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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일본학 특강-

대구한의대학교

박 홍 식

(2)

목차

일본인론

 일본(日本) 국호의 등장

 15세기 한국인이 본 일본인론

 18세기 한국인이 본 일본인론

 19세기 서양인이 본 일본인론

 20세기 서양인이 본 일본인론

일본학특강 박홍식 2

(3)

일본이라는 국호의 등장

 일본(日本)이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은 견당사(遣唐使)부터이다.

 천황(황제의 호칭)의 유래

○ 견수사(遣隨使 けんずいし) 第 一 回(600年)

• 스이코 천황(推古天皇) 이 즉위한지 8년이 되던 해인 600년.

• 전거; 『수서(隨書)』 ‘동이전국전(東夷傳倭國傳)’. 『日本書紀』에는 記載되어 있지 않다.

• 『수서(隨書)』에는 수나라 황제였던 문제(文帝)의 물음에 일본으로 부 터 파견된 견사(遣使)가 답을 한 모습이 기재되어 있다.

 「開皇二十年 俀王姓阿毎 字多利思北孤 號阿輩雞彌 遣使詣闕 上令 所司訪其風俗 使者言俀王以天爲兄 以日爲弟 天未明時出聽政 跏趺 坐 日出便停理務 云委我弟 高祖曰 此太無義理 於是訓令改之」 (開 皇20年은、推古天皇8年에 해당한다)

일본학 특강 박홍식 3

(4)

일본이라는 국호의 등장2

○ 견수사 第二回、607年(推古15年)

• 小野妹子가 大唐国에 国書를 가지고 파견되었다.

• 전거; 『수서(隨書)』 ‘동이전국전(東夷傳倭國傳)’ 와 『일본서기』

• 『隋書』「동이전왜국전」에

「日出處天子致書 日沒處天子無恙云云」「帝覽之不悅 謂鴻臚卿曰 蠻夷書有無禮者 勿復以聞」)。

양제(煬帝)가 화낸 것은 俀王이「天子」라는 이름으로 소개한 점이다. 「日 出處」「日沒處」라는 기술때문이 아니다.

「日出處」「日沒處」은『摩訶般若波羅蜜多経』의 주석서『大智度論』에

「日出処是東方 日没処是西方」라고 있는 것처럼、단순히 동서의 방향을 표시하는 불교용어이다. 그러나 불교용어를 사용한 것은 中華的 책봉체제 로부터의 이탈을 표명하는 표현하는 생각될 수 있다.

일본학 특강 박홍식 4

(5)

일본이라는 국호의 등장3

왜국(倭國)이 이름을 바뀌어 일본(日本)이라 하였다.

“스스로 말하기를 ‘해뜨는 곳에 가깝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붙였다’고 하였다 . “倭國更号 日夲 自言近日所出以爲名”

『삼국사기』 권 제6, 신라본기, 文武王 , 十年冬十二月(670년) (당 고종(唐高宗) 함형(咸亨) 원년(670)에 해당한다.)

8세기 신라인에 비친 일본인

- 신라 경덕왕(景德王) 12년/고켄 천황(孝謙天皇) 5년(753년),

2월에 일본의 고켄 천황은 종5위하 오노노 다모리(小野田守)를 대사로 하는 '회답' 사절단을 신라에 파견하였다.

신라는 이들 일본 사신들을

"거만하고 예의가 없으므로 왕이 접견도 하지 않았다.“

(《삼국사기》 〈본기 권9 경덕왕〉, “十二年 秋八月 日本國使至 慢而無禮 王不見之 乃廻 (12년(753)

일본학 특강 박홍식 5

(6)

일본이라는 국호의 등장4

<日국호 기록된 견당사 墓誌 발견 1>

 (도쿄=연합뉴스) 기사입력 2004-10-11 09:32

'일본'(日本)이라는 국호가 기록된 견당사(遣唐使ㆍ당나라 사절단) 일 행의 묘지(墓誌.비문의 일종)가 중국 시안(西安) 인근에서 발견됐다고 일본 언론들이 11일 보도했다.

견당사는 일본 나라(奈良ㆍ710-784년) 시대 당나라에 대규모로 파견 된 사절단으로 이들을 통해 수입된 당의 각종 선진문물은 일본 고대 율 령국가 확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게 정설이다.

중국 시베이(西北) 대학이 시안 인근에서 발견한 이 묘지는 높이와 폭 이 각각 39㎝인 정방형으로 덮개석 윗면에서 12문자, 본체석에는 171 문자가 새겨져 있다. 당시 견당사를 수행한 한 유학생의 묘지로 확인됐 다.

일본학 특강 박홍식 6

(7)

일본이라는 국호의 등장5

<日국호 기록된 견당사 墓誌 발견 1>|

묘지에는 ,

"성은 정(井), 자는 진성(眞成), 국호는 일본(日本).

천부의 재능을 가지고 당에 건너와 면학에 힘썼다.

학문을 연마해 관리로서 조정에 임했다. 예의 바름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734년 정월 급병으로 36세로 사망했다.

황제는 죽음을 애도해 상의봉어(尙衣奉御)라는 관직을 하사했다. 12월4일 산 스이 부근에 매장했다. 사체는 이국의 흙이 됐지만 혼은 고향에 돌아간다.“

라고 기록돼 있다.

상의봉어라는 관직은 황제의 의복을 관리하는 부서의 책임자다. 이로 미 뤄 볼 때 당시 현종황제(712-756)의 신임을 얻은 것으로 추정됐다.

신문은 이 인물의 이름이 중국명인 탓에 확인은 불가능하지만 717년 당나 라로 간 사절단의 일원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일본학 특강 박홍식 7

(8)

8세기 일본인의 눈에 비친 신라인의 모습

삼국사기 卷第四十六 卷第四十六 列傳 第六 > 설총(薛聰) >

[세상에 전하기는 일본국 진인(眞人, 오우미노 미후네 淡海三船)이 신라 사신 설판관(薛判官 즉 대판관(大判官) 한나마(韓奈麻) 설중업(薛仲業)) )에게 준 시(詩)의 서문에,

“일찍이 원효거사가 지은 《 금강삼매론(金剛三昧論)》을 읽고 그 사람을 만나 보지 못한 것을 깊이 한탄하였는데, 신라국의 사신 설판관이 곧 거사의 손자라 는 것을 듣고, 비록 그 할아버지를 만나보지 못하였어도 그 손자를 만난 것을 기뻐하여서 이에 시를 지어 드린다”고 하였다.(779년)]

(《속일본기》권36 고닌키(光仁紀) 호키(寶龜) 11년(779년) 정월에 기록된 신라 사신단의 기록과 관련이 있는 역사적 사실.

일본학 특강 박홍식 8

(9)

15세기 한국인의 눈에 비친 일본인론 1 - 신숙주(申叔舟 : 1417~1475)의 일본인론 1 -

출전- 해동제국기 [海東諸國記, 1443년(세종 25)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일 본에 다녀온 신숙주(申叔舟)가 1471년(성종 2) 왕명을 받아 쓴 책.

“(일본은) 별처럼 흩어진 섬에 살면서 풍속도 아주 다르므로 ...”

“(일본은) 땅이 흑룡강 북쪽에서 시작해서 우리나라 제주의 남쪽까지 이르고 유구와 맞닿아 있어서 그 지형이 매우 깁니다”

“그들은 습성이 굳세고 사나우며 칼과 창을 능숙하게 쓰고 배 부리기에도 익숙합니다.”

“먹고 마시는 데는 칠기를 사용하고 높은 분에게는 토기를 쓴다, 젓가락은 있으나 숟가락은 없다.

남자들은 머리를 자르고 이를 묶었으며 사람마다 단검을 차고 다닌다. 부인들 은 눈썹을 그렸으며 머리를 등에 늘어뜨리고 다리로 이어서 그 길이가 땅에 끌 리게 하였다 남녀간에 얼굴을 단장하는 자는 모두 이빨을 검게 물들인다.

일본학 특강 박홍식 9

(10)

15세기 한국인의 눈에 비친 일본인론 2 - 신숙주(申叔舟 : 1417~1475)의 일본인론 2 -

- 무릇 서로 만나면 무릎을 세우고 앉아서 예를 표하고 만약 길에서 존장자를 만나면 신과 갓을 벗고 지나간다.

- 사람들의 집은 나무 판자로 지붕을 덮었고 오직 천황이나 국왕이 거처하는 곳이나 사원에만 기와를 썼다.

- 사람들은 차 마시기를 좋아하며 길가에 다점(茶店)을 설치하고, 차를 파는데 행인이 동전 일문(一文)을 던지고 한 잔을 마신다.

-사람들이 사는 곳곳에 천 명, 백 명 씩 모여 저자를 열고 점포를 두었다,

-부자들은 시집 못 간 여자들을 데려다가 의복과 음식을 주고 얼굴을 단장시키 고 경성(傾城)이라고 부르는데, 지나가는 나그네를 끌어들여 유숙시키며 술과 밥을 주고서 그 값을 받기 때문에 여행객들이 식량을 싸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일본학 특강 박홍식 10

(11)

15세기 한국인의 눈에 비친 일본인론3 - 신숙주(申叔舟 : 1417~1475)의 일본인론 3 -

- 남녀를 가릴 것 없이 모두 그들의 국자(國字, 무릇 47자임)를 익히 말며, 오직 스님들만이 경서를 읽어서 한자를 안다.

- 남녀의 의복은 모두 얼룩지게 물들였고 푸른 바탕에 흰 무늬가 있다.

남자의 웃옷은 겨우 무릎에 미치고, 치마는 길어서 땅에 끌리고 관은 없고 혹은 오모(烏帽: 대로 만들었고 정수리는 평평하고 앞뒤는 뾰족하며 겨우 상투를 가리기에 족함)를 쓰기도 한다.

- 갓은 부들은 쓰는데 대나무나 삼나무로 만들기로 한다.

(남녀가 나다닐 때 쓰고 다님)

일본학 특강 박홍식 11

(12)

18세기 한국인의 눈에 비친 일본인론 1 - 이덕무 (李德懋, 1741 ~ 1793)의 일본인론 1 -

 출전 ; 이덕무가 쓴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제64권,

청령국지蜻蛉國志, (일본을蜻蛉國(청령국) 또는 부상국扶桑國이라 했다. 청령국은 잠자리 모습의 지형을 두고 이름 지은 것이고, 부상은 해가 떠오르는 동쪽 바다 속에 있다고 하는 神木이다.

- 일본 사람은 대개 부드럽되 능히 굳고, 굳되 유구(悠久)하지는 못하며, 여리되 능히 견디고, 견디되 진기(振起)하지는 못한다. 총명하되 식견이 편협하고, 예민하되 기상이 작으며, 능히 겸손하되 남에게 양보하지 못 하고, 능히 은혜를 베풀되 남을 포용하지 못한다.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기이한 것을 숭상하며, 가까운 사람을 반기고 먼 사람에게 소홀하며, 고 요한 곳을 즐기고 떼지어 살기를 싫어하며, 본업에 안정하고 분수를 지 키기를 좋아한다.

일본학 특강 박홍식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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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한국인의 눈에 비친 일본인론 2 - 이덕무 (李德懋, 1741 ~ 1793)의 일본인론 2 -

- 기교(奇巧)ㆍ진완(珍玩)에 몰두하나, 부지런히 애쓰고 전일(專一)하다.

그러므로, 신무(神武)가 이것을 이용하여 태평한 정치를 이루었고, 수길 (秀吉,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이것을 이용하여 천하에서 막강한 구적(寇 賊)을 만들었으며, 가강(家康)이 제어하기에 이르러서는 다시 각각 정해 진 분수를 지켜서 고요하여 소란이 없었다.

- 몸집은 특별히 크지도 작지도 않고 살찌거나 파리한 사람도 드물며, 악창(惡瘡)도 없고 부종(浮腫)도 없다. 밤낮으로 몸을 씻어 깨끗하게 하 며, 얼굴은 여위고 정신은 맑으며, 졸기를 잘하는 사람이 아주 적다. 인 구가 날로 번성하여 사람이 물고기처럼 많다. 여자는 열서너 살이 되면 모두 아이를 가질 수 있다.

- 대마도(對馬島) 사람은 미개하여 문식(文飾)이 없으나, 몸이 튼튼하고 내국인(內國人)보다 특이하게 크다.

일본학 특강 박홍식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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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한국인의 눈에 비친 일본인론 3 - 이덕무 (李德懋, 1741 ~ 1793)의 일본인론 3 -

- 시문(詩文)과 유학(儒學)이 이 나라에서 행해진 것은 대개 왕인(王仁) 과 지장(智藏)ㆍ홍법(弘法) 두 대사(大師)로부터 비롯되었다.

근자에 강남(江南)의 서적이 장기(長崎 ‘나가사끼’)에 모여들어, 집집이 글을 읽고 사람마다 문장을 쓰니, 오랑캐의 풍속이 점점 변하여 간다.

- 성무(聖武)의 천평(天平) 7년(735)에 당(唐) 나라 사람 진경(晋卿)이 와 서야 비로소 《문선(文選)》ㆍ《이아(爾雅)》의 음을 통하였다.

- 대저 일본 사람은 총명하고 숙성하므로, 4~5세에 능히 붓을 잡고 10 여 세에는 모두 능히 시를 지으며, 시를 잘 짓고 글씨를 잘 쓰는 여자가 매우 많다.

일본학 특강 박홍식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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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한국인의 눈에 비친 일본인론 4 - 이덕무 (李德懋, 1741 ~ 1793)의 일본인론 4 -

 일본의 풍속

- 왜인은 습성이 굳세고 사나우며, 칼ㆍ창을 정교하게 다루고 배를 익숙하 게 다룬다. 남자는 머리털을 자르고서 묶으며 단검(短劍)을 찬다. 부인은 눈썹을 뽑고 이[齒]에 물들이고 이마에 눈썹을 그리며, 등뒤로 머리털을 드리우고 다리[髢]를 이어대어 그 길이가 땅에 끌린다.

- 서로 만나면 꿇어앉는 것을 예의로 여기고, 길에서 존장(尊長)을 만나면 신과 갓을 벗고 지나간다. 인가(人家)는 흔히 널빤지로 지붕을 이었으며, 차 마시기를 좋아하므로 길가에 다점(茶店)을 두며, 인가가 곳곳이 천백(

千百)으로 모여서 저자를 열고 가게를 둔다. 가멸한 사람이 갈 곳 없는 여 자를 거두어 단장시켜 지나가는 손[客]을 이끌어서 재우고 음식을 먹이고 그 값을 받으므로 길 가는 사람들이 양식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 대저 그들의 풍속이 숭상하는 것은 첫째가 신(神)이고 둘째가 부처[佛]이 고 셋째가 문장(文章)이다. 강호(江戶)가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은 첫째가 무(武)이고 둘째가 법(法)이고 셋째가 지사(智詐 슬기와 속임)이다.

일본학 특강 박홍식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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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한국인의 눈에 비친 일본인론 5 - 이덕무 (李德懋, 1741 ~ 1793)의 일본인론 5 -

 일본의 사민(四民)

- 입법(立法)이 매우 엄하기는 하나, 과조(科條)는 실로 간략하고 또 획 일하여 변경이 없다. 관원에 있어서는, 제후(諸侯)의 아들은 제후가 되 고 공경(公卿)의 아들은 공경이 되며 적자(嫡子)로 서로 이어가므로 제 지위 이외의 것을 바라는 마음을 갖지 않으며, 아래로 온갖 벼슬과 이 서(吏胥)와 노예(奴隸)까지도 다 대대로 이어받고, 큰 죄악이 없으면 다 대대로 녹(祿)을 먹는다.

- 벼슬하지 않는 사람에 있어서는 농부의 아들은 농부가 되고 공장이의 아들은 공장이가 되며, 장사로 재물을 모은 자는 공후(公侯)의 낙(樂)을 누리기는 하나, 집 밖에서는 감히 존귀한 사람과 어울리지 못한다. 그러 나 그들의 풍속은 직위를 가진 자가 높고 그 다음이 장사꾼이고 그 다 음이 공장이이고 가장 낮은 것이 농부이다. 문사(文士)라 일컫는 자는 곁들여 공업이나 상업을 하여 살아가므로 하류에 있는 자 중에 실로 문 인ㆍ시인이 많다.

일본학 특강 박홍식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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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한국인의 눈에 비친 일본인론 6 - 이덕무 (李德懋, 1741 ~ 1793)의 일본인론 6 -

 일본의 일상생활

- 음식(飮食)은 맛이 심심한 것이 많다. 기름지고 매운 것과 젓갈과 매 우 짠 맛이 나는 것은 먹지 못하고, 오로지 달고 신 것을 좋아한다. 가축 을 먹지 않고, 풍속이 개나 말을 잡기를 꺼리며, 죽으면 다 땅에 묻는다.

혹 병든 사람을 위하여 약으로 쓸 때에는, 벼랑 위에 소를 세우고 줄을 당겨 쓰러뜨려서 죽으면 고기를 갖다가 쓰고 그 나머지를 묻으므로, 가 축을 기르는 일이 드물다. 밥은 3홉을 넘겨 먹지 않고, 먹을 때에는 젓 가락을 쓴다. 물고기와 채소를 넣어 만드는 국은 반드시 먼저 깨끗이 씻어 기름기나 핏기를 없애어 한두 번만 끓여서 푹 익지 않게 한다. 대 마도 사람만은 탐내어 먹고 싫어하지 않는다.

- 풍속이 목욕을 좋아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머리를 감고, 상투를 짜고 나서 몸을 씻으며, 음식을 먹고서 손을 씻고 자기 전에 몸을 씻는다. 재 계(齋戒)가 있으면 하루에 세 번 몸을 씻으며, 소변보면 손을 씻고 대변 보면 몸을 씻는다. 그러므로 집집이 반드시 욕실(浴室)이 있다.

일본학 특강 박홍식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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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한국인의 눈에 비친 일본인론 7 - 이덕무 (李德懋, 1741 ~ 1793) 그린 일본지도1-

일본학 특강 박홍식 18

(19)

18세기 한국인의 눈에 비친 일본인론 8

- 이덕무 (李德懋, 1741 ~ 1793) 그린 일본지도 2-

일본학 특강 박홍식 19

(20)

18세기 한국인의 눈에 비친 일본인론 9

- 이덕무 (李德懋, 1741 ~ 1793) 그린 일본지도 3-

일본학 특강 박홍식 20

(21)

19세기 서양인이 본 일본인론

에른스트 야코프 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 1832- 1903)

독일의 상인이자 항해가. (《금단의 나라 조선 기행》/ 신복룡 역/집문당)

- 일본은 자긍심을 갖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즉 대외 관 계의 불안정과 피어린 내란의 연속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개항 후 25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모든 분야에 걸쳐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 다. 중국과는 반대로 신중함과 전력을 기울여 문호를 개방하고 서 양 문물을 수용함으로써 서양인들과 우호 관계를 맺은 일본 천황 정권의 공적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 북경과 동경은 견줄 수가 없었다. 한 쪽은 100년 전의 구시대의 환 상에 매달려 일체의 서양 문물을 거부하는 자세로 경직되어 있었 고 다른 한 쪽은 양팔을 활짝 펴고 서양 문물과 윤리 도덕을 환영 하는 적극적인 자세였다. 일본은 체결된 통상 조약들을 성실히 이 행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전국적으로 항구를 개항하여 세계 적인 교역을 가능케 했다.

동아시아와 일본 박홍식 21

(22)

20세기 서양인이 본 일본인론

루스 베네딕트 (Ruth Fulton Benedict, 1887~1948)의 [국화와 칼]

- 베네딕트는 1943년 미국 전시정보국 해외정보부에 부임 하였다. 1944년 미 국무부로부터 일본에 대한 연구를 의뢰 받고, 1946년에 『국화와 칼』을 출간하였다.

- 문화인류학자인 베네딕트는 단 한 번도 일본 방문하지 않고 오로지 학문적 연구의 입장에서 일본인론을 전개하였다.

- [국화와 칼]은 미국과 서양사람들에게 일본인에 대한 이해를 돕는데많은 영향을 주었다.

국화는 평화를 상징하며, 칼은 전쟁을 상징한다.

국화(평화)를 사랑하면서도 칼(전쟁)을 숭상하는 일본인의 이중성을 해부하였다

.

일본학 특강 박홍식 2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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