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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북한 반소반공운동의 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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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북한 반소반공운동의 실상*

기광서 (조선대 교수)

51) 논문요약

본 논문의 목적은 해방 직후 반소반공운동의 발생 배경 및 주요 사건을 파악하고, 이 운동의 전반적인 성격과 특징을 살펴보는 데 있다. 소련군과 공산당에 반대하는 움직임 은 해방 직후부터 지속되었고, 이의 이념적 토대는 일제 당국의 정책과 교육에 의해 조 성되었다. 최초의 반공세력 가운데 가장 적극적인 활동에 나선 것은 백의사를 중심으로 남쪽에서 올라온 테러조직과 이와 연계한 세력이었다. 학생을 중심으로 한 대중적 저항 은 신의주학생사건과 반탁운동, 토지개혁 반대운동에서 활발히 이루어졌다. 그리고 도시 군인민위원회 선거 시기 기독교도의 반대운동은 사실상 마지막 대중참여적 저항이었다.

1947년 이후부터 반소반공 세력의 조직적 저항은 공산측의 정책적·물리적 조치에 의해 사실상 막을 내렸다. 이 때문에 반소반공세력의 활동은 남쪽에서 파견된 단체와의 연대 를 통해 더욱더 테러적 방식의 소규모 산발적 저항에 의존하게 되었다.

해방정국에서 반소·반공 세력들의 활동은 조직적으로 확대되지 못했고 점차 대중으로 부터 고립되었다. 해방이라는 시대적 공간에서 자신들의 주장에 충분한 대의와 명분을 갖추지 못했을 뿐 아니라 공산측이 주도한 정치 환경을 극복하기에는 역량이 턱없이 부 족하였던 것이다.

주제어: 반소반공운동, 북한, 신의주사건, 반탁운동, 토지개혁, 도시군인민위원회 선거, 백의사(⽩⾐社)

* 이 논문은 2016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16S1A5A2A0102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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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지금까지 해방 후 북한사 연구는 공산당과 소련 등 ‘권력의 주체’로 묘사되 는 행위자들이 중심 대상으로 자리하였다.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이러한 역 사적 경향은 당연한 현상이기도 하거니와 정치사를 권력에 대한 도전과 응전 으로 묘사할 때 도전자들의 위상과 활동이 파편화되거나 단편적으로 처리되는 경우가 다반사였음은 물론이다. 바로 해방 후 북한 반소반공운동의 경우가 적 절한 사례라 할 수 있다.

해방 후 북한의 반소반공운동은 눈에 띠게 조직적이지 못했고, 분산적·테러 적 성격으로 인해 크게 주목 받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이 운동세력은 반소반 공 이념에 따라 남쪽 우익세력과 연계하에 북한에서 새로 수립되는 질서에 저 항을 한 산발적 집단들이 중심이 되었다. 이들은 조직적으로 단결된 경우도 있었지만 자연발생적으로 가담한 경우도 많았다. 이들의 활동이 북한 질서 형 성에 크게 위협이 되지는 못했으나 지속적으로 공산지도부에 상당한 부담을 안겨 준 것은 사실이다.

본 논문은 북한 반소반공운동의 연원과 발생, 주요 사건을 살펴보고, 전반적 인 성격과 특징을 밝히는데 목적이 있다. 그간 반소반공운동은 충분히 조명될 요건이 갖추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적으로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다. 행위 주체인 공산당과 소련군 지도부 등 주체세력의 활동뿐 아니라 이에 도전한 반 소반공운동을 제대로 규명해야만 북한사의 온전한 구성체계가 갖추어지리라는 것은 자명하다할 것이다.

북한의 반소반공운동은 처음부터 주목 받지 못한 것은 아니었고, 많은 회고 와 저술이 남아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간 이 운동은 주로 이데올로 기적 관점에서 북한을 비판하기 위한 역사적 근거로서 해석되었다.1) 마찬가지 로 회고와 주관적 경험담을 토대로 서술된 기록들이 대부분을 차지한 조건에

1) 반면 김창순은 이 운동에 대해 “이데올로기 투쟁이라기보다 한반도는 한국인의 땅이라는 외세에 대한 저항 민족주의”라고 규정하였다. 金昌順, “북한에서의 반소·반공은 저항민족주의.” 北韓 1995년 6월호,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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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는 학문적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본 연구주제에 대한 선행 저술은 사실상 한국전쟁 이후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왕의 연구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는데, 첫째는 월남민 출신의 저자들이 북한 내에서 자신과 주변의 경험을 토대로 한 증언과 수기, 회고록이고, 둘째는 1차 자료에 기반을 둔 저술이다.

첫째 범주의 글을 살펴보면, 먼저 함석헌은 자신의 체험을 토대로 반소반공 운동의 대표적 사례인 1945년 11월 신의주학생사건을 조명하였다.2) 조영암과 홍성준은 조만식에 대한 회고를 통해 해방 후 반소반공운동의 동향을 살폈 다.3) 한재덕과 오영진은 뚜렷한 이데올로기적 관점과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해방 후 북한정치사를 정리하였고, 반소반공운동에도 상당 지면을 할애하였 다.4)

북한의 반공운동 및 북한 학생운동의 흐름을 개괄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기 록으로는 집단 저술인 북한반공투쟁사5)와 韓國學生建國運動史 : 반탁·반 공 학생운동 중심6)을 들 수 있다. 1990년 북한연구소가 발행한 北韓民主統 一運動史는 해방 후 북한 반소반공운동 기록을 집대성한 저작이다. 전5권으 로 이루어진 이 책은 북한의 5개 도별로 발생한 반소반공운동 사건들을 구체 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그 밖에 군(郡)단위에서 벌어진 사건과 운동을 기록한 일부 군지(郡誌)가 발간되었다.7)

둘째로, 위와 같은 1차 기록물들을 기초로 서술된 몇몇 연구 성과를 찾아

2) 咸錫憲, “내가 겪은 新義主 學生 事件.” 씨알의 소리 11월호, 1971.

3) 趙靈巖, 古堂 曺晩植, 政治新聞社, 1953; 洪聖俊, 古堂 曺晩植, 서울: 平南民報社, 1966.

4) 韓載德, 金日成을 告發한다 – 朝鮮勞動黨 治下의 北韓 回顧錄, 서울: 內外文化社, 1965; 吳泳鎭, 蘇 軍政下의 北韓, 국토통일원, 1983.

5) 한국통일촉진회, 북한반공투쟁사, 서울: 한국통일촉진회, 1971.

6) 韓國反託·反共學生運動記念事業會, 韓國學生建國運動史 : 반탁·반공 학생 운동 중심, 서울: 韓國反 託·反共學生運動記念事業會, 1986.

7) 이에 관한 대표적인 기록은 다음과 같다. 金聖 編, 寧遠郡誌 , 서울: 平安南道寧遠郡民會, 1992; 長淵 郡中央郡民會 編, 長淵郡誌, 서울: 長淵郡中央郡民會, 1995; 平安北道 龍川郡民會 編, 龍川郡誌, 서 울: 平安北道 龍川郡民會, 1998; 定州郡誌編纂委員會 編, 定州郡誌 2, 서울: 定州郡民會, 1999; 殷栗 郡 中央郡民會, 黃海道 殷栗郡誌, 서울: 殷栗郡 中央郡民會,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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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수 있는데, 이 가운데 주민영은 신의주학생 사건을 다루었고,8) 이성재, 이 덕일, 한건희의 연구는 북한 교회의 활동과 공산측과의 관계에 대해 서술하였 다.9) 기왕의 2차 연구는 종교세력의 반공운동을 제외하면 본격적인 반소반공 운동에 대해서는 거의 살핀 것이 없다고 할 것이다. 위의 1차 문헌들은 분명 지역별 반공운동과 당시 발생한 사건을 살펴보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그 러나 이들 기록은 주로 체험과 회고를 바탕으로 기술된 까닭에 학술적 객관성 차원에서 분명한 한계점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사실관계의 확정에 서 일정한 결함을 지니고 있는데, 이들 저술들이 사료로서 정당한 대우를 받 지 못한 것도 증언과 수기로서 검증자료의 한계로 인한 것이다.

본 연구는 러시아문서 자료를 검토 분석하고 기존 문헌들과의 대조 비교하 여 사실관계를 확정하며, 이를 기반으로 해방 후 반소반공운동의 실체를 규명 하고자 한다. 러시아 국방성문서보관소(ЦАМО), 국립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 (РГАСПИ), 대외정책문서보관소(АВПР) 등에 소장된 해방 후 북한 관련 문서, 특히 반소, 반공운동을 보여주는 다수 자료는 기존의 기록들과 교차 검 토를 통해 해방 후 북한에서 전개된 반소반공운동의 면모를 밝힐 것이다. 이 들 자료는 북한각지에 주둔한 소련군 경무사령부와 제25군 정치기관, 주북조 선 소련민정부 등 소련군 기관이 북한 각지에서 발생한 사건 및 상황을 기록 한 문서들이다. 이 문건들은 작성자의 비의도적인 오류가 내포되어 있을 수는 있지만 모두 ‘비밀’ 또는 ‘절대비밀’로 분류될 만큼 사실적 서술에 대한 신뢰성 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그간 회고와 증언에 의존해온 반소반 공운동의 실제를 규명하는데 더없이 유용하다고 말할 수 있다.

본 논문의 시간적 범위는 해방 후에서 1946년 10월 도시군인민위원회 선거 까지를 다루고자 한다. 그 이유는 논문 분량의 제한 문제가 크지만 이후 시기 의 반소반공운동은 대부분 테러적 활동에 국한되는 까닭에 운동의 의미 부여

8) 朱民影, “신의주 반소 · 반공의거.” 성신여자대학교 교육학과 석사학위논문, 2001.

9) 이성재, “해방 이후 북한 기독교와 공산정권과의 관계에 대한 연구.” 연세대학교 이론신학과 석사학위논문, 1992; 이덕일, “소련 군정하의 북한교회에 관한 연구.” 숭실사학 제13호, 1999; 한건희, “북한정권 초기 (1945-1953) 기독교계와 공산주의 세력의 갈등연구.” 고려대학교 북한학과 석사학위논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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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고려하였다.10) 반소반공운동의 영역은 구체적인 행위 가 수반된 사건을 대상으로 하였다. 물론 이들 사건도 연구의 제약상 모두를 다루는 것은 어려웠다.

이 글은 해방 후 북한 반소반공운동의 주요 사건들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발굴하고, 가능한 관련 러시아문건과 국문자료들을 교차 검토함으로써 역사적 사실을 올바르게 검증하고자 하였다. 또한 집적된 사실의 분석과 해석을 통해 반소반공운동의 다양한 특징들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지면상의 한계로 많은 부 분들을 담을 수는 없었으며, 이는 차후 집필과제로 남겨두고자 한다.

Ⅱ. 극우반공이데올로기의 형성 배경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마르크스-레닌주의가 한반도에 유입되어 민족해 방운동과 결합되면서 일제는 이에 대응하여 ‘문화정치’를 통한 민족분열정책을 시행하고 사상의 억압을 제도화하기 시작하였다. 3.1운동 이후 일제의 ‘문화정 치’ 시기에 사회주의이념은 별다른 비판 없이 소개되기도 했으나 점차 이는 불온사상으로 간주되었다.

1925년 5월 제정된 치안유지법은 사상활동 및 혐의에 대해 처벌하는 법이 었다. 사상범죄는 일제 지배체제에 대한 일체의 저항과 공산주의적 활동, 그리 고 그 사상을 회포(懷抱)하고 논하는 행위를 일컫는 것이었으며, 바로 치안유 지법은 소련을 선두로 한 공산주의적인 모든 것에 대한 ‘방공’과 ‘반공’의 입법 이었다.11) 1920년대 말까지 반공이데올로기는 대대적으로 유포되지 않았지만 민족해방운동의 이념적 기반이 사회주의계열로 넘어간 1930년대 이후 공산주 의와 소련에 대한 비판은 급격히 강도를 높이게 되었다.

1935년 이후 일제는 코민테른이 인민전선전술을 채택하여 모든 반제국주의 세력의 단결을 도모하자 이에 대응하여 광범한 사상통제체제를 구축하였다. 이

10) 테러활동과는 다른 조선민주당과 천도교청우당의 상하부 저항에 대해서는 다른 지면에서 다루고자 한다.

11) 전상숙, “사상통제정책의 역사성–반공과 전향.” 韓國政治外交史論叢 제27집 1호, 2005, pp. 8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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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선에 따라 공산주의세력이 항일의 기치하에 다양한 세력을 끌어들일 가능성 이 증대하는 상황에서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의식을 확고히 갖추고 민 심의 동요를 막아야만 했다. 1936년 12월 일본 내무성은 “여하한 운동이 합법 적으로 전개된다하더라도 그 의도하는 바가 코민테른 신방침의 실천이 되거나 또는 공산주의혁명에 대중을 동원하는 것이 되는 이상 단호히 소멸을 기한다”

라는 방침을 발표하였다.12) 1936년 12월 보호관찰령이 공포되면서 사상범을 대상으로 사법 감시체계가 구축되었다. 이에 따라 경성, 함흥, 청진, 평양, 신 의주, 대구, 광주 등 전국 7개 지역에 보호관찰소가 설치되어 미전향 사상범을 수용하였다. 공산주의자들에게 강제된 사상전향은 중일전쟁 이후에는 민족주의 자들에게도 강제됨으로써 반공주의 논리는 더욱 확장되었다.

1938년 4월 국가총동원법이 공포되고 사회전체가 전쟁 수행을 위한 총동원 체제로 전환되었다. 이 목적 실현을 위해 7월에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이 창립되어 전조선의 황국신민화를 도모하였다. 동시에 보호관찰소의 외곽단체로 결성된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時局對應全鮮思想報國聯盟)은 조선 전향자 의 국가총동원운동에 협력을 더욱 강화하고, 적극적으로 사상국방전선(思想國 防戰線)에서 활동하여 모든 반국가사상을 파쇄격멸하는 목표를 추구하였다.13)

더 나아가 1938년 8월 일제는 조선방공협회(朝鮮防共協會)를 설치하고 지 역 기층조직으로서 방공단의 전국적 조직구축을 통해 전사회적인 방공화를 본 격적으로 추진하였다. 군단위 이하의 방공단의 경우 경찰서 및 주재소 소재지 로부터 4km 범위 안에 거주하는 청장년을 조직대상으로 하였는데, 전체가 아 닌 우수한 분자 약 50여명 정도의 기간조직을 구축하는데 역점을 두었다.14) 이와 함께 직장단위 방공단의 설치가 권장되었다. 조선방공협회는 “일반대중을 총동원하여 공산주의 사상 및 그 운동의 오류를 주지시키고 이를 박멸하고 방 위하는 것과 더불어 나아가 일본정신의 앙양을 도모함으로써 사상국방의 완벽

12) 이태훈, “일제말 전시체제기 조선방공협회의 활동과 반공선전전략.” 역사와 현실 제93호, 2014, p. 139.

13) 최선웅, “일제 시기 사법보호사업의 전개와 식민지적 성격–사상범 사법보호단체를 중심으로.” 東方學志

제186집, 2019, p. 293.

14) 이태훈, “일제말 전시체제기 조선방공협회의 활동과 반공선전전략,” p.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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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기한다”는 것을 공식 목표로 천명하였다.15) 실제적으로는 경찰과 관리기관 만으로 소련과 코민테른에 의한 각종 침투를 막기가 어렵기 때문에 일상적인 방공체제를 만들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 단체의 활동은 지역과 직장, 교우 회, 동창회 등을 포괄하는 방대한 조직을 기반으로 영화·연극·강연·포스터·글짓 기 등으로 나타난 선전방식을 활용하여 대중에게 반공 의식을 불어넣는데 집 중하였다. 이를 통해 공산주의를 인류의 ‘절대 악’으로 이미지화하고, 특히 그 대표 국가인 소련을 악마로 그렸다.

방공협회는 1940년 10월에 설립된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흡수되고, 말단기 구는 애국반으로 통합되었지만 반공반소 선전이 일상화된 후였다. 1941년에는 치안유지법의 개정을 통해 예방구금제도를 도입하여 사상범을 형기 만료 후 에도 계속 격리할 수 있게 하였다.16) 이와 함께 1940년 말까지 전국 7개 지 부, 83개 분회, 약 3,300여 명의 맹원을 둔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이 1941 년 1월 갑자기 해소되고 각 보호관찰소 직속 대화숙(大和熟)으로 재조직되었 다. 사상보국연맹에서 대화숙으로의 전환은 국민정신총동원운동에서 국민총력 운동으로의 전환을 배경으로 전자의 불비한 사법보호단체로서의 한계를 극복 하고 전향자들에 대한 통제를 일원화하려는 것이었다.17) 이는 사회 전반에 대 한 저항의지를 꺾는 효과를 낳을 것이었다.

일제가 사회주의사상과 소련의 영향력 침투를 막는데 심혈을 기울인 것은 그것들이 체제를 위협하는 실질적인 요소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일제의 반공이데올로기 선전과 방공정책은 조선인의 의식구조에 상당히 침투하였을 것이다. 특히, 1930년대 후반 이후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반공이데올로기는 전 계층을 대상으로 선전되었고, 민족개량주의자들과 유산계층, 친일세력에 침투 하여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을 수행하는 도구로서 활용되었다.

일제하 반공이데올로기는 내적으로 정연한 논리 체계를 갖춘 이념도 아니며

15) 朝鮮總督府 警務局 保安課, 朝鮮に於ける防共運動, 1939, 3쪽; 이태훈, “일제말 전시체제기 조선방공 협회의 활동과 반공선전전략.” 역사와 현실 제93호, p. 134에서 재인용.

16) 전상숙, “사상통제정책의 역사성–반공과 전향,” p. 84.

17) 최선웅, “일제 시기 사법보호사업의 전개와 식민지적 성격–사상범 사법보호단체를 중심으로,” p. 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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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익민족주의세력이 공산주의 사상과 직접적 논쟁 과정을 거쳐 구축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일제하 민족주의 세력에게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처음부 터 부정적으로 인식되었다. 1920년대 후반 신간회(新幹會)의 결성을 통해 민 족협동전선으로서 좌우의 연대가 성공하는 듯 보였으나 얼마 후 좌익측의 노 선 전환 등으로 인해 이 전선은 좌절되었다. 이때부터 민족주의세력의 입장에 서는 더 이상 공산주의자들을 민족운동의 동반자이자 협동의 대상으로 인정하 지 않게 되었다. 더욱이 1930년대 일제가 파시즘 국가체제로 재편을 강화하자 민족주의세력은 이에 편승하여 계급의식과 사회주의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였 다.18) 좌우의 대립은 단순한 이념의 경계에 머무르지 않았고 그에 못지않은 감정적 대립과 정서적 불인정이 서로 상대에 대한 인식을 규정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해방 후에도 일제 반공정책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그리고 공산당에 대한 특정 계층과 일반의 인식 구조에 상당 부분 반영되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 다.19) 좌우대립의 질서가 구축되는 과정에서 일제의 반공반소 이데올로기는 우익진영의 정책과 활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Ⅲ. 해방 초 반소반공운동의 발발 1. 소련군 진주 직후의 테러활동

해방 직전인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의 대일본 참전은 미국이 일본의 두 도 시에 핵무기를 투하한 것과 더불어 일본의 항복을 결정지은 사건이었다.20) 새 로운 ‘해방자’를 조선의 군중들은 태극기와 소련기를 들고 맞이하였다. 소련군

18) 김봉국, “탈식민 전후 반공담론의 지속과 변주.” 역사연구 제32호, 2017, pp. 67-68.

19)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해방후 민족국가건설운동과 통일전선, 서울: 역사비평사, 1993, pp.

85-86.

20) 이에 대해서는 기광서, “소련군의 대일전 참전과 러시아에서 본 광복의 의의 및 평가.” 軍史 제96호, 201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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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 진주한 북한의 각 도시마다 환영의 물결은 눈에 띄는 광경이었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 지휘부가 공공질서를 유지하고 주민생활을 안정시키 기 위해 노력한 것과 대조적으로, 일부 소련군 병사들에 의한 강도, 폭력 및 기타 범죄 행위도 드물지 않게 발생하였다. 이것은 소련과 그 군대에 대한 현 지 주민의 태도에 매우 부정적인 효과를 낳았다.21) 더구나 소련군 병사들의 일탈행위는 반소반공세력들에게 활동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소련군 주둔과 공산당의 권력 장악에 반발하여 이후 남쪽으로 넘어간 사람들 은 소련 군인들의 소행을 반소반공 선전에 적극 활용하였다.

소련군은 각 도·시·군에 경무사령부를 설치하고 질서 유지와 협력자 발굴, 반소 비방선전 적발 등에 나섰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잠재적인 반소반공 세력의 활동은 당장 눈에 띠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소련군의 평양 진주 직후 현준혁(玄俊爀) 피살 사건이 발생하였다. 현준혁은 공산당 평남도당 서기로서 평양의 공산당 조직과 활동을 지도한 인물이었으며 민족주의 지도자 조만식과 협력적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는 9월 3일 조만식과 트럭에 동승하였다가 해 방 직전 평양에서 관동군 정보기관 밀정 출신 염동진(廉東振)이 주도한 극우 단체 대동단(大同團) 소속 백관옥(白寬玉), 선우봉(鮮于鳳), 박진양(朴珍陽)에 의해 피격되었다.22) 염동진(본명: 염응택)은 처음 김구 계열로 낙양군관학교에 다녔으며 이청천의 신한독립당 간부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일제 말 관동군 헌 병대에 체포된 후에는 그 밀정이 된 인물이다. 처음 소련군 당국은 현준혁 피 살 사건의 원인으로 경무사령부가 민족주의 진영의 ‘보안대’를 해산시키는 일 을 현준혁이 도와준 데 있었다고 보았다.23) 이후 염동진 일행은 서울로 내려 와 극우테러단체 백의사(白衣社)를 결성하여 전국적으로 반소반공 테러활동을 펼쳐나갔다. 이 시기 또 하나의 폭력적인 사건으로는 9월 16일 황해도 해주에 서 우익 테러분자들의 무장습격사건이다. 이로 인해 공산당 도당 부위원장과

21) “샤포즈니코프, 조선의 상황(1945.9.13.).” ЦАМО, ф. 32, оп. 11306, д. 692, л. 32.

22) 鄭秉峻, “백범 김구암살 배경과 백의사.” 한국사연구 제128호, 2005, p. 268.

23) “샤포즈니코프, 조선의 상황(1945.9.13.).” ЦАМО, Ф. 32, оп. 11306, д. 692, л.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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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청 지도자를 포함한 간부 5명이 피살되었다.24)

처음 북쪽에서 조직된 대동단의 테러 활동이 반소반공운동의 시초였다면 이 들이 남쪽으로 내려가서 남한테러단체와 결합하고, 일부가 다시 북쪽으로 유입 되어 테러활동을 전개하였다. 즉, 그들은 남쪽의 우익 테러조직들과 연계를 가 지고서 인민위원회와 공산당, 소련에 반대하여 삐라를 살포하거나 테러를 모의 시행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 가운데 민족사회당의 경우 남쪽 세력과의 연계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눈에 띄는 단체로 볼 수 있다. 이 당은 130여 명의 당원 과 평안남도 9개 군에 지부를 두고 반공활동을 전개하였으나,25) 뚜렷한 활동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소련군에 의해 친파시스트적이라는 이유로 강제 해산 되었다.

2. 반소반공의 상징, 신의주학생사건

북한 우익세력들의 반소·반공적 지향성이 크게 표출된 사건은 잘 알려진 ‘신 의주반공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신의주는 국경에 위치하여 외지인들의 왕래 가 빈번한 도시였다. 해방 직후 일부 소련군에 의한 일련의 약탈 행위는 가뜩 이나 기독교의 기반이 강한 이 도시에 반소반공 의식을 심어주는 역할을 하였 다. 해방 직후 어수선한 도시 분위기 속에서 몇몇 정치결사가 등장하였다. 사 회민주당은 1945년 9월 신의주에서 상인 출신 강모(姜某)26)의 주도로 결성되 었으며, 공교롭게도 조만식의 조선민주당 창당 일자와 같은 11월 3일 정식으 로 창당했다.27) 목사 한경직과 윤하영도 창당 인사로 참여하였다. 소련군 당국 에 당 등록 당시 당원 수는 197명이었고, 11월 말에는 1,300명으로 증가하였

24) “북조선 정치상황에 대하여(1945.9.22.).” ЦАМО, ф. УСГАСК, оп. 433847C, д. 1, л. 47-48.

25) “레베데프가 슈티코프에게. 북조선 주민의 정치적 상태 보고(1945.9.19.).” ЦАМО, ф. 234, оп. 3225, д. 47, л. 236; 洪聖俊, 古堂 曺晩植, pp. 192-193. 같은 시기 이용직(李容稷)이 지도한 태극협회(太 極協會)도 불법단체로 탄압을 받았다.

26) 러시아 문서에 그의 이름은 강대희(Кан Де Хи)로 나와 있으나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

27) “메클레르, 북조선 정당사회단체 평정(1946.1.12.).” ЦАМО, ф. 172, оп. 614631, д. 43, л.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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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28) 다만 당세는 평안북도 지역을 넘지는 못했다. 이 당은 공산당과 공동행 동을 표명하기도 했으나 실제로는 김구의 임시정부를 지지하였다. 또한 당 선 언과 강령을 통해 독립 민주국가 건설을 지지하고 외세의 영향력에 반대하고 나섰다.29) 여기서 ‘외세’는 소련을 지칭한 것으로서 처음부터 반소적 성격을 드러내 보였고, 동시에 계급 독재의 배격을 내세움으로써 사실상 공산측의 정 책에 반대할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토지 문제와 대해서는 국가가 지주로부터 토지를 매입해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유상몰수 방식을 제기하였다.

해방 직후 신의주 지역 청년조직을 이끈 것은 공산측의 평북청년회와 결별 하고 8월 23일 결성된 우리청년회였다. 이 단체는 인민위원회와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우익계 중학생들이 참여하였고, 자작농 이상 가정 출신의 민족주의·

자유주의적 인텔리 청년들이 단합한 조직이었다. 우리청년회는 기관지 우리 靑年을 통해 지역민들의 명성을 끌면서 공산측의 주목 대상이 되었다.30)

신의주학생사건의 출발은 11월 18일 용암포 사건이 도화선으로 작용하였다.

용암포 인민위원장 이용흡(李龍洽)의 주로로 개최된 시민대회에서 학생대표로 등단한 최병학이 공산당이 당원 강습소로 쓰고 있는 수산학교를 반환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가 이용흡이 이끈 공산당을 비난하는 연설을 하자 시민들이 이 에 호응하면서 시위로 전환되었다.31) 이튿날 공산측이 노동자와 농민을 동원 해서 수산학교를 습격하고 학생들과 주민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바람에 그들 의 공분을 샀다. 용암포 사건에 자극을 받은 신의주 학생들은 곧바로 조사위 원단을 꾸려 현지로 갔으나 공산측은 그들의 항의와 체포된 학생들의 석방 요 구를 무시하였고, 조사위원단은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11월 23일 신의주 학생사건은 바로 용암포 사건에 대한 학생들의 반발에서

28) “메클레르, 북조선 정당사회단체 평정(1946.1.12.).” ЦАМО, ф. 172, оп. 614631, д. 43, л. 8-9;

“슈티코프. 북조선의 정치 상황에 대하여.” ЦАМО, ф. 172, оп. 614631, д. 38, л. 23.

29) “쉬킨이 로조프스키에게, 북조선 정치상황에 대한 보고(1945.12.25.).” АВПР, ф. 013, оп. 7, п. 4, д. 46, л. 7.

30) 북한연구소, 北韓民主統一運動史(平安北道篇), 서울: 北韓硏究所, 1990, p. 345.

31) 朱民影, “신의주 반소 · 반공의거,” pp.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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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났다. 평안북도 인민위원회 문교부장을 지낸 함석헌은 신의주학생사건을 촉발한 가장 직접적인 원인으로 공산당이 허가 없이 재판소 건물을 무단 사용 하게 된 것을 들었다.32) 공산측은 우리청년회가 중학생들의 무력시위를 주도 한 것으로 보았다.33) 우리청년회 지지자 중 일부는 인민위원회와 보안서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이날 신의주 6개 학교 학생 3500명이 3개 반으로 나누어 제1반은 도인민위 원회, 제2반은 도공산당본부, 제3반은 시보안서를 공격하기로 하였다.34) 학생 시위대가 내건 요구는 소련과 공산당을 몰아내고, 학원 자유를 쟁취하는 것으 로 대표되었다. 계획대로 학생들이 도인민위원회와 공산당사를 습격하자 공산 측은 무력으로 이를 진압하기 시작하였다. 곧이어 소련군대가 개입하여 사상 자가 확대되었다.

결국 신의주사태는 무력으로 진압되었으나 그 여파는 매우 컸다. 공산측은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11월 26일 김 일성은 신의주 상공인과 의사 대표들을 면담한 자리에서 신의주와 용암포 사 건은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비롯한 반동분자들이 공산당과 정권기관에 잠입 한 ‘일부 나쁜 놈들’의 행동을 악용하여 학생들을 선동하여 일어난 것으로 설 명하였다.35) 그는 다음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신의주에서 군중집회를 열고 신의주와 용암포 사건이 반동분자들의 책동으로 일어났음을 재차 강조하였 다.36)

11월 29일과 30일에는 종단 및 여성 대표들이 평안북도 군사령부 대표 S.

I. 그라포프 대좌를 방문하여 학생들은 선동 당했을 뿐이고 소련군 사령부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사태를 조사하여 잘못한 자들을 처벌해줄 것을

32) 咸錫憲, “내가 겪은 新義主 學生 事件,” p. 42.

33) “북조선 정치상황에 대하여.” ЦАМО, ф. 172, оп. 614631, д. 38, л. 31.

34) 朱民影, “신의주 반소 · 반공의거,” p. 20.

35) 김일성, “신의주시내 상공인, 의사, 기독교인들과 한 담화(1945년 11월 26일).” 김일성전집 제2권, 평 양: 조선노동당출판사, 1992, p. 335.

36) 김일성, “해방된 조선은 어느 길로 나갈 것인가. 신의주시군중대회에서 한 연설(1945년 11월 27일).” 김 일성전집 제2권, 평양: 조선노동당출판사, 1992, p. 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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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청하였다.37) 여성 대표들은 신의주 공산당 내에 옳지 못한 나쁜 사람들이 있다고 하였는데, 공산측이나 시민단체 모두 사태의 책임으로 공산당과 정권기 관에 있는 일부 인사들의 행위를 지적한 것은 일치된 견해였다. 그럼에도 공 산측은 북한 내 모든 ‘반동조직’은 남쪽의 반동들과 연계를 가지고 그들로부터 지시를 받으며 인민위원회와 공산당, 그리고 소련을 중상하는 활동을 하는 것 으로 단정하였다.38)

신의주사건의 여파는 여러 부문에서 큰 변화를 초래하였다. 우선 공산지도 부는 학생과 주민들을 대상으로 교육과 선전활동을 강화하여 ‘반동’의 영향에 서 벗어나는데 힘을 기울였다. 또한 권력기관의 숙청이 뒤따랐는데, 인민위원 회에서는 ‘친일분자’들이 쫓겨나고, 그 자리는 ‘민주정당’의 대표들로 충원되었 다. 이를테면, 1945년 11~12월 소련군 당국의 요구에 따라 상해임정요인이자 한독당 대표 등을 역임한 저명한 민족주의자 이유필(李裕弼)이 평안북도 인민 위원회 위원장직에서, 공산주의자 한웅(韓雄)은 도보안부장직에서 물러났다.39)

신의주사건의 희생자 통계는 출처마다 매우 다르게 나와 있기 때문에 확정 하기는 어렵다. 사망자는 대략 20~150명까지 분포되며, 부상자는 수백 명에 이르렀다.40) 공산측은 사건의 주도 세력으로 지목된 우리청년회, 사회민주당 등을 해산 조치하였고, 우리청년회 회장 김성순을 비롯한 일부 지도간부들은 피체 후 소련 수용소로 이송되었다.41)

신의주학생 사건은 공산주의에 반대하여 일어난 사태라기보다는 소련군의 약탈적 행위와 현지 공산당의 횡포에 대한 반감이 쌓여 발생하였다. 이 사건 으로 소련과 공산당 지도부는 통치 방식을 재검토하고 자체 체계를 정비하는

37) “북조선 정치상황에 대하여.” ЦАМО, ф. 172, оп. 614631, д. 38, л. 31-32.

38) “조선의 정치상황에 대하여.” РГАСПИ, ф. 17, оп. 128, д. 1119, л. 162.

39) “슈티코프. 북조선 정치 상황에 대하여.” ЦАМО, ф. 172, оп. 614631, д. 38, л. 29. 이유필은 12 월 3일 임시정부요인의 환국을 맞이하고자 서울로 향하던 도중 사망하였다.

40) 朱民影, “신의주 반소 · 반공의거,” p. 28; “신의주학생 폭동(신문 특별판).” ЦАМО, ф. УСГАСК, оп. 343253, д. 2, л. 194. 이 기사는 남한 한민당이 학생들을 선발하여 평양과 신의주에 파견하여 정 치투쟁을 도모하였는데, 평양에서는 실패하였고, 신의주에서는 성공을 거두었다고 평가하였다.

41) 咸錫憲, “내가 겪은 新義主 學生 事件,” p.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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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기로 삼았다. 그러나 신의주사건 이후에도 소련군 현지 지휘부의 이탈행위는 근절되지 않았다. 다음의 소련군 보고서는 그 실제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음주는 온갖 특이한 사건들과 부도덕한 행동들의 원천으로, 도처에 서 볼 수 있다. 특히 음주는 신의주에서 번창한 데, 심지어 낮에도 길 거리에서 술에 취한 군무원들을 볼 수 있다. 밤만 되면 모든 여관이며 공창(신의주에 70 곳이 넘는다)마다 술잔치가 벌어진다. 취한 군관들은 바로 거기서 순찰중인 경무부대원들의 묵인 하에 병사들과 교대로 창 녀를 찾는다. 신의주에 주둔하고 있는 비행사단의 개별성원(정치부장 추니크 중좌)도 이런 온갖 추태스런 품행을 보이고 있다. 소좌 데미도 프가 지휘관으로 있는 현지 보병연대 군무원들 역시 이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데미도프는 토요일 아침부터 다음날 저녁까지 이틀 동안(12월 8~9일) 그에게 별도로 제공된 경무사령부 여관방 두 개에서 계속 창녀 들과 술잔치를 벌였다(마침 거기서는 군고문관 그라포프 대좌와 도경 무사령관 기르코 중좌가 지내기도 하는데, 이 일은 그들이 보는 앞에서 벌어졌다). 도경무사령부 정치 담당 부사령관인 아탸소프 는 우리의 제 의에 따라 술에 취한 데미도프에게 제어하려 했으나, 그는 거친 욕설로 반응하면서 여관방들은 ‘경무사령관 기르코가 손수’ 자신에게 제공한 것이라고 말했다.

신의주 주재 도경무사령부의 특성은 다음과 같은 것도 있다. 회의 참석차 이틀 일정으로 평양으로 떠난 기르코 대신 자리를 지킨 부사령 관 표도로프 소좌는 이틀 동안 술에 취해 사령부에 나타나지 않았다.

사령부에는 당직 사관만이 남아 있었고 심지어 군관조차 한 명 없었다.

고주망태가 된 표도로프와 군관들을 우리는 이틀째 되는 날 집에서 발 견했으며, 경무사령부의 나머지 군관들의 소재는 파악할 수 없었다. 대 도시 신의주는 이틀 동안 실질적으로 경무사령부의 감시 밖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은 바로 최근 신의주에서 있었던 조선 민족주의자들 의 시위의 일부 원인을 설명하고 있다(강조는 인용자).42)

바로 소련군의 일탈 행위가 신의주사건의 주요 원인이었다는 점을 소련군

42) “표도로프가 칼라쉬니코프에게. 보고서(1945.12.29.).” ЦАМО, ф. 172, оп. 614631, д. 37, л.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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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부도 인정한 것이다. 신의주 사건 이후 소련군인의 약탈행위는 줄었지만 횡포는 곧바로 중단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남북 우익세력 들의 반소반공적 태도와 활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실제적 명분을 더해주었다.

Ⅳ. 모스크바 결정이후 반소반공운동의 전개

1. 반탁운동의 양상

1945년 12월 말 미·영·소 3국 외상이 모스크바회담에서 합의한 한국문제에 대한 결정은 한국 정치세력의 분열과 대립의 직접적 요인이 되었다. 한국임시 정부 수립과 5년 이내 신탁통치(후견) 실시로 요약되는 이 결정에 대해 좌우 양진영에서 신탁통치(후견)의 수용과 반대라는 극단의 입장으로 갈라서는 바람 에 양측의 대립은 격렬한 양상으로 치달았다.43) 더욱이 신탁통치가 처음 ‘강대 국들의 공동통치’에서 ‘한국임시정부에 대한 원조 및 협력 대책’으로 그 내용 이 변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정이 좌우세력의 인식을 변화시킬 가능 성은 없어 보였다. 우익세력은 신탁통치라는 용어가 주는 부정적 의미를 최대 한 활용하여 대중을 반탁운동으로 결집시키고자 하였다. 이로부터 모스크바 결 정은 한반도 문제 해결의 방도가 아니라 한민족의 분열과 대립을 가속화시킨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모스크바 결정에 찬성하는 공산당과 소련은 우익측으로부터 찬탁세력으로 몰려 직접적인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심지어 김원봉(金元鳳)의 의열단을 모태

43)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문제에 관한 4개 항의 결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독립국가로서 조선의 부활 등을 위한 조선 임시민주정부 수립, 2) 조선임시정부의 지원 등을 위한 미소공 동위원회 결성. 위원회는 자체 제의를 작성할 시 조선민주정당 및 사회단체와 협의해야 함. 위원회가 작 성한 권고안은 공동위원회를 대표한 두 정부에 의한 최종 결정이 채택될 때까지 미·소·영·중 정부의 심의 에 회부되어야 함, 3) 조선 임시민주정부와 민주적 조직들의 참여 하에 조선 인민의 진보 및 조선의 국가 적 독립의 확립 등을 위한 원조 및 협력 대책(신탁통치 또는 후견제)의 작성을 공동위원회에 위임함. 조 선 임시정부와 협의 후에 공동위원회의 제안은 5년 이내로 조선에 대한 4개국 신탁통치(후견)의 협정을 이끌어내기 위해 미·소·영·중 정부의 공동 심의에 회부됨, 4) 긴요한 문제들의 심의를 위해 조선 주둔 미 소사령부 대표자 회의를 2주 이내에 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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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하여 해방 직후 서울에서 문현승이 조직한 ‘대한의열단’ 일부 단원들이 김 일성을 주적으로 단죄하고 그를 물리적으로 제거하기로 하였다는 진술도 나왔 다.44) 물론 이는 김원봉측의 공식 노선이라기보다는 일부의 이탈적 행동으로 볼 수 있으나 탁치 문제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정국을 흔들어 놓았는지 확인해 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 직후 북한 내 여러 도시들에서는 신탁통치에 반대하고 공 산당과 소련군에 대한 저항을 호소하는 전단이 살포되었다. 1945년 12월 30일 밤부터 평양에서는 ‘신탁통치 반대’, ‘공산당을 배격한 민주정부 수립’ 등을 내 용으로 하는 전단이 뿌려졌고, 1946년 1월 초까지 이들 전단을 살포한 70명이 체포되었다.45) 이들은 주로 중학생들로 구성되었고, 그중 6명은 공산당 지도자 들에 대한 테러행위의 조직 임무를 띠고 서울에서 파견된 학생들이었다.46) 1 월 3일 철원에서는 병원장과 여관 주인, 촌장 등이 주동이 되어 100여명이 모 여 시위를 조직하여 시가행진을 시도하였다.47) 공산측은 여기에 개입하여 모 스크바 결정의 진위에 대해 군중들에게 해설함으로써 시위를 진정시켰다.

1945년 12월 30일에서 이듬해 1월 5일까지 황해도에서는 삐라 살포 및 시위 조직 혐의로 20명이 검거되었다.48) 이밖에 함흥, 원산, 덕천, 안악 등지에서 소규모 반탁시위가 벌어졌다.

이후 북한 내 반탁운동은 소강상태를 보인 듯 했지만 그것은 표면적 현상이 었을 뿐 상당수 학생들의 움직임은 공산측에게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하였다.

특히 모스크바 결정에 반대한 민주당 조만식 그룹이 축출되고 공산측이 주도 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발족으로 우익세력들의 불만은 내부적으로 고조되

44) “수슬로프에게. 김정의 심문조서.” РГАСПИ, ф. 17, оп. 128, д. 205, л. 117-118.

45) “추코프,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과 관련한 조선의 정세(1946.1.12.)”, ЦАМО, ф. 172, оп. 614631, д. 37, л. 40-41.

46) “연해주군관구 정치국 7과의 1945년 12월 사업 보고서.” ЦАМО, ф. 172, оп. 614631, д. 37, л.

2; “이그나티예프. 조선 후견에 관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과 관련하여 북조선 주민들의 정치적 분위기 에 대한 조회(1946.1.14.).” ЦАМО, ф. УСГАСК, оп. 102038, д. 2, л. 9.

47) “이그나티예프. 조선 후견에 관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과 관련하여 북조선 주민들의 정치적 분위기에 대한 조회(1946.1.14.).” ЦАМО, ф. УСГАСК, оп. 102038, д. 2, л. 10.

48) 위의 자료, л.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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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었다.

1946년 3.1절 행사는 해방 후 처음으로 맞는 3.1절이란 점에서 북한과 소련 지도부가 심혈을 기울여 준비하였다. 그런데 2월 27일 평양 시내 일부 중학교 와 직업기술학교 대표학생들은 비밀모임을 갖고 3.1절 시위에 참가하지 않고, 2월 28일부터 모든 학교가 동맹휴업에 들어갈 것을 결의하였다. 이들은 조선 민족정부 수립을 촉진할 것, 신탁통치 및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에 대한 항의를 촉구할 것, 구금된 학생들을 모두 석방할 것, 식량문제를 해결할 것, 언론·출 판·집회·이동·결사·여행의 자유를 부여할 것, 학생과 주민에 대한 억압을 중단 할 것 등 일련의 요구를 제기하였다.49) 이들의 요구 사항에는 반소반공적 주 장이 직접적으로 표명되지는 않았지만 그 속에는 그러한 내용이 충분히 읽혀 졌다.

3.1절 행사는 폭력으로 얼룩졌다. 남쪽의 우익진영은 반탁운동의 일환으로

‘대북타격 정책’을 실행에 옮겼는데, 이는 김구-신익희로 이어지는 임정계가 주도하였다.50) 정치공작대와 백의사 단원들은 3.1절 평양행사에서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지도부와 소련군사령부 대표들이 참석한 행사 연단에 수류탄을 투 척하였다. 이때 연단과 광장 경비를 책임지고 있던 Ya. T. 노비첸코 소위가 수류탄을 손으로 받아 불발탄으로 터지는 바람에 큰 인명피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51) 권총과 수류탄을 소지한 테러분자 2명이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그 외에도 소련 방첩기관과 보안대에 의해 100여명이 체포되었다.52)

3.1절 이후에도 평양 학생들의 동맹휴업은 계속되었다. 출석하지 않은 학생 들을 퇴학 처분할 것이라는 평안남도인민위원회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3월 4일 수업에는 20% 미만의 학생이 출석했고, 3월 5일과 6일에는 35%, 3월 7일에

49) “평양 중등학교 학생들의 파업 관련 자료.” ЦАМО, ф. 172, оп. 614631, д. 21, л. 1-2.

50) 도진순,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이승만·김구 시대의 정치사,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1997, pp.

76-77.

51) 3.1절 수류탄 투척사건과 노비첸코에 대해서는 “슈킨이 로조프스키에게(1946.4.9.).” АВПР, ф. 102, оп. 6, п. 2, д. 10, л. 1-2 참조.

52) “메레츠코프가 몰로토프 동지에게(1946.3.1.).” ЦАМО, ф. 142, оп. 551975C, д. 5, л.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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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다시 20% 이하로 떨어졌다.53) 이처럼 남쪽에서 파견된 테러세력의 활동을 제외하면 학생들의 조직적 항의가 반소반공운동의 주도적 모습으로 등장하였 다. 공산측은 학생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이들 다수가 부르주아 지주로서 내면화된 가정의 정치적 분위기를 학교로 가져왔다고 보았고, 다수 교사들도 일본에서 수학한 부르주아 지주이자 인텔리들로서 ‘정치 밖’에 있다 는 점을 들었다.54) 이런 이유 때문에 민주청년동맹이 학생들 사이로 침투할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산측의 설명에는 학생들의 저항을 계급적 시각에서 바라보았을 뿐 자기의 정책적 오류나 준비 부족에 대해서는 언급되 지 않았다.

모스크바 결정 발표 직후에 나타난 북한 내 반탁운동은 학생들 중심의 조직 적 저항 형태를 띠었다. 여기에는 전단 살포와 동맹 휴학 등이 주된 투쟁 양 식이었다. 하지만 반탁운동은 체계적인 조직적 지도가 미미했을 뿐만 아니라 소련군과 보안대의 신속한 대처로 인해 북한 전역으로 확대되기는 어려웠다.

공산지도부는 모스크바 결정의 정당성에 대한 광범위한 선전선동 활동의 전개 를 통해 주민들의 반대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차단시켰다, 다만 평양을 중심으 로 한 대도시 학생들의 반탁운동 및 남쪽과 연계된 테러활동은 토지개혁 기간 에도 토지개혁 문제와 결합하여 지속되었다. 특히 테러 활동은 산발적이지만 북한전역에서 상당 기간에 걸쳐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

2. 토지개혁에 반대한 저항과 테러

소련군 진주 후 일부 주민들 가운데서 반소 감정이 태동한 원인 가운데는 북한 주둔 소련군 부대를 위해 식량을 공출한 것과 공출이 끝날 때까지 곡물 의 자유거래를 금지한 데 있었다. 공출된 식량이 소련으로 반출되어 도시주민 들이 굶주릴 것이라는 소문이 여론을 악화시키기도 했다. 소련군 사령부는 이

53) “평양 중등학교 학생들의 파업 관련 자료.” ЦАМО, ф. 172, оп. 614631, д. 21, л. 2.

54) 위의 자료, л.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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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한 상황을 인지하고 곡물의 자유거래 금지를 풀었고, 소련군 부대를 위한 공출을 수매 방식으로 전환하였다.55) 하지만 이후에도 소련군대를 위한 공물 공출은 반공세력들에게 대민 선동을 위한 호재를 제공하였다.

1946년 3월 북한의 토지개혁은 공산당의 지지 기반을 강화하는 동시에 반 대세력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반탁운동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때마침 공포된 토지개혁 법령은 반탁세력에게는 운동의 동력을 이어주는 구실을 하였다. 더구 나 이 법령은 유산계층의 물질적 기반을 앗아갈 정도의 매우 급진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5정보 이상의 땅을 소유한 조선인 지주들은 무상몰수를 당했고, 이 땅은 소작농과 소농들에게 분여되었다. 땅을 빼앗긴 사람들을 중심으로 토 지개혁에 대한 반감을 품게 되었고 이는 자연스럽게 반소반공적 정서의 확산 을 부추겼다.

저항의 방식으로는 반대 삐라(전단) 살포, 유언비어 유포와 같은 소극적 방 식뿐 아니라 테러, 학생들의 반대 행동 등과 같은 적극적인 진출이 망라되었 다. 토지개혁에 대한 정권기관 내 반발과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예를 들면, 평안남도 강서군 인민위원회 위원장인 지주 출신 박모(某)는 토지개혁에 반발 하여 직무를 거부하였다.56)

또 다른 저항의 선도에 선 것은 학생들이었다. 3월 11일 신의주에서는 인민 위원회 위원장 정달헌(鄭達憲)이 학생 집회에서 토지개혁 법령을 해설하였지 만 참석자 150명 가운데 아무도 법령을 지지하지 않았다.57) 평양에서는 고등 교육기관인 평양공업전문학교와 14개 중학교에서 상당수 학생들은 동맹 휴교 를 선포하고 수업을 거부하였다.58) 3월 13일 현재 평양시 소재 중등교육기관

55) “슈티코프. 북조선 정치 상황에 대하여.” ЦАМО, ф. 172, оп. 614631, д. 38, л. 32.

56) “슈티코프가 몰로토프에게, 토지개혁 사업 진행과 주민 동향(1946.3.15.).” АВПР, ф. 018, оп. 8, п.

6, д. 81, л. 8; “이그나티예프. 토지개혁 사업 및 주민 분위기에 관한 1946년 3월 12일 자 보고.” ЦА МО, ф. 379, оп. 473072, д. 1, л. 50.

57) “이그나티예프. 1946년 3월 12일 토지개혁사업 시행 및 주민들의 동향에 대한 총결보고.” ЦАМО, ф.

УСГАСК, оп. 102038, д. 2, л. 122; “슈티코프가 몰로토프에게, 토지개혁 사업 진행과 주민 동 향(1946.3.15.).” АВПР, ф. 018, оп. 8, п. 6, д. 81, л. 8; “이그나티예프. 토지개혁 사업 및 주민 분위기에 관한 1946년 3월 12일 자 보고.” ЦАМО, ф. 379, оп. 473072, д. 1, л. 49-50.

58) “로마넨코가 메레츠코프에게. 북조선토지개혁 결과 보고(1946.4.11.).” АВПР, ф. 0480, оп. 2, п. 1,

(20)

학생의 75%가 수업에 나오지 않아 휴업이 지속되었다. 이에 대한 당국의 조 치는 단호했다. 교육기관장들의 회의가 개최되어 휴업 주동자들을 적발하여 퇴 학시키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아울러 사태의 원인을 해소하는 차원에서 민주청 년동맹 지도일꾼 회의를 열고 각 학교에 청년조직을 창설하여 학생들을 가입 시키는 등의 일련의 대책을 마련하고자 했다.59) 같은 날 평남 성천군 농업학 교 학생들은 토지법령에 대한 반대의 표시로 동맹휴업을 선언했으며, 언덕 위 에서 집회가 열렸다. 휴업을 주도한 13명이 체포되었다.60)

함흥에서의 사태는 폭력적으로 변모하였다. 3월 13일 함흥의학전문학교, 함 흥공립상업학교, 함흥 농업학교와 6개 중학교 학생 2,640명은 조선의 독립과 식량 사정 해결을 요구하는 시위를 개시하면서 토지개혁에 반대하고 나섰 다.61) 시위 참가자들은 북조선공산당 도위원회 정치학교 건물에 진입하여 시 당 선전부장과 검찰소 직원 3명, 보안원 5명을 구타하였다. 이에 보안원들이 무기를 사용하여 2명의 사망자를 발생시켰다.62)

해주에서는 여러 날 동안 200여명의 중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였고, 3월 10 일 이들 중 일부는 인민위원회와 공산당 도위원회를 공격하기로 모의하다가 적발되어 그 주동자들이 체포되었다.63)

토지개혁에 대한 지주들의 불만은 더욱 강하게 표출되었다. 다수의 지주들 은 아직도 토지개혁법령이 일시적인 현상이고, 그 법령이 폐지될 것이며, 빼앗 긴 토지를 자신들에게 돌려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3월 13일 직전

д. 1, л. 12.

59) “이그나티예프. 1946년 3월 13일 토지개혁사업 시행 및 주민들의 동향에 대한 총결보고.” ЦАМО, ф.

УСГАСК, оп. 102038, д. 2, л. 127-128.

60) 위의 자료, л. 126.

61) “로마넨코가 메레츠코프에게. 북조선토지개혁 결과 보고(1946.4.11.).” АВПР, ф. 0480, оп. 2, п. 1, д. 1, л. 12; “북조선의 정치상황.” АВПР, ф. 0480, оп. 2, п. 2, д. 7, л. 4.

62) “로마넨코가 메레츠코프에게. 북조선토지개혁 결과 보고(1946.4.11.).” АВПР, ф. 0480, оп. 2, п. 1, д. 1, л. 12.

63) “슈티코프가 몰로토프에게, 토지개혁 사업 진행과 주민 동향(1946.3.15.).” АВПР, ф. 018, оп. 8, п.

6, д. 81, л. 8; “이그나티예프. 토지개혁 사업 및 주민 분위기에 관한 1946년 3월 12일 자 보고.” ЦА МО, ф. 379, оп. 473072, д. 1, л. 49-50.

(21)

까지 황해도 해주 지역 지주 15명이 38선을 넘어갔고 1명은 목을 매 자살하 였다.64) 3월 23일 신막군에서는 지주의 자식들로 구성된 8명의 무장집단이 적 발되었는데, 그들은 토지개혁 시행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이유로 주민들에 게 폭력을 행사한 후 38선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 가운데 5명이 검거되었고, 3명은 저항 후 도주하였다.65) 이튿날 신계군에서는 19명의 ‘폭도집단’이 검거 되었는데, 이들은 신막군에서 검거된 이들과 관련되었음이 밝혀졌다.66)

토지개혁에 대한 지주의 반발은 황해도와 평안도 서부 평야지대에서 주로 강하게 발생하였다. 지주제의 발달 정도가 토지개혁에 대한 저항에 영향을 미 쳤다고 볼 수 있다. 토지개혁에 대한 반대세력은 계층적으로는 지주와 유산계 층이었지만, 집단적인 행동 세력은 학생집단인 경우가 많았다. 지주들은 토지 몰수에 반대하여 개별적으로 반발하거나 저항하는 경우가 많은데 비해 학생들 은 상황 인식의 공유를 통해 집단적으로 의사를 표명할 가능성을 보유했기 때 문이다.

토지개혁 시기 남쪽에서 파견된 테러 사건도 발생하였다. 3월 8일 밤 조선 민주당 당수이자 임시인민위원회 보안국장 최용건의 자택에 수류탄 3발이 투 척되었는데, 그 가운데 2발이 창문 옆에서 터졌다.67) 희생자는 나오지 않았으 나 3.1절 사건의 연속선상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3월 14일 밤에는 임시인위 서기장 강량욱의 저택에 대한 공격이 발생했다. 수류탄과 총탄 사격을 받아 강량욱의 22살의 아들과 17살의 딸 그리고 손님으로 온 목사가 피살되었고, 강량욱 자신과 그의 부인은 가벼운 부상을 입었다.68)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64) “이그나티예프. 1946년 3월 13일 토지개혁사업 시행 및 주민들의 동향에 대한 총결보고.” ЦАМО, ф.

УСГАСК, оп. 102038, д. 2, л. 126.

65) “이그나티예프. 1946년 3월 24일 토지개혁 사업 및 이에 대한 주민들의 반응 보고.” ЦАМО, ф. УС ГАСК, оп. 102038, д. 2, л. 183.

66) “1946년 3월 25일 현재 토지개혁 사업 및 이에 대한 주민들의 반응.”ЦАМО РФ,ф.УСГАСК, о п.1 02038, д.2, л. 185-187.

67) “이그나티예프. 토지개혁 사업 및 주민 분위기에 관한 1946년 3월 8일 자 보고.” ЦАМО, ф. 379, о п. 473072, д. 1, л. 46.

68) “북조선에서의 토지개혁.” РГАСПИ, ф. 17, оп. 128, д. 54, л. 196об; “이그나티예프. 1946년 3월 14일 토지개혁사업 시행 및 주민들의 동향에 대한 총결보고.” ЦАМО, ф. УСГАСК, оп.

(22)

간부들에 대한 테러는 당연히 공산측의 강경한 태도와 조치를 유발시켰다.

이들 사건은 3.1절 폭탄 투척 사건을 수행한 백의사와 임시정부 정치공작대 가 주도하였다. 앞서 살폈듯이 백의사는 남북한에서 테러·암살활동을 전개하였 을 뿐 아니라, 1946년 1월부터 9월까지 주한미군 정보참모부(G-2) 및 방첩대 (CIC)와 협력하에 대북 첩보활동을 벌였다. 매달 약 20명의 요원을 북한에 파 견했지만 재정난, 훈련부족, 38선 경계강화, 파견자의 불성실 때문에 일시 중 단하였다가 이듬해부터 파견을 재개하였다.69) 비록 염동진이 김구에 대한 부 정적인 시각을 지녔더라도 백의사 단원들 대다수는 김구의 추종자들로 이루어 져 있었다.

소련측은 반공세력의 테러활동에 대해 “전반적으로 반동들의 행위는 산발적 이고 적대적 공세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이는 근로대중의 장성하는 열성에 대해 반동분자들이 두려움을 갖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고 평가하였다.70) 테 러분자에 대해 경계할 필요는 있지만 그들이 대중과 유리되어 있기 때문에 큰 변수가 될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이밖에 평양에서는 연달아 테러 사건이 발생하였다. 3월 7일 밤 21시에 토 지개혁 문제에 대한 토의를 마친 북조선공산당 도당위원회 건물에 수류탄이 투척되어 건물에서 6미터 떨어진 곳까지 날아와서 폭발하였다.71) 3월 9일 밤 에는 시보안서 인근에서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수류탄을 투척하였다. 경무사령 부 부대가 수류탄 투척자를 발견하여 사격을 가하자 그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두 번째 수류탄을 던졌다. 사상자는 없었고 테러리스트들은 도주하였다.72) 3월 10일에는 조선인 2명이 평남 소재 군(郡) 부경무관 라자레프 소좌의 아들에게

102038, д. 2, л. 133.

69) <염동진→웨드마이어 보고서>(1947.8); 鄭秉峻, “백범 김구암살 배경과 백의사.” 한국사연구 제128호, 2005, pp. 269-270에서 재인용.

70) “메레츠코프가 몰로토프 동지에게(1946.3.1.).” ЦАМО, ф. 142, оп. 551975C, д. 5, л. 69.

71) “이그나티예프. 1946년 3월 6∼7일 토지개혁사업 시행 및 주민들의 동향에 대한 총결보고.” ЦАМО, ф.

УСГАСК, оп. 102038, д. 2, л. 159.

72) “이그나티예프. 1946년 3월 9일 현재 토지개혁 사업 및 이에 대한 주민들의 반향.” ЦАМО, ф. УСГ АСК, оп. 102038, д. 2, л. 111-112.

(23)

1천 엔을 주겠다고 하면서 그에게서 권총을 구매하려고 하였다. 아들은 그들 에게 권총을 판매하겠다고 약속하고는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 알렸으며, 그 직 후 평양의학전문학교 학생인 리덕선(Ли Тек-Сон)이 체포되고, 나머지 1명 의 학생은 도주하였다.73) 3월 14일 밤에도 소련군 방첩부대 스메르시(СМЕ РШ) 요원들이 한 병원을 수색하였을 때 건물에서 남쪽에서 파견된 조선인들 이 사격을 가하면서 도주하였다. 그중 1명이 사망했고 1명은 중상을 입었으며, 몇 명이 체포되었다.74) 그들 모두에게서 서울에서 가져온 문건들이 발견되었다.

3월 27일 밤 평남 순천군에서는 리영환(Ли Ен-Хван)이라는 자를 필두로 한 지주의 자식들이 군 농촌위원회 위원장을 해칠 목적으로 그의 집을 습격하 였고, 이 사건으로 8명이 검거되었다.75) 계속해서 소련군 보고서는 4월 검거 된 일부 테러단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4월 18일 4명으로 이루어진 테러단이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권총과 수류탄, 자동총이 압수되었다. 안주군에서 최근 보안서는 테러리스트 9 명을 체포하고 역시 무기를 압수했다. 4월 말경 통천군에서는 각급 인 민위원회와 공산당 일꾼들에 대한 테러를 준비하던 32명으로 구성된 2 개의 테러단이 체포되었다. 테러단 대부분은 조선 남쪽의 반동들에 의 해 투입되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해야 한다.76)

73) “이그나티예프. 1946년 3월 11일 토지개혁사업 시행 및 주민들의 동향에 대한 총결보고.” ЦАМО, ф.

УСГАСК, оп. 102038, д. 2, л. 118.

74) “이그나티예프. 1946년 3월 14일 토지개혁사업 시행 및 주민들의 동향에 대한 총결보고.” ЦАМО, ф.

УСГАСК, оп. 102038, д. 2, л. 133-134. 테러리스트 가운데 중 1명에게서 다음과 같은 문서를 발 견하였다.

“발송. No.4. 1946년 2월 15일 / 대한민국 28년.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국장 /직인/

철도역장 수신

철도 이용 편의 제공에 대하여

급무로 출장을 가는 아래의 최기선(Цой Ги-Сен)에게 귀하 구역의 철도 이용 편의를 제공하고 긴급 업무를 수행하는데 협조해줄 것을 요청함.”

75) “이그나티예프. 1946년 3월 29일 토지개혁사업 시행 및 주민들의 동향에 대한 총결보고.” ЦАМО, ф.

УСГАСК, оп. 102038, д. 2, л. 201-203.

76) “북조선의 정치상황.” АВПР, ф. 0480, оп. 2, п. 2, д. 7, л. 4.

(24)

토지개혁을 계기로 남한 이주자들이 본격적으로 발생하면서 일부는 남쪽에 서 반공의 ‘전도사’로서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다른 일부는 테러활동을 위해 다시 북쪽으로 투입되었다. 1946년 4∼5월 황해도 황주군에서는 남쪽과 연계 는 맺은 인사가 황주군 보안서장과 부서장, 군청년동맹 비서 출신들과 공모하 여 테러모의와 주민 봉기를 도모한 혐의로 모두 16명이 체포되었다.77)

이렇듯 북한의 사회질서를 흔든 토지개혁은 기존 질서에서 밀려난 세력으로 부터 거센 저항에 직면했으며, 이는 학생의 조직적 항의와 지주의 산발적 저 항, 남쪽으로부터의 테러 행위 등 다양한 양상을 보였다.

3. 기독교계의 도·시·군 인민위원회 선거 반대

1946년 11월 3일의 도·시·군 인민위원회 선거는 권력의 합법화를 위해 공산 측이 추진한 최초의 보통선거였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가진 권력의 임시 적 성격을 탈피하고 모든 결정에 적법성을 실어주기 위함이었다. 선거 절차에 의해 선출되지 않은 채 임시인위가 내놓은 각종 정책과 규정은 완전한 적법성 을 가질 수 없기에 권력기관으로서 정당성 확보에 부담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 다. 이에 1946년 9월 5일 임시인위는 제2차확대집행위원회를 열고 면·군·시·도 인민위원회 선거 실시에 관한 결정을 채택하였다.78)

소련의 대한반도 정책 집행 책임자인 소련 연해주군관구 군사회의 위원 T.

F. 슈티코프는 “농민들 사이에서 우리가 권력을 선거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권력은 하나님이 내려주시거나 군주가 임명해야 되는 것”이라는 소문을 접하 고서 당을 통해 선거선전원들을 농촌과 기업소에 파견하여 선거 선전사업을 강화할 것을 지시하기도 하였다.79) 그러나 인민위원회 위원 후보 선출 기간 북한 내 반대세력은 소비에트 선거 방식을 모방하여 북조선민전이 추천한 단

77) “야센코가 이그나티예프에게(1946.5.31.).” ЦАМО, ф. 172, оп. 614631, д. 21, л. 9-11об.

78) “北朝鮮 도·시·군·면·리인민위원회에 관한 규정.” 北韓關係史料集 제5권, 과천: 국사편찬위원회, 1987, pp. 19-23.

79) <슈티코프 일기> 1946.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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