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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재난 인식 연구의 성과와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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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태우**

목 차 1. 문제 제기

2. 근대 이전 재난 기록의 신빙성과 활용 문제 3. 유교적 재이론(災異論)의 수용과 시기별 변동 4. 향후 연구의 과제

<국문초록>

이 글은 재난이 끊임없이 정치문제가 되었던 역사성을 고려하며, 사회재난이 본격화하고 근대과학이 수용되기 이전인 근대 이전 시기에 국한하여 한국에서의 재난 인식에 관한 연구 동향을 정리한 것이다. 먼저 재난 기록의 신빙성 문제가 제기된 과정을 살펴보며 여러 자료를 교차해 당대의 실상에 접근할 필요성을 제기 했다. 이어서 선행 연구에서 주목한 유교적 재이론(災異論)을 통해 한국 재난 인 식의 시기별 양상을 살펴보았다. 끝으로 향후 연구 과제로 재난 분석을 위한 자료 의 폭을 넓히고, 유교 및 다른 사상에서의 재난 인식을 종합하며, 민중과 사회 일 반의 재난 인식에 관한 고찰이 필요한 점 등을 제기했다. 이로써 재난에 관한 역 사적 기억의 문제를 되짚어보며 재난인문학의 기초 정립에 일조하고자 했다.

주제어 : 재난, 자연재해,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 유교적 재이론(災異論), 재난인문학, 뺷삼국사기(三國史記)뺸, 뺷고려사(高麗史)뺸, 뺷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뺸, 뺷승 정원일기(承政院日記)뺸

* 이 논문은 2019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19S1A6A3A01059888).

** 조선대학교 재난인문학연구사업단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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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제 제기

재난(disaster)은 전 세계적인 이슈이자 앞으로도 계속해서 주목할 만한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서구 근대의 합리성 증대와 과학기술의 발달로 재난 이 극복될 것으로 믿었던 인류는 오히려 문명의 고도화와 지역 간 상호의 존성 및 복합성의 증대로 대형 재난의 위험 앞에 놓여 있는 상황이다. 현재 보고 있는 호주 산불재앙과 코로나19 사태는 안타깝게도 예전부터 진행되 어왔던,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재난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할 것이다. 인류 로 인해 증폭된 기후 위기는 인류 자신은 물론 지구생태계 전체에 걷잡을 수 없는 재난을 일으킬 확률을 계속 높이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성찰하고 대처하는 데 토대가 될 재난 연구는 그만큼 중요하고 실천성을 담보한 활 동이 될 수 있다.

재난은 오랜 역사가 담긴 주제이기도 하다. 현재 우려되는 코로나19 감염 증 확산 사례에서 보듯이 재난은 곧잘 정치적인 문제로 바뀐다. 재난 상황 에서 대통령과 정부에 비난이 쏠리는 일은 국가가 위험에 대비하고 안전을 책임지는 포괄적인 단위이기 때문에 불가피할 것이다. 현재도 그렇듯이 재 난은 역사 이래로 수천 년간 정치문제가 되어왔다. 특히 동아시아에서 재난 이 정치화한 사상적 배경으로 유교적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을 꼽을 수 있다. 천인감응설은 근대과학이 도입된 뒤부터 영향력이 감소하지만, 오늘 날 많은 사람의 심성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몰락은 ‘국정 농단’이 직접적인 계기였지만, 세월호 참사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정부의 무능과 국가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난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재해에 대처하지 못한 지배층과 국가에서 정치적 격변이 일어나고 나라가 몰락하 는 일들은 역사의 여러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한편 근대를 전후로 하여 재난의 범위는 큰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재난 은 오늘날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1)에서 정의하는 자연재난과 사회재

1) 법률 제16666호(2019. 12. 3. 일부 개정). 법률 조항은 국가법령정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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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양자를 모두 포괄하는 것이지만, 역사 연구에서 다뤄온 당대의 재난은 사뭇 차이가 있다. 사회재난의 경우 화재와 붕괴, 폭발, 교통사고, 환경오염, 에너지와 통신․금융, 감염병과 최근의 미세먼지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근 대 이후 과학기술의 발달 과정에서 등장하거나 양적으로 유의미한 상황에 이르는 것이 많다는 점을 고려할 때, 화재와 감염병 분야를 예외로 한다면 근대 이전의 재난은 기본적으로 오늘날 사람들이 정의하는 ‘자연재해’ 분야 에 국한되어 있다. 또한 근대과학이 수용되기 이전 사람들은 자연재해와 함 께 오늘날 비과학적 일로 치부되거나 실제 있었을 법하지 않은 특이한 사 안들(變異, 異變 사례)도 재해, 재난으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사회재난이 본격화하고 근대과학의 도입 여부를 기준으로, 근대 이전과 이후를 구분하 여 살펴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이상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본고에서는 첫째, 오랜 역사성 및 현재성을 지닌 재난 인식에 초점을 두고, 한국학계(주로 역사학계)에서 한국에서의 재난을 어떻게 연구해왔는지, 거기에 담긴 의미를 분석하고자 한다. 이때 분석 시기는 근대 이전, 곧 서구 자본주의문명이 세계의 기준이 된 19세기 후반 이전까지로 한정한다. 둘째, 근대 이전 재난을 연구할 때 그 기록문제 가 대두되는데, 재난 인식과도 관련하여 재난 연구에서 기록을 어떻게 다루 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셋째, 재난 인식에 관한 연구를 검토하면서 각 시 대 사람들이 ‘재난’을 바라본 인식의 추이를 정리해보겠다. 넷째, 이러한 작 업을 통해 새로운 연구 과제를 제기하면서 재난을 역사학, 나아가 인문학적 으로 연구하는 방향을 모색하는 기회로 삼고자 한다.

2. 근대 이전 재난 기록의 신빙성과 활용 문제

사전적인 의미에서 재난(災難)은 뜻밖에 일어난 재앙과 고난으로 풀이

(http://www.law.go.kr/, 검색일: 2020. 1. 19.)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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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다. 근대 이전에 ‘재난’이라는 용어는 거의 쓰이지 않았으며,2) 오늘날 재 난 용어에 가까운 단어로는 재(災), 천재(天災), 천변(天變), 재이(災異), 앙(殃), 난(難) 등이 대응된다. 이러한 용어를 오랫동안 한국의 정치이념과 지배질서를 구축해온 유교에 근거하여 포괄하면 대체로 ‘재이’로 통칭할 수 있다. 먼저 ‘재이’는 약간의 정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인간에게 직접 피해 를 주는 자연재해와 천문현상 등 하늘과 땅에서의 여러 이변(異變) 현상을 포괄하는 용어이다.3)또한 재이론은 잘 알려진 대로 하늘이 자신의 의지를 천문․자연현상을 통해 나타내는데, 만약 정치 지도자가 하늘의 뜻을 어기 고 민생을 돌보지 않을 때 음양오행이 조화롭지 않게 되어 여러 이상현상 이 발생한다는 이론이다. 이는 하늘과 인간이 원래 하나로서 하늘이 군주를 대리인으로 내세워 백성들을 다스리게 한다는 천인감응론과 연결되는 것 으로,4) 근대 이전 시기 많은 이들이 일반적으로 공유한 관념이다.

뺷삼국사기뺸부터 뺷고려사뺸, 뺷조선왕조실록뺸까지 한국의 연대기 사료에는 수많은 재이현상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를 두고 일찍부터 신빙성 여부 문제가 제기되었다. 오래전인 1926년 이이지마 다다오(飯島忠夫)는 편찬 자 김부식(金富軾) 등이 중국의 역사서에서 따오거나 조작했다는 주장을 펼쳤다. 뺷삼국사기뺸 신라본기의 내물왕 이전 기사는 허구의 것이고, 뺷삼국 사기뺸의 일식(日蝕) 기록이 중국 정사(正史)의 오행지(五行志)와 천문지 (天文志)의 기록과 대부분 일치한다는 이유를 들었다.5)이후 스즈키 다케

2) 뺷조선왕조실록뺸에서 “재난(災難)”으로 원문 검색할 경우 두 건 정도만 추출될 뿐이다.

뺷성종실록뺸 70권, 성종 7년 8월 10일 庚辰의 “忍言者. 臣竊謂此習未改, 此俗未變, 欲 天悅民安而無水旱之災難災難災難災難災難矣.”와 뺷현종실록뺸 10권, 현종 6년 3월 7일 癸巳의 “喜怒或 不能付物, 好惡間出於偏私. 謟諛之言日進, 忠鯁之風日衰, 置國於茫無畔岸之域.

而不自覺悟, 則荐疊之災難災難災難災難弭, 危亂之禍必作矣.” 災難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do) 검색(검색일: 2020. 1. 15.).

3) 재이의 정의는 김석우, 뺷자연재해와 유교국가뺸, 일조각, 2006, 156∼160쪽; 이욱, 뺷조선 시대 재난과 국가의례뺸, 창비, 2009, 76∼77쪽 참조.

4) 吳浩成 지음, 뺷조선시대 農本主義思想과 經濟改革論뺸, 경인문화사, 2009, 98∼99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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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鈴木武樹)는 뺷삼국사기뺸를 편역하며 중국 정사를 전재했다는 이이지마 의 주장을 긍정하면서 중국 역대 제기(帝紀)에 실린 글을 삼국사기에 옮겨 왔다는 주장을 하였는데, 한편으로 삼국이 각자 독자적인 일식기사를 가지 고 있었다는 점도 언급했다.6)

삼국사기 일식기사의 전재설, 조작설에 관하여 일찍이 홍이섭은 김부식 등이 중국 문헌을 인용했지만 삼국이 천문관측을 독자적으로 했다면서 전 재설을 반박했다.7) 이후 1970년대 중반부터 한국의 과학사학계에서 일식기 사에 대한 삼국의 독자 관측설이 제기되었다. 김용운은 중국 정사의 일식 건수보다 삼국의 일식 기사수가 적고, 수백 년의 기사 공백도 있는 등 불규 칙성을 보인다는 점을 들며 중국 사서 전재설을 납득하기 어렵다고 하고, 신라의 초기를 제외하면 삼국이 일식을 독자적으로 관측했고, 이때 남은 기 록을 토대로 김부식 등이 삼국사기를 편찬했다고 보았다.8) 이어 박성래는 일식뿐만 아니라 다른 자연현상 기록까지 종합적으로 검토하며 삼국사기 에 실린 자연현상이 구징(咎徵)과 상서(祥瑞)의 틀로 구성되어 있다는 새 로운 관점을 제시했다.9)

일식기사 전재설에 대한 합리적인 비판이 제기된 뒤 과학사학계를 중심 으로 뺷삼국사기뺸뿐만 아니라 다른 역사서의 천문현상 및 재이기록의 신빙

5) 飯島忠夫, 「三國史記の日食記事について」, 뺷東洋學報뺸 15-3, 東京: 東洋學術協會, 1926

6) 金富軾 撰, 鈴木武樹 編訳, 뺷三国史記 : 倭国関係뺸, 東京: 大和書房, 1975.

7) 洪以燮, 뺷朝鮮科學史뺸, 正音社, 1946, 42․54․69쪽.

8) Kim, Yong-woon, “A Study of the Records of Solar Eclipses in SamgukSagi(1),”

Korea Journal 16-7, 1976; “A Study of the Records of Solar Eclipses in

SamgukSagi(2),” Korea Journal 16-8, 1976.

9) Park, Seong Rae, “Portents and Politics in Early Yi Korea, 1392-1519,” Ph.D.

Dissertation, University of Hawaii, 1977(Park, Seong Rae, Portents and Politics in

Korean History, Seoul: Jimoondang, 1998로 출간). 박성래 著, 뺷한국과학사상사뺸, 유

스북, 2005도 참조. 이상의 연구사 정리는 李熙德, 「三國史記에 나타난 天災地變記事 의 性格」, 뺷東方學志뺸 24,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80, 66∼72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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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을 입증하는 연구들이 연이어 학계에 제출되었다. 조선후기에 편집된 뺷증 보문헌비고뺸의 일식 기록이 실재와 일치한다는 점이 인정받았고, 조선시대 뺷승정원일기뺸 등의 혜성 기록이 정밀하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뺷고려사뺸천 문지(天文志)의 혜성과 유성 및 일월식, 태양흑점 기록, 뺷삼국사기뺸의 달과 행성의 엄폐 현상, 금성 기록과 유성우 기록의 과학성이 검증되었다. 이로써 뺷삼국사기뺸를 비롯한 한국의 역사서에서 보이는 재이 기록의 신뢰도는 충 분히 높다고 할 수 있다.10)

그간의 연구를 통해 근대 이전 역사서의 기록에 관한 과학성이 확보되었 지만, 기록을 활용할 때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다. 자료를 집계하고 생산, 편찬하는 과정에서 객관성과 취사선택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 무엇 을 재이(재난)로 볼 것인지는 당대의 재이 인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둘 째, 유교적 천인감응론․재이론이 군주의 신하 견제, 신하의 군주 견제 등 정치에 활용됨에 따라 재이에 대한 언급 빈도가 정치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재이 발생을 군주를 견제하기 위한 정치 적 목표로 삼고자 할 때 그에 따른 기록도 의도적으로 늘어나게 마련이다.

셋째, 오늘날과 같이 행정력이나 관측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과거 상황을 고려할 때 자료를 전국 단위로 균질하게 수집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기록의 활용 문제를 두고 학계에서는 한쪽에서는 재이기록 자체를 의심 하지 않고 한국의 고중세 기후 변화 추이를 검출하기도 하고, 다른 한쪽에 서는 재이기록의 주관적인 취사선택과 정치적인 성격에 따른 기록의 변화 를 강조하고 있는 상황이다.

전자의 경우 예를 들면 17세기를 중심으로 하여 소빙기론을 강조하는 입 장이 있다. 대표적으로 이태진은 조선왕조실록(이하 ‘실록’)의 천변재이 기 록의 시기별 분포 상황을 검토하여 16∼18세기 전반에 이르는 기간에 재이 기록이 집중되어 있는 점을 밝히고, 실록에서 혜성과 유성의 다량 출현, 소

10) 연구사 검토는 경석현, 「조선후기 재이론(災異論)의 변화 - 이론체계와 정치적 기능을 중심으로」, 경희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8, 6∼8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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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성 등의 대기권 진입 등이 다량으로 발견되는 점에 착안하여 지구가 큰 규모의 운석군을 만나면서 각종 기상이변으로 한랭하, 곧 소빙기 현상이 이 어졌다고 보았다.11)그는 소빙기로 보는 시기의 기록은 “너무나 사실성이 높기 때문에 어떤 의심도 개입시키기 어렵”고, 실록 편찬자들의 기록정신 이 확고부동하여 “고의적인 누락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라고 보았다.12)실 록 자체의 기록을 사실에 입각한 것으로 그대로 받아들이며 연구를 진행한 것이다.

또한 지리학계에서는 뺷삼국사기뺸와 뺷고려사뺸를 통해 1,500년간 한국에 서의 자연재해 경향성을 정리하고, 특히 가뭄주기를 분석하는 연구를 제출 했다. 이 연구를 통해 한국의 고중세 1,500년간 가뭄 현상은 크게 세 번의 주기, 대략 500년의 시간 간격으로 발생했다는 결론을 내렸다.13)이 역시 기록을 실재를 보여주는 것으로 전제하고서 연구한 결과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을 비판하며 재이기록의 취사선택에 따른 주관성을 강조하는 관점도 강하게 존재한다. 박성래는 재이기록이 당대 역사가들의 손을 거쳐 다듬어졌기 때문에 객관적 사실 그대로를 전하고 있지 않으며, 그러한 기록을 근거로 과학적 통계를 얻어 의미를 구하려는 행위를 “대단 히 위험하고도 적절하지 못하다”라고 강하게 비판했다.14) 그는 실록의 자 연현상 기록을 과학적 기록보다는 ‘정치적 기록’으로 봐야 하며, 이태진과 같이 실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통계화하는 작업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

11) 李泰鎭, 「小氷期(1500∼1750) 천변재이 연구와 뺷朝鮮王朝實錄뺸」, 뺷역사학보뺸 149, 역사학회, 1996; 이태진, 「외계충격 대재난설(Neo-Catastrophism)과 인류역사의 새로 운 해석」, 뺷역사학보뺸 164, 역사학회, 1999.

12) 李泰鎭, 위의 글, 1996, 214쪽; 李泰鎭, 「小氷期(1500∼1750)의 天體現象的 원인 - 뺷朝鮮王朝實錄뺸의 관련 기록 분석」, 뺷國史館論叢뺸 72, 1996, 98쪽.

13) 윤순옥․황상일, 「삼국사기를 통해 본 한국 고대의 자연재해와 가뭄주기」, 뺷대한지리 학회지뺸 44-4, 대한지리학회, 2009; 윤순옥․황상일, 「고려사를 통해 본 한국 중세의 자 연재해와 가뭄주기」, 뺷한국지형학회지뺸 17-4, 한국지형학회, 2010.

14) 박성래 著, 뺷한국과학사상사뺸, 유스북, 2005, 632∼6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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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15)

또한 뺷승정원일기뺸(이하 ‘일기’)의 재이 기록을 분석한 연구에서는 뺷삼국 사기뺸와 뺷고려사뺸, 뺷조선왕조실록뺸 등 연대기 사료에 등장하는 천변재이 기록에 문제를 제기하며, 뺷실록뺸보다 더 기사 내용이 많고 편집이 거의 안 된 ‘일기’의 기록을 분석한 결과, ‘일기’에는 당시 조선에서 생산된 천변재이 기록의 일부만 수록된 사실을 밝혔다. 연구를 통해 ‘일기’는 관측자의 주관 과 정치 상황, 서울지역의 관측 결과만 담고 있는 관측지의 국지성에 영향 을 받으면서 기록되었고, 따라서 ‘일기’만으로 기후의 장기적 변화 양상을 쉽게 파악하기는 어렵다는 결론에 다다랐다.16)

앞서 언급했듯이 재이기록의 객관성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한국의 연대 기 사료에 기록된 재이현상은 당시 사람들이 실제 관측한 신빙성이 높은 것들이지만, 기록의 생산과 편찬에는 당대의 정치 현실이 담겨 있다. 일례 로 16세기 중종대 이후 뺷실록뺸에는 재이현상이 급증하는 양상을 보인다. 그 이유는 실록 편찬자들이 스스로 재이론을 왕성하게 전개했던 이들이었고, 자신들의 논의가 뺷실록뺸에 반영되면서 재이기록도 함께 수록되었기 때문 이다.17)기록의 양적 상태가 당대의 ‘실제 그러함’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남아 있는 자료에서 기후 변화나 자연환경의 변화를 감지하는 노력은 여전히 중요하다. 자연현상이나 재난 기록이 그 자체로 통계 패턴을 보여주지는 못하더라도 개별 기록 자체가 왜곡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삼국사기나 고려사, 실록 등 연대기자료 이외의 다른 자료를 교차 검토하면 서 당대의 실상에 접근해가는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 필요할 것이다.18)

15) 박성래, 「論壇Ⅰ 李泰鎭교수 “소빙기(1500-1750)의 천체 현상적 원인 - ≪조선왕조실 록≫의 관련 기록 분석”」, 뺷역사학보뺸 149, 역사학회, 1996.

16) 박권수, 「뺷승정원일기뺸 속의 천변재이 기록」, 뺷사학연구뺸 100, 한국사학회, 2010.

17) 경석현, 「뺷朝鮮王朝實錄뺸 災異기록의 재인식 - 16세기 災異論의 정치・사상적 기능 을 중심으로」, 뺷韓國史硏究뺸 160, 한국사연구회, 2013.

18) 그 한 예로 세종대 실록의 기록과 추수 후 재해대책, 기우제 현황 등을 비교하여 실록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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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유교적 재이론(災異論)의 수용과 시기별 변동

3.1. 삼국시대

그렇다면 과거의 사람들은 어떻게 재난을 인식하였는지, 이를 유교적 재 이론을 중심으로 그 연구 경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뺷삼국사기뺸를 전체적으 로 검토한 신형식에 따르면 내용 중 천재지변 기사가 전체의 27.4%를 차지 하여 전쟁과 외교기사보다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19)신형식은 이러한 천문 관측과 자연현상, 이변현상을 분류하고, 그 등장 기사의 숫자를 세기 별로 통계화했다. 또한 분류한 사례를 유형별로 살펴보면서 천재지변 기사 등장은 예고, 경고의 뜻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언급하였다.20)

이러한 내용상의 분류를 넘어 박성래는 삼국사기의 천재지변, 재이기사 에서의 각 자연현상에 대한 사상적 의미를 설명하고자 하였다. 그는 이러한 기사 내용이 중국으로부터 재이설을 수용한 흔적이라고 보면서, 천벌이나 큰 재앙이 있을 징조인 구징(咎徵)과 길한 일이 일어날 조짐인 상서(祥瑞) 로 구분하였다.21)

박성래의 연구를 더욱 확대하여 이희덕은 삼국사기의 천재지변 기사가 중국의 천인합일설(天人合一說), 유교의 정치윤리관과 연관된 점을 더욱 면밀히 분석하고자 하였다. 그는 중국 정사 가운데 최초로 오행지(五行志) 를 갖춘 뺷한서(漢書)뺸 이래 오행지가 기본적으로 복생(伏生)의 뺷상서대전 (尙書大傳)뺸 속의 홍범(洪範) 오행전(五行傳)22)에서 사상적 영향을 받았

기상기록의 통계적 신뢰성을 증명한 연구도 진행되었다. 이정철, 「조선왕조실록 가뭄 현상의 기록과 실제 - 세종즉위년∼세종18년을 중심으로」, 뺷국학연구뺸 25, 한국국학진 흥원, 2014; 이정철, 「조선왕조실록 가뭄 기록과 그 실제 - 세종 대(1418∼1450)를 중심 으로」, 뺷국학연구뺸 29, 한국국학진흥원, 2016.

19) 申瀅植 著, 뺷三國史記 硏究뺸, 一潮閣, 1981, 184쪽.

20) 申瀅植 著, 위의 책, 제3장 제2절 21) Park, Seong Rae, Op. cit. 1998.

22) 군주의 도덕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체계화한 제왕학을 전개한 것. 서경 홍범에서 사상 적 바탕을 찾을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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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보고, 삼국사기의 자연현상 기술도 이 홍범 오행전에 연계된 것으로 보았다. 그는 후한서 오행지와 삼국사기의 천재지변 기사를 비교하며, 대부 분의 삼국사기 기사들이 후한서 오행지의 천재지변 기사의 구조와 유사하 다는 점을 발견했다.23)부연하면 첫째, 천문현상 중 일식, 오성(五星: 수․

금․화․목․토성), 혜성 출현과 지변현상 중 한발, 지진, 대풍발목(大風拔 木), 도이재화(桃李再華) 등이 중국 자연관의 관찰대상과 거의 일치하며, 둘째, 천변(天變)과 지변(地變)을 구징(咎徵)과 상서(祥瑞)로 구분해서 파 악하는 것은 뺷서경뺸 홍범(洪範)과 관련된다는 설명이다.24)

뺷삼국사기뺸에 나타난 한국 고대의 자연관, 재난에 대한 인식을 유교의 정치사상, 천명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파악하는 관점은 이후에도 계속 보강 되었다. 김영현은 뺷삼국사기뺸 백제 기사에서 지상의 재이 부분을 집중적으 로 검토하였다. 그는 백제인들의 재이관에는 유교적 천명사상에 입각한 오 행사상에 북방계 샤머니즘과 토테미즘 요소, 백제 고유의 토착신앙이 포함 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재이 발생시 “일자왈(日者曰)”이라고 해석하 는 자가 등장하는데,25)그를 천문 변화와 재이를 관찰하며 그 의미를 점치 는 무자(巫者)일 것으로 보며, 이것이 토착신앙적 성격을 띤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뺷삼국사기뺸 찬자의 사관은 재해나 이변 기록을 첨삭하면서 왕조 개창자의 신성성을 부각시키고, 백제 멸망의 정당성을 천명사상으로 설명 하려는 의도를 가졌다고 하였다. 시조인 온조왕(溫祚王)은 구징(咎徵)이 15회 등장하고 휴징(休徵: 아름다운 징조)은 6회 등장하지만, 마지막 임금 인 의자왕(義慈王)조에는 구징이 25회로 백제 역대 임금 중 가장 많으면서 휴징은 하나도 없는 것에서 잘 드러난다.26)이밖에 신규탁은 고대 한국인

23) 李熙德, 앞의 글, 1980.

24) 李熙德, 「韓國古代의 自然觀과 儒敎政治思想」, 뺷東方學志뺸 50, 연세대학교 국학연 구원, 1986; 李熙德 著, 뺷韓國古代 自然觀과 王道政治뺸, 혜안, 1999.

25) 보기로 뺷삼국사기뺸 권 제23 백제본기 온조왕 25년(서기 7년) 춘2월, 王宫井水暴溢.

漢城人家馬, 生牛一首二身. 日者曰日者曰日者曰日者曰日者曰, “井水暴溢者, 大王勃興之兆也, 牛一首二身者, 大王并鄰國之應也.” 王聞之喜, 遂有并呑辰․馬之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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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자연관을 동아시아 자연관에서 위치시키며 천명론(天命論) 단계에 해 당한다고 보았다.27)

3.2. 남북국시대

삼국시대에 천인합일․천인감응설이 도입되었다고 한다면 이후 남북국 시대(통일신라시대)에는 천인감응설을 구현하려는 노력들이 자료에 드러 난다. 이희덕은 삼국시대에 비해 이 시기는 각종 재해를 하늘이 내리는 벌 로 생각하는 천견설(天譴說)이 적용되는 사례가 뺷삼국사기뺸에 더욱 많이 등장하며, 이것이 천인합일사상이 심화한 증거로 보았다. 또한 7세기 중반 이후 신라의 국정을 총괄하던 벼슬인 중시(中侍: 侍中)의 임면 사유가 재 이기록과 연관되고 있는 점도 새로운 현상이다. 군주에 대한 직접적인 경고 보다는 군주를 보좌해서 하늘의 뜻을 완수하는 신하에게 책임이 가해졌던 것이다.28)

최근 삼국통일 이후 신라의 재이 발생 추이를 중대와 하대 전반기, 하대 후반기로 나누어 정리, 검토한 연구가 제출되었다.29) 이기봉은 신라 중대 사람들의 재난 인식을 국왕의 실정(失政)에 대한 하늘의 견책(譴責)으로 이해한 유교적 천인감응론과, 불교신앙을 통해 재해를 극복하려는 불교적 재이론이 공존하던 상태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이 시기는 특히 재이가 국 왕과 귀족세력이 상대를 비판하는 정치적 수단으로 적극 활용되면서 재이 와 정치의 상관관계가 뚜렷해졌다. 재해에 대한 대처 여부가 사회 불안으로

26) 金永炫, 「百濟社會의 災異觀에 관한 고찰」, 뺷역사교육뺸 45, 역사교육연구회, 1989.

27) 신규탁, 「고대 한국인의 자연관 : 재이론을 중심으로」, 뺷동양고전연구뺸 9, 동양고전학 회, 1997. 그는 동아시아 자연관의 이행을 천연론(天然論) → 천명론(天命論) → 천인 상교승론(天人相交勝論) → 천리론(天理論)의 순으로 보았다.

28) 李熙德, 앞의 글, 1980, 90∼94쪽; 李熙德 著, 앞의 책, 1999, 339∼341쪽.

29) 李基峰, 「統一新羅時代 災異와 政治․社會 變動」, 충남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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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상황도 발생했다. 경덕왕대에는 진골귀족들이 농민 수탈을 강화 하고, 재해에 미온적으로 대처하면서 민의 불안이 높아졌고, 혜공왕대에는 많은 도적이 등장하며 사회 불안이 가중되었다.

신라 하대 전반기에는 뺷삼국사기뺸에 등장하는 재해 발생 빈도가 이전시 기보다 줄어들었으나, 신라정부의 미온적인 대응으로 민의 피해가 커지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재이에 대한 중앙정부의 미흡한 대처는 시중(侍中) 교 체와 반란 등 정치 변동에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으며, 반란이 재해와 연관 되는 사례는 이전 시기보다 많아지고, 대책 마련의 부실은 더욱 잦은 도적 이 일어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신라 말인 하대 후반기는 재이기록이 진성여왕(眞聖女王) 등 특정 왕대 빈도가 높은 특징을 보인다. 진성여왕 2년(888년) 가뭄에 대한 경주 귀족들 의 미흡한 대처와 더불어 농민항쟁이 크게 일어났다. 이 항쟁을 중앙정부가 제대로 진압하지 못했고, 농민의 이탈과 혼란은 가중되었다. 이러한 권력의 공백 상태를 차지한 것이 바로 지방의 유력자들이었고, 그들은 호족(豪族) 으로 정치세력화하였다. 이기봉에 따르면 신라 하대 후반기 정치․사회 혼 란은 재이가 직간접적 원인이 되었고, 호족의 독자성 강화도 재이와 관련된 다. 그는 재이를 신라 멸망의 원인으로서 더욱 적극적으로 해석할 필요성을 제기하였다.30)

한편 전덕재는 삼국과 통일신라시대에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를 정비하 는 과정에서 유교적인 천인감응설을 수용해 가뭄 등 재해를 극복하는 노력이 있었음을 밝혔다. 삼국시대 초기에 비해 이재민을 더욱 적극적으로 구제하 고, 농업생산기반을 안정화하고 확대하려는 노력이 각지에서 벌어졌다는 것 이다. 유교 천인감응설에 따라 재해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죽은 자와 동물들 에게도 관용과 덕을 베푸는 행위로 이어졌다.31)또 그는 뺷삼국사기뺸에서 시

30) 李基峰, 앞의 글, 2016.

31) 전덕재, 「삼국과 통일신라시대 가뭄 발생 현황과 정부의 대책」, 뺷한국사연구뺸 160, 한 국사연구회,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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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별 기록의 엄밀성 차이가 존재하는 점을 밝혔다. 삼국시대에는 계절별로 뭉뚱그려 가뭄이 발생한 사실을 기록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에 비하여 통일신 라시기에 이르면 그러한 예가 급감한다는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재해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술되고, 기록의 신빙성도 제고되었다고 할 수 있다.32)

그러나 이 시기는 신라의 통일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북쪽으로 발해도 존재하였다. 사료의 부족 탓이 크지만, 현재까지 발해에서의 재난 문제는 한때 백두산 폭발을 발해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목한 점 이외에는 구체적으로 연구되고 있지 못한 상황이다.33)

3.3. 고려시대

중국적인 자연관, 곧 유교의 천인감응, 재이론은 남북국시대를 거쳐 차츰

32) 전덕재, 위의 글, 2013, 12쪽.

33) 일본에서 1981년 일본 북부지방에서 퇴적된 백두산 화산재를 처음 발견한 마치다 히로 시에 의해 발해 멸망의 원인을 백두산 화산 폭발에서 찾는 연구가 발표된 적이 있었다 (町田洋, 「火山噴火と渤海の衰亡」, 中西進·安田喜憲 編, 뺷謎の王国・渤海뺸, 東京:

角川書店, 1992). 백두산 분출로 인한 분출물양은 과거 2,000년간 최대 규모였고, 그 분출 연도가 915년일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그 여파로 발해 멸망이 촉진되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러한 설명에 영향을 받아 한국 역사학계에서도 발해 건국 1,300주년을 맞이 한 토론회에서 발해 멸망의 원인으로 화산 폭발설이 거론된 적도 있었다(高句麗硏究 會 編, 뺷발해건국 1300주년 기념 : 698-1998뺸, 학연문화사, 1999, 120, 142~143, 179~183 쪽). 그러나 2000년대 들어 화산 분출 측정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폭발 연도가 938~947년 사이로 좁혀졌다. 마치다 히로시 역시 자신이 언급한 발해 멸망설을 수정한 상태이다. 물론 9세기에도 화산이 분출했다는 이론도 제기되고 있으나, 대체로 백두산 의 대분출 연도는 발해 멸망 이후로 보인다. 다만, 발해 부흥운동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을 가능성은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소원주·윤성효, 「백두산 화산의 홀로세 대분화 연구 : 개관」, 뺷韓國地球科學會誌뺸 20-5, 한국지구과학회, 1999; 谷口宏充 編, 뺷 CNEAS 中國東北部白頭山の10世紀巨大噴火とその歷史效果뺸, 仙台: 東北大學東 北アジア硏究センタ-, 2004; 진재운, 뺷백두산에 묻힌 발해를 찾아서 : 화산학으로 풀어 본 발해 멸망의 진실뺸, 산지니, 2008; 소원주, 뺷백두산 대폭발의 비밀뺸, 사이언스북스, 2010; 윤성효, 「백두산의 역사시대 분화 기록에 대한 화산학적 해석」, 뺷韓國地球科學 會誌뺸 34-6, 한국지구과학회, 2013; 윤성효·고정선·장철우, 「역사시대에 분화한 백두산 화산재의 화학 성분」, 뺷암석학회지뺸 27-1, 한국암석학회, 201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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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대되었다. 이 천인합일설에 바탕을 둔 자연관의 심화는 고려시대로 이어 졌다. 앞서 신라에서 재이 발생에 대한 견책이 왕이 아닌 시중(중시)에게 돌아간 것처럼, 고려 초에도 군주의 실정이나 부덕한 정치에 대한 견책 관 념이 있었으나, 신료들의 실정(失政)으로 돌리는 경향이 뚜렷하게 드러난 다. 재앙을 지우고 복을 불러들이는 기양(祈禳) 의례에서도 신하들의 충성 과 자숙이 촉구되었고, 어떤 조짐에 대한 예시로서 해석하려는 점술적인 측 면이 강했다.34)

그런데 982년(성종 1년) 최승로(崔承老)가 그의 상소문에서 정치이념으 로서 유교를 강조한 이후 차츰 중국의 천인합일사상에 의한 자연관이 정립 되어갔다. 천재지변 발생이 군주의 부덕에 따른 것이며, 기양대책에서도 군 주의 책기수덕(責己修德)이 기본이 되었다. 재해 발생시 군주가 피정전(避 正殿), 감상선(減常膳)하고 형정(刑政)을 완화하거나 토목공사를 중지시 키는 행위가 늘어갔다. 또한 성종대 이후에는 뺷예기(禮記)뺸의 월령(月令) 사상을 수용하여, 군주가 월령에 따른 정사를 베풀지 않으면 천재지변을 초 래하기 때문에 월령에 따른 군주의 통치가 요청되었다. 요컨대 성종대 이후 로 천인합일설과 더불어 유교주의 정치이념에 입각한 덕치사상이 전개되 었고, 천재지변의 원인이 신하에서 군주의 부덕으로 옮겨가는 재이관의 변 화가 발생했다. 이는 성종 이후 유교관인층의 성장이자 천인합일설에 의한 왕권 견제 기능의 강화로 볼 수 있다.35)

한정수는 고려 전기 천인감응론적 재이설을 토대로 덕을 닦기 위해 경학 적 기반 위에서 「무일(無逸)」이나 「홍범(洪範)」 등 유교정치사상이 수용된 점, 왕도정치론이 고려 전기 재이론의 전개와 함께 일층 심화하는 과정을 밝혔다. 또한 그는 삼국시대에 비하면 고려 전기 재이기록이 당시 기상과 기후 변화 관련 기록이 많은데, 이는 국가적 차원에서 실질적인 대책으로서

34) 李熙德, 「高麗初期의 自然觀과 儒敎政治思想」, 뺷歷史學報뺸 94․95, 역사학회, 1982 35) 李熙德, 위의 글, 1982; 李熙德 著, 뺷高麗儒敎 政治思想의 硏究: 高麗時代 天文․五

行說과 考思想을 中心으로뺸, 一潮閣,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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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본(務本)에 기초한 권농정책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가뭄과 홍 수 등 자연재해에 대해 충분한 대비와 군주의 선정이 이뤄지면 재난을 극 복할 수 있다는 인식과 실천이 고려 전기부터 본격적으로 정립되었다는 것 이다.36)이전보다 고려인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재난에 대비해간 흔적이다.

고려 후기 들어 원나라에서 성리학이 수용된 이후에는 유학 지식인들로 부터 군주의 수양을 통한 성학(聖學)이 강조되고, 고려왕실이 불교와 도교, 민간신앙의 도움을 받아 자기의 신성성을 과시하던 상황이 비판받기에 이 르렀다. 극심한 천변재이의 발생과 원인에 대해서는 군주의 책기수덕이 부 족한 점이 지적되었고, 급기야 고려 말 사대부 가운데는 혈통에 기반한 정 통성 문제를 결부시키며 역성혁명의 천명관을 주창하는 이들이 등장하게 되었다.37)이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조선 개창의 논리로 이어지는 것이다.

물론 고려시대의 재난에 대한 인식이 천인합일사상에만 입각한 것은 아 니었다. 천재지변을 단순한 자연현상으로 파악하고 일상에서의 근심과 재 난을 인간의 소행으로 보려는 자연관도 수용되고 있었다. 의종대 김양경(金 良鏡)은 중국 후당(後唐) 강징(康澄)의 상소 내용을 언급하면서, 자연의 변이보다 인위적인 정치와 사회의 기강이 정상화하지 못한 점들을 두려워 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1089년(예종 11년) 12월에는 예종이 스스로 당나 라 태종이 서상(瑞祥)과 선정(善政)이 무관하다고 한 대목을 긍정하기도 하였다. 고려 후기 이곡(李穀)은 홍수와 가뭄의 근원에 대하여 성군인 요임 금과 탕임금도 천수(天數)를 면할 수 없었던 점을 언급하면서 인사(人事) 와 천계(天戒)의 불일치를 지적하기도 했다. 이러한 인식은 순자(荀子) 이 래의 합리적 천문관이 고려에 수용된 흔적을 나타내며, 자연현상과 인간사 회의 일을 구별하려는 시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자연현상과 인간사 회를 구별하려는 시각보다 천일합일사상, 천견론이 주류가 된 것은 군주정

36) 한정수, 「高麗前期 天變災異와 儒敎政治思想」, 뺷韓國思想史學뺸 21, 한국사상사학 회, 2003.

37) 韓政洙, 「고려후기 天災地變과 王權」, 뺷歷史敎育뺸 99, 역사교육연구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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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를 견제함으로써 유교 지식인들이 정치에 적극 참여할 수 있는 논리가 되었기 때문이다.38)

이밖에 진영일은 뺷고려사뺸의 천문지(天文志), 오행지(五行志)를 분석하 여 재이 발생과 정치권력의 상관관계에 주목했다. 그는 「오행지」 등에 나타 난 유가의 질서개념을 우주 삼라만상을 분류하고 구별하여 질서를 부여하 려던 사유체계로 정리했다. 재이는 질서의 반대명제로서 때와 곳, 종류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는데, 이러한 사유방식에서 인간은 각자 할당된 시간과 장소를 떠나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되었다. 따라서 고려 시대 재이론은 인간사의 관점에서 왕조와 사회질서의 유지에는 긍정적인 면이 있었지만, 사회 변화의 여러 요소를 적극적으로 억제하는 부정적인 면 도 동시에 지녔다고 평가된다.39)

뺷고려사뺸에 대한 사료 비판을 통해 자연재해 발생추세가 검토되기도 하 였다. 먼저 김영현은 조선 초 고려사 찬자들이 「오행지」 편찬과정에서 재변 기록을 첨삭했을 가능성을 제기했고, 고려사 오행지의 재이가 거의 전부 구 징(咎徵)인 점, ‘점왈(占曰)’로 풀이되는 기록들은 토착신앙사상의 흔적일 가능성을 언급했다. 또한 그는 기사에 대한 통계 작업을 통해 재이기록 수 가 왕의 치적과 깊은 상관성을 갖고 있다고 보고, 고려 초에 재변 빈도가 매우 낮고 고려 말인 공양왕대 1년 평균 기사 빈도가 가장 높은 점을 볼 때, 조선 건국의 정당성과 고려 멸망의 당위성을 재이를 통해 설명하려는 뺷고려사뺸 찬자들의 흥망사관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40)

마찬가지로 뺷고려사뺸 오행지를 분석한 이정호는 「오행지」에 자연재해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고, 뺷고려사뺸 세가나 뺷고려사절요뺸에 없는 부분도 수

38) 李熙德, 「高麗時代의 天文觀과 儒敎主義的 政治理念」, 뺷韓國史硏究뺸 17, 한국사연 구회, 1977.

39) 秦榮一, 「≪高麗史≫ 五行․天文志를 통해 본 儒家秩序槪念의 分析」, 뺷國史館論 뺸 6, 1989; 진영일 저, 뺷고려국왕과 재이사상뺸, 제주대학교출판부, 2010, 3∼4장.

40) 金永炫, 「高麗時代의 五行思想에 관한 一考察」, 뺷忠南史學뺸 2, 충남사학회,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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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하는 등 사료 가치가 크지만, 오행(五行) 여러 부분에 수록되거나 수록되 어야 할 자연재해가 누락된 사례도 발견되는 등 한계가 있는 점을 지적했다.

또한 오행지를 통해 자연재해 발생추세를 검토했는데, 12세기 전반기, 14세 기 후반기에 전체 기록의 38%가 집중된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실제 자연재 해 기록보다 이변 현상 기록이 두드러지게 다수 기재된 시기가 존재(무신정 변, 최충헌 집권, 몽골과 전쟁, 원간섭 시작, 충렬왕 중․후반기 등)한다는 점을 거론하였다.41)김영현의 분석과 같이 뺷고려사뺸 편찬 과정에서 고려왕 조의 변화과정에 대한 관점이 개입되었을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이다.42)

3.4. 조선시대

조선 건국을 주도한 사대부들은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재이론을 군주 권 제어에 활용하면서 재난을 정치화하였다. 주자학적 재이론은 바로 재이 를 군주의 심성 수양 문제로 귀결시키면서 군주권을 적절히 견제하는 역할 을 하였다. 이 주자학적 재이론의 변동 과정이 조선시대에 두드러진다.

조선 초기 지배층은 하늘의 주재자적 성격을 강조하여 하늘의 권위에 의 거해 덕치, 곧 민본정치를 행하고, 천인합일을 이루고자 하였다.43)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조선 초에는 하늘에 대한 인식이나 재난관에서 주자학적 이 념보다는 중국 한나라 동중서(董仲舒)의 견책적 재이관에 가까웠다. 하늘 을 이기론(理氣論)에 입각한 이치로서 설명하기보다는 ‘인격적 의지’를 가 진 대상으로 보았다. 태종 및 세종대 가뭄에 대처하기 위해 기우제를 지낼 때도 의례에 고려시대의 무속과 불교․도교적 요소가 혼재되었으며, 주자

41) 이정호, 「뺷高麗史뺸 五行志의 체재와 내용 - 自然災害의 발생추세를 중심으로」, 뺷한 국사학보뺸 44, 고려사학회, 2011.

42) 이정호, 위의 글, 2011, 30쪽; 이정호, 「高麗前期 異變現象 기록을 통해본 災異觀과 위기인식 - 뺷高麗史뺸 五行志 기록을 중심으로」, 뺷역사와 담론뺸 80, 호서사학회, 2016, 235쪽.

43) 李碩圭, 「朝鮮初期의 天人合一論과 災異論」, 뺷진단학보뺸 81, 진단학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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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적 이념을 재난 상황에 적용하는 일은 쉽게 정착하지 못했다.44)국가 정 책과 시스템에 주자학을 적용하려는 당위와 개인의 자연관, 재해 인식의 영 역 사이에는 거리가 있었다.

15세기 후반 주자학을 강조하는 사림세력이 등장하고 그들을 중심으로 재이를 통해 군주에게 심성 수양과 성학(聖學)에 대한 탐구를 요구하면서 주자학적 재이론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관료의 언권(言權)이 강화하면서 왕을 견제하는 용도로 주자학적 재이론은 정치적으로 활용되었다. 재이론 이 정치 논쟁으로 격화하면서는 공과 사, 시비를 구별할 수 있는 군주의 수 양이 요구되는 군주성학론(君主聖學論)이 강조되었다.

그런데 자연현상에 대한 관찰 등 경험이 축적되면서 군주의 심성 수양만 이 유일한 재이 해소 방안이라는 인식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16 세기 후반∼17세기 초반에는 재이론의 이론체계가 재편되기에 이른다. 재 이론을 변통론(變通論)의 근거로 활용하여 재이를 선험적이고 보편적인

‘이(理)’가 아닌 경험에 근거하여 이해하려는 태도가 등장했다. 성군(聖君) 이 즉위한 시절에도 재이는 끊이지 않았고, 백성을 구제해야 재이를 없앨 수 있다면서 재이론과 변통론을 결합하는 논리가 대두되었다. 인간사회의 문제는 인간사회 문제 자체로 보려는 시각이다.45)과학의 발달로 천문현상 에 대한 계산이 정확해져 유성이나 혜성, 행성의 변화 등에 대한 중요도가 감소하고, 인간사회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자연재해 현상이 더욱 중요 해졌던 배경도 존재했다.46)그러나 인조반정 이후에 주자학적 재이론이 다 시 강해지기도 하였다. 하늘의 현상과 인간사회의 현상을 구별하는 논리가

44) 이상호, 「태종대 가뭄 대처 양상에 드러난 유학적 사유 - 뺷태종실록뺸의 가뭄 관련 기사 와 재이관을 중심으로」, 뺷국학연구뺸 23, 한국국학진흥원, 2013; 이상호, 「세종 즉위기 3년간(즉위년∼세종 2년)의 기상․기후 현상과 세종의 대처」, 뺷한국학논집뺸 57, 계명대 학교 한국학연구원, 2014.

45) 이상은 경석현, 앞의 글, 2018, 제3∼4장.

46) 하서정, 「효종(孝宗)대 정국변화와 재이(災異) 논의의 활용」, 뺷대구사학뺸 134, 대구사 학회, 2019, 209∼2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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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될 경우 재이로 군주를 경계시킬 수 없다는 이유에서, 관인․유자들이 주자학적 재이론을 교조적으로 고수했기 때문이다.

18세기 이후 재이론은 다변화 양상을 보였다. 첫째, 일방적으로 군주를 압박하는 군주성학론과 달리 군주의 수성(修省)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논의하는 흐름이 등장했다. 둘째, 청으로부터 서양 천문학이 수용되면서 규 칙적인 재이 현상이 인사와 무관하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재이의 범주도 점차 축소되는 경향을 보였다. 셋째, 이익과 홍대용 등 실학자들이 재이를 하나의 자연현상으로 보는 등 천인감응론에 대한 천착을 거부하는 흐름이 대두하고 있었다.47)

예를 들어 18세기 편찬된 뺷동국문헌비고뺸, 「상위고」(1770)에서는 전체의 3/5이 재이기록인데, 여기에는 서양 천문학을 수용한 이후 변화된 재이관이 투영되어 있다. 달과 항성의 접근 현상이 한 건도 없거나 유성 현상 등 매일 같이 일어나는 것도 극히 소량만 옮겨 적는 등 규칙적인 천체 현상이 제외 되었고, 실제 발생 가능한 재이현상만 수록되었다. 이는 서호수(徐浩修, 1736∼1799)의 재이관이 투영된 결과였다. 그는 서양 천문학의 성과를 흡수 하며 조선 하늘[자연]에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 재이가 무엇인지를 정리하 려 했고, 합리적으로 실증할 수 있고 또 실측할 수 있는 자연현상으로서의 재이에 주목했다.48)

물론 기본적으로는 군주가 재이를 두려워하며 경계해야 한다는 논리가 조선 지배층의 기본적인 인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19세기까지 기본적 으로 관철되었다.

47) 경석현, 앞의 글, 2018, 제5장.

48) 경석현, 「18세기 후반 뺷문헌비고(文獻備考)뺸 「상위고(象緯考)」의 재이(災異) 기록과 재이론(災異論) 연구」, 뺷韓國思想史學뺸 54, 한국사상사학회,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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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향후 연구의 과제

이상에서 근대 이전 재난 기록의 신빙성 논란과 활용 문제, 그리고 유교 적 재이론을 중심으로 재난 인식과 그에 대한 연구 경향을 살펴보았다. 아 래에서는 이러한 연구의 흐름에서 나타난 한계를 짚어보며 향후 연구의 과 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이는 재난을 역사적으로, 나아가 인문학적으로 연구 하기 위한 기초 작업이기도 하다.

먼저 분석 자료군의 한계를 지적하고자 한다. 역사학계에서는 대체로 뺷삼국사기뺸와 뺷고려사뺸, 뺷조선왕조실록뺸 등 연대기류의 관찬 사서에 의존 하여 재난을 분석해왔다. 연대기 자료만 하더라도 뺷조선왕조실록뺸뿐만 아 니라 뺷승정원일기뺸에 있는 재난 기록도 연구자의 눈길을 기다리는 중이다.

뿐만 아니라 문집과 일기류, 문학작품은 여전히 본격적인 연구의 대상이 되 고 있지 못하다. 최근 연구에서도 지적되었듯이, 관청에서 작성한 보고서나 연대기류에 작성된 재난 상황이 그것을 보고하고 기록한 사람의 성향과 기 록물의 형식에 따라 과장과 축소가 있을 수 있는데, 개인의 일기와 문학작 품에는 재난의 실상과 체험, 정서가 더욱 잘 묘사될 수 있는 특징이 있다.49) 불경이라든가 불교의 탱화, 그림에서도 당대의 재난 인식을 유추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50)곧, 개인의 기록이나 예술작품은 관찬사서에 있는 재난 인 식을 파악하는 데 보완물이 되거나, 때로는 관찬사서에서 소략하게 기록된 부분보다 더욱 풍부한 내용이 담긴 대안적인 자료가 될 수 있다. 요컨대 재 난 분석을 위한 자료의 폭을 넓힐 필요가 있는 것이다.

둘째, 재난 인식에 대한 주제의 폭을 확장할 필요가 있다. 선행 연구에서 는 주로 유교적 재이론에 입각한 연구가 주종을 이룬다. 그러나 유교 정치

49) 안대회, 「전근대 한국 문학 속의 자연재해 - 18세기와 19세기의 자연재해를 중심으로」, 뺷일본학연구뺸 53, 단국대학교 일본연구소, 2018.

50) 김지연, 「朝鮮後期 般若龍船圖 硏究」, 뺷美術史學硏究뺸 281, 한국미술사학회, 2014;

박미례, 「조선시대 감로탱화 하단(下段) ‘죽음도상’ 유형연구」, 뺷온지논총뺸 61, 온지학 회, 2019 등 미술사 차원의 연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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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에서 벗어난 재난(재해) 인식, 예컨대 불교적, 도교적 재이론, 민간신앙 에 입각한 재난 인식을 더욱 복원하고, 그것이 각 시기별 미친 영향을 파악 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7세기 이후 신라에서 현재의 고통과 재난에 서 중생을 구제하는 지장보살신앙의 수용 양상,51)군주의 수덕(修德)이 재 해를 물리치고 복을 불러오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가시적이지 않은 점 을 보완하기 위하여 개설된 고려시대 소재도량(消災道場)과 거기에 담긴 밀교(密敎)신앙의 문제52) 등에 관한 연구가 제출되었다. 또한 조선 초만 하더라도 고려에 이어 천변재이나 질병을 소재하려는 불교식 기복적 의례 와 도참의식은 계속되었으며,53)억불정책의 시행 이후에도 왕실이나 나라 의 변란으로 죽은 자들을 인도하거나 백성들의 질병, 각종 자연재해를 구제 하기 위한 불교식 의례로서 국행수륙재(國行水陸齋)는 뺷경국대전뺸에도 남 았다.54)조선후기 재난으로부터의 중생 구제와 극락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 으로서 반야용선도(般若龍船圖)라든가 미륵사상에서 재난 인식을 읽어낼 가능성도 있다.55)이렇게 불교나 민간신앙에서의 연구도 진전되고 있는데, 이러한 연구는 개별적으로 진행되는 차원에 불과하며, 유교적 재이론과 다 른 사상․신앙에서의 재이론, 재난 인식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노력은 미 처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이 분야에 대한 관심이 요구된다.

51) 박미선, 「新羅 五臺山信仰에 나타난 占察禮懺의 내용과 성격」, 뺷韓國思想史學뺸 33, 한국사상사학회, 2009.

52) 우주옥, 「高麗時代 線刻佛像鏡과 密敎儀式」, 뺷美術史學뺸 24, 한국미술사교육학회, 2010; 김수연, 「高麗時代 密敎史 硏究」, 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2;

김수연, 「소재도량(消災道場)을 통해 본 고려시대의 천문기양사상(天文祈禳思想)」, 뺷韓國思想史學뺸 45, 한국사상사학회, 2013.

53) 박성래 著, 앞의 책, 452∼470쪽; 도현철, 「조선 건국기 성리학자의 불교 인식」, 뺷한국 사상사학뺸 50, 한국사상사학회, 2015.

54) 이기운, 「조선 초 國行水陸齋를 통해본 밀교사상 연구」, 뺷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뺸 81,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2019.

55) 김지연, 앞의 글, 2014; 이병욱, 「조선시대의 미륵사상과 신앙의 4가지 유형」, 뺷원불교 사상과 종교문화뺸 81,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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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유교적 재이론에 입각한 재난 인식은 기본적으로 군주의 통치, 군 주와 신하(지배층)의 관계가 중심이었다. 그렇다면 민중의 재난 인식에 관 해서는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 근대 이전 시기, 전통시대의 재난에 대한 민중 또는 사회 일반의 인식을 살펴봐야 할 것이다. 여전히 기존 연구에서 는 자료 한계로 인하여 세밀하게 고찰하지 못한 한계가 있다.56)바로 위에 서 언급한 신앙에서 나타나는 재난 이해 양상은 당대의 지배층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 차원에서의 인식이 결합하여 있는 경우가 많다. 또한 조선 후기 미륵신앙과 뺷정감록뺸 신앙, 여러 문학작품에서 나타나는 재난 인식과 양상 등에 주목할 수 있다. 그러한 신앙과 열망의 흔적에서 재난, 재해의 실상을 유추해보는 방법론의 개발도 필요하리라고 본다.57)기층 민중과 지배층의 재난 인식을 아우르고, 그 사이의 갈등과 합치 양상을 살펴보는 것은 한국 재난 인식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필수적인 작업이 될 것이다.

넷째, 한국의 재난 인식에 관한 통사적 이해를 위해 유교적 천인감응설에 입각한 재이론이 19세기 이후 언제 어떻게 서양문명의 도입과 함께 변용되 고 현실적인 의미에서 해소되었는지를 검토하는 것도 향후 연구 과제가 될

56) 아직 시론적이지만, 최근 조선시대 필기․야담류에서 지배층에서 민중층에 이르는 역병 인식을 파악하려는 연구나 일기 등을 활용하려는 연구는 자료 한계를 벗어나는 시도로서 주목할 만하다. 강상순, 「조선시대의 역병 인식과 신이적 상상세계」, 뺷日本學硏究뺸 46, 단국대학교 일본연구소, 2015; 안대회, 앞의 글 참조.

57) 예를 들어 조선후기 유행한 뺷정감록뺸 등 각종 비결(祕訣)에는 재난 상황이 자주 묘사 되어 있다. 뺷정감록뺸의 여러 판본 중 대표적인 「감결(鑑訣)」에는 외세가 침범하여 안성 과 죽산 사이에 송장이 산을 이룬다든가, 한강 남쪽 100리에 닭과 개소리가 없고 인적이 영영 끊어질 것이라든가, 수년 동안 수해와 병화가 있고, 아홉 해 큰 흉년에 인민들이 나무껍질을 먹고 살고, 천 리에 이어진 소나무가 하루아침에 하얗게 서고 염병이 돌아 인명이 절반으로 준다든가 하는 식의 재난 상황이 기술되어 있다(백운항 편, 「감결」, 뺷정감록뺸, 일광사, 1986 참조). 이는 소빙기가 몰아닥친 기근과 감염병, 재난 상황에 대 한 조선 정부의 미흡한 대처 및 가렴주구 등의 사회상이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뺷정감록뺸 신앙에 관해서는 백승종, 「18-19세기 뺷정감록뺸을 비롯한 각종 예언서의 내용 과 그에 대한 당시대인들의 해석」, 뺷진단학보뺸 88, 진단학회, 1999; 김탁, 「조선후기의 예언사상-‘이필제사건’을 중심으로」, 뺷한국종교뺸 34,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2010;

백승종 지음, 뺷정감록 미스터리뺸, 푸른역사, 2012 참조.

(23)

것이다. 이는 현대사회의 재난 인식 연구를 직접 겨냥하는 사전 작업이 된다.

끝으로 본 글의 한계로서 재난 대응에 관한 접근이 부족한 점을 언급해 둔다. 재난 인식에 대한 정리와 함께 그에 동반하는 재난 대응에 관한 시기 별 실제 상황 및 연구사에 대해서도 면밀한 검토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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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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