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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콘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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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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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학

14주. 대전의 전설

지털텐츠

(2)

대전광역시

한국 중앙부에 있는 광역시로 충 청남도 동남부에 위치한 광역시

대덕구, 동구, 서구, 유성구, 중

구로 나누어져 있다. 현재의 대

전지방은 행정구역의 변천이 여

러 번 있었다. 대체로 백제 때에

는 우술군, 신라 때에는 비풍군,

고려 때에는 회덕현·유성현·진

잠현에 속한 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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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광역시

조선시대에는 공주목하의 회덕현·진잠현으로 큰 변동없이 계속되어 오다 고종 32년(1895) 지방행정 제도의 개편으로 회덕군·진잠군 지역이 되었다.

그후 1914년 3월 1일 회덕군·진잠군과 공주군의 일부가 합쳐져 대 전군이 신설되었고, 종래의 회덕군과 회남면 지역(현재 인동, 원동, 중동, 정동, 삼성동)을 중심으로 대전면이 신설되어 이 지역이 현재 대전광역시의 모체가 되었다.

그후 대전면에서 대전읍, 대전부가 되었다가 1949년 8월 15일 대전

시가 되었고, 1989년 1월 1일 대덕군 전역을 편입하면서 대전직할

시가 되었으며, 1995년 1월 1일 대전광역시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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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의 전설

이 고장은 산·방죽·바위 등 자연물에 관한 설화가 주류를 이루 며, 역사적 인물에 관한 설화도 많다.

대덕구, 동구, 서구, 유성구, 중구로 나누어져 있으며 이번에 살 펴볼 대전의 전설로 서구의 전설이 가장 많이 등장한다.

서구 도안동의 가새바위, 흑석동의 용말강변과 말구렁, 관저동의 신선봉과 신선암, 평촌동의 정방마을, 중구 대사동의 보문산, 서 구 장안동의 해태산, 괴정동의 지치울 명당, 내동의 이여송의 뜬 터, 괴곡동, 동구 판암동의 우병사 묘소, 서구 내동의 박사진 정 문, 서구 둔산동의 모정 전설 등

(5)

1) 가새바위(서구 도안동)

(6)

 가새바위

(7)

2) 용말강변과 말구렁(서구 흑석동)

(8)

 용말강변과 말구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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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선봉과 신선암(서구 관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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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들이 내려와 장기를 두었다는 바위 ‘신선암’

 신선봉과 신선암

신선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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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부터 불러온 신선봉이라는 산봉우리가 있다. 그곳에는 반듯하게 깍인 넓은 반석이 있는데, 그 반석 위에 신선들이 내려와 장기를 두었다고 한다. 그 신선들이 장기를 두며 즐기고 있는데, 한 늙은 나무꾼이 지게와 낫을 내려놓고 정신 없이 구경을 하다가 시간이 많이 지났다는 노인의 말에 허둥지둥 마을로 내려갔으나 모두 낯선 사람 뿐이었다. 그 나무꾼은 다시 그 산에 들어가 신선의 힘을 빌어 샘을 파고 수백 개의 돌탑을 쌓아가며 온세상의 평화를 빌고 신선이 되어 올라갔다고 한다. 그 바위는 신선암이라고 불리게 되고 동네도 신선암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 신선봉과 신선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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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정방마을(서구 평촌동)

정방마을은 서구 평촌동 옛성 부근에 있는데, 그 고성은 백제 때의

것이라 전해진다.

(13)

 정방마을 전설

 평촌동 옛 성 부근에 고성이 있는데 그 성은 백제 때의 것이

라 한다. 옛날 백제 말기에 나당 연합군이 쳐들어 왔다. 이

동네에 당나라 소정방이 진을 치고 전투를 지휘하였다. 그

주변에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동네 사람들은 정방의 군사들

에 붙들려 강제 노동으로 그 성을 쌓게 되었다. 그것이 정방

군을 돕고 백제를 멸망시키는 줄 알면서도 우선 목숨을 보존

키 위하여 부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드디어 정방군과 신라

군이 백제를 멸망시켰다. 이 동네 사람들은 백제 유민들로

신라의 통치를 받으면서 소정방을 기억하게 되었다. 그리하

여 이 동네를 <정방>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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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보문산의 전설(중구 대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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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 하면 떠오르는 산은 보문산(寶文山)이다. 이 산은 중구 대사 동 등 11개 동에 걸쳐 있다. 해발 457.6m 높이의 이 산은 ‘보물이 묻혀 있는 산’이라는 뜻의 ‘보물산’으로 일컬어지다가 ‘보문산’으로 바뀌었다는 유래가 전해진다.

 보문산은 대전시민의 휴식처로 사랑 받고 있으며 세 가지 전설들이 전해진다.

 첫 번째는 우화형 전설 / 두 번째는 효자형 전설(교재) 세 번째는 도승형 전설

 전설들의 공통점을 살펴보면 흙 속에 보물이 묻혀있다고 하여 ‘보문 산‘이라 이름 붙인 것이라 한다.

 보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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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문산 - 우화형 전설

옛날 지금의 보문산 기슭에 아들 오 형제를 둔 한 농부가 살았습니다. 장성 한 아들들은 각각 자기 뜻대로 직업을 달리하여 분가를 하게 되자, 늙어 노 인이 되도록 혼자 살게 되었습니다. 어느 해에 몹시 가뭄이 들어 연못에 한 방울의 물이 없도록 마르자, 그곳에서 두꺼비 한 마리가 나와 농부 앞에 나 타났습니다. 농부는 두꺼비에게 물을 떠다 주었더니 두꺼비는 물을 마신 뒤 에 어디론지 사라졌습니다. 그 다음해도 가뭄이 계속되었는데, 연못에 나가 보니 작년의 그 두꺼비가 접시를 가지고 와서 농부 앞에 놓고 사라 졌습니 다. 집에 돌아와 그 접시에 담뱃재를 떨었는데 다음에 보니 접시에 재가 가 득 담겨져 있었습니다. 이상한 조화라고 생각한 농부는 동전을 놓아 보았습 니다. 이튿날 보니 동전이 또 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큰 부자가 되었는데, 이 소문을 들은 아들들이 다투어 접시에 탐을 내게 되었습니다.

아들들의 욕심과 시기를 염려한 농부는 그 접시를 몰래 뒷산에다 묻고 돌아

오다가 숨이 차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 후 많은 사람들이 그 접시를 찾았으

나 영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보물이 묻혔다 하여 보물산, 다시 변

하여 보문산이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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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문산 - 효자형 전설(교재)

아주 먼 옛날, 한적한 들판에 늙은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착한 나무꾼이 있었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여 그 소문이 이웃 마을에까지 알려졌다. 이 나무꾼에게는 주정뱅이 형이 있었는데 일하기를 싫어하고, 부모님과 동생을 괴롭히기만 하였다. 어느날 해질 무렵, 나무꾼은 나무를 한 짐 하고, ''내일은 이 나무를 팔아서 부모님께 고기를 사 드려야 지.''다짐하며 걸음을 재촉하였다. 나무꾼이 산길 옹달샘 옆에 이르렀을 때, 물고기 한 마리가 햇볕에 나와 죽어 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무꾼은 그 물고기를 샘물 속에 넣어 주었다. 그러자 나무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물고기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파란 주머니 만 놓여 있었다. 하도 이상하여 그 주머니를 주워 이리저리 살펴보았더니, ''은혜를 갚 는 주머니"라고 씌어 있었다. 주머니를 이용하는 여러 가지 설명이 쓰여 있었다. 나무꾼 은 집에 돌아와 주머니에 씌어진 대로 동전 하나를 넣었다. 그랬더니 주머니에서 동전이 마구 쏟아지는 것이 아닌가? 나무꾼은 당장 큰 부자가 되었다. 이것을 알게 된 형이 동 생을 찾아와 한 번만 만져 보자고 하여, 마음씨 착한 동생은 그 주머니를 형에게 내주고 말았다. 형은 그 주머니에 구슬을 넣고 시험하는 척하다 몰래 가지고 도망갔다. 동생이 뒤쫓아가 서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그만 그 주머니를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형이 발로 주머니를 밟는 순간, 흙이 들어가 주머니 안에는 흙만 걷잡을 수 없이 쌓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큰 산을 이루니, 그 속에 보물주머니가 묻혀 있다고 하여 ''보물산''이라 하였 고, 나중에는 '보문산'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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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문산 - 도승형 전설

옛날 한 대사가 소제동 방죽을 지나다가 해가 저물었는데 갑자기 논두렁에서

우리 백성이 3년 가뭄으로 다 죽겠으니 우리 성을 살려주시오'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자세히 알아보니 용궁의 왕이었습니다. 이에 대사는 물고기를 모아

가뭄으로부터 구해줬습니다. 그러자 용궁의 왕이 그 은혜로 복조리 하나를 대

사에게 주었습니다. 대사는 복조리를 망태에 다 간직하고 보문산 근처에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날이 어두워 불빛이 나는 집을 찾아가니, 단칸방에 일곱

자식을 데리고 사는 부인이 있었습니다. 부인이 대사 의 저녁으로 진수성찬을

차렸으나 아이들에게는 시래기죽을 주었습니다. 부인의 간청으로 저녁을 먹고

아랫목에서 하룻밤믈 잘 지낸 대사는 이튿날 부인에게 복조리를 건네주었습니

다. 부인이 복조리에 쌀과 엽전을 넣었더니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쌀

과 돈이 나왔습니다. 그리하여 큰 부자로 소문이 났습니다. 그런데 이 복조

리의 신통함을 알게 된 자식들이 그 복조리를 서로 차지하려고 싸움을 하였습

니다. 부인은 복조리를 강변 모래에 묻었습니다. 그때 복조리에 모래가 들어

가자 다시 모래가 쏟아져 나와 점점 늘어가 더니 큰 산을 이루었습니다. 그

래서 이 산은 보물산, 곧 보문산이라고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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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해태산(서구 장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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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산은 대전광역시의 남쪽

서구

장안동과 충남 논산시 벌곡면 만목리 경계에 있는 산이다(고도:305m).

예로부터 이 산 부근 마을에서는 화재가 자주 일어났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산 봉우리가 마치 불꽃처럼 생긴 해태산 때문이라하여 마을 사람들은 산꼭대기에 큰 물 단지를 묻고 그 물속에 간수를 넣은 작은 병을 함께 넣어 두었다고 한다.

매년 정월 보름날이면 풍장꾼들이 물과 간수를 갈아 넣었다고 하는데, 현재 이 민속은 단절되었으며 깨진 단지와 그 안에 넣어 두었던 간수병 만이 남아 있다 고 한다.

풍수에서는 이러한 산을 화기(火氣)의 산, 즉 화성(火星) 또는 화산(火山)이라 고 한다. 이에 대해 보통 세간에서는 마을 입구나 산 방향 쪽으로 돌탑을 세운 다든지, 일종의 소화전 기능도 하는 연못을 판다든지, 때로 형편이 되면 물의 신으로 이해되는 해태상을 세운다든지 하는 등의 공동체 차원의 풍수비보(風水 裨補)를 하였다. 해태산의 경우, 지명을 통한 화기비보(火氣裨補

)가 함께 병행되었 다고 할 수 있다

 해태산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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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태산 전설

장안동에 해태산이 자리하고 있다. 이산 정상 부근에는 지대가 높음에도 늘 물

이 나는 습지가 있다. 그리고 깨진 단지와 그 속에 간수병이 그대로 남아 있다

한다. 옛날에 이 산의 이름은 화태산이었다. 그래서 그 아래 마을에서 늘 불이

나서 다 망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동네의 생각 있는 노인들이 그 원인을

살펴보고, 그것은 화태산의 물이 마르기 때문이라 믿게 되었다. 이 원인을 알

게 된 동네 사람들은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화태산 꼭대기에 큰 단지를 묻고

거기에 항상 물을 가득히 채웠다. 그리고 그 물속에 간수병을 넣어 불기운을

억누르려 하였다. 그래도 화재는 근절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 예방법을 궁

리한 끝에 현명한 노인들이 해태가 불기운을 막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화태

산의 이름을 해태산으로 바꾸었다. 그랬더니, 그 동네에 화재가 끊기고 모두들

잘 살게 되었다. 그 뒤로 동네 사람들은 매년 제사를 올리고 농악을 울리며 축

제까지 벌려 왔다 한다. 지금은 그 신앙과 민속이 단절되었지만 정상에는 그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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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지치울 명당(서구 괴정동)

서구 괴정동은 면적 1.26㎢, 인구 1만 8161명(2008)이다. 북쪽으 로 갈마동·탄방동, 동쪽으로 탄 방동·용문동, 남쪽으로 내동·가 장동, 서쪽으로 갈마동과 접해 있 는, 서구의 중북부 도심 지역이다.

동명의 유래는 정자나무인 느티나

무(귀목나무)가 있으므로 괴정(槐

亭)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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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치울 명당 전설

괴정동에 <지치울>이란 마을이 있다. 옛날에 이 마을에서 지치가 많이 나와 붙은 이름이라는데, 이곳에 명당자리가 있었다. 조선 세종 때에 지금 서대전 서쪽 박신 성이라는 장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부자인데다가 참의 벼슬까지 한 행복한 사람이 었다. 그가 늙어서 남몰래 지사를 불러 명당자리를 찾으니 바로 자기네 지치밭으로 확정되었다. 그는 기쁜 마음으로 이제는 자손들에게 재산을 분배하고 있었다. 이제 재산을 골고루 배분하고 마지막으로 가장 귀여워하는 손녀 차례가 되었다. 그는 손 녀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원하는 대로 다 주겠다"고 하였다. 그랬더니, 손녀는 "

다른 것은 다 그만두고 그 지치밭을 달라"고 말하였다. 그 장자는 깜짝 놀라 "그것 만은 말고 다른 무엇이든지 택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손녀는 "그렇다면 다른 땅은 한 마지기를 주지 않아도 섭섭지 않다"고 거절하며 일어서는 것이었다. 그 손녀가 하도 영특하고 귀여워서 자기의 명당자리인 지치밭을 그녀에게 주었다. 그리하여 박신성 장자는 죽어 다른 자리를 잡아 묘를 썼다. 그 후로 손녀는 권령에게 시집가 서 시집 어른 산소를 자기 소유인 지치밭 명당에 썼다. 그랬더니, 그 남편이 성공 하여 공조참의에 오르고 자손이 번창하여 많은 인물이 나왔다 한다. 이 박씨부인이 소녀 적에 영특하여 할아버지 슬하에서 그 지치밭이 명당이라는 것을 눈치 채고 그 것을 소유하여 끝내 시집가문을 빛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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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이여송의 뜬터(서구 내동)

내동은 백제(百濟)때 노사지현(奴斯只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때는 비풍군(比豊郡)의 영현(領縣)인 유성현(儒城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 때는 공주부(公州府)에 속했었다. 조선시대 초기(朝鮮時代 初期)엔 공주 군 천내면(公州郡 川內面)의 지역이었으며, 1895(고종 32)년 행정 구역 변경으로 회덕군 천내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 구역 개혁으로 가 장리의 일부와 예정리를 병합하여 내동리(內洞里)라 하고 대전군 유천면 (柳川面)에 편입하였다. 1963년 대전시 내동이자, 중구에 속하였다.

1988년 1윌 1일 대전시 서구에 편입되었으며, 1989년 1월 1일 대전직 할시 서구 법정동으로 가장동에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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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여송의 뜬터 전설

내동 뒷산에 있는 가새바위 남쪽 고스락이 이름있는 명당이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바로 그 명당자리를 제대로 찾지 못하고 많은 지사들이 이 근방을 찾아 헤매어 왔을 뿐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만백성이 왜적에게 죽게 되었을 때, 명나라에서 이여송 이 동원군을 이끌고 내려와 왜적을 물리쳐 평난하였다. 기고만장한 이여송이 귀국에 앞서 조선팔도 명산 승지를 돌면서 살펴보니 명당자리가 많이 눈에 띄었다 그는 내심 으로 이런 명당을 그냥 두었다가는 장차 큰 인물이 나와서 명나라를 위태롭게 하리라 걱정하고, 칼을 빼어 명당의 혈을 끊어 피가 칼끝에 묻어 나왔다. 이렇게 지혈을 끊 으면서 내려오다 내동 뒷산의 명당을 발견하고 그는 놀랐다. 이 명당에 묘를 쓰면 반 드시 뛰어난 장수가 태어나 큰일을 저지를 것이라 믿고 그것을 망치리라 마음먹었다.

이번에는 그가 그 혈을 칼로 끊지 않고 다른 묘안을 생각하게 되었다. 아무리 칼로 끊어도 그 명당 기운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 명당 자리를 찾아 깊이 파서 기운을 빼보았다. 그래도 그 명당 기운이 서리므로, 이제는 숯불을 피워 그 구덩이에 쌓아 놓고 마구 태웠다. 그래서 그 명당 기운이 모두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 후로 그 자리는 이름만의 명당으로 전하고 그 이름을 숯불로 뜬 터, 이여 송의 뜬터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지금은 그 구덩이를 메우고 그 위에 하나의 묘가 외로이 자리하여 있다.

(26)

9) 우병사 묘소(서구 괴곡동, 동구 판암동)

(27)

• 괴곡동은 대전광역시 서구에 있는 동으로 1989년 1월 대전시의 직할시 승격에 따라 대전직할시 서구 괴곡동이 되었고,

1995년부터 대전광역시 서구 괴곡동이 되었다.

• 판암동 지역은 조선 말기, 널로 다리를 놓은 지역이라 하여 너더리 또는 판교(板橋)라 하였는데, 1946년 일본식 동명

변경에 따라 판암동(板岩洞)이 되었다. 그 뒤 1992년 9월 1일 판암1동과 판암2동으로 분동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우병사는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때 인조가 공주로 피신하였을 때 크게 세워 뒤에 청주병사를 지냈다.

 우병사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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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병사 묘소 전설

이비마을 뒷산에 조선 인조 때의 공신 우병사의 묘소와 지팡돌이 있다. 거기에는 우 병사의 전설적인 행적이 얽혀 있다. 인조 2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 왕은 부득이 궁성 을 떠나 공주로 파천할 수밖에 없었다. 어렵게 공주 근처에 이르러 금강을 건너야 했 다. 그때는 겨울이라 강물이 얇게 얼어서 얼음 위로 건너기도 불안하고 배를 타기도 어려웠다. 뒤에서는 난적이 따라오고 앞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가로놓여 진퇴양난이 었다. 왕이 위급하여 애를 태우는 데도 이렇다 할 묘책이 없었고 호종하던 벼슬아치 도 누구하나 적극적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때에 기골이 장대하고 장심이 강한 우병사 가 죽음을 각오하고 충성을 다하여 왕을 업어 건너기로 하였다. 먼저 직접 강물로 뛰 어 들어 얼음을 깨고 수심을 점검하여 안전지대를 확인한 후에 왕을 업고 그 강을 무 사히 건넜다. 왕이 그 충성과 용기에 크게 감동하고 호종하던 관원들은 부끄럽게 여 기며 뒤따라 건너게 되었다. 그 후로 왕은 우병사의 놀라운 공로를 가상히 여기고 벼 슬을 높이어 청주목사까지 지냈다. 우병사는 담력과 함께 큰 힘을 발휘하여 많은 사 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는 고향에 노닐면서 높이 두 길이나 되는 돌을 지팡이 삼아 서 끌고 다녔다는 것이다. 그래서 후인들은 이것을 지팡이돌이라 부르고 그의 장력을 찬탄하고 해마다 그 돌을 위하여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돌은 원래 판암동 소정 앞에 있었는데, 제사의 유풍이 사라진 뒤 마을 사람들이 이 돌로 다리를 놓았다. 이 사실을 우병사의 후손들이 뒤늦게 알고 우병사 묘소 앞에 세워 오늘에 그 전승을 증 언하고 있다.

(29)

10) 박사진 정문(서구 내동)

박사진은1554(명조9)∼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선비이며 금산(錦 山) 칠백의사의 한 사람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금산

전투에서 조헌(趙憲)의 문인 김선복

(金善復)·복응길(卜應吉) 등과 함께

종군하여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였

다.

(30)

 박사진 정문 전설

예정 마을에 선조 때의 의병별장 박사진의 정문이 있었다. 지금은 그 건물이 없어지고 터만 남아있다. 박사진은 이 고장의 어진 선비로서 청운의 뜻을 품고 글을 읽고 있었다.

마침 임진왜란이 일어나 동족이 왜적에게 무참히 죽고 임금이 몽진의 길에 오르는 등 참 화가 너무도 컸다. 그는 애국애족의 분심이 일고 군욕신사의 충의심이 충천하여 책을 떨 치고 일어나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조헌의 진영으로 달려갔다. 충용과 지략을 겸한 박 사진은 의병 별장의 임무를 띠고 백전백승의 기백으로 먼저 청주성에 쳐들어 온 왜적을 무찌르고 승리하여 대공을 세웠다. 청주성에서 참패·후퇴한 왜적은 금산에 집결, 증배 되어 결전을 벌리고자 갖은 계책을 꾸미고 있었다. 이런 정보를 입수한 그는 조헌이 이 끄는 의병의 선봉장이 되어 금산으로 달려 승장 영규대사의 의병들과 합세하여 700여명 의 특전부대를 이루어 결전에 임하였다. 드디어 왜적의 대군을 맞아 금산 와룡평에서 최 후의 결전을 벌렸다. 전투장비와 참전인원에서 월등한 차이를 보이어 중과부적이었으나, 그러면 그럴수록 박사진 별장은 앞장서서 독전하고 용기백배하여 왜군을 수없이 무찔렀 다. 결국 아군의 사상자가 속출하고 물밀 듯이 쳐들어오는 왜적을 상대하여 물러섬이 없 이 역전하다가 순절하였다. 그 후 평란이 되고 나라에서는 박별장의 혁혁한 공훈을 높이 사 이곳에 정문을 세우고 그 공훈을 후세에 길이 빛내게 되었다. 그 정문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퇴락하고 현대화의 물결에 따라 없어지고 지금은 빈터만 남아 회고지정을 느끼 게 한다.

(31)

11) 모정(서구 둔산동)

둔산동(屯山洞)은 대전광역시 서구의 동이다.

행정동인 둔산1동·둔산2동·둔산3동 이 나누어 관할한다. 정부대전청사, 대 한민국 특허법원 등 국가 중앙행정기관 과 대전광역시청이 위치하고, 대전고등 법원, 대전고등검찰청, 대전지방경찰 청, 충청지방통계청, 충청지방우정

청, 대전광역시교육청 등 사법·행정기 관, 기업, 금융기관, 백화점, 병원, 대 형마트 등 업무지구가 형성되어 있

는 대전광역시의 도심이다.

(32)

 모정 전설

삼천 곁에 자리한 마을을 모정이라 하는데, 원래 여기에는 모정 이 세워져 있었다 한다. 조선조 효종 때에 이 고장의 명유 동춘 당 송준길과 우암 송시열, 송애 김경여, 죽창 이시직 등이 모여 모정을 짓고 뜻을 함께하여 놀았다 한다. 그들은 이 고장의 석학 으로서 전국의 학문과 정치, 문학 등을 좌우하던 거물들이었다.

그런 인물들이 함께 노닐면서 시국을 걱정하고 학문을 논하며 문 학을 즐기는 사이에 그 모정은 너무도 유명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이 오랜 세월을 보내고 헤어지거나 작고하여 그 모정만이 남

아 그날을 회상케 하니, 거기에 전설적인 이야기가 얽힐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 인걸들은 가고 모정도 퇴락하여 없어지니 그들

의 이름과 함께 ''모정''만이 후인의 기억 속에 남았고, 그래서

그것이 동네 이름으로 정착되고 말았다 한다.

(33)

감사합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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