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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世紀初 高麗의 女眞征伐과 對外關係의 變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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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碩士學位論文

12世紀初 高麗의 女眞征伐과 對外關係의 變化

國民大學校 大學院

國 史 學 科

姜 恩 淨

2001

(2)

12世紀初 高麗의 女眞征伐과 對外關係의 變化

指導敎授 朴 宗 基

이 論文을 碩士學位 請求 論文으로 제출함

2001年 12月 日

國民大學校 大學院

國 史 學 科

姜 恩 淨

2001

(3)

姜恩淨의

碩士學位 請求論文을 認准함

2001年 12月 日

審査委員長 金 杜 珍 ㊞ 審 査 委 員 朴 宗 基 ㊞ 審 査 委 員 張 錫 興 ㊞

國民大學校 大學院

(4)

目 次

論文槪要 ………ⅰ

1. 머 리 말 ……… 1

2. 11世紀 중엽 이후 동북아시아 정세의 변화 ……… 5

3. 高麗의 女眞征伐과 對外關係의 展開 ……… 14

1) 肅宗·睿宗代初 政局運營과 女眞征伐 ……… 14

2) 女眞征伐期 高麗의 對外關係 ……… 21

4. 女眞征伐 以後 對外政策의 變化 ……… 31

5. 맺 음 말 ……… 40

參考文獻 ……… 42

Abstract ……… 50

(5)

[論文槪要]

12世紀初 高麗의 女眞征伐과 對外關係의 變化

姜 恩 淨

본고에서는 고려의 여진정벌을 전후한 시기 고려와 주변국간의 관계와 고려 대외 정책의 변화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11세기 중엽 이후로 동북아의 양대 축이었던 遼·宋이 동요하고 女眞이 급속도로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았던 고려는 이들과의 관 계에 적극 대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이 글은 12세기 초 고려가 여진정벌을 단행하게 된 배경으로서의 文宗代 이후 고려 대외정책과 여진정벌이 실패한 이후의 고려 대외정책의 변화를 당시 동북아정세와의 상관관계를 통해 이해하고자 하였다.

당시 宋은 神宗代 王安石을 중심으로 新法을 실시함으로써 富國强兵을 꾀하였고, 동시에 遼를 제압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聯麗制遼策’을 펴 나갔다. 북방의 遼 또한 고려가 宋·女眞과의 관계를 긴밀히 하고, 또 여진의 세력이 점차 강성해지는 것에 위협을 느끼고 있던 상황에서 고려와의 관계를 안정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다. 때문 에 地界劃定, 榷場의 설치와 같은 문제를 일으킴으로써 고려를 견제하는 한편, 고려 의 歲貢을 면제해 주거나 대량의 下賜品을 보내는 등 위협과 타협의 양면작전을 구 사하였다. 이러한 宋·遼의 처지를 간파했던 고려의 文宗은 內治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송과의 통교를 재개하고, 여진에 대해서는 회유와 강압책을 병행 하면서 기존의 遼 一國과의 조공책봉관계의 틀을 벗어나 遼·宋·女眞과 다원적인 외교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宣宗 5년 고려가 遼와의 榷場문제를 매듭지으면서 일단락되 었고, 고려는 이제 遼와의 관계를 긴밀히 하는데 주력하였다. 肅宗 즉위초부터 요에 대한 사신파견에 고려가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다는 것과 使行횟수를 크게 증가시킨 것을 제외하고도, 양국관계가 긴밀해졌음은 여러 측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려는 요와의 관계를 공고히 함으로써 북방에서의 고민거리였던 여진을 장차 정벌하는데 요의 동의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선종대 對遼우위정책으로의 전환은 이러한 목적 이 있었던 것이다.

한편 숙종은 즉위 이후로 문벌귀족의 발호를 막고 미약해진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 여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는 것을 일차적인 목표로 삼았다. 이를 위해 숙종의 측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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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을 중심으로 南京建設, 錢幣流通策, 別武班의 설치 등 諸政策이 시행되었는데, 이 것들 대부분은 여진에 대한 2차 정벌이 단행되었던 睿宗代 초반까지 계속되었다. 그 러나 이러한 정책결정 과정에서 대부분의 문벌귀족은 소외되어 불만이 커져갔고 밖 으로는 여진세력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강성해지고 있음을 의식하게 되었다. 고려 는 이러한 대내외적 위기 속에서 고려는 숙종 9년부터 예종 4년까지 6년 여 간에 걸 친 여진정벌을 단행하였다.

고려의 여진정벌은 문종대 이후로 宋·遼·女眞과의 관계를 재설정하면서 동북아 시아에서 외교적 우위를 획득한 위에 영토실리를 추구하려 했던 고려의 의지를 적극 반영한 것이었다. 또 국왕권 우위의 정치를 실현시키려는 다양한 모색이 계속되었던 국내정치의 연장선상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도 있겠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요와 송이 모두 복잡한 국내정세로 인하여 고려나 상대국에 대한 관심이 덜할 수밖에 없 었던 상황에서, 여진의 강성함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던 여·요간의 필요에 의해 단 행된 것이었다. 때문에 이 시기 麗·遼관계는 더욱 긴밀해졌고, 상대적으로 宋에 대 해서는 소극적이었다. 그러면서도 고려는 송·여진에 계속해서 사신을 파견하는 등 각 국과의 안정된 관계유지에 힘썼다.

그러나 예종 4년 여진정벌이 실패하자, 숙종·예종대 초 개혁을 주도하던 세력이 몰락하면서 개혁의도는 방향을 잃게 되었다. 때문에 이를 대신하여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새로운 세력과 정국운영론이 필요하게 되었고, 遼의 쇠퇴와 金의 건 국으로 인한 대외관계에서의 일대 전환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이에 예종은 송과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선진문물을 대대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이를 계기로 유교이념에 입각한 禮制정비를 본격화하는 방향으로 정국을 운영하고자 했다. 한편 송은 새로이 흥기하고 있는 여진과 연합하여 遼를 견제하고자 하는 외교적 목표를 위해 고려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러한 상호 이해관계가 합치되면서 양국 사이에 활 발한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었다. 이로써 선종대 이후로 예종대 초 반까지 요와의 관계를 긴밀히 하면서 상대적으로 宋과는 소원한 관계를 맺어 왔던 고려는, 예종대 중반 이후로는 親宋정책으로 대외정책을 전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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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11세기 중엽이후 12세기 전반까지 고려사회는 큰 전환기를 맞았다. 文宗代 이후로 는 內治에 힘을 기울여 문물제도를 크게 정비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방·외교에도 힘써 遼와 계속해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송과의 통교를 재개하고 여진을 정 벌하는 등 다양한 외교정책을 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李資義·李資謙의 亂 이 연달아 일어났으며 民의 유망을 비롯한 지배체제의 동요와 이에 대한 대응책 마 련에 부심하던 때이기도 하다. 대외적으로도 이 시기에는 당시 동북아의 양대 축을 이루었던 遼·宋 양국이 모두 불안한 정국운영을 하게 되면서, 동북아 주도권 다툼 을 위한 각 국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이러한 상황은 여진족이 세력을 결집하여 북 방의 새로운 위협요소로 대두하는 배경이 되었다. 여진족의 대두는 당시 동북아 질 서를 재편하는데 큰 변수로 작용하였고, 고려는 대내외적인 위기를 맞아 적극적인 정국운영을 필요로 했다.

때문에 11세기 중엽 이후 고려 대외관계의 시기적인 중요성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주목받았다. 日帝時代 植民史學者들은 他律性論에 입각하여 잦은 전란과 외침으로 일관된 연구를 하였고, 반면에 대부분의 民族主義 史學者들은 徐熙·姜邯贊·尹瓘 등의 戰勝을 별개의 장과 절로 서술하여 고려전기의 대외관계사가 승리의 역사임을 강조하였다.1) 그 가운데서도 文一平은 고려의 군주 중 睿宗이 宋·遼·金의 대립 속 에서 中立을 지킴으로써 중국 대륙으로부터의 정치적 풍파를 면하였을 뿐만 아니라 요·금의 衰强을 이용하여 압록강 유역의 抱州와 來遠 2주를 얻었다고 하며, 엄정한 중립외교를 편 예종의 국제적 혜안을 칭송하였다.2)

그러나 이후로 고려중기 대외관계 연구의 대부분은 문종대 재개된 對宋外交와 肅 宗·睿宗代 초반 고려의 女眞征伐에 비중을 두었다. 대송관계연구에 따르면, 契丹과 宋이 대치하는 정세 속에서 당시 고려와 송은 국교재개를 통해 중복적인 외교관계를

1) 이러한 연구 결과, 일제시대 이후로 고려시대 대외관계 연구의 기본 시각도 대부분이 이민족 의 침입과 이에 대한 고려인의 항쟁이라는 측면에서 이루어져 왔다(朴宗基, 1994,「고려시대의 대 외관계」『한국사』6, 한길사, 223∼226쪽).

2) 文一平, 1982,「朝鮮人과 國際眼」『湖岩全集』제1권, 309∼313쪽

일제시대의 고려사 서술에 대해서는 朴杰淳이 식민사가들과 민족주의 사가들의 연구성과를 상 세히 언급·비교하고 있다. 그는 문일평의 고려 대외관계사 인식에 처음으로 주목하기도 했다 (『韓國近代史學史硏究』, 國學資料院,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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펴면서 경제적·문화적으로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고 적극적인 접촉을 하였다고 한 다. 그 결과, 고려의 對宋관계에 대해서는 크게 3가지 견해가 제시되었다. 첫째, 송의 선진문화 수입과 경제적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3)과 둘째, 초기에는 정치·군사 적인 목적이 컸으나 점차 문화·경제적인 것으로 바뀌어갔다는 것4), 세 번째로 고려 도 송과 마찬가지로 북방의 遼를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5)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면서도 송의 對高麗관계에 대해서는 군사적·외교적으로 요·금 의 압박을 견제할 필요에서, 송이 고려와의 외교를 주도적으로 개선하려 했다는 데 에 같은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들 연구는 麗宋간의 전반적인 대외교류 양상 과 의미부여에 목적을 둔 것이 대부분으로, 양국 간에 있었을 사건이나 상대국에 대 한 인식 등 다양한 측면에서의 주제설정과 고찰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또 고려의 여진정벌에 대한 연구에서는 尹瓘 개인의 업적이나 여진정벌 이후 설치 된 9城의 위치,6) 別武班7)을 다룬 연구가 주를 이루었다. 이로써 고려가 여진을 정벌

3) 金庠基, 1937,「麗宋貿易小考」『震檀學報』7;『東方文化交流史論攷』, 乙酉文化社, 1948 ---, 1959,「海商의 活動과 文物의 交流」『국사상의 제문제』4, 국사편찬위원회 ---, 1961,『高麗時代史』, 東國文化社

李丙燾, 1961,『韓國史』中世篇, 震檀學會 4) 全海宗, 1977,「高麗와 宋과의 關係」『東洋學』7

---, 1981,「對宋外交의 性格」『韓國史』7, 국사편찬위원회 ---, 1989,「高麗와 宋과의 交流」『國史館論叢』8, 국사편찬위원회

朴龍雲, 1995·1996,「高麗·宋 交聘의 목적과 使節에 대한 考察」『韓國學報』81, 82 5) 鄭起燉·金容完, 1985,「麗·宋 關係史 硏究-그의 性格을 中心으로」『論文集』12-1, 충남대

인문과학연구소. 이 외에도 麗·宋 양국의 대외정책 변화 등을 살핀 연구성과에는 다음의 것 이 있다.

森克己, 1956,「日本·高麗來航の宋商人」『朝鮮學報』9 森克己, 1959,「日·宋と高麗との私獻貿易」『朝鮮學報』14

丸龜金作, 1960·1961,「高麗と宋との通交問題(1)(2)」『朝鮮學報』17·18 徐炳國, 1973,「高麗·宋·遼의 三角貿易考」『白山學報』15

羅鍾宇, 1984,「高麗時代의 對宋關係」『圓光史學』3 6) 津田左右吉, 1913,「尹瓘經略地域考」『朝鮮歷史地理』Ⅱ

池內宏, 1922,「完顔氏の曷懶甸經略と尹瓘の九城の役」『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9卷 稻葉岩吉, 1931,「高麗尹瓘九城考」『史林』16-1

尹武炳, 1958,「길주성과 공험진」『歷史學報』10 金九鎭, 1976,「公嶮鎭과 先春嶺碑」『白山學報』21 方東仁, 1976,「尹瓘九城再考」『백산학보』21

金九鎭, 1977,「尹瓘九城의 範圍와 朝鮮六鎭의 開拓-女眞勢力 關係를 中心으로-」『史叢』21·22 金光洙, 1977,「고려전기 대여진교섭과 북방개척문제」『東洋學』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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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게 된 이유는 크게, 문벌귀족세력을 견제하고 국왕 중심으로 강력한 통치질서를 확립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政治的 측면8)과 군사행위에 이어 民戶의 徙民을 통한 농지개척의 동기를 내포한 것이라는 經濟的 측면9)에서 이해되었다. 그 러나 여진정벌이라고 하는 사실에만 지나치게 주목하여 이것이 일어나게 된 배경이 라든가, 그 결과로서 고려의 대내외적 측면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연구는 소홀하였다.

사실, 10∼12세기 고려의 대외관계를 高麗·宋·遼·金과의 다원적인 관계로 이 해해야 한다는 것은 일찍부터 지적되어 왔다.10) 그러나 기존의 연구에서는 고려가 여진정벌을 단행한 전후 시기 대외관계의 대상을 宋이나 女眞, 一國과의 관계로만 이해했던 것이다. 때문에 이 시기 동북아 국제질서를 제대로 파악한 위에서 여진정 벌이 단행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정세에 대한 계기적 이해와, 고려가 취한 대외정책 상의 변화과정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이런 점에서 비록 거란을 주체로 하였으나, 당시의 동북아 정세라는 틀 안에서 고려 대외관계를 다룬 金在滿, 金渭顯 의 연구는 주목된다. 김재만은 麗·遼 각 국의 사료제시에 충실하여 교섭사로서의 고려 대외관계의 전반적인 이해를 돕지만, 대외정책을 결정하는 데 있어 정치세력간 갈등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한편 김위현은 宋·西夏·高麗·女眞의 관계를 다각 도로 살펴 동북아 정세를 거시적으로 보려고 한 것과 麗·遼 관계에 있어서 ‘여진문 제’의 중요성을 인식한 점에서 기존의 연구와는 차별성을 갖는다. 그러나 연구대상으 로서의 각 국간 범위가 넓고 시기적인 범위 또한 넓어 내용이 상대적으로 간략하다 는 한계가 있다.11)

여진정벌의 단행과 종결은 물론, 일차적으로는 고려와 여진과의 관계에 기인한다.

方東仁, 1980,「高麗의 東北地方境域에 關한 硏究-특히 尹瓘의 九城設置 範圍를 중심으로-」

『嶺東文化』창간호

7) 李基白, 1968,「高麗別武班考」『金載元博士回甲紀念論叢』

金塘澤, 1983,「別武班의 設置와 軍制의 變化」『高麗軍制史』

8) 朴宗基, 1994,「고려시대의 대외관계」『한국사』6, 한길사

9) 金光洙, 1977,「高麗前期 對女眞交涉과 北方開拓問題」『東洋學』7, 11∼13쪽 徐聖鎬, 1993,「肅宗代 政局의 推移와 政治勢力」『역사와 현실』9, 35쪽 10) 徐炳國, 1973,「高麗·宋·遼의 三角貿易考」『白山學報』15

金庠基, 1974,『東方史論叢』, 서울대 출판부

朴宗基, 1993,「高麗中期 對外政策의 變化에 대하여-宣宗代를 중심으로-」『한국학논총』16 11) 金渭顯, 1981,『契丹的東北政策-契丹與高麗女眞關係之硏究』, 華世出版社, 臺北

金在滿, 1999,『契丹·高麗關係史硏究』, 國學資料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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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그 결정과정에는 당시의 국내외 정세, 즉 고려 내부에서의 諸정치세력과 국왕의 정치적 입장이 달랐을 것이고, 遼·宋과의 이해관계도 얽혀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연구는 이러한 내외부적 요인의 상관관계에 주목하지 못했던 것 이다. 최근 鄭修芽가 北宋代에 전개되는 新法의 실시 등과 관련하여 고려의 肅宗·

睿宗·仁宗代 정치사를 이해한 것이나, 북송대의 사상적 흐름과 교호함으로써 고려 자체 내의 독자적인 사상의 발전이 전개되었다고 하는 등 양국관계의 이해의 폭을 넓힌 것은12), 이 시기 정치개혁과 동향을 새로운 각도에서 보려는 연구방법의 전환 이라는 측면에서 중요시된다.

주지하듯이 고려는 숙종·예종대 초반 대내적으로는 ‘新法’이라 불리울만한 개혁 을 추진했고, 대외적으로는 遼·宋과의 관계를 안정시킨 상황에서 여진정벌을 단행 하였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고려가 여진정벌을 단행한 전후 시기의 국내정세와 당 시 宋·遼·女眞관계의 추이를 함께 살펴, 대내외의 변동기적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고려가 취했던 정책을 이해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11세기 중엽 이후 宋·遼가 동요하고 女眞이 흥기하면서, 동북아 정세의 변화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된 고려가 文宗代 이후 宣宗代까지 이들 각 국 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다음으로 肅宗의 즉위와 함께 왕권 을 강화시키기 위한 제 개혁정책이 실시되었던 국내상황을 서술하고, 여진정벌이 단 행되었던 시기 동북아 각 국과의 외교양상을 정리하여 고려의 여진정벌이 단행될 수 있었던 국내정세와 당시 동북아 정세와의 상관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여진정벌 이후의 정세변화를 적극 이용한 고려 대외정책의 전환과 그것이 갖는 의의 에 대해 고찰해 보고자 한다. 무엇보다 이 글에서는 기존연구에서 국가간의 상호교 섭 내용이나 고려정세에만 주목해왔던 것을 지양하고, 송·요·여진에 대해서도 각 국의 국내사정을 서술함으로써 동북아 정세의 변동이라고 하는 당시의 상황을 이해 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했다. 여진정벌의 이해는 당시 동북아 대외정세에 대한 폭넓 은 이해 위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12) 鄭修芽, 1988,「尹瓘勢力의 形成」『辰檀學報』66

---, 1992,「高麗中期 改革政策과 그 思想的 背景」『朴永錫華甲紀念論叢』

---, 1995,「高麗中期 對宋外交의 再開와 그 意義」『國史館論叢』61 ---, 1999,『高麗中期 改革政治와 北宋新法의 受容』, 서강대 박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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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1世紀 중엽 이후 동북아시아 정세의 변화

文宗(1046∼1083)은 왕권의 안정과 체제정비를 목적으로 관제를 개편하며 백관의 班次와 祿科를 제정하고 兩班田柴科를 更定하는 등 여러 시책을 단행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집권적 지배체제의 확립을 의미하는 정치·경제의 여러 제도와 문물이 정 비되었다.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실시된 이러한 일련의 작업은 결과적으로 왕권을 강화시키고 국력을 신장시킴으로써 고려의 대외적 위상을 높이는데도 일조하였다.

李齊賢은 문종에 대한 史贊을 통해 당시 고려의 대외관계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宋朝는 매양 왕을 칭찬하는 글월을 보내왔고 遼氏는 매년 왕의 생신을 축하하는 의례를 치렀으며 동쪽에 있는 倭國에서 바다를 건너 보배를 바쳤고 북쪽에 있는 野人들도 관문에 들어와서 토지와 주택을 받았다.13)

이제현은 문종대 대내적인 안정을 기초로 대외정책에 있어서도 외교적 마찰 없이 다원적인 국제관계를 유지했던 사실을 나름대로 긍정적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이처 럼 문종대 고려가 적극적이면서도 자신감에 찬 대외정책을 펼 수 있었던 요인을 생 각해보면 국내 정국의 안정은 물론이요, 무엇보다도 당시 동북아정세의 동요 기미를 고려가 제대로 파악하고 그것을 자국에 유리하게 이용한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11세기 중엽 이후 宋·遼·完顔部 女眞 각 국의 국내사정을 간략히 살 펴보도록 하겠다. 송은 국초부터 동북으로 遼의 강성과 서쪽으로 西夏의 대두로 인 하여 적지 않은 위협을 받았는데, 이들과의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기 위해 요·서하 양국에 대해 매년 막대한 歲幣를 보내는 방법을 택했다.14) 그 결과 仁宗·英宗代 무 력약화와 재정파탄은 극에 달했고, 神宗代 王安石이 개혁을 추진하는 원인이 되었다.

王安石은 對外經略을 위한 내정개혁, 즉 新法을 실시함으로써 송의 富國强兵을 꾀하 였는데,15) 개혁이 시행되었던 초기에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에 힘입어 송은

13)『高麗史』卷9, 文宗 37年 李齊賢贊. “宋朝每錫褒賞之命 遼氏歲講慶壽之禮 東倭浮海而獻琛 北貊扣關而受廛”

14) 1004년의 전연지맹의 결과 송은 매년 銀 10만냥과 絹 20만 필을 ‘歲幣’의 명목으로 遼에 보냈 다. 이후 1044년에는 西夏와의 和議 결과 매년 비단 13만필, 은 5만냥, 차 2만근을 서하에 지 급하기로 했고, 화의를 주선해준 요나라에 다시 비단 10만필, 은 10만냥의 세폐를 추가하기로 했다. 송은 自國의 평화를 유지시켜 주는 수단이자 무역을 유지시켜 주는 수단으로 歲贈銀을 遼·西夏에 준 것이다(朴志焄, 1990,「北宋代 對外經濟關係와 華夷觀」『梨花史學硏究』19, 37쪽, 梨花史學硏究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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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遼를 제압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聯麗制遼策’을 펴 나갔다.16) 고려와의 통 교가 재개된 지 몇 년 후 詔立高麗交易法 을 만들어17) 고려와의 관계를 재정립한 것은 ‘聯麗策’에 적극적이었던 송의 입장을 잘 나타낸다. 그러나 哲宗의 즉위 이후로 는 집권세력이 바뀔 때마다 정책의 기조가 번복되는 과정이 되풀이되면서 新法黨·

舊法黨간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었다.

한편 1004년 송과의 澶淵之盟 이후로 동북아의 실질적 강자로서 등장한 遼는, 道 宗의 즉위(1055)와 동시에 耶律重元이 반역을 도모하였고18) 太康年間(1075∼1084)에 는 耶律乙辛에 의해 황후와 황태자가 죽임을 당하는 등19) 통치집단의 반란과 분열이 계속되면서 혼란이 야기되었다. 때문에 주변국에 대한 위엄은 상대적으로 약화될 수 밖에 없었다.

遼의 관심이 대내적인 문제에 집중되자, 요의 寧江州와 隣接하고 있던 完顔部는 점차 요의 영향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완안부의 烏古迺(뒤에 景祖라 追尊됨)는 요 로부터 生女直部族節度使의 職을 받고 太師의 칭호20)를 누렸는데, 요의 요구에 부응

15) 李範鶴은 기존의 연구에서 社會經濟史家들이 新法을 內政改革을 위한 제도의 창안이나 사회계 층간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만 다루어 대외정책이 차지하는 비중이 지나치게 경시 되었다고 지적하면서, 對外經略을 위한 내정개혁으로서의 신법에 주목하고 있다(「王安石(102 1∼1086)의 對外經略策과 新法」『高柄翊先生回甲紀念史學論叢 歷史와 人間의 對應』, 1984, 한울).

16) ‘聯麗制遼策’은 이미 1044년에 富弼이 제출한 ‘河北守禦十二策’ 가운데서 고려와 연합하여 요를 견제함이 외교상의 주요한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지적되었다. 그는 고려가 거란을 섬기고 있 지만, 거란이 고려를 두려워한다고 하며 “앞으로는 고려를 잘 대우하여 그 경사(수도)에 세조 하는 것을 허락하고 앞에서 차등 있고 후하게 물품을 하사하여 사신의 마음을 돌리십시오. 그 명을 내리는 글을 우수하게 하여, 그 뜻에 기쁘게 하십시오. 다음 번에 다시 거란이 순리를 범 하려 하면 흉악한 뜻을 말하여, 우리가 사람을 보내어 고려로 하여금 그것을 치게 하십시오”

하였다(蔣非非, 王小甫 等著, 1998,『中韓關係史』古代卷, 北京, 社會科學文獻出版社, 174∼175 쪽).

17)『宋史』卷15, 神宗紀2 元豊 2年(1079) 春正月 丙子條

18) 황태자의 숙부인 耶律重元과 그 아들 涅魯古가 반역을 도모하여 누차 궁궐을 침범하다 패하여 大漠으로 도망갔다가 자결하였다(『遼史』卷22, 道宗2 淸寧 9年 7月條).

19) 大康元年, 태자의 생모인 황후 蕭觀音과 令官이 간통했다는 것으로, 11월에 황후는 사사되었고 令人 趙惟一, 高長命을 죽이고 그 家屬을 적몰하였다(『遼史』卷23, 道宗4 太康 元年 11月 辛 酉條). 태강3년(1077)에는 황태자가 황제가 되려 했다고 무고하여 태자를 몰래 죽였는데, 耶律 乙辛을 비롯하여 그의 黨人인 張孝傑, 耶律燕哥, 蕭十三 등에 의해 두 사건이 심의되고 평정되 었고, 이 과정에서 忠良한 선비들을 배척하여 쫓아내거나 죄에 연루시켜 죽였기 때문에 이들 은 더욱 뜻을 이룰 수 있었다(같은 책, 同王 太康 3年 4月∼11月條).

20)『金史』卷1, 世紀1“(景祖)…以爲生女直部族節度使 遼人 呼節度使爲太師 金人稱都太師者 自此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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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무역을 계속해 나갔기 때문에 주변의 諸女眞部族의 사정이나 요의 사정에 밝 았다.21) 이후로 완안부 여진은 요와 주위 諸部族 간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이를 해 결하면서 遼의 신임을 얻는 동시에 별다른 의심을 사지 않고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 다.22)

이처럼 女眞의 성장과 遼·宋의 동요가 가시화되던 대외정세 속에서 고려는 송·

요·여진과의 관계에 적극 대처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결과 문종은 이들 각 국과 의 활발한 관계를 꾀하였던 것이다.23) 문종대 대외관계의 특징이라면 對宋·對遼·

對女眞관계에 있어 다원적인 외교양상을 보이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변화는 문종 25년(1071) 고려가 송과 외교관계를 재개한 사실에서 잘 나타나 있다.24)

文宗은 일찍부터 송과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을 했었다.

왕이 耽羅와 靈巖에서 목재를 장만하여 큰 배를 건조하여 장차 송나라와 연계를 가지려 하였는데 內史門下省에서 아뢰기를 “우리나라는 北朝(遼)와 우호관계를 맺어 변경에 위급 한 일이 없으므로 백성들이 자기 생업에 안착되고 있으니 이런 방법으로 나라를 보전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지난 庚戌年(顯宗元年, 1010)에 보내왔던 거란의 問罪書에 동으로는 여

21) 外山軍治는 완안부가 특유의 자원으로서 人蔘, 松實, 白附子, 蜜蠟, 貊皮 등을 요에 공물로 헌 상했고, 요인과 무역, 생산용구 등을 교역하면서 다른 여진 부족에 비해 요와의 교역도 빈번했 고 정치적인 시각도 일찍 뜨였다고 보았다. 이 때문에 완안부는 요에 경계의 마음을 일으키게 하지도 않고 영토를 개척하여 생여진 諸部를 경략하고 통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女眞の興 起と遼宋との關係」『金朝史硏究』, 東洋史硏究叢刊之十三, 1964, 3쪽).

22) 1096년(遼 道宗 壽昌2)에는 陶溫水 徒籠古水 紇石烈部 阿閤版 및 石魯가 五國으로 통하는 鷹 路를 막고 요 捕鷹使를 잡아죽이는 변란을 일으켰는데 盈歌가 이들을 구하고, 이후로 인근 제 부족을 정벌해 나간 것이다(『金史』卷1 世紀1, 穆宗 3年). 김위현은 영가가 鷹路開通戰을 적 극적으로 이용하였다고 보았다. 이를 통해 內的으로는 女眞部를 복속시키고 外的으로는 요로 부터 신임을 얻는 길임을 간파했다는 것이다(金渭顯, 1985,「完顔部의 女眞統合策」『遼金史 硏究』, 裕豊出版社, 144쪽).

23) 11세기에서 12세기 전반기 고려조는 국위가 가장 드러난 시대였다. 奧村周司는 이 시기 고려 가 주변 제세력(東西女眞과 耽羅 등)을 포함한 독자의 정치적 세계가 형성하면서 國威를 드러 내던 시기라고 보았다. 고려의 武散階와 鄕職을 여진의 추장과 탐라의 왕족에게 제수하였고, 고려조의 국가제사의 하나인 팔관회에 宋都綱, 여진, 탐라, 일본 등 諸國人이 참여하여 朝賀하 는 의식을 행한 것은 전형적인 사례라고 했다(奧村周司, 1979,「高麗八關會的秩序國際環境」

『朝鮮史硏究會論文集』16, 80∼83쪽).

24) 成宗 12년(993) 거란의 침입이 있자 고려에서는 북송으로 몰래 사절을 보내어 援軍을 요청하 였지만, 송이 지원을 거절하면서 두 나라의 공식적인 외교가 단절되었다. 이후 顯宗 5년(1014) 거란과의 3차 전쟁이 일어나자 고려는 송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다시 송의 연호를 사용하기도 했으나 현종 10년 거란과 강화를 맺게 되면서 송과의 외교를 다시 중단하고 이후로는 遼와 사 대책봉관계를 맺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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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과 결탁하고 서로는 송나라에 왕래하니 이는 무슨 계책을 꾸미려는 것인가라고 하였으 며 또한 상서 柳參이 거란에 사절로 갔을 때도 東京留守가 송나라에 사절을 보낸데 대하 여 물으면서 시기하는 듯한 눈치가 있었다고 하니 만일 이 일이 누설된다면 반드시 흔극 이 생길 것입니다. … 우리의 문화와 예악이 흥왕한 지가 벌써 오래이므로 상선들이 끊이 지 않아 날마다 귀중한 보배가 들어오고 있사오니 중국에서는 실로 도움을 받을 것이 없 습니다. 만일 거란과의 국교를 영원히 끊지 않으려면 송나라와 사절을 교환해서는 안됩니 다.”라고 하였다.25)

위의 기사는 문종 12년의 일로, 문종이 송에 사신을 파견하려 하였으나 內史門下 省이 거란과의 관계 악화, 송과의 통교의 무익함 등을 이유로 반대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문종 22년(1068, 宋 神宗 熙寧 元年) 송의 神宗이 福建轉運使로 하여금 상인을 고려에 보내어 통교를 재개하고자 하는 송의 의지를 전달하면서 고려의 뜻을 타진하였다.26) 고려가 이를 받아들여 문종 25년 金悌를 송에 파견함으로써 兩國의 국교가 정식으로 재개되었다.27)

앞에서도 보았지만, 송의 입장에서 고려와의 통교재개는 고려와 연합하여 요를 견 제하려는 목적이 컸다. 그렇지만 당시 麗·遼간의 안정적인 관계에서만 麗·宋관계 가 온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한계를 알았기 때문에 송은 고려·요와의 화평관계 를 인정한 위에서 양국관계를 재개할 수밖에 없었다.28) 한편 송은 매년 세폐를 요에

25)『高麗史』卷8, 文宗 12年 8月 乙巳條. “王欲於耽羅及靈巖 伐材造大船 將通於宋 內史門下 省上言 國家結好北朝 邊無警急 民樂其生 以此保邦 上策也 昔庚戌之歲 契丹問罪書云 東結構於女眞 西往來於宋國 是欲何謀 又尙書柳參奉使之日 東京留守問南朝通使之事 似有嫌猜 若泄此事 必生釁隙 且耽羅地瘠民貧 惟以海産乘木道經紀謀生 往年秋 伐材過 海 新創佛寺 勞弊已多 今又重困 恐生他變 况我國文物禮樂 興行已久 商舶絡繹 珍寶日 至 其於中國 實無所資 如非永絶契丹 不宜通使宋朝 從之”

26) 宋은 1068년(神宗 熙寧元年) 7월에 羅拯에 지시하기를 “고려는 옛날부터 君子의 나라이며 또 祖宗의 시대로부터 통교를 부지런히 해 왔는데 뒤에 이르러 오랫동안 외교관계가 끊어졌다.

지금 듣건데 고려의 임금은 賢王이라 하니 사람을 파견하여 설득함이 옳겠다” 하였다. 이에 나증은 商人 黃愼을 고려에 파견했는데 고려 文宗은 宋의 이러한 특사파견을 크게 환영하였다 (『高麗史』卷8, 文宗 22年 7月 辛巳條,『宋史』卷487, 外國3 高麗傳). 이후 문종 24년(1070) 8 월에 다시 황신이 고려에 와서 국교의 재개를 협의하게 된 것이다(『高麗史』卷8, 文宗 24年 8月條).

27)『高麗史』卷8, 文宗 25年 3月 庚寅條

28) 이후로 양국의 교왕은 경제·문화교류가 주가 되었고, 정치·군사 방면으로는 거의 관계가 이 루어지지 않았는데 이는 요를 의식한 양국의 입장에서 당연한 것이었다. 한편, 고려·거란의 上下國 관계를 인정한 위에서 고려와의 관계를 추진했기 때문에 송은 고려의 책봉거절을 두 번이나 겪으면서도 이를 묵묵히 받아들이면서 적극적인 입장을 표명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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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부하면서도 양국간 경제활동을 원활하게 했던 榷場의 置廢를 주도함으로써 요의 경제를 압박하는 二重的 형태의 외교정책을 시행하였다.29) 때문에 요는 항상 경제적 불안에 시달렸다. 당시 요가 麗宋의 교류를 알면서도 특별한 제재를 가하지 않았던 이유는 이들 양국의 교류를 통하여 간접적이나마 송의 물자를 공급받을 수 있고 다 른 한편으로는 여송관계의 견제가 심할수록 이들 관계가 더욱 공고해질 것을 염려한 때문이라 하겠다.

문종은 이처럼 미묘한 국제관계 속에서 親宋的인 입장을 보이는 한편, 遼와의 事 大冊封관계30)를 공고히 하여 북방의 안정도 유지할 수 있었다. 즉 요에 대하여 稱臣 納貢하고 요의 正朔을 행하는 위에서 宋과의 우호관계를 발전시켰던 것이다. 예를 들면, 고려사절의 入宋은 요에 보냈던 使行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고려는 正賀·冬 至·生賀·問侯使 등 정기사행과 그밖에 수시로 비정기 사절을 요에 파견하고 있었 다. 반면에 對宋사절은 부정기적이었으며 그 대부분은 謝恩·獻方物·弔慰·賀登極 의 사명을 띤 것이었는데, 고려가 대외관계의 기본적인 입장인 遼 우위의 관계를 고 수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고려는 여진관계에서 强硬策과 懷柔策을 병행하였다.31) 물론 이러한 입장은 國初부터 일관되게 펴왔던 것인데 문종때 동여진, 즉 東蕃賊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러한 관계는 송의 고려에 대한 입장을 정립하는데 있어 혼란을 야기했는데, 고려가 入宋에 앞 서 거란에 통고하지 않을 수 없었던 관계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던 송의 관료들은 고려와의 관 계개선을 항상 염려했던 것이다.

29) 朴志焄은 북송의 대요무역이 크게 두가지 의의를 가진다고 보았는데, 하나는 무역방식으로써 歲贈銀을 회수하는 현실적인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요의 경제적 약점을 장악하 여 요의 동향을 견제하고 양국간의 화평관계를 도모하는 것인데, 이러한 송의 의도는 상당부 분 실효를 보았다고 했다(「北宋代 對外經濟關係와 華夷觀」『梨花史學硏究』19집, 1990, 37쪽).

30) 이 글에서는 고려와 중국왕조와의 관계를 김한규의 견해를 따라 ‘朝貢冊封關係’라는 용어로 표 현했다. 그는 동아시아의 전통적 국제관계가 ‘朝貢’이라는 일방적 행위에 의해 성립되는 것으 로 잘못 이해될 소지가 있음을 지적하고, 중국 주변의 국가가 중국과 관계를 맺는 방법은 ‘朝 貢’과 ‘冊封’이 교차함으로써 ‘朝貢冊封關係’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았다(『한중관계사

Ⅰ』, 아르케, 1999, 25∼31쪽).

31) 국초부터 여·요는 양국 사이에 있었던 여진에 대해 회유·강경책을 병행해 왔다. 현종원년 (1010) 거란이 송을 제압하는 등 당시 동아정세가 요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자 결국 여진 족에 대한 지배권도 거란이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그러나 靖宗代(1034∼1046) 千里長城이 완 공되고, 文宗代(1046∼1083)에는 沿邊築城의 단계를 벗어나 동여진족 부락을 정벌함으로써 귀 순주 경영이 군사적으로 뒷받침되었다. 이로써 문종대에는 고려가 대여진지배권에서 거란보다 우위에 서게 되었다(李根花, 1988,『高麗前期 北方政策의 展開硏究』,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 문, 1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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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발해지면서 고려는 이에 적극 대응할 필요가 있었다. 문종은 10년(1056)과 34년 (1080) 두 차례에 걸친 여진에 대한 대대적인 진압을 실시함으로써 강경한 입장을 분명히 내비쳤다.32) 반면, 이 시기에는 동서 여진의 여러 부락 가운데에서 고려에 內 附하여 그들의 주거하는 지역에 郡縣을 두기를 청하는 자들이 잇달았는데,33) 문종은 投化하여 오는 여진인에게 官爵을 수여하여 회유하는 한편, 田宅을 주어 內地에 분 산적으로 거주하도록 하고 民戶로 편입시켰으며 변방의 空地를 주어 살게 하기도 하 였다.34) 이러한 정책을 통해서 고려는 여진에 대한 입지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송·여진과 활발한 외교관계를 가지려 했던 고려의 대외정책은 당시 요와 충돌할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그것은 송과의 통교가 재개된 지 얼마 안되어, 고려가 요로부터 여러 가지 위협을 받은 데서 알 수 있다. 다음의 사실이 그러하다.

① 요나라의 동경 병마도부서에서는 추밀원이 시달한 공문에 준하여 압록강 이동의 국경 을 획정하자는 통첩을 보내왔다.35)

② 有司에서 아뢰기를 “거란정부가 定戎鎭 관문 바깥에 庵子를 설치하였사오니 사절을 파 견하여 그것을 철거하도록 통고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니 왕이 이 제의를 좇았다.36)

③ 고려가 사신을 보내어 압록강 이동의 땅을 賜해 줄 것을 바랬으나 허락하지 않았다.37)

④ 상서우승 韓瑩을 告奏使로 파견하여 당시 요나라에서 압록강에 榷場을 설치하려는 기 도를 중지하라고 요구하였다.38)

遼는 문종 29년(1075, 遼 道宗 太康 元年) 7월 압록강 이동 강역을 다스리겠다는 32) 문종 10년의 것은 차치하더라도, 34년의 진압은 당시 平章事였던 文正과 동지중추원사인 崔奭 등이 보병과 기병 3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여진지역을 정벌한 것으로 그 규모나 지휘관 의 위치로 보아 전쟁의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33)『高麗史』卷4 顯宗 8年 8月 乙酉, 甲午條/同王 20年 8月 乙未條. 다음의 기사에 보이는 歸順 州·益昌州·氈城州·恭州·恩服州·溫州·誠州 등은 고려가 이미 전부터 東北邊을 경영했 음을 짐작하게 한다. “東女眞歸順州都領大常古刀化副都領古舍 益昌州都領歸德將軍高舍都領黔 夫 氈城州都領奉國將軍耶好歸德將軍吳沙弗 恭州都領奉國將軍多老番長巴訶弗 恩服州都領元甫阿 忽都領那居首 溫州都領三彬阿老大 誠州都領尼多弗等 率衆內附 乞爲郡縣賜…”(『高麗史』卷9, 文宗 27年 2月 乙未條)

34) 그러나 東西蕃 추장과 두목들이 앞을 다투어 入貢하자 고려는 이들의 입공에 대하여 병마사의 보고를 얻은 뒤에야 입궐할 수 있게 하거나, 여진인의 체류 기간이 보름을 넘지 못하게 하는 등 제한을 가하기도 하였다(『高麗史』卷9, 文宗 35年 2月 辛酉, 5月 己丑條).

35)『高麗史』卷9, 文宗 29年 7月 癸酉條. “遼東京兵馬都部署 奉樞密院箚子移牒 請治鴨江以東彊域”

36)『高麗史』卷9, 文宗 30年 秋8月 庚戌條. “有司奏 北朝於定戎鎭關外設置庵子 請遣使告奏毁撤 從之”

37)『遼史』卷23, 道宗紀3 大康4년 夏4월 辛亥條. “高麗 遣使乞賜鴨淥江以東地 不許”

38)『高麗史』卷10, 宣宗 3年 5月 丙子條. “又遣告奏使尙書右丞韓瑩 時遼欲於鴨綠江 將起榷場 故 請罷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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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구에 뒤이어, 다음해에는 국경지대인 定戎鎭에 庵子를 설치하려 하였다. 고려는 사 신을 파견하여 항의하고 시설물에 대한 철폐를 요구하면서, 문종 32년(1078)에는 오 히려 압록강 이동의 국경일대를 고려가 관리하고자 하는 뜻을 요에 전하였다.39) 이 것은 당시 宋과의 통교재개로 교류가 활발해지고, 女眞에 대해서도 강경·회유책이 효과를 보면서 국제관계에 자신감을 얻은 문종이 요와의 관계를 재설정하기 위해 압 록강 이동에 대한 직접 경영을 요구한 것이라 하겠다.

요의 위협은 宣宗代(1083∼1094)에도 계속되었다. ④에서처럼 宣宗 3년(1086) 요는 고려에 榷場설치를 요구하자, 고려에서는 여러 차례 요에 사신을 파견하여 이 문제 를 논의하는40) 한편, 만일에 대비해서 李顔의 신분을 藏經燒香使로 위장하여 비밀리 에 국경사태에 대비하도록 하였다.41) 선종 5년 9월에는 각장계획 철회를 요청하는

「乞罷榷場表」를42) 遼에 보내어 고려의 노력은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었다. 遼 道宗 은 “가까운 시일중에 편의토록 처리하겠지만 아직 (각장)설치를 결정한 바도 아니니, 편안한 마음으로 성심을 다하고 疑懼를 풀고 至極한 뜻을 이해하라”43)며 각장 설치 를 취소하였고, 이로써 양국 간의 긴장관계는 풀렸다.

그러면서도 특기할 만한 일은 이 같은 논의를 하는 와중에 양국이 취한 행동이다.

39) 요와의 문제해결을 위해 적극적인 입장을 취했던 이러한 고려의 태도는, 송이 요에 대하여 취 한 입장과는 크게 다르다. 송 또한 희령 5년(1072)에 지계획정을 요구받았다. 요는 騎兵 수천을 越境시켜 송의 邊兵을 射傷시킨 것을 시작으로 兩屬戶를 鈔掠하는 등 소소한 도발을 일삼다가 희령 7년 河東과 河北에 걸쳐 있는 울주, 응주, 삭주 등 3주에 걸친 국경선을 새로 조정할 것 을 요청하였는데, 결국 송은 700여 리의 땅을 요에게 넘겨주고 邊民 數千家를 內地에 이주시 켰다(陶晋生, 1984,『宋遼關係史硏究』, 137∼154쪽).

40) 遣告奏使秘書監林昌槩 如遼(『高麗史』卷10, 宣宗 4年 春正月 乙丑條) 遣密進使閤門引進使金漢忠 如遼(같은 책, 同王 4年 春正月 庚辰條) 遣告奏使禮賓少卿柳伸 如遼(같은 책, 同王 4년 冬10月條)

선종 5년 9월의「乞罷榷場表」에서 “여러번 사신편에 章奏를 보냈지만….”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러한 告奏使, 密進使를 제외하고도 요에 대한 일반적인 사행편에도 이 문제를 언급했 을 것이다.

41)『高麗史』卷10, 宣宗 5年 2月 甲午條. “以遼議置榷場於鴨江岸 遣中樞院副使李顔 托爲藏經燒香 使 往龜州 密備邊事” 이 문제에 대한 고려의 경계심은 심각했던 모양이다. 각장 설치요구가 있었던 선종 3년 9월에는 兩京의 武官을 소집하여 閱射하기 수개월에 이르렀고(같은 책, 同王 3年 9月 戊午條), 같은 해 12월에는 다시 兩京의 文官을 소집하여 열사했으며(같은 책, 同王 3 年 12月 戊戌條) 4년 1월에는 山川, 廟社에 祭를 올려 神兵의 助戰을 빌었다(같은 책, 同王 4年 1月 己巳條).

42)『高麗史』卷10, 宣宗 5年 9月條. “遣太僕少卿金先錫 如遼 乞罷榷場表”

43)『高麗史』卷10, 宣宗 5年 冬10月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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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고려의 歲貢을 免해주었다.44)

② 이해에 요나라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羊 2천 두, 수레 23대, 말 3필을 선사하였다.45)

③ 왕이 요나라 사신들을 위하여 乾德殿에서 재차 연회를 배설하고 3명의 사절들을 殿內 에 들어와 앉도록 하였다. 좌우 관리들이 아뢰기를 “사신들에게 연회를 재차 베풀어 주 는 법은 전례가 없으며 3명의 사절들을 殿內에 들여앉힌다는 말도 듣지 못하였습니다”라 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왕이 말하기를 “그들은 자기 나라 임금이 지은 天慶寺 碑文을 가 지고 왔으니 특별히 대우해야 된다”고 하면서 관리들의 제의를 좇지 않았다.46)

이러한 사실은 당시 양국 간 위협과 타협의 움직임이 팽배했음을 보여주는 것이 다. 요가 고려의 세공을 면제해 준 것이나 대량의 하사품을 보낸 것은, 고려에 대한 요구와 위협의 이면에 고려를 회유하고자 하는 요의 의도가 깊이 깔려있음을 보여주 는 것이라 하겠다.47) 요는 고려가 宋·女眞과의 관계를 긴밀히 하고, 또 여진의 세 력이 점차 강성해지는 것에 위협을 느끼고 있던 상황에서 고려와의 관계를 안정시킴 으로써 당시 동북아 정세가 요에게 그만큼 불리하게 전개될 가능성에 대한 예방책을 쓴 것이었다. 한편, 고려에서도 선종 7년(1090) 9월 요의 使者에게 두 차례나 연회를 베풀어주는 전례없는 예우를 하고 있다. 고려는 문종대 여진정벌의 경험을 통하여 북방에서의 一戰을 계획하던 상황에서 여진정벌에 있어 전략상 중요한 압록강 이동 지역을 확보하기 위하여 이 지역에 대한 요의 영토침해 행위, 榷場요구를 중지하는 조건으로 양국 간에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려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정황을 미루어 보면, 선종 5년 이후로 고려가 遼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대외정책을 취한 것과 그 결과 양국의 이해관계가 더욱 돈독해졌음을 볼 수 있다.48)

44)『遼史』卷25, 道宗紀5 大安 4年 3月條. “免 高麗歲貢”

45)『高麗史』卷10, 宣宗 5年 12月條. “是歲 遼遣使 賜羊二千口 車二十三兩 馬三匹” 그러나 요가 고려에 양을 하사한 것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다.『遼史』고려전에는 1083년(道宗 太康9)에도 고려에 양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문종의 昇遐를 8월에 안 것으로 미루어 이는 문종에게 보내는 것이었을 것이다.『遼史』에는 선종 10년에도 양을 보낸 기록이 있다. “遣使賜高麗羊”

(『遼史』卷25, 道宗紀 大安 9年 7月 壬寅條)

46)『高麗史』卷10, 宣宗 7年 9月 庚辰條. “再宴遼使于乾德殿 令三節人 坐殿內左右 有司奏 再宴使 者 古無此禮 三節就坐殿內 亦所未聞 王曰 使者 賚御製天慶寺碑文 以來 宜加殊禮 不從”

47) 거란은 흥종 말부터 弓口門과 郵亭을 설치하고 고려의 철훼요구를 무시한채 다시 농지를 개간, 확대하고 암자를 지어 사람과 물자를 비축하기도 했다. 이에 문종이 制書를 내려 그 철폐를 촉구하도록 하였으나 中書省에서는 “국경에 우려할 만한 사태가 벌어진 것도 아니 고 新皇帝(道宗)가 즉위하여 冊命을 加해 왔는데 回謝도 하지 않고 국경에서의 是非거리를 내세우는 것은 賢明치 못하다” 하였으니, 그야말로 거란은 고려와 문제를 일으키기를 원한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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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고려의 태도에 송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당시 송의 고려에 대한 입장은 다음과 같다.

① 顒은 성품이 욕심이 많고 인색하여 상인들의 이익을 빼앗기를 좋아하고 富室이 법을 어기면 문득 오랫동안 가두었다가 돈을 받고 풀어주었다. 비록 작은 죄라도 銀 數斤을 바 쳐야 했다.49)

② 고려가 賜與받은 것을 北虜(遼)에 나누어주지 않는다면 요가 어찌 저들이 우리나라(宋) 에 來貢하는 것을 묵인하겠습니까? 이는 寇賊의 兵을 빌리고 도적의 식량을 보태주는 것 이나 다름없으니 이것이 세 번째 해입니다. 고려는 명목으로는 義를 사모하여 來朝하였다 고 하나 실제는 利를 바라고 온 것이며 그 本心을 헤아려 보면 결국은 北虜에 의해 이용 되고 있습니다…지금 고려의 사절은 이르는 곳마다 山川과 지형을 그려서 虛實을 엿보고 있으니 어찌 善意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네 번째 해입니다.50)

『宋史』고려전의 서술에서 선종을 숙종으로 잘못 인식하여 혹평한 것이나, 蘇軾 이 고려사신의 入貢이 초래하는 폐단을 논한 때가 宣宗 6년(宋 哲宗 元祐 4)부터임 을 보면, 이는 선종대 이후 달라진 고려의 대외정책에 대해 宋 朝廷에서 경계를 하 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②는 고려와의 통교를 재개하면서도 고려와 요의 관 계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던 송의 불안과 당시 麗·宋·遼 3국간의 긴장관계를 짐작 케 한다.

문종대 동북아 각 국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새로운 질서재편을 주도하려 했던 고려 는, 선종대 이후에는 遼와의 안정적인 관계를 통해 북방지역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 해 다시 요와의 관계를 긴밀히 하는 정책으로 선회하였다. 이는 다음의 숙종대 대외 정책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48) 朴宗基는 선종대를 기점으로 고려의 대외정책이 거란 우위의 대외정책으로 전환되어 숙종대까 지 이어지는데, 이는 송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문종대와 예종대의 대외정책과는 다른 방 향이었다고 한다(「高麗中期 對外政策의 變化에 대하여」『한국학논총』16, 1993).

49)『宋史』卷487, 外國3 高麗傳. “顒性貪吝 好奪商賈利 富室犯法 輒久縻責贖 雖微罪 亦輸銀數斤”

『宋史』에는 宣宗의 재위기간이 4년으로 잘못 기재되어 있는데 이 때문에 여기에서의 顒은 실제로는 선종 4년 이후의 사실을 평한 것으로 선종대의 사실을 서술한 것이다.

50)「論高麗買書利害箚子」『蘇軾文集』3冊, 孔凡禮 點校本, 1986, 北京 中華書局. “高麗所得賜予 若不分遺北虜 則契丹安肯聽其來貢獻 是借寇兵而資盜糧 此三害也 高麗名爲慕義來朝 其實爲利 度其本心 終必爲北虜用 何也 虜足以制其死命 而我不能故也 今使者所至 圖畵山川形勝 窺測虛實 豈復有善意哉 此四害也”

(20)

3. 高麗의 女眞征伐과 對外關係의 展開

1) 肅宗·睿宗代初 政局運營과 女眞征伐

선종이 죽고 獻宗이 어린 나이로 즉위한 해 7월, 鷄林公은 門下侍郞平章事 邵台輔 와 함께 李資義의 거사를 이유로 그를 주살한 후 중서령이 되었다가 11월에 헌종의 禪位의 형식을 받아 왕위에 올랐다. 이러한 사실은 숙종의 ‘國王’으로서의 정통성과 권위에 큰 흠이 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즉위공신과 일반관료들 간의 갈등도 야기하 여 국정의 운영에도 부담이 되었다. 이에 숙종은 즉위초부터 문벌귀족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는데 정치운영의 기본방향을 두었는데, 숙종대(1095∼1105) 전 시기를 걸쳐 왕권강화를 위한 여러 방안들이 강구되었다. 南京建設, 錢幣流通策, 別武班의 설치 등 국정 전반에 걸친 대대적인 개혁, 즉 ‘新法’이라 할 수 있는 정책들이 그것 인데, 이들 대부분은 여진에 대한 2차 정벌이 단행되었던 예종대 초반까지 계속되었 다.

이러한 정책을 적극 추진하면서 숙종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시켜 주었던 尹瓘을 비 롯한 義天, 李敖, 林彦, 吳延寵 등 일련의 세력들은 鷄林公 시절부터 관계를 맺고 있 었던 府僚, 그리고 邵台輔, 王國髦 등 핵심 공신들과 內侍·文翰職 등의 近侍職 관 료들이 중심을 이루었다.51) 이들 세력에 대비되는 존재로 金上琦, 崔思諏로 대표되는 문벌귀족세력이 있었다. 이들은 정치적 입장이 보수적이었고 정국운영에도 異見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숙종이 정책을 추진하는데 비교적 순응하였으며 그를 제외한 인물들의 활동도 소극적이었다.52)

51) 서성호, 앞의 논문, 31쪽

숙종의 개혁정치를 뒷받침한 세력에 대해서는 먼저, 윤관과 의천으로 대표되는 사원세력을 설 정한 것(김광식, 1989,「高麗 肅宗代과의 王權과 寺院勢力」『白山學報』36)과 송·고려의 왕 위교체와 관련하여 송에 사행을 다녀온 사람들 및 계림공 시절의 府僚, 그리고 소태보, 왕국모 등 핵심 공신들과 특별한 관계에 있던 자들이 각기 내시·승선 등의 근시직에 포진하여 ‘측근 적인 성격의 관료군’을 형성하였다(서성호, 앞의 논문, 31쪽)는 것, 세 번째로 숙종대 일련의 정책 가운데 전폐유통과 여진정벌을 추진한 세력을 중심으로 ‘윤관 세력’이 형성되었다(정수아,

「윤관세력의 형성」, 12쪽)는 견해가 있다. 12세기 정치사 이해에 대한 연구사 정리는 다음의 글을 참고하면 된다. 박종기, 1992,「高麗政治史硏究論」『擇窩許善道先生停年紀念韓國史學論 叢』, 一潮閣

52) “大勢가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 침묵만을 지켰으며 그 어떤 건의도 하지 않았다.”(『高麗史』

卷95, 魏繼廷傳)고 한 위계정의 태도는 당시 문벌세력의 태도를 대표한다고 하겠다. 문벌귀족 의 소극적인 자세는 숙종대 주요정책을 논의할 때의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는데, 鑄錢정책에서

(21)

숙종은 이들 양 세력의 조율을 위해 3년 3월, 태자를 보좌하는 詹事府를 세우고 소속의 관원으로 邵台輔·黃塋·黃兪顯과 같이 자신의 즉위에 공로가 있었던 인물 과 당시 중앙정계의 요직에 있었던 金上琦·崔思諏, 그리고 尹瓘·文翼·魏繼廷 등 새로이 중앙정계에 진출하였던 인물들을 대거 임명하였다.53) 물론 첨사부 설치의 목 적은 왕위계승권자인 태자의 지위를 강화시켜 안정되게 왕권을 물려주고자 하는 의 도에서 비롯된 것이겠으나 이들 두 세력을 적절히 안배하여 갈등의 소지를 줄이는데 도 작용하였다.

숙종의 측근세력에 의해 실시된 개혁정책으로는 錢幣流通策과 別武班의 설치를 우 선 손꼽을 수 있겠다. 전폐유통책은 화폐라는 교환수단을 통하여 국내의 유통경제를 장악하고 商稅를 징수함으로써 재정을 확보하려는데 있었다. 義天은 “用錢을 시행하 면 교환과 운반에 편리하고, 米·布에서 파생되는 수취 및 교환의 부정을 방지할 수 있고, 祿米의 독촉으로 피해를 입는 細民을 보호할 수 있으며, 미곡의 저축으로 인하 여 흉년에 대비할 수 있다.”54)며 전폐 사용을 적극 권장하였다. 이것은 왕권을 중심 는 郭尙이 유일하게 반대하고 있고, 南京 건설에 있어서는 柳伸과 庾祿崇만이, 숙종 9년의 여 진정벌 논의에서는 李永이 유일하게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추명엽, 1999,「11世紀末∼12世紀初 女眞征伐問題와 政局動向」,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7쪽).

53)『高麗史』卷11, 肅宗 3年 3月 癸亥條. “敎曰 寡人謬以凉德 而有元良 宜升震位 特命有司立太子 詹事府左春坊延慶宮司等官 皂隷采邑皆屬焉 以邵台輔爲太師 金上琦爲太傅 崔思諏爲太保 金先錫 爲少師 黃瑩爲少傅 林斡爲小保 魏繼廷李䫨趙藺忠郭尙並爲賓客 金漢忠洪起爲左右庶子 柳伸金景 庸爲左右諭德 尹瓘爲東宮侍講學士 崔公詡爲家令 文翼高令臣爲左右贊善大夫 禹元齡爲中舍人 李 瑋爲典內 蔣寧爲洗馬 劉載爲侍讀 康拯爲中允 柳仁茂爲司議郞 張景爲藥藏郞 崔寅弼爲宮門郞 李 侯爲率更 黃兪顯爲侍衛 吳孫慶崔惟正爲左右淸道率府率 羅俊弓濟爲左右監門 崔挺爲右衛 崔現爲 旅賁中郞將”

54)「鑄錢建議上疏」『大覺國師文集』卷12, 1974, 建國大學校出版部. “夫米之爲貨 遠近貿易 提荷 㝡難 實用止銖兩之輕 虛廢有千鈞之重 或經數百理 裹米爲資 一馬之䭾 不過二石 動踰旬浹 人馬 之用 已耗半矣 或値大冬盛夏 貧民無畜 親自背負 觸熱冒凍 僵仆道途 莫知其艱 今用錢以免䭾負 之苦 其利一也 夫貧者民之天也 孤寡困窮 獨賴曰米 今以爲貨 無良狡猾之徒 趣利機巧之輩 雜以 沙土 加以塵腐 無用之粒 又有小升大升之僞 輕量重量之姦 良善無告之民 僅獲升合 簸揚淘擇 其 所亡者 十四五焉 雖處之嚴刑 不能止也 今用錢 以絶姦狡 而恤困窮 其利二也 國家均祿之制 以米 爲給 右食之儲 止盈一歲 兩班 請受 唯俟他州 督責至嚴 轉漕勞苦 或風霜阻滯 歲時凶荒 薄官之 家 至夏未食 權豪勢族 則計程陪卸 取利一倍 細民益困 貪吏益雄 至於廉潔端士 他無所獲 仰事俯 畜 全仗捧祿 復以白秔 半易田糙 負荷入市 有同行商 圓法果施 准祿之半 以錢給之 則減督責 而 備凶荒 抑權豪而優廉潔 其利三也 國家帑藏 除珠玉龜貝之珎 金銀犀象之寶 其外積畜 獨米與布 夫布久則有彫爛之殘 米久則有塵腐之壞 繼之以蟲蛀 ?濕雨漏 火災切覩 大盈新倉 ?年貢布 未經數 霪 擇破取完 百無十好 往年火災 一堆被燃 百堆俱發 瞬息之際 盡爲輕灰 今若用錢 非獨積蓄堅牢 抑亦賜與大便 其利四也”

(22)

으로 하는 집권력 강화와 국가재정 확보라는 정치적·재정적인 필요에서 실시되었 기 때문에 왕권강화에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南京경영, 군사력 강화와 같은 개 혁을 추진하는데 있어 재정적 뒷받침이 되었다.55)

숙종 9년(1104) 윤관이 건의하고 추진한 別武班은 일차적으로는 ‘賊은 騎兵이고 我 軍은 步兵’이라는 결함을 보충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징집대상은 거의 모든 民이었는데, 私的인 군사력과 富의 축적을 가져올 수 있는 모든 계층의 民을 公的인 제도권 속으로 편제시켜 국가재정의 확충과 국왕 중심의 군사력 집중이라는 조건을 동시에 충족시켜 주었다.

이외에도 숙종대에는 사회변동에 따라 위기의식을 느낀 국가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민심의 수습을 통해 권력의 안정을 도모하는 한편으로 風水圖讖思想이나 불 교를 근거로 하여 遷都를 추진하거나, 사찰과 궁궐 건립, 종교행사들을 빈번하게 행 하는 등 일련의 정책들을 시행하였다.56)

이러한 정책들은 새로운 통치질서를 수립하려는 숙종의 의도가 적극 반영된 것인 데, 궁극적으로는 사회통합과 국력의 결집을 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결정 과정에서 대부분의 문벌귀족은 소외되었고, 개혁의 의도 자체가 자신들의 제기반을 위협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대체로 숙종의 정국방향에 반대하는 정치적 입장을 가지 고 있었다. 전폐사용은 국가가 유통경제를 장악함은 물론 수취 및 교역과정에서의 권세가나 大商富賈의 對民수탈을 방지하는 의미가 컸고, 宰樞의 자제들까지 징발대 상으로 삼았던 別武班도 당시 군사를 선발하는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5品 이상의 문 무 관료들에 대한 특권을 무시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 시기는 사회 전반에 대한 통치력의 관철이 이루어진 후, 고려의 대외팽 창의 의지가 노정되던 시기였다.

내가 국사를 맡은 이래로 늘 조심하여 北으로는 遼나라와 외교관계를 맺고 南으로는 宋나 라를 섬겨 왔는데 또 女眞이 동쪽 강적으로 되어 있다. 군사 정치에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급선무이니 긴급하지 않은 役事를 없애어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라57)

위의 조서에서 숙종은 南北으로 宋遼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가운데 새로이

55) 蔡雄錫, 1988,「高麗前期 貨幣流通의 基盤」『韓國文化』9, 90∼94쪽

56) 채웅석, 1994,「고려중기 사회변화와 정치동향」『한국사』5, 한길사, 184∼191쪽

57)『高麗史』卷11, 肅宗 6年 8月 乙巳條. “朕自御神器 居常小心 北交大遼 南事大宋 又有女眞 倔 强于東 軍國之務 安民爲急 宜罷不急之役 以安斯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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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적으로 대두하고 있는 完顔部 女眞에 대한 위기의식을 천명하고 있다. 또 숙종 8 년경에는 완안부에 거처하고 있었던 고려인 의원이 盈歌의 친척의 병을 치료해 주고 고려에 돌아와 사람들에게 일컫기를 “黑水에 거주하는 여진이라는 부족은 날로 강대 해져, 병사들은 더욱더 날래고 용감해지고 있으며 해마다의 곡식은 매년 결실을 잘 맺는다”58)고 하여, 여진경계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곧이어 완안부의 盈歌는 蕭海里 를 격파한 戰勝을 고려에 보고하였는데59)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로 고려는 여진세력 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강성해지고 있음을 의식하게 되었다. 이에 고려에서는 숙종 8년(1103) 여진의 세력을 알아내기 위해서 난을 평정하고 성공한 것을 이유로 여진 에 축하사신을 보내게 되었고,60) 이후로는 완안부 여진과 고려 사이에 활발한 사신 교환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서로의 허실을 파악하려는 양국의 적극적인 노력이었을 것이다.

曷懶甸의 여러 부족들이 와서 붙좇으려 하자 고려에서 이를 듣고는 와서 붙좇지 못하게 하고자 하였는데, 이는 자기들에게 가까이 있어서 불리할까 여긴 것으로서 사람을 시켜 그들을 불러들여 (붙좇는 일을) 그만두게 하였다. 斜葛이 고려에 있으면서 갈라전을 왕래 하던 도중에 그 일을 모두 알게 되어, 마침내 石適歡으로 하여금 가서 갈라전의 사람들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미처 시행되지 않아 穆宗이 죽자 康宗이 자리를 이은 뒤 석적환을 파 견하여 星顯과 統門의 군사들을 데리고 가서 乙離骨嶺에 도착하여, 군사를 더욱 모집하여 活涅水로 나아가 갈라전의 지역을 돌며 배반하여 망명한 일곱 성을 거두어들이게 하였다.

고려가 사람을 보내와서 아뢰기를 “응당 의논해야 할 일이 있다”하기에 갈라전의 관속이 詳穩 斜勒과 詳穩 冶刺保로 하여금 가게 하고 석적환 역시 盃魯를 시켜 가게 하였더니, 고려에서 야라보 등을 잡아들이고 배로는 보내 주며 말하기를 “너와는 상대할 일이 없다”

고 하였다. 그리하여 다섯 군데 물줄기에 거처하는 백성들이 모두 고려에 붙좇아 들었으 며 團練使 가운데 함몰된 자가 14명이었다.61)

58)『高麗史』卷12, 肅宗 8年 7月 甲辰條,『金史』卷135, 外國下 高麗傳

59) 完顔部는 이 소해리난의 평정으로 자연 女眞諸部의 귀부를 일으킬 수 있었고, 또 국제적으 로도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金人 自此 知遼兵之易與也”라 하여 이 사건을 계기로 遼 군사력의 약점이 드러났고, 또 이 시기에 “高麗 始來通好”라는 기사가 있어 요·고려와의 관계상 변화를 맞고 있는 완안부의 행보가 주목된다(『金史』卷1 世紀1 穆宗 9년).

60)『高麗史』卷12, 肅宗 8年 7月 甲辰條

61)『金史』卷135, 外國下 高麗傳. “曷懶甸諸部盡欲來附 高麗聞之不欲使來附 恐近於己而不利也 使 人邀止之 斜葛在高麗及往來葛懶道中 具知其事 遂使石適歡往納曷懶甸人 未行而穆宗沒 康宗嗣 遣石適歡以星顯統門之兵往至乙離骨嶺 益募兵趨活涅水 徇地曷懶甸 收叛亡七城 高麗使人來告曰 事有當議者 曷懶甸官屬使斜勒詳穩冶剌保詳穩往 石適歡亦使盃魯往 高麗執冶剌保等 而遣盃魯曰

(24)

위의 기사는 이미 이 시기 曷懶甸 지역과 그 주위의 통제권을 획득하기 위한 양국 간 긴장이 고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안으로는 계층적 이해관계에 따라 문벌귀족의 불만이 커져 가는62) 한편, 기상재이 와 수취체제의 모순으로 민의 저항이 광범하게 일어나면서 민생악화라고 하는 실질 적인 문제에 부닥쳤던 고려는, 밖으로도 강성해진 여진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이 필 요했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고려의 여진정벌이라는 강경책으로 귀결되었다.

고려의 여진정벌은 숙종 9년(1104)부터 예종 4년(1109)까지 6년 여 간에 걸쳐 단행 되었다. 그러나 숙종 9년 林幹과 尹瓘의 연이은 패배는 고려의 정치적 위기와 대외 적인 위기를 오히려 심각한 상황으로 몰고 갔다. 국왕 권위가 손상된 것은 물론 문 벌귀족 등이 정치적으로 소외된 상태에서 이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여진의 위협도 직접적으로 맞게 된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안고서 왕위에 오른 睿宗(1106∼1122)은 태자 시절부터 교류하였던 윤관 등 숙종대 핵심정치세력과의 연대 속에서 주요 정책을 추진했다.63) 대내적으로 는 백성들의 생활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監務의 설치, 인사행정상의 문제점 개선과 國子監의 개혁을 통한 교육제도의 정비를 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전대의 개혁정치에 대한 비판이 표면화되어 예종은 신료들의 강력한 반대에 직면하게 되었다. 원년 7월에 兩府의 近臣 및 臺省·諫官·諸司知制誥 등에 게 時弊를 직언하도록 하였는데, 上奉事에서 특히 논란이 되었던 것은 숙종 때의 전 폐유통책과 天壽寺役의 문제였다.

짐이 兩府, 臺諫, 兩制 및 長齡殿의 讐校員들이 제출한 글을 보았다.…天壽寺 役事는 先考 께서 세우기 시작한 것인데 얼마 되지 않아 昇遐하자 衆論이 봉기해서 다투어 간하여 말 리니, 짐도 그 불가함은 알면서도 다만 先考의 뜻을 따르려고 아직 감히 罷去하지 못하였 으니 이는 짐의 허물이다. 또 돈을 사용하는 법은, 곧 오랜 옛날 제왕이 나라를 부하게 하 고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한 것이요, 나의 선고께서 재화를 모으려고 한 것은 아니다. 하 물며 大遼가 근년에 또 用錢을 시작한다 함을 들음에 있어서랴.64)

無與爾事 於是 五水之民皆 附於高麗 團練使陷者十四人”

62) 李基白, 1975,『韓國史』4, 41∼43쪽

63) 睿宗은 태자시절부터 詹事府를 통해 숙종대 측근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서성 호는 숙종이 폭넓은 통치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첨사부를 확충하였는데 당대의 재상 및 주요 중견 관료들을 그 관속으로 두고 이들과 王子와의 유대관계 형성을 제도화하였고, 궁극적으로 숙종 자신과 후계 王子와의 정치적 기반을 넓히고 안정시키려는 것이었다(서성호, 앞의 논문, 23쪽).

(25)

예종의 정책에 비판적 입장을 취했던 신료들에 대한 정확한 언급은 없지만, 예종 의 즉위 이후로 대귀족 출신 인물인 金景庸, 李瑋, 魏繼廷, 李䫨 등이 재추직에 오르 면서65) 이들의 정치적 성장도 점차 이루어졌던 상황을 생각하면, 이들과 예종 사이 에 개혁을 둘러싼 입장차이가 드러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이러한 반대에 대해 예 종은 이미 肅宗이 착수한 것이기 때문에 그 뜻을 어길 수가 없다면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으나 정책결정에 있어 국왕과 신료 간에 갈등이 표면화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숙종대 추진되었던 諸政策이, 여진정벌의 실패와 숙종의 승하로 인하여 개혁에 대한 명분을 잃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한편 예종은 대외적으로도 즉위초부터 여진정벌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즉 위한 그 해 11월에 동북변경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기 위하여 智綠延, 殷元忠 등을 東界에 보내어 山川을 순시케 하고66) 12월에는 宰樞를 불러 동계의 邊事를 물었 다.67) 마침내 예종 2년(1107) 10월 고려는 윤관을 원수, 吳延寵을 부원수로 삼아 다 시 여진 정벌에 나섰다. 당시의 병력은 17만 대군으로 고려 全域에서 병사를 징집하 고 준비한 총력전이었다. 윤관은 여진의 많은 부락을 소탕하고 諸將을 보내어 경략 한 지역의 경계를 획정하였고,68) 각 군을 동원하여 험준한 要地에 城池를 築設했는 데, 南方의 주민을 옮겨서 성 쌓는 정책을 보완하기도 하였다.

고려의 여진에 대한 2차 정벌은69) 문벌귀족 세력이 정치적으로 성장하고 국왕권의 64)『高麗史節要』卷7, 睿宗 元年 7月條. “朕覽兩府臺諫兩制 及長齡殿讎校員等奉事…其天壽寺之役 先考經始 而未幾昇遐 衆論蜂起 爭欲諫止 朕亦知其不可 第以遹追先志 未敢罷去 是則 朕之過也 其使錢之法 乃古昔帝王 所以富國便民 非我先考 殖貨而爲之也 況聞大遼 近年亦始用錢”

65) 예종 즉위년 11월에 魏繼廷을 守太尉門下侍中으로, 崔弘嗣와 이오를 門下侍郞同平章事로, 예종 원년 3월에는 金景庸을 知門下省事로, 원년 11월에 李瑋를 同知樞密院事로 임명하였다(『高麗 史』卷12, 睿宗 卽位年 11月條, 同王 元年 3月條, 11月條).

66)『高麗史』卷12, 睿宗 卽位年 11月 壬戌條 67)『高麗史』卷12, 睿宗 卽位年 12月 乙亥條

68) 兵馬鈴轄 林彦에 따르면 “其地方三百里 東至于大海 西北介于盖馬山 南接于長定二州 山川之秀 麗 土地之膏腴 可以居吾民 而本勾高麗之所有也 其古碑遺跡 尙有存焉”라 하였는데, 이를 통해 윤관이 평정한 지역의 범위를 짐작할 수 있다(『高麗史』卷96, 尹瓘傳).

69) 예종 2년의 대여진전에 대해서는 크게 3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숙종 9년의 패전이라는 국가 의 치욕을 씻기 위해 결행된 것으로 이로 인한 기미주의 상실을 恨하여 그 舊土를 회복하고자 한 것으로 이해하였다(津田左右吉, 1913,「윤관경략지역고」『조선역사지리』2, 126쪽/方東仁, 1980,「고려의 동북지방경역에 관한 연구」『영동문화』1, 44쪽/김봉두, 1990,「고려전기 대 여진정책의 성격」『전통문화연구』1, 83쪽). 둘째로는 예종 2년의 대여진전은 域外의 농경지 획득 및 농업이민 추진에 대한 욕구라는 내적 요인에 의해 일어났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金光 洙, 1977,「고려전기 대여진교섭과 북방개척문제」『동양학』7, 234∼239쪽)/金九鎭, 197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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