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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게 그림보기] ⑧ 죽어야 사는 예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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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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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자 ≒ 영웅 ≒ 희생양

2018 평창 동계 올림픽을 앞둔 우리들은 기대와 설 렘으로 소치 올림픽을 기다렸다. 그리고 많은 화제와 논란 속에 우리들은 두 명의 선수, 김연아와 빅토르 안을 기억한다. 편파판정의 희생양이 된‘여왕 김연 아’에게 우리는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러시아의 영 웅이 된 빅토르 안을 두고 한국의 젊은 네티즌들은 한 국빙상연맹 파벌싸움의 희생양이라고 여기며 아쉬운 박수를 보냈다. 두 사람 모두 어떤‘권력’에 희생되었 음에도 굴하지 않았다면서 사람들은 그들을‘영웅’ 라고 부른다.

어떤 분야의‘고수’는 곧 스타가 된다. 1인자로 등 극한 자는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는 선망의 대상 이 된다. 스타는 본인의 의도와 무관하게 영웅이 되기 도 하고 희생양이 되기도 한다. 비단 김연아와 빅토르 안 뿐이랴. 실력과 스타덤으로 대중의 이목을 받는 연 예계의 스타들도 마찬가지다. 어떤 연구과제에 매진 하여 새로운 학설을 입증하는 과학자 또한 그 분야에 서 박수 받는 고수라 할 수 있다. 과거와는 달리 오늘 날 특정 분야의 1인자들은 매스컴과 얽히면서 영웅이 되기도 하고 또 희생양이 되기도 한다.

최고의 예술가는 누구인가?

그러나 상당히 애매한 평가를 받게되는 고수들이 있다. 나는 그들을 예술가들이라고 생각한다. 예술가 란 1차적으로는 예술을 직업으로 사는 사람이다. 각

나라마다 꾸준히 예술작업을 실천하면서 세계적 권위 의 예술상들을 받는 대표 예술가 무리들이 있다. 하지 만 점수를 매기고 순위를 정하는 스포츠 세계나 학설 을 입증하고 증명시켜 보이는 학문 분야와는 달리, 이 예술의 세계는 단순히‘권위적인 예술상’의 수혜여부 로만 최고의 기량이 판가름 나는 단층적인 구조가 아 니다. 더군다나(예술가와 관련하여 몇 차례 소개했던 글들에서 살펴보았듯이) 예술가들이란 때로는 정신과 적 치료를 요하는 광인으로 볼 수도, 신내림을 받은

‘신선’으로 볼 수도 있지 않았는가!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술가’라는 아이덴티티가 영화, 소설, 드라마 등의 대중매체와 만나면서 틀어지고 변하고 있음을 확인하 였다. 누구를‘예술세계’의 1인자로 평가하는 데 있어 우리가 어떤 잣대를 가지고 있는지 묻는다면 그 대답 은 쉽지 않다. 그만큼 예술이라는 것 자체가 객관적인 터전이기 이전에 어떤 주관적인 상황이기 때문이다.

최고의 피겨 선수를 가려내는 것에도 주관적인 판단 에서 자유롭지는 않다지만, 최고의 예술가를 가려내 는 일만큼 복잡하지는 않을 듯하다. “최고의 예술가는 어떤 사람인가?”이라는 질문은 오랫동안 예술 비평가 들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20세기 이후 예술학과 미학 의 복잡한 전개 속에서 하나의 답을 찾을 순 없겠지 만, ‘저자(author)’에 대한 몇몇 주목할 만한 논의들 을 살펴본다면 어렴풋하게나마 그 가늠의 잣대가 보 일지도 모르겠다. 이들이 말하는‘저자’를 작품의 창 작자인‘예술가’로 환원하여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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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이 곧 예술이다!

예술가와 예술작품을 사유의 대상으로 놓고 고민하 는 학문이 예술학 또는 미학이다. 임마누엘 칸트 (Immanuel Kant, 1724~1804)는 그때까지의 철학적 논의들을 총체적으로 정리한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 불 린다. 칸트는‘미(美)’라는 것은 애당초 학문이 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물을 아름답다 고 할 때, 그것은 그 사물이‘미’라는 성질을 갖고 있 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나의 주관이 좋게 받아들였 다’는 의미에서의‘취미판단‘이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 에 인간이기에 갖는 공통의 보편타당함이 있기 때문에 주관적 보편타당성이 있다고 여겼다. 이것이 칸트가 말하는‘미적 무관심성’이다. 또한 칸트는 미의 향유란 어떤 개념을 만들거나 심화, 변화시키는 것이 아닌 그 저 일종의‘유희’라고 보았다. 때문에 미는 다른 목적 이 필요하지 않는 것이며 그 자체가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으로 이미‘합목적’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칸트 의 유명한‘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다. 이러한 것들을 전제로 두고 칸트는 예술을 천재의 산물로 보았으며, 진정한 예술은 신의 은총을 받은 천재에게서 창조된다 고 여겼다. 즉, 예술은 논리적 설명이 불가능한 광기의 산물이라는 뜻이다. ‘미’가 곧‘예술’이라는 고전주의 미학을 직관적이고 주관적인 사유로서 정리한 칸트 미 학은 19세기 후반까지 무리 없이 받아들여졌다. (물론 현재에도 일부분 여전히 수용되고 있다.)

아름다움이 과연 예술일까?

그러나 이 질서정연해 보였던 심미주의 예술관은 거칠고 기괴한 예술작품들의 등장과 함께 깨지기 시 작하였다. 인상주의 화파의 작품은 거칠어졌고 피카 소의 그림은 기괴했다. 20세기 이후 파괴를 위한 파괴 를 감행한 다다이즘(dadaism)이 등장하더니, 마침내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은 변기 에 <샘>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미술관에 이를 작품이 라고 올려놓기까지 하였다. 작품이 더 이상 예쁘지 않 아도, 마음에 들지 않아도,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어도

예술이 될 수 있었다. 예술가들은 더 이상 누가 보아 도 예쁘고 멋있는 작품을 만들지 않아도 예술가로서 고수의 경지에 이른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이 다. 기존의‘아름다움을 위한 예술’은 여러 형태로

‘해체’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지점에서 20세기 철학 의 큰 흐름이 되는 구조주의, 현상학, 기호해석학, 수 용미학,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 논의 등 다양한 의견 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바르트 - 저자의 죽음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자, 롤랑 바르트 (Roland Barthes, 1915-1980)는「저자의 죽음 (The Death of the Author)」(1968)이라는 파격적인 말을 하였다.

니체 (Friedrich Nietzsche, 1844~1900)가“신은 죽 었다”고 선언한 배경과 겹쳐 읽혀지는 대목이다. 바르 트는“저가의 죽음에 대한 대가로 우리가 얻는 것은 독자의 탄생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저자의 죽음’은 곧‘독자의 탄생’이라는 것이다. 바르트에 따 르면‘저자’는 여러 목소리 중의 하나일 따름이며, 저 자의 문학작품은 그 자신만의 독창적인 창조물이 아 니라 그 이전 선조들과 문화가 남겨놓은 것을 빌려와 조립했다는 것이다. 누가 어떤 이야기를 했느냐가 아 니라, 어떤 이야기에서 어떤 느낌을 받았느냐에 대해

<샘>, 뉴욕에서 열린 제1회 앙데팡당전시회에 마르셀 뒤 샹이 가명으로 1917년에 출품한 오브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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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니라 독자가 만들어낸다는 이야기다.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작가는 작품을 써내려갔을 뿐, 작가 자체 가 작품의 의미가 아니라는 말이다. 바르트가 이 주장 을 펼 당시 프랑스 문학비평은 작가의 출생, 성장배경, 환경 등의 전기적 입장에서 작품을 분석하는 것이 크 게 유행했었다. 바르트는 이에 반기는 들고 작품은 작 품 그 자체로서 보아야한다는 주장을 펼친 것이다. 그 는 작가를 작품의 기원이자 작품해석을 위한 권위로 인식하는 기존의 사고방식을 비판하며, 작가는 단지 그 시대의 모습을 표현하는 사회의 도구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위대한 작가가 있기 때문에 위대한 작품 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푸코 - author, authority

프랑스 후기구조주의 철학을 대표하는 미셸 푸코 (Michel Foucault, 1926~1984)는「저자란 무엇인가 (What Is an Author)」(1969)라는 강연을 통해 바 르트의 주장을 이으면서도 또 다른 관점에서 저자 개 념을 파악하고 있다. 푸코는 단순히 저자를 제거하자 는 주장만으로는 공허하다고 보았다. 그는 저자란 텍 스트가 존재하는 사회조직의 관계 속에서 지식의 흐 름을 규정짓는 권력의 기능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쉬 운 예를 들자면, 셰익스피어의 작품들 중 하나에서 일 부 내용이 그가 쓴 것이 아니라고 판명되었다고 가정 해보자. 아무리 셰익스피어를 잊고 작품 분석을 하려 해도 이미 이전과 같은 상황은 아니게 된다. 작가라는 존재는 작품과 이분법적으로 떼어낼 수 있는 것은 아 니며 오히려 한 집단 내의 이데올로기적 권력과의 미 묘한 관계 속에 있다는 말이다. 작가(author)에게 있 는, 혹은 부여된 권위(authority)에 대한 깊은 고민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데리다 - 복원이 아닌 해체

해체주의로 유명한 자크 데리다 (Jacques Derrida,

1930-2004)는 그의 저작『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Of Grammatology)』(1967)를 통해 저자와 작품의 분리 논쟁을 이어갔다. 데리다는 텍스트 읽기 작업을 통해 작가가 텍스트에서 의도하고 표현했던 것을 재생 산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를 새롭게 생산해야 한다고 요청한다. 여기서 텍스트란 일차적으로 보자면 문학작 품을 뜻한다. 이러한 텍스트를 예술가가 창작해 낸‘작 품’으로, 또 독자를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관람자로 그 뜻을 확장하여 보아도 맥락상 크게 다르지 않다. 데리 다는 텍스트를 읽는 것은‘복원(reconstructive)’작업 이 아니라‘해체(deconstructive)’의 작업이라고 하였 다. 데리다의 저자에 대한 해체주의적 논의는 유명한

‘고호의 신발 논쟁’사건에서 그 일면을 확인할 수 있다.

‘고호의 신발 논쟁’은 실존주의 독일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 (1889-1976)가「예술작품의 근원 The Origin of the Work of Art」에서 밝힌 고호의 <신발>

해석에 대해 미국의 미술사학자 마이어 샤피로 (Meyer Schapiro, 1904~ 1982)가 비판을 가했는데, 이를 두고 데리다가 최종적으로 양측 모두를 반박하 며 가세한 유명한 철학 논쟁이다. 이들 논쟁의 다소 난해하고 전문적인 용어들을 빼고 쉽게 살펴보면 다 음과 같다. 하이데거는 고호의 <신발> 작품에서 허름 한 농부의 신발이‘드러내주는’농촌 아낙의 본질적

<신발>, 빈센트 반 고흐, 1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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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거론하면서 화가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구두라 는 진리 앞에 서 있게 된다고 설명하였다. 이에 대해 샤피로는 인신공격에 가까운 반박을 하고 나섰다. 나 치 일파로 소문난 하이데거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가 지고 있던 샤피로는 하이데거가 고호의 신발에 대해 전혀 잘못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반박하였다. 기록 에 따르면 고호는 1886년 프랑스 몽마르트 골목의 한 중고물품 가게에서 한 쌍의 신발을 구입하여 그린 후 2년간 다양한 신발 연작 시리즈를 그린 것으로 알려 져 있다. 때문에 고호의 신발은 파리라는 대도시에 사 는 도시인의 신발이지 결코 농부가 수고로운 땀을 흘 리며 대지를 밟던 신발이 아니라는 것이다. 샤피로는 하이데거가 이후 이들을 논쟁을 지켜 본 데리다가 발 끈하고 나선다. 우선 둘 다 틀렸는데 샤피로의 말이 더욱 수준이 낮다고 공격하였다. 그는 이 구두의 주인 이 누구이냐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 서 예술작품에 대한 궁극의 해석은 있을 수 없으며 예 술 작품이 열어주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에 주목해 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고호의 <신발>을 보면서 누구 의 신발인지 캐묻는‘복원’작업이 아닌 그 누구의 신 발도 아니라는 데서 출발하는‘해체’작업을 통해 예 술작품을‘즐길’수 있다고 하였다.

에코 - 열린 텍스트

바르트에서부터 시작하여 푸코, 데리다로 이어지는 저자 논의의 쟁점은 다소간 차이가 있지만 이들이 말 하고자 하는 큰 줄거리는‘열린 텍스트 (open text)’

개념으로 공통적으로 귀결되고 있다. 이탈리아 철학 계의 거장이자 <장미의 이름>의 저자로 유명한 움베 르트 에코 (Umberto Eco, 1932~)는『Open Text(열 린 예술작품)』라는 저서를 통해 현대 문화와 열린 텍 스트에 대한 논의를 전개했다. 여기서 그는‘열린’즉 개방이라는 개념의 지속적인 역사적 유용성과 함께, 현대 문화이론의 주요한 주제들 즉 텍스트의 다의미 성 강조 및 독자와 텍스트간의 상호작용 과정이라는 관점을 본격적으로 제시했다. 에코는 기존의 예술 미

학에 대한 반론으로 이 논의를 시작했다. 전통적 예술 혹은 고전적 예술은 본질적으로 애매모호하지 않으며, 결국은 특정한 방향으로 의미를 지시하게 편이지만, 현대적인 예술작품의 경우는 다양한 잠재적 의미가 공존하며 그 어느 것도 지배적 의미라고 할 수 없다.

텍스트는 독자들에게 가능성의‘장’만을 제공해 주며, 그러한 장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는 대부분 독자에 게 맡겨 놓는 것이다.

저자는 죽었는가?

“저자는 무엇인가?”를 고민하던 일련의 논의는 크 게는 저자의 존재 자체보다는 독자의 존재를 새롭게 찾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말을 살짝 바꾸어 다시 보 자면“예술가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현대의 비평 가들은 예술가에게 사망진단서를 끊어주고 관객(관람 객)이라는 출생신고서를 발부한 셈이다. 어쩌면 창작 자를 제거하면서까지 창작물 즉 예술작품의 본질을 더욱 탐구해보겠다는 절박한 탐구욕의 결과일지도 모 르겠다. 그러나 실제로 예술가들은 죽었는가? 삼청동 의 갤러리와 미술관들에서, 홍대 뒷골목의 대안공간 들에서 예술가라는 직함으로 생생히 살아 걸어 다니 는 저들은 누구란 말인가? 철학자들과 비평가들이 갑 론을박하며 저자가 죽네, 독자가 태어나네 하는 이 순 간에도 많은‘예술가’들이 작품을 만들고 세상에 내 보내고 있다. 누가 죽든 태어나든 변함없이 흘러가는 우리네 일상처럼 예술가들과 그들의 작품은 지금도 우리 곁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최후의 영웅

오늘날의 예술가는 다른 분야의 1인자가 받게 되는 영웅을 위한 박수도, 희생양에 대한 위로도 받지 못한 다. 창작자는 작품을 만들고 사라짐으로써 관객과 독 자를 낳고 사라지는 존재다. 작가가 죽고 남은 자리에 작품이 있다. 우리는 그 작품을 섭취하며 작가를 그리 워하기도 하고, 작가를 저주하기도 하고, 작품 속에서 나를 찾기도 하고, 나를 잊어버리기도 한다. 아니 어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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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들에게 듣고픈 영웅담이 없다.

우리는 예술가들의 부단한 노력과 수고와 땀을 그려 내는 데 익숙하지 못하다. 그저 그들은 천재라서, 태생 적으로‘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별종들이기에 나의 치열하고 삼엄한 현실 세계와는 다른 세계에 있다고 폄하하기도 한다. 역사 속의‘스타 예술가’들의 사건 파일을 들추듯 옛날 그림과 작품들을 구경하면서도 정작 오늘을 살아가는 예술가는 오히려 낯설다. 그리 하여 오늘의 예술가들은 고독하고 외롭다. 창작자가 사라진 자리에 놓인 작품 앞에서 그들의 고독과 외로 움을 물려받고 태어난 관객, 그는 바로 내가 된다. 예 술작품 향유라는 의외로 녹록치 않은 감상과정을 거 치면서 내 영혼을 쩡하고 울릴 의미를 찾는 일도 나의 몫이며, 그것이 성사되는 순간의 은밀한 성취감에 축 배를 들 진정한 영웅은 바로 나 자신이다. 그러하니 오늘이라도 미술관으로, 갤러리로 걸음을 옮겨 문을

“예술가란 무엇인가”라는 쉽지 않은 화두로 4회에 걸쳐 감히 적어본 민망한 글들을 오늘로서 정리하고 자 한다. 애당초 정답이 없는 질문에서 출발하였다. 그 럼에도 의문을 품고 고민하는 과정을 함께 한 독자들 에게 나름의 소득이 있었기를 기대해 본다.

송주영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예술학과에서 미술사, 미학, 예술경 영을 배우고 오하이오 주립 대학(The Ohio State University)에서 미술교육으로 석사(MA)를 받았다. 수년간 디자인 전문지 기자로 근무하면서 디자인과 예술에 관한 다 양한 저술을 하였고, 서울디자인페스티벌, 디자인코리아 등 다수의 국제 디자인 전시를 기획, 진행하였다. 현재는 예술 관련 서적의 번역과 편집을 하며 프리랜서 저술가로 활동하 고 있다. juilacats@naver.com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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