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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몽인산문에있어서의의미와실현양상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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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몽인 산문에 있어서 自得 의 의미와 실현양상

* 金 愚 政

1)

국문초록

< >

복고적 문풍이 등장한 16세기 말~17세기 초는 한국 한문산문사에 있어서 전환기적 의 의를 지니고 있다 이른바. 古文辭로도 일컬어지는 복고적 문풍을 주도한 이로 흔히 거론 되는 작가가 尹根壽 崔岦 柳夢寅‧ ‧ 등인데 이들은 치밀하게 정제된 구식과, 艱險하고 深晦 한 문체 논쟁적이고 전복적인 내용을 담은 새로운 산문을 창출함으로써 글쓰기의 의미, 와 방법에 관한 진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런 이유로 이들을 하나의 유파로. 묶어서 계열화하는 경향도 있지만 실제 이들의 작품을 면밀히 검토해보면 매우 상이한, 방식으로 구현되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유몽인은 당시 문단의 경향과 주요한 산문 텍스트에 대한 비판적 진단을 통해 左傳 ‧ 와 의 글을 문장 학습의 전범으로 규정하였다 한. 國語 ‧ 戰國策 ‧ 史記 ‧ 漢書 韓愈 柳宗元‧

편 歐陽修와 蘇軾으로 대표되는 宋代의 문장에 대해서는 弛縵支離하고도 하고 李夢陽과 으로 대표되는 의 문장에 대해서는 와 을 일삼았다고 하여 매우 부정

王世貞 明代 模擬 剽竊

적으로 평가하였다 유몽인이 이와 같은 산문론의 근거이자 대안으로 삼았던 것이 바로. 인 바, 으로부터 에 이르기까지 의 문장을 폭넓게 학습하여 자기화함으

自得 秦漢 唐宋 諸家

로써 어떠한 텍스트에도 견인되지 않고 천변만화의 변환미를 지닌 글을 써야 한다는 것 이다 조선중기 복고적 산문의 등장 원인을 서술할 때 곧잘 거론되는 것이. 前後七子의 수용 문제인데 유몽인의 경우 전혀 다른 방향에서 복고를 주장하였던 셈이다, .

유몽인은 또한 自得의 창작 원리를 실제 작품을 통해서도 철저하게 구현하였다 눈에 띄. 는 수사적 조탁 없는 평이하고 담백한 어조 속에 애잔한 상실감을 토로한 「盆菊記」, 散 과 이 적절히 안배되어 신축적이면서도 자연스러운 속에 현실과 이상의 경계

行 齊行 行文

위에 놓인 내면의 갈등을 묘사한 「喚仙亭記」, 公羊傳 과 「醉翁亭記」를 절묘하게 차용한

와의 논리적 대비가 돋보이는 의 함의를 운

, ,

寒碧堂記 赤壁賦 無盡亭記 滕王閣序

「 」 「 」 「 」 「 」

문화된 句式 속에 재현한 「二難軒記」 등의 글은 유몽인이 강조한 自得의 창작원리가 어 떠한 방식으로 실현되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단국대학교 한문교육과 강사

* / rtoran@dankook.ac.kr 1

- -

(2)

목 차

< >

머리말

1. 3. 自得의 실현양상

의 산문론

2. 自得 4. 맺음말

머리말 1.

문학의 의미와 가치를 성리학의 체용론적 구조 속에서 파악하려는 태도가 보편화된 宣祖 연간 이후 富贍하고 豪放한 사장파의 문풍은 明白하고 平易한 사림파의 문풍에 그 주류 적 지위를 양보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를 가리켜. 穆陵盛世라는 낭만적인 수식으로 언명 하듯이 도본문말론의 자장 속에서는 이해되기 어려운 다양한 문학적 조류들이 명멸한 때 이기도 했다. 尹根壽(1537~1616)‧崔岦(1539~1612)‧柳夢寅(1559~1623) 등에 의해 촉발 된 복고적 산문의 등장 역시 이러한 다양성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이른바. 古文辭로도 일컬어지는 복고적 산문은 치밀하게 정제된 句式과 艱險하고 深晦한 문체 논쟁적이고, 전복적인 내용을 실현함으로써 글쓰기의 의미와 방법에 관한 진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 하였다 이런 이유로 이들을 하나의 유파 또는 계열로써 범주화하는 경향도 있지만 실. , 제 이들의 작품을 면밀히 검토해보면 매우 개성적인 방식으로 구현되었음을 확인하게 된 다.1) 요컨대 윤근수의 경우 새로운 문학 사조, -前後七子-를 소개하는 과정에서의 역할 은 인정할만하지만 창작상의 실천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으며 최립은 이론보다는 창, 작의 영역에서 인상적인 성취를 이루었지만 그 연원은 전후칠자가 아니라 당송고문에 있 었다 반면에 유몽인은 이론적 측면에서 볼 때 매우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견해를 제시하. 였을 뿐만 아니라 창작에 있어서도 적극적으로 적용하여 실천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 다 유몽인은 당시 문단의 경향과 주요한 산문 텍스트에 대한 비판적 진단을 통해. 左傳 와 등 일곱 가지 텍스트를 문장 학습의 전범 國語 戰國策 史記 漢書 韓愈 柳宗元

‧ ‧ ‧ ‧ ‧

으로 규정하는 한편 歐陽修와 蘇軾으로 대표되는 송대의 문장이나 李夢陽과 王世貞으로 대표되는 명대의 문장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평가한 독특한 산문론을 개진하였다 조선. 중기 복고적 산문의 등장 원인을 서술할 때 곧잘 거론되는 것이 前後七子의 수용 문제인 데 유몽인의 경우 전혀 다른 방향에서 복고를 주장하였던 셈이다, .

유몽인의 산문론은 그간 적지 않은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는데 대부분 복고를 주장했다, 는 표면적 사실을 반복적으로 거론하였을 뿐 그 문예적 의의와 창작상의 반영양상에 대 해서는 크게 주목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수사 및 표현상의 특징을 언. 급한 몇 편의 논고2)는 주목할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는데 산문론과의 비판적, 대비를 통한 문예미의 검토로 이어지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본고는 이와 같은 문제의. 식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유몽인의 복고적 산문론의 근거가 되는, 自得의 의미를 살펴본

1) 이에 관해서는金愚政, 「月汀 尹根壽 散文의性格」(漢文學論集 19 ,집 槿域漢文學會, 2001)과「簡易 崔岦 散 단국대 박사학위논문 참고

( , 2004) .

文 硏究」

2) 역설적 어법과 우언과 풍유의 활용을 표현수법상의 특징으로 거론한 申翼澈의 글(「柳夢寅의 文學觀과表現手 의 , 성균관대 박사학위논문, 1995)과 고문가로서의 위상에 주목하여 풍부한 구상력과 통념의 틀을 벗 法 特徵」

어난 논리성 수사의 활용을 통한 형식미의 구현 등을 제시한, 宋知泳의 글(「於于 柳夢寅 散文 硏究」, 고려대 석사학위논문, 2004)등이 있다.

2

- -

(3)

후 이 자득의 원리가 작품에는 어떤 양상으로 반영되었는지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

의 산문론 2. 自得

유몽인의 산문론은 전통적인 산문 텍스트에 관한 논의와 문장 학습의 방법 그리고 수사, 및 문체상의 논의 등 세 방면으로 대별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논의는 대부분 복합적으. 로 제시되고 있지만 그 중심축에는 전통적인 산문 텍스트에 관한 논의가 자리잡고 있, 다.

서계가 결승을 대신한 이후 三墳 五典 九丘 八索‧ ‧ ‧ 은 워낙 오래 전의 것이라서 이미 살펴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부자께서 산삭한 경서야말로 가장 오래된 글이라 하겠는데 후학들이 흉내낼 수. , 없겠거니와 자고로 문장의 근원은 오로지 여기에서 나왔다고 하겠습니다 좌구명이 저술한 좌전. 과 국어 는 그 글이 簡雅하여 또한 후학이 쉽게 미칠 수 없지만 한 가지 체격을 전문적으로 닦은 것이니 문장을 배우는 이들이 대부분祖宗으로 삼습니다.3)

유몽인은 육경이야말로 근원적 전범이지만 동시에 어떤 방법으로도 모방 불가능한 것이 기 때문에 한 가지 체격을 전문적으로 닦은‘ ’ 좌전 이나 국어 의 문장을 차선적 전범 으로 선택하게 된다고 보았다 이처럼 사상적 문제를 접어두고 오직 창작의 실제적 적용. 가능성만을 고려한 유몽인의 태도야말로 문장 학습의 대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취급 되던 전국책 4)이나 장자 까지도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車雲輅 에게 준 글에서 훈고에 급급하지 않고 육경으로부터 와 을 얻었다고

(1559~?) , 文氣 邃見

칭찬하면서도 좌전 ‧ 국어 ‧ 사기 ‧ 한서 와 한유 유종원의 문장에 의거해‧ 文律을 刻峻하 게 하고 時宜를 반영한 글을 짓는다면 불후한 업적을 이룰 수 있을 것5)이라고 권계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맹자 와 상서 는 이치를 따른 것이므로 비록 사마천의 사기 보다 높기는 하지만 그 공은 이 루기 쉽습니다. 한서 는 질박하고 신실하므로 비록 사마천의 사기 보다 낮지만 배우는 이들이 잘못되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국어 는 넉넉하고 기이하므로 말이 번다하지만 그 지리함을 느끼 지 못합니다. 좌전 은 간결하면서도 상세하므로 말이 간략하지만 섬세하고 미묘한 것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장자 는 그 말을 새롭게 하는데 뛰어나면서도 그 단서를 잘 바꾸었으므로 말이 중첩 하여 드러나 나오면 나올수록 새롭습니다 한유의 글은. 古意를 훔쳤으되 지리한 말을 깎아내고 정 수를 뽑아내어 그 절주를 촉급하게 하였으므로 제대로 배우지 못하면 宋文의 無味함에 흐르게 됩

3) 柳夢寅, 「與尹進士彬書」, 於于集 前集 권5; 韓國文集叢刊 63, p.414.(이하 於于集을 인용할 경우 한국 문집총간 의 면수만 표기함) “自夫書契代結繩之後 三墳五典九丘八索尙矣 已不可尋 降至夫子刪書 其文最古, , , , ,

, , . , , ,

似非後學可倣象 而自古文章之源 專出於此 至左邱明著春秋傳曁國語 其文簡雅 亦非後學可易及 而爲其專於一

, .”

體 學之者多祖焉

4) 최립은 漢史列傳抄 를 편찬한 뒤 그 범례에서, 周秦 이상의 傳으로서 權謀辨說이 많은 전국책 에서 연유한 글은 배제한다고 밝힌 바 있다. 崔岦, 漢史列傳抄 , 「漢史列傳抄甲乙丙集目錄」 “甲主漢書傳內節約太史文 而尤,

. , , , , .”

選利於初學熟讀得力者……其周秦以上傳者 多出戰國策 大抵權謀辯說之文 學者宜恥讀焉 是以裁取於漢爾 5) 「報滄洲道士車萬里 雲輅 書( ) 」, 前集 권5, p.418. “今尊文氣如許 邃見如許 皆從六經中出來 豈比應擧者汲汲訓誥, , ,

, , , , , , , ,

中哉 若依易書左國馬班韓柳 刻峻其文律 觸事著文 日添其編牘 則流傳不朽 天下無敵 不出於半歲之功 而‧ ‧ ‧ ‧ ‧ ‧ ‧

, .”

其爲後學楷範何如耶 深有望於左右也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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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니다 유종원의 문장은. 命意가 분명하고 立語가 정밀하므로 말은 비록 간삽하지만 지취는 잘 펼쳐 졌으니, (이 가지는 문장의 첩경으로 배우는 자들은 살피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비록 그러하8 ) , . 나 의리에 돌아가지 않으면 말이 촌스럽고 본받은 바가 없어지니 반드시 육경에서 그 살점을 맛, 보고 선유의子書에서 힘줄을 튼 뒤에야 所見이 투명하고 立言이 바르게 될 것입니다.6)

유몽인은 앞서 차운로에게 준 글에서 제시한 6종의 텍스트에 맹자 ‧ 상서 를 추가하여 모두 8종의 문장을 문장 학습의 첩경으로 언명하면서 육경과 선유의 글을 통해 의리를, 갖추어야 소견이 투명하고 입언이 바르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유몽인의 관점에서 보자. 면 육경을 제외한 어떤 텍스트도 그 자체로 완전하지 않으므로 필연적으로 각각의 장처 를 흡수하여 자기화하는 과정이 요구되는 것이다. 사기 의 천변만화를 닮았다는 한유의 문장도 이러한 경지에 오른 대목은 고작 一語一段에 그칠 뿐, 맹자 ‧ 장자 를 ‘模樣’하 고 百家를 ‘雜飾’했고 구양수 역시 구우일모에 지나지 않으며 왕세정은, , 麤厲險僻하며 구두만을 좇았을 뿐이다.7) 심지어 유몽인은 사기 의 연원은 노자 ‧ 장자 ‧ 좌전 에 있 는데도 명산대천에서 얻었다고 속이고 한유의 문장은, 장자 에서 비롯하였는데도 유가 에 거짓 기탁하여 맹자 를 배웠다고 한다고 하며 결국 一家를 專門하거나 群書를 抄略 하게 마련이라고 하였다.8)

한편 「大家文會跋」에서는 상서 와 장자 대신 전국책 를 추가하여 七大家로 규정하고 그 문장을 선록한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에 따르면. 전국책 은 抑揚 闔‧ 捭가 기굴하고 황하가 쏟아져 내리는 듯한 웅변을 갖춰 文氣를 돕기에 충분하며 유종원의 글은, 精勁하 면서고 예스럽다고 하면서, ‘지나칠지언정 부족해서는 안 된다 는 문장관을 피력하였다’ .9) 이처럼 유몽인은 육경 이외의 어떤 문장도 완벽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비록 부분 적인 혐의가 있다 하지라도 그것이 절대적인 배척의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고 판단한 것 이다.

유몽인은 송 명대의 문장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을 가하였다 한유의 문장과‧ . 한서 를 배울 무렵을 회상하며 평생 고문만을 읽을 뿐 송 이하의 글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10) 고 하거나 심지어, “송문 피하기를 불화살을 피하듯이 하였다”11)고까지 극렬하게 배척하 였다 이는 물론 다소 과장된 표현임이 분명하지만 구양수나 소식에 대한 비판을 보더라. 도 그 전체적인 논조는 바뀌지 않는다.

6) 「與尹進士 彬 書( ) 」, 前集 권5, p.417. “孟子尙書 順理也 故雖高於馬史 而其功易成 漢書 朴實也 故下於馬史, , , . , , ,

. , . , . ,

而學者不病 國語贍而奇也 故語繁而不覺其支離 左氏簡而詳也 故語約而不遺纖微 莊子善新其語而善更其端也

, . , , , , . ,

故談鋒層現 愈出而愈新 韓文竊古意 削支辭 拔其粹 促其節也 故不善於學之則流於宋文之無味 柳文命意明

, , , . . , , ,

立語精也 故語雖澁 而趣則暢 文章之捷徑也 此學者不可以不察也 雖然 不歸諸義理 則語野而不法 必於六經

, , .”

焉 其胾 先儒子書焉決其肯綮 然後所見透而立言正嚌

7) 「與尹進士彬書」, 前集 권5, p.414. “獨退之頗有脫胎處 亦一語一段而止 善倫孟莊爲模樣 而雜以百氏錄飾之 歐, , , .

, , , , . , , ,

陽爲文 亦多出於此 非專於韓而能之者也 然特牛體一毛 曷足多稱也哉 至大明王世貞 喜用其文字 而麤厲險僻

, , .”

只逐逐句讀間耳 屈指歷代文章碩儒 其得馬史體格者有幾人哉

8) 「文章指南跋」, 前集권6, p.446. “子長得之老莊左史 而誣稱得之名山大川 退之得之莊子 而僞托儒家曰學孟子而, , ,

. , , , .”

爲之 盖因天下書無窮 非聰明所遍及 必須或專門一家 或略抄諸書而得功居多焉

9) 「大家文會跋」, 前集 권6, p.445. “或曰 子之所編則善矣 戰國策 語多權謀 柳子文好刻削 類申韓者流 何取於: . , ; , ,

? : . , , , , . ,

斯 曰 何傷 昔孔子刪詩 不刪鄭衛風 況戰國策抑揚闔 崛奇 其懸河雄辯 足以助文氣 柳文最精勁且古 後世捭

, . , .”

無沿襲 余用是竝錄焉 凡文章寧亢不欲卑 寧過不欲不及

10) 「答崔評事 有海 書( ) 」, 後集 권4, p.554. “僕幼時學韓文漢書于申濩氏 每勸誦東人賦策百許首 當時僕志氣衝斗牛, . ,

, , , , .”

竊伏而笑之 平生只讀古文 不肯掛眼乎宋以下之文 矧東賦乎 東策乎

11) 「報滄洲道士車萬里 雲輅 書( ) 」, 前集권5, p.418. “若生者 避宋文 如避火避箭, , .”

4

- 5 -

- -

(5)

세상에서는 구양수의 문장이 동파의 문장보다 뛰어나다고 하지만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 한다 동파의 문장은. 古文이 아니니 애초부터, 文字에 마음을 두었던 사람이 아닙니다 스스로 의. 론을 세워서 고인이 미처 보지 못한 바를 보고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시원스럽게 풀어냈는데 등, 한하게 한 말조차도 모두 사람들이 미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치 구름과 이내가 산에서 나와 바람. 부는 대로 휘말렸다 펼쳐지는 것과 같아 손으로 잡을 수도 없고 잡는다한들 허공이 되고 말지요.

그만한 재주가 없는데도 그 문장을 배우고자 한다면 문체가 卑弱해지고 말 따름입니다. 王弇州는 만년에 그의 문장을 좋아하여 가신이 배웠던 것을 모두 버리고 그를 배웠습니다 이로부터 문체가. 날로 낮아져서 자못 예전의 작품만도 못하게 되었으니 이는, 陳相이 墨子를 배운 것이 불과한 것 으로 슬퍼할 만 합니다 나는 어렸을 때 소동파의 글을 낮잡아보아 일찍이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 는데 그것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朱子의 글의 논변과 의리가 평탄하고 명백함이 동파의 글과 비 슷하며 지리함 또한 비슷함을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주자가 소동파의 학문을 힘껏 배척하였는데. 어째서 그의 글을 본받았을까 의심하기도 했었습니다 아마도 비슷한 시대에 태어나. 氣味가 서로 유사해서 그런 것이겠지요. 大明의 문사들은 宋文의 弛縵함에 대해서 징계함이 있었으니, 空同이 좌전 과 국어 에서 선창하고 弇州가 兩漢에서 뒤를 이었습니다. 宋元의 퇴미한 물결을 일거에 씻 어내려고 한 것이었지만 오직 문장에만 뛰어날 뿐 이치에는 짧았으니 과연, 足下가 말한 바와 같 습니다 나는. 宋文을 낮잡아보되 구양수의 문장을 업신여김이 더욱 심하여 마침내 사람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에서 소리 높여 구양수의 문장은 나의 문장만 못하다 고 하였는데 이 말을 들은 사“ ” , 람들이 크게 놀랐습니다 그러나. 雙泉 成汝學만은 옛날에 나의 벗인“ 崔仁範이 늘 말하기를 구양‘ 수의 문장이 나의 문장만 못하다 고 하였는데 그대도 이와 같구나 라고 하였습니다’ , .” . 崔子는 문장 과 시가 모두 예스러웠는데 불행하게도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 최자도 오히려 가볍게 여겼거, . 늘 하물며 최자가 아닌 사람임에게 있어서이겠습니까.12)

유몽인은 구양수의 문장이 한유의 문장보다 뛰어나다고 한 최립의 말을 듣고 본집을 구 해 읽어봤으나 弛縵하여 깊은 맛이 없었으며 읽을 때마다 졸음이 났다13)고 술회한 바 있다 위 글은 다음에 이어지는 부분인데 소식의 문장이 구양수보다 낫다고 평가하면서. , 도 고문이 아니라고 본 견해가 흥미롭다 소식은 문자에 뜻을 두지 않은 사람 으로 입. ‘ ’ ‘ 에서 나오는 대로 시원스럽게 풀어낸 것일 뿐이라는 유몽인의 주장은 소식이 일상언어’ 와 구별되는 문학언어의 문학성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말과 상통한다 때문에 소식의 문. 장은 한유나 유종원의 문장에서 보이는 텍스트 의존성으로부터는 비교적 자유로웠지만 결과적으로 平易 明白 支離‧ ‧ 한 문체로 귀결되었다고 평가한 것이다 한편 이몽양과 왕세정. 은 이와 같은 송문의 弛縵함을 극복하고자 진한의 고문을 전범으로 삼을 것을 주창했지 만 문장만 뛰어날 뿐 이치는 짧은 한계를 노출했다고 판단했다 한유가 맹자와 장자를‘ ’ . 배웠지만 그에 미치지 못하였고 구양수가 한유를 배웠지만 그에 미치지 못하였다며 맹, ,

12) 「答崔評事 有海 書( ) 」, 後集 권4, p.554. “世稱歐陽文高於東坡文 余以爲大不然 坡文非古文也 初非有心於文字, . ,

. , , , , . , , ,

者 自立論議 見古人所未見 隨口快辨之 等閒之說 皆人所不及 如雲烟出山 隨風卷舒 不可以手攬之 攬之則

. , . , . , ,

爲空虛 未有其才而欲學其文 文體卑弱而止 王弇州晩好其文 盡棄其學而學焉 自是文體趨下 殊不及舊作 是不

, . , , , , , , ,

過陳相之學墨 可哀也 僕少時卑蘇文 不曾一覰 及得觀之 始知朱子之文 論辨義理 平坦明白 與坡文相似 支

. , , . ,

離亦似之 始疑朱子力排蘇學 何嘗效其文哉 蓋生近代氣味相類故也 大明文士有徵於宋文之弛縵 空同先倡於左

, . , , . ,

國 弇州繼武於兩漢 意欲一振宋元之頹瀾 惟其長於文短於理 果如足下之所云也 僕卑宋文而傲歐文甚 遂揚言于

: , . : , , .

廣衆之中曰 歐文不如吾文 聞者大駭 獨雙泉成汝學曰 昔吾友崔仁範常曰 歐文不如吾文 子又如之 崔子文與詩

, . , .”

俱古 不幸早世 彼崔子猶輕之 况非崔子者乎

13) 상게문. “當世言文章者 多稱崔東皐立之 東皐偏好歐陽文 謂勝於韓文 余樂之 力求諸中朝 得本集熟觀之 其, . , , , , ,

. , , , .”

文弛縵無深味 一讀之 便令人厭 每見其書 輒伸欠而思睡矣 6

- -

(6)

자 장자가 배운 바를 배운다면 맹자 장자의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 ‧ 14)고 한 유몽인의 주장 은 얼핏 전후칠자의 복고론과 닮아있다 그러나 유몽인은 복고파의 실착 역시 인식하고. 있었다 유몽인은 이몽양과 왕세정이 복고의 기치를 내세우게 된 원인이 송문의. 弛縵支 함에 있었다는 점은 긍정하면서도 결국 제자서를 모방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말았다고 離

평가하였다.

내가 보건대明의 문장가들은 宋儒가 한유의 문장을 전적으로 숭상하였으면서도 그 奇簡한 점을 얻지 못하고 단지弛縵支離한 말단만을 배우고 이를 바탕으로, 箋註文字를 도와 사람들이 알기 쉽 게 한 것을 경계하였다 그러므로 좌전 과 사기 를 위주로 하기도 하고 여력이 있으면. 先秦諸子 를 배우기도 했지만 구구절절 구두를 하였으니 왕세정이 으뜸이고 이몽양이 다음이다 이몽, .

書 剽掠

양의 문장은 왕세정보다 더욱 예스러우니 또한 진한고문을 선창할만하였지만 단지, 語辭가 追蠡하 여 小家에 가깝다 그러므로 마땅히 왕세정의. 浩大함만 못하다. 汪道昆에 이르러서는 단지 句語를 뒤쫓거나 선진양한에서 약간의 문자를 훔쳐와 중첩하여 써냈다.15)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유몽인은 弛縵支離와 대척적인 지점에 놓인 奇簡의 문체를 특징으로 하는 고문의 체식을 획득하기 위한 전범적 산문 텍스트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 었다 그렇다면 그가 인정한 산문 텍스트의 범위는 과연 어디까지인가. ? 앞서 살펴본 「報

나 등에 따른다면 상서 좌전

( ) ( )

滄洲道士車萬里 雲輅 書」 「與尹進士 彬 書」‧「大家文會跋」 ‧ ‧ 국어 ‧ 전국책 ‧ 사기 ‧ 한서 와 한유 유종원의 문장 등 모두‧ 9종의 텍스트 정도가 여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겠는데 반드시 여기에 국한되는 것만은 아니다 이 점은, . 「與尹進士 의 말미에서 의 학업을 그만두고 십 년을 기약하고 앞서 진술한 책들을 각 ( )彬 書」 “擧子

각 수백 번씩 먼저 읽은 뒤에 아래로 구양수와 소식, 明朝의 대가들에까지 미친다면 작 자의 영역에 올라 고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것”16)이라고 충고한 대목에서 확 인할 수 있다 요컨대 유몽인은 진한과 당대의 문장을 우선적인 문장 학습 텍스트로 규. 정하였지만 송 명의 문장 역시 그 목록에서 완전히 제외시키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이런‧ . 점에서 송 이하의 글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고 하거나 송문 피하기를 불화살을 피하듯이, 하였다고 한 유몽인의 술회는 문장 학습의 대상과 내용을 분명하게 제시하기 위한 수사 이기도 했던 셈이다.

이처럼 전범적 산문 텍스트의 존재를 긍정하는 태도는 필연적으로 모방이나 표절로 흐를 위험성을 안고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유몽인은 이런 텍스트에 대한 광범위한 독서와 지. 속적인 연찬17)을 강조하면서도 그 최종적 목표를 自得에 둠으로써 진정한 고문의 경계 에 도달하고자 했다.

14) 「答成察訪 以敏 書( ) 」, 前集 권5, p.410. “韓學孟莊 不逮孟莊 歐學韓不逮韓 今之學歐取壯元者如吾友金壽賢‧ , ‧ , . ,

, , , , , , , , ,

雖不及歐 溯其源 實出孟莊 金之去孟莊 不亦遠乎 中國之小我東 職此然也 生之志 直欲學孟莊所學者而已‧ ‧ ‧

, , .”

學孟莊所學而不逮 則猶爲孟莊 其不愈於學韓歐不逮而爲東文如壽賢者乎‧ ‧ ‧

15) 「題汪 道昆 遊城陽山記後( ) 」, 後集 권4, p.556. “余觀大明文章之士 有懲宋儒 專尙韓文 而不能得其奇簡處 徒, , , ,

, , . , , , ,

學弛縵支離之末 資之以助箋註文字 使人易曉也 故或主左氏史記 餘力先秦諸氏 寸寸尺尺 剽掠句讀 王弇州爲

, . , , , , , .

上 李空同次之 空同之文 益古於弇州 又能先倡秦漢古文 而但語辭追蠡 近於小家 故當讓弇州之浩大 至於汪

, , , .”

氏 徒逐逐句語 竊若干文字於先秦兩漢 重用疊出

16) 「與尹進士 彬 書( ) 」, 前集 권5, p.417. “苟能廢擧子業 期十年先讀前所陳之書各數百遍 而後下逮歐蘇明朝大家, , ,

, .”

可以登作者之壇 與古人齊肩矣

17) 상게문. “大抵文章之就 徒博則無效 徒約則不周 必須遍讀群書 專功一帙 功積而後有就, , . , , .”

7

- -

(7)

가 여러 경전을 주해한 것은 단지 은미한 뜻을 발휘하여 후학을 인도하고자 해서였지 후학 宋儒

이 그것 읽기를 本經 읽듯 하게 하고자 했던 것은 아닙니다 옛날. 董仲舒 楊雄 王文仲 周濂溪 程‧ ‧ ‧ ‧ 의 여러 들이 어찌 훈고에 종사한 적이 있었습니까 다만 사서와 육경에 근거하여.

子 朱子‧ 傳 自悟

하였을 뿐입니다 오늘날의 학자들은 이것을 사양하고 저것을 우선하니. , 이 날로 낮아지게

自得 斯文

된 것입니다 동방의 문장은. 牧隱이 최고입니다만 목은은 중국에서 급제한 선비입니다 그 크고 작. 은 여러 작품들은 모두 의리에 귀결되니 그, 辭語가 비록 실제로 근거한 바가 많기는 하지만 모두 의 법식에서 나온 것인지라 저는 저으기 그것을 비웃습니다 대개 문장은, . 을 하지 않

科程 前作 沿襲

는 것을 귀하게 여기니 자신의 흉중에 쌓인 바가 도의 근원에서, 自得한 것이라면 구구한 沿襲은 쓸모 없을 것이니 말의 많고 적음을 또한 어찌 논하겠습니까, .18)

이른바 주소어록체의 폐단을 지적한 글이다 경전을 주해한 제현의 저서는 훈고를 일삼. 아 완성된 것이 아니라 사서와 육경을 근거로 ‘自悟自得’한 것일 뿐이라고 하며 본말이 전도된 학풍을 꼬집고 있다 여기에서 말한. ‘自悟自得’은 엄밀히 말해 문학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표현이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문학의 뿌리를 육경에 둔 이상 필연적으로 사상. 또는 철학과 분리될 수 없음을 감안한다면 문학적인 전용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때문. 에 유몽인은 이 두 가지를 명확히 구별하지 않고 의리에 귀결한 李穡의 문장도 科程의 법식을 탈피하지 못하였다고 지적하며 문장에 있어서 자득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던 것이 다.

나는 구석진 나라에서 태어나 高士와 碩友를 만나지 못하고 좀 먹고 먼지 앉은 簡編 속에서 自 하였다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구양수나 소식 등의 문장으로 눈을 흐리지 않았었는데 근세에. , 得

의 대가들이 절의 지키기를 매우 높이 하는 것을 볼 때마다 자못 스스로를 견주어 봄에 부족 明朝

하여 어렸을 때 한유 유종원 두 책을 잘못 읽었음이 못내 한스러웠다 지금부터라도 후학과 아이‧ . 들에게先秦으로부터 唐虞로 거슬러 올라가고 漢으로 내려와서는 司馬遷과 司馬相如에게서 그치는 것으로 그 성취가 어떠한지를 시험하고자 한다. 杜子가 말하기를, ‘五岳 밖에도 존귀한 다른 산이 있음을 알았다 고 하였으니 중국의 밖에도 좌전 이나 사기 못지 않게 고고한 문장이 있을 줄’ , 어찌 알랴.19)

선진의 전적을 직접적인 목표로 삼았던 명의 문장가들을 접하며 송문을 읽지 말아야 한 다는 사실만 알았을 뿐 한유나 유종원의 문장 또한 절대적인 준거가 아니었음을 모르고, 학습했던 자신의 경로를 반성적으로 돌아본 글이다 궁벽한 곳에서 태어나 훌륭한 스승. 이나 뛰어난 벗 없이 문장의 묘리를 자득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토로20)했던 유몽인 은 이처럼 때로는 그 자신이 문장 학습의 텍스트로 인정한 한유나 유종원의 문장마저도

18) 「報滄洲道士車萬里 雲輅 書( ) 」, 前集 권5, p.418. “宋儒之註解諸經 只欲發揮微旨 以牖後學耳 非欲後學讀之如, , ,

. , ? , .

本經也 昔董仲舒楊雄王文仲周濂溪程朱諸傳 何嘗從事於訓詁 只據四書六經 自悟自得而已 今之學者謝此先‧ ‧ ‧ ‧ ‧

, . , . , . , , ,

彼 斯文所以日卑也 東方之文 牧隱爲最 牧隱 中朝科擧之士也 其大小諸作 皆歸之義理 其辭雖甚實多所根據

, . , , , , , ,

而皆出於科程之式 生竊笑之 凡文章貴不沿襲前作 吾胸中所儲 自得於道原 則區區沿襲 不足多也 話言之多少

!”

又何論哉

19) 「題汪道昆副墨」, 前集 권6, p.443. “余則生此偏邦 不遇高士碩友 自得於蠹簡塵編中 自幼抵老 義不以歐蘇等, , . ,

. , , , , .

文溷眼 自幼抵老 義不以歐蘇等文溷眼 每見近世明朝大家守節甚抗 頗自視缺然 深恨少年時誤讀韓柳兩書也 繼

, , . : ‘ , ’,

自今欲勸後學兒曺先秦而溯唐虞 下漢而止於兩馬 以試其成就如何 杜子曰 乃知五岳外 別有他山尊 安知中國

, , ?”

之外 有高古之文章 不下於左馬者乎

20) 「與尹進士 彬 書( ) 」,前集 권5, p.417. “窮鄕僻村 無碩師良友 而自得其竗者 未之嘗聞 雖自曰得其妙 而識者竊, , , . , .”

嗤之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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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할 만큼 자득을 중시하였다. “문장만큼은 고인에 뒤지지 않는다”21)고 자부할만큼 적 극적인 산문 인식을 지녔던 유몽인에게 있어서 이 자득의 경계는 그의 복고적 산문론이 모방이나 표절로 흐르지 않고 장르적 관습을 넘나들며 신축적이며 유연한 작품세계를 실 현할 수 있도록 해준 창작의 핵심 원리이자 원칙이었던 것이다.

의 실현양상 3. 自得

유몽인은 광해군의 복위 음모에 가담했다는 무함으로 사형당한 뒤 200여년이 지난 년에야 신원되었으며 그의 문집도 년에야 간행될 수 있었다 조선후기 제가의

1794 , 1832 .

비평목록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은 데에는 이런 점도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는데 아래에 인용한, 「盆菊記」는 유몽인의 문장으로서는 드물게 시문선집에 선록 된 몇 안 되는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22)

. , , , , . ,

余性不喜俗 俗多好花草 又以菊爲淵明所好 戶種之益繁 輿儓之家 無不燦耀成林 余甚笑之 蓋惡

, . , , , , , .

人之好之 順人而應俗也 去年 余出外家 僮種菊於墻罅 余不拔之 何以不于地而于墻 不循俗也 洎

, . , , . ,

余如中原 士有遺余蘭者 余謂蘭我國無之 自北京輿來王京 道上傷凍春不芽 其畵盆欲盛水乎 底有穴

, , , , . , , ,

欲蒸飯乎 曾經糞土等棄之 屬家童求之 隣之醫人 蒔白菊 古書菊稱黃華 則白菊非菊 余尤惡其僞

. , , . , , .

而猶任家童爲也 吁 居俗而不俗老尤難 余從此稍學俗矣 將種竹矣 又將種梅矣 悲乎吾衰也23) 나는 본디 시속을 좋아하지 않는다 시속에서는 대부분 화초를 좋아하는데 또 국화는 도연명이. , 좋아했던 것이라 하여 집집마다 심어서 더욱 번성하며 천한 사람의 집에도 찬란하게 숲을 이루지, 않음이 없었다 나는 이를 매우 비웃었으니 사람들이 그것을 좋아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을 따라. , 시속에 호응하는 것임을 싫어해서였다 지난해 내가 외가에 나갔었다 어린 종이 담벼락 틈에 국화. . 를 심었지만 내가 뽑아버리지 않았으니 땅에 심은 것이 아니라 담벼락에 심어서 시속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뒤 내가 중원에 갔을 적에 어떤 선비가 내게 난을 주었는데 우리나라에는. , 없는 난이라고 여겼다 북경으로부터 서울로 싣고 왔지만 길에서 추위에 얼어버려 봄에도 싹을 틔. 우지 않았다 그 화분에 물을 담겠는가 밑에 구멍이 있으니 밥을 찔 것인가 일찍이 분토와 마찬. , . 가지로 팽개쳐 두었다가 가동에게 맡겨 쓸모를 찾아보게 하였는데 이웃의 의원이 그 화분에 백국, 을 모종하였다 고서에 국화는 황국을 일컫는다고 하였으니 백국은 국화가 아닌 셈이므로 내가 그. , 거짓됨을 몹시 싫어했지만 가동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아 시속에 살면서 속되게 늙지 않기는. , 더더욱 어려우니 내가 이로부터 시속을 조금은 배웠노라 장차 대나무를 심고 매화도 심으리니, . , 슬프구나 나의 노쇠함이여.

이나 을 제재로 한 다른 과 달리 이라는 소품을 제재로 작성된

堂宇樓亭 山水遊觀 記文 盆菊

이 글은 분량도 분량이지만 문체상으로도 매우 간결하고 압축적이다 맹목적으로 유행을. 좇는 풍조에 대한 비판과 담벼락에 심어진 국화를 뽑아 버리지 않았던 이유 난이 심어,

21) 「贈金剛山僧宗遠序」,前集 권4, p.382. “若我者 德不若人 智不若人 聰明不若人 獨於文章 不下於古人, , , , , .”

22) 조선후기에 편찬된 시문선집 가운데 유몽인의 문장을 선록한 자료로는 別本東文選이 유일하다 여기에는. 「 외에도

盆菊記」 「送崔簡易翁之杆城郡序 送成川假仙洪兄之任序 送崔汝以赴留守于開城序 順天府喚仙亭記」‧「 」‧「 」‧「 」 등 모두 편의 작품이 실려있는데5 , 별본동문선 이 숙종 연간에 간행된 관찬서임을 감안하면 다소 이례적이 다.

23) 「盆菊記」, 後集권4 p.53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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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져 있던 화분에 흰 국화가 심어지기까지의 사연이 특별한 수사적 조탁이 없는 평이하고 담백한 어조로 서술되다가 돌연 작가의 애잔한 상실감을 토로함으로써 깊은 여운을 전하 고 있다 유몽인은 일찍이. “나는 혼자다 오늘날의 선비를 보건대 나처럼 혼자인 이가. 있는가 혼자로써 세상길을 가니 사귀는 도리가 어찌 하나에 얽매이랴 하나에 얽매이지. . 않기에 넷이고 다섯이고 모두 나의 벗이니 나의 무리가 또한 넓지 아니한가 그 차가움, . 은 얼음을 얼릴 정도이지만 나는 떨지 않고 그 뜨거움은 땅을 태울 정도이지만 나는 애, 태우지 않는다 가함도 없고 불가함도 없어서 오직 내 마음을 따른다 내 마음이 돌아갈. . 바는 오직 나 한 사람일뿐이니 그 거취가 어찌 느긋하고 여유롭지 않으랴.”24) 라고 할만 큼 자의식이 강했던 문인이다 시류에 편승하여 당여를 짓고 갑론을박하는 혼탁한 정국. 을 비판하여본들,25) 결국 도저히 세상과 절연할 수 없었던 자아의 내면의식이 바로 이곳 시속을 배웠으니 남들처럼 대나무도 심고 매화도 심어보리라 는 자조적이고 역설적인

“ ”

표현 속에 담겨있는 것이다 유몽인의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하는 신선의 세계도 결국 현. 실과의 갈등 속에 경계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주체의식이 반영된 것이다.

는 바로 이와 같은 자의식이 선명하게 표출된 수작이다 모두. 4단락으로 이루

「喚仙亭記」

어진 이 글은 講武의 용도로 세워진 정자의 이름으로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喚仙의 의 미에 대한 진술로 시작된다. 安期生 丁令威 黃鶴仙人 純陽眞人‧ ‧ ‧ 등 여러 선인의 행적을 거 론하며 속계와 선계는 본디 소통 불가능한 관계임을 진술하고 있다.26) 다음은 이 글의 후반부이다.

, , , , . ,

今者 吾同年柳勵仲氏下車昇平 不踰歲 淨遺址而新之 仍舊扁而名之 蓋以是府介於山海之間 素著

. , , . ,

佳麗之稱 彼東溟方丈之 仙 經過遊息於斯 混流俗而人不識者何限 吾知勵仲氏必聞神仙之好樓居羣

, . , ,

營是宇以館候之乎 第未知勵仲氏之喚之以何道乎 …… 昔余賦遠遊于瀛洲 避官府入曺溪 棲于臨鏡

, . , , ? .

堂 當時無是亭矣 他日角巾南歸 重過于玆 勵仲氏乎其喚我無 吾亦混流俗而人不識者27)

지금 나와 동년인 柳勵仲이 昇平에 수레를 내리고 한 해가 지나기도 전에 遺址를 정돈하여 새롭 게 하고는 예전의 편액을 따라 명명하였으니 대개 이 지역이 산과 바다의 사이에 끼어 있어서 평, 소 아름답다는 일컬음이 자자해서이다 저 동해 방장의 여러 신선이 이곳을 거쳐가거나 잠시 쉬어. 감에 유속과 뒤섞여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경우를 어찌 限量하랴 나는 여중씨가 반드시 신선이. 누정에 머묾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이 건물을 지어 맞이하고자 한 것임을 알겠으나 다만 여중씨 가 어떤 방법으로 그들을 부르고자 하는지는 모르겠다. …… 옛날에 내가 瀛洲에서 遠遊를 읊고 를 사직하여 에 들어가 에 우거하였는데 당시에는 이 정자가 없었다 훗날 각건을, .

官府 曺溪 臨鏡堂

쓰고 남쪽으로 돌아가다가 이곳을 다시 지나게 된다면 여중씨가 나를 불러줄까 나 또한 유속과? 섞여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자이니 .…

24) 「贈李聖徵 廷龜 令公赴京序( ) 」, 前集 권3, p.357. “余獨也 視今之士 其有若余獨乎 以獨而行于世 交之道豈泥, , , ,

, , , , , , , . ,

于一乎 一之不泥 於四於五 皆吾友也 則吾之倫 不亦博乎 其寒凝氷而吾不慄 其熱焦土而吾不灼 無可無不可

, , , .”

惟吾心之從 而吾心之所歸 惟一人而已 則其去就豈不綽有裕乎

25) 상게문. “黃者自黃 靑者自靑 其靑黃果其性乎 問于甲則是甲而非乙 問于乙則是乙而非甲 其俱是乎 其俱非, , ? , , ?

, ?”

乎 其甲乙不能相是乎

26) 「喚仙亭記」, 前集권4, p.395. “吾聞神仙 無而有 有而無 其居也縹, , , 緲, 其趨也冥昧 於山則非雲梯鐵鎖可攀 於, ,

, , . , , .

水則非風檣雨楫可接 矧乎弓 以招 玉帛以聘哉 異哉 昇平之講武亭 若之何名喚仙哉 昔者安期生遊東海而只留㫌

, [ ] , , ,

阜鄕之舃 可 丁 令威歸遼城而只題華表之詩 黃鶴仙人留連吳江之酒家 純陽眞人三入洞庭之岳陽 而未聞有號召

. , , .”

而將迎之者 倘有人知其眞仙而挽之 必泠然飄然而逝 唯恐蹤跡之或露 27) 상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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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산행으로 이루어진 구식 속에 배비구가 적절히 삽입하여 신축적이면서도 자 연스러운 행문 속에 喚仙의 의미를 담아내고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선조 41년 도승지였던 유몽인은 영창대군을 잘 보호해달라는 내용의 교서를 전달한 일로 (1608)

이이첨 일파에게 탄핵되어 서호에 우거하게 된다 그 뒤 광해군. 3 (1611)년 에 남원부사 에 임명되지만 대북파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있던 터라 곧 사직하고 순천 조계산의 임경 당에 한동안 칩거하였는데 위에서 말한 옛일이란 바로 이때의 일을 가리킨다, . “각건을 쓰고 남쪽으로 돌아가다가 이곳을 다시 지나게 된다면 여중씨가 나를 불러줄까? 나 또한 유속과 섞여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자이니.” 라는 마지막 문장은 혼탁한 정국 속에 서 탈속을 꿈꾸었으되 현실과 결별하지 못하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내적 갈등으로부터 배태된 것이다 이 글의 모두에서. “없으면서도 있고 있으면서도 없으 며, 縹緲하게 머물고 冥昧하게 내달린다”28)고 표현된 신선의 모습은 곧 현실과 이상의 경계 위에 서있는 유몽인 자신의 모습이기도 한 셈이다.

대개 고문은 개인의 사적인 생각이나 감정에 관한 내용보다는 인륜 도덕 치세 경국과 같이‧ ‧ ‧ 공적이고 보편적인 문제를 다루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서신이나 비지 애제처럼 비교적. ‧ 사적인 영역과 관계되는 글마저도 진중하고 엄숙한 태도로 일관하여 인간 내면의 진정성 을 찾아보기 힘든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하지만. 「분국기」‧「증이성징영공부경서」‧「환선 정기 를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유몽인의 고문에는 자기반영적인 성격을 지닌 글들이 적」 지 않다 이런 글들은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비. 교적 장르나 형식상의 격식에 크게 구애되지 않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유몽인의 문장에. 대한 몇 안 되는 제가 비평 가운데, “최립은 고인의 작품을 모방했으므로 비록 뛰어나다 할지라도 自家의 造化가 아니지만 유몽인은 모범적인 작품을 모의하지 않고 흉중의 조화 에서 나온 것”29)이라고 한 權擘 등 몇몇 문인의 평가도 이런 점에서 서로 맥이 닿는다.

요컨대 유몽인이 강조한 자득의 창작론이란-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그 자신이 전범 으로 규정한 몇몇 텍스트의 수사나 문체 등 형식적인 면으로부터의 자득을 의미하는 것 일 뿐만 아니라 진정성을 기반으로 한 개성적이고 흡인력 있는 내용의 창출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과연 수사나 문체 등 형식적인 면에 있어서의 자득의 실현양상. 은 어떠한가? 이는 전범적 텍스트와 어떤 방식으로 소통하고 있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다음 작품을 보자.

? . ? . ? . ? ‘

寒者何 竹也 碧者何 沙也 堂之名寒碧何 以其地有竹沙也 竹沙之稱寒碧何 取杜子 竹寒沙碧

’ . ? . , . , ,

浣花溪 者詩也 孰居之 鄭措大時也 措大 京師人 其先君詩名高一世 嘗隱於會稽山不售 自號會稽

. , , . , ,

山人 措大自幼稚富氣槩 値時之難 亦隱於錦城山 山有萬竿寒竹一帶碧沙 可挹於一堂 堂之名於是乎

. , , , ; , ,

得之矣 ⓑ夫寒者非一 有風也月也水也石也 千百其名 而必曰竹 碧者非一 有天也雲也山也海也 千

, ? , : “ , . , . ,

百其名 而必曰沙者何……於是 君子歌之曰 亭亭萬竹 氣侵書帙 綿綿平沙 色連溪月 孰營是堂

. , . , . , .” ,

堂以詩名 世隱於詩 允繼家聲 錦城嵯嵯 錦水深深 寒耶碧耶 主人之襟 有聽其歌而愛其名者 不入

, , , ? .

其堂 不見其物 而文以記之 ⓒ記之者何人 高興柳夢寅也30)

28) 주26 .번

29) 柳夢寅, 於于野譚 萬宗齋本( ) 권3 張14; 景文社, 1979. “尹月汀根壽見擘問近世文章高下 人言新進中柳某能,

, . : ‘ , , ,

文章甚高云云 其文與崔東皐岦孰優 擘曰 崔之文模倣古人之作 雖工非自家造化 若夢寅之文不擬前模範 皆出

, , .’ , . : ‘ ,

胸中造化 此最難 崔殆不及也 且余曾聞車五山天輅論我文及崔文每如此 其見略同 亡友成晉善每曰 以我觀之

, , , , , .’

子之文博採孟莊馬班韓柳 自成造化 不模古人之作 崔岦之採漢史韓碑柳文 模擬體格以隘窄 頗不如子之文‧ ‧ ‧ ‧ ‧ ‧ ‧ ‧

: ‘ ?’ : ‘ .’”

晉善嘗問許筠曰 柳之文與崔孰優 筠 思之良久曰 崔文老神柳似不逮黙

(11)

차가운 것은 어떤 것인가 대나무이다 푸른 것은 어떤 것인가 모래사장이다? . ? . 堂의 이름을 寒碧 이라 이름한 것은 어째서인가 그 곳에 대나무와 모래사장이 있기 때문이다 대나무와 모래사장을? . 이라 일컬은 것은 어째서인가? 의 ‘ ’란 시구에서 취한 것이다 누가 그곳에.

寒碧 杜子 竹寒沙碧浣花溪

사는가? 措大 鄭時이다 조대는 서울 사람이다 그의. . 先君은 詩로 한 시대에 높이 이름났는데 일, 찍이 회계산에 은거하여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會稽山人이라自號하였다 조대는 어려서부터 기개. 가 넉넉하였는데 시대의 어려움을 만나 또한, 錦城山에 은거하였다 산에는 만 그루나 되는. 寒竹과 한 줄기 띠를 이룬 碧沙가 있어서 당우 한 채에서 모두어 살필 수 있었으니 당의 이름은 여기에, 서 얻어진 것이다 차가운 것은 한둘이 아니니 바람과 달과 물과 바위도 있어서 그 이름을 천 가. , 지 백 가지로 할 수 있거늘 굳이 대나무라고 하였으며 푸른 것은 한둘이 아니니 하늘과 구름과, , 산과 바다도 있어서 그 이름을 천 가지 백 가지로 할 수 있거늘 굳이 모래사장이라고 한 것은 어 째서인가?……이에 군자가 노래하기를, “곧고 곧은 수많은 대나무 그 기운 서질을 침범했네 면면, . 히 이어진 평평한 모래사장 그 빛깔 시냇물에 비친 달빛에 연이었네 누가 이 당을 지었는가 시, . , 로써 이름했네 세상을 피해 시에 숨었으니 진실로 집안의 명성을 이었다네. , . 錦城의 높고 높음이 여, 錦水는 깊고 깊네 차가움이여 푸르름이여 주인의 흉금이네. , .” 라고 하였다 그 노랫소리를 듣. 고 그 이름을 사랑하는 자가 있었으나 그 당우에 들어가 보지 못하고 그 물색을 보지 못해 글로써 기문을 쓰나니 기문을 쓴 자는 누구인가 고흥 사람 유몽인이다, ? .

인용한 글은 「寒碧堂記」의 서두이다 유몽인은. “시험삼아 오늘날의 문장을 보니 之 而 其‧ ‧ ‧ 로 글을 엮어 한 구 안에 세 번이나 조사를 써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 글을 읽 於 乎 也 以‧ ‧ ‧

음에 물 흐르듯 구두가 유창하니 이런 글로 과거에 급제하고 한 나라에 빛내는 데는 부, 족함이 없겠지만 후세에 전해질 수는 없을 것”31)이라고 하여 조사의 빈번한 사용에 반 대한 바 있다 일반적으로 고문사가 간험한 문체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보면 이와 같은. 언급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하겠는데 기실 유몽인의 문장이 꼭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 진 것만은 아님을 이 「寒碧堂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와 ⓑ를 보자. ⓐ에서는 ‘ ’何 와 ‘ ’也자를 연용한 자문자답의 구식을 통해 간결하면서도 경쾌한 리듬감을 부여하고 있 으며, ⓑ에서는 ‘ ’也자를 연속적으로 병렬함으로써 하고많은 사물 가운데 굳이 대나무와 모래사장에서 ‘寒碧’이라는 이름을 취한 이유를 효과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수사법이 생경하지 않다면 이는, 公羊傳 을 통해 이미 이러한 화법을 경험했기 때문이다.32) 유몽인의 산문 가운데는 「送江原方伯申 湜 序 效國語押韻( ) ( )」‧「贈義 과 林道人效楞嚴經」‧「戱效戰國策奉贈全州府尹鄭公行序」‧「贈楓嶽三藏菴泂敏法師靑鶴非鶴論」 같이 원용한 텍스트를 아예 명시한 작품도 있지만 「한벽당기 와 같이 비록 제목에서는」 나타나지 않더라도 차용의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또 한 가지 더. 더욱 흥미로운 점은 이 작품은 公羊傳 만 차용한 것이 아니라 구양수의 작품도 차용하 고 있다는 사실이다.

30) 「寒碧堂記」, 前集권4, p.391.

31) 「答年兄林公直書」, 前集 권5, p.410. “試觀今之文 以之而其於乎也以屬辭 一句三用語助 使人讀之也 其句讀, , , ,

, ? , , ?”

流於唇吻 用是捷巍科華一國者何限 雖然 其施於一時則得矣 其如傳世壽後何

32) 公羊傳隱公 元年‧ “元年者何 君之始年也 春者何 歲之始也 王者孰謂 謂文王也 曷爲先言王而後言正月? . ? . ? . ?

. ? . ? . ? . ?

王正月也 何言乎王正月 大一統也 公何以不言卽位 成公意也 何成乎公之意 公將平國而反之桓 曷爲反之桓

, . , . , . ,

桓幼而貴 隱長而卑 其爲尊卑也微 國人莫知 隱長又賢 諸大夫扳隱而立之 隱于是焉而辭立 則未知桓之將必得

; , . , . , ? ,

立也 且如桓立 則恐諸大夫之不能相幼君也 故凡隱之立 爲桓立也 隱長又賢 何以不宜立 立適以長不以賢 立

. ? . ? , .”

子以貴不以長 桓何以貴 母貴也 母貴則子何以貴 子以母貴 母以子貴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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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 , , ; , ,

環 皆山也 其西南諸峯 林壑尤美 望之蔚然而深秀者 琅邪也 山行六七里 漸聞水聲 潺潺而瀉出滁

, ; , , , . ? .

于兩峯之間者 釀泉也 峯回路轉 有亭翼然 臨于泉上者 醉翁亭也 作亭者誰 山之僧智僊也 名之者

? . , , , , . ,

誰 太守自謂也 太守與客 來飮于此 飮少輒醉 而年又最高 故自號曰醉翁也 醉翁之意 不在酒而在

, , . , ;

乎山水之間也 山水之樂 得之心而寓之酒也……然而禽鳥知山林之樂 而不知人之樂 人知從太守遊而

, . , , . ? .

樂 不知太守之樂其樂也 醉能同其樂 醒能述以文者 太守也 太守謂誰 廬陵歐陽修也33)

처음 글을 지을 때에는 수십 자에 이르렀던 것을 결국 ‘環滁皆山也’ 5자로 압축하였다든 지 ‘ ’也자를 21번이나 연용하였다34) 하여 화제가 된 「醉翁亭記」의 일부이다. ‘寒者何 竹

로 시작되어 로 끝나는 한벽당기 는

’ ‘ ’ ‘

也 記之者何人 高興柳夢寅也 「 」 作亭者誰 山之僧智僊

라고 한 뒤 로 끝나는 취옹정기 의 구

’ ‘ ’

也 名之者誰 太守自謂也 太守謂誰 廬陵歐陽修也 「 」

식을 차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한벽당기 는 단지 모방 이상의 문」 학적 의의는 없는가? 이 문제는 모의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질 테지만 의도성의, 개입 여부에 따라 판단한다면 이 작품은 모방과는 거리가 멀다 이는 이 글의 전체적인. 맥락만 살펴보더라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취옹정기 의 경우」 , 滁州로부터 낭야와 양천 을 거쳐 취옹정에 이르는 마치 전통적인 산수화의 구도와 유사하게 대구도에서 소구도, 로 시선을 응축해간 뒤에 인물과 정자의 명칭에 대한 진술이 시작되는 응집적인 서술구 조를 택하고 있으며 사변적 의론을 배제하고 서정적이고 유연한 필치로 閱勝의 樂趣를 묘사하고 있다 이에 반해. 「한벽당기 는 대뜸」 공양전 의 즉문즉답의 화법을 활용하여 당우의 명칭이 유래한 바를 밝힌 뒤 堂主에 대한 서술과 堂名에 대한 의론이 이어지며 결말에 다시 한 편의 시를 삽입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결국. 「한벽당기 가」 공양전 을 차용한 것은 어떤 심각한 의론을 조성하고자 해서가 아니라 단지 당우의 명칭을 소개하 기 위해서였고, 「취옹정기 를 차용한 것도 그 서술구조나 서술태도 또는 주제나 의경 따」 위를 본받고자 해서가 아니라 그저 수사장치의 일종으로 활용한 것이다 이처럼 전혀 어. 울릴 것 같지 않은 텍스트들-선진문과 송문 을 한 작품 속에 노골적으로 드러내놓되- 작품의 전체적인 내용이나 형식에 있어서는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는 「한벽당기 는 어떠」 한 텍스트도 작가의 의도에 따라 창조적으로 재해석되고 변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실 험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라 하겠다.

는 어우집 과 별도로 전하는 필사본 문집인 에 그 초고가 실려 있어

無盡亭記 好稿

「 」 黙

서 편장법이나 자구법과 같은 고문의 수사법에 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데 있어서 요긴 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송문과 직접적으로 관계된 글이라는 점에서도 주목할만한 작품이 다.35) 이 글은 ‘無盡’이라는 정자의 이름에서 연상되듯이 蘇軾의 「赤壁賦」에 견주어 서 술한 의론형 누정기이다 여기에서 유몽인은. “천하만물 그 무엇도 다함이 없지 않은데 다함이 없기를 바라는 것은 천리를 어기는 것 이라고 하여” “변한다는 점에서 보자면 천 지도 일찍이 한 순간[一瞬]도 변치 않을 수 없지만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자면 사물

33) 歐陽修, 「醉翁亭記」; 余冠英외 인 주편3 , 唐宋八大家全集 上 國際文化出版公司, , 1997, p.998. 번역은 생략 함.

34) 朱熹와洪邁의 평에 보인다. 朱熹저,黎靖德 편,「論文上」, 朱子語類 권139; 中華書局, 1994, p.3308. “歐

. , , , , ‘ ’

公文亦多是修改到妙處 頃有人買得他醉翁亭記藁 初說 州四面有山 凡數十字 末後改定 只曰 環 皆山也 五字滁 滁 권

.” / , 8. “ , . ,

而已 洪邁 容齋隨筆五筆‧ 歐陽公醉翁亭記東坡公酒經 皆以也字爲絶句 歐陽二十一也字 坡用十六‧

. , , .”

也字 歐記人人能讀 至於酒經 知之者蓋無幾

35) 이 작품의 문예적 성격에 관해서는 졸고, 崔岦「 의 山水屛序와 柳夢寅의無盡亭記를 통해 본古文辭의文藝美

집 에서 상론한 바 있다

( 漢文學論集 23 , 槿域漢文學會, 2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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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우리 인간 모두가 다하지 않는[無盡] 존재”36)라고 한 소식의 관점을 정면으로 반박 하고 있다.37) 이는 곧 ‘無盡’에 대비되는 ‘一瞬’의 관점을 취한 것으로 정자의 명칭 자체, 를 부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청풍과 명월도 다하지 않음이 없고 바다와 산도 다하지 않 을 수 없으니 유한한 인간으로서 무한한 경지를 추구한다는 것은 조물주의 뜻을 위배하, 는 것38)이라 한 것도 모두에 제기한 진술과 부합한다 그런데 정작 마지막 단락에서는. 의 성리학적 세계관과 이라 한 노자의 말을 인용하여 천리유행

‘自强不息’ ‘知足之足常足’

의 이치를 깨닫고 순응하는 것이 올바른 군자의 태도라고 하며, 無盡이라고 명명한 것을 용인하는 태도를 취하였다.39) 그렇다면 「무진정기 는 과연 소식의 관점을 정면으로 반박」 하고 있는가? 천지자연의 무한함과 인간의 유한함을 대비시켜 세속적 욕망을 초탈한 삶 의 자세를 낭만적으로 묘사한 「적벽부 와」 ‘乾坤剝復之理’와 ‘自强不息’의 세계관을 통해 천리에 순응하는 성리학적 수양론으로 귀결된 「무진정기」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 한다 하지만. 「적벽부 에서도」 “흘러가는 것이 이와 같으나 일찍이 다하지 않으며 차고, 기우는 것이 저와 같으나 끝내 사라져버리거나 커져버리지 않는다”40)고 하였듯이 이 양, 자의 세계관이나 삶의 방식 자체가 본질적으로 상반된다고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오늘 이 정자에 이르러 江山과 風月의 흥취가 다함이 없음을 얻었으니 주인이 명명한 것이, 마땅하다 고 언급하였듯이 소식의 의론을 반박함으로써 정자의 이름마저 부정하였던 전” 반부도 실은 논제를 구성하고 의론을 창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비튼 것이지 근본적인 전복을 목표로 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런 점에서. 「무진정기 는」 「적벽부 라는 강력」 한 흡인력을 지닌 텍스트를 대상으로 하였으면서도 원작에 견인되지 않고 변용하여 자기 화하는데 성공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滕王閣序」에 나오는 경구 “四美具二難幷”에서 취의한 二難軒에 쓴 기문의 일부 이다.

, . , , . :

三十八年春 朴子爲韓子構草堂三間四楹 旣成 朴子使韓子求名於柳子 柳子請名之以二難 韓子曰

“我知之矣 州號爲公 而幽居私其雲物 是一難也 城名爲儒 而武人擅其風月 是二難也, , , ; , , .”柳子曰: “武

, ; , . , ?” : “ ,

昌名邑 不是都無文術 不夜稱城 未必長爲白日 況今名實兩全 有何難旃 韓子曰 嘉遯之村 非巢

, ; , , . , ?” : “

由則莫可 今宦子者舍之 鰲頭之山 非偓佺則莫干 今火食者安焉 二者之難 不其然乎 柳子曰 成

, . , . , .”

都非物外而君平下簾 岳陽亦人世而洞賓飛吟 況地有得人而彰 人無因地而揚 吾於二者 未見其難也

: “ , , , ?” : “ , , ;

韓子曰 吾之所難 子之所易 子之所難 可得聞命乎 柳子曰 今夫是軒 朴子創之 韓子存之 朴子

, . , ? , , , ,

讓之 韓子分之 湖山雲月之勝 孰全而保之 軒雖勝 不有主而主之 病其虛而莫守 不有賓而賓之 病

. , , , . , , , .

其寂而莫討 聲以曲投 影以形從 物以類合 人以情同 雷風相搏 動足則揮臂 陰陽胥應 燥火而濕水

, ?

不有朴子之敬客 焉有韓子之擇主 41)

36) 蘇軾, 「赤壁賦」; 余冠英 주편 전게서, , p.3129. “蓋將自其變者而觀之 則天地曾不能以一瞬 自其不變者而觀之, , , .”

則物與我皆無盡也

37) 「無盡亭記」, 前集 권4, p.392. “大凡有始而無不卒 造物者之意也 天下萬物 畢竟同歸於盡 而欲 其無盡者, . , , 鄿 ,

. , , ? , , ,

違天理也 今松巖公構三楹小亭於垂老之年 以無盡扁之 其意何居 萬物之中 莫久者海岳 而東海桑泰山礪 曾不

, , . , , !”

能以一瞬 而蘇軾 一拘儒也 乃敢貪天之物 以江上山間之淸風明月爲無盡藏 不亦異哉

38) 상게문. “彼蓬蓬然起於北海 蓬蓬然入於南海 其入也非風之盡乎 但見宵從海上來 寧知曉向雲間沒 其沒也非, , ? , ,

? , , , , . , , , ,

月之盡乎 噫 海也而盡 岳也而盡 風也而盡 月也而盡 矧乎世之人 其知者有限 而不知者無限 其得者有窮

, , , , .”

而不得者無窮 其生者有涯 而其死者無涯 如是而求無盡於有盡之域 是造物者之賊也

39) 상게문. “雖然 乾坤剝復之理 化化而生生 未嘗斯須間斷 宜君子之體之以自强不息 不息於天理爲不違 然則孰, , , , . ,

? : “ , .” , , .”

爲近其楚苦縣人之言乎 其言曰 知足之足 常足 今日到斯亭 得江山風月之趣無盡 宜主人之名之也 40) 蘇軾, 전게문. “逝者如斯 而未嘗往也 盈虛者如彼 而卒莫消長也, , , .”

41) 「二難軒記」, 前集권4, p.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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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봄에 가 를 위해 초당 세 칸을 지었는데 낙성한 뒤에 가 로 하여금

38 朴子 韓子 , 朴子 韓子 柳子

에게 헌의 이름을 요구하였다. 柳子가 二難으로 명명하기를 청하자 韓子가 말하기를, “내가 그 뜻 을 알겠다 고을 이름은. ‘ ’公이라 하는데幽居에서 雲物을 사사로이 취하였으니 이것이 첫 번째 어 려움이요 성의 이름은, ‘ ’儒라 하는데 武人이 그 風月을 독점하였으니 이것이 두 번째 어려움이다.”

라고 하였다. 柳子가 말하기를, “武昌은邑을 이름한 것이지만文術이 전혀 없지는 않았으며, 不夜 는城을 일컬은 것이지만白日이 항상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물며 지금은 이름과 실상이 모두 온. 전하니 그렇게 이름함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가 말하기를, “ 의 마을은 와 가 아니고는 살 수 없는데 지금 벼슬아치가 살고

韓子 嘉遯 巢父 許由

있으며, 鰲頭의 산은 偓佺이 아니고는 구할 수 없는데 지금 火食하는 자가 안주하고자 하니 두 가, 지의 어려움[二難]은 당연하지 아니한가?” 라고 하였다. 柳子가 말하기를, “成都는 物外의 땅이 아 니지만 君平 嚴遵( )이 주렴을 내리고 살았으며 岳陽 또한 인간 세상에 있었지만 洞賓 呂( 嵒)이 이곳 을 날며 詩를 지었다 하물며 땅은 사람을 얻어야만 빛나지만 사람은 땅을 통하지 않고도 이름을. 드날릴 수 있으니 나는 두 가지에 대해서 어렵게 여기지 않는다, .” 라고 하였다. 韓子가 말하기를, 내가 어려워하는 바를 그대는 쉽게 여기니 그대가 어려워하는 바를 얻어들을 수 있겠는가 라

“ , ?”

고 하였다. 柳子가 말하기를, “지금 이 軒은 朴子가 짓고 韓子가 살며 朴子가 물려주고 韓子가 나 누어 받았다. 湖山과 雲月의 승경을 그 누가 온전히 간직하겠는가? 軒이 비록 빼어나더라도 주인 될 만한 자가 주인되지 않으면 비워두고 지키지 않느니만 못하고 손님될 만한 자가 손님되지 않, 으면 적막하게 하여 토론하지 않느니만 못한 법이다 소리는 곡조에 따라 배치되고 그림자는 형상. 을 따르며 사물은 부류로써 합하고 사람은 정으로써 함께 한다 번개와 바람이 서로 치듯이 발을, . 움직이면 팔을 흔들게 되고 음과 양이 서로 호응하니 불로써 말리고 물로써 적신다. 朴子가 객을 공경함이 있지 않았다면 어찌 韓子가 주인을 택함이 있었겠는가?

유몽인이 韓孝仲이라는 武人과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구성된 이 글은 ‘二難’의 의미에 관한 두 가지 의론이 순차적으로 진술되고 있다 하나는 지역과 인물의 관계에 대한 것. 이고 다른 하나는 賢主와 嘉賓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공주 유성이라는 곳에 무인의 사. 유물이 들어선다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문제에 대해 유몽인은 무창과 불야 성도와, 악양의 예를 들어 어떤 인물이 사느냐에 따라 그 지역의 성망이 높아지는 것이지 지역의 성망에 따라 사람의 가치가 정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이는 바로. “人 이라 한 등왕각서 에 대한 명쾌한 논박으로서 의 진정한 함의가 현주와

” , ‘ ’

傑地靈 「 」 二難

가빈이라는 논제에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한편 이 글에는 당송고문가들의 누정기에서는 흔히 사용되지 않는 押韻을 이용한 수사법 이 보인다 강조 표시된 글자가 그것인데. , 術 日‧ 은 入聲 質韻으로 압운하였고 全 旃‧ 은 下 으로 압운하였으며 은 으로 압운한 것이다. 한 경우도 있

平聲 先韻 彰 揚‧ 下平聲 陽韻 通韻

는데, 下平聲 鹽韻과 侵韻에 각각 속하는 簾과 吟 上平聲 冬, 과 東에 속하는 從과 同이 그것이다 이밖에도. 上平聲 支韻에 속하는 之를 7번이나 연용하여 압운하였다 또한 이. 어지는 글에서도 비록 압운은 하지 않았지만 대우를 고려한 배비구를 적절히 배치하고 시로써 찬미하는 내용을 곁들임으로써 고답적인 풍격을 창출하였다.42) 유몽인의 글 가운

42) 상게문. “如魚泳淵 如鳥歸藪 如淄合 而易牙難嘗 如石投水而沒人莫取 其業雖殊 其趣不二 然則觀所爲主, , 澠 , . , , ,

, , . , , ,

服傳訓在此 婚媾無尤 體易義以是 古人之以賢主嘉賓爲二難者 是天下難莫難 而反掌于今日 吾所以請名於斯軒

.” , . , ; , ;

者也 軒旣名 而柳子請賦詩以娛賓主 於朴子賦兎罝 取公侯干城也 於韓子賦鹿嗚 取德音孔昭也 於二子賦衡

, ; , . : “ .”

門 取衡門之下可以棲遲也 又賦蘀兮 取叔兮伯兮倡予和女也 韓子拜手曰 不敢當不敢當 於是乎二子之賢也嘉 , .”

也 君子難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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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는 「이난헌기 와 같이 전체적으로는 산문의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압운이나 대우 배비」 ‧ 등을 활용하여 운문적 미감을 강화한 예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43) 어떤 의도로 이처럼 운문적인 수사를 기문에 적용하였는지는 각각의 작품마다 면밀하게 고찰할 문제지만 적, 어도 유몽인이 장르적 관습(convention)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고 개성있는 작품세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43) 「釣隱亭記 香翠窩記 贈金書狀朝天記」‧「 」‧「 」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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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음말 4.

한국 한문산문사를 서술함에 있어서 16세기 후반~17세기 초반은 전환기적 성격을 띠고 있다 조선초기 관각파의 문장에서 나타나는. 軟美한 당송문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한 복 고적 산문 고문사- -은 글이란 무엇인가 어떤 글이 뛰어난가 좋은 글을 짓기 위한 방, , 법은 무엇인가 등에 관한 진지한 성찰과 창작의 계기를 제공하였다 당시 유행한 고문사. 는 “文必秦漢 詩必盛唐”의 구호 아래 명대 문단을 풍미했던 전후칠자의 이론과 흡사할 뿐만 아니라 실제 그들의 문집이 소개되면서 본격화하였다 이런 점에서 조선중기 고문. 사의 문예적 성격에 대한 접근은 전후칠자에 대한 이해가 동반되어야 함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정작 고문사 작가로 규정되어온 이들의 이론과 작품을 면밀히 검. 토해보면 “문필진한 이라는 구호가 무색해질만큼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유몽인의 경우도 이에 해당한다 그는 고문사를 창도했다고 평가되는 윤근수나 최. . 립보다도 더욱 적극적으로 복고적 산문론을 개진했는데 그 중심에는 전범적 산문 텍스, 트에 관한 논의가 자리잡고 있다 그 가운데 특기할만한 점은 구양수와 소식으로 대표되. 는 송대의 문장과 이몽양과 왕세정으로 대표되는 명대의 문장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인 데 이러한 주장은 전후칠자의 그것과 매우 흡사하다, .

유몽인은 송문이 弛縵支離한 병폐에 빠졌다고 보았으며 명문은 복고를 주장하였으되 모 의와 도습에 머물고 말았다고 진단하였다 하지만 유몽인이 궁극적으로 추구하였던 목표. 는 한두 가지 전범적 텍스트가 지닌 문예적 경계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폭넓은 독서와 연찬을 통해 자기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확보하는 것이었으며 그런 점에서 송문과 명, 문 역시 그의 독서목록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유몽인은 이를 자득이라고 표현하였는데, 「盆菊記」‧「贈李聖徵令公赴京序」‧「喚仙亭記」와 같이 작가의 진정성이 선명하게 표출된 글과 公羊傳 과 「醉翁亭記」를 요령있게 결합한 로부터 취의하여 함의를 풍부하게 구성한 압운을 사용

, ,

寒碧堂記 赤壁賦 無盡亭記

「 」 「 」 「 」

하여 고답적인 풍격을 구현한 「二難軒記」 등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실현된 자득의 경 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유몽인의 자득의 산문론과 작품세계는 이 시기 복고. 적 산문이 그 형성과정에 있어서는 전후칠자로부터 자극받은 점이 있었다 할지라도 실제 로는 조선 문단 내부의 환경 속에서 비판적으로 수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주제어 : 柳夢寅 自得 散文 古文 秦漢古文 唐宋古文 前後七子 韓愈 柳宗元 歐陽修, , , , , , , , , ,

, , , , ,

蘇軾 李夢陽 王世貞 文體 修辭 文藝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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集 槿域漢文學會

이 논문은 2006년 5월 30일에 투고 완료되어

년 월 일에 편집위원회에서 심사위원을 선정하고 2006 6 21

년 월 일까지 심사위원이 심사하고 2006 7 15

년 월 일에 심사위원 및 편집위원회 회의에서 게재가 결정된 논문 2006 7 25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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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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