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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과03: 과학혁명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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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피소드 과학사

세째 주: 과학혁명의 시작

(2)

신대륙 발견-의의

콜럼부스(Christopher Columbus , 1451 ~ 1506) 의 신대륙 발견(?)은 서양인의 관점에서는

역사의 무대를 전 지구로 확장하는 계기가 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또한 서양의 역사가 지중해 중심에서 대서양 중심으로 바뀌는 전환점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콜럼부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서양인들은 자신들이 사는 세계가 더 큰 세계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며,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주어진 것’ 즉 전통에 대한 회의를

품을 수 있었다.

(3)

신대륙 발견-사회, 경제적 조건들

콜럼부스의 신대륙 발견은 여러 가지 사회 · 경제적 조건에 더해서 콜럼부스라는 탁월한 개인이

등장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러면 그 조건들이란 무엇이었을까?

첫째, 스페인의 정치적 안정이다. 이베리아에 거주하던 가톨릭 교도들은 무어족과 5백년에 걸쳐 투쟁한 끝에 드디어 무어 족 무슬림들을 몰아냈다.

이후 여러 소국들이 경쟁하다가, 카스틸랴의 이사벨라 공주와 아라곤의 페르디난드 왕자가

정략결혼을 하여 통합 스페인 왕국이 등장하였다.

(4)

신대륙 발견-사회, 경제적 조건들

둘째, 후추, 비단, 보석, 면직물 등 당시 유럽에서 매우 귀했던 상품들을 아시아로부터 대량으로 값싸게 들여오고자 하는 경제적 동기가 있었다.

유럽인들은 이 상품들을 중국, 인도, 동인도로부터 육로를 통해 수입하거나, 홍해와 페르시아만을

거치는 동지중해 항로를 통해 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경로들은 아랍인들의 독점 때문에 가격이 비쌌고 그나마 16세기에 들어서는 무역의 중심 항구를 점령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간섭과 탄압이 심해져서 그나마 이용하기도 어려워졌다.

(5)

신대륙 발견-사회, 경제적 조건들

셋째, 항해술과 선박 제조 기술의 발달, 그리고 미지의 세계에서 만날 위험에 대처할 수 있는 무기의 개발 등이 콜럼부스 신대륙 발견의

직접적 힘이 되었다.

넷째,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이 아랍 세계를 통해 광범위하게 소개되면서 지구는 둥글다는 고대 천문학자들의 견해가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6)

신대륙 발견-사회, 경제적 영향

콜럼부스의 항해에 이어진 유럽 각국의 신대륙 개발 노력은 항해술을 발달시켜서 유럽이

세계의 전면에 나서게 하였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들어온 은(銀)은 가격혁명의 계기가 되었다 (p.69).

그 결과 식민지 지배에 몰두한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산업개발을 소홀히 해, 주도권을

영국과 프랑스 등 산업혁명을 이룬 국가들에게 넘겨주게 됐다. 또 페루에서 들어온 감자는

유럽의 급격한 인구 증가를 뒷받침하는

식량자원이 됐고, 담배는 인류 최대의 기호품이 되었다.

(7)

신대륙 발견-학문적 영향

그리고 무엇보다 예전에는 누구도 들은 적 없는 거대한 대륙들과 대서양보다 훨씬 넓은

태평양이 있다는 사실은 당대 지식인들에게

지적 자극이 되었다. 15세기 당시에는 신사고를 하는 유럽인이라도 어려운 문제에 있어서는

고전적 권위의 편에 서기 쉬웠다.

그러나 지리상 발견의 결과로 16, 17세기에 와서는 권위에 대한 존경이 줄어들었다. 신대륙 발견 이후 유럽인들은 ‘주어진 것’에 대해

회의하게 되었으며, 지식인들의 사고의 문은 크게 넓어졌다.

(8)

지동설-코페르니쿠스

르네상스 시대에 최초로 지동설을 주장했던 이들은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 코페르니쿠스(Copernicus, 1473~1543),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 등이다.

그는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운동한다는 --- 지동설을 주장하여 교회와 마찰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던지, 그 내용을 담은 『천구들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 (1543)는 그가 죽기 직전에야 출판되었다.

(9)

지동설-천동설의 문제들

당시 주류 우주론은 천동설이었다. 이 이론을 먼저 주장했던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였고,

나중에 프톨레마이오스는 완전한 원운동을 하지 않는 것처럼 관측되는 천체 운동을 오직

원운동으로만 설명하기 위해 무수히 많은 원들을 도입했다.

이러한 설명을 코페니쿠스는 조화롭지

못하다고 느꼈을 뿐 아니라 완벽한 신이 창조한 우주가 그처럼 복잡하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균형과 아름다움을 갖춘 체계적 구조를 찾으려 했다.

(10)

지동설-이론적 단순성

그는 천체들이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고 하면 우주론이 단순해짐을 깨달았다. 또 행성들이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고 생각하면 거의 원형으로 운동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도 발견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 역시 아리스토텔레스를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하여, 천체는 완전한

원운동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역시

프톨레마이오스처럼 주전원을 끌어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가 설명한 우주 역시 조화와 단순성을 (부분적으로나마) 잃어버리게 되었다.

(11)

새로운 해부학-그 이전

베살리우스(Andreas Vesalius, 1514-64)는 근대 해부학의 시조다. 당시 생리학은 고대 그리스인인 갈레노스(Claudius Galenus, 2세기 경)의 이론이 주류였다. 그는 간, 심장, 뇌를 인체의 세 주요 기관들로 여겼다. 인체의 주요한 기능을

소화, 호흡, 신경으로 보고, 이 세 가지를 영(soul)이라는 것으로 설명했다. 음식을 섭취하는 소화는 ‘자연의 영,’

생명력, 열, 기운을 담당하는 호흡은 ‘생명의 영,’ 정신을 담당하는 신경은 ‘동물의 영’이라 설명했다. 이 체계들은 서로 독립적이라고 했다.

(12)

새로운 해부학-베살리우스의 혁신

갈레노스의 인체이론은 나름대로 합리적 이었지만 피의 움직임을 우리가 알고 있는 순환 이론, 즉 온 몸의 피는

심장을 중심으로 순환 한다는 기본적 사실을 포함하지 않고 있었다.

16세기 의학자들은 해부하는 일을 천하게 여겼다.

따라서 그들의 인체 지식은 갈레노스 이론 정도였고 인체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많았다. 베살리우스는 직접

인체를 해부하며 갈레노스의 오류를 밝혔다. 또 1537년 파도바 대학 교수가 되면서 해부학 혁신을 위해 노력했다.

(13)

새로운 해부학-『인체 해부에 대하여』

예를 들면 (i) 우심실과 좌심실 사이에는 구멍이 존재하지 않음을 밝혔다. 또 (ii) 갈레노스에 의하면 심장에서 폐로

연결되는 폐동맥은 영양분만을 제공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너무 굵었다. (iii) 폐정맥은 폐에서 받아들인 공기를

심장으로 전달해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실제 폐정맥에는 공기 대신 피가 가득 차 있었다. (p. 77 참조.)

인체에 대해 그가 밝혀낸 오류와 새로운 지식을 모은

『인체 해부에 대하여』는 1543년 7권으로 출판됐고, 의학 근대화의 이정표가 됐다.

(14)

새로운 해부학-후대에 끼친 영향

베살리우스는 갈레노스 이론의 여러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해부에 의한 경험적 지식을 강조하여 새 의학 발달을 도왔다.

당시 천하게 보던 해부학을 중요하게 여겨 직접 해부를 시도한 경험은 하비 (William

Harvey, 1578~1657)의 보다 완전한 혈액 순환이론의 밑바탕이 되었다.

(15)

새로운 달력-시간의 단위들

달력이란 1 년을 열두 달로 나누고, 각 달을 다시 30일 내외로 나누어, 각 날들의 날짜를 정해놓은 것을 말한다.

달력의 날짜를 정할 때 기초가 되는 시간의 개념들은

천문관측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계속되는 관측의 결과로 시·분·초가 정해졌고, 이것은 지구가 1회 자전하는 시간, 즉 하루를 구성하는 시간단위들이 되었다. 그러나 하루는

지구의 1 회전 자전 주기보다는 태양과 지구가 1회 마주보는 주기로 정하는 것이 더 유용하다. 이것이 평균태양일(mean solar day)이다.

(16)

새로운 달력-태양력의 오차

이렇게 만들어진 시간의 개념은 그 편리함으로 오늘날까지 계속 사용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별들의 운행에 따라 정하는 것이 훨씬 정확하다.

이것은 춘분과 추분으로 확인할 수가 있다.

춘분과 추분은 낮밤의 길이가 같은 날들인데

3월과 9월에 하루씩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실제 춘분과 추분이 달력에 정해진 그 날들과

맞지 않게 된다. 이를 시정하기 위해 일정기간이 지나면 윤년을 두거나, 아예 새 역법(歷法)을

만들기도 하였다.

(17)

새로운 달력-이집트의 달력

최초의 역법은 고대 문명의 발상지였던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에서 만들어 졌다. 이집트 농경문화의 기초는 나일강의 범람이었고,

따라서 그 시기를 정확히 아는 것은 파종시기, 수확시기를 잡기 위해 매우 중요했다. B.C.

4200년 이집트에서는 이미 1년을 12개월, 1개월을 30일, 부가일 5일을 두어 365일을 1년으로 하는 이집트력이 사용되었다.

(18)

새로운 달력-율리우스력

율리우스력은 1년의 평균 길이를 365.25 일 (365 일 6시간)로 계산한 것으로, 6시간을 달력에 집어넣을 수가 없어서 4년을 한

그룹으로 하여 3년 동안은 1년의 길이를 365 일인 평년으로 하고 , 마지막 4년째에는

366일로 정하여 윤년이라 불렀다. 그리고 율리우스 황제는 새 달력에서도 춘분은 이집트와 마찬가지로 3월 25일로 정했다.

(19)

새로운 달력-율리우스력의 오차

그후 4세기 초엽, 천문학자들은 율리우스력의 1 년인 365.25 일 (365 일 6시간)이 실제 1년의

길이보다 약 11분 더 길다는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1년에 11분이라면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율리우스력이 제정되고 한참이 지난 325년 당시에는 실제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춘분은 3월 21일었는데,

달력에서의 춘분은 3월 25일로 4일이나 차이가 났다.

(20)

새로운 달력-그레고리력

율리우스력의 오차는 점점 커져서, 16세기 후반에 실제의 춘분은 3월 11일이었는데,

이것은 달력 상 춘분인 3월 21일보다 10일이나 지난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는 새 역법을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우리가

요즘 사용하는 그레고리력(Gregorian Calendar) 이다.

교황은 1582년 우선 천문학자 클라비우스의 조언에 따라 그해 달력에서 10일의 분량을 깎아 10월 5일을 15일로 고치라는 회칙을 내렸다.

(21)

새로운 달력-그레고리력

또 다시 보정하지 않아도 되게끔 400년마다 3회는 윤년을 두지 않아 율리우스력보다 400년에 3일씩 줄이기로 하였다.

구체적으로, 다음 방법을 썼다:

(i) 4년마다 윤년을 두되, 다음 예외가 있다. (ii) 100으로

나누어지는 해는 평년이되, 다음 예외가 있다. (iii) 400으로 나누어지는 해는 윤년이다.

예를 들어, (ii)에 따라 1700년, 1800년, 1900년은

평년이었지만, (iii)에 따라, 1600년, 2000년은 윤년이었다.

(22)

현미경의 발명-얀센

현미경은 16세기 후반에 발명되어, 생물학의

수준을 높이는데 기여했다. 현미경은, 망원경과 마찬가지로 사물을 크게 보이게 하는 여러 개의 렌즈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망원경과는 달리

멀리 보이는 사물을 크게 보여주는 게 아니라, 아주 가까이 있는 물체를 확대하도록 되어 있다.

현미경은 1590년 암스테르담의 렌즈 연마공인 얀센에 의해서 발명되었다.

(23)

현미경의 발명-훅

현미경을 이용해 처음으로 생물체를 관찰한

사람은 영국의 훅(Robert Hooke , 1635 ~ 1703) 이었다. 그는 자신이 직접 고안한

복합현미경으로 살아있거나 죽은 생물을 관찰한 결과를 기술하고 그림을 그려서 『현미경 관찰

(Micrographia)』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1665).

또한 코르크를 관찰하여 식물의 세포벽을 최초로 발견했다.

(24)

현미경의 발명-레벤후크

레벤후크(Antonie van Leeuwenhoek ,

1632~1723)는 100여 개의 현미경을 만들어 내었다. 그는 자신이 직접 갈아 만든 단일

렌즈로 된 단안(單眼)현미경을 사용하였다.

이 현미경은 표본을 고정하고 초점을 맞추는 뾰족한 나사가 달려 있고, 렌즈가 설치된 평평한 놋쇠판으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배율이 매우

낮은 돋보기 수준의 현미경이었지만,

원생동물과 박테리아를 발견하는 등 여러 생물을 최초로 관찰하게 해줬다.

(25)

현미경의 발명-말피기

말피기는 현미경 해부학의 창시자로서,

개구리의 모세혈관을 관찰하였는데 이것은 하비의 혈액순환론을 완성시키게 해줬고,

콩팥의 말피기소체, 혀의 미뢰를 발견하는 등, 현미경을 통해서 생물학의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

그는 이 관측결과들을 『허파에 관하여』라는 책을 통해 발표하였다 (1661).

(26)

온도계의 등장-온도의 정의

물체가 열을 받아 뜨거워지거나 열을 빼앗겨 차가워졌을 때, 이로 말미암아 생겨난 차이를 과학적으로 정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근대 이후 실험과학이 강조되면서 온도가 실험 결과에 영향을 준다는것을 알게 되었고, 정확한 온도측정은 실험의 중요한 과정이 되었다.

온도란 물체의 차고 뜨거운 정도를 수량으로 나타낸 것으로 정의한다. (엄밀하게 말하면,

오늘날 어떤 물체의 온도는 그것이 포함하는 분자들의 평균 운동에너지로 정의된다.)

(27)

온도계의 등장-갈릴레이와 그 제자들

갈릴레이는 온도의 높낮이에 따라 기체의

부피가 변하는 것을 원리로 최초의 온도계를 만들었다 (1593). 그 후 갈릴레이의 제자들이 주도적으로 모인 ‘실험 아카데미 (Accademia del Cimento)’회원들에 의해 다양한 온도계가 만들어졌다. 아카데미 회원들은 유체를 이용한 온도계를 다양하고 체계적으로 사용했다. 이는 유체의 열팽창이 온도변화에 따라 일정함을

이용한 것이다. 특히 알코올은 온도 변화에 따른 부피변화가 커서 온도계에 쓰기에 적당하였다.

(28)

온도계의 등장-수은온도계

파렌하이트(Gabriel D. Fahrenheit , 1686 -

1736) 는 처음으로 수은 온도계를 만들었는데, 수은은 열팽창이 균일하고 -38.9°C 에서부터

357.7°C 까지의 넓은 영역에서 액체로 존재하기 때문에 온도계에 쓰기에 매우 적합하다.

.

(29)

온도계의 등장-화씨, 섭씨, 절대온도

화씨온도는 파렌하이트의 제안을 개량한 것으로 얼음의 녹는 점을 32°F, 물의 끓는점을 212°F로 정해 180등분한 것이다. 섭씨온도는 셀시우스 (Anders Celsius, 1701-44)의 제안 (1742)을 개량한 것으로 1기압에서 얼음이 녹는 점을 0°C, 물이 끓는 점을 100°C로 정해 백등분한 것이다.

절대온도는 톰슨(William Thomson, 1824-1907) 이 도입 (1848)한 것으로, 분자 운동에너지가 0인 상태를 0°K, 물의 삼중점(액체도, 고체도, 기체도 될 수 있는 상태)의 온도를 273.16°K로 정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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