이유가 있다. 현재 과학은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까지 올라가 그 기원을 찾는다.

베이컨은 과학에서는 아무것도 그 자체로는 유의하지 않으면 검증과 관련되어야만 유의성을 가진다는 것이 기본적인 원칙이라고 말한다. 즉 연역법을 방법론으로 사용한다. 물론 고고자 료는 고고학자들의 의지와는 독립적으로 형성되며, 때문에 자의석 해석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과학을 하는 방법과 고고학을 하는 방법이 어느 정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고고학을 하나의 과학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는 것이다. 고고학은 또한 특정한 인간 집 단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사회과학이다. 사회과학은 인 간 사회의 여러 현상을 과학적,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모든 경험과학을 가르킨다.

과학 이론이란 어떻게 사물이 작용하고 변화하는지를 말해 주는 일반화의 한 형태이다. 이 론들은 일반적으로 어떤 한 실체나 실체에 대한 이해를 도모한다. 구체적인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런 종류의 다양한 설명들을 결합하여 다시 설명적인 주장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고학자들은 민족학자나 지리학자, 사회학자와 달리 그들이 연구하는 사람 들의 행위를 관찰할 수 없으며 대부분은 문헌 자료에 기록된 것처럼 사람들의 생각에 직접적 으로 접근할 수도 없다는 점에서 역사가와도 다르다. 대신 고고학자들은 인간행위와 사로를 인간이 만들고 사용한 것들이나 주어진 환경에서 그들의 행위로 인해 남은 물적인 흔적으로부 터 추론해야 한다.

·실증주의, 상대주의, 사실주의

오랫동안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은 순진한 경험주의자들이어서 수집된 증거들로 그럴듯하게 설명들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1960년대에 과정고고학자들은 관찰 가능한 현상들 사이에 일반 적인 규칙성을 찾고 설명을 강조하는 실증주의적 인식론을 취하였다. 또한 과정고고학자들은 과학을 중시하여 방법론적 개체론으로 일반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방법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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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룩하였다. 한마디로 가설을 과학적으로 검증하는 방법이다. 이에 반해 탈과정주의자들 그리 고 초기 콜링우드와 같은 고고학자들은 인식론을 가졌다. 오로지 지각으로만 의미를 얻는다고 주장하는 관념론을 옹호한다. 따라서 관념론자들은 지각을 결정하는데 개념들이 중요한 역할 을 한다고 믿는다. 탈과정주의자들은 실증주의자들이 인간행위가 인지적으로 조정되었다는 점 을 무시하며, 때문에 문화의 중요성을 평가절하하고 있다고 본다. 결국 실증주의는 자연세계 에 적응하는데 필요한 종류의 지식과 관련되며, 관념론은 다른 인간과 상호작용하는 데 필요 한 것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사회과학에서는 실증주의와 관념론이 부적합하다는 인식이 있으며 사실주의가 각광을 받게 되었다. 사실주의자들은 과학적 연구의 대상을 지각이나 개념화된 것뿐만 아니라 존재하고 일 어나는 모든 것들이라고 본다. 사실주의자들은 실증주의자들처럼 외형에만 신경을 쓰지 않으 며 관념론자들처럼 외형의 의미를 평가절하하지도 않는다. 사실주의는 존재물뿐만 아니라 구 조를 연구하는 것도 정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반환원주의적이다. 실제 세계의 복합성을 인 정하기 때문에 실증주의적으로 설명과 예측을 동일시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일반화와 이론

고고학자들은 과정주의를 겪으면서 자료들을 일반화하였다. 이는 자료의 수집, 서술, 분류, 해석과 관련되는 모든 과학적 행위들에서 역할을 하고 있다. 사회과학 학문들의 사례를 따라 서 일반화를 상위, 중위, 하위의 범주로 나눈다.

하위 일반화들은 고고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고고자료들은 관찰에 근거하고 있다. 중 위이론은 복수의 사례에서 두 개 이상의 변수 사이에 일어나는 규칙성들을 설명하기 위한 일 반화라고 정의된다. 즉 중위이론은 하위의 고고자료 중에서 규칙성들을 설명하기 위한 상위이 론으로 가기 전의 단계라고 할 수 있다. 루이스 빈포드는 중범위 이론을 주장하였는데, 중위 이론과 중범위 이론은 모두 관찰에 근거한 고고자료들을 포함하고 있고 이를 입증하여 상위이 론으로 가기위한 전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상위, 또는 일반 이론들은 현재 고고학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들로 다윈진화이론, 문화 생태학, 문화유물론, 역사유물론이 있다. 이러한 상위이론들은 구체적인 관찰을 설명하기보다 는 인간행위에 대한 개념들을 연관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확증되거나 반증될 수 없 다. 하지만 현재 일반화된 상위이론들은 중위이론에서 실패와 검증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현재까지 그 신뢰성을 인정받는 것이다. 많은 중범위 이론들이 유물론 및 관념론적 설 명의 양식들을 구분하는데 유의한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인간행위는 복잡하고 상징적으로 매 개되어 있는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어려워지는 것이다.

·과학적 설명과 귀납과 연역

고고학자들은 과학적 설명들이 두 가지 증명의 형식을 밟게 된다는 점을 받아들인다. 첫 번 째 검증은 일치성이다. 이는 어떤 한 설명이 사실에 대응하는지를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두 번째는 일관성이다. 어떤 한 주장이 논리적으로 일관된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이상적으로 상위, 중위, 하위 이론들 사이에 논리적인, 관찰 가능한 증거 사이에 사실 대응 을 세울 수 있어야 한다. 하위 이론들에는 대부분 관찰 가능한 증거들이기 때문에 일관성의 검증이 적용되지 않는다. 상위 이론을 직접적으로 검증하는 데도 사실 대응은 거의 쓰이지 않 는다. 연역적 접근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인간행위의 경험일반화와는 대조적으로 인간행위에 대한 설명은 가설로서 진술되고 독립된 자료로 검증되는 포괄법칙에 근거해야 한다고 주장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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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들은 상위와 중위 이론 사이에 명확한 논리적 연결을 세우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 두 수준의 이론 사이에 약하지만 복잡하며 설명하기 힘든 관련성이 있음을 과소평가한다. 이에 반해 상위이론 자체는 증명하기 어렵고 주관적인 영향을 받기 쉬우며, 중위이론을 만드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때문에 많은 귀납론자들은 고고학자들이 중위의 수준에서 신뢰할 만한 많은 수의 일반화를 수립한 다음에나 상위이론을 만드는 것을 궁극적으로 목표로 삼을 수 있다고 본다.

귀납론자들은 스스로 보아스의 학문 전통에 서 있다고 주장한다. 보아스 학파는 역사주의적 입장을 중시하면서 문화를 통합적 전체로서 고찰하려 하였다. 이러한 접근은 선입견이 개입되 지 않고 수집된 증거에 근거하기 때문에 더 우월하다고 믿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론들은 증거 로부터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료에 부과되는 것임이 분명하다.

설명이 귀납이나 연역 가운데 어느 것으로 더 잘 만들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들은 지나 치게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성공적인 이론 확립을 위해서는 귀납과 연역, 이 두 가지 접근들을 모두 필요로 한다.

·보편성과 특수성

고고학자들이 추구하는 일반화의 형식적인 성격에 대해서도 의견이 일치되어 있지 않다. 과 정주의 고고학자들은 모든 법칙은 반드시 보편적이어야 한다고 가정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과 학을 중시하며 그것을 통해 하나의 일반화를 지향했기 때문에 이것이 모든 이론에 적용될 수 있다는 믿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성과 관련된 보편 법칙은 아주 적은 수에 불과하며 대부분의 범문화적인 일반화 들은 동일하거나 밀접하게 관련된 생산양식을 가진 사회들에만 적용된다고 주장하는 고고학자 들도 많다. 여기서 말하는 보편성과 특수성은 한 곳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정한 형식의 사회들에만 적용되는 일반화는 보편 일반화의 형태로 다시 쓰일 수 있는 반면에 특수 성들은 흔히 더 세부적으로 보완하여 다시 정식화되어 특정한 수준의 사회에까지 구체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4. 도전

마지막 문제는 과연 학사 연구가 고고 자료의 해석에서의 진보를 파악할 수 있는지 하는 것 이다. 고고학의 발달이 고고 자료를 해석하는데 있어 얼마나 더 객관적일 수 있는지 하는 것 이다. 만약 고고학 증거가 과거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면 존재론, 그 리고 특히 인간행위를 억제하는 특정한 요인들에 대한 연구는 미래의 우리 학문의 발달에 인 식론, 곧 이해의 성격에 대해 연구하는 것 만큼 중요하게 될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 떻게 고고학적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어떤 식으로 찾아졌는지에 대해 알아봄으로써 고고학 해 석의 객관성이나 주관성 및 고고학이 어느 정도나 현재에 되살린 과거 이상이 될 수 있는지, 어떤 한 종류의 이해가 한 시대나 문화에서 다른 시대나 문화로 의사소통될 수 있는지에 대한 부가적인 통찰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앞에서 1장의 내용을 요약해 보았다. 1장은 앞으로 10장까지 전개될 목차의 서론이라고 할 수 있다.

고고학 해석을 위해서는 위의 과학, 과학 이론, 사회과학이라는 개념이 모두 포함되어야 한 다. 고고 자료를 관찰하여 과학적으로 검증을 거쳐야 하고 이를 검증하기 위해서 또는 그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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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에 있어서 과학 이론이 증거가 될 수 있다. 또한 이론을 설명한다는 것 그것이 사회과학인 것이다. 과학과 과학이론이 객관적이라고 한다면 사회과학은 주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둘 모두가 고고학 해석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1장 고고학사 연구하기의 시작을 알리는 문구는 ERNEST GELLNER의 글이다. ‘인간과 사 회에 대한 연구는 과학적일 수 없을 것이라고 보는 또 다른 방식이 존재한다’ 라는 말은 고고 학을 연구하는데 있어 과학적인 방법 이외에 다른 방법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방식이라는 것은 한 가지 방법에만 너무 극단적으로 치우치면 안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 다. 한 가지 이론이 옳다고 생각해서 너무 그곳에만 집중하게 된다면 다른 이론들은 무시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고학을 연구하는데 있어서도 상대주의가 있어야 한다.

또한 고고학 해석을 위해서는 사회적 맥락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콜링 우드는 사회적 맥락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연구를 할 수 없다고 하였다. 고고학 해석을 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점이 사회적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사회적 맥락은 고고학의 배경이 되는 셈인 것이다.

2장. 고전고고학과 문헌고고학

몇몇 고고학사 연구자들은 현재 고고학자들이 인류의 과거 물적 유존물이라 생각하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짐으로써 고고학의 기원을 찾았다. 그러나 물질문화를 의도적으로 이용하여 과 거에 대한 지식을 추구하는 것으로 제한하는 연구자들도 있다. 이 두 가지 접근들은 분명 역 사적으로 상호 관련되어 있었으며, 전자의 관심은 후자의 발달에 필수적이었을 가능성도 있 다. 고고학의 발달은 상당 정도 물질문화 자체와는 큰 관련이 없는 과거에 대한 관심에서 자 라난 것으로 보인다.

1. 고대 세계에서 과거에 대한 관심

·유적과 유물에 대한 관심

15세기에서 16세기로 추정되는 이로쿼이족 유적에서는 수천 년 전의 찌르개, 석제 파이프, 순동 도구들이 출토되었다. 민족지 증거에 따르면 그 유물들은 숲 속에서 그것들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영혼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유물들을 소유하는 사람들에게 다양 한 행운을 가져다주는 마법의 힘을 가진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중세 유럽에서는 농경 민들이 경작 중 발견되는 돌도끼나 찌르개들을 수집하였는데, 그런 물건들이 번개 또는 요정 과 같은 영적인 창조물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믿었던 것이다.

16세기 아즈텍인들은 정기적으로 테오티우아칸 유지 가운데에서 의식을 거행하기도 하였다.

이 유지는 서기1000년기에 점유된 것으로서 가장 최근의 존재의 사슬이 시작될 때 신이 우주 의 질서를 재정립한 곳이라고 믿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설명들은 현재 우리가 사람이 만들었 거나 자연적으로 형성되었다고 알고 있는 경관들을 사람 또는 초자연적인 기원을 가진 것이라 풀고 있다. 이러한 해석들은 고고학자들이 그 자료의 원래 의미를 찾기는 매우 어렵다. 왜냐 하면 믿음에 의한 해석이기 때문에 객관적이기보다는 주관성이 많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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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유물이나 고대 건축물들은 이전 시기 지배자나 정치적으로 위대한 시기의 유지로서만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정보원으로서 가치를 지녔다. 왜냐하면 이 지역들은 문자라는 자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명문들이 많이 발견되어 문헌자료로서 많은 참고가 되고 있다. 이집트의 제18왕조에는 필경사들이 고대의 폐기된 기념물들을 방문하고 벽 이나 기둥에 문자나 그림으로서 표현해 놓기도 하였다. 고대 왕가의 축제에 대한 기록을 남겨 그것을 재현함으로써 권위와 의식적 권력을 고양시키고자 하였다.

이집트인과 메소포타미아인들의 과거 물질문화에 대한 관심은 모두 종교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이 처음부터 완전한 형태로 문명을 세웠다고 믿었다. 이 연구들의 목적은 종교적인 관심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지만 물질자료를 통해서 과거에 대한 이해를 하 려했다는 점에서 초기 호고주의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고 생각 할 수 있다.

·그리스와 로마 그리고 고대 중국

고대 그리스인들은 역사와 고고학이라는 용어를 역사학의 두 장르를 구분하는 데 사용했다.

역사는 원래 문제를 먼저 설정하고, 관련 정보를 찾으며, 마지막으로 자료로부터 결론을 도출 하는 탐구의 형태를 가리키는 데 쓰였다. 서기전 5세기 헤로도토스를 비롯한 사람들은 가까운 과거를 연구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역사학적인 연대기 서술은 페르시아전쟁 이후에 시작되었다. 이후에 학자들은 이런 종류의 연대기들을 종합하여 현대적 의미에서 기록에 근거한 역사를 생산하게 된다. 그 이후 지금과 마찬가지로 역사는 문헌 기록 에 바탕을 둔 과거에 대한 연구를 가리키게 되었다.

고고라는 용어는 서기전 4세기에 처음으로 신화, 전설, 구비전승이나 물질자료를 이용한 더 욱 오래전의 과거에 대한 연구를 지칭하였다. 주된 강조는 계보, 도시의 창시, 사람과 제도 및 관습의 기원에 맞추어졌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전에 봉납하는 물품들을 과거의 위대한 사람 들의 유품으로 인지하였으며 때로는 무덤들을 파서 고대 영웅의 유지라고 믿어졌던 것들을 찾 아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고대 물질자료들에 대한 관심은 많아졌지만 수집하거나 연구하려는 움직임은 없었다.

중국에서 과거에 대한 관심은 주로 고고학자들보다는 사상가에 의해서 나타난다. 사상가 한 비자는 신석기시대의 채문 및 시문 토기라 불리는 유물을 중국 문명 발달의 초기를 나타내는 것들이라 하였다. 중국의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은 고대 중국사에서 아주 영향력이 있는 <사 기>를 쓰면서 정보를 수집할 때 고대의 유지들을 방문하고 과거의 유존물들에 대한 고찰을 하 였다. 유학자들은 적어도 하왕조까지 올라가는 공통의 유산을 강조함으로써 역사 연구는 중국 의 문화 및 정치 생활을 통일시키는 데 강력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사마천과 같이 초기 중국 의 역사가들은 역사 문헌에서 발견될 수 있는 실수들을 보완하고자 고대의 물품들에 관심을 가졌다. 즉 중국은 역사를 보완하고 수정하기 위해서 고대 물품들을 증거자료로서 참고를 한 것이다.

2. 중세 유럽에서 역사를 보는 시각

최근 연구에 따르면 중세 서유럽에서는 로마 문화의 물적 유존물에 대해서 이전의 생각되던 것보다 더 크게 인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몇몇 도시들에서는 아주 인상 적인 로마의 기념물들은 공식적으로 도시의 자부심의 하나로 보호를 받았다. 또한 중세시대는 암흑시대라고도 불리며 기념물이나 유물들을 대규모로 파괴하였던 시기이기도 하다. 파괴행위 로 고대의 비문들과 예술품들이 발견되기도 하였으나, 이 가운데 남아 있는 것은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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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대 그 어느 때에도 고고학 발굴이 역사적 원천으로 여겨지던 때는 없었다. 왜냐하면 중세는 암흑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종교에 집착하고 종교만이 나의 전부, 국가라는 인식이 널 리 퍼져있었기 때문이다. 고전시대의 유물들이 발견되어 때로 주목받기도 하였고 그에 대한 평가도 이루어졌으나 그런 발견을 방법론적으로 연구하려는 노력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중세에 있어 로마 카톨릭 교회는 학습을 독점하고 조정하였다. 고대에 대한 확실한 지식이 라고는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나 남아 있는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역사서들뿐이라고 여겼 다. 더구나 성서는 인간의 모든 것에 대한 역사와 우주의 역사까지도 제공한다고 믿었다. 이 러한 토대 위에서 과거에 대한 기독교적인 관점은 다양한 방식으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속적 으로 고고 자료의 해석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다음과 같은 여섯 개의 진술로 요약될 수 있다.

1. 세상은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초자연력에서 비롯되었으며, 앞으로도 수천 년 이상 유지 될 것 같지는 않다. 창조의 연대를 교황과 같은 사람들이나 주교들이 연대를 설정하였는데 이러한 연대들은 성서에 나오는 세대들을 역산한 것으로서 수천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또한 세상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끝나게 될 것이라는 믿음 도 가지고 있었다.

2. 물리적 세계는 퇴보가 진전된 상태에 있다고 믿어졌으며, 대부분의 자연적인 변화들은 신이 본래 창조한 상태로부터 부식되는 과정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물리적 세계 의 부식과 몰락은 모든 물리적 사물들의 덧없음을 증거가 되며, 이는 기독교 교회가 영적 인 것들을 강조하는 것이 타당함을 말해 주었다.

3.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신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에덴동산으로부터 인류가 쫒 겨난 것이 확산의 시작이며, 두 번째는 언어의 분화로 가속화되었다는 것이다.

4. 인간 행동의 기준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퇴보하는 것은 자연스런 것이라 여겨졌으며, 이 생각은 퇴보론에 대한 고전시대의 학설들을 알게 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퇴보론은 유럽 인들이 마주쳤던 수렵채집민과 부족 농경민들의 원시적인 기술들을 설명하는 데도 사용되 었다. 그렇지만 퇴보론의 개념이 기술이나 물질문화에 적용될 때는 그와는 다른 시각과도 충돌하게 된다.

5. 세계의 역사는 많은 사건들의 연속으로 해석되었다. 그 중 기독교는 세계사가 우주적 중 요성을 갖는 일련의 사건들의 연속으로 생각된다는 점에서 인간사에 대한 역사적인 관점을 고취시켰다. 이러한 사건들은 신이 미리 개입한 결과로서 해석되었으며 신의 도움 없이는 인류역사에서 그 어떤 역사적 중요성을 얻을 수 있는 변화 또는 진보가 이루어질 수 없게 된다. 신이 개입하지 않는 동안 인간사를 정체 또는 순환적인 과정을 그리게 된다는 것이 다.

6. 중세의 학자들과 예술가들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인들보다도 물질문화에서 변화를 인식 하기 못하였다.

3. 르네상스시대의 호고주의

·르네상스와 고전고대에 대한 관심

14세기 동안 교역과 다른 경제적 변화들이 증가한 결과 북부 이탈리아의 봉건제는 상업 도 시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게 되었다. 학자들은 베로나, 파두아, 플로렌스 같은 도시들을 고대 도 시국가의 부활로 여겼으며, 잔존하는 고전시대의 저술들을 찾아 이런 도시들을 고대 도시국가 의 부활로 여겼으며, 고전시대의 저술들을 찾아 이런 도시들에서 정치적 변화를 삼고자 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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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역사적 선례를 예로 들어서 혁신을 정당화하는 일은 세속적인 것과 관련해서는 먼 과거를 현재보다 우월하게 보고 생활을 증진시키는 정보의 원천으로 삼는 것이다. 하지만 르네상스를 계기로 정치혁신을 정당화하는 역사 문헌을 찾게 되면서 점차 당시의 사회 및 문화 생활이 고 전 고대와 그렇게 비슷하지는 않다는 인식을 하게 된다.

14세기 초기 르네상스 학문은 수도원의 도서관에서 발견된 자료들에 집중하였다. 15세기에 는 그리스 문헌들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는데, 당시에는 이런 문헌들이 다른 나라에서 이탈리 아로 대량으로 들어왔었다.

더 학문적인 고전고대에 대한 관심은 문헌에서 건축이나 미술로 확산되어 갔다. 지리학자 알베르티는 고대 건축을 연구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였고 도시 귀족과 부유한 상인들은 고대 미술과 건축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면서 자신들의 사회적 위치를 드러내기 위해서 미술을 후웜 하였다.

15세기 말에 들어오면 바오로 2세, 알렉산드르 6세와 같은 교황과 추기경들 그리고 이탈리 아 귀족들은 고대 미술품들을 수집하고 전시하게 된다. 이들은 그런 물품들을 찾기 위해 땅을 파는 일을 후원하기 시작한다. 체계적인 발굴은 아니지만 발굴을 시작했다는 것에 의의를 둘 수 있다.

·호고주의의 확산

고전고대에 대한 관심은 점차 유럽 전역에 확산되어 갔다. 이미 16세기에 윌리엄 캠든과 같 은 지역의 호고가들에 의해 연구되었다. 이 과정에서 귀족층은 로마 및 그리스 미술품을 탐욕 스럽게 수집하였으며, 귀족의 대리인들이 미술품을 이탈리아와 그리스로부터 사들였다. 앞에 서 설명하였듯이 14세기 고고라는 말은 문헌기록 편찬에서만 사용되던 말이지만 1600년이 되 면 과거와 관련된 물적 증거들을 수집하는 것을 주된 작업으로 재정립하게 된다. 호고가라는 용어는 이미 15세기부터 쓰였는데, 16세기가 되면 때로 고대의 유물들을 연구하는 아마추어뿐 만 아니라 공식적인 직함을 지칭하기도 하였다.

호고주의가 확산이 되면서 고대 명문 연구 전문가였던 자코브 스폰은 근대적인 의미에서 이 전 인간사회들의 물적 유존물에 대한 고찰을 가리키는 뜻에서 고고학이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빙켈만과 미술사

18세기 동안 호고가들은 고전시대의 미술품을 연구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호고가들은 미술품을 수집하여 근대 미술가들의 모델로 유행시켰다. 석조상이나 금속조상들은 미적으로 높이 평가되었으며 장식의 의미를 알아내려는 노력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작품들은 역사 문 헌을 통해서만 연대를 추정할 수 있었는데, 명문을 가진 것은 별로 없었으며 그러한 맥락에서 발견되거나 구체적인 기록을 가진 것도 없었다. 이와 같은 문제를 독일의 호고가 요한 빙켈만 이 해결하였다.

빙켈만은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유를 사랑하였기 때문에 세상에서 제일 위대한 미술들을 만 들어냈다고 믿었으며, 이는 의인화된 이미지들에 분명하게 나타난다고 하였다. 그는 자신의 생애를 이탈리아에 전시된 그리스와 로마의 조각품을 연구하는 데 바쳤다. 당시 그리스 미술 의 많은 작품들은 로마시대의 복제품 형태로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빙켈만은 고전시대 문헌 에 그 연대가 나와 있는 작품들을 찾아냄으로써 될 수 있는데로 많은 조각품들의 연대를 추정 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리스 조각품들을 네 시기로 나누었다. 시원양식, 고도의 양식, 세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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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 양식, 모방과 쇠락의 시기였다. 이런 양식들은 아직까지도 그리스 미술을 말할 때 자주 인 용되곤 한다. 그렇지만 빙켈만은 미술사적으로 훌륭한 업적을 남겼지만, 스스로 생각하는 예 술적 아름다움에 대한 이상적 기준들을 찾고자 하였으며 자신을 후원하는 귀족들에게 큰 관심 을 끌 만한 물건들을 지속적으로 연구하였다. 그리하여 일상생활에 대한 고찰은 전혀 보여주 지 못한 것이다. 다만 고전 문명에 대한 자신이 역사적인 지식을 고대 문헌들에서 부적절하게 다루어진 영역들에까지 확장시키기는 하였다.

빙켈만은 흔히 고전고고학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양식 편년을 수립하여 연대를 모르는 유물 들에 적용시킬 수 있음을 논증한 것은 고고학을 역사학과는 다른 독자적인 학문 분야로 세우 는 데 중요한 한 걸음을 나아간 것이다. 하지만 빙켈만은 18세기의 다른 호고가들과 마찬가지 로 일반적으로 고고학과는 다른 물품들을 연구하는 데에만 관심을 가졌다. 그 자신의 주된 관 심은 양식이었지 출토맥락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빙켈만이 미술사학의 창시자라는 주장 이 고전고고학의 아버지라는 주장보다 많은 점에서 더 합당하다. 빙켈만은 분명 고전학 연구 와 미술사학이라는 독립된 학문이 서로 밀접하고도 오래 지속된 관계를 맺는 데 큰 역할을 하 였던 것이다.

·18세기의 발굴과 유적조사

18세기에 호고가들이 예술품을 수집하는 것 이외에 체계적인 고고학 발굴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는데 바로 서기 79년 베수비우스 화산 폭발로 파괴도니 헤라쿨레니움과 폼페이에서의 로 마 유적들 발굴이 그러하다.

프랑스에서는 17세기 이후 로마 건물들을 고찰하고 기록하며 보존하는 데 관심이 증가하였 다. 이러한 관심은 루이 14세 치하에 도로를 건설하고 요새를 확충하는 프로그램으로 더욱 자 극을 받았다. 건설 과정에서 땅속에 묻힌 로마의 구조물들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건축가들은 아주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헤르쿨라네움과 폼페이의 건축물들에 대해서 평면도와 해발고 도를 기록하였다. 이러한 발굴들은 빙켈만이 호고주의적 연구를 고전고고학으로 전환시키는 데 했던 기여 못지않게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고대 신전들과 다른 일반 건물 유지들을 발굴하고 보존하는 일은 1809년에서 1814년까지 나폴레옹이 로마를 점령하였던 시기 동안 프 랑스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러한 발굴의 목적은 미술품들을 찾는 일이었지만 18세기가 되 면 헤르쿨라네움과 폼페이에서 새로운 발굴의 기준이 수립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호고가 들은 르네상스 초기부터 로마의 도시 지리학에도 관심을 가졌지만, 18세기가 되어서야 미술품 의 수집뿐만 아니라 특정 유적의 건축물들까지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연구들은 피치콜리에 의해서도 이루어졌다. 또한 1734년 이탈리아를 여행하였던 잉 글랜드 신사들은 호고가협회를 조직하여 1751년부터 그리스에서 고대 기념물에 대한 상세한 지표조사를 후원하게 되었다. 이런 조사에 대한 출간물들은 이탈리아 뿐만아니라 고대 그리스 전반의 미술 및 건축에 대한 관심을 고양시켰다.

4. 고전고고학의 발달

·고전고고학의 성립

18세기 말 고전고고학은 학문적 맥락에서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프로이센 제국의 북부 게르 만왕국은 1806년 나폴레옹에 패하여 교육 체계의 혁신을 기획하게 되었다. 이 혁신의 목적은 공무원들을 교육시켜 프랑스 계몽주의의 혁명적인 사상에 노출시키지 않으면서도 국가의 사무 를 더 효율적으로 조정하는 것이었다. 프로이센의 교육 혁신을 맡았던 빌헬름 폰 훔볼트는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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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언어, 문학, 역사, 철학, 미술 연구에 바탕을 둔 고등학교 과목들이 미래의 관료들이 혁명 사상에 노출되지 않도록 교육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는 그리스 철학 은 독일 학생들에게 근대 세계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사상들을 충분히 제공해 존다고 생각하였다. 고전학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폰 훔볼트의 교과목 혁신의 영향으로 프로이센과 같은 게르만 대학들에서 고전학연구가 확 충되었다. 고전학은 괴팅겐대학에서 헤인이 설립하고 그의 학생이었던 프리드리히 볼프가 할 레 대학에서 더 명확하게 정식화시켰다. 그것은 철학을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화를 이해하는 열쇠로 생각하였다. 고전학자들은 고대 문헌의 진실을 검증하기 위해서 고고학에 의지하기보 다는 문헌 비판에만 의존하였다. 그래서 고전학자들은 역사학적인 방법론을 취하여 문헌 비판 에 집중하였다.

·19세기 후반 고전고고학 발굴

19세기 후반 고전고고학은 문헌기록으로부터 알려진 지식을 확증하고 확장시킬 수 있는 정 보를 얻을 방법을 찾기 시작하였다. 주세페 피오렐 리가 이탈리아 정부의 지원을 받아 1860 년 폼페이의 발굴 책임을 맡게 된다. 그는 이전까지 이루어지는 미술품과 건축물 발굴들은 모 든 종류의 건물들에 대한 세부적인 발굴이고 서로 다른 부분들이 어떤 목적으로 사용되었는지 를 파악하기 위한 아주 세부적인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즉 지금 행하고 있는 발굴은 큰 목적 을 달성하기 위한 아주 부분적이라는 것이다.

19세기 동안 독일의 모델에 강한 영향을 받은 고전학 연구는 인문학의 정수가 되면서 유럽 과 미국 전역에 인문학 교육의 토대가 되었다. 따라서 고전시대에 대한 지식은 우월한 기호, 교육, 사회적 지위에 대한 표시가 되었다. 때문에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주요 도시들에서 박물 관, 이탈리아와 그리스 및 주변 지역에서는 고전학 연구를 증진시키기 위한 국립 학교들을 수 립하는 데 지원이 이루어 졌다.

이탈리아는 외국학자들의 발굴을 금지하였지만 그리스에 터를 잡은 외국 학자들은 지중해 북부지역에서 고전시대 유적들에 대한 중요한 발굴들을 수행하였다.

고전시대의 발굴은 크림반도에서 19세기 초에 시작되었고 1826년이 되면 크레흐에 많은 발 견물들이 모이게 되어 고고학 박물관이 수립되기에 이른다.

많은 전문적인 고전고고학 훈련은 그에 결부된 학교들 안에서 이루어졌다. 주요 국가들에서 만 대규모 발굴을 지원하는데 필요한 재원들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국가들은 고고학을 통해 국제적인 위신을 획득할 수 있는 길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고전고고학 발굴이 국가의 정세에 개입되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고전고고학의 성격

고전학과나 미술사학과가 대학이나 박물관에 자리를 잡게 되면서 고전고고학자들은 선사고 고학자들이나 인류학자들과는 다르게 분류되었다. 그것은 바로 고전고고학의 연속성에 있다.

고전고고학은 성당, 일반 건물들에서 고대 문헌과 미술품들을 찾아왔다. 그리고 조금 더 발전 하여서 도시에 초점을 맞추어서 도시의 평면도를 알아내고자 하는데 관심을 두었다. 정작 도 시 안에서 생계나 취락유형 등은 무시를 하였다. 이렇게 고전고고학은 다른 곳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서 초기의 르네상스적인 경향에서 계속 머물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19세기 동안 고전고고학에 변화가 일어났다. 고전고고학에 전문화가 진 행되면서 미에 대한 초기적 관심이 양식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에두아르트 게르하르트는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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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은 유물에 대한 체계적인 서술과 비교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고전고고 학자들은 유물들을 편년적으로 배열을 하고 어디서 만들어 졌는지 파악하려하고 누가 만들었 는지를 분석하려 하였다. 양식적인 분석을 하려 시도하였지만 고전고고학자들은 고대 유물의 기능에 대해서는 관심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외적인 사람으로 미국의 고고학자 해리 엇 앤 보이드 호이스를 예로 들 수 있다. 그는 많은 크레타의 유물들을 기능적인 측면에 대한 고려를 토대로 분류하였다. 19세기와 20세기 초에 몇몇 고전학자들이 인류학적 주제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만 고전고고학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였다. 고전고고학이 기 능적인 측면에 관심을 가지지 못한 이유는 유물의 기능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바로 유물 들을 보고 어떤 대화를 가능하게 해주는지에 대한 즉, 외적인 면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진 것 이다. 따라서 고전고고학의 주된 목적은 원래 사회 또는 문화적 맥락에 대한 것에서 고립된 양태로 물질문화에 대한 제한적인 범위의 형식적 연구로 후퇴하게 되었다. 고전고고학의 보수 적인 경향에 대해서 스티븐 다이슨과 이안 모리스는 대학원학생들이 외국으로 나가 흔히 대규 모의 장기 발굴들을 위해 조직된 위계적 구조 안에서 연구를 수행해야 할 필요가 있었음을 주 장하기도 하였다.

1960년대 이후 고전학 연구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 이유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는 더 이상 현대의 다민족사회에서 예전과 같은 관심을 끌 수 없었다.

5. 이집트학과 아시리아학

고전학 연구는 이집트학과 아시리아학의 발달에 모델을 제공해 주었다.

·고대 이집트 연구

고대 이집트는 오랫동안 사색과 환상의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성서에 이집트는 이국적인 경 이의 땅이자 도피처의 이미지와 함께 억압, 우상숭배, 위험한 여자들의 땅으로 그려졌기 때문 이다. 또한 15세기 르네상스 학자들은 고전시대 저술들에서 이집트를 재발견하게 되면서 모세 보다 오래전에 이집트인들은 완전하면서도 덜 부식된 형태의 신성한 지혜의 원초적 계시를 지 니고 있을 것이라는 식의 공상을 하기도 하였다.

고대 이집에 대한 체계적 연구는 1798~1799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이집트 원정에 동행 한 프랑스 학자들의 관찰로 시작되었으며 1809년부터 <이집트 서술>이라는 몇 권짜리 책을 출간하였다. 이러한 군사 행동으로 로제타스톤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이는 장프랑수아 샹폴리옹의 고대 이집트 스크립트들에 대한 해독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비문이었다. 이때부 터 이집트에 대한 중요한 연구결과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대부분의 이집트 문헌들은 지식의 저장소가 아니라 종교 의식의 일상적인 양상들과 더불어 역사, 행정, 그리고 세속적인 사항들 을 다루는 것이었음이 드러났다. 그래서 몇몇 고고학자들은 기념비적 명문들을 기록하기 시작 하였다. 문헌들을 사용하면 고대 이집트에 대한 편년과 역사의 골격을 얻을 수 있었으며 이와 관련하여 이집트학자들은 이집트 미술과 건축의 발달을 연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샹폴리옹은 성서와 상충되는 편년을 제한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는 나폴레옹의 패배 이후 프랑스를 통치 하던 보수적 관료들의 종교적 감정을 자극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1880년대부터 이집트에서 작업을 하기 시작한 페트리는 자신의 발굴 도면을 그리고, 어디 에서 유물들이 발견되었는지를 기록하였다는 점에서 새로운 기준을 세웠다. 그는 단면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층위 단면은 거의 그리지 않았다. 이집트 고고학을 현대의 기술적 수준과 비슷하게 연구한 학자는 미국의 고고학자 조지 라이스너이다. 그는 이미 1900년 엘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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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 수도원에서 층위 단면을 일상적으로 그리기 시작했고 기자의 헤테페레스 여왕 무덤과 함 께 묻힌 많은 물건들을 세심하게 기록하였다. 이집트학도 고전고고학과 마찬가지로 일생생활 에 대해서는 관심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고전학 연구를 모델로 한 이집트학자들은 문헌학, 문 학연구, 정치사, 상류층의 예술 및 건축 연구에 집중하였다.

·아시리아학의 성립

아시리아는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역에서 티그리스강 상류를 중심으로 번성한 고대 국가이 다. 아시리아학의 연구도 명문의 해독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2세기에 서아시아를 여행하는 유 럽인들은 이라크와 페르시아의 고대 도시 유지들을 주목하였고 때로는 해석할 수 없는 명문들 이나 다른 유물들을 유럽으로 가져오기도 하였다. 1616년 피에트로 델라 발레는 바빌론의 유 지를 찾아 고찰을 하였으며 우르지역을 방문하기도 하였고 1786년 조제프 드 보샹은 바빌론 에서 알려진 첫 발굴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세 도시 유적들은 모두 구약성서에 언급되어 있 던 곳들이다. 1754년 장자크 바르텔르미는 고대 히브리어의 지식을 이용하여 페니키아 알파벳 을 해독하였으며 이로부터 서아시아 문명에 대한 금석학적 연구가 시작되었다. 19세기 초에 바빌론 유적들을 포함하여 메소포타미아 유적들을 조사하고 수집하였으며 북부 이라크의 님루 드와 쿠윤직에서 더 대규모로 발굴을 하게 되었다. 1857년에 헨리 롤린슨은 페르시아 왕 다 리우스 1세가 이란의 비시툰의 절벽에 새기라고 명령한 세 개의 문자로 된 기록을 시작으로 고대 바빌론 언어로 된 설형문자들을 성공적으로 해독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는 고대 아시리 아와 바빌론의 역사를 재구성하는데 획기적인 일이었다.

이라크 남부에서는 영국과 프랑스가 크림전쟁에 참여한 뒤에야 대규모 발굴이 시작되었다.

1877년에서 1901년까지 텔로에서 에르네스트 드 사르젝의 발굴은 서기전 3000년기 이라크 남부에서 번영하였던 수메르문화에 대해 차음으로 방대한 증거를 제공하였다. 독일 고고학자 로베르트 콜데바이는 광범위한 범위의 고대 바빌론 유적을 발굴하였는데 이로서 바빌론시대 도시구획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었다.

아시리아학자들은 문헌 자료를 사용하여 메소포타미아 역사를 재구성함으로써 미술과 건축 에 있어 장기간의 변화를 연구할 수 있었다. 아시리아는 문자 자료가 아주 잘 보존이 되어 있 어서 금석학자들이 기록 자료에 더 크게 의존할 수 있었다. 때문에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정치 사, 문학 장르, 종교 신앙, 사회 및 정치 조직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다양한 고문헌 자 료들로 메소포타미아의 금석학자들은 시대 및 주제에 따라 전문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나 아시리아학은 문헌에 기반을 둔것과 고고학적인 지향을 가진 아시리아학이 유리되어 있다는 점이 메소포타미아의 자료에 대한 해석을 종합하는데 가장 큰 장애가 되고 있다.

·이집트와 아시리아학의 의의

이집트학과 아시리아학의 발달로 고대 히브리, 그리스, 로마 인의 서술들을 통해서만 이차 적으로 알 수 있었던 이 두 지역에 3000년이라는 문헌사를 더해 주었다. 이 두 학문은 고전 학을 모델로 하여서 유물들이나 건축물들에 대한 기능적인 면에 관심을 보여주지 못하였지만 편년, 역사 기록, 종교 신앙 등에 대한 많은 정보들을 주었다. 두 학문 모두 문자 자료에서 많 은 발달을 이루었다. 문자 자료들이 모두 땅에서 출토되고 있었기 때문에 고전학을 모델로 하 였지만 고고학에 의존을 하였다. 이집트와 아시리아학의 발달에는 성서 연구과 관련되어 있다 는 점에서 지원을 받아 성장하게 되었지만 학문이 전문화되면서 한계들을 극복하려고 하였다.

이집트학과 아시리아학에 내재된 또 다른 편견은 이집트와 이라크의 이슬람 시대에 대한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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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를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문화는 이슬람 문화보 다 우월한 것이라는 생각이 광범위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고학은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에 서 식민화에 대한 유럽인들의 생각을 반영해 주며 간접적인 지원을 하였던 것이다.

6. 기타 초기 고고학적 행위들

중국 송나라 때에는 식자층 사이에서 유학이 부활하면서 고대의 진귀한 유물들을 연구하는 오랜 전통이 강화되었다. 이러한 관심은 황하의 흐름이 전도되면서 상나라의 청동 그릇들이 우연하게 출토되어 커지기도 하였다. 송나라 학자들은 고대 청동 및 옥 제품, 특히 명문을 가 지고 있는 유물들에 대한 상세한 서술과 연구들을 간행하기 시작하였다. 송나라 이후 이 같은 호고주의적 연구는 크게 쇠락하였지만 청나라 초에 다시 부활하였다. 고염무, 염약거와 같은 학자들은 문헌 비판에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이들의 주된 관심은 고대 저술들의 진실성을 확 인하는 것이었다. 청동이나 돌에 새겨진 고대의 명문들은 초기의 사전들에 나와 있는 글자의 의미를 입증하고 바로잡는 데 쓰였다. 또한 고증학파의 학자들은 1898년부터 안양에서 출토되 기 시작한 상나라 복골에 쓰인 문자를 해독하기 위한 노력도 하였다. 이러한 연구들이 현대 중국에서 고고학의 발달에 토착적 토대를 제공하였다고 해석되기도 하지만, 이러한 연구들은 단지 과거의 사료를 평가하고 검증하는 과정을 통해 역사적 진실규명과 그 관련성을 추구하는 역사학 한 가지에 머물렀다.

일본에서는 도쿠가와시대 동안 사무라이 학자들과 상인들이 고대 유물들을 수집하고 기술하 였다. 신유학자들 중 아라이 하쿠세키는 돌화살촉이 초자연적인 힘으로 만들어진 아니라 옛날 사람들이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국학운동을 따랐던 사람들은 일본에 끼친 외국의 영향을 배제하고자 하였으며 신도의 중요성과 왕권 회복을 꾀하였다. 이들은 8세기에 편찬된

<고사기>와 <일본서기>와 같은 문헌자료 연구를 독려하였다. 이들은 모호한 자료나 단지 상상 에 의존하여 많은 고분들은 특정 초기 왕들의 무덤이었음을 주장하였으며, 그것들을 보존하고 복원하려 하였다. 이런 식으로 경관을 통하여 불교 사원보다 신도 사원들이 우월함과 도쿠가 와 봉건제에 비해 중앙집권화환 정부의 우수성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집 트, 아시리아, 중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과거 유물에 대한 관심은 문헌자료로부터 시작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인도에서는 식민시대 이전에는 학문이나 호고주의는 발달하지 못했다. 인도의 학문 은 다른 분야들에서는 지적 성취들을 이룩하였지만 정치사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는 아마도 힌두교와 카스트제도에서 상위의 성직자와 전사 집단들 사이에 사회규율적인 권 력의 분할로 생활과 역사적 사건들의 의미에 대한 이해가 더 우주론적인 영역의 일부가 되었 기 때문일 것이다.

7. 결론

처음에 체계적으로 발달한 고고학은 역사학적인 것이었다. 과거의 물질문화에 대한 관심은 보편적이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기능적인 면에 대해 연구를 하여 과거에 대해 알아보려는 시 도는 보편적이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조각상들과 건축물들이 연구가 되기는 하였지만 그 기능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또한 이집트와 아시리아학은 두 학문 모두 종교적인 기록에서 시작되었으나 그 발달이 계속 이어지지 못하였다. 그리고 사회적인 상황으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이슬람이 연구되지 못하였다. 또한 일본에서는 고대 유물의 연구들이 정치적으로 연관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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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이것은 고고학을 연구하는데 있어 고고 자료는 사회적 맥락을 포함하지 않고는 연구 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전고고학은 후일 유럽 문화를 상류층의 시각에서 정의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왜냐 하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훌륭한 석조상들이나 건축물의 파편들을 사고 모으면서 이러한 것 들이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20세기 이전 중국과 일본 사회에서 보이는 강한 연속성과는 대조를 이루며, 고대의 문자 문명에 대한 주된 정보원으로서 고고학이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전고고학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고대 유존물에 대한 단순한 관심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다. 반면에 이집트와 아시리아학은 문헌고고학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처음부터 문헌자료에 집중을 한 것은 아니다. 두 학문 모두 종교적인 관심에서 발달한 것인데 이집트는 나폴레옹의 군사적인 행위에서부터 연구가 시작이 되었고 아시리아학은 유럽인들의 관심에서 비롯된 명문 해독에서 시작되었다. 괴테의 문장은 바로 이러한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완성체 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많은 방식들이 존재한다는 것, 그 배경에는 역시 사회적 맥락이 존재한 다는 것이다.

3장. 호고주의와 고고학

고전고고학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예술품과 건축물들에 관심을 가지면서 발달을 하였고, 아시리아나 이집트학과 같은 문헌고고학은 명문을 해독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나중에는 군 사적인 목적에 의해서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고전고고학과 선사고고학은 모두 본래 전문화된 분야가 아니었으며 처음에는 대체로 호고주의적 전통과 구분되지 않았다. 왜냐 하면 고전고고학과 선사고고학은 처음부터 유물 자체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단 지 고대유물의 외적인 것에 치중하여 수집하는 것에서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 것을 좋아하여 수집을 하는 것을 가리키는 호고주의와 구분이 잘 되지 않았던 것이다.

1. 북유럽의 호고주의

·중세의 호고주의 : 영국

중세유럽에서도 우리가 선사시대 무덤이나 거석기념물로 인지하고 있는 것들은 지역적인 관 심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지역적인 연대기들을 성직자들이 작성을 하였다. 성직자들 은 자신들의 연대기에 때로 그런 유적들과 결부되어 내려오는 민간설화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들은 왕족이나 귀족 가문의 기원을 찾아 성경이나 고전 문헌에 나와 있는 유명 인물들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연대기를 기록하는 성직자들은 설화나 전설 속에 등장하는 영웅적인 인물들 의 자손이라고 기록하였고, 특정 지배 집단들을 지지하기도 하면서 사실이 아닌 허구적인 이 야기들을 정당화시키려 하였다.

다른 연구들에서는 중동과 종교적 유대를 세우려 하였다. 20세기 말 잉글랜드 서남부의 글 래스튼버리 수도원의 수도사는 성서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하나인 요셉이 서기 63년 예수가 최후의 만찬에서 사용하였다는 성배를 잉글랜드에서 가져왔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주장은 애 국심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또한 개신교 개혁의 계기가 되었다. 영국의 호고주의는 애국심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연대기를 작성하면서 이들은 역사에 관심을 가지 기 시작하였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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