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영정과 단기연호를 중심으로-
임채우
*
70)Ⅰ. 서론
Ⅱ. 단군상 승인과 단기 연호의 문제 (해방후-1970년대) 1. 대종교 국조단군상 승인 (1949)
2. 현정회의 단군상과 단군영정 중복 승인 (1977) 3. 단기연호의 제정 (1948)과 대체 (1961)
Ⅲ. 단군성전 및 국조 단군상 건립 문제 (1980년대-현재)
1. 서울시 단군성전 건립계획 (1985) 및 국사교과서 기술논란 (1987) 2. 국조단군상 건립문제 (1999)
Ⅳ. 근현대 단군 인식의 변화 문제
【국문요약】
해방 후 대한민국 건국초기에는 정부나 국민은 모두 단군의 사상과 이념을 계승한다는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정부는 개천절을 국경일로 제정하고 단기연호를 사용하며 홍익인간을 교육이 념으로 채택하였고, 국조인 단군영정을 표준상으로 공인하였다.
*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국학과 교수
그러나 60년대 근대화의 구호속에서 단기연호는 西紀로 대체되었 다. 80년대에는 정부에서 건립하려던 국조단군성전계획도 취소되었 으며, 90년대에는 시민운동단체에서 건립한 국조단군상도 수난을 겪 게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개천절마저 국경일으로서의 위상을 잃 어버리고 일반공휴일의 개념으로 취급되는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경제개발을 최우선시한 급진적인 서구화의 물결 속에 단군은 점점 하나의 특정 宗派에 한정된 숭배물로 축소되었고, 이런 과정 속에서 단군상은 國祖로서의 위상을 상실한채 종교분쟁의 대상 물로 전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주제어: 대종교, 현정회, 단군상, 단군영정, 나철, 정훈모, 개천절
Ⅰ . 서론
우리 민족에 있어서 단군은 國祖로서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일제 강점기 같은 혼란한 시대에는 위난극복의 구심점으로 작용하였다.
신규식(1879-1922)은 단군이 태백산 단목 아래 강림했다는 한줄기 기 록이 없었다면 한민족은 다른 민족에게 종속되고 말았을 것이라고 한 바 있다.
1)
암울했던 구한말 일제강점기에 단군은 그야말로 민족 을 지켜주는 희망의 등불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기세등등 하던 청나라도 소중화를 자처하던 조선도 제국주의자들의 대포와 군 함 앞엔 모두 종이호랑이처럼 붕괴되고 난 그 혼돈 속에서, 한번 단 군이 등장하자 민족의 구심점으로서의 역할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그래서 단군숭배의 기풍은 대종교라는 민족종교를 탄생시키면서 정 치와 사상 종교간의 모든 종파를 넘어서 당시대를 이끄는 범민족 지
1) 신규식 저, 민병하 옮김, 한국혼, 박영사, 1975, 38쪽 참조.
도이념의 바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운동과 대한민국의 건국은 단군을 중 심으로 한 대종교에 빚을 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발족할 때 총령 7인중 세 명의 총령(이동녕, 이시영, 신규 식)이 대종교인이었고, 임시정부의 의정원 29인 중 대종교인이 21명 이었다고 한다. 이외에 대종교인으로 우리 독립운동사에 남아 있는 대종교 인물을 대략 들어보면, 박은식, 신채호, 김좌진, 김동삼, 이상 룡, 이상설, 안재홍 등을 위시해서 동아일보 창간에 깊숙히 개입한 유근이나, 국학 연구의 선구자역할을 했던 최남선도 대종교인이었고 북로군정서를 세운 서일, 한글학자인 주시경, 권덕규, 이극로, 김두봉 도 대종교인이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초대 내각에는 대종교 인사가 여럿 포함되 었다. 가령 부통령 李始榮은 대종교인들과 함께 조선국권회복단이라 는 독립운동 비밀결사를 조직했고,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으며 해방후 단군의 역사서인 단기고사의 발간에 간여하기 도 했다.
2)
국무총리 李範奭은 만주 신흥무관학교 교관이며 북로군정 서 소속으로 청산리 전투에 참여했고 광복군 사령부 참모장을 지냈 다. 대종교 총전교를 지내기도 했던 초대 문교부장관 안호상은 대종 교의 영정을 표준영정으로 지정하고, 단기연호를 제정하는데 주도적 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또 정인보 감찰원장, 안재홍 민정장관도 대 종교인이었다.이렇게 단군 대종교는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 고, 해방후에는 단군 숭모의 정신을 계승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홍 익인간의 이념을 계승하고 단기연호를 제정하고 국조단군상을 승인 하는 일련의 조치는 음으로 양으로 이 대종교인들의 노력이 크게 작 용했을 것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2) 大野勃 原著; 金海菴, 李華史 飜譯. , 檀奇古史(朝鮮福音社, 1949)를 교열하 였다.
그러나 6,70년대에 단기 연호 및 표준국조영정 제정등에 대한 정 부의 일련의 조치나, 8,90년대 단군성전 및 국조단군상 건립 문제 및 최근의 개천절 요일 지정제 등을 둘러싸고 빚어졌던 사회적 갈등을 볼 때 이전의 단군 숭배 전통과는 많은 변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본고에서는 이런 맥락에서 檀紀연호와 단군 國祖 표준영정을 중심으 로 해방후 우리 사회의 단군 인식의 변천과정과 문제점에 대해 고찰 하려고 한다.
Ⅱ . 단군상 승인과 단기 연호의 문제 (해방후-1970년대)
1. 대종교 국조단군상 승인(1949)
단군 영정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태백일사에 보인다. 여기에서 는 아갑이 등극해서 환웅과 치우와 단군왕검의 세분 시조의 상을 반 포하여 관청에서 봉숭하게 했다고 한다.
3)
태백일사의 위작논쟁에 대해서는 일단 논외로 한다면, 신시개천 3307년 B.C.591년에 등극한 불한세가 57대 아갑임금이4)
치우 환웅과 함께 단군의 상을 그렸다는 것이다. 이후에는 신라 진흥왕때의 명화 솔거(560-?)에 의해 단군 영 정이 그려졌다는 설이 동사유고등에 전해진다. 그 이후 조선시대 에 들어와서는 성리학적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면서 단군의 위상은 현 격하게 축소되었다. 다만 평양의 사당에서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제 사하기는 하지만, 단군상에 대해서는 구월산 삼성당에 모신 단군 木 像이 있었다거나 태안의 태을전에 단군상을 모셨다는 설이 전해지고3) 태백일사 「번한세가」: 戊午 子阿甲立 庚午 天王 遣使高維先 頒桓雄蚩尤檀 君王儉三祖之像 以奉官家.
4) 단학회연구부, 환단고기 3 대배달민족사연표, 코리언북스, 1998. 270쪽 참조.
는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5)
그러나 조선 중후반기부터 일부 학자들에 의해 고대역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단군에 대해 재인식하기 시작되었고, 조선이 멸 망하는 위기에 처한 구한말부터는 단군은 민족의식과 독립운동의 상 징으로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되었다. 특히 그 당시 우리 사회 전체가 종교를 초월해서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상징으로서 단군을 받아 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이후로 종교적 신앙과는 별도로 國祖 존숭이라는 민족적 報本意識에서 개인이나 사회단체의 단군사묘 설립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6)
20세기 초 대종교를 통해서 그간 실전되어 있던 단군 영정이 전해 졌다. 羅喆(1863∼1916)과 鄭薰謨(1868-1943) 등은 1910년 단군교 重 光式을 갖고 단군 영정을 봉안하므로써 단군 영정이 천하에 공개되 었다. 대종교에 단군 영정이 전해지게 된 내력에는 두가지 설이 있 다. 하나는 대종교중광육십년사에 나오는 1908년 12월 31일 일본 동경에서 杜一白(호 彌島)이 羅喆을 찾아와 전해주었다는
7)
설이고, 다른 하나는 대종교요감에 나오는 1910년 3월 강원도 석병산 도인 高上植(호 空空眞人)이 경성(서울)으로 나철을 찾아와 전해주었다는8)
2가지 설이 있다. 대종교중광육십년사와 대종교요감은 모두 대 종교총본사에서 발행한 중요한 敎籍임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에서 혼 선이 빚어지고 있다.특히 대종교요감에 白南奎(1891-1956)가 증언한 내용을 보면 강 원도 석병산에서 왔다고 하는 高上植 空空眞人이라는 노인이 “신라 의 명공 솔거가 그려서 오늘까지 전해온 유일본”이라고 하면서 단군 영정을 전해주었다고 해서 솔거가 그렸다는 설과 연관을 짓고 있다.
9)
5) 임채우, 「단군영정의 기원과 전수문제」, 선도문화 11권, 2011, 13-20쪽 참조.
6) 이강오, 한국신흥종교총람, 335쪽 참조.
7) 대종교총본사, 大倧敎重光六十年史, 1971, 93쪽.
8) 대종교총본사, 대종교요감 개천4444(1987), 2쪽.
이와같이 대종교에서 봉안된 단군 영정의 기원에 대해서는 두가지 의 엇갈린 설이 존재하고 있으며, 영정을 모사한 화가에 대해서도 지 운영,김은호,안중식 등의 여러 설들이 있어서 혼란을 더하고 있다. 이 에 대해 필자는 정황상 지운영을 최초의 모사자로 추정하면서 1910 년 나철에 의해 정식으로 봉안된 영정인 부여박물관 소장본을 중심 으로 몇가지 중요한 영정들을 사계의 권위자로부터 감정받을 것을 제안하였다.
10)
이 영정 실물에 대한 필적감정은 단군 영정 전수 과정 및 내력에 관한 현재의 혼란한 설들을 정리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 서가 되기 때문이다.아무튼 비장되어 오던 단군의 영정이 대종교 중광의 핵심인물들에 게 한말에 전수되어 1910년 8월 21일 국치일 전날 정식으로 봉안함 으로써 세상에 다시 등장했다. 그 후,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나철 선 생이 만주로 피신하면서 총본사를 옮겨가자, 일제의 수색을 피하여 湖石 姜虞(1862∼1932)는
11)
단군의 영정을 고향인 부여에 모시고 가9) 대종교총본사, 대종교요감 개천4444(1987), 2쪽.
10) 졸고, 단군영정의 기원과 전수문제, 28-29쪽 참조.
11) 민족항일기의 대종교 지도자.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순서(舜瑞), 호는 호석 (湖石). 충청남도 부여 출신. 진구(鎭求)ㆍ철구(銹求)ㆍ용구(鎔求)의 세 아들 을 두었는데, 모두 정교(正敎)와 대형(大兄)이란 호를 받았다. 어려서부터 한 학을 공부하였고 1895년부터 9년간 함경북도 성진ㆍ길주ㆍ경원 등 세 곳의 감리(監理)를 역임하였다. 1909년 대종교가 조직되자 입교하였다. 1911년 지 교(知敎), 1914년에는 상교(尙敎)로 승진되어 총본사의 총전리(總典理)로서 5 년동안 교문의 최고행정책임자의 업무를 수행하였다. 1916년 정교(正敎)로 승질됨과 동시에 대형의 호를 받았으며, 1918년에는 교주를 제외하고는 최 고위 직책인 사교(司敎)에 임명되었다. 1921년에 남도본사(南道本司)를 부설 (復設)하고 도사교위리(都司敎委理)로서 3년간 시무하였다. 특히 신앙생활에 있어서, 1914년 교주인 나철(羅喆)을 대신하여 백두산 상봉에 올라 혈서로 제천하였고, 1920년에는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서, 1924년에는 마니산 참 성단(塹城壇)에서 제천수도하는 등, 교문의 사표가 되었다. 교리연구에도 진 력하여 종리문답 倧理問答ㆍ천산도설 天山圖說ㆍ제천혈고사 祭天血告辭
ㆍ일삼경 一三經(天符經解說)ㆍ애오가 愛吾歌 등의 유저가 있다. 1950 년 5월에 규범개정으로 도형(道兄)이란 호가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大倧敎
서 숨겨서 보존했고 그의 손자인 강현구에 의해서 부여박물관에 기 탁하여 현재 세상에 전해지게 되었다.
12)
강우의 영정을 1946년 당시 대가였던 지성채 화백으로 모사하게해서 대종교총본사에 봉안했는 데, 대한민국 수립 직후 초대 문교부장관이었던 안호상의 노력에 힘입어 이 지성채 모사본이 1949년 국회의 동의를 받아 대한민국 국조성상 표준본으로 공인되었다.
13)
1976년 6월 14일에는 문화공보부 장관으로부터 <문화 1740∼8790호>로 대종교 천진이 국조단군 표준성상임이 심사 승인되었고, 또 1976년 12월 28일에는 <문화 1740∼19226호>로서 단군 천진을 성상 심의위원회에서 심의하고 심 의사항대로 제작되었으며 ‘대종교 총본사에서 제작한 것만을 존중키 로 확인’한다는 국조성상 제작 확인서를 받았다.
14)
2. 현정회의 단군상과 단군영정 중복승인 (1977)
그런데 1977년에 또 다시 현정회
15)
의 단군 영정을 국가에서 공인 하므로써 단군 영정은 2가지로 존재하게 되었다. 현정회는 일제강점重光六十年史 (大倧敎倧經倧史編修委員會, 大倧敎總本司, 1971), 대종교요감 (大倧敎總本司, 197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강우 조).
12) 조준희, 단군 영정, 32쪽.
13) 대종교총본사, 대종교요감 개천4444, 2쪽.
14) 대종교 홈페이지 인용. http://www.daejonggyo.or.kr/main/?skin=busi_0310.htm 15) 현정회는 국조 단군을 숭봉하여 국민정신을 순화하고, 명현 선열의 추모사 업 및 전통, 정신문화 계승⋅발전을 목적으로 설립되어 1968년에는 대한민 국최초의 공공건물로서 단군성전을 건립하였고, 1969년 6월 27일(문공부 문 화정책과 사단법인 인가 제148호) 사단법인으로 설립 인가되었는데, 2000 년:5월29일에 문화관광부 비영리법인으로 등록하였다(제 2000-20호).
기에 왕조에서 지내오던 나라제사가 끊어지자 천안시 북면 오곡리 봉황산에서 이한철(李漢哲) 옹의 지도로 이숙봉(李淑峰) 여사 등이 모여 숨어서 제사를 지내던 데에서 기원한다. 이들은 광복을 맞아 남 산에 단군제단을 설치했다가, 한국전쟁 후 사직공원 한편에 있던 건 물을 단군 성전용으로 매입했다. 인허가로 인한 갈등과 단군성전 건 립 반대세력에도 불구하고, 단군성상을 3차례 조성하는 등 우여곡절 을 겪으면서 이곳에 성전을 건립한지 9여 년 만에 1968년 단군성전 및 사직기념관을 완공한 다음에 서울시에 기부하였다.
16)
그리고 1968년 8월 24일 현정회를 결성하여17)
단군성전을 관리하도록 위임 했다. 단군성전은 1973년 5월에 서울특별시로부터 보호문화재로 인 정받았고, 1989년에 개축하였다.18)
그러던 중 전국에 흩어져 있는 단군 영정의 모습이 각기 달라 혼 돈이 생기자 표준영정을 제정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되어 정부는 1977년 단군성전 창건할 때부터 조성하여 모셔온 단군소상을 국민경 모단군표준상으로 지정하고 단군영정 제작을 현정회에 의뢰했고 홍 석창화백에 의해 그려진 영정이
19)
1978년 8월 28일 정부 표준영정20)
16)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이숙봉 이정봉(李貞峰) 이희수(李喜秀) 세자매는 天華佛 敎의 창교자이기도 하다. 이 중 이희수는 불교사학자로서 교리를 마련했다.
천화불교는 대일여래를 주존으로 하면서 토착신앙과 습합된 종교이다. 이종 익⋅이희수 등, 한국불교 유가밀교, 천화불교포교원, 1968 참조.
17) 현정회에는 이병도 김상기 이희승 김범부 윤태범 이항녕 신석호 등 국학자 들이 대거 가담하였고, 설립 1년뒤인 1969년 6월 27일 문화공보부에 사단법 인으로 등록하였다. 이는 종교단체는 아니지만 단군과 사직 및 역대 선열들 의 위패를 봉안하고 奉祀하는 기관이다. 김재경, 한국문화사, 디지털교보 문고, 2007. 103쪽 인용.
18) 현재 단군성전은 전체 대지면적 241,99평(800,7m)에 성전이 16평(52,92m), 정 문인 내외삼문이 5.63평(18,64m), 관리실이 32.56평(107,64m) 등으로 이루어 져 있다. 성전편액인 단군성전은 김응현(金應顯), 사단법인현정회⋅백악전⋅
단군성전⋅사직기념회관의 간판은 이현종(李賢鍾), 홍익인간의 글씨는 원중 식(元仲植) 그리고 이화세계는 손경식(孫敬植)이 각 쓴 것이다.
19) 현정회의 영정은 1969년 초상화가 김종래 씨의 단군성상을 참고로 불교조각가
현정회 단군 영정 으로 지정받았다.
21)
사실 그동안 각 종교.사회단체에서 단군 영 정을 사용해왔으나, 그 기본 모델은 대종교본 이었다. 제헌국회에서 대종교본이 표준으로 승 인되었고, 1976년도 정부에서도 대종교총본사 에서 제작한 것만을 존중한다는 약속을 했으 나, 바로 다음 해에 현정회의 영정을 중복 승인 해줌으로써 표준영정이 2종이 존재하는 혼란이 야기되었다.
정부측은 현정회의 것은 경모의 대상이고 대 종교의 것은 신앙의 대상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22)
이에 대해 대종교 의 영정은 종교적인 면이 강하기 때문에 일반인이 접근하기가 다소 어렵다는 판단에서 현정회의 신청을 승인했으리라고 해서 수긍하는신상근 씨가 동상을 제작했는데 그것을 기준으로 홍석창 화백이 완성한 것이다. 20) 표준영정이란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이 동상영정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제 작한 영정에 대하여 정부표준영정으로 지정한 영정을 의미한다. 문화체육관 광부는 우리 역사상 나타난 위인, 사상가, 전략가 및 우국 선열로서 민족적 으로 추앙을 받고 있는 선현들의 동상ㆍ영정의 난립을 예방하고자 선현의 동상 및 영정을 제작하고자 하는 중앙행정기관 및 지방자치단체와 그 산하 공공단체의 신청에 따라 동상영정심의위원회를 통해 제작과 관련된 전문적 인 사항에 대한 권고 및 지도를 하는데, 그동안 73년 충무공 이순신의 표준 영정을 지정한 이후 2005년 12월까지 총 77명의 선현에 대한 표준영정을 지 정했다. 당초 이 사업은 이 충무공 영정을 통일하라는 대통령지시(73.4.28) 및 국무총리지시(73.5.8)에 의거한 동상건립 및 영정제작에 관한 심의절차 공고(73.6.30)를 근거로 하여 시작이 되었으나, 현재는 문화체육관광부 동상 영정심의규정(제정 1996. 5.21 문화체육부훈령 제60호/위 공고는 폐지)을 근 거법령으로 하여 추진되고 있다.
21) 현정회는 다시 홍석창 화백에게 단군의 치세사상인 홍익인간ㆍ이화세계의 정신과 국조로서의 위엄과 치우침이 없는 상을 갖춘 영정 제작을 의뢰했고 제작된 영정은 문화재 전문위원회(영정분과)의 3차에 걸친 수정과 심의를 거쳐 영정을 완성해서 다시 2번째 표준영정으로 지정받게 되었다.
22) http://kr.blog.yahoo.com/gaundekr/777
견해도 있지만,
23)
국가에서 표준으로 공인된 단군 영정의 공신력이 실추되었을 뿐 아니라 일반 국민으로서도 혼란을 느끼지 않을 수 없 게 되었다.3. 단기연호의 제정 (1948)과 대체 (1961)
단군 기원을 기록한 문헌으로는 삼국유사와 제왕운기가 가장 오래된 것이며, 후대의 것으로는 세종실록 지리지ㆍ동국통감, 權 擥(1416-1465)의 應製詩註 등이 있다. 이들의 기록을 보면 한결같지 는 않다. 먼저 一然(1206-1289)의 삼국유사 紀異편에서는 魏書를 인용하여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어 도읍을 阿斯 達에 정하고 나라를 개창하여 조선이라 일컬으니 중국의 堯임금과 같은 때”라고 했고, 함께 인용한 古記에는 “단군왕검이 요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인 庚寅년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일 컬었다.”고 했다. 一然(1206-1289)은 이 경인년에 대해 註를 달아 “당 고의 즉위년은 戊辰이니
24)
50년이 되는 해는 丁巳로서 경인은 잘못 된 것 같다.”고 하였다. 이에 따르면 단군기원인 정사년은 기원전 2284년이 된다.李承休(1224-1300)의 帝王韻記 東國君王開國年代에는 帝釋天의 손자 단군이 帝堯와 같은 무진년에 즉위하여 殷나라 武丁 8년 을미 에 아사달산에 들어가 산신이 되었는데, 그 동안 나라를 다스린 기간 이 1,028년이라 했다. 이승휴의 서술에는 연대상 잘못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주나라 무왕 원년은 기묘년으로 서기전 1122년에 해당되는 데, 이로부터 단군이 신이 되고 나서 기자가 나라를 세우기까지의 기
23) 김정, 단군의 진짜 얼굴을 찾습니다: 제각각 단군 초상 단일화부터 하고 보 자, 신동아 인용.
24) 중국사서에서도 문헌에 따라 요가 즉위한 해에 대해서는 차이가 있는데, 司 馬光의 稽古錄과 劉恕의 資治通鑑外紀에 무진으로 기록되어 있다.
간인 164년을 소급하면 서기전 1286년이 되며, 여기에 다시 단군이 나라를 다스린 기간 1,028년을 가산하면 서기전 2313년이 된다. 이것 은 제고, 즉 제요가 나라를 세웠다는 서기전 2333년보다 20년이 늦다.
고려사 열전에서 白文寶(?-1374)는 공민왕에게 글을 올려 단군기 원을 언급한 부분이 있다. “하늘의 기수(氣數)는 순환하여 700년이 한 소원(小元)이 되고, 3,600년이 쌓이면 한 대주원(大周元)이 되니, 이것이 황제(皇帝)와 왕패(王覇)의 치난흥쇠(治難興衰)의 기회가 됩니 다. 우리 동방은 단군부터 지금(1362년)까지 이미 3,600년이므로 주년 (周年)의 기회가 됩니다.”
25)
그러나 백문보가 언급한 단군기원은 BC2238년으로 현재의 단기(BC2333년)와 연대가 다르다.세종실록 세종 18년 12월 정해조에 전 判漢城府事 柳思訥(1375- 1440)이 상서한 내용에 “신이 世年歌를 상고해 보건대 단군이 처음 에는 평양에 도읍했다가 뒤에는 白岳에 도읍했으며, 은나라 무정 8년 을미 아사달산에 들어가서 신이 되었는데, 그 노래에 이르기를 1,048 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고 지금도 사당이 아사달에 있다고 하였습니 다.”라고 한 것을 보면 제왕운기에서 단군이 나라를 다스린 기간이 1,028년이라고 한 것은 1,048년의 잘못으로 보이며, 서기전 2333년이 합당하다.
단기 연대를 확정적으로 서술한 것은 徐居正(1420-1488)의 동국통 감이 최초이다. 여기에서 단군이 朝鮮을 연 해가 唐堯 戊辰年(즉 BC2333년)이라고 분명하게 언급했다.
26)
25) 高麗史112卷-列傳25-白文寶: 今當喪亂之後民不聊生宜霈寬恩以惠遺黎. 且天 數循環周而復始. 七百年爲一小元積三千六百年爲一大周元. 此皇帝王覇理亂興 衰之期. 吾東方自檀君至今已三千六百年乃爲周元之會. 宜遵堯舜六經之道不行 功利禍福之說. 如是則上天純祐陰陽順時國祚延長. 願念睿廟置淸燕寶文閣故事 講究天人道德之說以明聖學. 且鄕曲皆正則國家可理.
26) 부다피아, 2011.10.12.http://buddhapia.com/_Service/_ContentView/ETC_CONTENT_
2.ASP?pk=0000958014&sub_pk=&clss_cd=0002188467&top_menu_cd=00000007 28&menu_cd=&menu_code=0000006478&sub_menu= 참조.
군주가 자신의 통치 年次를 표시하는 연호는 중국에서 처음 시작 됐다. 漢 武帝 때 사용된 ‘建元’이 최초의 기록이다. 우리나라의 최초 의 연호는 광개토대왕비에 기록돼 있는 ‘永樂’이다. 그후 삼국시대부 터 고려 초까지 부분적으로 연호제가 사용되어 왔다. 우리나라의 독 자적인 연호는 중국과의 외교관계 영향으로 거의 쓰여지지 않고 중 국 연호를 주로 사용하였다. 조선왕조에서는 전적으로 중국의 연호 를 사용하였으나, 고종 말 1896년을 建陽 1년으로 하면서 자주적 연 호로 전환하였다. 1897년(고종 31)에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연호도 光武로 고쳐 사용하였고 순종이 등극하면서 ‘隆熙’를 쓴 것이 마지막이다. 1909년(융희 3)에는 大倧敎에서 단군왕검이 즉위한 BC 2333년을 기원 원년으로 삼는 단기를 사용하였는데,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 연호가 단절되면서 이 단기가 우리나라에 널리 퍼졌고, 임시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해오다가 해방후에 공식 적으로 단기연호를 사용하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직후에는 대한민국을 연호로 쓰다가 안호 상 문교부장관의 주도로 단기연호가 제정되었다. 그 제정경위에 대 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1948년 8월 5일 이승만 대통령실에서 열린 첫 국무회의에서 연호문제가 제안되었다. 이 때에 간지(干支) 서기(西紀) 민국(民國) 연호 중에서 택하자는 주장이 나왔지만 결론 이 나지 않았다. 그러자 안호상 문교부장관이 국무회의가 끝난 후 이 대통령을 따로 찾아가 단기를 사용할 것과 개천절을 국경일로 삼자 고 제안했다. 그 이유로 일본 기원 역사를 이길 수 있는 것은 단기 연호밖에 없다고 설득하자, ‘그것 좋지. 독립선언서에도 단기연호를 쓰지 않았는가’하여 결국 단기연호가 결정되었다.”
27)
그래서 1948년 9월 25일에 대한민국 법률 제4호 ‘연호에 관한 법률’에서 “대한민국 의 공용 연호는 단군기원으로 한다”고 정하므로써 단기가 대한민국 27) 노길명 외, 한국민족종교운동사, 민족종교협의회, 2003, 230쪽 인용.의 연호로서 공식적으로 쓰이게 되었다. 연호의 확정은 국가의 정체 를 알리는 것으로, 단기(檀紀)를 대한민국의 공식적 연호로 설정하여 법률로 “대한민국의 공용 연호를 단군기원(檀君紀元)으로 한다”라 명 시함으로써, 일반 공문서와 사문서 등에 단기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5.16군사혁명이 발생한 뒤 혁명정권위원회에서 1961년 12 월 2일에 폐지 법령이 선포되었다. 이로써 1962년 1월 1일부터는 단 기의 공식적인 사용이 중단되고, 西紀를 공용 연호로 쓰게 되었다.
연호에관한법률
[시행 1962.01.01] [법률 제775호, 1961.12.02, 폐지제정]
現在 使用중인 檀紀年號는 外交面을 爲始하여 一般行政에 많은 隘路와 缺點이 있어 이를 是正하기 위하여 現行 檀紀年號에서 西紀年號로 바꾸 려는 것임.
①大韓民國의 公用年號는 西曆紀元으로 함.
②이 法은 檀紀 4295年 1月 1日부터 施行하도록 함.
③이 法 施行당시의 公文書중 檀紀로 表示된 年代는 당해 檀紀年代에 서 2333年을 減하여 이를 西曆年代로 看做하도록 함.
④年代 訂正에 있어서는 公文書 訂正에 關한 타 法令의 規定에 不拘하 고 當該 公文書의 書式에 適合하도록 年代訂正印을 使用하여 訂正할 수 있도록 함.
위 법률을 보면 정부는 외교 및 행정의 측면에서 연호가 맞지 않 는데서 오는 불편을 이유로 들어서 서기연호에로의 변경했다. 서기 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중심으로 역사를 분류하는 서구중심적 연호로서, 해방되던 1945년 美군정이 시작되면서 도입되었다. 서기는 우리의 문화와는 관련이 없지만 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어서 편리하 다는 이유로 도입된지 20년만에 단기 연호를 제치고 대한민국의 연 호로 정착되었다. 단기는 현재 일부 신문사와 민족단체에서만 西紀 와 함께 병기하고 있는 형편이다.
Ⅲ . 단군성전 및 국조 단군상 건립 문제 (1980년대 - 현재)
1. 서울시 단군성전 건립계획 (1985) 및 국사교과서 기술논란 (1987)
서울특별시는 1985년 2월 자라나는 세대에게 민족혼을 일깨워 준 다는 목적으로 서울 사직공원에 있는 단군 신전을 크게 확충 건립하 기로 결정하였다. 서울시장을 단군 성전 건립위원 위원장으로 하여 87년까지 완공하기로 하고, 단군전 건립 예산은 20억원으로 하고 수 입내역으로 회비 및 찬조금 10억원, 독지가 및 정부의 보조금 10억원 으로 산정하였다.
그러나 기독교계의 강한 항의에 부딪쳐 1985년 7월 3일 이 일을 백지화하겠다고 발표하였다. 한편 1985년 10월 4일자 중앙일보에는
“지리산에 단군국조전을 세운다”라는 제목 하에 지리산 삼신봉 아래 에 있는 청학동 계곡에 사업비 10억을 투자하여 건립키로 하고 그 조감도까지 완성하였다고 보도한 바 있다.
기독교계의 거센 반대로 인하여 1985년 10월 22일 제 128차 정기 국회에서 단군 성전 건립에 대한 대정부 질의가 있었다. 당시의 이원 홍 문공부장관은 개천절을 우리 나라의 국경일로 정한 이상 국조의 단군을 인정하고 단군의 弘益人間의 정신으로 구심체를 만들어서 그 정신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정부가 단군을 종교적 차원으로 신격화해서 신전을 건립하여 종교의 대상으로 하는 것을 추진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답변하였다. 1985년 12월 19일 노신영 국무총리 는 한국개신교 주요 교단장과 기독교 기관 대표들에게 정부는 단군 신전을 건립할 계획이 없었고, 또 그런 일은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 단군성전 건립계획에 이어서 또 하나의 문제가 연이어 발생했다.
그것은 1987년도에 불거진 국사 교과서에 나타난 단군 기술문제였다.
대종교 안호상을 중심으로 한 재야 사학자들은 정부를 향해 일찍부 터 단군 신화를 국사에 편입시켜야 한다는 건의를 해오다가 1980년 대 중반 한국 사회의 식민지 사관에 대한 비판 의식이 강화되는 상 황하에서 한국사를 다시 써야 한다는 주장으로 발전했다. 국사편찬 위원회는 이를 수용해 집필 지침을 마련했는데, 그 내용에 “단군 신 화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될 것이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단군상 건립문제로 정부와 갈등을 빚었던 개신교 일부에서는 이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반발했다. 단군은 신화적 인물이며 곰이 인간이 되는 것은 역사가 될 수 없다고하여, 역사교과서에 단군 신화를 역사 적 사실로 기술하는 것을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2. 국조단군상 건립문제 (1999)
‘통일기원 국조단군상’은 시민운동단체인 한문화운동연합회가 출 범하면서 1998년 11월부터 1999년 7월까지 전국의 학교, 공원 등 공 공장소에 369기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이 단군상은 일부 기독교계의 강력한 반발을 초래했고, 일부에서는 단군상을 훼손하는 행위를 함 으로써 커다란 사회문제로 대두되기도 했다. 한 조사결과에 의하면 1999년 7월부터 2002년 3월까지 총 70건에 달하는 훼손사건이 보고 되었다.
이 단군상 건립 문제가 대두되자 한국기독교총연합회에서는 2002 년에 단군상대책위원회를 설립하고 단군상철거를 위한 세미나를 개 최했다. 여기에서 단군상대책위원회 부위원장이 발표한 내용을 보자.
“최근에 기독교 국가라 볼 수 있는 미국에 십계명비를 공공장소에 세우는 것은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에서 위헌의 소지가 있다는 견해가 지배적 이라는 보도를 본 일이 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20조 2항에는 분명히 국 교를 인정하지 않고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특정종교의 신앙의 대상으로 숭배하고 있는 단군의 상이 전국의 공공장소와 초중고교 에 360개나 세워져 있다는 사실에 1200만 기독교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 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우상숭배를 목숨걸고 반대하는 사람들입니다.”
28)
특정종교의 신앙의 대상인 단군상을 공공장소에 세우는 것은 신앙 의 자유를 해치는 위헌이며, 특히 우상숭배를 반대하는 시각을 갖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같은 세미나에서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단군상대책위원회 학술국장 은 단군상 건립기의 내용을 문제삼고 있다. “우리 역사학계에서 이미 위서(僞書)로 단정한 ‘환단고기’라는 책의 내용을 인용하여 허무맹랑 한 연대와 주장을 펴고 있다...우리나라의 기원을 ‘BC.7197년 중원 대 륙 천산에 안파견 한인(환인桓因)천제께서 하늘로부터 천부 삼인을 받아 세상에서 처음으로 나라를 세우셨으니 국호는 한국(환국, 桓國) 이다.’ 라고 적고 있다. 이 말은 우리나라의 역사가 무려 9197년이나 되고, 세상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나라가 한국이라는 표현이 아닌 가?..‘우리나라의 역사가 오래됐다.’ 라고만 하면, 그 내용이 검증되지 않은 허무맹랑한 내용일지라도 ‘애국애족’이 된다는 말 아닌가? 이것 은 ‘애국애족’이 아니라, 오히려 나라의 역사를 훼손하고 왜곡하는 일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해서 위서인 환단고기에 근거해서 조작 된 역사를 주장한다고 비판했다. 이어서 “고교 역사교과서에는, ‘단군 왕검은 당시 지배자의 칭호였다.’로 되어 있고, ‘환단고기’에는 ‘47대 에 걸친 단군’으로 적고 있으며, 어떤 사람들은 ‘단군’은 직명이고, 28) 설삼용,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 단군상 철거를 위한 세미나 자
료집,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단군상대책위원회, 2002.7.30.
‘왕검’은 사람 이름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온갖 단군 관련 서적에 제각각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는 등의, 그 정의조차 제대로 내 릴 수가 없는데도, 이런 ‘단군’을 ‘우리 민족의 시조’로, 혹은 ‘우리의 시조 단군은 이런 분이었다.’ 혹은 ‘건국실화’로 어떻게 받아들일 수 가 있겠는가?”라고 하여, ‘단군신화’를 실재했던 역사라고 주장하는 것은 근거없는 주장이라고 비판했다.
29)
이와같이 보수적인 성향을 지닌 한국기독교총연합회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단군상 건립반대 운동을 벌였고, 공립학교에서 특정 종 교의 상을 건립하는 것은 정교분리의 원칙에 위반된다며 강력하게 금지해줄 것을 요청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2003년 9월, 전국 교 회의 학생들에게 이 문제를 알리기 위해 <단군문제통합공과, 역사를 바르게, 소망을 주님께>라는 교재를 만들어 보급했다. 여기에 대해 홍익운동연합은 이 책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의 왜곡이며, 반민족적 행위라며 법정에 고소했다. 이에 대해 법원은 단군에 관한 역사적 객 관적 사실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 왜곡이라 볼 수 없 으며, 단군상은 단지 인물상이 아니라 종교적인 내용을 담았기 때문 에 공공 장소에 건립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모호한 판결을 내리기 도 했다.
30)
그러나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단군상대책위원회는 반드시 전체 기독교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단군상 사건과 관련해서, 6대 종교 지도자들(기독교, 불교, 천주교, 성공회, 원불교, 천도교)이 간담회를 갖고 “단군은 어느 한 종단의 신앙이 아 니라 우리 역사와 문화의 뿌리이자 상징”이라며, ‘유사 사건의 재발
29) 김대건, 「단군상 철거의 타당성과 철거 전략」, <단군상 철거를 위한 세미 나>,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단군상대책위원회, 2002.7.30.
30) 박명수, [특별기고] 종교편향 논쟁, 무엇이 문제인가 (11) 단군상, 종교 우상 인가 역사적 조형물인가, 크리스천투데이 기사, 2009.12.08.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05654 2011.10.1. 인용.
방지를 위해 함께 노력할 것’을 다짐하는 공동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 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단군상철거 및 반대운동은 기독교 전체의 견 해라고 할 수는 없음을 알 수 있다.
Ⅳ . 근현대 단군 인식의 변화 문제
이상에서 단군영정과 단기연호 문제를 중심으로 해방후 단군 인식 의 변화 문제를 고찰해보았다. 단군영정은 개별 종교적 차원이 아니 라 국조존숭이란 민족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또한 단기연호 문제도 외국과의 교류문제라든지 기존 의 관습을 변경하므로써 생기는 여러 불편한 점들에 대해서는 이미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있는 외국의 사례들을 잘 연구하고
31)
사 계의 전문가의 의견과 국민의 여론을 수렴해서 통일적 대안이 마련 되어야 할 것이다.또 단기연호에도 몇가지 다른 방식이 혼재하고 있는 문제도 있다.
현재 일반적으로는 단군께서 개천한 해 무진년을 BC2333년으로 환 산하고, 서기를 단기로 환산할 때는 2333년을 더하는 방식을 쓴다.
그런데 대종교에서는 단군이전에 환검 신시씨라는 대황조가 있었다 고 해서 상원갑자 즉 BC2457년을 개천 원년으로 보고 개천 125년이 바로 단군원년(기원전 2333년)으로 본다.
32)
이외에도 이유립의 태백 교 등 일부 단체에서는 환단고기에 나오는 단군조선 전에 개국한 신시배달국의 기원을 합쳐서 계산하는 신시개천 연호도 쓰여지고 있 다.33)
이런 점에 대해서도 학계의 논의를 거쳐 통일안을 마련하는 것 31) 아시아에서 일본 대만을 비롯해서 태국 네팔등이 독자적인 연호를 쓰고 있 고, 사우디아라비아 이스라엘 에디오피아 아프가니스탄 등도 고유의 연호를 사용하고 있다.32) 이는 김교헌(1868-1923)의 신단실기에서(1914년) 처음 보인다.
이 단기 연호 문제에 대해 혼동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건국초 홍익인간이란 국가 교육의 이념이나 단기 연호등에서 보여 지듯 해방후 우리사회에서 국조 단군에 대한 존숭은 다른 재론의 여 지가 없었다. 그러나 앞에서 분석해보았던 바와 같이 60년대에 들어 오면서 혁명정권하에서 구미 선진국과의 외교적 편리성이나 행정적ㆍ 경제적 효율성이란 명분하에 단기연호를 급하게 폐지하게 된다든지, 70년대의 단군영정 중복승인 문제를 비롯해서 8,90년대 단군성전이 나 국조단군상 건립문제에서 불거졌던 종교성 시비등 일련의 사태를 보면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국조에 대한 존숭의식은 사라지고, 서구 적인 기준에서의 편리성과 기능성만을 중시하거나, 개인의 종교적 신념을 우선시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최근에는 어린이날 현충일과 함께 개천절을 요일지정제로 변경하 겠다는 정부의 안이 발표되자마자(2011년 7월 20일), 여론의 반대에 부딪혀 바로(7월 29일) 정부안이 철회되기도 했다. 이제는 정부에서 조차 단군 개천절이 국경일이라는 의식보다는 어린이날이나 현충일 과 같은 차원에서의 공휴일이란 점만을 의식하고 있다는 의구심이 든다. 관점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필자의 생각으로 개천절은 어린 이날이나 현충일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것은 어린이날이나 현충일을 폄하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국가적으로 볼 때 개천절은 한민족의 유 구한 역사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최대의 국경일이기 때문 이다. 또 개천절이 종교적 기념일은 아니지만, 굳이 비유해 본다면 오히려 석가탄신일이나 성탄절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고 할 것이다. 지구촌 시대 세계화를 부르짖는 지금, 국내 국외를 구분한다는 것이 적절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일단 석가나 예수는 외국의 성인 들이요 단군은 우리민족의 聖王이다. 그래서 모화사대주의가 극성을
33) 신시배달국의 역년은 1565년으로, 서기를 신시개천으로 연호로 바꾸려면 단 군왕조와 중복되는 해 1년을 빼서 1565+2333-1(중복되는 해)을 해서 3897년 을 더하면 된다.
부렸던 조선시대에서조차도 국가제사로-箕子와 함께-단군을 이 땅에서 천명을 받은 조선의 개국시조로 정성을 드려 제향을 올렸던 것이다.
현대의 서구를 모델로한 근대화와 급격한 경제개발이 진행된 이후 우리 사회는 단군에 대한 인식이 이전에 비해 점점더 협소해질 뿐 아니라, 국가와 민족의 국조로서가 아니라 일개 종파의 신앙 대상으 로 제한적으로 인식되어가고 있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식민지나 최빈 국에서 세계 10위권의 무역대국ㆍ경제강국이 된 지금, 지구촌이란 개념이 익숙해진 이 글로벌 시대에 단군은 이제 거추장스럽고 불필 요해진 것일까?
사실 일제강점기하에서는 기독교계에서도 단군 영정에 대해 거부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 예를 들면 간도의 조선인 기독교 교 회에서는 단군을 존숭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기독교에서 세운 명 동학교 교가에는 “흰뫼(백두산)가 우뚝솟아 은택이 호대한 한배검이 깃 차신 이 터에 그 씨앗 크신 뜻 넓히고 가르는 나의 명동”이라고 해서 단군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음을 자랑스레 내세우고 있었고, 도 서관 벽에는 예수의 사진과 더불어 단군의 영정을 마주 걸어놓고 있 었다고 한다. 이는 단군을 기독교 교리에 어긋난다고 보거나 반대하 지는 않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 기독교를 신앙했던 안창호는 평생 단군상을 몸에 지니고 다녔고, 필라델피아에서는 대규모 단군집회를 개최하기도 했다고 한다.
34)
또한 해방후에도 ‘弘益人間’을 대한민국 교육의 기본이념으로 정하는 데에 안호상 문교부장관과 함께 커다란 역할을 했던 분도 연세대학교 총장을 지낸 백낙준박사였다. 그는 미 국에서 신학을 공부한 기독교인으로 1946년 조선교육심의회 제1분과 위원이었는데, 홍익인간을 교육이념으로 정하자고 제안하자, 미군정34) 전택부, 토박이신앙산맥 2, 대한기독교출판사, 1982, 97쪽; 이명화, 「북간도 한인사회와 명동교회」 일제하 간도지역의 한인사회와 종교, 한국학중앙연 구원 문화와종교연구소 국제학술대회보, 2009.11.20. 45쪽 재인용.
이 이 말이 민족주의적 색채가 심하다고 꺼려하자, 이를 영어로 ‘인 간에 대한 최대한의 봉사(maximum service to humanity)’로 번역하여 미군정을 설득하는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35)
이 점에 대해 혹자는 대종교는 당시에 종교의 하나로서가 아닌 교 파를 초월하여 일반적으로 믿어지는 초종교의 역할을 했다고 보았지 만,
36)
단군숭배에는 본래 종교적 신앙과 국조로서 숭봉하는 2가지 성 격이 있음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37)
단군신앙과 국조존숭이라는 2가 지 성격의 혼재는 우리 민족의 단군숭배에 있어서의 특징이자, 또한 유의해야할 점이다. 다시 말해 단군숭배는 자칫 국조존숭과 단군신앙 이 구분되지 않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구성원 대부분 의 경우에는 이런 특징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종교적 신앙의 차원에 서 본다면 바로 이 점으로 인해서 종교적 분쟁이 생겨날 여지도 있다.현대사회는 근대민족국가에서 뚜렷하게 구별되었던 국가간 민족 간 종교간 경계가 무너져가고 있으며, 특히 세계의 기성종교는 각자 의 독선적인 입장을 지양하고 타종교와의 대화와 이해를 도모하면서 상호 공존하는 종교다원화시대가 되었다. 종교다원화시대에는 좀더 개방적인 시각이 요청된다. 종교계에서도 단군 국조상에 대해 종교 자유를 침해하는 위헌이란 논리로 접근하기 보다는 종교적 차원이 아닌 국조에 대한 존숭이란 차원에서 보다 전향적인 접근이 필요하 다고 본다. 아울러 정부이건 시민단체건 간에 국조존숭운동을 전개 하기 위해서는 본래의 의도와 관계없이 종교성 시비에 휘말리지 않 도록 이 2가지 측면을 분명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개별적인 종교로서 단군을 신앙하는 것은 개인에게 보장된 종교의 자유이지
35) 노길명 외, 한국민족종교운동사, 민족종교협의회, 2003. 229-230쪽 인용.
36) 삿사 미츠아키, 「한말 일제시대 단군신앙운동의 전개」, 서울대학교대학원 박사논문, 2003. 참조.
37) 이강오, 한국신흥종교총람, 299쪽 및 졸고, 「대종교 단군영정의 기원과 전 수문제」, 15쪽 참조.
만, 국조를 추념하고 존숭하는 국가적 사회적인 의미에서의 단군은 그 누구도 신앙의 시각으로 접근해서는 안될 것임은 당연하다. 그래 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국조에 대한 인식이 왜곡당하는 일이 없도 록 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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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투고일 : 2011년 12월 30일 심사완료일 : 2012년 2월 8일 게재확정일 : 2012년 2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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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재, 「단군상 문제 어떻게 볼 것인가」 단군상 철거를 위한 세미나 자 료집,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단군상대책위원회, 2002. 7. 30.
【中文抄錄】
解放后檀君認識之變化與問題
-以檀君影幀和檀紀年號爲中心-
林采佑 (國際腦敎育綜合大學院 國學科 敎授)
解放后 在大韓民國建國初期 政府和國民都有了繼承檀君思想與理念 之精神. 這種氣分上 政府制定開天節爲國慶日, 使用檀紀年號, 採擇弘益 人間爲敎育理念, 而且公認國祖檀君影幀標準像.
但是在60年代近代化步驟裏 檀紀年號被代替了西紀. 80年代, 國家之 國祖檀君聖殿建立計劃取消了, 90年代 市民運動團體建立國祖檀君像被 毁損了. 這種情況下 連開天節喪失國慶日之位相 到了看做和一般公休日 一樣的地步.
總而言之, 以經濟發展爲主之急進的歐洲化之步驟裏 檀君之地位逐漸 萎縮而成爲特定宗派之崇拜物. 這樣情況下 可以說檀君喪失國祖之位相 轉落了宗敎紛爭之對象.
核心語: 大倧敎, 顯正會, 檀君像, 檀君影幀, 羅喆, 鄭勳謨, 開天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