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 무 청
2009
영 주 권 병 사 병 영 체 험 수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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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주 권 병 사 병 영 체 험 수 기
2009
세계 170여 개 국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재외동포 수가 700만 명을 헤아립니다. 먼 타국 땅에서 저마다 성실하게 자신의 삶을 가꾸고 구 성원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재외동포들은 조국의 경쟁력을 높 이는 데 있어서도 막중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엔 재외동포들의 참정권과 관련하여 많은 논의들이 오가면서 권리와 동시에 주어져야 할 의무에 대해서도 관심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해외 영주권 병사 자진입영」제도는 청년다운 순수한 기상과 강한 애국심을 가진 젊은이들 이 있어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흔히들 똑똑하고 현명한 젊은이들은 이기적이고 타산적인 모습으로 비춰지기 쉽고, 이 때문에 자진하여 병역의무를 이행하려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 것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병역의무를 자진해서 이행하는 젊은이들의 공 통점은 누구보다도 큰 꿈과 포부를 가지고 있으며, 그 큰 꿈과 포부만큼이나 높은 도덕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한결같이 인생을 보다 멀리 보고 높이 날고 자 하는 열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각과 행동이 반듯하지 않고는 원대한 꿈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점점 늘 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2년이라는 군복무기간이 스스로를 담금질하고 성장시키는 시간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럽고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병역의무는 대한민국의 젊은이라면 누구나 이행하여야 하는 의무이기에 외국에 살고 있는 젊 은이들이 군복무를 이행했다고 해서 별반 특별한 일도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 러나 대부분의 시간을 타국에서 살아 우리말도 서툴고, 한국문화가 낯설은 형편에서 군복무 를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기에 이들의 결정이 더욱 값지다 할 것입니다.
이들이 입대를 결심하게 된 사연에서 우리는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군복무를 자신의 정체성
●발간사
발 간 사
Greetings
영제도」프로그램이 나가야할 방향을 시사해 주는 측면이 있어 그 뜻을 깊이 새기게 됩니다.
비록 해외영주권을 지녀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되지만, 그런 마음으로는 월드컵 경기를 보며 태극전사를 당당하게 응원할 수 없을 것 같아 군 입대를 결심하게 되었다는 어느 청년의 순 수하고도 책임감 어린 마음을 읽으며 새삼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어떤 청년의 말대로 군대는 대한민국 젊은이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보이지 않는 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 면 저를 비롯한 병무행정에 몸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 끈을 더욱 단단하게 엮어가야 할 막중한 임무가 있음을 실감합니다. 2천여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변함없이 애독하는 대 표적인 고전「사기」를 쓴 사마천은 역사에 남을 정도의 나라는 반드시 두 가지에 기반을 둔 정책을 실시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는 정의이고, 다른 하나는 힘입니다. 병무행정은 힘 있는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최선봉에 서 있고자 노력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앞으로도 해외 영주권병사의 더 많은 자진입영을 이끌어 내기 위한 더 좋은 프로 그램 개발에 힘쓰겠습니다. 병역의무를 이행하고 각 나라로 복귀한 자원에 대한「국외병역 자원 네트워크」를 구성, 병역의무 이행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확산해 나가는 한편, 병역의 무를 이행할 대상자와 부모를 초청, 부대 체험을 미리 하도록 하는 행사를 통해 병역의무에 대한 긍정적 변화를 증대시키는 등의 계획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국 외 병역자원 네트워크」가 고국과 해외동포사회 간의 긴밀한 연대를 지속할 수 있고 한민족 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연결통로로서의 역할도 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오늘도 자신의 원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군대라는 인생도량에서 자신과 싸워가며 스스로를 담금질해 나가는 영주권병사를 비롯한 모든 대한민국의 병사들에게 뜨거운 사랑과 격려를 보냅니다.
2009. 1 병무청장|박 종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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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gratulations
희망의 싹이 보인다
한남대 행정학과 교수|조 만 형
대한민국에 희망의 싹이 보인다. 우리 세대가 아닌 지금 여러분의 세대가 선배들의 부끄러 운 과거를 바꾸고 있다. 영주권을 가진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대한민국에서 병역의무를 이 행하고자 입영하는 경우가 늘어나는 것을 보고 젊은 세대에게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부터 약 30년 전인 1979년에 육군사병으로 입대하여 33개월을 근무하고 1981 년에 제대했다. 1986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그 이듬해인 1987년에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이 지금은 육군사병으로 12개월째 근무하고 있다. 30년의 세월이 훌쩍 뛰어넘으면 서 한 세대가 지나고 다음 세대가 그 공백을 채워주는 세월의 무게를 느낀다.
우리집 아들은 미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미국시민권을 가지고 있다. 본인이 원하면 대한민 국에서 병역의무를 하지 않아도 합법적으로 사는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솔직히 30년 전에 군대 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생활들을 기억하면 아들이 군대에 가지 않았으면 하는 마 음도 있었다. 그 이유는 내가 겪은 군대생활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 때문이다. 한마디로 나 는 정말 억지로 군대생활을 하였고 제대할 날만 기다렸다. 그런데 대학생인 아들이 작년에 자원해서 입대한다는 것이다. 본인이 우리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당연히 군대에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결정을 하는데 조금이라도 고민을 하거나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거리낌이 없었다. 순간 아버지 입장에서는 과거 군대생활의 경험을 떠올리면서 아들이 군대 에 가서 무사히 생활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앞섰다. 입대하는 날 부대까지 가서 입소하는 것까지 보고 집으로 왔다.
훈련을 받는 기간 내내 우리 내외는 아들이 걱정되었다. 그런데 참 세월이 많이 변해서인지
●수기집발간을축하합니다
수기집 발간을
축하합니다
있었다. 심지어 행군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보았는데 마침 거기에 우리 아들이 걸어가는 모습도 담겨 있었다. 지금은 1년의 시간이 지나서 상병을 달고 휴가를 나와 달콤한 여유를 즐기고 있다. 아들이 알아서 군대에 가고 잘 지내는 것을 보고 과거 30년 전에 군대에 갔던 우리 세대들이 참으로 잘못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 당시의 군대는 구타도 많았고 부정부패 도 많았고 비리도 많았던 군대였다. 나도 그러한 세대에 살면서 그러한 생활을 하였다. 내가 볼 때 최소한 군대생활과 관련해서는 우리 세대들은 정말 부끄러운 짓을 많이 했다. 북한 김 일성이 그렇게 시킨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군대가 스스로 그러한 군대를 만들었던 것이다.
내가 1986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100여명의 한국유학생들과 지내면서 참으로 이상 한 경험을 했다. 소위 학력이 좋고 엘리트라고 자부하는 유학생들이 대부분 군면제자라는 사실이었다. 대략 100명 중에 80명 정도가 군면제자였다. 오히려 나같이 정상적으로 군대 에 가서 3년 동안 고생하면서 국가를 지킨 사람들이 소수가 되었다. 참으로 부끄러운 세대 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에 희망의 싹이 보인다. 우리 세대가 아닌 지금 여러분의 세대가 선배 들의 부끄러운 과거를 바꾸고 있다. 영주권을 가진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대한민국에서 병 역의무를 이행하고자 입영하는 경우가 늘어나는 것을 보고 젊은 세대에게 희망이 있다고 생 각한다. 이제 여러분들이 과거 선배들이 저지른 부끄러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가고 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앞으로 살아갈 대한민국은 더욱 정의롭고 공평한 사회가 될 것으로 확신 한다.
각설하고, 인류 역사를 보면 가장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했던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은 혼자서 일을 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 조직을 만들어서 일을 나 누어 한다. 인간이 만든 발명품 중에서 최고의 발명품이 조직이라고 한다. 회사, 학교, 정부, 교회, 군대 등 모두 인간이 만든 조직이다. 결국 인간은 조직을 만들고 그 속에서 살다가 죽 는 존재이다. 군대생활은 사람들이 조직생활을 배우고 익힐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가능하 면 조직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이 조직에도 좋지만 본인의 행복에도 좋다.
군대는 인간들이 사는 세상에서 어쩌면 없으면 더 좋을 지도 모른 조직이다. 군대란 결국 전 쟁을 하는 조직이기 때문이다. 회사나 공장은 인간에서 유익한 물건을 만들어내지만 군대는 전쟁을 하면서 살육을 하는 조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사회는 항상 상대가 있 는 법이다. 친구도 있지만 원수도 있고, 우방도 있지만 적국도 있다.
전쟁의 반대는 평화이다. 그래서 다른 한편으로 보면 군대는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만들어 진 조직이다. 전쟁을 겪은 사람만이 평화의 가치와 일상생활의 소중함을 안다고 한다. 여러
영 주 권 병 사 병 영 체 험 수 기
병무청은 영주권취득 후 자진하여 현역병으로 입영한 병사들의 자긍심과 애국심을 고취하기위한 문화탐방행사를 매년 실시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 2008년 9월 29일부터 10월2일 까지 실시한<병역의무자진이행 모범병사 문화탐방>
행사에 앞서 박종달 병무청장이 환영사를 하고 있는 장면(위)과 모범병사들과의 기념촬영 장면(아래)이다.
병 역 이 행 명 문 가 시 상 식 에 서 영 주 권 병 사 표 창
김재원일병을 비롯한 2명의 영주권병사가 병역의무의 숭고한 가치를 높인 올해의 모범병사로 선정돼「병역이행 명 문가 시상식」에서 병무청장 표창을 받았다. (2008. 6. 20)
한 인 단 체 장 초 청 병 무 행 정 설 명 회
「한인단체장 초청 병무행정설명회」는 재외국민들에게 영향력이 있는 인사들을 초청, 재외국민의 병역의무 및 관련 제도를 설명하는 행사로, 2008년 10월 1일, 서울그랜드힐튼호텔에서 총 55명의 내외 고객 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개최 되었다. 이날 설명회에서는 해외한인단체장 및 부회장, 사무총장 등 임원진에게 명예병무홍보대사 위촉패를 전달하는 한편, 영주권 병사 다섯명에게는 모범병사 표창장을 수여, 자진해서 병역의무를 이행코자 하는 젊은이들을 격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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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 HO OTTO O N NE EW WS S
재 외 동 포 를 위 한 병 무 행 정 설 명 회
『재외동포를 위한 병무행정 설명회』가 지난 2008년 9월 2일부터 11일까지 뉴욕과 LA 등에서 두 차례에 걸쳐 개최되 었다. “인터넷과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예전보다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국외에 체류하는 병역의무대상자들이 병역관련 정보를 얻는 데 있어 취약한 형편”이다. 『재외동포를 위한 병무행정 설명회』개최는 이런 어려움을 다소나마 해소하기 위한 취지에서 계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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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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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부모 형제 나를 믿고 단잠을 이룬다”……… 9
최우수상“소풍”……… 11
우 수 상 항아리가 가득 찼습니까? ……… 16
우 수 상 손 짓 ……… 19
우 수 상 노블레스 오블리주 ……… 23
“부모 형제 나를 믿고 단잠을 이룬다” ……… 27
어머니,아버지 저를 낳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 31
Ⅱ 꿈의 씨앗을 묻는 중대 ……… 33
꿈의 씨앗을 묻는 중대 ……… 35
강한친구 대한남자 ……… 39
국가를 위해 봉사할 수 있어 행복합니다 ……… 44
뉴질랜드 전경 ……… 48
세계속에 한국을 알리겠습니다 ……… 52
대한민국이 너무 좋습니다 ……… 56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려면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하라! ……… 60
Ⅲ 중대장이 한 턱 쏴라! ……… 63
중대장이 한 턱 쏴라!……… 65
정말로 잘한 결정 ……… 69
“용감한 해병대 이리와라”……… 72
군대는 한국남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 ……… 76
나는 대한민국 군인입니다 ……… 79
군대가면 사람된다 ……… 83
나의 별명은 수퍼토론토 ……… 87
Ⅳ 수에냐(Suena) 꿈을 꾸어라! ……… 91
수에냐 (Suena) 꿈을 꾸어라! ……… 93
브라질에서 온 공중보건의사의 섬마을 일기 ……… 96
군대도 자기하기 나름 ……… 100
인생살이의 Know-how, 군대에서 배운다 ……… 104
후회없는 선택 ……… 107
2년이라는 시간의 선물 ……… 111
삼겹살에 소주 한 잔이 그리운 영원한 한국인 ……… 114
Ⅴ 멋진 남자를 아들로 두었네!! ………117
멋진 남자를 아들로 두었네!! ……… 119
라 그란 오뽀르뚜니닫 ……… 124
인생수업……… 128
한국인의 매운 맛을 배운다 ………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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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부모 형제 나를 믿고 단잠을 이룬다”
“소풍”
항아리가 가득 찼습니까?
손 짓 노블레스 오블리주
“부모 형제 나를 믿고 단잠을 이룬다”
어머니,아버지 저를 낳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Ⅱ꿈의 씨앗을 묻는 중대
Ⅲ중대장이 한 턱 쏴라!
Ⅳ수에냐(Suena) 꿈을 꾸어라!
Ⅴ멋진 남자를 아들로 두었네!!
영주권병사 병영체험수기
2009
내가 처음
군대
에 간다고 폭탄선언을 했을 때많은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사람
이라고 했다.신검 받을 때에도 그랬고 신병교육대에 입소해서도
자대 배치
를 받고 나서도 늘 그랬다.한국
사람들눈
에 나는 이상한 사람이었다.“소풍”
전역병사|조 재 훈
2007년 12월, 서해안 태안에서 기름유출 사건이 있었다. 그 넓은 바다를 메운 악마의 검은 손길 은 수 많은 바다 생물과 태안주민들의 생명과 보금자리를 뺏어가고 있었다. 제대를 몇 개월 앞둔 말년 병장인 나와 내 동기들은 편안히 누워서 혀를 차며 내 작은 안타까움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 때 당시 나는 태안 앞바다의 참사는 TV에서만 보는 사고라 느끼고 있었다. 과연 몇 명이나‘내가 가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을까.. 그러나 사건 며칠 후부터 인근 군부대 및 전국에서 자원봉사자 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몇 십만, 몇 백만 명의 자원봉사자들은 자비를 들여가면서 태안 앞바다의 기름을 제거해 가고 있 다는 뉴스를 들을 때 마다 우리 한국인들은 대단한 단결력을 가지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그 러던 중 인근 공군 부대에서 지원요청이 왔다.
당시 고참이 몇 없었던 시절, 떨어지는 낙엽도 피하라는 말년 병장이 가까이 올 시점에서 어떻게 보면 난 당연히 열외대상이었다. 하지만 난 그 떨어지는 낙엽을 맞아 보기로 했다. 지원자를 뽑는 다고 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기회도 자주 없는데 한번 가볼까?”어떻게 보면 태안에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모든 남자들은 군대와 안 보이는 가느다란 실로 묶여있다’는 생각을 가끔씩 한다.
외국에 나가서 오래 살았든 영주권을 받았든 모든 한국 남성은 그런 것 같다.
영주권을 보유하고 있는 20대 대한민국 남성, 즉 속칭“신의 아들”이 왜 하늘이 주신“면제”라는 은총을 걷어차고 다른 사람들은 기를 써 가면서 피하는 그 곳을 제 발로 기어 들어오느냐라는 질문에는 위 대답이 맞는 것 같다.
최우수상
가는 것을 단순히 소풍이라고 생각했다고 할 수도 있었다.
정확한 날짜는 생각이 안 나지만 크리스마스가 되기 일주일 전이었던 것 같다. 새벽 일찍 일어나 서 무려 6~7시간 정도의 버스를 타고 태안에 도착했을 때 내 앞에 보이는 것은 방파제의 검은 색 깔의 띠 그리고 수천의 인파였다. 옷을 갈아입고 해변으로 내려가 모래사장을 파보니 기름이 우 물처럼 고여있었다. 아무리 깊게 파도 나의 고무장갑 위에는 검은색의 기름만 묻어 나오고 아무 리 닦고 닦아도 검은 색은 지워지지 않았다.
내 우비는 발 끝부터 가슴까지 검은색으로 염색되었고 장화를 신은 것을 비웃듯이 기름은 계속 스 며 들어왔다. 기름 특유의 냄새는 역겨웠고 가끔 핑하고 돌기도 했다. 하지만 초등학생부터 어른 까지 누구 하나 멈추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밀물이 들어와 철수했지만 기름이 둥둥 떠다니는 바 닷물을 보니 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수천 명이 닦아도 바닷물에 남아있는 기름 때문 에 다시 더럽혀진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정말 안타까웠다.
태안의 마을은 죽음의 마을 그 자체였다. 모든 횟집의 문은 닫혀 있고 작은 슈퍼마켓 조차 찾아볼 수 없는 바닷가. 만약 내가 군대에 오지 않고 미국에서 인터넷으로 이 참혹한 현장을 봤다면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생명이 보이지 않는 바다 그리고 자원봉사자들의 행렬.
피부로 느끼며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태안 주민들의 피해를 체험했던 이 하루는 비록 불순한 동 기로 지원을 나왔지만 돌아갈 때는 세상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나는
2005년 12월 26일 미국 영주권자로서 공군 현역 병사로 입대 했다. 그리고 2년 3개 월이 지나 올해 3월에 제대를 했다. 지난 2년 3개월의 군복무 그리고 전역 후 지금 까지 사람들이 나에게 가장 많이 물어본 질문은 군복무의 경험 그리고 느낌이 아닌“왜 군대에 갔 느냐”였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군대를 가야합니다!!!”라는 TV 인터뷰용 멘트를 준비하 기는 했지만 나의 솔직한 대답은“글쎄요..”였다.지금까지 내 입대 동기는 지금의 나로서도 시원스럽게 대답을 못하겠다. 부모님의 압박이나 대학 교 생활의 고난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난 1학년 때 당당히 군대에 가겠다고 주변에 선포 했다. 아마도 내 입대 동기에 가장 가까운 답은“왠지 가야할 것만 같아”일 것 같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모든 남자들은 군대와 보이지 않는 가느다란 실로 묶여있다 라는 생각을 가 끔씩 한다. 외국에 나가서 오래 살았든 영주권을 받았든 모든 한국남성은 그런 것 같다. 영주권을 보유하고 있는 20대 대한민국 남성, 즉 속칭“신의 아들”이 왜 하늘이 주신“면제”라는 은총을 걷어차고 다른 사람들은 기를 써 가면서 피하는 그 곳을 제 발로 기어 들어오느냐라는 질문에 위 대답이 맞는 것 같다.
내가
영주권이 있든 없든 주위에 사람들이 군입대를 고민하든 말든 군대를 간다 라는 생 각은 내 뇌 속에 뿌리깊게 박혀 있었다. 어릴 적“F-18 전투기 조종사”혹은‘공군 사관학교 입학’이라는 꿈을 가졌던 나였기에 더더욱 군대를 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물론 힘들고 지루했던 2년 3개월이었지만 군대에 가기를 잘 했다. 단점보다 장점이 많았다. 공부 만 하고 나름 곱게 자랐던 나에게 군대생활은 내가 얼마나 부족하고 어렸는 지를 알게 해 주었다.
훈련소 입소 4일째 실소대를 배치 받으면서 나의 첫 빨간모자 조교를 만났을 때 왠지 군대라는 곳이 나를 바꿔줄 것 같았다.
본능에 충실해 단순하게 입대를 한 나에게“반갑다”라는 말과 함께 20여 분의 첫 기합을 받았을 때 지옥을 발견했지만 이‘지옥을 견뎌내자’라는 오기가 동시에 생겨났다. 지금 내가 생각해도 자랑스럽지만 난 그때부터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내가 나를 챙길 수 없다면 누구를 책임질 것이 며, 내가 나를 이길 수 없다면, 누구를 이길 수 있을까”내가 군대에서 얻은 첫 번째 교훈이었다.
유격과 산악행군 시에는 유체이탈이란 걸 경험했고 구보에서는 나의 정신력의 한계점을 찍었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하고 싶었고 다 버리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 공부하고도 싶었다. 하지 만 포기하지 않았다. 당시 100KG이었던 나는 서서히 20대의 건강한 육체로 되돌아 오기 시작했고 내 정신 또한 서서히 세상을 인지해 나갔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하면 완성이란 달콤함을 얻을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훈련소 생활은 나에게 거시적인 정신 세계관을 구축하게 해주었다.
훈련소가 정신을 차리게 해 주었다면 자대에서의 생활은 나에 대한 내 자신의 평가를 내릴 수 있 게 해 주었고 그리고 발전하게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미국 명문대에서 공부도 어느 정도 했고 문서 업무에도 제법 자신 있었던 내가 자대에서 받은 것은 부서 고참들의 문책과 호통이었다. 내가 있었던 곳은 보급대대 자세히 말하자면 사병과 훈련병의 쌀과 부식을 담당하는 곳이었다. 몇 천명이나 되는 인원을 먹이기 위해서 마트에서나 보았던 양 의 물건들이 매일 들어왔고 그것을 일일이 기록하고 손으로 쌓았다. 몇 만 캔이나 되는 음료를 보면서 이 것을 내가 다 쌓아야 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 서 고참들의 빨리 하라는 요구까지 겹치니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요즘
모 코메디 프로그램에서 하는 말처럼“해보지 않았으면 말을 마세요”라는 것처럼 난 일반 사람들이 상상하기 힘든 작업을 하루하루 했다. 물론 내가 고참이 되어서 느낀 거지만 우리 부서의 좌우명은“빨리빨리, 하지만 정확하게”였다. 빨리빨리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집중력과 민첩한 손놀림 그리고 숙련도가 필요했고 익숙해질 때 쯤에는 기계에 가깝게 변해버린 내 모습을 발견했다. 그리고 일일이 기록하기 위해서는 엑셀이라는 프로그램을 사용했다. 이 프로그램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던 내가 나중에 다른 부서들에서도 요청이 오는 프로그램 마스터가 되었다.처음에는 정말 혼도 많이 났고 실수도 많이 했다. 그러나 난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결국 자격증 을 따고 프로그램 하나는 우습게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물건 쌓기와 문서 업무 즉, 블루 칼라와 화이트칼라가 하는 일들을 각각 경험할 수 있었다. 참으로 귀중한 경험을 한 것 같다. 그 리고 공부하는 것과 일 하는 것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두 번째 교훈이었다. 일하는 능력은 경험이었고 공부하는 것은 노력이었다. 나는 전자에 너무나도 부족했었다. 나에게 얼마나 큰 선물인지 모르겠다.
세상에 사람은 많고, 그 사람들에게 배울 것도 많다. 내가 얻은 마지막 교훈이었다. 비록 내 부서 고참들은 일에 대해서 상당히 엄격했다. 가끔씩 그들의 정확성과 업무 능력에 놀란다. 물론 나보 다 나이가 많고 그들이 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열심히 정확하게 하는 지 알 수 있었다. 모두 다 나 보다 좋은 대학교도 안다니고, 공부에 대한 열정도 많이 없었지만 왠지 그때는 내 자신이 초라하
처음에는 정말 실수도 많이 했다.
그러나 난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결국 자격증을 따고 프로그램 하나는 우습게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게 느껴졌었다. 내가 아무리 공부를 잘했어도 직장에서 일을 못하면 무슨 소용이며 결국 내 대학 교 졸업장은 길거리에 나뒹구는 휴지 조각처럼 되는 것이란 것을 깨달았다. 내 자신을 채찍질 할 수 있는 계기였다.
내 위에 나랑 똑 같은 장래희망을 가진 고참이 한 명 있었다. 공부만 열심히 하면 나중에 취업도 무난히 할 수 있겠지 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진 나에게 그의 행동은 충격이었다. 그는 증권사에 들 어가기 위해 자격증시험을 준비하고 짬짬이 시간을 나눠가며 자신의 길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에 비해 나는 멍하니 TV를 보고 있는 시간이 더욱 많았으며 동기들과 잡담하는 것이 일상생활 이었다. 단순히 미국에서 공부한다는 것을 무슨 감투나 얻은 듯 느긋하게 생각했던 내게 고참의 공부하는 모습은 위기감으로 다가왔고 그 다음 날부터 내 손에는 증권에 관련된 문서들이 항상 들려있었다. 나의 부서 고참들이 나에게 업무를 잘하는 능력을 연마토록 나를 각성 시켜줬다면 이 고참으로 인해 나는 노력하는 사람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알게 해주었다.
나는 외국에서 나고 자란 영주권을 가지고 있는 모든 대한민국 남자들에게“반드시 군에 다녀와 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이런 글을 쓰는 건 아니다. 단지 자신이 부족하고 세상을 좀 더 알 고 싶다면 군대를 가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
로운 것들에 적응하다 보면“나는 누구인가”“나는 어떻게 살아왔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하나”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 한다.
나처럼...
훈련소 에피소드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훈련들이 고되고 힘들었지만 훈련이 끝나고 난 지금 돌이켜 보면 큰 보람을 느낍니다. 무엇보다 훈련소에서 따로 훈련을 받다보니 그 동안 못느꼈던 부모님의 고마움도 느끼고 저에게 편지를 주신 분들을 생각하며 훈련을 받다보니 훌쩍 한달이 지난 것 같습니다. ㅣ강태현(캐나다)
나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아들이기에 부여된 의무가 있다. ROTC 출신이 셨던 아버지께서 내가 태어났을 때 내가 ROTC 몇 기수가 될 지 계산하실 정도로 자부심이 있으 셨기 때문에, 나에게 군복무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고, 기대되는 일이었다.
하
지만, 사람의 미래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법인가 보다. IMF를 맞기 4개월 전이었던 97 년 8월, 홀연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나와 여동생을 부모님께서는 미국 LA로 데리고 떠나 셨다. 그리고 부모님께서는 미국 영주권을 취득하셨고, 미성년자였던 나에게도 자동으로 영주권 이라는 것이 나오게 되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알지 못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지를.친구들이 하나 둘씩 입대 할 때도, 그네들이 휴가를 나와서 군대이야기를 장황하게 들려줄 때도, 대부분 친구들이 전역해서 예비군에 편입이 될 때 까지도 나는 내가 군대에 가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한 적 없이, 마음 한구석에 빚처럼 남겨놓았다. 해외에 살면 다들 애국자가 된다고 했던가.
항아리가 가득찼습니까?
국방대학교 근무지원대|오 규 창
군대는 내 삶에 꼭 넣어야 하는 커다란 돌이었다.
나에게 있어서는 꼭 해야 하는 일인데, 지금 아니면 할 수 없어서 그래서 입대를 했다.
이제야 내 마음에 있던 조국을 향한 빚을 조금은 갚는 것 같다.
또, 나중에 내 아들에게 나는 떳떳한 아버지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우수상
나에게는 항상 마음에 나의 조국 대한민국을 향한 묘한 빚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러면서 어느덧 나는, 미국에서 4년의 대학생활 그리고 대학원까지 나에게 주어진 기회를 살려 가며 치열하게 살아왔고 로스쿨 졸업을 1년 앞두고 있었다. 로스쿨 졸업 후 취업할 로펌 인터뷰에 바쁜 어느 날, 뉴욕 케네디 공항에서 환승을 기다리던 중 어느 책에 나오는 이야기를 읽었다. 어 느 대학 교수가 유리로 된 큰 항아리와 큰 돌, 작은 조약돌, 모래, 물을 가지고 수업시간에 들어와 서, 큰 돌로 항아리를 가득 채운 후 학생들에게 물었다.
“항아리가 가득 찼습니까?”
학생들은 가득 찼다고 이야기 했고, 아무 말 없이 교수는 작은 조약돌들을 항아리에 부었다.
그랬더니 작은 조약돌 전부가 큰 돌들 사이사이에 들어갔다. 다시 교수가 학생들에게 물었다.
“항아리가 가득 찼습니까?”
학습효과로 학생들은 아무 말을 하지 않았고, 교수는 모래를 부었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물을 항아리가 찰랑찰랑 찰 때까지 부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물었다.
“내가 이것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학생 중 한 명이 손을 들고 시간을 어떻게 나누어 사용하든지 간에 항상 자투리 시간이 있으므로 그 시간을 잘 관리하라는 의미인 것 같다고 말했다. 학생의 발표를 듣고 교수가 말하기를, “학생 의 이야기도 의미가 있지만, 내가 학생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선적으로 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만약 작은 조약돌들을 먼저 넣었 다면, 절대로 큰 돌을 이 항아리에 넣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묵상하던 중, 나의 인생에 내 마음 속에 빚처럼 항상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하지만 그 누구도 나보고 하라고 말하지 않았던 군대라는 큰 돌이 떠올랐다. 그리고 지금 내 인생의 항아 리에 그 돌을 넣지 않으면,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서는 절대 넣을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 후에 부모님께 나의 결심을 설명 드렸고, 부모님께서는 전적으로 내 결정을 신뢰해 주 셔서 모든 인터뷰를 중지한 후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군에 입대를 하였다.
물론, 주변에 친구들은 로스쿨 졸업을 1년 남기고 그렇게 가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나를 말 렸지만, 나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이것은 내 의무요, 내가 조국에 진 마음의 빚을 갚는 일이며, 더
나아가서 지금 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 들어왔더니 주변에서 나를 바 라보는 시선은 정반대였다. 교회에서 집사님, 장로님들께서 훌륭한 결정이라고 격려해주셨고, 친 척들도 내 결정을 후원해 주셨다.
나는 힘이 났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에게 다짐했다.
20대 후반인 나에게, 어쩌면 이 시간, 이 2년의 시간이 마지막 주어진 휴가라고.
나는 이제 길고 긴 휴가를 보내러 간다고.
지난 27년 간 시간이 없어서 머릿 속에만 담아두었던
그 정리되지 않은 많은 생각들을 2년의 군생활을 통하여 숙성시키고 다시 되새김질하여서 앞으로 제대 후 다가올 나의 30대를 거침없이 치고 나아갈 원동력을 삼아야하겠다고 다짐했다.
군대는 내 삶에 꼭 넣어야 하는 커다란 돌이었다. 나에게 있어서는 꼭 해야 하는 일인데, 지금 아 니면 할 수 없어서...그래서 입대를 했다. 이제야 내 마음에 있던 조국을 향한 빚을 조금은 갚는 것 같으며, 나중에 내 아들을 향하여 나는 떳떳한 아버지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입대한 지 1년 2개월 정도가 지났는데, 군대는 벌써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규칙 적인 생활을 통하여 신체적으로는 더욱 건강해져 가고 있으며, 150명의 사랑하는 가족들도 생겼 고, 내 정신과 마음은 더욱 건전해지고 있다. 나는 2년의 휴가를 마친 내가 기대가 된다.
우수상
손짓
육군사관학교 본부중대•병장|김 용 광
내 나이 서른, 분대장으로서 오늘의 결산 내용과 지시사항을 듣고 전파하기 위해 가고 있다.
다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일과 후 웃고 떠드는 모습이 사뭇 귀여워 보이기도 하며, 나도 그저 그런 젊음이 좋아보인다.
저기 복도 끝에서 어서 오라는 손짓을 한다.
주황색 바탕에 짙은 파랑색 줄무늬가 겨드랑이를 따라서 그려져있다. 이 활동복을 입은 사람들이 복도를 걸어다니면서 각자 인사와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다. ‘분대장 집합’이란 소리와 함께 이 복도를 걸어가면서 나는 안부를 묻고 또는 인사를 받으면서 집합장소로 가고 있다.
내 나이 서른, 분대장으로서 오늘의 결산 내용과 지시사항을 듣고 전파하기 위해 가고 있다. 다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일과 후 웃고 떠드는 모습이 사뭇 귀여워보이기도 하며, 나도 그저 그런 젊음이 좋아보인다. 저기 복도 끝에서 어서 오라는 손짓을 한다. 어서 오라는 손짓....
시
원하게 달리는 차 안. 주위는 흔히 보이는 논과 밭이 있다. 하늘은 맑고 강하지 않은 햇볕은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있음을 알리는 듯 하다. 친한 친구 놈이 운전하는 자동차는 논산을 향하고 있다. 내 옆에는 여자친구가, 앞 좌석에는 또 다른 친구가 앉아있다. 그 녀석들은‘99년도 군 생활을 하고나서 지금 예비군 훈련 마지막 년도를 남기고 있다. 난‘07년도 군 생활을 하러 간 다. 애써 말을 하지 않아도 입대날의 찹찹함을 알고 있기에 그냥 의미없는 우스개소리를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어도 그 녀석들의 군 생활은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한가 보다. 논산에 도 착하자 입소하려는 인파들이 보였다. 우린 천천히 그 인파를 헤치고 훈련소로 들어가면서 집합 장소로 갔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나와 비슷한 연배는 없어보인다.
사실, 군대라는 특수 집단에 간다는 알 수 없는 미지의 두려움보다는 내가 이 나이에 가서 잘 견 딜 수 있을까? 라는 내 자신에 대한 불안감이 더 크다. 논산 훈련소!!.... 1994년 형이 입대할 때 한 번 와 봤던 곳이다.
그 곳에 내가 다시 오다니 감회가 새롭다. 이제, 집합을 할 시간이다. 여자 친구와 한 번 깊은 포 옹을 하고 친구들과 다시 포옹을 했다. 그리고 뒤 돌아보지 않고 운동장 (지금은 나에겐 연병장이 지만)에 들어갔다. 어색한‘충성’이라는 인사와 함께 운동장을 한 바퀴 돈다. 난 그저 줄을 맞춰 서 돌고 있는데, 저 멀리서 친구 녀석 중 한 명이 손을 흔든다. 내 이름을 크게 외치면서 손을 흔 든다. 보이는 구나. 그 녀석의 얼굴과 손짓이....
17
시간의 장거리 비행 시간을 마치고 한국에 도착했다. 미국 뉴욕에서 한국까지 오는 비행 기는 너무 지루했다. 기내에서 영화도 보고, 책도 읽곤 했지만. 그리 재미있지는 않았다.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가서 다시 대학을 다녔다. 영주권자인 나는 대학을 다니면서 학자금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3년 동안, 공부를 하고 졸업 할 시기가 되었다. 그 때, 한 통의 전 화가 집에서 걸려왔다. 집 경제 사정이 많이 어렵고, 아버님이 쓰러지셔서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 식이었다.
그 곳에 내가 다시 오다니 감회가 새롭다.
이제 집합을 할 시간이다.
여자 친구와 한 번 깊은 포옹을 하고 친구들과 다시 포옹을 했다.
그리고 뒤 돌아보지 않고 운동장 (지금은 나에겐 연병장이지만)에 들어갔다.
어색한‘충성’이라는 인사와 함께 운동장을 한 바퀴 돈다.
그 전화를 받은 후 3일 동안 고민을 했다. 한국에 가겠다라는 말을 했지만, 한국에 가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무슨 일을 해야 하나 등 내 앞 길의 대책을 세우느라 고민을 했다. 나름대로 계획을 세웠지만, 미래가 내 맘대로 되리라는 보장은 없지 않은가. 마지막 기말 고사를 보고 나서 짐을 서둘러 챙겼다.
다음날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오는 동안 대책을 고심했다. 집안 경제에 어떻게 보탬이 되어야 하나, 내 진로는 어떻게 정해야 하나, 군대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도착 입구가 열리면 서 각기 서로 보고 싶은 얼굴들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 중 저기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그 새 얼굴이 많이 야위었고, 흰 머리도 많이 늘었다. 많이 늙으셨구나. 그 간의 고생이 얼마나 심 하였는지 대충이나마 짐작을 할 수 있다. 어머님이 손짓을 하신다. 어서 오라고....
만
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것이 인생인 것 같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이 열리던 그 해에 난 미국으로 갔다. 그 때부터 내 인생에 헤어짐이라는 단어가 들어왔다. 물론,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그런 관계들이 많이 있었지만, 가슴이 애릴 정도로 헤어짐이라는 단어가 맘 속에 깊이 자리잡은 때가 이 때였다. 4년 뒤, 미국에서 어느 정도 적응을 하며 인생의 계획을 세울 때에 다 시 이를 뒤로 하고 한국으로 가야 했었다.희뿌연 안개가 드리워진 망망대해 위에 하나의 나뭇잎을 타고 떠내려가는 그런 심정으로 한국에 왔다. 하지만, 한국에 와서 군입대 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하면서 무언가 희망의 가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정당당하게 군 입대를 하고나서 정상적으로 한국에 살면 이제 그 쓰라린 헤어짐의 반복을 보다 적게 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 대방동에 있는 병무청에 가서 영주권자인 내가 병역의 의무를 할 수 있는 방안들을 물어보 았다. 그리고, 영주권자 입영 희망 프로그램이 있으니 한 번 지원해 보라는 권유에 2007년 2월 20일 영주권자 입영 희망 프로그램 1기로 입대하게 되었다.
서로 다른 나라에서 온 영주권자끼리 1주일 동안 입소대대에 머물면서 적응기를 가졌다. 서로 어 색한 사이지만, 그래도 웃고 떠드는 가운데 금새 친해지게 되었고 적응기가 끝나면서 훈련소로 들어갈 때, 서로 연락하자며 이메일을 나누기도 했다.
훈련소에 있을 때나, 육군사관학교로 자대 배치를 받을 때, 운동을 하면서 체력을 키우자며 스스 로 다짐을 하였다. 일년 동안 부대 운영 계획대로 살다보니, 하루 하루의 시간은 더디게 가는 듯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나름대로 알차고 빠르게 시간이 간다. 초창기의 내 다짐이 어느 정도까 지 진행되었는 지 아직 판단하기는 이른 것 같다.
이 다짐을 지속시켜야 할 시간적 여유가 충분히 많기 때문이다. 남들은 군대를 가면서부터 헤어 짐이라는 말을 실감하는 듯 하다. 하지만, 난 이전에 이를 경험했고, 지금은 군 생활을 기점으로 만남의 단어를 더욱 경험하고자 한다. 같이 먹고 자는 전우들을 만났고, 이들과는 헤어진다는 생 각보다는 이들과의 관계 지속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헤어짐을 경험한 후 만남이 있는 게 진리라고 한다면, 이제 우울한 헤어짐보다는 행복한 만 남을 생각할 시기인 것 같다. 이제 저기서 어서오라는 전우의 손짓은 이전의 손짓과는 다른 의미 로 내게 다가온다. 난 미소를 지으며 간다.
훈련소 에피소드
다들 외국에서 오래 살아서 제재가 심하고 규율이 엄격한 군대에 적응이 잘 되지 않아 분대장들과의 사소한 마찰도 있었지만 힘든 5주간의 훈련을 마친 지금은 다른
호주에서 유학생활을 하다 영주권을 취득한 후 대학원 재학 중에 문득 군대를 가야만 한다는 생 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호주에는 공부를 하러 넘어간 것이었지 이민을 생각하고 가지 않아서 그 럴 수도 있다. 혹은 가족들과 지인들이 모두 한국에 있어서 일 수도 있다.
하지만 군대를 가야 한다는 큰 문제를 망설임 없이 단번에 결정을 내릴 수 있게 해준 것은 지금까 지 살아오면서 가지고 있던 가치관 때문이었다. 한국 사람임을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그 믿음을 저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2002년, 2006년 월드컵을 모두 호주에서 맞이하면서 태극전사들이 골을 넣는 순간마다 심장이 요동치는 것을 느낀 것이 기억 난다. 또한 붉은 티셔츠를 입고 삼삼오오 모여서 멀리 있지만 마음이 전해지기를 바라며 응원을 했던 기억 난다. 물론 군대를 안 올 것이라고 결정을 내린 후에도 태극전 사를 응원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 남자라면 와야 한다는 군대를 경험하지 않고 부끄러 움 없이 응원을 할 수가 없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60사단|유 백
지금 왜 입대를 했는지 누군가가 물어본다면 노블레스 오블리주 (Noblesse Oblige)를 몸소 실천하기 위해서 입대하였다고 말해 주고 싶다.
영국의 귀족처럼 권리를 누리기 위해 책임을 다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자존심과 나라를 한 번에 지킬 수 있는 방법이다.
우수상
입대하겠다고 부모님께 처음 알려드렸을 때 부모님의 반응은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 달랐었다. 영 주권을 가지고 있으면서 군대를 왜 가냐고 하시는 부모님이었다. 하지만 부모님께 내 자신에게 떳떳하기 위해서 가야만 한다고 하니 부모님께서는 고마움을 느끼셨다. 고마움을 느낄 필요가 없 으신데도. 이런 말을 하기에는 부끄럽지만, 아마 부모님은 자식의 올바른 생각에 고마움을 느끼 신 듯 했다. 그리고 자식이 타지가 아닌 한국에서 터전을 잡고 싶어 하는 것에 대해서도 기특해 하시는 것 같았다.
2006년 7월, 한국에 완전한 귀국을 하기 위해서 왕복 항공권이 아닌 편도 항공권을 발권했을 때 의 기분은 참으로 묘했다. 발권 후 호주에서 알았던 지인들과 대학, 대학원 동문들과 마지막 인사 를 하기 위해서 술자리를 가졌다. 술자리에서 군대를 다녀온 선·후배도 있었고 나보다 나이가 많지만 아직 군대를 가지 않은 선배도 있었다.
군
대를 다녀온 그리고 다녀오지 않은 선·후배 모두 내가 군대에 가기로 결정했다고 말했을 때, 한명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나를 정신 나간 녀석이라고 장난스럽게 농담을 던졌다. 그 농담을 들으면서 2년이란 시간을 군대에서 보낸다는 게 어리석은 일인가 하는 생각도 해 보았지 만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내가 내린 결정이 옳은 것이라는 마음은 더욱 단단해져만 갔다. 지금도 휴가를 나가면 내 결정이 옳다고 해 준 형을 계속 만나고 있다. 하지만 나머지 선·후배들은 호주 에서 한국에 대한 향수와 군대에 대한 두려움을 가슴에 안고 삶의 터전을 잡고 살아가고 있다.한국에 들어와서 통역병을 지원하기 위해서 대학원 졸업식도 참석하지 않고 일찍 귀국을 하였다.
물론 호주에서 살아온 시간과 영어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기 때문에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바 로 시험에 응시하였다. 합격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2006년 7월, 한국에 완전한 귀국을 하기 위해서 왕복 항공권이 아닌 편도 항공권을 발권했을 때의 기분은 참으로 묘했다.
발권 후 호주에서 알았던 지인들과 대학,
대학원 동문들과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서 술자리를 가졌다.
결과가 발표되는 날, 결과는 나를 놀라게 했다. 영어권 국가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의 점수치고는 형편없었다. 한국에서 공부하여 더 좋은 점수를 취득한 사람도 많이 있었다.
그 때 나는 군대라는 곳을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었던 것 같다. 통역병에 떨어지고 연말에 모집을 한다는 카투사에 지원을 하였다.
토익은 대학을 다닐 때 방학기간에 한국에서 본 점수로 지원을 하였다. 900점 이상의 점수를 가 지고 있었지만 임의 선발이 되기 때문에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지원을 하였다. 이렇게 하루를 카 투사 발표만 기다리는 것이 무료하여 중국어 학원을 등록하였다. 그곳에서 전문연구요원제도 라 는 것에 대해 알게 되었다. 석사를 취득한 사람이면 평균 초봉 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카투사 발표를 기다리는 동안 전문연구요원제도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하였다. 며칠 후, 한 국에서 인지도가 높은 IT업계에서 면접을 보자고 연락이 왔다.
회사
입사 후, 제품 교육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물론 대학에서 배웠던 많은 부분들이 중 복이 되어서 큰 어려움은 없었다. 한달 과정의 교육이 끝날 무렵, 병무청에서 전문 연구요원이 될 수 없는 자격이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 소식을 들은 다음날 나는 어머니와 함 께 확실한 이유를 듣기 위해 바로 병무청으로 갔다.병무청에서 설명해주는 이유는 간단명료했다. IT 공학 석사가 아닌 IT 경영학 석사를 취득 하였 기에 부적합판정이 났던 것이다. 그 때 한국이란 나라는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들고 있는 졸업장, 자격증을 보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로서는 카투사 발표를 기다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카투사를 발표하 는 날, 당연히 선발이 될 것이라고 생각 했지만 한국에서의 내 운은 정말로 안 좋은 듯했다. 카투 사도 떨어졌다. 쓰라린 가슴을 안고 육군으로 입대하기 위해 병무청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그러 자 모니터 왼편에 팝업 창이 뜨면서 2007년 2월 20일에 입대할 영주권 병사를 모집한다는 내용 이 적혀 있었다.
원하는 지역, 원하는 보직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나에게 부여되었던 것이다. 카투사 발표 다음 날 나는 바로 병무청으로 가서 영주권 병사모집에 지원하였다. 병무청에서 일하시는 분께서 의아
한 눈빛으로 쳐다보시면서 영주권 지원 병사는 처음이라면서 입대 이유가 있는지 물어보셨던 기 억이 있다. 나는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입대한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 왜 입대를 했는지 누군가가 물어본다면 노블레스 오블리주 (Nobless Oblige)를 몸 소 실천하기 위해서 입대했다고 말하고 싶다. 영국의 귀족처럼 권리를 누리기 위해 책임을 다한 다는 것은 스스로의 자존심과 나라를 한 번에 지킬 수 있는 방법이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울 타리 안에서 안전하고 평온하게 살기 위해서 내가 직접 나라를 지킨다는 것은 몸서리 칠 만큼 아 름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영주권을 가지고 자진입대 한 전우들, 질병을 치유한 후 입대한 전 우들, 이 밖에도 지금 대한민국을 지키는 모든 전우들은 모두 존경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육군 논산 훈련소에 입대하였을 때만 해도 모든 것이 낯설고 서툴렀는데, 어느덧 병장이 되어서 새로운 신병들을 지도하고 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2년간의 군 생활이지만 훈련소에서 부 모님과 헤어지면서 흘렸던 어머니의 눈물은 평생 마음 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영주권 병사라는 간판 대신 대한민국을 지키고 있는 수 만의 대군 중 한 명으로서 작지만 큰 자부심 을 가지고 남은 기간 하루하루 성실하게 군복무하겠습니다. 충성!
훈련소 에피소드
입소대대에서 훈련까지, 내 전우들은 45일간 함께 생활하다가 각자 갈길을 가는데 이들이랑 계속해서 연락이 가능했으면 좋겠다. 특별한 인연으로 알게된 그들이 더
‘내가 너라면 절대 군대 안 올걸?
후회되지 않아?’
철원의 겨울은 혹독하리만치 춥고 봄은 짧다. 한창 진지 공사를 하다가 짧은 봄볕을 느끼며 쉬고 있는데 한 고참이 슬그머니 나에게 물었다.
‘넌 영주권자이니까 굳이 군대 와서 사서 고생할 필요 없잖아?’
농담 반, 진담 반의 고참의 말에 나도 슬며시 웃으며 말을 돌린다. ‘사서 고생하려고 왔는데 후회 는 무슨 후회를 합니까?’그렇다. 나는 미국의 영주권을 가진‘부시의 아들’국외거주자다.
내가 처음 군대에 간다고 폭탄선언을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했다. 신검 받을 때에도 그랬고 신병교육대에 입소해서도 자대 배치를 받고 나서도 늘 그랬다. 한국 사람들 눈에 나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사실 내가 군대에 입대한 이유는 좀 특별한 이유에서였다. 어렸을 때부터 나의 장래 희망은 정치인이었다.
“부모형제 나를믿고단잠을이룬다”
6사단•상병|김 종 환
내가 처음 군대에 간다고 폭탄선언을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했다.
신검 받을 때에도 그랬고 신병교육대에 입소해서도 자대 배치를 받고 나서도 그랬다.
한국 사람들 눈에 나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우수상
누군가가 내게 꿈이 뭐냐고 물어볼 때 국회의원이라고 당당히 말하던 나를 보면서 다들 웃었지만 나는 정치라는 것이 해보고 싶었다. 약한 사람들이 힘없이 당할 때면 눈물이 나게 슬펐고 부정부 패와 부조리를 보면 슬픔과 분노로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래서 나는 정치를 하고 싶었다.
내 어머니의 나라 대한민국에서 정치가가 되고 싶었다. 내가 입대하게 된 이유는 적어도 욕먹는 국회의원이 아니라 떳떳하고 할 말 할 줄 아는 국회의원이 되고 싶어서였다. 그래서인지 나는 단 한 번도 내 선택이 후회되거나 실망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나는 이렇게 좀 이상할 지는 모르지만 자랑스러운 이유에서 군대에 입대했고 그래서 나는 힘들지만 적과 대치하고 있는 G.P에서의 군 생활을 지원했다.
처음 신병교육대에 입소했을 때나 자대에 와서 그동안 내가 겪어온 사회와는 너무 많은 것이 달라 서 사실 실수도 많이 했다. ‘압존법’이나‘다’나‘까’로 끝나는 말투들 고참과 후임의 관계라든가 모든 것이 나에겐 생소하고 어색하기만 했다. 그래서 그런지 이등병 때에는 실수도 많이 했고 다 른 동기들에 비해 지적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그럴수록‘이런 것도 해내지 못하면 내가 과연 무 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군대
에 오기 전에 자원입대를 하려거나, 혹은 자원입대했던, 영주권자들의 인터넷 카페 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그 중에는 한국어를 전혀 못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도 다들 잘 생활하는데 나는 한국말도 잘 하니 훨씬 유리한 조건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 자 점점 오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내가 더욱 더 열심히 하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모두들 나를 달 리 보기 시작했다. 매일 실수만 하고 이해하기 힘든 후임이 아니라 참 열심히 하는 녀석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그런 내가 이제 어느덧 상병이 되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지난 시간 동안 나는 이곳에서 한국이, 아니 군대가 아니면 결코 배울 수 없는 많은 것을 배웠다. 참을성, 양보하는 마음, 솔선수 범하는 자세, 왜 우리가 뜬 눈으로 밤을 새며 이 나라를 지키고 있는 지까지... 왜 미국에서 많 은 정치인들이 스스로 자진해서 군대에 입대했고 또 무엇을 배워 왔는 지 새삼 알 것 같았다. (저 유명한 J.F 케네디도 지금의 부시대통령도 모두 군대를 다녀왔다)
나만큼이나 어머니께서도 많이 바뀌셨다. 처음 100일 휴가를 나가서 어머니께 필승이라고 경례를
붙여 보이자 어머니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내가 군대에 간다고 처음 말을 꺼냈을 때 적지 않은 나 이에 군대에 갔다가 사고라도 당하면 어떻게 하냐고 한사코 말리셨다. 어머니께선 항상 자식 걱정 뿐이셨다. 하지만 지금은 더 늠름해지고 생각이 깊어졌다면서 군대보내길 잘했다고 칭찬 일색이시 다. 남자는 군대에 꼭 가야 한다며 군복을 입은 내 사진을 자랑스럽게 꺼내 놓으신다.
사실 미국은 한국을 굉장히 위험한 곳이라고 생각한다. 정작 우리는 항상 평화가 늘 우리 곁에 있 는 양 생각하고 행동하지만 미국은 평화라는 것이 얼마나 쉽게 깨어질 수 있는 것인지 알며 늘 대비 하고 준비한다. 이런 두 나라의 모습을 비교할 수 밖에 없는 내겐 북한의 위협이 마치 먼 나라 일 인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주한미군 철수나 민족공조 따위의 구호를 마치 우리네 생각인양 부르 짖는 사람을 보면 가끔은 이 나라의 미래가 걱정되기도 한다.
DMZ의 최첨단 G.P에서, 엎드리면 코 닿는 곳에 북한군을 두고 근무하고 있는 나에게 있어서도 민족분단의 현실과 북녘의 동포들이 굶주림과 가난으로 고통 받는 모습을 생각하면 폐부를 칼로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느낀다. 하지만 그 누가 이렇게 총부리를 마주한 현실이 마음 아프지 않겠 으며, 그 누가 살아남기 위해 자기 자식을 중국으로 내다파는 북한 동포들의 모습을 보며 동정하 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지금 세계에 단 하나뿐인 분단국가에서 살고 있으며, 우리 의 핵심적인 적은‘주체사상’이라는 세뇌전술 아래 우리를 적화통일 시키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집단이다.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우리를 지킬 힘도 든든한 우군도 있다. 제 나라 하나 못 지켜 국사를 위태 로이 한 부끄러운 역사는 세계 어디에나 있어왔다.
그런
치욕의 역사가 아니라 제대로 된 독립과 자유의 가치를 누릴 수 있는 떳떳한 역사를 우리의 후손에게 남길 수 있다는 것은 누가 생각해도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한국 사람들 중에는 스스로의 손으로 자기 나라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모르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부모 형제, 나를 믿고 단잠을 이룬다’라는 군가의 한 구절이 얼마나 가슴을 울리는 말인지를 잘 모르는 것 같다.
내 어머니의 나라, 우리조국 대한민국에 감사한다. 우리가 통일된 민족으로 아무 걱정 없이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면 더 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그래도 우리 스스로 우리를 지킬 수 있고 또 지금 내 가 조금 고생함으로 해서 나의 가족과, 친구들이 평화를 누릴 수 있게 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이렇게 생각해 보건데 자기 나라를 지키기 위해 불편을 감수하고 봉사하는 일은 이상한 일이 아 니라 자랑스러운 일이다. 후회할 일이 아니라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기쁜 마음으로 오늘도 경계 근무에 임할 수 있고 지금 당장 적과 싸운다고 해도 주저 함 없이 나아갈 수 있다. 물론 나 혼자만의 힘으로 역부족이라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DMZ의 끝없는 고독과 긴장 속에서도 불안에 떨거나 주저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해주는 우리 수색중대 전 우들과 비록 다른 곳에 있지만 하나의 목적을 위해 오늘도 희생하는 수많은 국방전우들이 있기에 나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뜨거운 전우애와 봉사정신, 그 밖에도 수많은 것들을 배우게 해 준 군대에서의 지난 시간들에 대해서 감사하며, 남은기간 성실 하게 복무할 것을 다짐한다.
2008년 5월 14일 이른 아침, 경계근무를 마치고...
훈련소 에피소드
이틀에 한번 꼴로 돌아오는 불침번 시간때... 부식으로 받아두었던 컵라면을 전우들과 몰래 먹었던 일은 잊지 못할 것이다. 기회가 된다면 해 보아라. 하지만 걸리면
“어머니, 아버지 저를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비록 아직 효도 한 번 못해 드렸지만, 제대 후 못 다한 효도 다하겠습니다.”무석이가 군대에 있을 때 보내온 편지 중 일부분입니다. 군대에 가기 전에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을 군입대 후 들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납니 다. 지금 무석이는 다시 호주로 돌아가서 남은 공부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우리가족은 6년 전 호주로 이민을 간 이후 그곳에서 영주권을 취득하였습니다. 그러다가 4년 전, 무석이 아버지가 병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한국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무석이와 형은 호주에서 학업을 계속하였구요. 무석이는 호주에 있을 때도 조국인 한국을 매우 사랑하였고 자랑스러워하 였습니다. 그래서 호주에서 학업을 마치면 국내로 들어가 국내기업에 취업해서 일을 계속 하고 싶어하였습니다. 그래서 군입대도 망설임 없이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또한 공군 장교 출신으로 무석이가 군에 가는 것을 적극 권장하였지만 어머니인 저는 마 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남편은 군생활이 제일 편하다고 저를 위로하였지만 걱정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역한 지금은 군대에 보내길 잘했다고 생각됩니다. 무석이가 군에 가서 변화된 모습을 보고 있자면 형도 군에 보냈으면 하는 마음이 듭니다.
어머니,아버지 저를낳아주셔서감사합니다
예비역 해병•박무석 어머니|김 명 희
무석이가 군에 가서 변화된 모습을 보고 있자면 형도 군에 보냈으면 하는 마음이 듭니다.
군복무로 인하여 무석이의 내성적이고 소극적이었던 성격이 적극적이고 자신감이 넘치는 성격으로 변했습니다.
해병대의 강한 훈련을 받고 나오니 자신감도 얻고 많은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군복무로 인하여 무석이의 내성적이고 소극적이었던 성격이 적극적이고 자신감이 넘치는 성격으로 변했습니다. 해병대의 강한 훈련을 받고 나오 니 자신감도 얻고 많은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행군과 유격 등 군대에 서의 훈련은 자신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으며 군대에 다녀왔음을 절대 후 회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군대에 가더라도 믿음생활을 많 이 하라’고 했는데 저의 바람대로 교회에 잘 나갔다고 합니다. 비록 군 영내 교회에서 주는 초코파이 때문에 열심히 교회도 가고, 예배도 드리고 하였다고 하지만...처 음 포항으로 면회를 갔을 때 일입니다. 무석이에게 맛있는 거 사먹으라고 돈을 주었는데, 무석이 가 그 돈으로 사가지고 온 것은 다름 아닌 초코파이 한 상자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 습니다. 코허리가 시큰하고 아들이 너무 예쁘고 대견해 보였습니다.
무석이가 근무하던 포항의 부대 앞에 식당이 하나 있습니다. 면회를 가면 같이 식사를 하였는데 무석이도 휴가를 나오게 되면 아침식사를 꼭 그 식당에서 하였답니다. 아버지와 같이 식사를 하 던 곳이라 밥을 먹을 때마다 꼭 그 식당에서 밥을 먹고 아버지를 한 번 더 생각하였다네요. 아들 을 군대에 보내고 나니 길거리에서 파란 옷을 입은 휴가 나온 군인만 봐도 아들 생각이 났습니다.
군대
이야기가 정말로 재미있나요? 남편과 무석이는 군대 이야기를 할 때면 큰 목소리로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껄껄 웃으며 이야기에 빠져듭니다. 이럴 때 형은 외톨이가 됩 니다. 군대를 안갔다 왔으니 대화에 끼어들 수가 없는 것이지요. 사실 군생활이 쉬웠겠습니까?전역 후 집에 와서 하는 말이 복무 중에는 부모님 걱정하실까봐 말을 안했는데 많이 힘들었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군생활이 힘들긴 했으나, 제대 후 생각하니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생각된답니 다. 군복무를 마친 지금은 공부하는게 제일 쉽다고 합니다. 정기휴가 기간 중 호주를 방문하였는 데 호주에 있는 친구들이 무석이를 많이 부러워하였습니다. 복무 중 호주로 휴가도 올 수 있도록 하고 항공여비도 지급해 준다는 사실에 많이 놀라워하고 부러워하였다고 합니다. 군대 갔다 온 후 철이 많이 들었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건강해지고, 자신감을 갖게 되고 담대해지고, 연 약함이 없어지고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이 많이 더해졌습니다.
대견한 내 아들 무석아! 힘들었던 군생활을 이겨낸 것처럼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잘 이겨내고 열심히 공부해 네 꿈을 맘껏 펼치렴!
영주권병사 병영체험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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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Ⅰ“부모 형제 나를 믿고 단잠을 이룬다”
Ⅱ꿈의 씨앗을 묻는 중대
꿈의 씨앗을 묻는 중대 강한친구 대한남자 국가를 위해 봉사할 수 있어 행복합니다 뉴질랜드 전경 세계속에 한국을 알리겠습니다 대한민국이 너무 좋습니다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려면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하라!
Ⅲ중대장이 한 턱 쏴라!
Ⅳ수에냐(Suena) 꿈을 꾸어라!
Ⅴ멋진 남자를 아들로 두었네!!
타임캡슐
을 만들기로 했다.10년 마다 달라진
나의 모습
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본인
의꿈
을 그린 몇 장의종이
를...누구에게나 하나쯤 좌우명이 있듯이 내게도 내 마음 속에 꼭꼭 묻어 두고 사는 소중한 글이 있다.
꿈이 있는 사람은 아름답다. 꿈이 있는 사람은 마음만큼은 부유하다. 그래서 꿈이 있는 사람은 행 복하다. 꿈이란 삶의 목표이기도 하고 삶의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더욱더 그러 하다.
나는 지금 제2군지사에서 세 번째 중대장 직을 하고 있다. 가만히 헤아려 보면 10년의 군 생활 중 견장을 차고 군 생활을 한 것만 70개월이니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모습을 10년 간 곁에서 보아 왔 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 싶다. 이곳에 전입 온 지는 이제 약 3개월 가량 지났다.
그리고 내게는 나 하나만을 바라보는 초롱거리는 100여 명의 눈빛들이 있다. 그리고 처음 중대원 을 접했을 때 그들 중에는 행복한 이보다 불행한 이가 더 많았다. 여기에서 말하는 행복과 불행이
꿈의씨앗을 묻는중대
제2군수지원사령부 소령(진) |백 재 순
타임캡슐을 만들기로 했다.
10년 마다 달라진 나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본인의 꿈을 그린 몇 장의 종이를 소대 단위로 유리병에 담아 중대에서 가장 높은 언덕(햇살마루)에 올라가 묻기로 했다.
그리고 몇 년 후 따뜻한 봄날 다시 만나 군생활 간 품었던 미래의 나의 모습을 젊은 날 군생활의 추억으로 돌아가, 같이 열어보자고 말이다.
란 그저 일반적인 사회의 잣대로 잰 행복과 불행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하지만 이제 우리 중대에는 누구 하나 불행한 이가 없다. 우리 중대에서는 가난한 집안의 병사도, 사랑받지 못하고 성장해 온 병사도 모두 행복하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우리 중대원들에게 그렇게 이야기해 왔다. 우리 중대원들은 표정이 참 밝다. 항상 우리 중대원들은 중대장에게 어린 아이와 같은 눈빛으로 해맑은 웃음으로 다가온다. 나 는 우리 중대야말로 대한민국 육군의 유토피아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중대장 직을 수행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 어느 때의 군생활보다 행복하다.
그
러면 이제 우리 중대 이야기 하나를 적어보고자 한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우리 중대에 한 명 있는 해외 영주권 병사와 관련한, 그 병사의 변화된 군 생활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중 대원 모두의 이야기일 지도 모른다. 내가 처음 중대에 부임하던 날, 나에게 중대를 안내해 준 병사 가 한 명 있었다. 늘 위병조장 임무를 수행하는 병사였기에 위병소에서 부임하는 중대장을 처음 접 했으리라. 그 병사가 해외 영주권자로서 병역의무를 위해 자진 입대한 병사였다. 그런데 내가 그 병 사를 개인적으로 다시 접했던 것은 바로 며칠 후 영창에 입창한다고 중대장실로 들어 왔을 때였다.사실 내가 중대에 전입오기 전, 중대에서는 각종 내무부조리와 경계근무 태만 등으로 중대원의 25%가 징계를 받고 입창 대기 중인 상태였다. 그러하다 보니 중대의 사기와 분위기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침체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중 한 명이 이○○ 이라는 해외 영주권 병사 였다. 3개월 전에도 이미 병장이라는 계급장을 달고 있었지만, 이제는 분대장 견장을 차고 마지 막 휴가를 이틀 앞두고 있다.
당시 그에게 나는 이런 질문을 했다. 너는 왜 군에 왔지? 라고. 그는 거짓 없이 이야기 했다. 부모 님께서 가라고 했고, 본인도 군대는 갔다 와야겠다는 생각에서 군에 왔다고. 그러면 너는 군에서 무엇을 얻어 갈거냐 라고 다시 물었다. 그러자 본인의 선택에 후회한다는 눈빛으로 아무 것도 얻 은 것이 없다고 말했다. 영창에 다녀온 후 그의 표정은 많이 밝아졌지만, 군에서 얻어 가는 것이 없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병장 세 번째 만남에서 나는 또 물었다. 너의 꿈이 무엇이냐 고. 안타깝게도 그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뿐만 아니라 중대원의 90%가 꿈을 잃은 채 젊은 날 의 소중한 2년을 본인들의 생각처럼 군에서 썩고 있었다. 나 역시 20대 초반에 그렇게 시간을 보 냈는지 모른다. 하지만 형훈이의 그 한마디는 내게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욱더 안타까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