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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 예술철학의 근현대 철학적 기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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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의 하이데거 이해를 중심으로 -

김 유 석*

1)

Ⅰ. 들어가는 글

Ⅱ. 하이데거와 이경의 문제의식: 근원에 대한 물음

Ⅲ. 예술작품이 보여주는 것

Ⅳ. 진리의 은폐성과 비-은폐성

Ⅴ.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매개자로서의 예술가

Ⅵ. 결론을 대신하여

Ⅰ. 들어가는 글

이경(怡耕) 조요한(趙要翰) 선생(1926-2002, 이하 ‘이경’이라 칭함)은 한국에 서 아직 예술에 대한 학문적 담론이 체계화되지 않았던 1950년대와 60년대에, 아 름다움과 예술의 본질에 관한 성찰을 선구적으로 시도하였고, 이를 통해 하나의 일관된 이론을 확립했던 철학자이다. 미학과 예술철학은 철학의 여러 분과들을 열거할 때마다 언제나 마지막에 거론되는 분야이다. 그것은 많은 서양의 철학자 들이 저마다 정초한 탐구 방법에 따라 각자의 세계관과 인간관, 인식 이론과 사 회 이론 등을 확립한 연후에, 자신이 구축한 사유 체계의 연장선상에서 아름다움 과 예술의 본성을 다뤄왔던 모습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런 점에서 미학과 예술철

* 숭실대학교 강사

이 논문은 한국미학예술학회 2012년 봄 정기학술대회 기획심포지엄에서 발표한 원고를 수 정보완하여 게재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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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은 철학의 분과들 가운데 응용적 성격이 가장 높은 분야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말은 서양 학문의 수용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미학과 예술철학 이 연구하기 가장 까다로운 분야라는 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것들을 체계적 으로 이해하고 확립하기 위해서는 먼저 철학 전반에 대한 수용과 해석이 전제되 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후(戰後) 한국 사회는 서양 철학의 사조들이 체계 적으로 수용되기는커녕, 주요 고전 작품들조차도 제대로 번역되지 않은 상황이었 다. 이렇게 척박한 현실 속에서 이경은 주요 서양철학자들의 사유를 직접 연구하 고 소개하는 동시에, 그들의 사유 속에 펼쳐진 미학과 예술이론을 재해석하고 평 가하면서 우리의 시각과 언어로 체계 지우고자 하였다. 그것은 마치 건축가가 이 미 주어진 자재(資財)들을 가지고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직접 나무와 돌을 다듬 어 재료들을 마련하는 동시에, 그것들을 이용하여 집을 지어야 하는 상황과 같다 고 할 수 있다. 이경은 이 지난한 작업을 묵묵히 수행하였고, 그의 거인적인 노력 덕분에 우리는 전후 불과 20년 만에 한국인의 손으로 쓰이고 한국인의 해석과 관 점이 담긴 예술철학(경문사, 1973)을 얻게 되었다.1)

이 글은 이경의 대표작인 예술철학을 중심으로 그의 예술론과 미학 사상 의 형성에 영향을 준 철학적 요소들을 살펴보는 하나의 ‘소박한 탐문’이고자 한다.

글이 ‘소박(素朴)’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경이 여러 철학들을 섭렵해가며 넓힌 사유의 폭을 필자의 역량으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흔히들 이경이 고대 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전문가라고들 말하지만, 실제로 이경이 보여준 철학적 관심은 칸트와 셸링, 헤겔과 같은 근대 철학자들의 작품들에서부 터 딜타이와 크로체, 하이데거와 루카치 같은 20세기를 대표하는 몇몇 거장들의 사유에 이르기까지 넓고도 다양하다. 더욱이 이경은 이들의 사유를 그저 개관하 고 마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작품들 한편 한편에 깊이 천착하며 매우 수준 높은 분석과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따라서 지면의 한계와, 무엇보다도 필자의 제한된 능력을 고려할 때, 이것들을 모두 다루는 것은 무모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아울러 이 글은 완결된 연구라기보다는 하나의 ‘탐문(探問)’ 수준에 머물러 야 할 것 같다. 이경의 예술철학이 형성되는데 어느 철학자의 무슨 이론이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쳤는지를 정확하게 규명하기란 쉽지 않다. 이경은 여러 철학자 1) 이 글에서 주로 인용하게 될 예술철학은 이경의 서거 1년 후에 한국미학예술학회에서

수정, 증보를 통해 재출간한 개정판이다. 조요한, 예술철학, 서울: 미술문화,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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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의 작품을 꼼꼼하고 정확하게 읽어나갔지만, 그렇다고 결코 그들의 생각을 무 비판적으로 답습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일정 정도 거리를 유지하는 속에서 독 창적인 해석과 수용을 모색했다. 따라서 이경은 이 사상과 저 사상을 사심 없이 대조, 비교하는가 하면, 하나의 이론을 놓고서도 특정 측면은 적극적으로 평가하 되 다른 측면은 과감하게 비판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렇듯 치열한 비교와 분석, 평가와 비판을 수행하는 가운데 어느 한 순간에 일어났을 지적인 화학반응 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이경이 던지고 숙고했을 물음을 함께 따라가며 음미하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 이 경이 펼친 사유의 자취를 따라 탐문해보려는 철학자는 바로 마르틴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 1889-1976)이다.

Ⅱ. 하이데거와 이경의 문제의식: 근원에 대한 물음

하이데거는 이경이 붙잡고 씨름했던 여러 철학자들 가운데, 서양 고대 철학 자들을 제외하고는, 가장 자주 언급된 현대 철학자이다. 이경은 예술철학의 곳 곳에서 하이데거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2) 다른 어떤 철학자들보다도 하이데거 의 작품들을 가장 많이 인용할 뿐만 아니라,3) 아예 예술철학의 한 장(章) 전체 2) 개정판을 기준으로 주로 다음의 쪽들에서 하이데거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괄호 안은 언급 내용). p. 31(하이데거의 존재론적 미학), pp. 58-61(예술가의 사명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 명), pp. 97-98(작품 해석의 문제), pp. 271-272(현존재와 삶의 평균적 일상성), p. 277(기술 시대에 있어서 예술의 존재론적 기능), pp. 281-300(하이데거 연구에 할애된 장), p. 328(하 이데거의 일상성 개념에 대한 루카치의 비판), p. 390(시의 초월적, 혹은 종교적 성격), p.

393(신과 인간의 매개자로서의 시인).

3) 이경이 예술철학에서 인용, 분석하고 있는 하이데거의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1942); 횔덜린과 시의 본질(Hölderlin und das Wesen der Dichtung) , 횔덜린 시의 해명(Erläuterungen zu Hölderlins Dichtung)(1951); 예술작 품의 근원(Die Ursprung des Kunstwerkes) , 무엇을 위한 시인인가(Wozu Dichter)? ,

숲길(Holzwege)(1950); 사유란 무엇을 말하는가(Was heißt Denken)? , 로고스(Logos) ,

강연 및 논문집(Vorträger und Aufsätze)(1954);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Was ist Metaphysik)? , 진리의 본질에 관하여(Vom Wesen der Wahrheit) , 휴머니즘에 관한 서 한(Briefe über den Humanismus) , 이정표(Wegmarken)(1967); 언어에의 길 (Unterwege zur Sprache)(1959); 형이상학 서설(Einführung in die Metaphysik)(1954).

작품들은 하이데거 전집(Heidegger Gesamtausgabe)(Vittorio Klostermann, 1975–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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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하이데거 연구에 할애하고 있다.4) 이는 하이데거에 관한 이경의 관심이 그만 큼 컸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경이 하이데거에게서 주목한 것은 무엇이었을 까? 이경은 예술철학의 머리말에서 자신의 연구 방법을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 이 말하고 있다.

본 예술철학의 방법론은 선험철학적인 위로부터의 방법도 아니고 심리주의 적인 아래로부터의 방법도 아닌, 미적 체험에 따르면서도 의식내용의 본질 직관을 시도하는 현상학적 방법을 취했다. 예술현상의 사실성에서 출발하되 심리주의 미학의 한계를 깨닫고 사실성의 근원을 묻고 나아가는 길을 택했 다(예술철학, pp. 6-7).

이경은 미와 예술에 대한 철학적 탐구의 길로서, 위로부터의 방법과 아래로 부터의 방법, 그리고 현상학적 방법이라는 세 가지 길을 소개한 뒤에, 앞의 두 방 법이 아닌 세 번째 방법을 취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앞의 두 방법은 미의 본성과 위치에 대한 대립적인 관점에 기반 하는 것으로서, 이경은 이 구분이 19세기 독 일의 실험 심리학자였던 구스타프 페흐너의 분류 방식을 따른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5) 위로부터의(von oben) 방법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미를 어떤 초월적인 실 체 내지는 이념, 또는 보편 판단이나 개념의 대상으로 본다. 그러한 본성이 작가 의 작품 속에 구현되거나 모방될 때, 사람들은 작품의 예술성과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위로부터의 방법은 세계에 내재해 있거나 혹은 자연 초월적인 아름다움의 본성을 먼저 탐구하고, 그에 기반하여 개별적인 작품 속에 구현된 아름다움의 본성을 살펴보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셈이다. 아름다움을 감각을 초월한 형상의 수준에서 바라본 플라톤이나 이념의 자기 전개과정의 한 단계로 이해했던 헤겔의 사유가 이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아래 재)의 편집 순서에 따라 나열하였다. 괄호 안에 표기된 연도는 작품의 원래 출판년도가 아 니라 이경이 사용한 책의 출판년도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하이데거의 주요 작품들이 한 글로 번역된 덕분에, 우리는 이경의 하이데거에 대한 이해와 해석을 한결 수월하게 따라 갈 수 있었다.

4) 조요한, 하이데거와 예술작품의 본질 , 예술철학, 제14장, pp. 281-300. 원래 이 글은 이 경이 1971년 한국미학회에서 간행한 미학지 창간호에 기고했던 논문이다(조요한, 하이 덱거와 藝術作品의 본질 , 미학 vol. 1(1971), pp. 28-44).

5) 예술철학, p.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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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부터의(von unten) 방법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인간의 의식 과정에 서 발생하는 심리적인 현상으로 이해한다. 이 경우 미는 개인의 경험에 즉한 것 으로서 체험자의 주관적인 심리상태로 환원될 수 있다. 또한 이 방법에 따를 경 우, 아름다움에 관한 연구는 개인의 미적 체험들에서 출발하는 경험적이고 귀납 적인 경향을 띠게 될 것이다.6)

그런데 이경이 이 두 길을 모두 거부했다는 것은 아름다움을 초월적이거나 객관적인 실체로 보거나 개인의 주관적인 심리상태로 보는 것 모두와 일정하게 거리를 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대신 이경이 내세운 대안은 예술작품의 사실 성을 인정하고 이로부터 출발하되, ―여기까지는 예술작품에 대한 개인의 미적 경험에서 출발하는 아래로부터의 방법과 유사해 보인다― 개인의 주관에 머물고 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실성 자체의 근원을 캐물어간다는 것이다. 이경은 이 것을 훗설의 본질 직관에 바탕을 둔 현상학적인 방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 다. 그런데 미적 체험의 근거를 물어간다는 점에서 이경의 관심은 훗설보다는 오 히려 하이데거가 추구했던 존재 근거에 대한 물음을 연상시킨다. 실제로 이경은 19세기와 20세기의 미학 연구 방법을 소개하는 대목에서 훗설의 현상학적 미학의 특징을 소개한 뒤에, 바로 이어 하이데거를 언급하면서 그의 사유를 존재론적 미 학이라 부르고 있다. 이에 따르면, 존재론적 미학은 “미적 현상을 단순히 향수라 는 면에서 취하지 않고, 존재자의 근거를 은폐된 상태로부터 비-은폐성으로 끌어 내어 존재의 건립을 시도”하는 데 있다.7) 이 대목은 이경이 하이데거에게 주목하 는 이유가 바로 ‘근거(Ursprung)’ 물음에 있다고 생각할 여지를 제공한다.

하이데거가 존재자의 존재 근거를 구하듯이, 이경은 미의 근원에 대한 물음 을 던진다. 하이데거와 이경 모두에게 있어서, 근거 물음을 던지는 사람은 대상과 동떨어진 객관적 관찰자가 아니다(그런 점에서 이경은 위로부터의 미학을 거부한 다). 오히려 실존의 불안과 미적 체험을 온 몸으로 경험한 사람이다. 그렇다고 해 서 그는 체험을 개인의 주관적 차원에 가두지도 않는다(그런 점에서 이경은 아래 로부터의 미학과도 거리를 취한다). 오히려 예술의 향유자는 미적 체험을 매개로 하여 다시 미적 대상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다. 가장 생생한 미적 체험의 사실 성을 받아들이면서 다시 그 사실성의 근원을 묻는다는 점에서, 이경은 가장 생생

6) ibid., p. 30.

7) ibid., p.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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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게 실존의 불안을 느끼는 현존재가 자신을 근거 짓는 존재의 소리를 듣고자 몸 을 돌린다고 말하는 하이데거와 동일한 문제의식을 공유한다고 말할 수 있다.

Ⅲ. 예술작품이 보여주는 것

이경이 예술에 대한 탐구를 예술 현상의 사실성에서 시작한다고 말했다면, 무엇보다도 그 출발점은 예술작품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될 것이다. 이는 하이데 거가 예술작품의 근원 에서 예술과 예술작품 간의 상호성이라는 순환논리를 넘 어서고,8) 실제 예술의 본질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먼저 현실 속의 작품을 찾아가 서 작품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9) 그렇다면 우선 우리는 예술작품이 무엇이고, 그것은 무엇을 통해 작 품 아닌 것들과 구별되는지를 먼저 밝혀야 할 것이다. 즉 예술작품은 어떤 면에 서 일상의 물건들과 구별될까? 이경은 하이데거의 이러한 문제의식을 좇아 다음 과 같은 식으로 양자를 비교한다.

예술 ‘작품’은 우리 앞에 돌이나 나무, 그림이 그려진 캔버스, 또는 표시된 종이로서 놓여있는 것같이 여겨진다. 그러나 이런 것은 예술작품이라기보다 는 물리적 대상으로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예술’ 작품이라는 점에 주의 를 돌리지 않으면, 하이데거의 말대로 벽에 그림이 걸려있다는 것과 엽총이 나 모자가 걸려있다는 것은 같은 의미이다(예술철학, p. 97. 따옴표는 이 경의 것).

차이점을 거론하기에 앞서 먼저 닮은 점을 이야기하자. 예술작품이나 기술 자가 제작한 상품 모두 일차적으로는 물리적인 대상들, 즉 사물들이다. 돌과 나무

8) 예술이 예술가와 예술작품을 규정짓는 근원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예술은 작품 속에서만 드러난다. 따라서 예술을 이해하려면 먼저 작품에서 그 해명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하 지만 그것이 작품인지를 알려면 먼저 예술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즉 서로가 서로를 제약하고 서로의 근거가 되는 이 관계는 끝없이 순환된다. 하이데거, 예술작품의 근원 ,

숲길, pp. 1-2.

9) 하이데거, 예술작품의 근원 , 숲길, p. 2; 조요한, 예술철학, p. 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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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의 재료로 이루어져있으며, 색이나 소리 등과 같은 일정한 성질을 담고 있다.

또한 이것들 각각은 제작자(예술가 또는 장인)의 가공을 거친다는 점에서도 공통 적이다. 따라서 벽에는 화가의 그림이 붙을 수도 있지만, 장인이 만든 모자가 걸 릴 수도 있다. 오늘날 ‘예술’을 뜻하는 단어인 ‘art’가 ‘기술’을 의미하는 라틴어

‘ars’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만 보아도 예술(작품)과 기술(의 산물)이 같은 뿌리를 공유하고 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요컨대 모든 작품들은 사물적 특징을 갖 는다고 할 수 있다.10) 그렇다면 이 둘은 어떻게 구별될까? 하이데거에 따르면 그 차이는 제작된 것 안에 들어있는 것이 무엇을 나타내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즉 일반적인 물건은 재료를 통해 그 물건의 일차적 의미(즉 해당 물건의 기능)을 그 대로 드러낼 뿐이지만, 예술 작품은 재료 안에 들어있는 것이 작품이 지칭하는 것 이상의 무엇을 이야기해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가죽구두는 가죽이라는 재료 안에 일정한 형태가 내재함으로써

‘이것은 보행을 위한 도구’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구두 가게의 유리창에 붙어있는 상품 포스터 역시 마찬가지이다. 종이와 잉크라는 재 료 안에 일정한 형태가 더해져서 ‘이것은 보행을 위한 ‘훌륭한’ 도구’임을 강조한 다. 그리고 그게 전부이다. 그러나 화가가 그린 구두는 이야기가 다르다. 화폭에 물감을 통해 그려진 그것은 ‘보행을 위한 도구’라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을 이 야기해준다. 지칭하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을 이야기한다(allo agoreuein)”는 점에서 예술작품은 하나의 ‘비유(allegory)’가 되며,11) 일차적인 의미 이외에 다른 의미가 “함께 튀어나온다(sym + ballein)”는 점에서 ‘상징성(symbol)’을 갖게 된 다.12) 즉 예술작품은 그것이 지칭하는 일차적인 의미에 더하여 일정한 비유와 상 징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기술자의 노동을 통해 구현된 물건들과 구별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그 ‘다른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것이 해명된다면, 우리는 예술작품의 근원에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물음에 대하여 하이데 거는 입증이나 설명 대신 구체적인 작품에 대한 해석을 통한 보여주기를 택한다.

10) 하이데거, 예술작품의 근원 , 숲길, p. 9.

11) 고전 그리스어 ‘allo agoreuein’은 “다른 것을(혹은 다른 식으로) 이야기하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agoreuein’은 민회나 법정에서 ‘연설’하고 ‘주장’한다는 뜻과 함께, 시장통에서 물건 을 ‘선전’하거나 가격을 ‘흥정’한다는 뜻을 지닌다.

12) ‘상징(symbol)’의 어원이 되는 ‘symballein’은 전치사 ‘sym(함께)’과 동사 ‘ballein(창이나 돌 등을 던지다)’으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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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유명한 그 사례는 바로 반 고흐의 <농부의 구두>에 대한 해석이다.

먼저 하이데거는 실제 구두의 재료와 형태, 그리고 일상의 용도에 관해 이 야기한다. 구두는 가죽으로 된 바닥과 깔창, 발등과 볼을 감싸는 부분들이 있고, 이것들은 실과 바늘에 의해 꿰매어져 있으며,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일상의 도구 로서 자신의 용도에 걸 맞는 모양을 하고 있다. 구두가 담고 있는 일차적인 의미 를 따진다면, 그림 속의 구두는 그 구체성 면에서 실제 구두를 따라갈 수 없다고 하이데거는 단언한다. 그러나 예술작품으로서 그림 속의 구두는 현실의 구두가 이야기할 수 없는 다른 것을 말해준다. 반 고흐의 작품에 대한 하이데거의 ‘묘사’

를 좀 더 따라가 보자.

너무 오래 신어 가죽이 늘어난 신발이라는 이 도구의 안쪽 어두운 틈새로 부터 밭일을 나선 고단함이 엿보인다. 신발이라는 이 도구의 수수하고 질긴 무게 속에는 거친 바람이 부는 드넓게 펼쳐진 평탄한 밭고랑 사이로 천천 히 걸어가는 강인함이 배어 있고, 신발가죽 위에는 기름진 땅의 습기와 풍 요로움이 깃들어 있으며, 신발 바닥으로는 저물어가는 들길의 고독함이 밀 려온다. 신발이라는 이 도구 가운데에는 대지의 말없는 부름이 외쳐오는 듯 하고, 잘 익은 곡식을 조용히 선사해주는 대지의 베풂이 느껴지기도 하며, 또 겨울 들녘의 쓸쓸한 휴경지에 감도는 해명할 수 없는 대지의 거절이 느 껴지기도 한다. 더 나아가 이 도구에서는 빵을 확보하기 위한 불평 없는 근 심과 고난을 이겨낸 후에 오는 말 없는 기쁨과 출산이 임박해 겪어야 했던 아픔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 떨리는 전율이 느껴진다. 이 도구는 대지에 속 해 있으며, 농촌 아낙의 세계 속에 포근히 감싸인 채 존재한다. 이렇듯 포 근히 감싸인 채 귀속함으로써 그 결과 도구 자체는 자기 안에 머물게 된 다.13)

하이데거가 보기에 <농부의 구두>라는 작품이 이야기해주는 다른 것들이란 바로 작품 속 구두를 신었을 농부 혹은 농촌 아낙의 삶과 그들을 둘러싼 환경이 다. 그림 속의 구두는 일을 나가는 농부의 발걸음에 묻어나는 고단함(Mühsal)과 강인함(Zähigkeit)을 이야기해준다. 또한 농부가 시간을 보냈을 대지의 습기 (Feuchte)와 풍요로움(Satte), 그리고 들길의 고독(Einsamkeit)을 알려준다. 이 뿐 13) ibid., pp. 22-23(번역은 신상희 역을 일부 수정하여 인용함).

(9)

만 아니다. 구두는 그것이 딛고 서있었을 법한 대지의 부름(Zuruf)과 베풂 (Verschenken)은 물론,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냉정한 거절(Sichversagen)에 대 해서도 이야기해준다. 구두는 또 그 주인이 겪었을 법한 근심(Bange)과 환희 (Freude), 탄생의 떨림(Beben), 그리고 죽음 앞에서의 전율(Zittern)에 대한 느낌도 전해준다. 화가는 그 구두가 누구의 것이고, 무엇을 위해, 어디서 구입했는지에 대 해서는 알려주지 않는다. 사실 그것은 화가의 관심이 아니다. 반면에 그림 속 구 두는 그것의 주인이었을 사람이 속한 세계(Welt)를 알려준다. 바로 이것들이야말 로 현실의 구두나 구두 포스터가 드러내지 못하는 것들이다. 더 나아가 이 그림 은 구두라는 도구가 참으로 무엇인가(was das Zeug … in Wahrheit ist) 하는 것, 즉 그 존재를 드러낸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14) 이경은 하이데거가 언급한 도구 의 참된 존재라는 대목에 주목한다. 도구는 일정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도록 제작 된 것이다. 즉 도구의 생명은 사용에 있다. 그런데 화가는 낡고 닳아서 쓸모없게 된 구두를 그리면서 오히려 구두의 참된 본질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게 이경은 작품을 통해 존재의 모습을 감추는 일 없이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작가의 사명이 라는 하이데거의 생각에 동의한다.15)

그렇다면 그림 속의 구두가 보여주는 세계, 작품 속 구두의 주인이 속한 그 세계는 무엇일까? 예술작품이 열어 보이는 세계는 지리학적인 세계도, 관찰과 인 식의 대상이 되는 세계도 아니다. 그것은 존재자가 자신의 존재를 근거 짓는 일 종의 터와 같은 것이다. 자신의 존재가 기반 하는 동시에 실존적 불안과 결단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모든 사람은 다 자신의 세계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런 점에서 볼 때, 세계는 결코 존재자와 동떨어진 대상도 아니요, 그렇다고 존 재자의 주관적 경험으로 환원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존재자는 자신을 둘러싼 일상과 자신의 유래가 감추어진 존재의 근거를 찾으려는 결단 사이에서 갈등하고 투쟁한다. 이러한 투쟁이 예술작품을 통해 드러난다. 하이데거는 이를 “도구가 대 지(Erde)에 속해 있으며 농촌 아낙의 세계(Welt) 속에 포근히 감싸인 채 존재한 다”는 말로 대신한다. 이경은 이 말을 다음과 같이 풀어 설명한다. “하나의 세계 를 세우는 일에 있어서 예술작품은 대지를 사용한다. 지상의 자료들인 돌, 목재, 색깔, 언어, 음조를 사용한다. 도구를 만드는 경우 그것은 사용성에 목적이 있지 14) ibid., p. 25.

15) 조요한, 예술철학, pp. 6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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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예술작품은 이와 달리 자료로서 하나의 세계를 세워야 한다.”16) 대지는 작품 (또는 도구)의 재료가 속한 곳이다. 대지의 재료들이 모여 사용 목적에 맞는 도구 가 만들어진다. 예술작품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대지의 재료들로부터 작 품이 만들어지지만, 이 작품은 다시 대지를 넘어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이데거 말마따나 ‘세계는 대지 위에서 평안을 누리고자 대지보다 높이 오르려’ 한다.17) 그러나 재료들의 원천인 대지는 이러한 세계의 구축에 저항한다.

대지는 둘러싸는 것으로서 세계를 자기 속에 집어넣고 보존하려 든다. 이렇듯 드 러내려 하는 세계와 감추려 하는 대지의 투쟁이 이루어지는 장이 바로 예술작품 이다. 이 투쟁을 거쳐 예술작품은 존재를 열어젖힌다. 그것은 감추어진 존재가 드 러나는 것이며, 하이데거는 이를 ‘진리가 스스로 작품 속에서 정립되는 것(das Sich-ins-Werk-Setzen der Wahrheit)’이라고 말한다.18) 이제 예술은 존재의 진리 에 관여하게 된다. 이경은 철학자가 논증을 통해 ‘밝혀내지’ 못하는 것을 예술가가 작품을 통해 ‘드러낸다’고 보는 하이데거의 주장에 강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처 럼 보인다.19)

Ⅳ. 진리의 은폐성과 비-은폐성

과연 예술이 진리를 담아낼 수 있을까? 사실 예술이 참과 거짓의 문제를 다 루지는 않는다. 그것은 과학의 영역이다. 과학의 담론은 명제들로 이루어진다. 그 리고 명제란 참, 거짓을 판별할 수 있는 문장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예술의 담론 은 ―그것이 시든, 그림이든, 혹은 음악이든 간에― 참, 거짓을 밝히는 것과는 무 관해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술이 진리와 완전히 절연(絶緣)되어 있다고 볼 수만은 없다. 이경이 하이데거에 주목하는 이유는 예술이 과학과는 다른 방식 으로 진리에 관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초기 작품에 해당되는 존재와 시간에서 현존재의 본질 구조가

16) ibid., p. 289.

17) 하이데거, 예술작품의 근원 , 숲길, p. 37.

18) ibid., p. 28.

19) 조요한, 예술철학, p.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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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에 있고, 실존은 자기 현전을 위해 요구되지만, 정작 인간은 존재자들 곁에 머물게 됨으로써 퇴락이 발생하며, 세계 안에 내던져진 현존재가 이러한 존재자 들과의 일상적 교류에 탐닉하는 속에서, 존재가 은폐되는 계기가 마련된다고 지 적한 바 있다.20) 이렇듯 전기의 하이데거가 존재의 은폐성에 주목하고 그 원인의 규명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후기의 하이데거는 존재의 드러남을 설명하는데 적극 적인 관심을 보인다. 후기의 하이데거에 따르면, 존재는 ‘밝히면서 감추는 것 (Lichtendes Bergen)’21)을 자신의 근본 구조로 삼으며, 이는 진리의 경우에도 마 찬가지이다.22) 그렇다면 진리에는 본질적으로 밝히는 것과 나타나는 것이 있는가 하면, 감싸는 것과 은폐하는 것이 공존한다. 하이데거는 진리가 작품 속으로 방향 을 돌릴 때, “진리는 밝히는 것과 감추는 것 사이의 투쟁으로 세계와 대지의 대치 성 속에 있다”고 말한다.23) 여기서 다시 우리는 세계와 대지 간의 투쟁이 일어나 는 장으로서의 예술작품을 만나게 된다.

진리에는 자신을 드러내려는 본성(비-은폐성)과 감추려는 본성(은폐성)이 공 존한다는 생각은 등잔불이 환하면 환할수록, 그 아래편의 음영(陰影) 또한 더욱 짙어진다는 비유를 통해서 한결 더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이경은 하이데거가 시 인 횔덜린을 좇아 ‘시의 본질은 진리의 정립(Das Wesen der Dichtung ist Stiftung der Wahrheit)’이라고 말한 것에 주목한다.24) 진리의 정립으로서 예술은 존재 안에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을 주고, 그 기초를 세우고, 새롭고 본질 적인 세계를 출현시킨다. 우리가 예술을 통해 접하는 아름다움이란 작품으로부터 받는 어떤 감흥이나 느낌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작품에 내재한 어떤 균제나 조 화도 아니다. 그것은 세계의 열림과 대지의 닫힘, 은폐성과 비-은폐성, 존재와 존 재자의 투쟁 가운데 존재의 진리로서 드러나는 것이다.25) 또한 그런 의미에서 이 제 진리는 하나의 사건이 되고, 아름다움은 진리가 존재하는 방식이 된다.26)

진리가 은폐성과 비-은폐성이라는 이중성을 띠며, 예술작품이 두 본성 간의

20)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p. 175.

21) 하이데거, 존재의 본질에 관하여, p. 26.

22) 조요한, 예술철학, p. 291.

23) 하이데거, 예술작품의 근원 , 숲길, p. 51.

24) ibid., p. 62.

25) 조요한, 예술철학, p. 294.

26) 하이데거, 예술작품의 기원 , 숲길, p.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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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의 장이자 존재가 드러나는 공간이라는 (하이데거의) 주장과 (이경의) 해석은 확실히 설득력 있는 입장이며, 어떤 면에서는 매력적이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우 리는 하이데거에게 ―또 이경에게― 다음과 같이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진리 의 은폐성과 비-은폐성이 굳이 예술작품을 통해서만 해명될 일일까? 원래 진리는 은폐성과 비-은폐성을 상반된 성질로서 자기 안에 갖고 있는 것 아닌가? 무엇보 다도 진리의 이러한 본성은 예술뿐만 아니라 과학에서도 다뤄왔던 문제 아닌가?

우리는 이와 비슷한 생각을 2,500년 전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다음 과 같은 단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자연은 숨기를 좋아한다(

hē physis kryptesthai philei

).” (DK B123)

여기서 ‘자연’으로 옮긴 그리스어 ‘physis’는 사물의 ‘본성’ 또는 ‘본질’을 뜻하 기도 한다. 본성이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는 일은 없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의 눈 을 미혹시키고 우리의 시선 너머로 숨는다. 사실 과학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사물이 본성이 한 눈에 그대로 다 드러난다면, 그래서 우리가 단박에 그 모든 것들을 알 수 있다면, 굳이 과학이나 철학은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 고 해서 본성이 우리의 눈을 피해 영영 달아나버리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도무 지 본성을 밝힐 수 없다면, 애초에 과학은 불가능할 것이며, 인간은 극단적 회의 론이나 불가지론에 빠져버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통 철학의 관점에서도 자연은 우리에게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전통 철학은 우리의 눈에 드러나는 것을 ‘현상 (phainomena)’이라고 부른다. 현상은 천변만화해서 사람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지 만, 사람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현상 너머에 변하지 않는 어떤 실재(ousia)가 있 음을 전제하고 그 정체를 파악하고자 노력해왔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하이데거가 말하는 진리의 은폐성과 비-은폐성은 전통 철학자들이 추구해온 현상 너머의 본 질과 어떤 점에서, 어떻게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하이데거가 말하는 진리의 은폐성과 비-은폐성의 참된 의미는 세계를 바라 보는 관찰자의 처지와 조건을 고려할 때에만 비로소 온전하게 이해될 수 있을 것 이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과학자’ 또는 ‘철학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관 찰하는 세계를 철저하게 대상화시켜 바라본다. 어떤 종류의 탐구를 수행하든 간 에, 그것이 객관적이고 사심 없는 탐구가 되기 위해서, 관찰자는 관찰 대상과 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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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져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심지어 세계를 전체로 탐구하는 철학의 경우 에도, 철학자는 마치 자신이 세계 밖에 위치한 것과 같은 태도와 관점을 취한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관점을 따르자면, 탐구 주체와 대상의 분리라든가, 객관성의 확립이라는 전통 철학의 이념은 하나의 신화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세계-내-존재로서 이미 세계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우리 개개인은 세 계의 처음과 끝을 알지 못한 채 세계의 어느 한 과정 속에 던져진 자들이다. 그 래서 하이데거는 초기에 존재와 시간에서 현존재에게 필요한 것이 ‘죽음을 향 한 본래적 존재의 실존론적 구성이요, 죽음을 향해 자신을 던짐으로써 고유한 존 재를 가져오려는 선구적 결의’라고 주장한다.27) 하지만 이제 예술작품의 근원 에 이르러, 현존재의 결의는 주체가 결정하는 활동이 아니라, 인간이 존재자에 결박 당한 상태로부터 벗어나 ‘존재의 개방성’을 열어놓는 일로 바뀌게 된다.28) 이때 존재의 개방성이란 곧 진리의 비-은폐성이 드러나는 것에 다름 아니다.

Ⅴ.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매개자로서의 예술가

그렇다면 이렇게 존재를 드러내고 작품을 통해 진리의 비-은폐성을 구현하 는 예술가는 누구인가? 이경은 하이데거가 시인과 철학자를 비교하는 것에 주목 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철학자는 존재에 대해 ‘말하고(sagen)’ 시인은 성스러운 것을 ‘부른다(nennen).’29) ‘말하다’는 그리스어 동사 ‘레게인(legein)’에서 왔다. 이 말은 감추어지지 않은 것의 이면에 은폐된 것들을 것을 낱낱이 드러냄을 뜻한 다.30) “철학자가 존재에 대해 말한다”고 할 때, 그것은 철학자가 자신의 발언을 통해 ‘존재의 이야기되지 않은 말’을 언표한다는 뜻이 된다. 한편 ‘부른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것의 이름을 부른다는 뜻이 아니다. 반대로 시인이 알 수 없는 신들의 이름을 부르고 탄원할 때, 그 신들이 다가오는 것처럼, 이 명명을 통해 ‘비 로소 존재자는 자기 본성을 향해 지명됨’을 뜻한다.31) 시인이 성스러운 것을 부른 27)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pp. 260-261.

28) 하이데거, 숲길, p. 55.

29) 조요한, 예술철학, pp. 282-283.

30) 하이데거, 강연 및 논문들, p. 211.

31) 하이데거, 횔덜린 시의 해명, p.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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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표현은 아직 확립되지 않고 알 수 없는 것을 명명함으로써, 그것의 근원을 확고하게 구축하는, 이른바 언어에 의한 존재의 정립을 말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 런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철학자는 사유와 논증을 통해서 현상의 이면을 밝히고 그 안에 숨어있는 본 질에 대하여 말하기를 시도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철학자는 본질을 드러내는 데 실패하곤 한다. 그것은 세계-내-존재로서의 인간이 겪을 수밖에 없는 한계이 기도 하다. 사실, 세계 안에 던져지기로는 철학자나 시인이나 다를 바 없다. 하지 만 철학자와 달리, 시인은 확립되지 않은 미지의 것을 부르고, 또 그 부름을 통해 존재의 본질을 드러낸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예술가의 작품 활동을 통해 서이다. 이경은 하이데거가 시인 횔덜린의 싯구를 인용하는 데 주목하며, “시를 쓰는 일은 모든 업무 가운데 가장 무죄한 일이며, 근원으로의 접근을 준비하는 일”이라고 단언한다.32) 사실 시인(예술가)은 아는 자가 아니라 보는 자이다. 과학 이 언표를 통해 개별적인 것들에 대한 진리를 밝히려 하고, 철학이 존재자들의 근거를 밝히(려 애쓰지만 대부분의 경우 실패하)는 것과 달리, 시인은 시의 언어 를 통해 사물의 본성을 드러내고 보여줄 뿐이다. 아니 어떻게 보면, 존재가 시를 통해서 스스로를 드러내도록 한다고도 볼 수 있다. 달리 말하면, 하이데거에 있어 서 철학적 사고는 ‘인간 구원’을 위한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이데거는 “존재가 근본에서, 또 가능한 본질의 전체 넓이에서 새 롭게 경험되어야 한다”33)는 입장에 따라서 철학으로부터 시작(詩作)으로 방향을 돌렸던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점은 하이데거와 대척점에 서있다고 말할 수 있는 플 라톤 역시 시인에 대해서는 하이데거와 비슷한 주장을 폈다는 점이다. 플라톤은 자신의 대화편들 안에서 시인들이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보여주지만, 그들은 그 것들의 본성이 무엇이고 그것들이 왜 아름다운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면 시인은 무슨 수로 아름다운 것들을 이야기하는가? 그것은 신적 인 영감에 의해서이다. 즉 시인은 일종의 영매(靈媒)라는 것이다.

32) 조요한, 예술철학, p. 285.

33) 하이데거, 횔덜린 시의 해명, p.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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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 (…) 그러니까 자네가 호메로스에 관해서 훌륭하게 노래하는 이유 말인데, 그것은 자네를 움직이는 것이 기술이 아니라 신적인 힘이라서 그런 것이네. 그건 이를테면 에우리피데스가 ‘마그네티스’라 불렀고 대중들은 ‘헤라클레스의 돌’이라고 불렀던 자석에 깃든 힘과 같은 거야. 사실 자석은 그 자체로 쇠로 된 반지들을 당길 뿐 아니라 그 반지들에게 힘을 부여해주기도 한단 말일세. (…) 그래서 종종 쇠 반지들로 이어진 아주 긴 고리가 서로 들러붙곤 하는 것이지. 하지만 그 힘은 바로 저 자석에서 비롯되어 이 모든 것들에 걸려있는 거란 말이지.

그렇게 무사(Mousa) 여신도, 그녀 자신이 영매들을 만들어내는 것이고, 이 영매들을 통해 영감을 받은 다른 사람들의 고리가 들러붙게 된다 이 말이네. 사실 모든 서사시인들, 특히 훌륭한 시인들은 기술에 의해서가 아니라, 영감을 받은 자들로서 사로잡힌 상태가 됨으로써 온갖 아름다운 시들을 노래하는 것이지. (…) 그 많은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기술을 통해서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오로지 신적인 몫을 통해서 각자가 아름답게 지을 수 있는 것이라네. 즉 그것에 대하여 무사 여신이 저마다를 강제하기에, 어떤 이는 디튀람보스시를, 어떤 이는 송시(頌詩)를, 어떤 이는 무가(舞歌)를, 어떤 이는 서사시를, 그리고 또 어떤 이는 이암보스시를 지을 수 있는 것이지. 하지만 다른 분야에 관해 그들 각각은 보잘 것 없다네. 왜냐하면 그들은 기술이 아니라, 신적인 능력을 통해 그것들을 이야기하기 때문이야. 사실, 단 하나에 관해서라도 기술을 통해 잘 이야기할 줄 안다면, 그렇다면 다른 모든 것들에 관해서도 그럴 수 있어야 하겠지. (…) 내 말이 맞는 것 같지 않나, 이온?

이온 : 네, 제우스께 맹세코, 나로서도 그리 생각해요. 뭐, 어떻게든 당신이 그 말을 통해 내 영혼을 건드린 것 같으니까요, 소크라테스. 그리고 내 생각에도 좋은 시인들이 신적인 몫의 배분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것들을 전달해주는 것 같아요. (플라톤, 이온 533d-535a)

시인은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탁월한 방식으로 노래한다. 그러나 플라톤에 의하면 그것은 시인 자신의 기술 때문이 아니라, 신에게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시를 짓는 동안 시인의 영혼은 신에 의해 점유 당한다. 그리고 이것은 대화 속의 이온과 같이 시인의 작품을 노래하는 가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가수가 시를 노래하는 동안 그의 영혼 안에는 신이 자리 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를 자석이 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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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를 끌어당기고, 당겨진 반지가 다시 자력을 받아 다른 반지를 끌어당기는 것 과 같다고 설명한다. 신의 영감을 통해 시를 짓기에 시인들은 누구보다도 아름다 운 작품을 지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힘과 기술로 짓는 것이 아니다.

철저하게 신에 의해 강제당하는 것이요, 시인은 그저 몸만 빌려준다는 것이다. 소 크라테스는 신적인 영감과 기술의 차이를 능력의 적용 가능성에서 찾는다. 만일 시를 짓는 것이 기술에 의한 것이라면, 시인은 시와 관련해서, 서사시든, 서정시 든, 다른 어떤 장르의 시든 간에, 그 기술을 무차별적으로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마치 건축 기술자가 집에 관해서라면, 그것이 성이든, 토담집이든, 수상가옥 이든 간에 가리지 않고 지을 수 있어야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서사시인은 오직 서사시만을 아름답게 지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 순간에는 시인의 영혼 속에 서사 시를 주관하는 무사 여신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요컨대 시작(詩作)은 기술이 아니 며, 시인은 신적 영감에 사로잡혀 탈아의 상태로 시를 짓는다는 것이다.

사실 시인에 대하여 플라톤의 이러한 묘사는 다분히 적대적이고 경멸적이기 까지 하다. 한마디로 시인들은 무지하고 정신 나간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 리는 이러한 비우호적인 태도가 향후 플라톤의 정치철학에서 시인들에 대한 통제 와 추방으로 이어질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경은 이 작품을 거론하면 서 시인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보다는, 미적 경험과 종교적 경험이 어떤 공통적인 뿌리를 갖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시인들은 신적인 영감을 분배받음으로써 시 를 짓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신들의 통역이라 할 수 있으며, 시인의 시를 노래 하는 가수들은 통역의 통역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은 모두 일종의 신적 인 자(theios)인 셈이다.34) 그리고 이경은 시인의 이러한 특징을 다시 하이데거의 시인론에 연결시킨다. 하이데거는 시인이 저 언덕과 이 언덕, 하늘과 땅, 신들과 인간들 사이에 위치한 존재라고 말한다. 그 ‘사이에서’ 시인들은 인간의 위치를 측 정하고, 인간이 어디에 자리 잡아야 하는지를 신들의 눈치로 읽어낸다는 것이 다.35)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하이데거에 있어서도 시인들은 ‘아는 자’가 아니라 ‘보 는 자’이다. 그러나 이 말은 결코 경멸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오히려 하이데거는 과학과 철학의 언어가 부딪히는 한계를 시적인 언어가 넘어선다고 본다. 그리고 그것은 정의와 설명이 아니라 묘사와 드러냄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제 “인간은 34) 조요한, 예술철학, p. 393.

35) 하이데거, 횔덜린 시의 해명, p.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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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이고 또 자기 현존재를 어디에 정주시킬 것인가”를 찾아나서는 것은 철학자 나 과학자가 아니라 오롯이 시인의 몫이 되는 것이다.36)

Ⅵ. 결론을 대신하여

이경은 어떤 분야에 관하여 글을 쓰든 간에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을 직접적 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여러 다양한 이론이나 해석들을 독자가 알기 쉽게 소개하 고 그 핵심을 간명하게 보여주는 가운데 저자의 의견을 조심스럽게 덧붙일 뿐이 다. 그 방식이 너무나도 신중하고 또 겸손하여 자칫 독자들은 이경의 예술철학

이 저자의 독창적인 사상이나 관점보다는 서양의 이론들을 평이하게 소개하고 만 것이 아니냐는 인상을 받기도 한다. 더욱이 오늘날에는 하이데거의 예술론에 관 하여 적잖은 번역서와 연구서들이 나와 있다.37) 예를 들어 하이데거가 쓴 반 고 흐론의 경우, 국내에도 제법 많은 해설 및 관련 논쟁들이 소개되어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38) 그런 점을 고려한다면 이경의 하이데거 연구는 이제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서는 두 가지 점을 강조하고 싶다. 하나는 이경이 수행 한 하이데거 연구의 선구성이요, 다른 하나는 선구성에 뒤지지 않는 전문성과 이 론적 긴장감이다. 예술철학의 한 장(章)으로 수록되어 있는 하이데거와 예술작 품의 본질 은 1971년, 미학지 창간호에 수록된 글이다. 하이데거의 예술론을 둘 러싼 본격적인 해석과 논쟁들이 ―예컨대 반 고흐 해석에 관한 샤피로의 비판 (1968)과 데리다의 비판적 평가(1978)― 대략 1960년대 후반에 시작되었다는 사실 을 고려한다면, 그리고 당시 한국의 지식인 사회에 구축되어 있었던 서양 철학의 담론 수준을 생각한다면, 당시 이경이 펼쳤던 이론적 고민은 믿을 수 없을 정도 36) 조요한, 예술철학, p. 295.

37) 예컨대, F.W. 폰 헤르만, 하이데거의 예술철학, 이기상 옮김, 문예출판사, 1997; 한국하이 데거학회(편), 하이데거의 예술철학, 철학과 현실사, 2002; 김동규, 하이데거의 사이-예 술론, 그린비, 2009 등.

38) 예컨대,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휴머니스드, 2004)의 경우, 에세이 성격의 글임에도 불구 하고, 하이데거의 반 고흐 해석을 둘러싼 서구의 논쟁이 탁월하게 소개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좀 더 전문적인 논쟁사와 관련해서는, 이성훈, 반 고흐는 누구의 구두를 그린 것인 가? – 하이데거, 마이어 샤피로, 그리고 데리다 , 대동철학 (45), 2008, pp. 293-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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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선구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경이 수행한 연구의 가치는 그저 시간 에서 앞선다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이경은 결코 하이데거를 추종하듯이 받아 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시종일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하이데거의 예술론에 관한 여러 비판 가능성을 검토하는 신중한 태도를 취한다. 그래서 이경은 하이데 거가 주장하는 현존재의 일상성을 소개하면서, 이러한 주장이 인간의 삶을 빈약 하고 왜곡된 것으로 만든다는 루카치와 아도르노의 비판을 비중 있게 다룬다.39) 또한 하이데거의 예술론이 존재론 전체를 예술작품의 근원으로 환원시키는 오류 를 범할 수도 있다고 지적하는 한스 예거의 지적을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한다.40) 그런가 하면, 후기 하이데거의 진리 개념이 미학에 국한되다보니 정작 윤리나 현 실의 문제는 외면한다는 홉스테터의 비판에 대해서, 이경은 예술 생활을 윤리나 현실의 문제와 대립적으로 보는 것은 일종의 플라톤적인 오류를 범하는 셈이며, 하이데거의 체계에서는 미와 윤리를 굳이 대립적인 것으로 볼 필요가 없다고 주 장함으로써 하이데거를 옹호하기도 한다.41) 이로부터 우리는 이경이 한 철학자의 사유를 그저 소개하고 풀어내는 데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동시대의 문제들 과 견주고 답을 구함으로써 철학의 물음을 언제나 현재 진행형 속에서 바라보았 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이데거가 현존재로부터 그것의 근원이 되는 존재의 진리를 물어 나갔듯 이, 이경은 구체적인 예술작품으로부터 미의 근원에 대하여 물음을 던졌다. 즉 두 철학자 모두 미적 체험의 사실성으로부터 탐구를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 거나 이경 모두에게 있어서, 이러한 물음을 던지는 사람은 대상과 동떨어진 객관 적 관찰자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이들은 눈앞에 작품이 현전하고 그것을 체험 하며 감동을 얻는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적어도 이 사실이 분명하다면, 다음 단 계는 그 감동의 근거를 찾아나가는 일이 될 것이다. 이경이 하이데거의 예술론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면, 그것은 바로 개인의 예술적 체험에서 시작하여 그 근거를 찾아 들어가려는 태도 때문인 듯하다. 그것은 작품과 감상자를 분리시킨 채로, 작 품에 구현된 미의 본성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려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모든 미적 체험을 감상자의 심리상태로 환원하려는 태도도 아니다. 오히려 근거를 찾아 들

39) 조요한, 예술철학, pp. 272-273.

40) ibid., p. 295.

41) ibid., p. 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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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간다는 것은 감상자와 작품, 무엇보다도 작품 속에 구축된 공간의 상호 관계와 교호성(交互性)을 바탕으로, 그 안에서 조우하게 될 어떤 울림을 기다린다는 뜻으 로 이해해도 좋을 듯하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은 아름다움을 향유하고 즐기면서 도, 또 빼어난 예술 작품을 창작해내면서도, 정작 미적 감동과 예술적 창조성의 근거에 대한 고민이 척박했던 시절, 서양의 것을 받아들이되 우리의 관점과 언어 로 소화하고, 무엇보다도 우리 고유의 아름다움이 지닌 본성을 해명하기 위하여 이경이 펼쳤던 거대한 지적 고투(苦鬪)의 아주 작은 부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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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하이데거학회(편), 하이데거의 예술철학, 철학과 현실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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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초록

이경 조요한 선생은 한국 사회에서 서양의 철학과 예술 이론이 체계적으로 수용되기 이전인 1950년대와 60년대에, 선구적으로 미와 예술의 본질에 관한 이 론적 성찰을 시도하였고, 이를 통해 하나의 일관된 이론을 확립했던 철학자이다.

이경은 이를 위하여 서양의 주요 철학자들의 작품들을 직접 연구하고 소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미학과 예술이론을 무조건 답습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재해석하고 평가하면서 우리의 시각과 언어로 체계 지우고자 하였다.

이 글에서는 이경이 연구했던 여러 서양의 철학자들의 사유 가운데, 하이데 거의 예술론을 중심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고대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를 제 외한다면, 하이데거는 이경이 자신의 예술철학에서 가장 자주 언급했던 현대 철학자이다. 또한 이경은 아예 하이데거의 예술론을 다루는 글을 따로 쓰기도 했 다. 그러므로 이경이 하이데거 사상의 어떤 점에 주목하였고, 어떻게 이해하였는 지를 살펴보는 것은 이경 예술철학의 형성 과정을 이해하는 데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하이데거에 대한 이경의 관심은 예술에 대한 접근 과정을 공유하는 데서 나 타난다. 이경은 예술철학에서 자신의 탐구 방법이 예술 현상의 사실성을 인정 하고 사실성의 근원을 물어나가는 이른바 현상학적 방법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이데거가 예술과 예술작품 간의 상호성이라는 순환논리를 넘어서고 예 술의 본질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먼저 현실의 작품을 찾아가 작품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물어야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문제의식을 같이 한다.

이경은 하이데거가 장인의 상품이 사용가치만을 드러내는 것과 달리, 예술 가의 작품에는 비유와 상징이 나타나며, 이는 단순히 사물의 효용가치를 넘어, 작 품을 둘러싼 세계의 본성을 드러내는 데까지 이어진다고 주장하는 데 주목한다.

이는 과학자와 철학자가 논증으로 밝혀내지 못한 존재의 진리를 예술가는 작품을 통해 드러내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즉 예술작품은 그저 단순한 감흥의 대 상이라기보다는 세계의 열림과 닫힘 간의, 존재와 존재자 간의, 진리의 은폐성과 비-은폐성 간의 투쟁이 벌어지는 싸움터이며, 그 가운데 존재의 진리가 드러나는 장이라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현존재로부터 그것의 근원이 되는 존재의 진리를 물어갔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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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은 예술작품으로부터 미의 근원에 대해 물음을 던졌다. 그것은 바로 개인의 예술적 체험에서 시작하여 그 근거를 찾아가려는 태도이다. 그리고 이 태도는 감 상자와 작품을 분리시킨 채 작품에 내재된 미적 본성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려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미적 체험을 감상자의 심리상태로 환원하려는 태도도 아니 다. 오히려 개인적 감상에서 출발하여 감상자와 작품, 그리고 작품 속에 구축된 공간 사이의 교호성을 바탕으로 그 안에서 드러나게 될 어떤 진리를 기다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경이 하이데거를 읽는 속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핵심어

조요한, 하이데거, 예술작품, 존재, 세계, 진리, 드러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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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De la formation de la philosophie d’art chez ZOH Yohan (1926-2002) - de son interprétation sur Heidegger -

Iouseok Kim*1)

Zoh Yohan est le philosophe coréen qui a essayé d’interpréter les diverses pensées occidentales et d’en établir de façon cohérente une théorie de l’art dans les années soixante où ni les philsophies occientales ni les théories esthétiques ne sont introduite en Corée du Sud. Même si Zoh a introduit les pensées occientales, il n’était pas content de les suivre aveuglément. Tout au contraire, il a essayé de les critiquer et de les réinterpréter afin d’établir une théorie originale propre à la langue coréenne et à la mentalité coréenne.

Cette étude s’intéresse à l’influence de la théorie esthétique de Martin Heidegger sur la formation de la philosophie d’art de Zoh. Sauf Aristote, Heidegger est le philosophe le plus souvent cité dans Philosophie d’art, l’un des livres les plus importants de Zoh. De plus, son intérêt sur Heidegger était tellement fort qu’il a même écrit un article consacré à sa théorie esthétique.

Le point commun que partage Zoh avec Heidegger est, nous semble-t-il, une attitude approchant des œuvres d’art. Dans sa Philosophie d’art, Zoh a avoué que sa méthode d’approche consiste à admettre l’existence des oeuvres d’art et celle de l’expérience artistique. C’est à partir de cette expérience que l’on peut avancer vers le fondement de ce qu’il a joui. Zoh a définit ce processus d’étude comme “méthode phénoménologique.” En effet, c’est exactement la même attitude qu l’on trouve dans la pensée de Heidegger, car il

* Lecturer at Soongsil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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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firme aussi que, pour révéler la nature de l’art, il faut d’abord se demander ce que c’est les oeuvres d’art et la manière dont elles existent.

Comme Heidegger mène ses études à partir de Dasein jusqu’à la vérité de l’Etre, Zoh a pour le commencement les oeuvres particulières afin de révéler le fondement de l’art et la nature de la beauté. D’ailleurs, cette attitude n’appartient ni à la position objective ni à la position subjective, car elle ne permet pas de séparer le spectateur des oeuvres d’art, ni ne réduit non plus l’exérience aux états mentaux du spectateurs. Au contraire, le processus de l’expérience artistique à la révélation du fondement de l’art présuppose une interaction entre les spectateurs, les oeuvres d’art et surtout le monde représenté dans ces oeuvres. C’est par là que l’on peut attendre une révélation de la vérité de l’Etre (chez Heidegger) ou celle de la nature de la beauté (chez Zoh).

Mots-clés

Zoh Yohan, Martin Heidegger, OEuvres d’art, Etre, Monde, Vérité, Révélation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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