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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속의 유교문화 2

대구한의대학교

박 홍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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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아메노모리 호슈 (雨森芳洲, 1668-1755)

 나가사키의 공자묘

 오규소라이의 유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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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시가현(滋賀県) 나가하마시(長浜市)

다카쓰키(高月町)에서 출 생하였다.

* 에도 시대 일본의 의사 이자 주자학자. 한문, 조선 어, 중국어에 능통. 쓰시마 번에서 외교 담당 문관으 로 활약하였다.

<옆의 초상화는 조선통신 사를 따라간 화가 이성린(

李聖麟,1718~1770)이 1748년에 그린 것으로 알 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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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노모리 호슈 (雨森芳洲, 1668-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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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 1668년~1755년)

 1990년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 궁중 만찬 연설 에서 노 대통령은 "과거 아메노모리 호슈 선생의 외교철학인 '성신교린誠信交隣'처럼 한국과 일본은 신의와 성실로 사귀 어야 한다"고 말했다.

 일본사람들도 잘 모르는 아메노모리가 역사의 현장에 다시 등장한 것이다.

 일본인 최초로 조선어 교과서인 『교린수지 交隣須知』를 썼 다고 한다. 국제간의 대등한 외교관계를 강조했으며, 우삼동(

雨森東)이라는 조선식 이름을 사용했다.

 그의 부친은 무사의 신분을 버리고 의사가 되었으며, 호슈도 가업을 잇기 위해 의사 수업을 받았으나, 도중에 유학자의 길 을 택한다.

 22세 때 쓰시마 번의 진문관(한문 담당 관리)이 되어 근무하 면서 당시 일본 유일의 해외 공관이었던 부산의 왜관을 오가 면서 조선어를 습득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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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 1668년~1755년)

 그는 지적 호기심이 많아 한글에도 매우 관심을 보이면서 배웠다고 한다.

 조선 통신사 사절을 쓰시마에서 에도까지 안내하는 직책도 맡아 통신사들과도 친분을 쌓았다.

 통신사 신유한(1681∼?) 이 작성한 해유록을 보면 호슈의 학 식에 감탄하는 기술이 여러 곳에서 보인다.

 1719년에 제술관으로 통신사의 일원이 되어 일본을 방문하 였던 신유한은 아메노모리와 나눈 대화의 내용을 그의 일본 기행문 『해유록(海游錄)』 에 적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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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 1668년~1755년)

- 신유한(申維翰, 1681-1752)이 쓴 일본기행록인, [해유록]의 기 록가운데 아메노모리 호슈에 대한 기록-

(다음 글은 장상섭이 번역한, 신유한의 [해유록] 정음문고125권 참조)

 “저녁에 우삼동(아메노모리 호슈)이 나의 관저로 찾아와 만 나기를 청했다. 머리에는 세모난 검은 관을 썼고, 두 폭으로 만든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있어서 보기에 해괴하다.

나는 세 서기와 더불어 서서 마주보고 읍을 한 뒤에 앉았다.

나는 일찍이, 그가 중국말에 능통하고 시문을 아는 데는 일본에 서 가장 뛰어났다고 들어 왔다.

나는 공(그대의)의 시명이 널리 알려져 있음을 알고 있는데

일생에 외우고 익히며 저술한 것이 얼마나 되느냐 하고 물었더니 그는 놀라면서 젊어서도 오히려 남만 못하였는데, 이제는 늙어 버 렸으니 어찌 감을 대해서 할말이 있으리오..그때 그의 나이가 52 세라 머리는 반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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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長崎)의 공자묘(孔子廟)

1893년 청나라 정부와 일본 나가사키의 화교들이 협력해서 지었다고 한다. 건물은 중국의 전통미를 살렸다.

 중국인이 해외에 세운 유일한 공자묘(공자 사당)이다.

 72명의 공자 제자를 조각해 놓은 조각상이 있다.

 72명의 조각상은 얼굴, 표정, 자세들이 각각 서로 다 다르다.

- 공자는 『시(詩)』·『서(書)』·『예(禮)』·『악(樂)』을 교재로 삼아 가르쳤는데 , 제자가 3천여 명이나 되었다.

그 제자들 가운데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와 같은 육예(六藝)에 조예가 깊은 자가 72명이었다.

(사마천, 『사기(史記)』 「공자 세가(孔子世家)」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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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長崎)의 공자묘(孔子廟)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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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長崎)의 공자묘(孔子廟)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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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長崎)의 공자묘(孔子廟)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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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長崎)의 공자묘(孔子廟)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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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長崎)의 공자묘(孔子廟)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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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시대 유교문화에 대한 일본사회의 단면

 “論語(ろんご)よみの論語知(し)らず.”

(논어를 읽어도 논어를 모른다.)

 위의 말은 일본 에도시대의 속담이다.

책을 소리 내어 읽지만 그 뜻은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 많은 경전 중에 하필 논어를 대상으로 삼았을까?

그것은 에도시대 논어가 유학의 그 어느 경전보다 일반적으 로 더 많이 읽혔다는 당시 독서 경향에 대한 증거이다.

 이와 비슷한 이야기도 전하다.

곧 에도시대, “청소년이 집에서 「센류(川柳)」의 글을 읽다가 어머니가 방에 들어오면 얼른 논어책으로 가린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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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나타난 일본유학의 한국 소개

 일본 유학의 조선 유입이라는 변화는 극소수 조선 유학자들 에 의해 전개되었지만 한일간 학술사적 의미는 자못 적지 않 다. 그 변화를 몰고 온 조선 유학자가 안정복(順菴 安鼎福, 1712〜1791), 이덕무(靑莊館 李德懋, 1741〜1793) , 정약용(

茶山 丁若鏞, 1762~1836)이었다.

 제 1단계 : 안정복의 이토 진사이의 소개

조선학계에 일본 고학자 최초 소개

 제 2단계 : 이덕무의 이토 진사이, 오규 소라이,

다자이순다이(太宰春臺, 1680~1747) 소개

이토 진사이의 학설 일부 평가 , 조선학계에 일본 고학의 학설 최초 소개

 제 3단계 : 정약용의 이토 진사이, 오규 소라이,

다자이순다이의 논어 주석설 인용 및 비평

조선학계 최초의 일본 고학에 대한 연구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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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학자들이 인정한 일본 유학자 오규소라이

- 이덕무의 평가,

“오규 소라이는 특이한 재주로 동무(東武)의 여러 대에 걸친 특별한 예우를 받아, 엄연히 전국의 문장가의 으뜸이 되었다.

또한 ‘해외의 걸출한 선비(海外之傑士也)’이다.”

- 다산 정약용의 평가

‘오규 소라이 선생(先生)’으로 호칭하며 그의 학문에 대해서도 호평하였다. “내가 이른바 고학선생(古學先生) 이토오 진사 이(伊藤維楨)가 지은 글과 오규 소라이 선생(荻先生) ․ 다자 이 순다이(太宰純)등이 논한 경의(經義)를 읽어보니 모두 찬 란한 문채가 있었다. 일본은 근래 명유들이 많이 배출되고 있 다. 그 가운데 호를 소라이(徂徠)라고 하는 모노베나베카시와 (物部雙柏) 같은 사람은 해동부자(海東夫子)로 불리어지고 있 으며 그 제자들도 많다.…… 또 일본에는 과거공부의 폐단이 없으므로 지금은 그들의 문학이 우리나라를 훨씬 앞서 있으 니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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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규소라이 (荻生徂徠, 1666년 -1728)의 의식구조

 46인의 사무라이 처단에 대한 의견서

“의(義)란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도이며, 법은 천하의 규구(規矩)이다.

예(禮)로써 마음을 제어하고, 의(義)로써 일(事)을 제어한다.

지금 46인의 사무라이가 그 주군을 위해 원수를 갚은 것은 사무라이 된 자로서 수치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신을 정결하고자 했던 도(道)이며, 그 일은 의(義)라고 하더라도, 그 무리들에 국한된 일이 되기 때문에 결국은 사론(私論)일 뿐이다.

그것은 원래 영주아사노 나가노리(淺野長矩)가 바쿠후 장군의 거처인 에도성에서 경거망동한 죄로 처벌을 받았으니, 기라 요시나카(吉良義 央)를 원수로 삼아 바쿠후의 허락도 없이 소동을 일으킨 일은 법에 어긋난 일이다. 지금 46인의 사무라이의 죄를 물어 무사의 예로서 셋푸쿠(切腹)에 처함이 곧 공론이며, 그럼으로써 자연히 우에스기가 (上衫家, 吉良의 本家)의 청원도 이루어지는 셈이 된다.

저들이 충의(忠義)를 가볍게 여기지 않은 도리(道理)는 대공론(大公論) 이라고 말하지만, 만약 사론(私論)으로 공론을 해치면, 이후 천하의 법은 세우기 어렵게 될 것이다.(「徂徠擬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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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규소라이 (荻生徂徠, 1666년 -1728)의 철학배경

 “나는 하늘의 총령(寵靈)에 의해 왕세정 이반룡 두 사람의 책 을 얻어 읽고, 처음으로 고문사(古文辭)가 있는 것을 알았다.

이로써 점 점 『육경』을 읽게 되어, 몇 년이 지남에 차츰 차츰 물(物)과 명(名)이 합치됨을 체득하게 되었다. 물과 명이 합치 하게 됨에 따라 그 뒤로는 훈고(訓詁)가 비로소 밝아지고 『육 경』에 대해 무언가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육경』은 그 '물(物)' 인 것이며, 『예기』와 『논어』는 그 '의(義'이다. '의'가 반드시 ' 물'에 속한 다음에야 도(道)가 정해지는 것이다.”

 이쪽 사람들은 방언(일본어)을 가지고 읽으면서 이를 가리켜 화훈(和訓)이라고 한다. 이것을 '훈고(訓詁)라고 이해하지만 실은 번역이다. 그런데도 시람들은 그것이 번역임을 모른다."

"저쪽에는 당연히 저쪽의 언어가 있다. 중화(中華)에는 당연 히 중화의 언어가 있다. 언어의 체질이 본디 달라서 어느 것 에 의거한들 딱 들어맞질 않는다. 이런데도 화훈으로 에둘러 읽고서 통할 것 같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견강부회일 뿐이 다. 그래도 세상 사람들은 반성하지 않고 책을 읽고 쓸 때 그 저 화훈에만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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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규소라이 (荻生徂徠, 1666년 -1728)의 철학

 “(도덕의 수양으로) 이미 성인이 되면 그 가르침을 들어 천하 를 가르치면 천하가 저절로 다스려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은 노장의 내성외왕의 학설이며, 바깥을 경시하고 안을 중시 하는 데로 귀결된다. 그것은 선왕 공자의 원형과는 크게 다르 다. 그러므로 유학자들은 벼슬하지 않고 민간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 제자들을 교육하여 인재를 양성하지 못하고 벼슬길 에 나아가서는 국가를 교화하여 풍속을 성취시키지 못할 것 이다. 그리하여 형체만 있고 쓸모없다는 비난을 면하지 못하 게 되는 것은 그들이 도(道)로 삼는 것이 선왕의 도와 다르기 때문이다.”

 “대개 선왕은 언어만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은 부족하다 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므로 예악을 제정하여 그들을 가르쳤 다. 또한 정치와 형벌만으로는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줄 수 없 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예악을 제정하여 그들을 교화하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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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규소라이 (荻生徂徠, 1666년 -1728)의 철학

 “앎을 이루는 방법은 예악보다 좋은 것이 없다. 또한 선왕이 천하의 기강을 세우고 백성들의 지극한 도덕을 세운 것은 오 로지 예에 있다. ……

반드시 여러 예를 상고하여 선왕의 도에 합치하는 지의 여부 를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예는 체(體)가 된다고 말하는 것이 며, 또한 선왕의 도의 체인 것이다”

 “도는 총괄한 명칭이다. 말미암는 바가 있는 것을 가지고 말 한 것이다. 대개 옛 성왕이 수립한 것으로 천하 후세의 사람 으로 하여금 이로 말미암아 행하게 하고, 자기도 또한 이로 말미암아 행한다. 사람이 도로로 말미암아 다니는 것에 비유 하여 도(道)라고 한다. 효제와 인의로부터 예악과 형정에 이 르기까지 합하여 이름을 붙였으므로 총괄한 명칭이라고 한 다. 선왕은 성인이다. 그러므로 혹은 '선왕의 도'라고 말하기 도 하며, 혹은 '성인의 도'라고 말하기도 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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