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肅宗·睿宗代初 政局運營과 女眞征伐

선종이 죽고 獻宗이 어린 나이로 즉위한 해 7월, 鷄林公은 門下侍郞平章事 邵台輔 와 함께 李資義의 거사를 이유로 그를 주살한 후 중서령이 되었다가 11월에 헌종의 禪位의 형식을 받아 왕위에 올랐다. 이러한 사실은 숙종의 ‘國王’으로서의 정통성과 권위에 큰 흠이 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즉위공신과 일반관료들 간의 갈등도 야기하 여 국정의 운영에도 부담이 되었다. 이에 숙종은 즉위초부터 문벌귀족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는데 정치운영의 기본방향을 두었는데, 숙종대(1095∼1105) 전 시기를 걸쳐 왕권강화를 위한 여러 방안들이 강구되었다. 南京建設, 錢幣流通策, 別武班의 설치 등 국정 전반에 걸친 대대적인 개혁, 즉 ‘新法’이라 할 수 있는 정책들이 그것 인데, 이들 대부분은 여진에 대한 2차 정벌이 단행되었던 예종대 초반까지 계속되었 다.

이러한 정책을 적극 추진하면서 숙종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시켜 주었던 尹瓘을 비 롯한 義天, 李敖, 林彦, 吳延寵 등 일련의 세력들은 鷄林公 시절부터 관계를 맺고 있 었던 府僚, 그리고 邵台輔, 王國髦 등 핵심 공신들과 內侍·文翰職 등의 近侍職 관 료들이 중심을 이루었다.51) 이들 세력에 대비되는 존재로 金上琦, 崔思諏로 대표되는 문벌귀족세력이 있었다. 이들은 정치적 입장이 보수적이었고 정국운영에도 異見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숙종이 정책을 추진하는데 비교적 순응하였으며 그를 제외한 인물들의 활동도 소극적이었다.52)

51) 서성호, 앞의 논문, 31쪽

숙종의 개혁정치를 뒷받침한 세력에 대해서는 먼저, 윤관과 의천으로 대표되는 사원세력을 설 정한 것(김광식, 1989,「高麗 肅宗代과의 王權과 寺院勢力」『白山學報』36)과 송·고려의 왕 위교체와 관련하여 송에 사행을 다녀온 사람들 및 계림공 시절의 府僚, 그리고 소태보, 왕국모 등 핵심 공신들과 특별한 관계에 있던 자들이 각기 내시·승선 등의 근시직에 포진하여 ‘측근 적인 성격의 관료군’을 형성하였다(서성호, 앞의 논문, 31쪽)는 것, 세 번째로 숙종대 일련의 정책 가운데 전폐유통과 여진정벌을 추진한 세력을 중심으로 ‘윤관 세력’이 형성되었다(정수아,

「윤관세력의 형성」, 12쪽)는 견해가 있다. 12세기 정치사 이해에 대한 연구사 정리는 다음의 글을 참고하면 된다. 박종기, 1992,「高麗政治史硏究論」『擇窩許善道先生停年紀念韓國史學論 叢』, 一潮閣

52) “大勢가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 침묵만을 지켰으며 그 어떤 건의도 하지 않았다.”(『高麗史』

卷95, 魏繼廷傳)고 한 위계정의 태도는 당시 문벌세력의 태도를 대표한다고 하겠다. 문벌귀족 의 소극적인 자세는 숙종대 주요정책을 논의할 때의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는데, 鑄錢정책에서

숙종은 이들 양 세력의 조율을 위해 3년 3월, 태자를 보좌하는 詹事府를 세우고

으로 하는 집권력 강화와 국가재정 확보라는 정치적·재정적인 필요에서 실시되었 기 때문에 왕권강화에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南京경영, 군사력 강화와 같은 개 혁을 추진하는데 있어 재정적 뒷받침이 되었다.55)

숙종 9년(1104) 윤관이 건의하고 추진한 別武班은 일차적으로는 ‘賊은 騎兵이고 我 軍은 步兵’이라는 결함을 보충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징집대상은 거의 모든 民이었는데, 私的인 군사력과 富의 축적을 가져올 수 있는 모든 계층의 民을 公的인 제도권 속으로 편제시켜 국가재정의 확충과 국왕 중심의 군사력 집중이라는 조건을 동시에 충족시켜 주었다.

이외에도 숙종대에는 사회변동에 따라 위기의식을 느낀 국가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민심의 수습을 통해 권력의 안정을 도모하는 한편으로 風水圖讖思想이나 불 교를 근거로 하여 遷都를 추진하거나, 사찰과 궁궐 건립, 종교행사들을 빈번하게 행 하는 등 일련의 정책들을 시행하였다.56)

이러한 정책들은 새로운 통치질서를 수립하려는 숙종의 의도가 적극 반영된 것인 데, 궁극적으로는 사회통합과 국력의 결집을 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결정 과정에서 대부분의 문벌귀족은 소외되었고, 개혁의 의도 자체가 자신들의 제기반을 위협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대체로 숙종의 정국방향에 반대하는 정치적 입장을 가지 고 있었다. 전폐사용은 국가가 유통경제를 장악함은 물론 수취 및 교역과정에서의 권세가나 大商富賈의 對民수탈을 방지하는 의미가 컸고, 宰樞의 자제들까지 징발대 상으로 삼았던 別武班도 당시 군사를 선발하는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5品 이상의 문 무 관료들에 대한 특권을 무시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 시기는 사회 전반에 대한 통치력의 관철이 이루어진 후, 고려의 대외팽 창의 의지가 노정되던 시기였다.

내가 국사를 맡은 이래로 늘 조심하여 北으로는 遼나라와 외교관계를 맺고 南으로는 宋나 라를 섬겨 왔는데 또 女眞이 동쪽 강적으로 되어 있다. 군사 정치에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급선무이니 긴급하지 않은 役事를 없애어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라57)

위의 조서에서 숙종은 南北으로 宋遼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가운데 새로이

55) 蔡雄錫, 1988,「高麗前期 貨幣流通의 基盤」『韓國文化』9, 90∼94쪽

56) 채웅석, 1994,「고려중기 사회변화와 정치동향」『한국사』5, 한길사, 184∼191쪽

57)『高麗史』卷11, 肅宗 6年 8月 乙巳條. “朕自御神器 居常小心 北交大遼 南事大宋 又有女眞 倔 强于東 軍國之務 安民爲急 宜罷不急之役 以安斯民”

강적으로 대두하고 있는 完顔部 女眞에 대한 위기의식을 천명하고 있다. 또 숙종 8 년경에는 완안부에 거처하고 있었던 고려인 의원이 盈歌의 친척의 병을 치료해 주고 고려에 돌아와 사람들에게 일컫기를 “黑水에 거주하는 여진이라는 부족은 날로 강대 해져, 병사들은 더욱더 날래고 용감해지고 있으며 해마다의 곡식은 매년 결실을 잘 맺는다”58)고 하여, 여진경계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곧이어 완안부의 盈歌는 蕭海里 를 격파한 戰勝을 고려에 보고하였는데59)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로 고려는 여진세력 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강성해지고 있음을 의식하게 되었다. 이에 고려에서는 숙종 8년(1103) 여진의 세력을 알아내기 위해서 난을 평정하고 성공한 것을 이유로 여진 에 축하사신을 보내게 되었고,60) 이후로는 완안부 여진과 고려 사이에 활발한 사신 교환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서로의 허실을 파악하려는 양국의 적극적인 노력이었을 것이다.

曷懶甸의 여러 부족들이 와서 붙좇으려 하자 고려에서 이를 듣고는 와서 붙좇지 못하게 하고자 하였는데, 이는 자기들에게 가까이 있어서 불리할까 여긴 것으로서 사람을 시켜 그들을 불러들여 (붙좇는 일을) 그만두게 하였다. 斜葛이 고려에 있으면서 갈라전을 왕래 하던 도중에 그 일을 모두 알게 되어, 마침내 石適歡으로 하여금 가서 갈라전의 사람들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미처 시행되지 않아 穆宗이 죽자 康宗이 자리를 이은 뒤 석적환을 파 견하여 星顯과 統門의 군사들을 데리고 가서 乙離骨嶺에 도착하여, 군사를 더욱 모집하여 活涅水로 나아가 갈라전의 지역을 돌며 배반하여 망명한 일곱 성을 거두어들이게 하였다.

고려가 사람을 보내와서 아뢰기를 “응당 의논해야 할 일이 있다”하기에 갈라전의 관속이 詳穩 斜勒과 詳穩 冶刺保로 하여금 가게 하고 석적환 역시 盃魯를 시켜 가게 하였더니, 고려에서 야라보 등을 잡아들이고 배로는 보내 주며 말하기를 “너와는 상대할 일이 없다”

고 하였다. 그리하여 다섯 군데 물줄기에 거처하는 백성들이 모두 고려에 붙좇아 들었으 며 團練使 가운데 함몰된 자가 14명이었다.61)

58)『高麗史』卷12, 肅宗 8年 7月 甲辰條,『金史』卷135, 外國下 高麗傳

59) 完顔部는 이 소해리난의 평정으로 자연 女眞諸部의 귀부를 일으킬 수 있었고, 또 국제적으 로도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金人 自此 知遼兵之易與也”라 하여 이 사건을 계기로 遼 군사력의 약점이 드러났고, 또 이 시기에 “高麗 始來通好”라는 기사가 있어 요·고려와의 관계상 변화를 맞고 있는 완안부의 행보가 주목된다(『金史』卷1 世紀1 穆宗 9년).

60)『高麗史』卷12, 肅宗 8年 7月 甲辰條

61)『金史』卷135, 外國下 高麗傳. “曷懶甸諸部盡欲來附 高麗聞之不欲使來附 恐近於己而不利也 使 人邀止之 斜葛在高麗及往來葛懶道中 具知其事 遂使石適歡往納曷懶甸人 未行而穆宗沒 康宗嗣 遣石適歡以星顯統門之兵往至乙離骨嶺 益募兵趨活涅水 徇地曷懶甸 收叛亡七城 高麗使人來告曰 事有當議者 曷懶甸官屬使斜勒詳穩冶剌保詳穩往 石適歡亦使盃魯往 高麗執冶剌保等 而遣盃魯曰

위의 기사는 이미 이 시기 曷懶甸 지역과 그 주위의 통제권을 획득하기 위한 양국 간 긴장이 고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안으로는 계층적 이해관계에 따라 문벌귀족의 불만이 커져 가는62) 한편, 기상재이 와 수취체제의 모순으로 민의 저항이 광범하게 일어나면서 민생악화라고 하는 실질 적인 문제에 부닥쳤던 고려는, 밖으로도 강성해진 여진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이 필 요했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고려의 여진정벌이라는 강경책으로 귀결되었다.

안으로는 계층적 이해관계에 따라 문벌귀족의 불만이 커져 가는62) 한편, 기상재이 와 수취체제의 모순으로 민의 저항이 광범하게 일어나면서 민생악화라고 하는 실질 적인 문제에 부닥쳤던 고려는, 밖으로도 강성해진 여진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이 필 요했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고려의 여진정벌이라는 강경책으로 귀결되었다.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