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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체제기 유림 잡지 소재 한시의 성격과 그 실상 - 조선유도연합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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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유도연합회의 뺷유도뺸를 중심으로 -

45)한길로*

목 차 1. 서론

2. 잡지의 간행 이력 및 구성 그리고 주요 필진

3. 한시의 분석 : 분류(憤流)하는 시의(詩意)의 반전통적 면모 4. 결론

<국문초록>

일제 말 대표적인 친일 유림단체 조선유도연합회(1939∼1945)의 기관지인 뺷유 도(儒道)뺸 는 일제강점기 유림(계) 최후의 ‘잡지’라는 점에서, 그리고 일제 협력의 면모를 가장 적극적이고 노골적으로 노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주목을 요하는 잡지라 할 수 있다. 뺷유도뺸는 1939년 조선유도연합회 창립 이후, 1942년 4월 창간 호를 시작으로 7호까지(1944년 11월) 발간되었고 대다수는 일어(순한문 포함)로 작성되었다. 먼저 당시 조선에서 일어를 이해하는 조선인이 겨우 16%에 불과했으 며 국민의 7할 이상이 농민층에 속해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결국 이 잡지는 총독부가 ‘식자(識字)층’이자 ‘농촌 지도인사’인 유림의 역할에 대단히 주목하며 그들의 적극적인 협력을 이끌어 내기 위한 성격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의 문학은 일종의 절대 권력을 소유한 ‘주문자(총독부)’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그들의 요구를 ‘작자’가 충실히 반영하여 ‘생산’하는 구조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뺷유도뺸 역시 매우 충실히 보여주고 있는데, 이들의 한시는 내용적인 밀도나 미학적 가치를 사실상 배제하고 파시즘 체제에 ‘헌신’해야 한다는 당위를 앞세우고 있었다. 또 전시 파시즘의 내용과 한시라는 ‘형식의 결합’에 더욱

* 중국인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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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중하며 그들의 프로파간다를 압축적으로 전달하는데 주력했다. 나아가 기존의 전통을 전복시켜 일본식 황도유학을 유교의 ‘전범’으로 삼는 시의(詩意)를 강하게 노출하고 있었고 전쟁을 독려하고 찬양하는 등, 반(反)전쟁적인 전통을 갖고 있던 것과도 역행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본 잡지에 수록된 ‘한시’들은 일제 말 ‘총동원’

이라는 상황을 매우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데, 특히 일제 말 전쟁파시즘과 결합 하여 기존의 유학 그리고 한학 전통이 어떻게 변형되고 굴절되며 전복되는지를 매 우 잘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주제어 : 전시체제기, 조선유도연합회, 뺷유도뺸, 친일 한시, 친일 문학

1. 서론

일제 말 대표적인 친일 유림단체 “조선유도연합회(1939∼1945)”의 기관 지인 뺷유도(儒道)뺸1)는 일제강점기 유림(계)가 남긴 최후의 ‘잡지’라는 점에 서, 그리고 일제 협력의 면모를 가장 적극적이고 노골적으로 노출하고 있다 는 점에서 많은 주목을 요하는 잡지라 할 수 있다. 더불어 이 잡지에 수록된 한시들은, 중앙의 주요 간부 뿐만 아니라 ‘유림’으로 불리는 각 지방 인사까 지 포함하고 있어 당대의 ‘친일 한시’ 창작이 대단히 광범위한 규모로 진행 되었음을 반증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고는 뺷유도뺸의 전반적인 구성을 살펴보는 한편 잡지에 수록된 한시를 조명함으로써, 일제가 당대 ‘유림’을 어떻게 관리하고 통제하 며 활용했는지 분석해보고 또 이른바 ‘유림’들은 어떠한 시(詩)적 수사(修辭)

1) 참고로 뺷유도(儒道)뺸라는 이름을 걸고 가장 먼저 발간된 잡지는 1920년 일제의 비호아 래 상해 임시정부 내 유림 출신들을 견제하고 내통하기 위해 결성된 ‘유도진흥회’의 기 관지다. (1921∼1925, 통권 48호로 종간). 본고에서 다루는 뺷유도뺸는 위 잡지와 구분되 며 저본은 국회도서관 누리집(http://dl.nanet.go.kr)에 공개된 것을 기준으로 삼았음을 밝힌다.(청구기호 : 古 181.22 ㅈ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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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동원하여 그들의 요구에 화답했는지 살펴보려 한다. 이를 통해 ‘조선의 근대화’를 내세운 일제가 전근대의 전형적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유림’을 외부 화거나 배제하기보다, 어떤 방향에서 자신들의 통치에 활용했는지 규명해보 고자 한다. 더불어 일제의 패망 직전까지, 제국주의 파시즘 체제의 욕망을 대리하여 발산하고 있는 ‘한시’들의 구체적 실상에 대해 언급하려 한다.

일제강점기 친일 유림(계)의 잡지들은 대체로 특정한 단체의 기관지 형태 로 발간되었다. 강점 전후 대표적인 잡지로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

∼1909)의 후원으로 1907년 창립된 친일 유림단체인 대동학회의 뺷대동학회 월보뺸(1908-1909)를 거론할 수 있다.2)이후, 이른바 문화통치기로 접어들면 서 친일 경향의 유림단체가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유림계 잡지도 함께 등장했 는데, 대동사문회(大東斯文會)의 뺷대동사문회보뺸(1920)․유도진흥회(儒道 振興會)의 뺷유도뺸(1921-1925)․강원도유도천명회(江原道儒道闡明會)의 뺷강 원도유도천명회보뺸(1922)․조선유교회(朝鮮儒敎會)의 뺷일월시보(日月時報)뺸 (1935) 등이 그것이다. 중일전쟁 발발 후 전시 동원 체제에 이르자 일제는 이들 유림을 보다 직접적이고 종합적으로 통제하고 관리하며 ‘전시(戰時)형 유림’으로 거듭나게 하는데 주력했다. 이를 위해 결성된 대표적인 단체가 바로 조선유도연합회(1939∼1945)이고 그 기관지가 바로 뺷유도뺸였다.3)

2) 뺷대동학회월보뺸 소재의 한시는 일제 강점 전후에 창작된 친일(한)시의 원형적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들이 남긴 시는 한말 의병 활동과 대비되는

‘반민족적 행위’에 관한 비판과 더불어 기존의 한문학적 문예 전통의 전복과 왜곡 그리고 굴절의 측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평가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에 관한 기존 연구는 다음을 참조할 것. (강명관, 「일제 초 구지식인의 문예활동과 그 친일적 성격」, 뺷창작과 비평뺸 겨울호(16-4); 1988, 정홍열. 「대동학회월보 사조란 소재 한시 연구」,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4; 박영미, 「뺷대동학회뺸ㆍ뺷신문계뺸ㆍ뺷조선문예뺸 소재 한시에 나타난 ‘봄’

상징에 관한 일고」, 뺷한문학논집뺸 23, 근역한문학회, 2005; 「일제 강점 초기 한학 지식인의 문명관과 대일의식」, 단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5; 이성민, 「대동학회월보 소재 한시 에 대한 일고찰」, 뺷퇴계학논총뺸 14, 퇴계학연구소, 2008)

3) 조선유도연합회에 대한 연구는 주로 사상사적인 관점, 그리고 일제의 유림 동원정책과의 연관성, 나아가 그들의 인적 구성과 주요 친일 활동(문학적인 활동 포함) 등으로 이뤄졌다.

(김원열, 「일제강점기 황도 유림의 사회 윤리에 대한 계보학적 연구」, 뺷시대와 철학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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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뺷유도뺸는 조선유도연합회의 성격과 인적구성 및 주요 활동을 조 명하고 일제 말 유림 동원 정책과 양상 등에 관한 연구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특히 일본을 과거 주나라로 묘사하고 그들의 전쟁을 이른바 ‘의전 (義戰)’으로 미화하는 등 유가의 논리로 일제의 침략전쟁을 합리화하고 정 당화하며 나아가 맹목적인 천황에 대한 헌신을 요구한 일제의 정책과 그에 협력한 인물들의 언술을 조명하는데 집중되었다.4) 하지만 뺷유도뺸에 수록 된 ‘한시’의 경우, 조선유도연합회 소속 간부 ‘개인’의 친일 협력 행위를 증 명하는데 활용된 측면이 많아 잡지에 수록된 한시의 전체적인 면모와 그 양상을 조명하기에는 다소 한계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이들이 남긴 시 를 ‘한문(시)학’의 영역으로 소환하여 조명하려는 시도가 적었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 하, 아래에서는 먼저 잡지의 발간 현황과 구성을 살피면 서 주요 필진을 분석해 보겠다. 이어서 잡지에 수록된 한시의 실상을 드러 냄으로써, 이 시기 일제가 강력하게 실행시키고자 했던 ‘시정(施政)’이 유 림의 ‘시정(詩情)’으로 가공되어 어떠한 양상으로 표출되었는지 살피고자 한다. 결국 일제강점기 유림계가 남긴 최후의 잡지라고 할 수 있는 뺷유도뺸 를 통해, 일제 말 제국주의와 비정상적이고 강압적으로 ‘결합’된 한(시)문학 의 굴절된 일면을 드러내고, 나아가 식민지 시기 ‘문단’의 신문학(국문․일

21-2,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0; 류미나, 「식민지권력에의 ‘협력’과 좌절」, 뺷한국문화뺸 36,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05; 「전시체제기 조선총독부의 유림정책」, 뺷역사와 현실뺸 63, 한국역사연구회, 2007; 「일본의 조선 신민화 정책과 유림 동원의 실태」, 뺷일본학뺸 31, 동국대학교일본학연구소, 2010; 정욱재, 「일제 협력 유림의 유교인식」, 뺷한국사학사학 보뺸 16, 한국사학사학회, 2007; 「한말․일제하 유림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 문, 2008, 「조선유도연합회의 결성과 황도유학」, 뺷한국독립운동사연구뺸 33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연구소, 2009; 한길로, 「총동원시기 친일 유림의 한시에 드러난 전쟁협력논 리」, 뺷열상고전연구뺸 35, 열상고전연구회, 2012, 「전시체제기 조선 유림의 일본 체험과 시회 풍경」, 뺷국제어문뺸 62집, 국제어문학회, 2014)

4) 뺷유도뺸의 일부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사료집(뺷친일반민족행위관계사료집 13, 일제강점기 유학계의 친일협력과 친일한시뺸, 선인, 2009)에 번역되어 수록되었다.

아래에서 인용한 일부 내용 역시 이를 참조하였음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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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작품이 아닌 이른바 ‘유림’으로 통칭될 수 있는 ‘구(舊)체제적 보수 인 사’들이 남긴 ‘친일 문학’의 한 국면을 밝히고자 한다.

2. 잡지의 간행 이력 및 구성 그리고 주요 필진

일제는 구한말 지방 유림을 중심으로 진행된 의병들의 격렬한 무장 투쟁 활동과 집단 망명 그리고 3․1운동 이후의 이른바 ‘(1․2차) 유림단 사건’

등에서 보여준 강력한 저항 및 비협조적 태도를 목도하면서 이들의 영향력 과 지도력을 경시할 수 없음을 자각했다. 동시에 이들을 포함하여, 이미 기 존의 지배적 지위를 활용한 특권을 유지하고 있던 중앙의 귀족 및 문인․

관료집단을 자신들의 협(조)력자 혹은 대리자로 만드는 것 역시 매우 중요 하게 판단했다. 즉 그들은 통치초기부터 ‘유림의 친일화’가 조선 지배의 비 중 있는 관건이 될 것이라 예측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조선 유림의 친일화는 강제병합 이전부터 이루어졌는데 이를 주도 한 인물은 ‘이토 히로부미’였다. 이토는 ‘조선왕조’에 대한 충성, 명분과 의리 를 중시하는 조선유림의 전통을 단절하는 것을 매우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그리하여 친일관료인 이완용(李完用)과 원로인사 조중응(趙重應) 등의 배 후에서 자금을 대며 신채호가 일본의 “3대 충노(忠奴)”5)로 꼽은 신기선(申 箕善)을 회장으로 하는 ‘대동학회(大東學會, 1907)’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최초의 친일유림단체라 할 수 있는 대동학회 결성 이후 문화 통치기에 이르면 이러한 정책은 더욱 구체화 되었다. 이는 결국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며 내세 운 근대화나 왕조체제 하의 계급관념 해체 작업을 중단시키는 한편 향촌사회 에 잔존하고 있던 종래의 신분관념과 ‘유교적 페쇄주의’를 식민구조 속에 포함시켜 통치에 활용하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할 수 있다.6)이후에는 중국을

5) 뺷대한매일신보뺸, “日本의 三大忠奴”, 1908.04.02., 4면.

6) 조동걸, 뺷한국근대사의 시련과 반성뺸, 지식산업사, 1989, 14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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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으로 하는 조선의 유교전통을 전복시켜 일본의 ‘황도’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국가주의적 유교 이데올로기를 확립하려는 의도와도 깊은 연관성을 구유하고 있었다.

특히 각 지방 유림에 대한 전방위적인 통제와 관리는 1930년대 농촌진흥 운동을 기점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시기 일제는 각 지역의 농민들을 지도할 인물로 바로 ‘유림’을 지목했다.7)즉 유림을 동원하여, 그들을 통해 농촌에 대한 지배력을 확장하는 동시에 기존의 자치 구조를 위축 및 축소시켜 행 정 권력에 복속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동 시기 경무국의 기록은 그들이 유 림을 활용하려는 목적을 보다 분명히 보여준다. 그들은 “각지의 유림회, 명 륜회, 또한 도 당국의 지도에 따라 무운장구(武運長久)를 기원하고 시국에 대한 강연과 국방헌금, 황군위문에 힘써 8월 15일 이후는 매월 1일․15일에 경학원, 문묘 등이 다 같이 거국일치와 국위 선양의 서고식(誓誥式)을 계 속 실시하는 중이다. 각종 제전에서도 국기의 게양과 중국 응징 서원문 낭 독을 하는 등 물심양면에 걸쳐 후방의 적성은 괄목할 만하다.”는 보고서를 남기기도 했다.8) 결국 유림을 단일 조직화하여 더욱 철저하게 통제 및 감 시하면서 이들을 전시체제의 조력 단체로 조직하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그 럼 당시 뺷동아일보뺸 기사를 통해 조선유도연합회 결성식 풍경을 살펴보자.

“10만의 인원을 가지고 일 천 만원의 재산을 옹위하고 은연한 세력을 가지고 나려온 조선유림은 이러타할 활동도 없이 시대를 등진 듯 한 살림으로 지내오던 오늘 경학원(經學院)이 주최가 되어 오는 16일 오전 9시에 부민관 강당에서 우

7) 당시의 기사에는 “農振運動에 儒林의 協力이 무엇보다 必要하다는 것으로 地方儒林 을 指導하야 本運動에 協力케하고 저 來五月頃 道內優秀한 儒林을 道에 召集하야 儒林和合會를 開催하고 本運動의 趣旨를 指示하는 同時 협력을 促하려는 一方 各 廟 釋奠祭와 其他 適當한 機會를 利用하야 講演會 또는 講習會를 開催하여 一般儒 林의 覺醒을 促”라는 언급이 있다. (뺷매일신보뺸, 「農振運動을 徹底强化 儒林의 覺醒 促進」 1936.04.19. 4면. 밑줄 필자)

8) 조선총독부경무국, 김봉우(역), 뺷일제식민통치비사뺸, 1988, 청아, 5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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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宇垣)총독 심전개발의 운동에 박차 맞춘 대회 이래 처음으로 전조선유림대 회(全朝鮮儒林大會)를 개최하기로 했다.”9)

뺷동아일보뺸는 조선유림을 하나의 거대 중앙조직으로 조직하려는 명분으 로 ‘이러타할 활동도 없이 시대를 등진 듯 한 살림’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곧 당국의 입장에서 그들은 ‘은연한 세력’을 갖고 있음에도 활동이 대단히 소극적이거나 비타협적이었다는 점이 불만이었음을 반영하면서 직접 총독 부가 이들의 활동에 깊숙이 개입해야 할 필요성에 따라 이 단체가 조직되었 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된 조선유도연합회는 중 앙과 지방을 아우르는 거대 조직이 되었고 정무총감 오노 로쿠이치로(大野 綠一郞, 1887∼1985)가 직접 총재가 맡은, 사실상 ‘반관반민’ 조직으로 전락 하고 말았다.10)이후 이들은 전시체제 유지와 확장을 위한 시국 강연과 강습 에 힘쓰며 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민중의 동요를 차단하고 나아가 그들을 일본제국의 충량한 신민으로 세뇌시키기는 활동을 전개해나간다.11)

이들의 기관지 뺷유도뺸는, 1939년 조선유도연합회 창립 이후 1942년 4월 창간호를 시작으로 1944년 11월 7호까지 발간되었고 대다수는 일어(순한문

9) 뺷동아일보뺸, “儒林大會 三百儒林代表參集“, 1939.09.29. 2면.

10) 임숙정(뺷조선유도연합회 순천군지부 회원의 현황과 특징」, 뺷한국근대사연구뺸 73, 한국 근대사학회, 156면)의 연구에 의해 현재까지 밝혀진 것을 보면, 당시 “조선유도연합회”

는 전국 76곳의 지역 유도회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11) 이 시기, 각 지역 유림에 대한 일제의 강압적인 회유와 통제는 이태준의 소설 뺷해방전 후뺸(1946)에 등장하는 중심인물 ‘김직원’을 통해서도 매우 잘 드러난다. 1943-1945년 사 이 철원에서 벌어진 일을 기록한 이 소설에서, 주인공 ‘현’과 마주친 ‘김직원’은 일제의 압력에 굴하지 않은 채 유생의 길을 걷는 강직한 인물로 나온다. 그는 창씨도 거부했고 단발도 하지 않은 채 여전히 조선조의 전통을 굳건히 유지해가며 해방의 그날의 도모하 는 인물로 묘사되는데 소설에서는 그에게 일제가 가하는 압력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

그는 “이제 머리를 깎어라, 낙치(落齒)가 다 된 것 더러 일본말을 배워라, 복색을 갈어 라, 나 직원 내노란 말씀이니까 잘 알아들었소이다” 라며 일제의 압박에 비타협적 입장 을 견지했지만 이후 그는 주재소와 경찰서를 오가다 결국 구금되고 만다. (이태준, 「해 방전후」, 뺷이태준전집뺸 3, 상허학회, 소명출판, 2015, 287~28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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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함)로 작성되었다. 먼저 당시 조선이 약 8할에 육박하는 문맹률을 보였고12) 또 일어를 이해하는 조선인이 겨우 16.61%(1942)13)에 불과했으며 국민의

‘7할 이상’14)이 농민층에 속해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즉 이 단체는 농촌의 지도 인사이자 ‘식자’층에 속하고 있던 유림의 역할에 대단 히 주목하며 그들의 협력을 이끌어 내기 위해 결성되었고, 바로 이 잡지는 그들에게 일제가 주입하고자 했던 사상과 지침들이 뒤섞여 있는 것이다.15)

전체적인 간행사항을 정리해보면, 잡지는 1942년(2월) 창간호를 시작으로 1944년을 7호(11월)까지 발간된 ‘반년간’ 잡지로 보인다.16)고정된 구성은 대 개 “권두언- 논설- 본회기사- 지방기사- 대동아전쟁일지(大東亞戰爭日誌) -한시 - 편집후기”로 구분할 수 있는데 각 호마다 순서상의 차이가 다소 있 다.17)편집 및 발행은 중추원 서무과 촉탁(1930-1941) 및 조선사편수회 서기 (1934-1941) 등을 역임한 일본인 가치 세이지로(可知淸次郞, ?-?)가 담당했 고18)잡지의 대다수는 ‘논설’이 차지하고 있는데 논설란에는 총 77편이 수록되 어 있으며 일본인 22명과 조선인 14명, 모두 36명의 글이 게재되어 있다.

12) 허만길, 「광복 후의 문맹 퇴치 정책 연구」, 뺷교육한글뺸 7, 한글학회, 1994, 176면.

13) 허재영, 뺷일제강점기 어문정책과 어문 생활뺸, 도서출판 경진, 2011, 119면. 본 책에서 제시한 통계를 보면 1942년까지 줄곧 10%대에 머물렀다가 1943년에 들어서야 20%(22.15) 를 상회했다.

14) 신용하, 「朝鮮王朝末ㆍ日帝下 農民의 社會的 地位와 經濟的 狀態」, 뺷한국사 시민 강좌뺸 6, 일조각, 1990, 101면 재인용.

15) 전시체제에 따라 수많은 잡지와 신문이 폐간되는 시대적 상황에서 ‘유림 잡지’가 오히 려 새롭게 발간되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이 단체에 대한 당국의 관심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다시 강조하면, 대다수가 일본어(한자 포함)로 구성된 이 잡지가 향하고 있는 대상은 다수의 대중이 아닌 소수의 ‘유림’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곧 여전히 ‘식자 (識字)의 권위와 영향력’ 그리고 ‘농업 중심의 문화’가 유지되고 있는 조선의 상황을 염 두 했을 때, 지역 지도인사 혹은 보수 엘리트라 할 수 있는 ‘유림’의 역할을 일제가 대단 히 주목하고 있었고 그들의 협력 없이는 식민체제 유지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현실을 반영한다 할 수 있다.

16) 참고로 1호에는 판권기가 없다. 또 1943년에는 신년특별호가 추가되어 총 3번이 간행 되었다.

17) 각 권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9)

논설의 주요 내용을 간략히 요약해보면, 일본과 조선의 ‘유교’적 연원과 연관된 내용과 함께 ‘대동아공영’의 당위성을 내세우고 전시 유림의 역할과 사명을 보조할 ‘시국’관련 내용도 상당수 존재한다. 일본인 필진은 대부분 총독부 출신의 관변학자 및 교육자․군 고위 간부들이 대다수로 드러났 다.19)그들은 유학의 근본사상을 일본 사상의 전통위에서서 재구축하고 또 조선과 일본 유학 전통의 유사성을 드러내면서 근본 유학과 주자학적 세계 관을 군국주의 이데올로기로 변형시킨 이른바 ‘황도유학’의 당위성을 강조 하고 있었다.20) 즉 군과 총독부 정보과 그리고 관변학자들이 총동원되어

‘왕도․오륜․효‘와 같은 조선조 전통의 유가 이념을 내세우기보다 총력전 상황에 적용될 ’국가(천황)주의적 충효’ 이념을 내면화 하도록 유도하고 있

권호 체재

1호(1942.03) 卷頭言 - 論說 - 漢詩 - 本會記事 - 大東亞戰日誌

2호(1942.10) 卷頭言 - 論告(小磯國昭 總督) - 論說 - 本會記事 - 地方記事 - 大東亞戰爭日誌 - 漢詩 - 編輯後記

3호(1943.01) 卷頭言 - 論說 - 本會記事 - 地方記事 - 大東亞戰爭日誌 - 漢詩 - 編輯後記 4호(1943.08) 卷頭言 - 論說 - 本會記事 - 大東亞戰日誌 - 文廟釋奠儀式順序 - 漢詩 - 編輯後記

5호(1943.11) 卷頭言 - 論說 - 本會記事 - 地方記事 - 大東亞戰爭日誌 - 享祀位次圖 - 漢詩 - 編輯後記

6호(1943.04) 卷頭言 - 論說 - 地方記事 - 大東亞戰爭日誌 - 編後錄

7호(1944.11) 卷頭言 - 論說 - 本會記事 - 地方記事 - 大東亞戰爭日誌 - 漢詩 - 編輯後記

18) 상기 이력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누리집(http://db.history.go.kr)에 공 개된 뺷직원록뺸을 토대로 정리하였고 이후의 인물 역시 동일한 방법을 적용했다.

19) 잡지에 글을 수록한 일본은 모두 22명으로 직책은 잡지에 소개된 것을 그대로 옮겼다.

(林茂樹(副會長) / 渡邊豊日子(經學院顧問, 幹事) / 林耕宇(中華民國京城公使待遇 總領事) / 鳥飼生駒(敎學硏修所長․學監) / 近藤杢(神宮皇學館敎授) / 奧山仙三 (國民總力朝鮮聯盟企劃課長) / 倉茂周藏(朝鮮軍報道部長) / 岩村俊雄(評議圓, 京畿 公立中學校長) / 倉島至(情報課長) / 阿部吉雄(京城帝國大學助敎授) / 平沼騏一郞 (東洋文化學會長,男爵) / 鵜澤總明(大東文化學院總長) / 宇野哲人(文學博士) / 高 田眞治 (文學博士) / 大野謙一(學務局長) / 堂本敏雄(情報課長) / 白神壽吉(明倫全 文學校副校長) / 安岡正篤 / 鈴川壽男(松志會長) / 皓堂 田保橋四朗 / 田花爲雄(京 城帝大敎授) / 諸橋轍次(文學博士))

20) 권인호, 「타카하시 도오루(高橋亨)의 황도유학」, 뺷대동철학뺸 55, 대동철학회, 201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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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던 것이다.21)

대표적인 필진으로는 당시 조선유도연합회 부회장 하야시 시게키(林茂 樹)22)․교학(敎學)연수소장 및 학감 도리카이 이꾸마(鳥飼生駒)23)․조선 군보도국장 쿠라시케 슈조(倉茂周藏)24)․경성제대 교수 아베 요시오(阿部 吉雄)25)등을 거론할 수 있다. 반면 조선인 필진을 살펴보면, 매회 「권두언」

을 작성한 회장 박택상준(朴澤相駿)26)을 포함한 연합회 주요 간부 그리고 경학원 및 명륜학원 관계자가 중심이 되었다.27)이들이 작성한 논설들 역시 일본인 필진과 같은 맥락에서 발화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대개 조선유도연합

21) 우경섭, 「1920~30년대 조선과 만주국의 왕도유학」, 뺷한국한연구뺸 22, 인하대한국학연 구소, 2010, 21면.

22) 하야시 시게키(林茂樹) : 생몰미상. 1911년 경시(警視)를 시작으로 전북도지사(1929), 총독부 학무국장(1932), 조선사편수위원(1932-1933), 국민총력연맹 이사(1941) 등을 역 임했다. 그의 논설로는 「儒道創刊に寄せて」(1호)․「吾人の進軍譜」(3호)․「詩經を讀 む」(7호)가 있다.

23) 도리카이 이꾸마(鳥飼生駒) : 생몰미상. 평양중학교 교유(敎諭)(1917-1921) 및 교장 (1923-19247), 대구사범학교 교장(1934-1936), 교학연수소장 학감(1940-1944) 등을 역임 했다. 그의 논설로는 「日本精神の中核」(1호)․「新春の所感」(3호)․「會澤正志齋先生 の國防論」(4호)․「我國の敎學」(7호)가 있다.

24) 구라시게 슈조(倉茂周藏) : 생몰미상. 1938년 소장이 되었고 조선군보도국장(1940-1943), 대일본부인회조선본부사무총장(大日本婦人會朝鮮本部事務總長)(1944) 등을 역임했 다. 그의 논설로는 「徵兵制施行と儒林に對する希望」(2호)․「戰陣訓に就て」(3호)․「必 勝の信念」(4호)이 있다.

25) 아베 요시오(阿部吉雄) : 1905-1978. 야마가타현(山形県) 출신으로 동경제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경성제대 법문학부 조교수(1941-1943)를 역임했으며 1974년 일본에서 퇴계학 연구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취임하며 퇴계학 연구에 매진했다. 그의 논설로는 「李退溪 と山崎闇齋」(2호)․「淺見絅齋と退溪․栗谷(3-4호)」․「我文敎史上に於ける李退溪」

(6호)가 있다.

26) 박상준(朴相駿, 1876∼?) : 창씨명은 박택상준(朴澤相駿)으로 호는 학포(學圃), 평안남 도 성천 출신이다. 친일 유림으로 활동한 대표적인 인사로 해방 전까지 조선유도연합회 회장을 지냈다. 「일제강점하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에 따라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지정되었다.

27) 조선인 필진 명단 (직책은 잡지에 소개된 것을 그대로 옮겼으며 본명과 생몰년은 필자 가 기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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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는 ‘황도유학’을 새로운 ‘동양정신’으로 확립 하기 위한 글과 일제 침략 전쟁을 ‘유도’의 논리로 옹호하는 한편 전시체제기 유림의 각성과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하는 내용이 대다수였다.28)대표적으로 조선유도연합회 상임이사 이명세29)의 글을 살펴보자.

이름 제목

朴澤相駿

(會長. 朴相駿, 1876∼?) 卷頭言(1-7호) 李家軫鎬

(顧問. 李軫鎬, 1867∼1943) 儒道の創刊を祝す(1호) 韓相龍(1880∼1947, 顧問) 儒敎(1호)

金川聖(每日申報社長.

李聖根. 1887∼?) 儒道の創刊を祝して (1호), 新年の辭 (3호) 安寅植

(1891∼1969, 敎育部長) 皇道儒學(1호) / 皇道儒學 二(2호) 春山明世(常任理事.

李明世․1893~1972)

東亞共榮圈と儒敎の役割(1호) / 讀護聖錄有感(2호) / 正氣歌の解 說(6-7호)

金誠鎭(明倫學院講) 儒道硏究(1호) (순한문)

崔浩然 儒道統論(1호), 經學源流(3호) (순한문) 高元勳(中樞院參議) 徵兵制實施と半島靑年の覺悟(2호)

孔聖學

(經學院司成․副題學) 道也者不可須叟離也(2호), 人能弘道(5호) 순한문 竹城濟風(經學院司成) 高麗鄕の由來に就て(2호)

楊山鍾燁(全北南原郡大山

面雲橋里) 理氣化物圖說(2호)

金璜鎭(儒學硏究所講士) 先儒嘉言鈔(3호, 순한문), 先儒嘉言(5-6호 순한문), 先哲善行(순한문) 朱炳乾 (硏究)李栗谷先生(3~7호), 中朝事實(4-7호)

柳光烈 我國王學の開祖中江藤樹(4호)

28) 정욱재, 「조선유도연합회의 결성과 황도유학」, 뺷한국독립운동사연구뺸 33,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237면.

29) 이명세(李明世, 1893∼1972) : 본관은 전성(全城), 자는 성도(聖道), 호는 의산(義山)이 다. 창씨명은 춘산명세(春山明世)로 문집 뺷의산집(義山集)뺸(1972)이 있다. 대표적인 친 일 유림으로 조선유도연합회 상임이사와 경학원 사성(1944)으로도 활동했으며 「일제강 점하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에 따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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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의 진흥은 대내적으로 우리나라(일본 - 필자주)의 정책상 필요 불가결한 중대한 문제일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동아공영권을 확립하여 여러 약소민족 을 지도하며 보호하는데 가장 중요한 사항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 유림이 라는 사람들은 먼저 우리 국체의 존경과 현대의 중대 시국을 인식하고 종래부터 습득해 온 유교정신을 황도정신에 합치시켜며 황국신민으로서의 길을 실천궁행 함으로써 국가적인 대(大)사업에 공헌해 주기를 간절하게 바라마지 않는다.”30)

이명세의 위 글은 조선유도연합회의 주요 이념과 향방을 잘 보여주는 글 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유학의 진흥과 일본의 번영 그리고 일제가 외친 ‘동 아공영권’ 확보를 동일선상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러면서 오랜 기간 동안 조선(인)의 문화 속에 깊이 체화되었던 기존의 유학적 전통을 일본의 ‘황도 정신’과 합일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기존의 유학 전통을 사실상 ‘전복’시 켜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즉 기존의 유학을, 황국신민으로서 공 헌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 활용하기 위해 조속히 ‘황도’정신으로 대체하여 이를 내면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와 조선유도연합회 그리고 일제가 말하는 유학의 ‘진흥’이란 기존의 유학을 ‘변형시키거나 뒤 틀림’으로써 성취되는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일제가 말하는 ‘동아공영’을 곧 유학의 진흥과 등치시킴으로서 그 침략성을 은폐하고 도덕적 정당성을 내 세우려는 구조를 포착할 수 있는 것이다.

형식적으로 뺷유도뺸는 민간 유림단체의 기관지이다. 하지만 상술한 것처 럼 단체의 총재를 정무총감이 당연직으로 맡고 있었고 집필진 역시 상당수 가 총독부 산하기관 인물들이 총동원되어 있었기에 사실상 총독부의 영향 력이 막대한 ‘반기관지’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잡지는 ‘황도유 학’이라는 국가주의와 결합된 유가이데올로기를 새롭게 확립시키려는 지향 을 갖고 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30) 春山明世, 「東亞共榮圈と儒敎の役割」, 뺷儒道뺸 1호, 1942.3, 41면. (친일반민족행위진 상규명위원회, 뺷친일반민족행위관계사료집뺸 13, 일제강점기 유학계의 친일협력과 친일한 뺸, 선인, 2009, 330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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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당대의 언어정책에 따라 잡지 내 논설의 대다수가 ‘일본어’로 작 성되어 있었다는 사실과 당시의 언어질서를 보건데, 대중들이 이 잡지를 애 독했을 가능성은 대단히 희박했다 할 수 있다. 또 유학자들에게 익숙한 순 한문의 논설 역시 전체의 1/7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점은, 이 잡지의 ‘수신 자’가 지방의 평범한 유학자들을 향하기보다 철저히 일본화 된 소수의 유림 을 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잡지는 “유도연합회를 빨리 결성하여 중앙과 지방이 호응해 유도정신 부흥에 힘쓰라”31)는 학무국의 지 시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행위를 증거하고 ‘전시’하기 위한 도구이자 징표였다고 평가 할 수 있을 것이다.

3. 한시의 분석: 분류(憤流)하는 시의(詩意)의 반전통적 면모

유학의 전통에서 ‘전쟁’은 대단히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는데, 예 를들어 “공자께서 삼가 한 것은 제계와 전쟁과 질병이었다”(뺷論語뺸, 「述而」,

“子之所愼齊戰疾”), 그리고 “춘추에 의로운 전쟁은 없었다.”( 뺷孟子뺸, 「盡心 下」. “春秋無義戰”는 발언들은 이러한 관점을 더욱 명백히 드러내는 언급이 라 할 수 있다. 결국 “유가”의 이름으로 ‘도덕적 명분을 경시하면서 강력한 병기를 앞세워 타국을 정벌하여 영토와 인구를 늘리거나 확장하는 것이 국가 의 중대 과제이자 목표’32)로 설정된 경우는 대단히 반유교적인 사유로, 이러 한 목표가 대내외적으로 공표된 것은 사실상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잡지의 대다수는 일본어 논설로 ‘전황(戰況)’을 전하는 동시에 ‘전시를 맞은 유림의 태도’․‘황도유학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글로 채워져 있고 이들 대다수는 총독부에 속해 있거나 직․간접적인 통제 를 받는 주요 간부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단체는 분명 조선의 팔도 유

31) 뺷조선일보뺸, 「도 단위의 유도연합회 금후 결성 촉진을 지시」, 1939.11.02., 2면.

32) 고병익, 뺷동아시아의 전통과 변용뺸, 문학과 지성사, 1996, 2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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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이 결합되어 있는 이른바 전국 단위의 ‘유림단체’였기에, 이들의 기관지 는 “지방기사”와 같은 단신 뿐만 아니라 각 지방 유림 개개인의 자발적인 참여로 지면이 구성되어야 했을 것이다. 또한 ‘잡지’라는 성격에 맞는 ‘독물 (讀物)’ 혹은 ‘문예물’ 또한 포함되어야 했었을 것이다.

이 둘을 고려했을 때, 이 잡지에 수록할 가장 적합한 문예물은 역시 ‘한시’였 을 것으로 추정된다.33)물론 그들이 가장 애호하는 장르가 한시였고 그들의 상징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도 한시다. 다만 이러한 기본 전제 외에도, 한시는 논설과는 달리 시형(詩型)을 단구(短句)로 제한한다면 적은 지면에 매우 많은 인원들의 이름을 함께 거론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즉 최소한의 지면에 많은 이의 작품을 수록함으로써 다양한 이들의 참여로 지면이 채워져 있음을 ‘전시’할 수 있는 효과를 기대하기에도 한시는 ‘제격’이었던 것이다.

한시는 3호와 6호를 제외하고 5호에 걸쳐 153명이 작성한 (14제) 157수 (首)가 수록되어 있다.34)(전체적인 면모는 후면【부록】참조) 이들이 작성 한 시들은 크게, ‘중앙 간부’들이 작성하고 이들의 주도로 공모된 시와 각

‘지방 유림’의 작품들로 구분할 수 있는데 간부들의 경우 논설의 주요 조선 인 필진이었던 인사들과 각 지방의 강사(講士)들이 주축을 이뤘다.35)이들

33) 동시기 간행된 관찬 뺷경학원잡지뺸에는 한시가 수록되어 있지 않는데, 필자는 이 점이 이 두 잡지에 드러난 미묘한 구성의 차이라고 판단한다.

34) 활용된 시제는 ‘황군전첩지희(皇軍戰捷志喜)’(1호), ‘축징병제실시(祝徵兵制實施)’(2호),

‘제결전시유림각오(題決戰時儒林覺悟)’ (3호), ‘추도산본원사(追悼山本元師)’(5호) 등 으로, 대다수는 일본의 전쟁을 ‘고무․찬양’하거나 협력을 강권하고 또 전시를 맞아 유림 의 협력과 민중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내용의 시제가 주로 활용되었다. 더불어 ‘시류’와는 직접적으로 관련 없어 보이지만, 각 지역 유림과 중앙 유림의 시회를 통해 단결된 유림의 일면을 표출한 ‘경포아집(鏡浦雅集)’(4호)이나 석전 제례 이후 그 소감을 일본에 대한 감은(感恩)으로 치환시킨 ‘석전례필후지감(釋奠禮畢後志感)’(7호) 역시 작자 개인의 개 성을 드러내기보다 ‘제국의 감성’을 한시를 통해 서술하려는 의도를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35) 대표적으로 회장 박상준(朴相駿, 「皇軍戰捷志喜」(1호, 3수), 「祝徵兵制實施」(2호),

「追悼山本元師」(5호, 2수))과 상임이사 이명세(李明世, 「新加坡陷落日志喜」(1호), 「祝 徵兵制實施」(2호), 「追悼山本元師」(5호)), 조선유도연합회 이사를 거쳐 성균관 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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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주로 ‘태평양전쟁’ ‘징병제’와 같은 당시의 전시 상황과 매우 밀접한 연관 을 맺는 사건과 정책들을 시제로 삼거나 ‘시회’나 ‘석전제’처럼 그들 단체의 중요한 행사를 시제로 삼고 있었다. 먼저 창간호에 수록된 박상준의 「황군 전첩지희(皇軍戰捷志喜)」(1942)를 살펴보자.36)

검 하나로 영국과 미국을 응징하고 一劒膺懲並英美

남하하는 황군에 온 세계가 놀랐네 皇軍南下六洲驚

어찌 장군의 지력이 저자들의 전투와 같겠나 寧將智力同渠鬪

우리 동양의 정의로운 이름을 펼쳤다네 伸我東洋正義名

일제가 동남아 해상권을 장악하기 시작한 1942년, 그는 이 시기의 성과를 영국과 미국에 대한 ‘응징(膺懲)’으로 규정했다.37)유교적 의미에서 응징은 맹자에게서 본격적으로 발화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맹자에게 있어서 응징 이란, 도덕적 명분을 갖고 있는 ‘천자’의 나라만이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오랑캐에게 가할 수 있는 것이었다.38)이를 통해 살펴보면 박상준은 일본 을 과거 ‘주(周)나라’와 같은 천자의 나라로 또 동양 문명의 새로운 ‘중원’으 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인식하에서 일본군을 ‘선’으로 표징 하면서 영․미군은 ‘악’의 이미지와 겹치게 배치하였다. 더불어 일본군의

‘지력(智力)’을 강조하면서 연합군을 무력과 힘만 앞세운 ‘치(癡)’의 이미지 로 치환하였는데, 결구를 통해 이 승리는 즉 “동양의 정의(正義)”를 드날리 는 전쟁이고 바로 “동양”을 위한 전쟁임을 드러냈다. 즉 일본의 아시아태평

학에 오른 공성학(孔聖學, 「鏡浦雅集」(4호), 「追悼山本元師」(5호), 「釋奠禮畢後志感」

(7호)) 등을 거론할 수 있다.

36) 박상준, 뺷유도뺸 1호, 조선유도연합회, 1942.03, 49면.

37) 1942년 당시 일본은 진주만 공급 이후 홍콩, 나아가 버마까지 점령함으로써 이 지역에 대한 사실상 완벽한 지배에 성공하면서 유럽 열강을 포함한 연합군 전체에 커다란 영향 력을 과시했다. 즉 사실상 동남아시아를 장악함으로써 일제는 자신들이 늘 주창했던

“대동아공영”의 퍼즐을 형식적으로나마 완성한 것이다.

38) 뺷맹자(孟子)뺸, 「등문공상((滕文公上)」. “戎狄是膺, 荊舒是懲。 周公方且膺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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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전쟁의 침략성을 은폐하는 동시에 도덕적 명분과 정당성을 부여하며 이 승리를 ‘동양’이라는 정의로 귀결시킨 것이다.

이어서, 1943년 진주만 공습 등 큰 전공을 올리다 4월 남태평양에서 전사 한 해군 원수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 1884∼1943)를 추모하는 시 를 남긴 개성인삼 상인 출신의 공성학(孔聖學)39)의 시 「야마모토 원수님 을 추도하며(追悼山本元師)」(1943)를 살펴보자.40)

용 같은 병법에 범 같은 지략을 갖춘 원수님 龍鞱虎略總元戎

푸른 바다에 올라 군사를 지도하시다 滄海登壇指導中

전쟁터에서 목숨 바쳐 공적을 이루셨으니 裏尸馬革成功積

당당한 그 죽음은 나라에 대한 충정의 보위리라 一死堂堂保國忠 전 날 밤 장성(將星)이 창공에 떨어졌으니 將星前夜隕蒼空 일억의 국민들 하나 되어 애도의 눈물 흘리고 一億國民哀淚同 혼신을 다한 평생의 사업에 몸 굽혀 경배하니 鞠躬盡瘁平生事 빛나고 빛나는 마음 바다의 해처럼 붉게 걸려있네 赫赫心懸海日紅

“용도(龍鞱)”는 주(周)나라 여상(呂尙)이 지은 뺷육도(六韜)뺸의 편명으 로 뛰어난 병법을 지칭하고 “이시마혁(裏尸馬革)”은 ‘말가죽에 담긴 시체’

를 말하는 것으로 전쟁터에서 장렬히 전사한 장수를 의미한다.41) 이 시는

39) 공성학(孔聖學) : 1879-1957. 개성 상인 출신으로 인삼을 통한 다양한 상업 활동 뿐만 아니라 김택영과 교류하며 뺷여한시가문초뺸의 교열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의 친일적 면모 는 민족문제연구소의 뺷친일인명사전뺸 2(2009)에 자세히 언급된 바 있다. 그는 식민지 시기 다양한 한문 저술로도 주목되었는데 공성학의 한문 저술에 관한 연구는 다음을 참조할 것. (이은주, 「일제강점기 개성상인 공성학의 간행사업 연구」, 뺷어문학뺸 118, 한국 어문학회, 2012; 「1923년 개성상인의 중국유람기 뺷중유일기(中遊日記)뺸연구」, 뺷국문학연 뺸 24, 국문학회, 2012; 공성학(외), 박동욱(역), 뺷향대기람뺸, 태학사 2014; 노관범, 「근대 개성 문인 공성학의 지역 활동과 뺷춘포시집뺸」, 뺷반교어문학뺸, 반교어문학회, 2015; 박영 미, 「공성학의뺷탕도기행(湯島紀行)뺸에 대하여, 뺷한문학보뺸 32, 우리한문학회, 2015) 40) 공성학, 뺷유도뺸 5호, 조선유도연합회, 1943.11, 107면.

41) 이시마혁(裏尸馬革) : 후한의 명장 마원(馬援)의 고사에서 유래했다. 그는 늙은 몸을 이끌고 전쟁터에 나가며 “대장부는 마땅히 말가죽에 시체가 담겨 돌아와야지, 아녀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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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진주만 공습’으로 이름을 떨친 일본제국 해군 연합 함대 사령관 ‘야마모토’의 전사를 애도하는 시이다. 전반적으로 시는 ‘비장 감’과 ‘숭고미’를 강조하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데, 공성학은 그의 죽음 의 의미를 곧 일억 식민의 애사(哀事)라고 여기며 제국을 위해 헌신한 그 의 충정과 공적을 찬상하였다. 그의 죽음을 일본인의 감정으로 이입하고 있 음을 알 수 있는데, 즉 제국의 시선에서 그의 죽음을 추도하고 애도함으로 써 전시 체제의 전범(典範)으로 삼아야 함을 우회적으로 말했다. 또한 야마 모토의 ‘헌신’적인 삶과 공적에 경배하며 일제의 전쟁이 비단 일본만을 위 한 전쟁이 아닌 ‘일억신민’, 즉 식민지 및 내지 모두를 위한 전쟁임을 다시 금 환기시키며 시를 마감했다.

한편, 일제 패망 직전까지 그들이 “조선유도연합회”(경학원 포함)에 주목 한 또 다른 이유로 “의례”를 통한 일본(천황)의 ‘귄위’ 확보를 거론할 수 있 다. 즉 선현에 대한 학문을 숭모하고 이를 체현하려는 본연의 목적과는 달 리 이른바 ‘내선일체’라는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유림과 민중들을 교화하려 는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된 것이다.42)일제는 조선조의 유교 전통을 계승 하면서 유교정신을 진작하여 이른바 ‘동양적 가치’를 고수한다는 명분으로 석전제례를 이어갔는데, 전시체제기에 이르면 배례의 대상 자체를 ‘일본 천 황과 조선 총독’을 향하게 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43)즉 ‘조선 유림의 황도

품에서 죽어서야 되랴(大丈夫 當以馬革裏尸 安能死兒女手)”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이 후 적과 대치하다가 무더위에 시달리고 전염병에 걸려 얼마 후에 그곳에서 죽었다.

(뺷後漢書 卷24 馬援列傳뺸 참조)

42) 장진영, 「일제강점기 석전의 변질과 해방 후의 규정」, 뺷고전과 해석뺸 17, 고전문학한문 학연구학회, 2014, 305∼327면.

43) 실제로 본격적으로 태평양전쟁이 진행된 1942년의 ‘석전’ 기사를 먼저 살펴보면 총독 이하 주요 간부들이 이 제례에 참여했고 또 과장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4천여 명의 인원들이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 제례가 총독부의 주목을 받았던 큰 행사 가운 데 하나였던 것이다. “황도유학(皇道儒學)의 수립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이 때 대성 공자의 위대한 가르침을 추모하고 제지내는 춘계석전은 십오일오전 열시부터 남총독, 대야정무총감, 하군 관민 사천여명이 참렬한 중에 부내 명륜정의 경학원에서 엄숙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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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및 향교의 신사화’를 획책한 것이다. 아래의 시 「석전례필후지감(釋奠禮 畢後志感)」44)은 1944년 4월 16일 명륜당에서 개최한 석전례를 다룬 시로, 조선유도연합회 간부 27명과 함께 참석한 당시 조선유도연합회 강사 겸 경 학원 사성(司成) 이명세의 시이다.45)

제사 의식 찬란한 성균관의 봄날 祀儀煌煌泮上春

다행히 하늘이 사문을 망치지 않으셨도다 幸賴斯文天未喪 조정의 꽃과 나무 생기가 배로 거듭났고 朝廷花木倍生新 백세의 이륜을 우리 백성에게 베풀었네 (下略)彛倫百世敍吾民

시에서는 ‘춘(春)’․‘신(新)’과 같은 시각적 이미지를 활용하여 당시를 태 평성대로 묘사하는 한편 총독부를 과거 조정과 같은 것으로 등치시키면서 그들 통치에 대한 권위를 높이며 그들의 행정을 ‘선정’으로 미화하고 있다.

특히 ‘하늘이 사문(斯文)을 망치지 않았다’는 표현은 일제의 조선 지배를 유교적 관점에서 정당화하는 의식의 발로이자 유도의 본류가 이제는 일본 에게 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더불어 일제의 정 책을 이륜(彛倫), 즉 유가의 근본 원리로 삼고 있다는 것은 일제의 정책이 란 곧 식민지 유림 그리고 백성들이 마땅히 실천하고 체득해야할 ‘상도(常 道)’라는 것임을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풀이된다. 즉 그의 시에서 일 본 지배는 ‘유도’를 망치지 않게 한 ‘천행(天幸)’으로 인식하면서 제국의 확

히 진행되었다. 이날 남총독 대야총감 이하 이가(李家)중추원 부의장, 조전(篠田) 경성 제대총장, 이(李) 이왕직장관, 진기(眞崎) 총독부학무국장, 임(林) 중국 총영사 등 내빈 이 임석하고……” (뺷매일신보뺸, 「춘계석전(春季釋奠)」 1942.04.16, 2면)

44) 조선유도연합회, 뺷유도(儒道)뺸 7호, 「석전례필후유감(釋奠禮畢後志感)」, 1944, 136면.

부제는 “昭和十九年四月十六日於明倫堂”이다.

45) 뺷매일신보뺸의 기사에 따르면 이 날 ‘석전례’에는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 1880∼

1955) 및 국민총력조선연맹사무국총장, 그리고 이완용의 차남 이항구(李恒九) 이왕직 장관 등이 참여하였고 관내의 조선인과 학생 등 총 3000여명의 인원이 참여했다고 전한 다. (뺷매일신보뺸, 「春季釋奠祭擧行-小磯總督以下三千名參列」, 1944.04.16,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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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과 유도의 확장이 동일한 범주에 있음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뺷유도뺸에는 각 지방 유림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진 시들 역시 수록되 어 있는데, 이는 중앙과 지방 각 조직이 긴밀하게 공조하고 있고 또 각 지역 군 단위 유림들 역시 일제의 정책을 매우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음을 드러내 려는 의도라 할 수 있다. 경남 고성(6명, 2호)․충북 옥천(3명, 4호)․경남 창령(4명, 4호) 유림의 이름으로 수록된 시들은 모두 자체의 현상공모 절차를 걸친 일종의 ‘선고(選考)’시라는 특징을 보였다.46)이는 곧 각 지방 유림이 뺷유도뺸의 성격에 가장 부합되는 시들을 ‘엄선’하기 위해 자체 ‘검열’을 실시했 음을 보여준다 하겠다. 즉 ‘개인 - 지역 유림 - 편집부(총독부)’로 이어지는 검열과정을 추측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먼저 뺷유도뺸 2호에 수록된 경남 고성 유림 이영석(李瑩汐, 固城郡會華面背屯里, 2위)47)의 「대동아전쟁필 승(大東亞戰爭必勝)」(1942)의 시를 살펴보자.

미․영을 격파하고 대동아를 건설하시니 擊破米英建大東

우리 천황의 공덕 하늘과 같도다 吾皇功德與天同

제후국 공영하며 권내(圈內)로 귀속될지니 共榮邦國歸圈內

일척건곤(一擲乾坤) 승부의 명운은 손바닥 안에 있다네 一擲乾坤運掌中 (後略)

46) 총 13명 가운데 이력이 다소나마 확인되는 사람은 단 2명에 불과했다. 고성의 김동기(金 東琪)는 지역 유지로 자신의 마을에 “배둔(背屯)야학”설립하는 건에 적극적으로 주도했 고 또 뺷동아일보뺸 고성지국장(1935-1938)을 지냈다(뺷中外日報뺸, “執行委員會”. 1927년 06월 22일, 4면, 뺷朝鮮中央日報뺸, “固城郡會華面背屯里 敎員四氏의 活動으로 背屯夜 學院曙光”, 1935.03.26., 3면; “閉鎻中에있는 背屯夜學院曙光” 1935년 12월 25, 4면, 뺷東 亞日報뺸. “固城支局”, 1935.04.04., “固城支局”, 1938.11.24.3면.) 의령의 전기진(田麒鎭) 은 하단을 참조.

47) 李瑩汐, 「大東亞戰爭必勝」, 뺷儒道뺸 2호, 朝鮮儒道聯合會, 1942.10. 88면. 참고로 하략 된 시 원문은 다음과 같다. “勢傾地軸西南北, 威壓世間陸海空. 神怒人憤無不勝, 壯哉 大義古今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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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시는 1941년 12월 8일 진주만 폭격으로 항공모함을 제외한 미국 태평 양함대의 주력을 궤멸시킨 사건 그리고 홍콩에 이어 1942년 1월 2일 말레이 시아, 8일 보르네오까지 함락시키고 난 후 2월 15일 싱가포르까지 차지하며 영국군 사상 최대의 항복을 받아낸 배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 다.48)작자 이영석은 먼저 방국(邦國) 즉 제후국의 개념을 통해 대동아 공영 을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즉 일본을 천자국으로 삼고 기타의 나라를 제후국으로 이해하는 ‘전도된 중화주의’의 일면을 노출하고 있는 것이다. 더 불어 일제가 ‘선전’했던 전시 이데올로기를 복제하고 있는데, 그 역시 일제 침략전쟁을 ‘대동아 건설의 완성’이라 말하는 동시에 이 모든 것을 ‘하늘과 같은 천황의 공덕’으로 돌리는 시혜의식을 드러내며 자신의 정체성을 ‘천황 의 신민’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윽고 종국에는 일본이 천하를 수중 에 둘 것이라는 낙관적 미래를 기대하면서 “귀신조차 노하고 사람들이 분해 하는 일인데 어찌 승리할 수 없겠는가, 장대한 대의는 고금에 통하도다!(神 怒人憤無不勝, 壯哉大義古今通)”49)라며 일본의 승리는 곧 고금을 관통하 는 ‘대의’와 같은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즉 이 전쟁을 유교의 주요 이념인 “의(義)”의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연합군을 “불의”한 무리, 그래서 마 땅히 응징 당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하본경묵(河本秉 默, 沃川郡安內面桃季里)의 「제결전시유림각오(題決戰時儒林覺悟)」(1943) 를 살펴보자.50)

(前略)

마땅히 자기의 몸을 던져 먼저 나서고 獻身宜自當先早

48) 김명인(외), 뺷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뺸, 연세대학교출판부, 2006, 212∼214면.

49) 위와 같음, 같은 면.

50) 河本秉默, 「題決戰時儒林覺悟」, 뺷儒道뺸 4호, 朝鮮儒道聯合會, 1943,08, 120면. 참고 로 생략된 앞 구절은 다음과 같다, “此時體制異他時, 勤勞可運陶公甓, 決戰今年我亦 知, 緻密若籌張子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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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음으로 분발하여 매진할 뿐이니 奮發一心因邁進 총력을 다하는데 어찌 뒤쳐질 수 있으며 總力焉能落後遲 완적이 오래되록 횡행한들 무엇이 걱정이랴 何憂頑敵用長期

이 시는 ‘전시에는 유림도 전사(戰士)’가 되어야 함을 역설하는 내용으로,

‘한시의 형식’ 속에 당시 당국이 강조한 주요 내용들을 하나의 ‘구호’처럼 간명하게 만들어 놓은 것과 같은 외형을 하고 있다. “헌신․분발․총력”과 같은 단어들을 전면에 등장시킴으로써 전시 유림이 갖추어야 할 각오의 ‘내 용’을 선명하게 제시하면서 일제가 강요한 국가주의 윤리의 내면화를 ‘증명’

하고 있는 형국이다. 더불어 온 마음을 다한 분발을 촉구하면서 ‘완적(頑 敵)이라는 우환’에 총력으로 맞서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데, 결국 전시 유림 이 가져야 할 각오를 환기하며 이를 더욱 확고히 하려는 작자의 태도를 대 단히 직설적인 자구로 역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지역의 다른 인물들의 시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예를 들어 류정 동열(柳井東烈) 역시 “국책의 완성이 바로 이때에 있으니, 장차 우리 붓을 내던지고 군의 대오를 따르자(國策完成在此時, 我將投筆從軍伍)”와 같은 시구는 이러한 태도를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51)또 영미(英美) 격파를 찬양하고 향후의 선전을 기원하는 의령 유림의 「제축영미타도(題祝英美打 倒)」(1943) 역시 노골적인 일제 찬양의 면모를 유감없이 표출하였는데 “죄 악스런 미국과 간사한 영국에, 매를 들지 않을 수 없다(米罪英奸不擧枚)”52) 와 “귀신같은 미국과 도깨비 같은 영국, 눈송이 녹듯 사라졌네(米鬼英魍雪 消同)”53)․“(영미의) 기세는 바람 부는 가을산의 낙엽처럼 될지니, 우리 천

51) 柳井東烈(沃川郡郡北面楸沼里), 「題決戰時儒林覺悟」, 뺷朝鮮儒道聯合會뺸 4호, 1943.

08, 119면

52) 田麒眞(宜寧郡大義面杏亭里), 위와 같음, 120면. 참고로 그는 자신이 사는 고을 대의면 (大義面)에서 학평의원과 ‘면협의원’ 등을 지냈다.(뺷每日申報뺸. “各地學議當選發表”, 1931.07.16, 뺷동아일보뺸, “當選된 面協議員”, 1935.05.31., 3면, 뺷每日申報뺸. “當選된 各地 新面議”, 1935.05.26.,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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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 공덕 하늘과 같도다(勢若秋山落葉風, 吾皇功德與天同)”54)같은 시 구는 일본의 논리를 여과 없이 재현하고 반복 및 재생산하는 대표적인 시구 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뺷유도뺸에 수록된 시들은 “시제”를 통해 이미 그 대략적인 시적 지향이 드러나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실제로도 노골적인 일 제 찬양의 뜻을 피력하고 또 승전을 기원하며 ‘내선일체’를 내면화하고 있 음을 ‘노출’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이 마치 유림이 가져야할 기본 적인 관점이라는 인식을 견지함으로써 자신들을 당대 유림의 전형으로 자 신하는 면모도 보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작성된 위 시들은 ‘식민 주체’의 시선을 자기의 것으로

‘동일시’하면서, 일본의 입장에서 바라본 전쟁에 대한 시각과 의의 등을 한시 라는 형식 속에 ‘간이하고 선명’하게 담아냈다. 즉 ‘전쟁’이라는 현실 그리고

‘유학’이라는 이념, 끝으로 ‘한시’라는 형식을 결합시켜 일제의 전쟁을 ‘추상 (推尙)’하고 총동원을 정당화하였으며 심지어 일본을 근대의 ‘주(周)’나라로 그려내기까지 했다. 정리해보면, ‘유림’이라는 ‘외형’을 한 이들은, 일제의 프 로파간다를 ‘자가증식’하면서 이를 조선 전체의 유림 공동체 내부에 확산시켜 더 큰 결집과 단결을 촉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비(非)국민 겸 비(非)유 림’을 만드는데 헌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들의 시는 유교의 본향을 ‘일본’으로 내면화하는 ‘반유교적’ 의식을 보여주면서 ‘찬전(讚戰)’의 뜻을 노골적으로 표명함으로써 ‘반전’을 강조한 기존의 한시 전통에도 역행하 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그들의 시는 ‘전시 파시즘’과 결합된 반유가․반전통 적 시의(詩意)들이 분류(噴流)하고 있는 것이다.

53) 田纘煥(宜寧郡宜寧面中洞). 위와 같음, 같은 면.

54) 姜恩熙(宜寧郡宜寧面茂田), 위와 같음, 같은 면.

(23)

4. 결론

이른바 조선의 ‘근대화’를 명분으로 병합을 강행한 일제는 ‘유림’을 식민 지 체제에 맞게 새롭게 재편하는 일에도 깊이 관여했다. 이러한 노력은 이 토 히로부미의 기획에 의해 탄생한 ‘대동학회’를 시작으로 식민통치 전 기 간에 걸쳐 지속되었는데, 그 절정이 바로 “조선유도연합회”의 결성이었고 그 실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뺷유도뺸라고 할 수 있다. 뺷유도뺸의 각 논설 그리고 시를 통해 드러난 것처럼, 일제는 전시체제 구축을 위해 조 선의 보수적 친일 세력을 ‘유림’으로 ‘가공’하고 재구축하여 기존의 유림 전 통을 분쇄하고 일본을 동아시아 유교문화의 중심으로 하는 전시체제기 새 로운 유교 전통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경무국의 보고서를 통해 표명한 것처럼, “총독 정치에 반항하고 중국 숭배의 관념을 버리지 못한 양반 유생 들이 당국의 끈임 없는 지도와 노력으로 눈에 띄게 호전”되어가도록 만들 어야 했던 것이다.55)

이 시기의 문학은 일종의 절대 권력을 소유한 식민주체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그들의 요구를 ‘문인’집단이 충실히 반영하여 ‘생산’하는 구조였고 한시 의 경우 ‘유림 집단’이 이를 담당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 따라 뺷유도뺸 역시 전시 이데올로기에 대단히 충실했고 ‘한시’ 역시 당대 분위기를 그대로 전하고 있었다. 그들의 시는 내용적인 밀도나 미적 성취보다, 파시즘 체제에 ‘헌신’해야 한다는 당위적 내용과 ‘한시’라는 형식의 결합에 더욱 치중 하며 그들의 프로파간다를 압축적으로 전달하고 있었다. ‘조선의 모든 유․무 형적 존재를 전쟁 동원을 위한 부속품으로 간주’56)해버린 총동원체제의 속에 서 ‘한시’ 역시 전시의 ‘문학적 부속품’로 전락해버리고 만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른바 ‘유림’들은 기존의 전통을 전복시켜 일본식 황도유학을 유교 의 전범으로 삼는 반유교적 전통을 만들어갔다. 또 “춘추 시대에 의로운 전쟁

55) 조선총독부경무국, 김봉우(역), 뺷일제식민통치비사뺸, 1988, 청아, 58면.

56) 천정환, 뺷끝나지 않은 신드롬뺸, 푸른역사, 2005, 34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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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없었다”는 언급 그리고 ‘‘안록산(安祿山)의 난’을 통해 나타난 전쟁의 폐해 와 인간의 고통을 다룬 두보(杜甫)의 「춘망(春望)」등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반전’의식의 전통에도 불구하고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거짓말”57)을 다시금 진실로 둔갑시키는 반(反)유가․반(反)한학적 시를 다수 창작한 것이다.

뺷유도뺸에 수록된 소위 말하는 ‘친일’ 한시들은 이미 한문을 체화하여 제 1문어(文語)로 활용하며 근대를 직접 체험하거나 일본(인)과의 접촉을 통 해 다양한 시를 남겼던 ‘구(舊)한국 지식인’의 남긴 강점 전후의 ‘친일시’와 는 전혀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즉 자신의 한학적 세계관 속에서 자신 이 경험하고 체험한 감정을 펼쳤던 과거와는 상반되는, 즉 자신의 체험보다 는 당국의 의도를 따라 자신의 시의를 표출하고 있는 면모를 강하게 보이 고 있다는 것이다. 즉 과거 문사와 같은 한학적 세계관의 흔적이 짙게 드러 나기보다 이를 ‘모사’하고 ‘재현’하려는 흔적이 더욱 선명하다 할 수 있다.

일본 군국주의 파시즘체제에 스스로의 감정을 ‘저당’잡힌 인물들이, 그들이 원하고 요구하는 방식으로 전시형 한시를 ‘조직’해내고 ‘구호화’하여 반복하 는 형국이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 잡지에 수록된 ‘한시’들은 일제 말의 ‘한(시)문학’굴절과 양상을 적나라하게 반영하고 있는데, 특히 일제 말 전쟁파시즘과 결합하여 기존의 유학 그리고 한학 전통이 어떻게 변형되고 전복되었는지 잘 보여주 고 있다. 각 시기 별 친일 한시의 성격과 구조 그리고 체제 변화에 따른 한 시의 변형 양상은 차후 연구 과제로 남겨두는 바이다.

57) 박노자, 뺷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뺸, 한겨레출판사, 2012, 9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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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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