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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숲길을 걸으니 지나간 사람의 흔적도 그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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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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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올레 11~12코스, 모슬포에서 용수포구까지

비밀의 숲길을 걸으니

지나간 사람의 흔적도 그림이 된다

신정일 | 문화사학자,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이사장, 「새로 쓰는 택리지」 저자([email protected]) 우리 옛길 걷기 최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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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흔적을 찾아

다시 모슬포 항이다. 바다는 잔잔하다. 바다에서 내륙으로 들 어갔다가 다시 바다로 나오는 이번 여정의 시작은 모슬개라고 도 부르는 모슬포 항이다. 알뜨르 비행장, 이름이 재미있다.

이곳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최대의 공군 병력을 집결 시켰던 곳으로, 여기에서 섯알오름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4·3사건이 일어났을 때 수많은 제주도민들이 학살되었던 섯알오름은 ‘석달오름’이라고도 부르는데, 지형이 새의 알처 럼 생겨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에 위 치한 ‘모슬오름’이라고 불리는 높이 180.5m의 분화구는 모슬

포라는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 동남쪽으로 송악, 서쪽으로는 차귀악에 닿아 있는 이곳은 조선시 대에는 봉수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한편 모슬봉 남쪽 일대에는 6·25 한국전쟁 당시 육군 제1훈 련소가 설치되어, 초창기 한국 육군의 요람이 되기도 하였다.

모슬봉에서 천천히 가다가 보니 대정읍 안성리에 이른다. 이곳은 추사 김정희와 동계(桐溪) 정온 (鄭蘊) 선생의 유배지로 유명한 곳이다. 김정희는 1840년(헌종 6) 윤상도(尹尙度)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김정희에게 내려진 ‘위리안치(圍籬安置)’라는 형은 죄인이 유배지 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울타리(탱자나무 가시)를 치고 그 안에 가둔 뒤, 보수주인(保授主人, 감호하는 주인)만 드나들 수 있도록 한 중형이었다. 지나가는 사람조차 볼 수 없는 유배지의 고독 과 절망 속에서 김정희는 우리가 오늘날 ‘추사체(秋史體)’라고 부르는 독특한 경지의 서체를 만들 어냈다. ‘날이 차가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시들지 않음을 알게 된다’라는 뜻을 담아 그린

「세한도(歲寒圖)」는, 그의 제자이자 역관이었던 이상적(李尙迪)이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올 때마다 귀한 서적을 구해 유배지에 있는 스승에게 보내온 정성에 감격하여 그려서 보낸 것이다.

그가 유배되어간 지 3년째 되던 1842년 11월 13일, 아내 예안 이씨가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을 받는다. 아내의 부음을 듣고도 머나먼 타향 유배지에 갇혀 갈 수 없는 신세였으니, 그의 마음은 오죽했을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절망과 슬픔 속에서 그는 시 한 편과 사무치는 그리움 을 담아 제문을 지었다. 시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월하노인 통해 저승에 하소연해, 내세에는 우리 부부 바꾸어 태어나리.

나는 죽고 그대만이 천 리 밖에 살아남아, 그대에게 이 슬픔을 알게 하리.

추사 김정희 적거지 우리 옛길 걷기 최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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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정에서 다시 길을 나서 제주의 길을 걷는다. 제주 올레에서는 여간해서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길은 대정읍 신평리에 이른다. 신평리는 조선시대에 대정군 우면의 날외(동일리) 위쪽 벌판에 새 로 만든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은 조선 후기 천주교의 순교지이자 다산(茶山) 정 약용(丁若鏞)의 조카인 정난주 마리아의 묘가 자리한 곳이다. 그녀는 ‘황사영 백서사건’의 주역인 황사영의 부인이다. 황사영은 1801년(순조 1) 신유박해의 전말과 그 대응책을 흰 비단(백서, 帛 書)에 적어 베이징의 구베아(Gourea) 주교에게 밀서로 보내고자 했으나,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 어 사형에 처해졌다. 정난주도 남편의 사건에 연루되어 이곳으로 귀향 와서 관비가 되어 살다가 6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신평리 사거리에서 돌담이 오붓하게 이어지는 길을 걷는다. 돌담 너머에는 나뭇가지가 늘어지 도록 노랗게 익어가는 밀감들이 매달려 있다. 이리 구부러지고 저리 구부러지는 돌담길을 따라가 다 보니 나무숲 우거진 길이 나타난다. 신평리에서 무릉리(武陵里)로 이어지는 곶자왈길이다.

‘곶자왈’이란 나무와 넝쿨들이 마구 얽혀 어지럽게 된 곳을 일컫는 순수 제주도 방언이다. 보온 보습의 효과가 있는 이곳 곶자왈

은 열대 북방 한계식물과 한대 남 방 한계식물이 공존하는 세계 유일 의 독특한 숲이다. 한겨울에도 푸 른 곶자왈은 지구온난화의 주범인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기 때문에 생 태계의 허파 노릇을 하기도 한다.

제주 올레 개발로 처음 공개된 이곳은 제주 올레 대표인 서명숙 이사장의 표현대로 ‘비밀의 숲길’

이다. 나무숲이 터널을 이룬 길이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펼쳐져 있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 다워서 길을 잃어도 좋을 것만 같 은, 그렇기 때문에 아끼고 아껴가

차귀도

저지문화 예술인마을

김정희유배지

모슬포 항

대정읍 생각하는정원

수월봉 새신오름

산방산 용머리해안

형제섬 화순항 제주조각공원

곶자왈길 인향동마을

출발 도착

환상숲 곶자왈공원 한경면

고산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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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걷고 싶은 숲길. 천천히 걷다가 보면 나뭇가지들이 바람결을 타고 와 말을 건 넨다. 가을이면 길가에 수북하게 떨어진 도토리와 무성하게 쌓인 나뭇잎의 향연 이 펼쳐지는 곳, 이곳이 바로 숲의 정령 이 사는 곳이리라.

돌담을 넘고 넘어 울창하게 우거진 숲 길을 벗어나자 무릉리의 인향동 마을에 이른다. 무릉리는 과거 무릉이 또는 중 장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또한 좌기동, 평지동, 인향동을 합하여 무릉2리라고 불렀는데, 인향동은 좌기동 서쪽에 있 는 마을이다. 이곳 인향동에는 오찬이괘 (굴)라는 굴이 있는데, 옛날 ‘오찬’이라는 장사가 한 끼에 한 말이나 되는 밥을 먹 고도 배가 고파서 소를 훔쳐다 이 굴에서 잡아먹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무릉 1리 서쪽에는 말을 지키던 수마장이 있었고, 사슴이 내려와 자주 물을 마시곤 했다는 자릉못(장톨 물)이 있다.

드넓은 제주 벌판이 펼쳐진 곳

무릉2리 생태학교에서 제주 올레 11코스가 끝나고, 무릉2리에서 용수포구로 이어지는 12코스가 시작된다. 평지동 마을은 좌기동 서쪽에 있는 마을로 고바치, 곶바치 또는 고전동이라고도 불렀 는데, 마을이 높은 지대에 있어서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뒤에 마을을 평평한 곳으로 옮겨 지금의 이름이 되었다. 평지동 서쪽에는 ‘영선’이라는 사람의 소유였다는 ‘영선이밭’이 있고, 영선 이밭 서쪽에는 ‘석찬’이라는 사람의 소유였다는 ‘석찬이밭’이 있다.

평지교회를 지나 도원 생태연못을 거쳐 신도리의 농남오름에 오른다. 농남봉, 장목봉이라고도 부르는 농남오름은 맨처남못 동쪽에 있는 산으로 예전에 녹나무가 무성했다고 하며, 농남봉 북쪽 에 있는 맨처남못은 차나무가 많아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선경도예를 지나고 보름이오름을 지나 바다가 보이는 도원횟집에 이른다. 도원횟집에서 신도 포구까지는 바다를 따라가는 길이다. 신도포구에서 바다를 벗어나면 수월봉(水月峰)이 나타난다.

곶자왈길 우리 옛길 걷기 최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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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월정 뒤로는 넓은 들이 펼쳐져 있고, 앞에는 깎아 세운 듯한 바위 벼랑이다. 아래로는 망망한 바다가 광활하게 열려 있고, 그 위로 가끔씩 수평선을 넘나드는 크고 작은 배들이 나타날 때는 그 정경에 찬탄을 금하지 못하게 된다.

옛 이야기가 소곤소곤 말을 건네는 길을 걷다

고산포구로 가는 엉알길은 가히 환상적이다. 찰싹거리는 길 너머 몸을 드러낸 차귀도는 자귀섬, 자구섬 또는 죽도라고도 부르는 섬이다. 자귀나무가 많아서 자귀섬이라 하였고, 후에 차귀도라는 이름이 붙었다.

고려 제16대 임금인 예종 때의 일이다. 송나라 복주(福州) 출신의 술사 호종단(胡宗旦)이 송 황 제의 명을 받고 와서 거짓으로 고려에 귀화를 하였다. 그는 예종의 신임을 받은 뒤, 마음 놓고 고 려의 온갖 고을을 돌아다니며 지맥과 수맥을 모두 끊고 다녔다.

그는 이곳 제주도의 혈맥도 끊었는데, 그 이유는 제주도의 지세가 중국에 대항할 만한 큰 인물

용수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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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태어날 형국이었기 때문이었다.

호종단은 지맥과 수맥을 모두 끊고는 배를 타고 송나라로 다시 돌아갔는데, 그가 송나라 앞바 다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폭풍이 일어 배가 비얌섬 사이로 침몰하였다. 그 사실을 접한 고려 조정 에서는 한라산의 수호신이 고려의 지맥을 끊고 돌아가는 호종단을 막은 것이라고 여겼다. 그때부 터 그 신을 ‘광양왕’에 봉하여 해마다 향과 제물을 내리어 제사를 지냈으며, 이 섬은 호종단이 돌 아가는 것(歸, 돌아갈 귀)을 막은(遮, 막을 차) 섬이라 하여 차귀도(遮歸島)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 대나무가 많다고 해서 ‘죽도’ 또는 ‘대섬’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차귀도 남쪽에는 장군석이라고 하는 오백장군바위가 있는데, 여기에 얽힌 전설이 슬프기 그지 없다. 옛날에 설문대할망이 500명의 아들과 함께 한라산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워낙 식구가 많다 보니 그날그날 동냥으로 끼니를 이을 수가 있었다. 하루는 동냥을 나간 아들들이 늦도록 돌 아오지 않자, 할망은 큰 가마솥에 아들들이 먹을 죽을 끓이며 죽젓개로 죽을 휘휘 젓다가 잘못하 여 가마솥에 빠져 죽과 함께 끓여지고 말았다.

500명의 아들은 동냥한 양식을 짊어지고 늦게야 집에 돌아왔다. 그들은 배가 고픈 나머지 허기 부터 채우려고 어머니를 찾을 겨를도 없이 허겁지겁 죽을 떠먹었다. 그날따라 죽 맛이 좋다고 생 각하면서 정신없이 먹고 있는데, 제일 늦게 온 막내아들이 어머니의 행방을 찾았다. 죽이 든 가마 솥을 들여다보다가 결국, 어머니가 그 안에 빠져서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

차귀도

우리 옛길 걷기 최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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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차귀도의 안쪽에 자리 잡은 섬인 와도는 지형이 사람이 누운 모습이 어서 ‘눈섬’이라고 부른다.

앞서간 사람이 그림처럼 보이는 길

길을 걷다가 보면 앞서가기도 하고 뒤처져 가기도 한다. 그때마다 서로가 아름다운 풍경이 되어 그리움이 안개처럼 물씬물씬 피어오를 때가 있다. 차귀도를 바라보며 용수포구로 가는 길이 바로 그런 길이다.

천천히 걸어서 도착한 고산포구의 바람은 드세다. 좌판에서는 오징어를 구워 팔고, 몇 척의 배 들이 포구에 정박해 있다. 이곳에 오래 머물 수는 없어 포구를 벗어나 길을 따라가니, 높이 148m 의 당산봉이 자태를 드러낸다. 한경면 고산리와 용수리 사이에 있는 이 산은 조선시대에는 차귀 악 봉수가 자리하고 있어서, 동남쪽으로 모슬악, 북쪽으로 판포악 봉수에 응하였다. 이 당산봉에 성황사(城隍祠)가 있는데, 차귀당 또는 차귀사라고 부르는 당집이다.

숲이 우거진 길을 걷는가 싶더니 바로 능선에 이른다. 정상에는 군부대가 있어서 가지 못하고 아래로 내려가는 길을 택한다. 얼마쯤 내려갔을까? 다시 당산봉 줄기를 향해 오르자 함성이 절로 터져 나온다.

억새가 우거진 능성에서는 차귀도가 손에 잡힐 듯 지척이고, 바람은 불고 파도는 철썩거린다.

제주의 여러 풍경 중 이곳만큼 강렬하게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곳도 그리 흔하지 않으리라. “멈 추어라, 순간이여, 너 정말 아름답구나”라고 파우스트가 찬탄하고 싶다던 그 장소가 바로 여기가 아닐까 싶은 광경에, 나는 얼이 빠져서 망연히 앉아 있을 뿐이다.

그래도 이곳에서만 머물 수만은 없으므로, 마치 아름다운 여인과 헤어지는 것과 같이 한 걸음 걸어가다 뒤돌아보고 또 한 걸음 걸어가다 뒤돌아보며 걸어가니 저 멀리 용수리가 보이는 길에 이르렀다.

나보다 앞서간 사람들이 아련한 그림 속 풍경처럼 보이는 길이다. 어디쯤 있는가 싶으면 나타 나고 다시 보이는가 싶으면 사라지는 길, 이 길을 두고 이 지역 사람들은 새가 많다고 해서 ‘생이 기정바당길’이라고 부른다.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없는 그 아름다운 길을 걸어서 용수리에 닿는다. 이곳 한경면 용수리 해 안에는 절부암(節婦岩)이라는 바위가 있다. 고씨 부인의 정절을 기리기 위한 바위로, 높이가 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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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m에 이른다. 바위 벼랑 위에는 사철, 후박, 돈나무 등 난대식물이 군락을 형성하고 있다. 절부 암에 얽힌 전설은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에 고산리에는 강사철(姜士喆)이라는 어부가 아내인 고씨 부인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며칠 동안 슬피 울던 아 내는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절부암에 있는 한 나무에 목을 매달아 죽고 말았다. 그런데 그 다 음날 강사철의 아내가 자살한 나무 바로 아래의 바닷물에 남편의 시체가 떠올랐다. 마을 사람들 은 중국 후한시대에 익사한 아버지를 따라 강물에 몸을 던져 죽은 조아(曺娥)의 고사와 같다고 하 며, 고씨 부인을 하늘이 낸 열녀라 칭찬하였다. 14년 뒤인 1866년 이 사실을 알게 된 판관 신재우 가 고씨 부인이 죽은 바위에 ‘절부암’이라고 새겨 열행(烈行)을 기리도록 하였으며, 해마다 음력 3월 보름이면 열녀제를 지내게 하였다. 지금은 마을 부녀회에서 300여 평의 밭을 마련하여, 거 기에서 나는 소출로 고씨 부인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 바위는 제주도기념물 제9호로 지정되어 있다. 제주 올레 11코스와 12코스가 끝나는 용수리에서 날이 저문다. 바다는 더할 나위 없이 잔잔 하고, 제주도는 평화로운 숙면을 취할 것인데, 길이 곧 집이고 집도 곧 길이라 여기며 사는 나그 네는 어디에서 긴긴 밤을 지내며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인지.

연재를 마치며

국토, 참 좋은 말이며 가슴 뭉클한 말이다. 삼천리 금수강산에 펼쳐진 산천과 길, 그 길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그 땅을 살다간 사람들의 자취를 국토연구원의 「국토」를 통해 선보인 몇 년이 나에게 있어 행복한 시간이었다.

‘산천을 유람하는 것은 좋은 책을 읽는 것과 같다’, 혹은 ‘견문이 넓어야 안목이 넓다’라는 말이 있다. 길은 국토를 사랑하고 이해하는 첫걸음이자 마지막 걸음이다.

우리 옛길 걷기 최종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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