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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의 공간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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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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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의 공간 정치학>

“영국의 도시 공간과 현대 미술: 2 차대전 이후의 런던”

홍익대학교 예술학부/미술사학과 교수 전영백

<들어가는 글>

<본론>

I. 20 세기 중반 영국의 현대 미술

I-1. 런던의 도시 공간

2 차대전 이후 런던의 건축; ‘영국의 페스티벌’을 중심으로

1930 년대 햄스테드에서 1950 년대의 소호로

II. 최근의 영국 미술

II-1. 오늘날 런던의 지역적 추이

60 년대 이후 런던 동부지역(East End)의 발전

<나오는 글>

<들어가는 글>

매년 여름에 개최되는 로얄 아카데미 졸업생의 여름전(summer exhibition)이 한창인 2003 년 7 월, 아카데미의 앞뜰에 보이는 초대 장이었던 18 세기 말 죠슈아 레이놀즈의 동상에 도전하듯 같은 높이에 설치된 밀랍 인물조형은 청바지를 입고 상의를 벗은 채 3-4 분 만에 한 번씩 입에서 불을 뿜어대고 있었다. 고전과 첨단이 공존하는 런던이라는 도시 환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 생각되었다.

다른 도시도 그렇지만 런던의 미술관은 도시의 구조 자체를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대도시 공간이 갖는 구조적 특징은 도시인의 시각 경험을 형성해 왔고 또 미술관은 그 시각구조를 반영하며 발전해 간다. 도시와 시각미술에 대해 남다른 주목을 한 학자들 중 발터 벤야민은 일찍이 대도시는 단지 변화된 삶의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새로운 지각 방식을 의미한다고 주장하였다. 벤야민은 대도시 경험은 요컨대 충격 체험, 다시 말해 “문지방 경험(Schwellenerfahrung)”1)이라고 서술한다. 즉 새로움과 낡은 것, 꿈과 깨어남, 예술과 상품 등의 경계를 체험하는 장소에서 그는 마치 문턱에 서있는 듯한 경험을 한다는 것이다.

대도시의 아케이드는 시각체험을 함축적으로 드러내는 주체의 시각 경험의 장으로 벤야민에게 이러한 ‘문지방 체험’을 개념화하게 하였다.

이는 안과 밖의 모호한 경계, 꿈과 깨어남 그리고 고대 세계와 현대 세계가 서로 얽혀 존재하는 미로(labyrinth)로써 설명된다. 대도시는 벤야민에게 파노라마처럼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공간일 뿐만 아니라, 모든 것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볼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시각 체계의 등장을 의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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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체계의 변혁은 섬유 산업의 발전과 철 구조물의 등장으로 대도시의 주요 건축물로 대두하게 된 아케이드(파사겐)에서 체험되었다.

대도시의 새로운 ‘볼거리’로서의 아케이드가 유리로 이루어진 진열장에 의해서 내부 공간과 외부 공간의 분리에도 불구하고 상점이라는 공간 안에서와 상점 밖에서 진열대에 놓여져 있는 상품들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새로운 건축양식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지각 방식과 직결되었다. 유리 건축물들은 유리라는 특성에 의해서 내적인 공간과 외적인 공간의 경계선을 모호하게 만들어, ‘내적 공간의 외면화’와 ‘외적 공간의 내면화’

현상이 일어났다는 점이 중요하다. 여기에 조명의 발달로 인한 현란한 빛의 반사가 안과 밖의 경계에 대한 모호성을 부가하였다.

이와 같이 시각적 변혁을 경험하게 하는 대도시의 보는 주체로서의 개인은 대중 속에 근거한다. “산책자의 무정형적인 집단”으로 또

“거리의 대중”으로 묘사되는 대도시 대중 속의 개인이 갖는 시각은 19 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보들레르(Baudelaire)가 본 제 2 제정기의 파리와 그 속에서 배회하는 군중 속 익명자인 ‘소요자(flâneur)’의 시각에 근원을 두는 것이다.

한 세기 반이 지난 지금에도 보들레르를 이은 벤야민이 규명한 대도시의 시각 체험은 우리에게 유효하다. 테임즈강 남쪽 사우스뱅크에 자리잡은 거대한 테이트 모던(Tate Modern)의 입구로 들어서면서 대도시 한 가운데 소요자(flâneur)의 경험을 실감한다. 눈 앞에 펼쳐진 건물 내부의 홀(turbine hall)의 엄청난 공간은 대부분 개조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포장된 거리를 닮은 새로운 공적 공간’을 제공하도록 되어있다.2) 이렇듯 건물 입구 공간은 이것이 외부인가 내부인가를 판단하기 모호하게 만들어 놓았다. 더구나 입구가 계단으로 올라가던 기존의 미술관과 달리 한 옆에서 밑으로 내려가도록 되어 있어, 공간이 주는 시각적 스펙터클의 충격이 더하다. 천정에서 들어오는 자연광은 육중한 벽돌 건물의 두터운 벽을 뚫고 내부를 내리쬐는데, 시각적 하중을 한결 가볍게 하면서 들어오는 관람자 머리 위로 떨어진다.

건물은 들어오는 이를 안락하게 맞이하는 내부 공간이라기보다 관람자를 익명의 시선들에게 노출시키는 공간이기도 하다. 근대화 시각(modernising vision)의 주체적 시각(subjective vision)에 근거하여 아케이드에 들어서는 벤야민의 대도시 소요자는 이제 더 이상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안전하지 않다. ‘보는 주체(seeing subject)’로서 숨겨진 익명적 시선의 주체자는 오늘날 우리의 변화된 대도시 환경에 정확히 들어맞지 않는다. 시선의 구조는 더 과격하게 전복되었다. 스스로의 시각계에서 내부와 외부 공간의 변증 뿐 아니라, 이제는 주체 자신이 ‘보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보여지는 존재’라는 포스트모던의 시각적 상황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근본적 시각 변화에서 시작하여, 대도시 런던의 미적 공간에 대해서는 미술관 건축에서부터 화파의 주요 활동지역 그리고 도시의 지역적 공간 배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각적 정책(visual policies)이 관여된다. 본 논문에서는 주로 2 차대전 이후 영국 현대미술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런던이라는 지정학적 공간이 크게 작용하였다는 전제를 갖고, 대도시의 지역적 특성이 어떻게 현대미술의 지형도에 영향을 주어 왔는가를 고찰하고자 한다.

<본론>

I. 20 세기 중반 이후 영국의 현대미술

‘왜 20 세기 중반 영국을 대표하는 현대 작가들의 작품 경향이 인물 주제 위주의 구상적 표현에서 두각을 보였는가’의 문제는 흥미롭다. 로렌스 알로웨이(Lawrence Alloway)는 베이컨의 교황을 주제로 한 작품들에 대한 비평에서 이 그림들은 교황에 대한 존경(homage)의 표시가 아니고 하나의

‘공격(attack)’이라고 묘사한다.{<Study after Velazquez's Portrait of Pope Innocent X>}(1953) 그리고 이 공격은 ‘예술과 반-예술(art and an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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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사이의 변증’이라 설명한다. 이와 유사하게, 에두알도 파올로찌(Eduardo Paolozzi)의 필름스타의 콜라쥬에서 글래머와 일상 생활이라는 두 극단 사이의 괴리감이 노출되어, 이상적 아름다움은 추한 리얼리티와 직면된다. 프란시스 베이컨이 남성 권력과 부성적 위엄성을 제시했던 반면, 파올로찌는 여성성의 이상에 개입한다. 그의 1950 년 콜라쥬에서는 다른 여성들의 글래머러스한 사진들의 찢겨진 부분들이 함께 조합되어 있는데, 이는 개별화를 거부하는 한 종류의 초상화를 나타낸다. ‘남성보다 더 치명적인’이라는 하단의 제목이 이를 강조한다.{(Paolozzi, <Deadlier than the Male>(1950)}

전쟁에서 두 부모를 잃고 베를린에서 망명한 프랑크 오엘바흐(Frank Auerbach)의 드로잉은 인간을 상처받고 끔찍한 모습으로 표현한다. 그가 다룬 인체의 벗겨진 피부는 고르지 않은 종이와 이에 잘 안착되지 않은 목탄으로 구성되어, 당시 비인간적 상황 하의 생존자를 암시한다.3)

2 차대전 이후의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 물음과 실존적 회의는 반미학적이고 추한 리얼리티의 표현으로 집결되었다. 로버트 로젠블럼(Robert Rosenblum)이 묘사한대로 영국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의 공적 경험을 명백히 예술에 반영했다는 말은 상당히 일리가 있다.4) 일찍이 폴 내쉬(Paul Nash)가 있었고 {<We are Making a New World>}, 베이컨과 그라함 서덜랜드(Graham Sutherland)는 40 년대의 작품에서 2 차대전으로 인한 시대의 고통스런 심리를 심도 깊게 전달하였다. 헨리 무어(Henry Moore) 역시 시대에 대한 증언과 진실한 감정에 파고들었다.5) 런던 사람들의 전쟁 중 지하 피신처의 드로잉은 그 우울한 힘을 여전히 보유한다. 그리고 전쟁의 경험은 삶과 죽음의 문제, 계급간의 갈등과 같은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작품 속에서 환기시켰다.

이와 같이 2 차대전 이후 20 세기 중반, 영국 작가들의 의식을 사로잡은 것은 인본주의적 전통에서 부각되는 인간적 주제(human themes)에 대한 관심이었다. 이는 그 당시까지만 해도 전반적 주도권을 잡았던 형식주의 비평에 힘입은 뉴욕 아방가르드에 대한 반작용이라 볼 수 있다. 사실, 데이빗 홉킨스(David Hopkins)의 지적대로, 인본주의자 도상(humanist iconographies)을 재발명한 작가는 주로 유럽의 작가들이었다.6) 영국에서 이 경향은 무어에서, 베이컨을 선두로 조성된 ‘런던 스쿨’(루시앙 프로이드, 알.비. 키타이, 프랑크 오엘바흐, 레옹 코소프 등),7) 그리고 최근의 ‘yBa’에서 보는 신체미술 등으로 일관성을 가지며 그 맥을 잇고 있다.

이 흐름에서 영국 미술이 채택한 유럽 미술 중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실존주의와 현상학으로 이해되는 알베르토 쟈코메티(Alberto Giacometti)와 동물적이고 곤충적 이미지를 통해 파격적 인체 조형을 구축한 저메인 리쉬어(Germaine Richier)의 작품들이었다. 그의 작품에서 보는 해골과 같고 찌를 듯이 뾰족한 형상은 린 차드윅(Lynne Chadwick), 레그 버틀러(Reg Butler), 그리고 파올로찌의 작품에서 유사성을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의 작품이 1952 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전시된 것을 보고 허버트 리드(Herbert Read)는 ‘공포의 기하학’이라고 묘사하였다.8)

이러한 기본적 틀 속에 전후의 사상적, 문화적 변동 속에서 태어난 런던 스쿨의 리얼리즘은 파리와 뉴욕과는 다른 자국적 개성을 지니면서 특히 그린버그식 형식주의가 주도하는 미국식의 절정기 모더니즘과는 차별되는 ‘모더니스트 리얼리즘(Modernist realism)’을 이루었다. 이 경향은 미술에 있어서 공간성과 역동성, 그리고 현재 일어나는 주제를 강조하였으며 이러한 관점을 신체로 귀결시켰다.9) 제임스 하이만(James Hyman)은 이에 덧불여 모더니스트 리얼리즘은 공간에서의 신체의 움직임 뿐 아니라 작품에서의 내러티브를 거부하고, 작품의 주제로 주체가 처한 난관과 궁지를 주요 테마로 다루며 표현의 모호성을 보인다고 설명한다.10) 이 개념을 정착시킨 영국의 대표적 비평가 데이빗 실베스터(David Sylvester)는 그린버그에 정면 도전하면서 런던 스쿨을 대외적으로 표방하는 선두에 있었다. 그는 미국 회화를 선도적 실천으로, 혹은 특별한 미국적 현상으로 표현한 그린버그의 시각을 명백히 거부하면서 그린버그에 의해 옹호된 미국 미술가들이 유럽 미술, 특히 프랑스 미술의 하위 변형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한다. 실베스터는 추상에 대해 반발했으며 실존주의(Existentialism)와 구상(figuration)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였다. 유럽의 리얼리즘(파리 스쿨)은 뉴욕 스쿨이 아닌 런던 스쿨로 이어진 것이고, 이런 맥락에서 추상보다 리얼리즘이 보다 주된 미술의 흐름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심으로 그는 베이컨과 쟈코메티를 부각시켰으며11), 버틀러, 파올로치, 윌리암 턴불(William Turnbull)과 같은 당대 영국 조각가들과 마이클 앤드류스(Michael Andrews)와 프랭크 오엘바흐(Frank Auerbach) 등 젊은 영국 화가들의 진가를 인정하였다.12)

런던 스쿨에 속하는 오엘바흐와 코소프의 1950 년대 작업을 ‘블랙 리얼리즘(black realism)’이라 부르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명칭은 양식뿐 아니라 작품의 내용에 연관되어, 그들의 드로잉과 회화가 삶이 아닌 그 그림자를 드러낸다는 것을 지적한다.13) 하이만은 이들의 작품은

“시각적인 시뮬라크라로 조밀하여 질식할 것 같고 산소를 갈망하는 세계를 보여준다”고 묘사한다.14) 오엘바흐와 코소프 작품의 표면은 대지와 같이 거칠고 많은 노동이 투여된다. 그들은 연필보다 목탄을 선호하여 그림자 드리운 검은 공간, 즉 지옥과 같은 비젼을 창출하였다. 어두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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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투성이의 생존자들이 부상한다. 이러한 특성은 개인적이라기보다 개념적 추이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덧붙여, 그는 오엘바흐와 코소프의 예술은

“자연이 아닌 인간에 대한 것이고 그들 작품에 드러나는 ‘대중의 정신’은 죽은 세계에서의 삶의 섬광이다”라고 묘사하였다.15)

루시앙 프로이드(Lucian Freud)의 리얼리즘은 날카로운 초점을 통해 자세하게 묘사된 대상을 극도로 클로즈업시킴으로써 내러티브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드러났다. 그의 1952 년작, <프란시스 베이컨의 초상>은 프로이드가 소유한 사진가 존 디킨(John Deakin)의 베이컨 사진을 보고 그렸으리라 추정되는 작품이다. 사진에서 렌즈가 대상의 얼굴에 너무 근접하면 중심에서 가장자리로의 왜곡이 생기는데, 프로이드 작품에서도 볼록 렌즈로 본 것 같이 부어오른 얼굴이 그림의 프레임을 채운다. 베이컨이 흐린 처리를 통해 특정성을 거부했다면{<Three Studeis of Human Head>(1953)}, 프로이드는 그와 반대로 초상화의 디테일을 지나치게 고조시키면서 모델의 실제적 묘사나 장르상 요구되는 특징 묘사를 도리어 거부한 셈이고 이를 통해 은유적 잠재성(metaphoic potential)을 강조한 것이다. “그들은 유형(types)이 아니고 인간 조건(human condition)을 나타냈다.”고 하이만은 설명했다.16) 다시 말해, 묘사된 사람은 특정하지만 동시에 더 일반적이고 은유적인 무언가를 느끼게끔 한다는 뜻이다. 요컨대 “탈개인화된 인간 이미지(depersonalised human image)의 분열”17)이라는 점에서 프로이드와 베이컨을 유사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전후 영국 화단의 경향에 있어, 이러한 런던 스쿨의 리얼리즘과 더불어 인디펜던트 그룹(Independent Group)18)과 팝 아트(Pop Art)19)가 보여준 리얼리즘의 맥락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인디펜던트 그룹은 회화적 강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시각미술에서 상대적으로 ‘저급 미술(low art)’을 지향했다고 알로웨이는 설명한다.20) 이 그룹에는 리챠드 헤밀톤(Richard Hamilton), 에두알도 파올로찌, 윌리암 턴불 등이 적극 참여했는데, 파올로찌의 남성 인물은 자신의 이미지를 프랑켄스타인의 괴물로 표현한 것이었으며, 외계인과 같은 신체, 프린트 처리된 회로망(circuit)의 혼합을 보였다. 또한 폼페이 벽화와 같이 고대적인 자취에서 컴퓨터 회로를 보는 듯한 이미지를 창출했다. 턴불은 파올로찌 이미지에서의 도발적인 텍스츄어를 공유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술의 관념적 이상성이 아닌, 삶과 일상을 미술에서 드러내고자 했던 인디펜던트 그룹과 팝 아트는 그 문화적 지향성과 리얼리즘의 근본적 자세는 공유하였지만 영국미술의 두 가지 다른 액면을 집약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알로웨이는 말하기를, “인디펜던트 그룹은 종종 영국 팝아트와 연계된다. 그러나 나는 이 그룹이 풍부의 미학(aesthetic of plenty)을 주장한 사실 너머 어떠한 연결이 있는지에 대해 회의적이다”라고 하였다.21) 다른 성격의 두 맥락이 함께 전시한 1956 년 <이것이 내일이다(This is Tomorrow)>전은 런던의 중심부가 아닌, 런던 동부지역(이스트 엔드)의 화이트채플(Whitechapel) 갤러리에서 열렸다. 이는 알로웨이의 언론매체를 통한 적극적 홍보 덕분에 하루에 천여 명의 관람자를 맞았던 전시였고, 건축가, 화가, 조각가의 합작 전시로서, 당시 영국 문화의 특성을 함축적으로 드러내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로봇22)이 전시 오프닝을 주관했다는 점이 예시하듯, 전시의 주요 성격으로써 예술과 일상, 고급미술과 하위미술의 경계 흐리기와 장르간의 분류에 대한 도전이 두드러졌다. 이 전시에서 헤밀톤의 작품 <무엇이 오늘날 우리의 가정을 그렇게 다르고 매력적으로 만드는가?(Just what is it that makes today's homes so different, so appealing?)>(1956)가 전시되었다.

인디펜던트 그룹과 팝 아트의 관계는 독특한 영국적 상황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미국의 경우는 팝아트에서 추상회화(Abstract Painting)가 갖던 제한성, 특히 표면적 통제에 대한 세대적 거부가 영국보다 더 강했는데, 이 반발감이 변증(dialectic)을 위한 풍부한 잠재성을 부여했다고 볼 수 있다. 영국에서 팝아트가 미국보다 도발적이지 않았던 것은 알로웨이의 지적대로, ‘그래픽 전통(graphic tradition)’이 항상 영국적 전통이었고 도전받지 않았다는 점과 직결된다고 볼 수 있다.23)

일상을 다루는 미술, 삶의 현실성을 담은 미술이라는 팝의 기본 명제는 영국 리얼리즘의 전통적 측면과 근본적인 면을 같이 하였지만, 광고 매체, 대량 생산물 등 팝에서 선호되는 가벼운 모티프는 영국 리얼리즘이 가진 비중 있고 심도 깊은 표현 방식과는 큰 괴리를 갖는 것이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팝 아트가 영국적 브루털리즘(Brutalism)의 측면과 맞지 않았다는 것이다. 1959 년 전시에서 브루털리즘은 인물을 거대하고, 단순화시키고, 정면으로 다루면서 회화적으로 처리하였고, 뒤 뷔페의 영향을 받은 반-개인적인 표현이 두드러진 특징을 가졌다. 필자는 이러한 브루털리즘의 특징이 영국 리얼리즘의 핵심을 이루고 있고 이같은 일상의 파격적 도입과 무거운 리얼리즘의 양면적 모습을 영국 미술의 전반적 특성이라고 강조하고자 한다.

이는 전후 20 세기 중반의 첨예한 특징뿐 아니라 오늘날의 젊은 영국 현대작가들의 충격적 작품에서도 병행되는 두 맥이라 할 수 있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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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과 펑크를 중심으로 형성된 당시 영국의 과격한 청년문화는 사회적으로 억압된 욕망을 풀어놓았으며, 예술 전반에 있어서도 금기시되는 주제들이 새롭게 형상화되었다. 새로운 하위문화를 정치화한 신좌파는 휴머니즘적인 마르크시즘을 옹호하였고 노동계층의 소외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60 년대의 젊은이들과 예술가들은 이러한 사회적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였는데, 이런 맥락에서 좌파적 하위문화와 당시의 아방가르드로서의 런던 스쿨의 반문화적 성격을 주목할 수 있다.

이 맥락에서 특히 50 년대 이후 사회적 리얼리즘(Social realism)을 미술의 영역에서 담론화시킨 존 버거(John Berger)를 주목할 수 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기반으로 하여 일상의 주제들에 대한 대중적 이해를 도모했고, 인간 조건의 진실을 사회적 차원에서 표현하는 것에 가치를 두었다.

버거의 사회적 리얼리즘은 런던 스쿨과도 관련하여 명백하게 영국적인 현상이었는데, 일상에 대한 관심과 물질성(materiality)에 대한 주목을 환기시켰다. 그렇다고 해서 버거의 비평적 관점이 런던 스쿨의 특성을 모두 옹호한 것은 아니다. 그는 코소프의 두터운 표면이 갖는 물질성과 육체성을 칭송한 반면, 난해한 베이컨의 회화가 보여주는 고통과 해체는 이기적이고 그의 공포는 현실세계와는 거리가 있다고 비판하였다.25)

60 년대 이후 일어났던 청년 하위문화가 신좌파에 의해 문화적 정치운동으로 변환되고, 성해방과 동성애와 같은 공공연한 하위문화 코드는 보수적인 영국 사회에 큰 변화를 일으켰던 것이 사실이다. 런던 스쿨의 리얼리즘은 이러한 하위문화 맥락에서 생성된 유럽적 모더니즘과 사회적 리얼리즘 사이에 존재했던 미술경향이었다고 할 수 있다.26) 요컨대, 전후 20 세기 중반기의 영국 화단은 20 세기 초부터 조성되었던 추상적 모더니즘과 볼티시즘(Vorticism)의 새로운 혁신 등으로 다양한 움직임이 있어왔으나, 구상미술이 주도되고 물질성이 심도있게 드러난 리얼리즘 계열의 작업이 우세했다고 볼 수 있다.

버거가 주도한 1952 년 <Looking Forward>전27)이 런던 동부지역의 화이트채플 아트 갤러리(Whitechapel Art Gallery)에서 열린 것은 런던에서 차지하는 이 지역의 성격상 (노동계층의 집결지, 산업화 과정의 경제적 빈곤지역) 전시의 정치적 성향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사회적 리얼리즘이라는 면에서 선언적인 전시회였는데, 광범위한 대중 관람객을 끌어들이고 특히 노동계층에도 이해하기 쉬운 것이었다. 그는 선언했다. “나는 이 전시를 비평가와 본드 스트릿(Bond Street)의 예술 애호가들을 위해서가 아니고 당신을 위해, 그리고 모던 아트를 참지 못하는 모든 당신의 친구들을 위해 기획했다.” 그는 이 전시에 참가한 화가의 작업이 주제에 대한 작가의 주관적인 ‘감정’의 리얼리티보다는 ‘주제 자체’의 리얼리티에 더 관여한다는 것을 보이고자 함을 강조하였다.28) 이 전시는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에서 전시했던 전쟁 미술가들에 의한 전쟁기 전시의 인기를 토대로 했으며, ‘영국의 페스티발(Festival of Britain)’의 많은 행사들에 고무되었다.29)

I - 1. 런던의 미술 공간

2 차대전 이후 런던의 건축; ‘영국의 페스티벌’을 중심으로

이제 전후 영국미술의 전개에 관여된 건축적 공간과 실제적 지역을 고찰하기 위해 ‘영국의 페스티발(the Festival of Britain)’을 먼저 살피고자 한다. 1951 년 개최한 영국의 페스티벌’은 영국의 전후 회복기의 상황을 잘 보여주며 런던이 미술공간의 현대화를 위해 얼마나 정책적으로 모색했는가를 나타낸다. 자연, 전통과 도시를 기치로 테임즈 강 아래쪽 남부지역인 ‘사우스뱅크(South Bank)’에서 구현된, 가장 거대한 국가적인 축제였다. 이 행사는 1851 년에 있었던 ‘대 전시회(Great Exhibition)’를 기념하여 시작되었다. 사우스뱅크 전시의 건축은 절충적이었으며, 어떠한 형식적인 기준이나 규칙이 부여되지 않았다. 강 오른쪽, ‘행성 토성(the planet Saturn)’은 미래를 향한 전문적인 기술을, 왼쪽에는 과거와 현대, 전통과 새로움이 교류하는 전원적인 풍경으로 꾸며놓았다. 이러한 개념은 기술과 문화라는 두 개의 이원적 가치로 구성된 것이다.30)

영국은 2 차대전의 참상을 극복하고 복구운동을 전개함에 있어, 그 어떤 유럽의 국가들보다도 충실했던 나라였다. 특히 전후의 다양한 문화적 운동을 통해 영국인의 정체성을 확인함과 동시에 이전의 구습을 벗어 던지며 새로운 이미지를 부여하려 했던 점은 당시 영국문화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1946 년 빅토리아 & 알버트 박물관에서 열린 전시 “영국은 할 수 있다(Britain can make it)” 그리고 5 년 뒤에 열린 사우스뱅크 전시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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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적 생존과 자부심에 대한 새로운 결의를 다지는 의미를 지녔는데 특히 철골과 유리의 모던한 건축물과 파빌리온 등을 통해 기존의 영국적인 무뚝뚝한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미래 지향적인 영국성을 지향하였다.

‘영국의 페스티발’의 일환으로 기획된 사우스뱅크 전시회에서 미술 위원회(Arts Council)는 모더니스트 미술을 자율적인 것이고, 의미를 취할 때 가치에서 자유로운 의미를 수용하는 것으로 대중에게 홍보하였다. 공공장소를 위한 작품들을 만들었던 작가들 중에서, 헨리 무어(Henry Moore)는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그와 위원회와의 관계는 전후에 바로 시작되었는데, 위원회가 그의 작업을 충실하게 지지한 것은 작업의 인본주의적(humanist) 주제 때문이고, 또 그의 국제적인 위상 때문이었다.31) 이 페스티발을 위해서 무어는 각지고 긴장감 있는 <와상(Reclining Figure)>을 제작하였다. 무어의 강력한 지지자인 로버트 멜빌(Robert Melville)은 도시 공간의 조성과 규명에서 공공 미술(Public Art)의 역할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사우스뱅크 전시와 직결되어 부각된 주요 관건이었다.32) 이 전시는 당시 일종의 “일상성의 전복(reversal)”을 가져오는 것이었는데, 이를 주최한 베리(Gerald Barry)의 용어인 “국민의 전시(The People's Show)”로서, “엄격성의 문화가 카니발로 넘어가는 결과였다”고 갈레이크(Margaret Garlake)는 설명한다.33)

전체 페스티벌에서 가장 강력한 이미지는 우선 ‘발견의 돔(Dome of Discovery)’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강철과 알루미늄으로 된 지붕이 강철 구조로 지탱되었다. 그 옆에는 포월(Philip Powell)과 모야(Hidalgo Moya)가 ‘수직적 형상’으로 디자인한 스카이론(Skylon)이 있었는데, 이는 발견의 상징, 그리고 행성 간(interplanetary) 여행의 이미지를 나타냈다. 이 사우스뱅크의 가장 주된 지표 두 가지가 그 미래주의적 건축의 놀라운 이미지를 형성하였다.

이 축제에서 규정된 특정한 건축양식은 없었지만, 대체적으로 ‘신경험주의(New Empiricism)’적인 모던 건축물들이 선보였다. 전후 영국을 주도했던 신경험주의 양식은 커다란 스케일과 산업적 재료를 사용하는 특징을 갖는다.34) 그런데 1960 년대에는 이러한 건축 흐름을 비판하는 새로운 건축운동이 시작되었는데, 알리슨과 피터 스미드손(Alison and Peter Smithson) 부부가 전개한 건축에서의 ‘브루털리즘(Brutalism)’이 그것이다. 이 움직임은 고양된 상상력과 건축재료로 가공되지 않는 산업재료를 썼다는 점에 있어서 신경험주의의 우아한 특성에 상반되는 것이었다.35) 이러한 새로운 건축운동은 전후의 영국인들의 극복의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당시의 하위문화와 고급문화의 절충적인 성격을 띠었다. 이러한 절충적 경향과 좌파적 시선은 60 년대에 나타난 리얼리즘적 회화의 경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스미드손 부부가 비평가 레이버 벤함(Reyber Banham)과 적극 참여했던 인디펜던트 그룹은 의사소통 이론(communication theory)에 관심이 많았으며, 예술은 일상문화의 한 측면을 반영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예술가는 비관습적이고 일상적인 오브제를 포함하여 어떤 재료라도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예술의 순수성과 아카데미의 자율성이라는 모더니스트적인 개념에 적대적이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36) 이들은 인류학과 아방가르드 미술, 그리고 건축에서는 더 일찌기의 르 꼬르뷔지에(Le Corbusier)에 기반하는 도시주의(Urbanism)를 발전시켰다.37) 스미드손 부부는 생동하는 사회와 친밀하게 연관되는 환경을 구축하려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계획은 1945 년에 진행된 ‘당신의 이웃을 발견하라(discover your neighbor)’라는 사회학적인 프로젝트와도 병행되는 것이었다. 이는 인류학자 쥬디스 헨더슨(Judith Henderson)이 런던 동부지역 베스날 그린(Bethnal Green)에 기반한 연구였는데, 노동자 계층의 이스트엔드 문화의 경험을 밝혔다. 이는 건축과 도시환경, 일상생활 사이의 소통관계를 반영하는 시도였는데, 이와 같이 인디펜던트 그룹은 고급/저급, 순수/기록 혹은 더 중요하게, 예술/비-예술의 이분법적 범주를 흐리는 데에 기여하였다.38)

인디펜던트 그룹의 주요 멤버인 사진가 나이젤 핸더슨(Nigel Henderson)은 1948-1952 년 사이에 그의 아내 쥬디스가 연구한 이 런던 동부지역의 일상 모습을 포토져널리즘의 방식으로 담았고, 이는 그의 예술적 명성을 세웠다. 그 중, 독특한 합성 사진인 <창가의 소년, 이스트 런던(Boy in Window, East London)>(1949-52)은 통속적 주제를 하나의 모더니스트 아이콘으로 전환한 것인데 역시 인디펜던트 그룹의 미학에 부합되는 것이다. 이 작품은 베스날 그린 가의 모습과 그곳의 상점과 주택을 다큐멘터리적으로 찍은 사진 연작들 중 하나이다. 제임스 링우드(James Lingwood)는 헨더슨이 스스로 경험한 2 차대전의 참상과 고통의 이미지가 이 사진들에서 표현된다고 하였다. 헨더슨에게 그것은 인간의 머리라는 소재로 함축되었는데 위의 사진에서 소년의 머리가 창가에 그려진 인간 머리 형상에 대응되는 것을 알 수 있다.39) 런던의 모더니스트 리얼리즘의 한 측면은 그의 1950 년대 중반 인간 형태를 왜곡된 이미지로 만든 이와 같은 콜라쥬와 스크린 프린트에서 잘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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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 년대의 햄스테드(Hamstead)에서 1950 년대의 소호(Soho)로

20 세기 중반 영국 미술의 동향을 볼 때, 피츠로이 스퀘어, 캠던 타운, 유스턴 로드, 블룸스베리 등 런던의 지역 이름이 직접 개입되어 있다. 그러나 특정 장소와 미술가를 가장 가깝게 융합시킨 곳은 역시 1930 년대의 햄스테드(Hamstead)와 1950 년대의 소호(Soho)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햄스테드를 간단히 살필 때, 이 지역은 1930 년대에 영국 아방가르드가 유럽 대륙의 아방가르드와 거의 대등한 발전을 이루는 데 발판이 된 예술의 중심지였다.40) 미술가들은 컨스터블(Constable), 블레이크(Blake)의 시대부터 계속되었던 미술적, 문예적 연합들 때문에 이 지역으로 모여들었다. 햄스테드의 미술가들과 작가들은 1930 년대 아방가르드 경향들인 초현실주의, 구성주의, 추상과 모던 운동 건축 모두와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이들에 의한 햄스테드의 국제적인 분위기는 정치적 활동과 관련되었고, 이는 유럽 본토에서 망명해온 미술가들에 의해 더욱 고조되었다.

1930 년대 후반, 유럽 전역에 걸친 암울한 나치 치하에서 망명한 미술가들이 도착하면서 이에 고무된 유닛 원(Unit One)41)에 의해 추상 경향들이 나타났다. 피에트 몬드리안(Piet Mondrian 1872-1944)은 1937 년에서 1941 년까지, 러시아의 구성주의 화가 나움 가보(Naum Gabo 1890-1977)는 1935 년 영국에 도착했고,42) 1938 년에서 1946 년 사이에 햄스테드에 살았다. 또한 바우하우스 출신의 망명자들인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 1969), 마르셀 브로이어(Marcel Breuer 1902-1946), 모홀리-나기(Laslo Moholy-Nagy 1895-1946)등은 모두 1930 년대 중반에 런던 햄스테드에 도착하였다.

유럽 본토에서 망명 압력을 받아왔던 이러한 유럽 미술가들은 햄스테드의 열렬한 반 파시스트 분위기에 포용되고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그런데 1930 년대에 예술적 햄스테드를 융성하게 했던 바로 그 유동성과 국제주의의 특성은 스스로의 종말을 재촉했다. 나치 독일에서 피신하고 런던에서 작업하여 성공하기 위해 언어적, 문화적 장벽을 허물었던 미술가들은 다음으로 대서양을 건너갈 기회를 고대하였다.43)

제 2 차 세계대전으로 영국의 초기 모더니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햄스테드의 미술가 거주지가 해체되고, 1950 년대의 미술의 중심지로 부각된 곳은 소호(Soho)였다. 전쟁으로 인한 1950 년대 영국의 정치적 □ 경제적 변화는 심각했고, 런던은 사회적 □ 문화적으로 변화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어 전후 새로운 장소에 대한 탐색이 이 시기의 특징이었다. 소호가 런던 미술가들을 위한 중심으로서의 역량을 발휘하게 된 것은 이런 변화와 불확실성의 분위기에서였다. 소호에는 쇠퇴의 분위기와 함께 국제적인 열기가 있었다. 미술가들은 소호가 영국 주류 사회에는 이질적이었으나 제도권 내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의미와 자기표현을 추구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이 지역은 괴짜들과 소외된 자들의 섬이자 소굴이었다. “소호는 부적응자들을 위한 완벽한 장소였다. 거기에서는 아무도 꼭 맞게 만들어지지 않았고 그것이 중요했다.”44) 또한 소호는 국제 예술가 연합(AIA : Artist International Association)과 몇몇 소규모 현대 미술 갤러리의 본거지였다. 이 소규모 갤러리 중 두 곳인 젬머(Zwemmer) 갤러리와 갤러리 원(Gallery One)은 유럽에서 영향 받은 아방가르드 미술을 통해서 영국의 실험적인 다음 세대를 위한 지침이 되었다.

소호는 좀 더 지적인 아방가르드 미술가 그룹인 인디펜던트 그룹에 의해 추구되었던 삶과 미술을 병행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 그룹은 새로운 전후 세계로의 지침, 고급문화와 저급문화 사이, 삶과 예술 사이의 전통적인 경계가 사라지는 세계로의 지침들을 추구했고, 소호는 처음으로 유럽만큼이나 미국을 향하게 되었던 이러한 특별한 전후(戰後) 미학에 완벽한 배경을 제공했다. 그들은 내셔널 갤러리보다는 소호 신문 판매대의 시각적 브리콜라주(bricolage)와 체어링 크로스(Charing Cross Road)의 중고 책 서점에서 영감을 받았다.45)

소호의 콜로니 룸(Colony Room)은 술과 섹슈얼리티(동성애)가 매력으로 작용한 예술가들의 집결지였다.46) 1949 년 문을 연 클럽의 불안정하고 석연치 않은 모호한 분위기는 1962 년 마이클 앤드류스에 의해 포착되었는데, 이 무리들에는 이 곳의 운영자 벨처(Muriel Belcher)와 함께 단골 손님들인 베이컨과 그의 모델 모라이스(Henrietta Moraes), 사진작가 디킨(John Deakin), 그리고 프로이드(Lucian Freud)등이 속해있다.47) 이들은 넓은 의미에서 런던 스쿨의 작가들이었다. 소호는 분명 예술가들을 강한 결집력으로 모이게 하는 장소였다.48) 그것은 소호의 반문화적 성향에 적잖이 기인하는 것이었는데 예를 들어 동성애로 소외된 작가들{예를 들어, 존 민톤(John Minton), 콜린 매킨스(Colin MacInnes)}은 소호의 바와 클럽에서 강한 동료의식을 발견하였다.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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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 년에 개최된 첫 번째 소호 페어(Soho Fair)는 소호의 특별한 ‘마을(village)’로서의 성격을 가진 행사로, 그 지역을 고무시키고 외부 지역의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소호의 사업들에 의해 조직되었다. 기득권과 전통에 도전하는 다양한 움직임이 생기면서 1950 년대 중반 무렵 주류 영국 사회는 소호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 중, 소호 페어가 열렸던 같은 해에, 테이트 갤러리에서 열린 <미국 현대 미술 (Modern Art in the United States)>전시회는 영국 대중들에게 잭슨 폴록(Jackson Pollock)과 같은 추상표현주의 화가의 작품을 소개했고, 미국을 대중 문화뿐 아니라 ‘고급 문화(high)’의 가능성의 장으로 인정받도록 하였다.50)

II. 최근의 영국 미술

오늘날 런던의 지역적 추이

이제는 오늘날 런던 미술 공간의 분포와 변천을 살펴보면서 미술 작업과의 지역적 연관성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고자 한다. 전반적으로 보아 런던의 미술 공간은 크게 세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쪽 영역(West End), 동쪽 영역(East End), 남쪽 영역(South)으로의 공간 구분은 그 지역 자체의 차이만이 아니라 빈부 차이, 지역 간 발달 정도의 차이가 작용한다고 할 수 있다. 웨스트 엔드는 도심에서도 값비싼 부지로 인해 상업지역을 이룬다. 이스트 엔드는 리버풀 스트릿역(Liverpool St. Station), 올드 스트릿역(Old Street Station) 등을 경계로 런던 동쪽을 말하는 것이고, 테임즈 강의 남쪽을 런던 남부지역으로 칭한다.(도표 참조) 이제 이러한 런던의 미술지역의 소개와 최근의 공간정책적 변화를 간단히 살피고자 한다.

웨스트 엔드(West End) 지역은 부유한 지역으로 주로 상업 화랑들이 밀집되어 있다. 이 개인 화랑들이 자리 잡은 도심 지역은 유지비가 비싼 관계로 부유한 화랑주들이 경영하며 주로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한다. 런던의 대표적 패션가인 뉴본드 스트릿(New Bond St.)과 인접한 코크 스트리트(Cork Street)에 와딩톤 갤러리(Waddington Galleries), 가고지안 갤러리(Gagosian Gallery), 말보로 갤러리(Marlborough Fine Art Gallery), 베르나르 제이콥슨 갤러리(Bernard Jacobson Gallery) 등이 있다. 전반적으로 추세로, 소위 고급 미술의 웨스트 엔드는 젊고 실험적인 작가들이 부상되는 이스트 엔드의 활기에 뒤쳐져, 이제 더 이상 예전만큼 미술애호가들의 열기를 찾아보기 힘들다. 런던 미술공간의 주도권은 앞에서도 이미 언급했듯이 60 년대 이후 화이트채플(Whitechapel) 겔러리 등의 눈부신 활약으로 차츰 동부 지역로 옮겨갔다고 본다.

런던의 동부인 이스트 엔드(East End) 지역은 이미 앞에서 강조하여 언급했듯이 헉스톤(Hoxton)지역이 그 중심이다. 헉스톤 스퀘어(Hoxton square)는 이 지역의 중심 공간으로서 전시 개막 날에 작가들, 비평가들, 애호가들이 만나 대화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되곤 한다. 런던 미술계에서는 이렇듯 서로 간 대화가 연결될 수 있는 공간이 중요하다. 이 지역의 대표적 갤러리들로 화이트 큐브 갤러리, 빅토리아 미로 갤러리, 딜럭스(Deluxe) 갤러리 등이 있다. 이러한 헉스톤 지역의 갤러리들과 더불어 이스트 엔드를 대표하는 이니바(inIVA)는 이 지역의 주요 미술 공간으로 유럽에서 유일하다고 하는 비유럽(non-European) 작가들을 위한 국제 프로그램이다.

런던의 지역적 공간 정치학의 구도를 잘 보여주는 경우로는 특히 빅토리아 미로(Victoria Miro) 갤러리(사진 28-29)를 들 수 있다. 본래 웨스트 엔드(West End)에 있었던 고급 갤러리가 이스트 엔드(East End)로 이전한 것은 런던 미술계의 중심부에 변화가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아트 카운셀(Art Council)이 정책적으로 이스트 엔드 지역을 미술 공간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인위적 개입이 있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갤러리 이동을 위해 무상으로 현재의 이스트 엔드의 공간을 쓰도록 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사치스런 레스토랑이나 카페란 찾아볼 수가 없는, 옛 공장지대의 분위기가 농후한 갤러리의 현 위치는 영국 화단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위상을 생각할 때 놀랄 정도이다. 이 갤러리의 주인인 미로(Victoria Miro)는 크리스 오필리(Chris Offili) 등 세계적 작가 배출에 힘을 발휘하는 실력자로 이미 상당한 명망을 쌓아왔다. 한편, 딜럭스(Deluxe) 갤러리는 원래 이름이 럭스(Luxe) 갤러리로, 지금은 영화관이 된 옆의 공간도 모두 갤러리 공간이었으나, 전시 공간이 작아지고 이름도 딜럭스(Deluxe)로 바뀌었다. 이곳은 원래 주로 젊은 작가들의 사진 등을 다루는 갤러리였으나, 비용 문제에 봉착한 것으로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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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런던 동쪽의 헉스톤 거리는 순수 미술이 집약되어 80 년대 후반 정도부터 새로운 미술 세대를 대표하는 지역으로 부상되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레스토랑, 카페 등 위락의 거리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건물 임대료가 너무 비싸져서 젊은 작가들이 더 이상 작업실을 빌릴 수 없게 되었고 전시 공간도 순수 실험 미술을 위한 전시를 하기에 점차 유지비가 힘겨워진 추세이다. 따라서 이 지역도 자본 양상에 따라 다른 지형도가 그려짐을 알 수 있다. 요즈음에는 테임즈 강 남쪽 지역의 움직임이 빨라지면서 남동부 지역에 실험적 대안공간들이 많이 생기는 추세가 주목된다.

이러한 미술 공간의 이동에 힘입어 강변의 뱅크싸이드(Bankside) 주위로 집값이 현격히 상승하는 등 미술 공간과 자본 시장은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런던 남부 지역(South)을 보자면, ‘싸우스뱅크(Southbank)’라고 명명하는 테임즈 남쪽의 복합 문화공간이 전통적인 무게를 잡는다. 이곳에는 미술, 음악, 공연의 예술 공간들이 함께 있는데, 전시장으로는 주로 20 세기 현대 작품들에 치중하는 헤이워드 갤러리(Hayward Gallery)가 대표적이다.

더불어 최근의 지역적 변화로 싸치(Saatchi) 갤러리가 런던 남부지역으로 이전한 것을 들 수 있다. 싸치 갤러리는 찰스 싸치라는 영국의 대표적 미술 소장가의 사적 갤러리인데, 2002 년 4 월 이전하여 현재는 싸우스뱅크의 카운티 홀(County Hall)에 자리 잡고 있다. 사업가로서 상술에 능한 싸치의 파격적인 미술 구매로 영국을 대표하는 yBa 를 탄생시킨 보루이기도 하다. 그러나 갤러리의 이전에 대해서는 부정적 여론이 있는데, 건물 공간과 작품 전시 면에서 현재의 신고전주의식 전통적 건물보다는 공장의 가건물 같이 거친 분위기를 물씬 풍겼던 이전 공간이 소장 작품의 성격과 더 잘 어울린다는 견해가 전문가들 사이에서 주도적이다. 싸치의 이전은 테임즈 강 남부지역의 주도성을 강조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런던의 공간적 정책에 있어 2000 년 이후 가장 커다란 변화는 테이트 모던(Tate Modern)의 설립이다. 이 거대한 미술관은 현대미술의 컬렉션과 전시기획을 담당하게 되었고 동시에 테임즈강 남동부(South East) 지역을 또 하나의 중요 미술공간으로 부각시켰다. 오늘날 테이트 모던 주위에 새로운 대안 공간 및 혁신적 프로그램들이 생겼는데, 특히 프로젝트 공간들{Union Projects, f a Project}을 들 수 있다. 이는 고정된 전시 공간에 작품을 맞추는 것이 아니고 작업의 성격에 따라 공간을 설정하는 놀라운 방식을 채택하기도 하는데, 대체로 가건물이나 임시 건축물을 단기간 활용하게 된다.

이제 미술에서의 공간 정치로 볼 때 남쪽이 주도권을 잡는 과도기에 있다 해도 무리가 아닐 정도이다.51)

젊은 영국 작가들(‘yBa’)

60 년대 이후 런던 미술계의 커다란 변화에 대해서 분석의 시각이 필요하다. 리챠드 숀(Richard Shone)은 “From ‘Freeze’ to House: 1988-94”라는 논문에서 이에 대해 세 가지의 주목할 만한 근거를 지적한다. 첫째, 영국의 작가들에 대한 집단적인 후원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것은 대처의 집권 이후 영국 사회의 보수화 경향과 맞물려, 작가들은 줄어든 복지정책에 반발하며 자신들의 전시회를 직접 개척해나가는 기지를 발휘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주었다. 또한 국가를 배제한 사기업의 후원과 미디어 매체의 활용을 통해 예술시장을 개척하는 수완이 발휘되었다. 이것은 찰스 사치(Charles Saatchi)라는 유명 콜렉터에 의해 그 추진력을 더하게 되었던 것이다.52) 둘째, 미술학교의 교육이 다양화되고, 이를 통해 능력있는 작가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셋째, 작가의 중심이 런던의 동부지역과 최근에는 테임즈강 남동부 지역으로 옮겨가는 경향이 나타났으며, 이 지역 미술대학의 발전{대표적으로 골드스미스 대학(Goldsmiths College)}의 성장은 이런 맥락에서 미술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53)

영국의 청년 미술가들이 급성장하여 세계 미술계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이들의 작품이 소수의 전문가들이나 소위 ‘교양 있는’ 사람들만이 이해하는 기존의 미술과 달리 작품의 주제와 매체, 전시방법, 시장성 등의 면에서 폭넓은 대중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80 년대의 미술이 예술의 본질이나 형이상학에 얽매여 기성 미술제도에 순응하면서 보수적인 태도를 고수한 반면 이들 1990 년대의 미술은 다다이스트와 같은 유머를 미니멀 아트나 환경미술의 문학적 특징과 결합시켜 미술의 위상을 문제 삼았다.

‘yBa’(young British artists)라고 불리는 일군의 작가들에는 데미언 허스트(Damien Hirst), 말콤 몰리(Malcolm Moly), 레이첼 화이트리드(Rachel Whiteread), 게리 흄(Gary Hume), 가빈 터크(Gavin Turk), 마이클 랜디(Michael Landy) 등이 속한다. 이들 작품의 특징을 살펴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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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이전 영국 작품들의 지역적 성격을 넘어서서 국제 시장에 부응하는 개방된 성향을 지니고 있는 점, 둘째 작가들이 대중매체와 새롭고 분명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대중문화로부터 나온 재료를 종종 사용한다는 점, 셋째 시각적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구경거리 형식으로 개념적인 작업을 제시한다는 점이다.54)

사회적 부정의를 지적하는 비판을 시도하고 또 속물적인 고급예술의 위선에 대해서 비판하는 주제도 오늘날의 영국 미술에서 두르러져 보인다.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가 목장 동물들의 시체를 도시 생활 속으로 끌어들여 표현하는 작품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관건은 이러한 과격하고 새로운 시각 언어를 영국적 특성으로 인식할 수 있는 근거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영국의 젊은 세대들이 표현하는 새로운 미술 언어는 일상과 미술의 통합을 추구했던 2 차대전 이후 영국 리얼리즘의 전통적이고 문화적인 흐름을 이으면서도 그것에 과격하게 도전하고 있는데, 그 양상이 극단적이다. 그 전통과 개혁, 보수와 진보의 양 극단의 공존이 본인이 포착하는 영국적 미술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그리고 이러한 양상이 역사적인 런던이라는 도시의 사회적 힘과 도시적 환경과 상통하고 있다는 것을 무시할 수 없다.

이처럼 런던이 현대미술을 주도하게 된 데에는 미술가 자신들의 노력뿐 아니라 영국의 사회적 상황에 따른 미술시장의 변화, 미술관 및 미술교육을 비롯한 제도적 뒷받침, 후원자 □ 화상 □ 비평가의 역할 등 다각적인 변화와 노력이 있었다는 점을 상기한다.55) 새로운 영국미술은 결코 경제적인 호황상태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1970 년대부터 영국의 경제는 불황을 맞게 되었고 1979 년 보수당의 대처 정부가 수립되자 경제회복정책으로 긴축재정을 실시하였다. 예술분야에도 정부의 지원이 크게 줄어들어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에 테이트 갤러리에서는 정부에만 의존하지 않고 사기업과 개인의 후원제도를 마련하였고 1984 년에는 50 대 이하의 영국 거주자를 대상으로 수여하는 터너상(Turner Prize)을 제정하여 젊은 작가들의 양성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본 연구의 주제인 런던의 미술 공간 구성에서 볼 때, 이러한 다층적인 작용과 연계된 영국 현대미술의 특성과 그 발전은 이스트 엔드(East End) 지역에 대한 발전 정책 없이는 실제적으로 결코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II-1. 런던의 미술 공간

1960 년대 이후 동부 지역(East End)의 발전

레이첼 화이트리드(Rachel Whiteread)의 <House>(1992)는 빅토리아 시대에 지어진 집의 내부를 뜬 한 덩어리의 콘크리트 주조물이다. 화이트리드가 터너 상을 수상했던 1993 년 같은 해 10 월 설치하여 1994 년 논쟁 가운데 철거될 때까지, <House>는 충격적인 이스트 엔드의 분쟁, 혼란, 빈곤에 관한 긴 역사를 묵상하게 하는 포커스를 제공하였다. 1994 년, 외부 여론을 제압하고 이 지역 위원회에 의해 결정한대로 이 화이트리드의 작품을 철거하였는데, 사실 당시 언론은 작품에 대하여 분노한 지역 여론과 이와 대비적인 지역적 동감으로 양분되어 극단적 논쟁의 상태를 보였다.56) 작품에 대한 이 지역(Bow)57) 대표의 공격은 이것이 슬럼을 철수하는 지역에 위치한다는 점, 건강한 녹색 지역을 막아버린다는 점, 그리고 불건전하고 밀실공포를 야기하는 과거에 대한 기념이 된다는 점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58) 더불어 예술가와 그 작품을 그 지방 공동체에 이질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가치들을 들여오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대두되었다. 런던의 이스트 엔드는 영국 사회의 산업화의 발전에 따른 계급 갈등과 인종문제, 그리고 과격주의(radicalism)등을 집약적으로 상징한다.59) 화이트리드의 <House>는 이와 같은 기억을 야기시켜 사회, 문화적 소통체계에서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문제시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다시 말해, 그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효과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런던에서 궁핍, 빈곤, 노동 계층 문화의 장소로 인식되어왔던 이스트 엔드(East End) 지역은 그 문화적인 위상에서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오늘날 이스트 엔드의 지역은 유럽에서 미술가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런던 미술계에서 주변지가 아닌 중심지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이면에는 이 지역 대지 및 건물의 공급과 수요에 관한 경제적 문제가 개입된다. 이를 간단히 언급할 필요가 있다. 2 차 세계 대전 이전에 이스트 엔드는 대규모 항구가 있는 복잡한 노동 계층 지구였으나, 1970 년 무렵이 되면서 인구가 줄어들고 독(dock)이 폐쇄되었다. 공장과 집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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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괄적인 재개발 계획이라는 명목으로 텅 비게 되었고 이런 폐기처분된 이스트 엔드의 건물들이 최저 가격으로 떨어지면서 미술가들에 의한 수요 증가를 맞이하게 되었다.

물론 이스트 엔드와 미술가들의 관련이 단순한 경제적 문제였던 것은 아니었다. 1950 년대의 폭격 피해와 1980 년대 도시 쇠퇴로 인해 손상된 이스트 엔드 특유의 광경은, 자신의 미술을 전쟁 이후 런던에서의 삶의 리얼리티와 관련시키기 위해 새로운 방식을 찾고 있는 미술가들에게 적합한 것이었다. 모든 소외된 자들을 허용하는 오랜 전통을 가진 이 지역의 사회적 구조는 비제도권 문화와 동일시하려는 미술가 세대들에게 공감적인 본거지를 제공한 셈이다.

1970-90 년대 30 년 동안 미술가들이 이스트 엔드로 이동했던 숫자가 매우 많았기 때문에, 전쟁 이전 이스트 엔드의 예술적 활동은 종종 가려지곤 하지만, 1880 년대에 설립된 이후 1904 년부터 이스트 엔드 지역 내 아마추어 미술가들을 위해 연례 전시회를 열었던 화이트채플 아트 갤러리(Whitechapel Art Gallery)는 이 지역의 미술가들을 격려했었다.60) 이스트 엔드와 영국 미술체계와의 관련성에 결정적 역할을 한 화이트채플 갤러리는 지역 미술가들의 작품을 고무시키고 거주자들에게 미술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을 고무시키고자 하는 목표를 지녔다.61)

그리고 이스트 엔드가 런던의 주요 미술지역이 되기까지에는 미술가들의 공간 확보를 위한 조직들이 작용하였음을 간과할 수 없다. 대표적인 것으로 ‘스페이스(SPACE)’62)와 ‘에이큼(Acme)’을 들 수 있다. 먼저 스페이스는 선창지구에 있는 창고 작업실의 개척 조직이라 할 수 있는데 미술가들에 의해 1968 년 설립되었다. 엄청난 크기의 캔버스를 사용한 뉴욕 화파처럼 큰 규모의 미술을 위한 대규모 작업실을 필요로 했던 런던의 미술가들은 폐쇄된 런던 선창지구(Dockland)에서 적합한 장소를 찾아내었던 것이다. 수용 공간을 찾는 미술가들에게 또다른 모델이 되었던 조직은 에이큼(Acme)으로, 이는 레딩 대학(Reading University) 미술학과의 가난한 졸업생들이 런던에서 살 수 있는 공간을 찾을 수 있게 할 의도로 1972 년에 설립되었다. 스페이스가 작업실 공간을 위한 조직이었던 반면, 에이큼은 그 초기 단계부터 작업 공간 뿐 아니라 주거 제공에 관한 조직이었다.

스페이스처럼 이 조직도 런던 시의회(Greater London Council: GLC) 소유의 주택을 통해 일했는데, 이 주택들은 철거를 기다리는 동안 비어있던 곳이다.63)

오늘날, 수요가 공급을 넘어서는 현상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에 이스트 엔드에서 누구나 이 두 조직을 통해 작업실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스페이스와 에이큼이 미술가들에게 합작적인 자립의 두 가지의 모델을 제공했다면, 세 번째 모델은 1973 년에서 1980 년 사이에 서쪽 강둑 위 버틀러스 워프(Butlers Wharf)의 빈 창고에 이주한 미술가들의 집단 거주지를 들 수 있다.64)

이스트 엔드 지역의 발전은 이렇듯 공공 미술 정책에 힘입어 왔고, 오늘날 영국을 대표하는 일군의 젊은 작가들은 이러한 런던의 공간적 구도에 영향 받았다. 화이트리드(Rachel Whiteread)는 터너 상(Turner Prize)의 선발 후보자 명단에 올랐던 이스트 엔드 연고의 많은 미술가들 중 한 명이었다. 이스트 엔드와 관련된 터너 상 후보자에는 이전에 버틀러스 와프 미술가였던 리처드 윌슨(Richard Wilson 1988 년과 1989 년 선발), 이 지역 시립 아파트에 거주했던 피오나 레이(Fiona Rae 1991 년 선발), 에이큼 단기임대 주택에 거주했던 코넬리아 파커(Cornelia Parker 1997 년 선발)등이 있다. 그 명단은 더 유명한 이름들을 많이 포함하며, 이스트 엔드와 1980 년대, 1990 년대 현대 미술체제와의 점진적인 연계를 두드러지게 나타낸다. 킷 웨드(Kit Wedd)는 이를 ‘새롭게 유행하는 도시적 감각과 현대 미술의 새로운 세대가 같은 방향으로 일치했던 과정이다’고 설명한다.65)

런던의 창고(warehouse) 공간은 1990 년대의 미술과 유행하는 도시적 생활양식 모두를 위한 공동 기반을 제공했다. 영향력이 큰 창고 전시는 1988 년 <프리즈 (Freeze)>전으로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가 이끄는 이 런던 동부지역의 대표적 미술 대학, 골드스미스 컬리지(Goldsmiths College)의 졸업생 그룹이 이룬 자립적인 성과였다. ‘yBa’(Young British Artists)가 스스로 그들 자신의 전시회를 준비하고자 했던 것은 같은 취향의 미술가들 사이에서 전시하고자 하는 요구,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스스로의 대중적 이미지를 관리하고자 한 희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또한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 데미안 허스트, 마크 퀸(Marc Quinn)을 포함한 yBa 를 세계적 주목을 받게 한 전시는 로얄 아카데미의

<센세이션(Sensation)>(1997) 전시였다. 이 전시에 대해 비평계는 격분했으나, 이는 이스트 엔드가 런던에서의 중요한 미술가 지구라는 명성을 드높였다.

고급 주택화, 재개발 등에 대한 압력이 지난 30 년 간 이스트 엔드에서 강하게 발휘되어 왔기 때문에, 미술가들은 이런 경제적 침입과 공간을 놓고 다투어야 했다. 미술가들이 도시 재개발의 과정에서 주도자라는 것과 그들이 가는 곳에는 패션, 돈, 경제적 발전이 따른다는 것은 어느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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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트 엔드에서 공적 부문 재정 지원과 개입주의적 계획 결정에 의해 진행된 역할도 매우 컸다. 따라서 1980 년대-1990 년대 동안 런던 선창지구 발전 단체(London Docklands Development Corporation)가 공공 미술에 대해 과감한 지원을 행한 중요한 정책과 더불어, 문화적 지역으로서의 혹스턴(Hoxton) 지역의 지원안은 관할 해크니 의회의 활동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66)

오늘날 영국의 현대미술이 가진 특징은 그것이 형성, 발전되는 도시 환경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최근 yBa 등 젊은 신진 작가들이 보여주는 미적 의도와 그 표현은 영국 미술이 처해왔던 지역적, 경제적, 문화적인 맥락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이들 작가와 직결된 런던 동부지역의 사회, 경제적 특성 그리고 이 지역에 대한 국가의 정책적 개발, 또한 미술관 체제 및 교육은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본 연구가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이스트엔드 지역이 갖는 역사적 의미와 그 사회적 상징성은 여러 세대를 걸쳐 축적된 것이며, 사실 20 세기 중반 이후 영국 현대미술의 발전에 깊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오는 글>

그리하여 우리는 2000 년, 뱅크싸이드(Bankside)에 설립된 테이트 모던(Tate Modern)으로 돌아온다. 1992 년 이 미술관의 프로젝트를 공표했을 때, 런던에 현대 미술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미술관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 프로젝트는 런던이 유럽의 주요 재정적 중심으로서의 그 위치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는 점을 부각하였다.67)

여기서 영국의 현대미술이 가진 도시 공간과의 연계가 함축적으로 녹아 있는 미술관의 양상을 보는 듯 하다. 산업사회의 공업화의 역사적 흔적을 가능한 살리면서 미술관의 권위주의적 체제를 자체적으로 도전하는 공간 설정이 그러하고, ‘고급 예술’의 외양을 의도적으로 흩트려 계급적 분리를 완화시키려는 사회적 유연성이 그러하다. 영국 현대미술에 대한 줄리앙 스탈라브라스(Julian Stallabrass)의 ‘High Art Lite’라는 표현이 이를 위트 있게 나타낸다.68) 지역적인 상징성을 빌어 말하자면, 부유한 기득권 세력의 런던 서부지역은 역사적으로 경제적 빈곤의 대명사인 동부지역(이스트엔드)의 도전과 혁신의 정신성 없이는 오늘날 아방가르드의 역동성을 결여하는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살펴보았듯 런던의 지역적 추이가 서부에서 동부, 그리고 최근에는 런던의 남동부 지역으로 움직이는 것은 문화적 욕망의 변화를 또한 반영한다고 하겠다.

미술과 도시 공간의 문제에서 핵심적 내용으로 지역성과 대표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무대에서 영국을 대표하면서도 지역적 특성을 잃지 않기 위한 노력은 필수적이다. 테이트모던의 경우는 지역성의 강조, 즉 그 지역 ‘공동체’로서의 역할은 이 기관의 정책에서 중요하다. 다수의 거주자가 공공 지역 거주지에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또한 관광객의 홍수를 대처해야 했다. 디렉터인 니콜라스 세로타(Nicholas Serota)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우리는 뱅크싸이드가 단순히 도시의 확장이 되는 것을 피하기 원한다. 즉 강 건너 북부 런던에 포괄되는 것이 아니기를 말이다. ̋ 69)

사실, 테이트 모던은 밀레니움 기금(Millennium Fund)에서 5 천만 파운드를 확보하였고 2400 개의 직업을 산출시켰고 공동체와의 연계를 굳히는 것에 신경을 썼다. 또한 지역 주민에 대한 혜택과 관광객 센터 설립, 지역 발전관 임명, 지역 단체에 대한 자문 등의 일에 소홀히 하지 않았다. 동시에 이 미술관은 ‘지역’ 미술관으로서의 역할과 동시에 영국의 대표적 미술관으로 뉴욕의 현대미술관(MoMA)과 파리의 퐁피두(Pompidou) 센터에 비교되는 기관으로 부각되었다는 점이 성공적으로 평가된다.70)

새 테이트는 그 자체로 매력적인 장소로 사람들이 즐길 수 있어야 했고 그러면서도 예술을 압도하는 건물이 아니어야 했다. 균형잡힌 접근이 강조되었는데, ‘우리는 미술관의 변화하는 사회적 역할을 인식한다. 방문객은 미술관의 스펙터클한 측면을 필요로 하지만 미술관은 슈퍼마켓으로 변해서는 안된다.’는 말이 이를 대변한다.71) 테임즈강 남동부의 사우스워크 의회(Southwark Council)는 이 프로젝트를 외부에서 지원했는데, 이 지역의 재개발을 하나의 ‘문화적 영역’으로 지정해 상점, 레스토랑, 사무실, 주택 등을 포함할 것을 추진하였다. 이 지역은 비교적 적은 변형을 거쳤다. 보존과 변혁이라는 두 가지 대립적 맥락을 포용하는데 균형을 잃지 않으려는 런던 시의 정책적 원리가 잘 반영되었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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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영국미술에 영국적인 것이 있는가?’는 연구 전반에 걸쳐 계속 품는 의문점이다. 오늘날 많은 영국미술은 그 소재를 영국의 매스 미디어와 생활의 일상사에서 취하는 것이 두드러진다. 앤드류 코지(Andrew Causey)는 50 년대 후반 미국의 모더니즘에서 주장하듯, 미술을 삶과 분리시켜야 하고 미술작품을 그 자체 대상으로 인식하려는 미학은 영국 문화의 미적 특성과 맞지 않았다고 지적하였다.72) “영국에서는 미술과 삶을 분리시키지 않는 감각이 두드러진다”는 그의 언급은, 그것이 20 세기 중반의 영국을 지칭하는 말인 만큼, 2 차대전 이후 런던을 중심으로 펼쳐진 리얼리즘 맥락의 미술에 대한 전반적 이해를 돕는다. 이런 맥락에서 런던의 도시 공간이 갖는 영국 현대 미술과의 관계는 더욱 밀접할지 모른다. 본 연구는 이런 가정 하에, 오늘날의 영국 미술의 특징을 런던의 대도시 공간과 연관시켜 연구하려는 의도를 가졌다. 요컨대, 도시 공간을 둘러싼 특정한 지역적 정책, 이와 연관된 건축 운동, 그리고 넓은 범위에서 당시 사회 □ 문화적 정향은 작품의 표현에 실제적으로 개입하고 작용하였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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