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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기 전반 高句麗와 後漢의 관계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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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세기 전반 高句麗와 後漢의 관계 변화*

18)

여 호 규**

❙국문초록❙

종래 고구려가

106

년경에 蘇子河 유역의 제

2

현도군을 渾河 방면으로 축출하였다고 이해하였다

.

그런데 제 반 사료를 검토한 결과

,

고구려가 후한의 정세 악화를 틈타

97

년경에 제

2

현도군을 점령한 사실을 확인하였다

.

그리고

105

년에는 고구려가 제

2

현도군과 요동군의 郡界였던 遼東故塞를 넘어 요동군 관내까지 진격하였다

.

후 한은 渾河 유역에 제

3

현도군을 설치하고

(106

),

遼東故塞를 수리하여 고구려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

이에 고구려는 제

3

현도군과 內屬關係를 체결하여 외교관계를 재정립하였다

(111

).

이때 양국이 遼東故塞 의 關門을 통해 교섭함에 따라 遼東故塞는 점차 양국의 국경선으로 변모하였다

.

이로써 고구려는 후한에 대한 공격을 잠시 유보해야 했지만

,

遼東故塞 외곽의 요동동부 산간지대에서 후한의 간섭을 받지 않고 세력을 확장 할 수 있었다

.

고구려는 요동고새 외곽에서 세력을 확장한 다음

, 118

년부터 다시 후한을 공략하였다

.

요동동부 산간지대 의 주민집단을 동원하여 후한을 공격하는 한편

,

鮮卑와 연합하여 요동군의 중심부까지 진격하였다

.

다만

122

년 이후에는 선비와의 연합 공격보다 遼東故塞 외곽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며 후한에 대한 공격루트를 다변 화하였다

.

이를 통해 고구려는 원산만 일대의 東濊와 압록강 하류의 小水貊 등을 예속시켰다

.

[

주제어

]

高句麗

,

後漢

,

玄菟郡

,

遼東郡

,

遼東故塞

,

鮮卑

❙목 차❙

머리말

.

後漢 제

2

玄菟郡의 축출 시기와 그 배경

.

3

현도군 內屬을 통한 後漢과의 관계 재정립

.

後漢에 대한 공격루트 다변화와 鮮卑와의 연합 도모 맺음말

* 이 논문은 2014년도 한국외국어대학교 학술연구비 지원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임.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 hgyeo1123@hufs.ac.kr

(2)

머리말

주지하듯이 고구려는 漢의 玄菟郡을 요동방면으로 축출하면서 국가적 성장을 이룩하였다

.

기원전

107

년 에 한이 압록강 중류유역을 포괄하는 지역에 현도군을 설치하자

(

1

현도군

),

이 지역 주민집단이 기원전

82~75

년에 제

1

현도군을 축출하였다

(

2

현도군

).

그 뒤 漢이 압록강 서북쪽의 蘇子河 연안에 제

2

현도군을 설 치하여 원고구려지역에 대한 분리통제책을 시행하자

,

桂婁集團이 이를 봉쇄하고 국가체제를 확립하였다

.

그 리고는 서기

1

세기 말

~2

세기 초에 제

2

현도군을 渾河 방면으로 축출하였다

(

3

현도군

).

1)

고구려의 국가적 성장에 따라 한의 현도군도 여러 차례 옮겨진 것이다

.

이 가운데 제

1

현도군 및 제

2

현도 군 시기가 고구려의 국가형성기에 해당한다면

,

3

현도군 이후는 고구려가 국가체제를 확립한 다음 후한과 본격적으로 외교관계를 전개한 시기라 할 수 있다

.

그런데 종전 연구는 주로 제

1

현도군 및 제

2

현도군 시기에 집중되었다

.

특히 제

1

현도군의 위치나2)

2

현도군의 분리통제책 봉쇄 시점3) 등에 대해 다양한 논의가 이루 어져 고구려의 국가형성을 다채롭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

반면 제

3

현도군 시기 후한과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의외로 적은 편이다

.

이는 이 시기의 관련 사료가 주 로 전쟁 기사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

그리하여 종전 연구는 주로 고구려와 후한의 전쟁양상을 검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

4) 이를 통해 고구려가 제

3

현도군이나 요동군 등을 공격하며 요동방면으로 진출하던 양 상을 파악할 수 있었지만

,

후한과의 외교관계에 대해서는 거의 검토하지 못하였다

.

이에 본고에서는

2

세기 전반 고구려가 제

3

현도군을 중심으로 후한과 외교관계를 전개하던 양상을 고찰하 고자 한다

.

특히 최근 後漢의 邊郡政策이나5) 요동군

·

낙랑군

·

현도군의 지배체제를6) 검토한 연구성과가 다 수 제출되었는데

,

이를 참조하여 전쟁 기사에 담긴 외교적 양상을 다각도로 검토하고자 한다

.

7) 아낌없는 질 정을 바란다

.

1) 李丙燾, 「玄菟郡考」,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田中俊明, 「高句麗の興起と玄菟郡」, 󰡔朝鮮文化硏究󰡕 1, 1994 참조. 2) 연구현황은 김미경, 「제1현도군의 위치에 대한 재검토」, 󰡔실학사상연구󰡕 24, 2002 참조.

3) 연구현황은 여호규, 「고구려의 국가형성과 한의 대외정책」, 󰡔군사󰡕54, 2005; 윤용구, 「고구려의 흥기와 책구루」, 󰡔고구려의 역사와 대외관계󰡕 서경, 2006, 참조.

4)李鍾旭, 「고구려 초기의 정치적 성장과 대중국관계」, 󰡔동아사의 비교연구󰡕, 1987, 일조각(1999 󰡔한국의 초기국가󰡕 아르케 재수록); 권오중, 「한과 고구려의 관계」, 󰡔고구려연구󰡕 14, 2002; 이인철, 「고구려와 고대 중국의 전쟁」, 󰡔고구려연구󰡕 24, 2006; 김미경, 「고구려 전기의 대외관계 연구」 연세대 박사학위논문, 2007; 여호규, 「고구려 초기 對中戰爭의 전개과정과 그 성격」, 󰡔동북아역사논총󰡕15, 2007a.

5)권오중, 「한대 변군의 部都尉」, 󰡔동양사학연구󰡕88, 2004; 김경호, 「한대 변군지배의 보편적 원리와 그 성격」, 󰡔동양사학연 구󰡕 91, 2005; 김병준, 「진한제국의 이민족 지배 ‒ 부도위 및 속국도위에 대한 재검토」, 󰡔역사학보󰡕 217, 2013a; 김병준,

「진한제국의 변경 이민족 지배와 부도위」, 󰡔전통시대 동아시아의 외교와 변경기구󰡕, 동북아역사재단, 2013b.

6)권오중, 「요동군 중부도위와 고구려의 신성」, 󰡔고구려의 국제관계󰡕, 고구려연구재단, 2005; 김병준, 「중국 고대 簡牘자료를 통해 본 낙랑군의 군현지배」, 󰡔역사학보󰡕189, 2006; 이성규, 「중국군현으로서의 낙랑」, 󰡔낙랑문화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07; 서영수, 「요동군의 설치와 전개」, 󰡔요동군과 현도군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08; 배진영, 「한대 요동군의 군현지배」,

󰡔요동군과 현도군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08; 윤용구, 「현도군의 군현지배와 고구려」, 󰡔요동군과 현도군 연구󰡕, 동북아역 사재단, 2008; 방향숙, 「후한의 변군 운용과 요동·현도군」, 󰡔요동군과 현도군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08; 권오중 외, 󰡔낙 랑군 호구부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10.

7) 이 글은 여호규, 2007a 앞의 글의 제3장 1절을 대폭 수정·확장한 것임을 밝혀둔다.

(3)

Ⅰ. 後漢 제2玄菟郡의 축출 시기와 그 배경

고구려가 蘇子河 연안의 제

2

현도군을 渾河 방면으로 축출한 시기와 관련하여 다음 기사가 많은 주목을 받 았다

.

-

㉠ 玄菟郡

, 武帝元封四年開. 高句驪, 莽曰下句驪. 屬幽州.

戶四萬五千六

,

口二十二萬一千八百四十五

.

縣三:高句驪

, 遼山, 遼水所出, 西南至遼隊入大遼水. 又有南蘇水, 西北經塞外.

上殷台

, 莽曰下殷.

西蓋 馬

. 馬訾水西北入鹽難水, 西南至西安平入海, 過郡二, 行二千一百里. 莽曰玄菟亭. (

󰡔漢書󰡕 권

29

하 地理 志

8

)

-

㉡ 玄菟郡

武帝置. 雒陽東北四千里.

六城

,

戶一千五百九十四

,

口四萬三千一百六十三

.

高句驪

遼山, 遼水出[一].

西蓋馬 上殷台 高顯

故屬遼東.

候城

故屬遼東.

遼陽

故屬遼東[二]. [一] 山海經曰:「遼水出白平東.」 郭璞曰:「出塞外(銜)[衛]白平山. 遼山, 小遼水所出.」

[二] 東觀書 “安帝即位之年, 分三縣來屬.”

(

󰡔後漢書󰡕 志

23

郡國

5,

하단의

[

]

[

]

는 唐 李賢의 付注

)

-

㉠은 전한 말경의 제

2

현도군

,

8)

-

㉡은 후한 중반경 제

3

현도군의9) 상황을 각기 기술한 것이다

.

그에 따르면 현도군의 屬縣은 전한대에는

3

개였는데

,

후한대에는

6

개로 늘어났다

.

이 가운데 고구려

·

서개마

·

상은대 등

3

현은 前漢代부터 현도군의 속현이었지만

,

고현

·

후성

·

요양 등

3

현은 본래 요동군 소속이었다 가 安帝가 즉위하던

106

년에 현도군 소속으로 변경되었다

(

唐 李賢이 付注한 󰡔東觀書󰡕 기사

).

10)

106

년에 현 도군의 구성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

실제 요동태수를 역임한 陳禪의 사례를 통해 候城縣이

121

년에 현도군의 속현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

11)그리고 󰡔後漢書󰡕 郡國志의 기록이

140

(

順帝 永和

5

)

을 기준으로 작성된 사실을 고려하면

,

12)

106

년에 개편된 현도군의 구성은 그 이후 계속 유지되었다고 볼 수 있다

.

이에 많은 연구자들이 고구려가

106

년을 전후하여 蘇子河 연안의 제

2

현도군을 渾河 방면으로 축출하였을 것으로 파악한다

.

13) 특히 고구려가 요동군을 대대적으로 공략하던

105

년에 제

2

현도군 지역을 점령하였다고 파악하기도 한다

.

14) 그럼 고구려가 제

2

현도군을 축출한 시기는 구체적으로 언제일까

?

이와 관련하여 고구려

8) 󰡔漢書󰡕 지리지의 郡國別 戶口籍은 元始2년(서기전 2)의 上計簿에 의한 것이며, 所屬縣目은 元延-綏和 年間(서기전 9~8년) 에 작성되었다(윤용구, 앞의 글, 2006, 12쪽 각주 17).

9) 󰡔後漢書󰡕 郡國志의 기록은 順帝 永和5년(140년)을 기준으로 작성되었다(󰡔後漢書󰡕 志19 郡國1 河南尹조).

10) 四庫全書의 󰡔東觀漢紀󰡕 권5 지리지1에 “安帝即位之年, 分高顯·候城·遼陽屬玄菟.”라는 기사가 있다. 한편 안제가 즉위한 연도를 107년으로 보기도 하지만, 이는 永初라는 연호를 제정한 연도이고, 실제 즉위 시점은 106년 8월이다.

11) 󰡔後漢書󰡕 권51 陳禪전:“永寧元年(120) 西南夷撣國王獻樂及幻人, 能吐火, 自支解, 易牛馬頭. 明年(121) 元會, 作之於庭, 安 帝與群臣共觀, 大奇之. 禪獨離席舉手大言曰 (중략) 左轉為玄菟候城障尉.”

12) 󰡔後漢書󰡕 志19 郡國1 河南尹조.

13) 白鳥庫吉·箭內亘, 「漢代の朝鮮」, 󰡔滿洲歷史地理󰡕(제1권) 南滿洲鐵道株式會社, 1913, 96쪽; 譚其驤 주편, 󰡔“中國歷史地圖 集”釋文匯編·東北卷󰡕, 中央民族學院出版社, 1988, 16~17쪽.

(4)

105

(

元興 元年

)

에 후한을 공략하던 양상을 기술한 다음 기사를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

-

㉠ 元興元年

(105)

春正月 高句驪寇郡界

.

秋九月

,

遼東太守耿夔擊貊人

,

破之

. (

󰡔後漢書󰡕 권

4

孝和帝紀

)

-

㉡ 遷遼東太守

.

元興元年

,

貊人寇郡界

,

夔追擊

,

斬其渠帥

. (

󰡔後漢書󰡕 권

19

열전

9

耿夔전

)

-

㉢ 元興元年

(105)

其年

,

遼東貊人反

,

鈔六縣

,

發上谷

·

漁陽

·

右北平

·

遼西烏桓討之

. (

󰡔後漢書󰡕 志

11

天文중

)

-

㉣ 後句驪王宮

(

중략

)

及長勇壯

,

數犯邊境

.

和帝 元興元年

(105)

,

復入遼東

,

寇略六縣

,

太守耿 夔擊破之

,

斬其渠帥

. (

󰡔後漢書󰡕 권

85

동이열전 고구려전

)

-

㉤ 至殤安之間

(106),

句麗王宮數寇遼東

. (

󰡔三國志󰡕 권

30

魏書 동이전 고구려전

)

-

㉥ 至殤安之間

(106),

其王名宮

,

數寇遼東

. (

󰡔梁書󰡕 권

54

동이열전 고구려전

)

-

㉦ 元興元年

(105)

,

高句驪王宮入遼東塞

,

寇略六縣

. (

중략

)

秋九月

,

遼東太守耿夔擊高句驪

,

破 之

. (

󰡔資治通鑑󰡕 권

48

漢紀

40

和帝

)

-

㉧ 五十三年

(105)

春正月 王遣將入漢遼東

,

奪掠六縣

.

太守耿夔出兵拒之

,

王軍大敗

.

秋九月

,

耿夔 擊破貊人

. (

󰡔三國史記󰡕 고구려본기

3

태조왕

53

)

상기 기사를 종합하면 고구려가

105

1

(

)

에 요동을 侵入하여

6

현을 寇略하자

,

이해

9

월에 요동태수 인 耿夔가 반격에 나서

(

고구려의

)

渠帥를 참수하였다고 한다

.

그런데 고구려의 요동 공격이 ②

-

·

㉡에는

寇郡界

’,

-

㉦에는

入遼東塞

라는 형태로 진행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

-

㉦의

入遼東塞

라는 표현을 참조 하면

,

-

·

㉡의

郡界

遼東郡의 郡界

임을 쉽게 알 수 있다

. ‘

遼東塞

遼東郡의 郡界

는 동일한 실체인 것이다

.

고구려가

105

년에 요동을 공격하기 위해 넘었던 후한의 방어시설은 당시

遼東郡의 郡界

로 기능하 던

遼東塞

였으며

,

이에

遼東塞

를 관할하던 요동태수 경기가 고구려 군을 추격하였던 것이다

.

그런데 ①

-

㉠에 따르면

2

현도군 관내에는 南蘇水

(

蘇子河

)

가 있는데

,

서북으로 塞外를 경유한다

고 한 다

.

15)이 기사의 전거 자료가 정리된 前漢 말경에 소자하 일대는 제

2

현도군이 설치되었지만

塞外

로 인식되 었던 것이다

.

전한 말경에 요동평원과 蘇子河 유역 사이에

가 존재했다는 것인데

,

이 塞는 前漢 초에 수리

14) 池內宏, 「漢魏晉の玄菟郡と高句麗」, 󰡔史苑󰡕14-3, 1941(󰡔滿鮮史硏究󰡕(상세1책), 吉川弘文館, 1951, 196~197쪽); 和田淸,

「玄菟郡考」, 󰡔東方學󰡕1, 1951(󰡔東亞史硏究󰡕(滿洲篇), 東洋文庫, 1955, 2~7쪽).

15) 이 기사를 “또한 南蘇水가 있는데, 현도군의 바깥을 따라 서북 방향으로 흐른다(There was also the Nansu River, which flowed northwestward along the outside of the Xuantu)”로 해석하기도 한다(Mark E. Byington, “Historical Geography of the Han Commanderies in Korea”,

The Han Commanderies in Early Korean History

, Korea Institute Harvard University, 2013, p.323). ①-㉠의 ‘塞’는 ‘현도군의 경계’를 지칭하며, 蘇子河 바로 안쪽에 위치했다는 것이다. 이에 최근 蘇子河 연안에서 확인되었다는 漢代 烽燧를 蘇子河를 경계로 모두 안쪽(南岸)에 표기하였다(Mark E.

Byington,

ibid.

, 2013, p.325). 그렇지만 漢代 烽燧 유적은 蘇子河 南北岸에서 모두 확인되며(李新全, 「高句麗早期遺存及 其起源硏究」, 吉林大 박사학위논문, 2008, 284쪽 지도), ‘經’은 일반적으로 ‘경유하다’나 ‘통과하다’로 풀이된다. 또한 “남소 수는 漢武邊塞 안쪽에서 발원하였지만 서북쪽은 塞外를 경유한다”로 풀이하기도 한다(李新全, 앞의 논문, 2008, 81~82쪽).

①-㉠의 ‘塞’는 ‘漢武邊塞’ 곧 漢 武帝가 축조한 邊塞(烽燧 유적)를 지칭하며, 소자하 상류는 漢武邊塞의 안쪽에 해당하지만, 하류인 서북 구간은 그 바깥쪽을 흐른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①-㉠을 일별하면 ‘西北經塞外’라는 구절이 南蘇水 곧 蘇子河의 하류에 국한되지 않고 蘇子河 전체를 지칭한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5)

遼東故塞

16)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

더욱이 ①

-

㉡에 인용된 󰡔山海經󰡕에 대한 郭璞의 주석을 통해 遼 水 곧 渾河 상류 일대도 塞外로 인식된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

또한 󰡔水經注󰡕를 통해 蘇子河 서남쪽의 太子 河 상류 일대도 塞外로 인식되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

17)

전한 말경에 소자하 유역에 제

2

현도군이 존재했지만

,

漢人들은 제

2

현도군과 그 주변 지역을 塞外로 파악 하고

, ‘

遼東故塞

를 전통적인 邊塞로 인식했던 것이다

.

18) 이에 따라 제

2

현도군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에는

遼東故塞

가 塞內의 요동군과 塞外의 제

2

현도군을 구분하는 경계로 기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즉 고구려가

105

년 요동을 공격할 때 넘었던 遼東郡의 郡界 곧

遼東塞

는 전한 초 이래의

遼東故塞

로 파악된다

.

현재 요동지역에 구축된 최초의 長城인 燕

·

·

漢 장성은 요서 지역의 요녕성과 내몽고자치주 경계선 약 간 위쪽을 따라 동서 방향으로 놓여 있는데

,

요하 중류 서안의 法庫지역까지 그 유적이 확인된다

.

19) 그리고 요하 동쪽에서는 渾河를 따라 墩臺 유적이 이어진다

.

20)墩臺 유적은 渾河 北岸을 따라

3~4

리 간격으로 동서 로 배열되어 있는데

,

撫順 동쪽의 章黨에서 남쪽으로 꺾여 혼하 지류인 東洲河 東岸을 따라 남으로 關口 營 城子까지 이어진다

.

특히 돈대 유적과 그 주변에서 前漢 초중반의 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전한 초기에 수리했다는 遼東故塞의 일부로 파악된다

.

21)

이렇게 본다면 고구려는

105

년에 遼東郡의 郡界로 기능하던

遼東塞

곧 渾河 북안과 撫順 동쪽을 지나던

遼 東故塞

를 넘어 요동군 관내의

6

현을 공략한 것으로 파악된다

.

고구려는

105

년에 塞外의 제

2

현도군 지역을 지 나 塞內의 요동군을 공략하였던 것이다

.

이는 고구려가

105

년 이전에 이미 遼東의 塞外 지역인 제

2

현도군을 점령하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

이러한 점에서 ②

-

㉣ 󰡔後漢書󰡕 고구려전의 기사가 주목된다

.

그에 따르면 고구 려 왕 宮이 장성한 다음 자주 邊境을 침범하였다고 하며

, 105

년의 요동 공격은

復入遼東

곧 최초가 아니라 재 차 이상의 공격으로 파악된다

.

고구려가

105

년 이전부터 여러 차례 후한의 변경을 공략하였던 것이다

.

16) 󰡔史記󰡕 권105 朝鮮열전:“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爲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屬燕.”

17) 󰡔水經注󰡕 小遼水조에는 漢代의 大梁水 곧 太子河가 塞外에서 발원하여 서남으로 흘러 小遼水 곧 지금의 渾河와 합류한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는 太子河 상류가 塞外였고, ‘遼東故塞’가 태자하 중하류의 어느 지점을 지나갔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18) 최근 蘇子河 연안에서 漢代의 烽燧(簫景全, 「遼東地區燕秦長城障塞的考古學考察硏究」, 󰡔北方文物󰡕2000-3, 2000), 通化 ‒白

山 地域에서 燕·秦·漢代의 烽燧·障塞 유적이 다수 조사되었다고 한다(李樹林·李娟, 「吉林省燕秦漢遼東長城考古調査槪 述」, 󰡔社會科學戰線󰡕2011-10, 2011; 李樹林·李娟, 「通化渾江流域燕秦漢遼東長城障塞調査」 󰡔東北史地󰡕2012-2, 2012). 이 에 通化 ‒ 白山地域의 烽燧·障塞 유적의 조영시기를 戰國時代 ‒ 前漢 중기로 보기도 하는데(李樹林·李娟, 앞의 글, 2012, 15쪽), 이 경우 蘇子河 유역은 遼東故塞의 ‘塞內’로 파악된다. 그렇지만 蘇子河 연안 봉수의 조성시기가 전한 중후반으로 상 정된다는 점에서(簫景全, 앞의 글, 2000, 82쪽) 通化 ‒ 白山지구에 그 보다 빨리 長城 유적을 조영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蘇 子河 연안 漢代 烽燧의 성격은 제1현도군 시기의 障塞線(簫景全, 앞의 글, 2000, 82쪽; 李新全, 앞의 논문, 2008, 66~76쪽) 또는 제2현도군 시기의 군사방어망(이성제, 「현도군의 개편과 고구려」, 󰡔한국고대사연구󰡕64, 2011, 308~312쪽) 등으로 파 악되고 있다. 어느 경우이든 前漢 초에 수리한 遼東故塞보다 늦게 조영한 방어시설로 상정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필자도 동 의한다. 다만 정확한 축조 시점에 대해서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19) 馮永謙·何溥瀅, 󰡔遼寧古長城󰡕, 遼寧人民出版社, 1986; 李慶發·張克擧, 「遼西地區燕秦長城調査報告」, 󰡔遼海文物學刊󰡕

1991-2, 1991; 李健才·劉素雲(주편), 󰡔東北地區燕秦漢長城和郡縣城的調査硏究󰡕, 吉林文史出版社, 1997.

20) 漢代의 邊塞는 국경지대의 방어시설로 지형조건과 재료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축조했다. 가령 河西지역 邊塞 유적은 참호, 성벽, 돈대나 보루, 천연장벽, 繩索이나 柵欄, 天田[모래밭] 등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吳礽驤, 󰡔河西漢塞調査 硏究󰡕, 文物出版社, 2004, 182~186쪽).

21) 孫守道, 「漢代遼東長城列燧遺跡考」 󰡔遼海文物學刊󰡕 1992-1, 1992, 14~15쪽; 王綿厚, 「燕秦漢時代的東北障塞」, 󰡔東北秦漢 史󰡕 遼寧人民出版社, 1994, 223~224쪽; 簫景全, 앞의 글, 2000, 79~81쪽.

(6)

따라서 고구려가 소자하 유역의 제

2

현도군을 점령한 것은

105

년 요동군을 공격하기 이전으로 파악된다

.

즉 고구려는

105

년 이전에 이미 소자하 유역의 제

2

현도군 지역을 점령한 다음

, 105

년에 종래 요동군과 제

2

현도군의 경계 역할을 하던

遼東故塞

를 넘어 요동군 관내로 진입하였던 것이다

.

이처럼

105

년 당시 제

2

현 도군은 사실상 괴멸된 상태였기 때문에 후한에서는 현도태수가 아니라 요동태수인 耿夔가 고구려 방어에 나 섰던 것이다

.

그렇다면 고구려가 제

2

현도군을 점령한 시기는 정확히 언제일까

?

후한을 건국한 광무제는 강경책보다는 유화적인 대외정책을 추진하였는데

,

동방지역에서도

41

년에 요동태 수로 부임한 祭肜이 위무책으로 변경지역을 안정시켰다

.

이때 玄菟 지역도 안정되었다는 것으로 보아22)

1

세 기 중반에는 제

2

현도군이 정상적으로 작동한 것으로 파악된다

.

고구려가 소자하 유역의 제

2

현도군을 점령한 시기는

1

세기 중반 이후인 것이다

.

그런데

1

세기 후반 明帝와 章帝 시기까지만 하더라도 비교적 안정되었던 후한의 대내외 정세는23) 和帝代

(88~105

)

에 접어들면서 급격하게 악화된다

.

먼저

1

세기 말경의 잇따른 자연재해와 외척의 발호로 내부 정세가 급속하게 불안정한 상태로 변모했으며

,

지방행정제도가 전반적으로 정체되었다

.

24)특히 자연재해의 피해가 심각하여 국가적인 차원에서 빈민구제책 과 더불어 의례 간소화 등 각종 儉約策을 시행하며 지방행정제도까지 쇄신했다

.

25) 이로 인해 邊郡에 대한 중앙의 지원이 곤란해짐에 따라26) 후한의 군사방어력은 급격히 약화되었고

,

이를 틈타 鮮卑

,

烏桓

,

羌族 등 이 후한의 변경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

먼저 후한의 서방 지역에서 羌族이 크게 발호하였다

.

강족은

93

년경부터 후한에 반기를 들기 시작하여

97

년에는 隴西 지역을 침입하여 長吏를 살해하였다

.

27) 이때부터 강족은 내속과 침공을 반복하며 후한의 서방 지역을 교란하였는데

, 107

년에는 隴道를 끊고 크게 침공하였다

.

그리하여

108

년에는 동으로는 趙와 魏

,

남 으로는 益州 그리고 三輔 지역까지 침략하기에 이르렀다

.

이에 따라

110

년에는 涼州 폐기론이 제기되고

, 111

년에는 그 침략이 河東과 河內 지역에까지 이를 정도였다

.

28)

또한 匈奴가 북으로 물러나고 烏桓이 남하한 후

,

그 빈 공간을 채우면서 등장한 鮮卑는29) 처음에는 흉노 에 복속되었다가

1

세기 말경 흉노의 쇠퇴를 틈타 급속하게 성장하였다

. 89~91

년 후한이 북흉노를 대대적으 로 공략하여 격파하자

,

흉노의

10

여만 落이 선비로 편입되었는데

,

이를 계기로 선비가 크게 강성해졌다

.

30) 선비는

97

년 灤河 하류의 肥如 공격을 시작으로

101

년에는 右北平

·

漁陽

, 106

년에는 어양 등 요서지역의

22) 󰡔後漢書󰡕 권20 祭肜列傳: “西自武威, 東盡玄菟及樂浪, 胡夷皆來內附, 野無風塵. 乃悉罷緣邊屯兵.”

23) 󰡔後漢書󰡕 권2 明帝紀 永平12년 是歲조:“天下安平, 人無傜役, 歲比登稔, 百姓殷富.”

󰡔後漢書󰡕 권90 열전80 烏桓鮮卑전:“明章二世, 保塞無事.”

小林總, 「後漢の少數民族統御官に關する一考察」, 󰡔九州大學東洋史論集󰡕 17, 1989, 101~104쪽. 24) 紙屋正和, 󰡔漢時代における郡縣制の展開󰡕, 同朋社, 2009, 691~715쪽.

25) 上谷浩一, 「後漢中期の地方行政刷新とその背景」, 󰡔東洋學報󰡕75-3·4, 1994, 198~209쪽.

26) 多田狷介, 「黃巾の亂前史」, 󰡔漢魏晋史の硏究󰡕 汲古書院, 1999, 49~59쪽; 野口優, 「後漢邊境における軍事防衛體制の轉換」

󰡔古代文化󰡕2014-1, 2014, 78쪽.

27) 󰡔後漢書󰡕 권4 和帝紀 永元 5년 시제조, 永元九年 8월조. 28) 김경호, 앞의 글, 2005, 52~53쪽.

29) 三崎良章, 󰡔五胡十六國󰡕 東方書店, 2006, 10쪽.

30) 王慶獻, 「烏桓鮮卑勢力消長」 󰡔內蒙古大學學報(哲學社會科學版)󰡕 1991-4, 1991, 9~11쪽.

(7)

후한 변군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였다

.

31)

1

세기 말경

,

후한이 내부 정세의 불안정과 함께 서방과 동방에서 각기 강족과 선비의 침공에 직면한 것이 다

.

32)특히

97

년경부터 선비가 후한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였는데

,

이때 요동태수 祭參은 鮮卑의 肥如 침공을 방어하지 못했다는 죄목으로 주살되었다

.

33) 이로 인해 동방지역에 대한 후한의 지배력은 급격히 약화되고

,

요동군의 지원을 받던 제

2

현도군의 지배력도 크게 흔들렸을 것이다

.

그러므로 고구려 왕 宮이

105

년 이전부 터 후한의 변경을 자주 공격한 사실을 상기하면

,

선비가 후한을 공격하기 시작한

97

년을 전후하여 제

2

현도군 을 공격하여 점령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파악된다

.

34)

결국

1

세기 말경에 후한의 대내외 정세가 급속도로 악화되자

,

고구려가 이를 틈타 제

2

현도군을 점령하였 다고 볼 수 있다

.

35) 다만 이때 후한은 요동태수 祭參이 주살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현도군을 재정비할 겨를이 없었다

.

36)이에 따라 고구려가

105

遼東塞

를 넘어 요동군 관내를 공격할 때까지 현도군은 사실상 괴멸된 상태로 방치되었다고 파악된다

. 105

년 고구려의 요동 공격을 기술한 사료 ②에 현도군과 관련한 표현이 보 이지 않고

,

요동태수인 耿夔가 고구려의 침공을 방어한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

Ⅱ. 제3현도군 內屬을 통한 후한과의 관계 재정립

이상을 통해 고구려가

97

년경에 제

2

현도군을 점령하였고

,

그 여세를 몰아

105

년에

遼東塞

를 넘어 요동군 관내까지 공략한 사실을 파악하였다

.

이로 인해 제

2

현도군은 고구려에 의해 점령당한

97

년경부터

105

년까지 사실상 괴멸된 상태로 방치되었다고 추정된다

.

그러므로 安帝가 즉위하던

106

년에 요동군 소속의 高顯

·

候 城

·

遼陽 등

3

현을 현도군 소속으로 변경했다는 ①

-

㉡ 기사는 고구려의 제

2

현도군 점령이 아니라

,

후한이 괴 멸되었던 현도군을 재정비하던 양상을 반영한다고 보아야 한다

.

<

1>

에서 보듯이 요동군 소속이었던 高顯

·

候城

·

遼陽 등의 위치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어 있다

.

이 가운데 遼陽은 漢代에 大梁水로 불린 太子河가 遼水로 흘러드는 곳으로37)遼中 偏堡子古城으로 비

31) 방향숙, 앞의 글, 2008, 242~245쪽; 鄭亮, 「試論東漢與鮮卑的和戰關係」, 󰡔劍南文化󰡕 2013-9, 2013, 181쪽.

32) 羌族의 침공으로 후한의 재정과 병력이 소모되자, 선비와 고구려 등이 후한의 변군을 대거 공략했다고 보기도 한다(薛海波,

「試論兩漢魏晋時期的玄菟郡」, 󰡔東北史地󰡕 2004-6 2004, 27쪽).

33) 󰡔後漢書󰡕 권4 和帝紀 永元九年(97) 八月조 소인 東觀記 “鮮卑千餘騎攻肥如城, 殺略吏人, 祭參坐沮敗, 下獄誅.”

34) 孫進己·王綿厚, 󰡔東北歷史地理󰡕(제1권) 黑龍江人民出版社, 1989, 391~392쪽에서도 고구려가 安帝가 즉위하던 해보다 이 른 시기에 제2현도군을 점령하였을 가능성을 제기한 바 있다.

35) 고구려를 건국한 주민집단은 기원전 82~75년경에도 烏桓이 흥기하여 전한의 변군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제1현도군을 압록 강의 서북방면으로 몰아낸 바 있다(여호규, 앞의 글, 2005).

36) 105년에 고구려의 공격을 방어한 耿夔의 경우, 89년(永元初)에 車騎將軍인 竇憲의 假司馬가 되었다가 騎都尉를 거쳐 91년 에 大將軍의 左校尉로 임명되어 북흉노 정벌에 참가하였다. 92년에는 북흉노의 선우에게 璽綬를 전해주기도 하였다. 얼마 뒤 中郞將으로 승진하였으나 두헌이 패배함에 따라 경기도 免官되었다. 그 뒤 長水校尉로 복직되었다가 五原太守를 거쳐 遼東太守에 임명되었으며, 105년(元興元年)에 고구려에 대한 반격에 나섰다(󰡔後漢書󰡕 권19 열전9 耿夔전).

37) 󰡔漢書󰡕 권28하 地理志8하 요동군조:“大梁水西南至遼陽入遼.”

(8)

<표 1>」 제3현도군의 군현 치소에 관한 제설38)

분 류 郡治所

(高句麗縣) 西蓋馬 上殷台 高顯 候城 遼陽 望平

池內宏 撫順

勞動公園古城

瀋陽 上伯官屯古城

和田淸 勞動公園古城 上伯官屯古城 瀋陽 부근 鐵嶺 부근

(

玄菟郡

)

田中俊明 勞動公園古城 瀋陽

魏家樓子古城

撫順 東洲

小甲邦古城 上伯官屯古城 瀋陽

舊城區古城

遼中 偏堡子古城

鐵嶺 新台子古城

(

玄菟郡

)

陳連開 上伯官屯古城 勞動公園古城

(

蓋牟城

)

偏堡子古城

中國歷史

地圖集 上伯官屯古城 勞動公園古城

(

蓋牟城

)

鐵嶺縣城

瀋陽

古城子古城 偏堡子古城

新民 南大古城

(

玄菟郡

)

李健才 上伯官屯古城 勞動公園古城

(

蓋牟城

)

鐵嶺 부근 偏堡子古城

東北歷史地理 勞動公園古城 上伯官屯古城 小甲邦古城 魏家樓子古城 舊城區古城 偏堡子古城 新台子古城

(

遼東郡

)

東北古代交通 勞動公園古城 魏家樓子古城 上伯官屯古城 偏堡子古城

新民 大古城子

(?)

王綿厚

1986

上伯官屯古城

王綿厚

1994

勞動公園古城

(

後漢末

)

→ 上伯官屯古城

魏家樓子古城 舊城區古城 偏堡子古城 新台子古城

(

遼東郡

)

孫守道 勞動公園古城 魏家樓子古城 舊城區古城

武家昌 東洲

小甲邦古城

金殿士 古城子古城

38) 참고문헌은 다음과 같다.

池內宏, 「玄菟郡の屬縣高縣の遺址」, 󰡔滿鮮史硏究󰡕(上世 제1책) 吉川弘文館, 1950.

和田淸, 「玄菟郡考」, 󰡔東方學󰡕1: 1955, 󰡔東亞史硏究󰡕(滿洲篇) 東洋文庫, 1951.

田中俊明, 「高句麗の興起と玄菟郡」, 󰡔朝鮮文化硏究󰡕 1, 1994.

陳連開, 「唐代遼東若干地名考釋」, 󰡔社會科學輯刊󰡕 1981-3, 1981.

潭其驤, 󰡔中國歷史地圖集󰡕(釋文匯編: 東北券) 中央民族學園出版社, 1988.

李健才, 「玄菟郡的建置和遷移」, 󰡔東北地方史硏究󰡕1990-1, 1990.

孫進己·馮永謙, 󰡔東北歷史地理󰡕(一), 黑龍江人民出版社, 1989.

王綿厚·李建才, 󰡔東北古代交通󰡕, 瀋陽出版社, 1990.

王綿厚, 「漢晋隋唐之南蘇水與南蘇城考」, 󰡔歷史地理󰡕4, 1986.

王綿厚, 󰡔秦漢東北史󰡕, 遼寧人民出版社, 1994.

孫守道, 「漢代遼東長城列燧遺迹考」, 󰡔遼海文物學刊󰡕 1992-1, 1992.

武家昌, 「撫順市小甲邦漢代遺址」, 󰡔中國考古學年監󰡕, 1990.

金殿士, 「瀋陽市南市區發現戰國墓」, 󰡔文物󰡕 1959-4, 1959.

(9)

<지도 1> 渾河-蘇子河 유역의 漢代 평지성

정된다

.

그리고 본래 中部都尉의 治所가 설치되었던 候城은 크게 瀋陽 舊城區古城과 上伯官屯古城 등으로 견 해가 나뉜다

.

39) 이중

候城

이라는 명칭이 邊塞의 要害處에 축조한

候城

이라는 명칭에서 유래했고

, 121

년에 현도군 산하의 候城에 邊塞를 관리하던

障尉

가 존재한 사실을40) 고려한다면

,

遼東故塞에 가까이 위치한 渾 河 북쪽의 심양 구성구고성이 더 적합하다고 파악된다

.

41) 高顯의 경우 심양 동쪽의 上伯官屯古城이나 남쪽 의 魏家樓子古城으로 비정되는데

,

양자 가운데 어느 쪽이라고 단정할 만한 명확한 논거는 없는 상태이다

.

이처럼 高顯의 위치를 단정하기는 힘들지만

,

高顯

·

候城

·

遼陽 등은 대체로 요동군의 북부인 渾河 연안 일대에 위치했다고 볼 수 있다

.

그런데 漢은 서기

30

년까지 변군지역에 部都尉制를 시행했는데

,

최근 연구에 따르면 部都尉는 각 邊郡을 몇 개의 구역

[

]

으로 구분하여 그 지역의 군사업무를 관장한 조직으로 파악된다

.

각 部都尉가 邊郡에 소속된 몇 개 屬縣의 군사업무를 관할하였다는 것이다

.

42) 실제 요동군에도 서기

30

년까 지 서부

·

동부

·

중부 등

3

개의 部都尉가 설치되어 있었다

.

이 가운데 東部都尉는 武次縣을 중심으로 西安

39) 한편 최근 燕·秦·漢 中部都尉의 ‘障堠之城’이 처음에는 상백관둔고성 동쪽의 靑欌子古城에 두어졌다가, 나중에 候城縣이 심양 구성구고성에 설치되었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王綿厚, 「瀋撫交界處‘靑欌子’古城的新發見及考古學意義」, 󰡔東北史地󰡕

2014-1, 17~19쪽).

40) 󰡔後漢書󰡕 권51 陳禪전.

41) 孫進己·王綿厚, 앞의 책, 1989, 281~283쪽.

42) 野口優, 「前漢邊郡都尉府の職掌と邊郡統治制度」, 󰡔東洋史硏究󰡕 71-1, 2012; 김병준, 앞의 글, 2013b, 134~150쪽.

(10)

·

番汗 등

3

,

西部都尉는 無慮縣을 중심으로 險瀆

·

房 등

3

,

中部都尉는 候城을 중심으로 望平

·

高 顯

·

遼陽 등

4

현을 관할한 것으로 파악된다

.

43)

106

년에 요동군에서 현도군으로 소속이 바뀐 高顯

·

候城

·

遼陽 등은 종래 中部都尉의 군사 관할구역에 해당하는 것이다

.

이로 보아 후한이 요동군 가운데 종래 중부도위가 관할하던 지역을 중심으로 현도군 조직 을 재정비했다고 파악된다

.

44) 물론 요동태수 耿夔가

105

년에 遼東塞를 넘어 요동군을 침공한 고구려 군을 격퇴하였기 때문에

106

년에 현도군을 재정비할 수 있었을 것이다

.

97

년 직후 고구려에 의해 점령당했던 제

2

현도군은 상당 기간 괴멸된 상태로 방치되다가

, 106

년에 종전 요동군의 중부도위 관할구역을 바탕으로 제

3

현도군을 신설하는 형태로 재정비되었던 것이다

.

이와 관련하여 후한이

104

년에 遼東 西部都尉官을 復置하였다가 安帝時에 遼東屬國都尉로 개편한 사실에 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

45) 전술하였듯이 漢代의 部都尉는 기본적으로 변군의 군사조직이었다

.

따라서

104

년 遼東 西部都尉官의 復置는 종전의 요동군 서부도위를 부활하여 선비의 침공을 방어하려는 대책이었다고 파 악된다

.

다만 서부도위의 부활만으로는 선비의 침공을 방어하기 힘들자

,

安帝代에 다시 요서군의 속현이었던 昌遼

,

賓徒

,

徒河 등까지 포괄하여 遼東屬國으로 확대 개편한 것으로 파악된다

.

요동속국의 치소인 昌遼는 전 한대의 交黎로서 요서군 동부도위가 설치되었던 곳인데

,

46) 요동속국은 기본적으로 來附한 烏桓이나 鮮卑를 감독하면서 변경 방어의 군사업무를 맡았다고 파악된다

.

47)

특히 최근 연구에 따르면 後漢 安帝代에 부활한 屬國都尉는 군사적 업무뿐 아니라 治民까지 관장하면서 屬國民에 대한 군사적 통치를 더욱 강화하였다고 한다

.

48) 또한 안제대에 요동속국을 설치한 것은 遼西地域 의 斷裂된 방어선을 수복하여 선비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

49)이로 보아

106

년 제

3

현도군 설 치도

104

년 요동군 서부도위의 부활이나 안제대의 요동속국 개편과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상 호 연관 아래 동일한 목적으로 취해진 조치라고 파악된다

.

즉 요동군 서부도위의 부활이나 요동속국으로의 확대 개편이 선비의 침공을 방어하기 위해 취해졌다면

, 106

년 제

3

현도군의 설치는 고구려의 침공을 막기 위 한 목적에서 취해졌다고 파악된다

.

50)

이러한 점에서 요동군의 중부도위에 소속되었던 후성

·

고현

·

요양 등이 요동군 북부의 渾河 연안 일대에 위치한 사실이 주목된다

(<

지도

1>

참조

).

51)候城을 치소로 하는 중부도위는 본래 요동군 북부의 군사업무를

43) 권오중, 앞의 글, 2005, 16~17쪽; 배진영, 앞의 글, 2008, 79~89쪽.

44) 다만 中部都尉의 군사 관할구역 가운데 望平縣의 소속은 바뀌지 않고 계속 요동군의 속현으로 남았다. 이에 <표 1>에서 보 듯이 106년에 망평현의 소속도 현도군으로 바뀌었는데, 󰡔後漢書󰡕 찬자가 이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고 보기도 한다(和田 淸, 앞의 책, 1955, 2~6쪽). 망평현은 중부도위의 치소였던 후성보다 북쪽에 위치하였으므로 106년에 현도군 관할로 소속 이 변경되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晉書󰡕 지리지에는 망평현이 현도군의 속현으로 나온다.

45) 󰡔後漢書󰡕 권4 和帝紀 永元16년 12월조 및 唐 李賢 付注.

46) 昌遼는 大凌河 하류의 錦縣 북쪽 일대로 비정된다(孫進己·王綿厚, 앞의 책, 1989, 382~383쪽).

47) 津田左右吉, 「遼東屬國の性質に就きて」, 󰡔史學雜誌󰡕25-10, 1914, 1265~1286쪽; 張國慶, 「東漢 ‘遼東屬國’ 考略」, 󰡔歷史敎 學󰡕1990-2, 1990, 14~16쪽.

48) 김병준, 앞의 글, 2013a, 144~146쪽.

49) 蘇衛國·張旗, 「有關東漢遼東屬國問題的一些看法」 󰡔鞍山師範學院學報󰡕2013-10, 2013, 23~28쪽. 50) 後漢 중후반 軍事防衛體制의 전반적인 전환 양상은 野口優, 앞의 글, 2014 참조.

(11)

관할했던 것이다

.

요동군 북부의 북쪽과 동쪽으로 遼東故塞가 지나간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

종래 중부도위의 군사업무 가운데 邊塞의 방어가 큰 비중을 차지하였을 것으로 파악된다

.

중부도위의 치소인

候城

이라는 명 칭이 邊塞의 要害處에 축조한

候城

에서 유래한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

이로 보아 요동군 중부도위의 관할구역을 바탕으로 재건된 제

3

현도군도 종전 遼東故塞의 방어가 가장 중 요한 군사업무로 부과되었다고 파악된다

.

특히 撫順 동쪽의 遼東故塞는 제

2

현도군 시기에 요동군과 현도군 의 郡界였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방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

이에

106

년 제

3

현도군의 설치와 함께 撫順 동쪽 의 遼東故塞와 관련한 군사시설을 대대적으로 수리하여 방어체계를 강화하였을 것이다

.

이러한 점에서 제

3

현도군의 설치와 함께 移置된 종전 현도군의 속현이 撫順 일대로 비정된다는 사실이 주 목된다

.

3

현도군 치소

[

고구려현

]

에 대해서는 撫順 노동공원고성과 瀋陽 상백관둔고성으로 보는 견해가 있 는데

,

52) 재건 초기의 제

3

현도군 치소는 무순 노동공원고성일 가능성이 높다

.

그리고 상은대현과 서개마현은 제

3

현도군의 치소를 중심으로 동서로 배치되었는데

,

상은대현은 무순 동쪽의 東洲小甲邦古城

,

서개마현은 서 쪽의 상백관둔고성이나 위가루자고성으로 각각 비정된다

(<

1>

참조

).

53)

후한이 제

3

현도군을 설치하면서 종전에 遼東郡의 屬縣이 설치되지 않았던 무순 일대에 제

2

현도군의 치소나 속현을 移置하여 집중 배치한 것이다

.

이는 후한이 제

3

현도군의 설치와 더불어 무순 일대의 군사방어력 특히 이 지역의 邊塞를 대대적으로 수리하여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하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

실제 제

3

현도군이 설 치된 이후인

121

년에 현도군의 候城縣에 변새를 관장하던

障尉

라는 관리가 존재한 사실이 확인된다

.

54)

漢代 邊塞의 군사조직에 관한 연구성과를 종합하면

,

55) 漢은 邊塞를 따라 대략

2~6

(1~3km)

간격으로

으로 불린 哨戒網

[

望樓

+

烽燧

]

을 축조한 다음

,

최말단 초계 조직에는

5~6

명의 병졸을 거느린 隧長

[

亭 長

],

중간 초계 조직에는 십 수 명의 병졸을 거느린 候長을 배치했다

.

그리고 이들 보다 상급 무관조직인 部

[

塞尉

],

候官

[

障尉

],

都尉府

[

都尉

]

등을 설치해 최전방 군사방어체계를 구축했다

.

이 가운데 障尉는 障塞尉로도 불렸는데

,

秩은

2

백석이고 산하에 士吏와 尉史를

2

명씩 설치했다

.

56)

이러한 漢代 변새의 군사조직을 참조하면

, 121

년 현도군 후성현에 상급 무관조직인 障尉가 존재한 것으로 보아 그 예하의 무관조직이나 초계조직도 갖추었다고 파악된다

.

3

현도군의 정비와 더불어 종전의 遼東故 塞가 새로운 군사방어망으로 거듭난 것이다

.

이와 관련하여

121

년 봄 후한이 고구려를 공격하던 다음 기사 가 주목된다

.

51) 권오중, 앞의 글, 2005, 22~23쪽.

52) 최근 무순 동주소갑방고성으로 보는 견해도 제기되었지만(金輝, 「撫順漢城與玄菟郡西遷」, 󰡔東北史地󰡕 2008-6, 2008, 40 쪽), 논거가 박약한 편이다.

53) 渾河 연안 漢代 平地城의 현황 및 제3현도군 治所의 위치 비정에 대한 논의는 여호규, 󰡔고구려 성(II:요하유역편)󰡕, 국방군 사연구소, 1999, 173~181쪽 참조.

54) 󰡔後漢書󰡕 권51 陳禪전:“明年(121) 元會, 作之於庭, 安帝與群臣共觀, 大奇之. 禪獨離席舉手大言曰(중략) 左轉為玄菟候城 障尉.”

55) 米田賢次郞, 「漢代の邊境組織」, 󰡔東洋史硏究󰡕 12-3, 1953, 251~254쪽; 陳夢家, 「漢簡所見居延邊塞與防禦組織」, 󰡔考古學報󰡕

1964-1, 1964, 68~69쪽; 永田英正, 「簡牘よりみたる漢代邊郡の統治制度」, 󰡔講座敦煌:敦煌の社會󰡕, 大同出版社, 1980(󰡔居延 漢簡硏究󰡕, 同朋社, 1989, 415~440쪽); 籾山明, 「烽燧, 長城, 關所」, 󰡔漢帝國と邊境社會󰡕, 中央公論新社, 1999, 45~50쪽. 56) 陳夢家, 앞의 글, 1964, 68~69쪽.

(12)

-

㉠ 建光元年

(121)

春正月

,

幽州刺史馮煥率二郡太守討高句驪

·

穢貊

,

不克

. (

󰡔後漢書󰡕 권

5

孝安帝紀

)

-

㉡ 建光元年

(121)

,

幽州刺史馮煥

·

玄菟太守姚光

·

遼東太守蔡諷等將兵出塞擊之

,

捕斬濊貊渠 帥

,

獲兵馬財物

.

宮乃遣嗣子遂成將二千餘人逆光等

,

遣使詐降

.

光等信之

,

遂成因據險阨以遮大 軍

,

而潛遣三千人攻玄菟

·

遼東

,

焚城郭

,

殺傷二千餘人

.

於是發廣陽

·

漁陽

·

右北平

·

涿郡屬國 三千餘騎同救之

,

而貊人已去

. (

󰡔後漢書󰡕 권

85

동이열전 고구려전

)

상기 사료는

121

년 봄

(1

)

후한의 유주자사

,

현도태수

,

요동태수 등이 고구려를 공격한 상황을 기술한 것 인데

,

-

㉡에서는

出塞擊之

라고 표현하였다

.

이 기사를 비롯하여 사료 ⑦에서 보듯이

121

년경 고구려와 후 한은

현도

를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였다

.

이로 보아

121

년 후한이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출발 한

는 제

3

현도군 설치와 더불어 수리한 撫順 동쪽의 遼東故塞로 파악된다

.

후한군이 塞外 곧 후한의 영향 력이 직접 미치지 않는 夷狄의 境內로 진입했음을 강조하기 위해

出塞

라 표현했던 것이다

.

57) 이는 종전에 요동군과 제

2

현도군의 郡界였던 撫順 동쪽의 遼東故塞가 제

3

현도군의 설치와 함께 후한의 최전방 군사방어 선으로 변모한 사실을 반영한다

.

이처럼 후한은

106

년 제

3

현도군의 설치와 더불어 종전의 요동고새를 중심으로 고구려에 대한 군사방어력 을 크게 강화하였다

.

58) 더욱이

108

년에는 현도군의 貧民을 구제한 사실도 확인되는데

,

59) 이는 현도군의 경 제적 상황이 피폐해진 사실과 더불어60)

3

현도군의 재건으로 군현 지배체제가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음을 반영한다

.

고구려의 입장에서 본다면 후한을 공략하기가 그만큼 어려워진 것이다

. 106~117

년경 후한에 대한 고구려의 공격 기사가 보이지 않는 사실은 이러한 측면을 반영한다고 볼 수도 있다

.

61)

그런데 제

3

현도군의 설치와 더불어 종래 요동군과 제

2

현도군의 郡界였던 遼東故塞가 후한의 최전방 군사 방어선으로 변모한 사실에 주목한다면

,

다른 관점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

즉 제

3

현도군의 설치와 함께 후한 의 군사방어선이 요동방면으로 크게 후퇴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

이와 관련하여

106

년 직후 고구려와 후 한의 교섭을 보여주는 다음 기사들이 주목된다

.

-

㉠ 永初三年

(109)

春正月 三年春正月庚子

,

皇帝加元服

.

大赦天下

. (

중략

)

高句驪遣使貢獻

. (

󰡔後漢書󰡕 권

5

安帝紀

)

57) 撫順 동쪽 章黨의 官嶺-土口子 사이는 撫順[제3현도군]에서 新賓[제2현도군] 일대로 나아가는 교통로상의 關門인데, 동서로 마주보는 白龍山과 黑虎山 위에 墩臺 유적이 있다(孫守道, 앞의 글, 1992, 14쪽). 만약 이곳에 關塞를 설치했다면 121년 漢軍이 出塞했다는 지점일 가능성이 높다.

58) 이에 제3현도군의 성격을 군사적 전진기지로 파악하기도 한다(권오중, 앞의 글, 2002, 253쪽).

59) 󰡔後漢書󰡕 권5 安帝紀 永初二年(108) 冬十月:“庚寅, 稟濟陰·山陽·玄菟貧民.”

60) 당시 羌族의 침공을 빈번하게 받았던 涼州 특히 居延 지역도 101년과 102년에 잇따라 賑貸를 받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피 폐한 상태였다(野口優, 앞의 글, 2014, 77쪽).

61) 󰡔資治通鑑󰡕 권49 漢紀41 安帝 永初五年(111년) 三月조 “高句驪王宮與濊貊寇玄菟.”라는 기사가 나오지만, 이는 118년(元初 5年)의 공격 기사를 잘못 기재한 것으로 파악된다(李大龍, 「高句麗與東漢王朝戰事雜考」, 󰡔東北史地󰡕2007-1, 2007, 10쪽).

또한 󰡔後漢紀󰡕 권16 安帝紀 元初元年(114년)條에 “是歲宮死, 玄菟太守姚光上言, 欲因其喪, 發遼東樂浪三郡兵, 出擊之, 議者 以爲可許.”라는 기사가 나오지만, 사료 ⑦-㉡에서 보듯이 121년 기사를 잘못 기재한 것이다.

(13)

-

㉡ 五十七年

(109)

春正月

,

遣使如漢

,

賀安帝加元服

. (

󰡔三國史記󰡕 고구려본기

3

태조왕

57

)

-

㉠ 安帝 永初五年

(111),

宮遣使貢獻

,

求屬玄菟

. (

󰡔後漢書󰡕 권

85

동이열전 고구려전

)

-

㉡ 更屬玄菟

. (

󰡔三國志󰡕 권

30

魏書 동이전 고구려전

)

-

㉢ 五十九年

(111),

遣使如漢貢獻方物

,

求屬玄菟

. (

󰡔三國史記󰡕 고구려본기

3

태조왕

59

)

사료 ④

-

㉠에서 보듯이 고구려는

109

1

월에 후한에 사신을 파견하여 貢獻하였다

.

󰡔삼국사기󰡕에서는 이 때의 사신 파견을 安帝의 加元服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로 파악하고 있다

(

-

).

이러한 가능성을 완전히 배 제하기는 힘들지만

,

󰡔후한서󰡕에 그와 관련된 표현이 없는 것으로 보아 󰡔삼국사기󰡕 찬자의 주관적인 서술로 추정된다

.

그렇다면 고구려가

109

년에 후한에 사신을 파견한 주목적은 무엇이었을까

?

전술하였듯이 고구려는

97

년경 제

2

현도군을 점령하고

, 105

년에는 요동고새를 넘어 요동지역을 대대적으 로 공략하였지만

,

요동태수 경기의 반격을 받아 패배하였다

.

더욱이 후한이 제

3

현도군을 재건하고

,

요동고새 를 수리하여 군사방어력을 강화함에 따라 고구려가 후한을 공략하는 것이 상당히 힘들어졌다

.

고구려는 이러 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109

년에 후한에 사신을 파견하였다고 파악된다

.

고구려가 군사적 침공 대신 후한 과의 화친을 통해 외교관계의 재정립을 모색했다고 추정되는 것이다

.

사료 ⑤는 이러한 가능성을 잘 보여준다

.

그에 따르면 고구려가

111

년에 후한에 사신을 파견하여 貢獻하 고 현도

(

)

에 屬하기를 요청하였고

,

그 결과 다시 현도에 屬하게 되었다고 한다

.

고구려가 요동군의 북부에 신설된 제

3

현도군에

하는 형태로 후한과의 외교관계를 다시 수립한 것이다

.

이처럼 고구려가 제

3

현도군 과 內屬關係를 맺은 것에 대해 종전에는 고구려의 필요에 의한 것으로62) 후한이 제

3

현도군을 재정비하자 시 간을 벌기 위한 임시 위장술이라고 이해하였다

.

63)또한 후한이

105

년 전쟁 직후에는 고구려를 요동군에 소속 시켰다가 고구려의 요청으로 그 소속을 현도군으로 옮긴 것으로 보기도 하였다

.

64) 종전에는 고구려와 제

3

현 도군의 內屬關係를 주로 고구려의 필요라는 관점에서 파악하고

,

구체적 내용은 거의 검토하지 않았던 것이다

.

당시 후한은 선비나 강족 등으로부터 대대적인 침공을 받고 있었다

.

특히 강족의 침공으로

110

년에는 涼 州 폐기론이 제기되고

, 111

년에는 그 침략이 河東과 河內 지역에까지 이를 정도였다

.

65) 또한

109~110

년 무 렵에는 후한에 귀부했던 烏桓과 南匈奴도 반기를 들었다

.

66) 후한으로서는 사면초가에 몰린 형국이었다

.

이 러한 상황에서 고구려가 제

3

현도군에 內屬을 요청하자

,

후한이 동방지역의 변새라도 안정시키기 위해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

그렇다면 고구려는 왜 후한의 제

3

현도군에 內屬을 요청한 것일까

?

종전 연구에서 언급한 것처럼 단순히 제

3

현도군 설치에 대응할 시간을 벌기 위한 위장술이었던 것일까

?

이와 관련하여 당시 漢의 邊郡이 주변국과

內屬

관계를 맺으면 먼저 邊塞의 관문인 邊關을 제거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그런 다음 후한의 변군

62) 李鍾旭, 앞의 글, 1987, 322~325쪽. 63) 김미경, 앞의 글, 2007, 91~92쪽. 64) 방향숙, 앞의 글, 2008, 252~253쪽. 65) 김경호, 앞의 글, 2005, 52~53쪽.

66) 󰡔後漢書󰡕 권5 안제기 永初三年 六月, 九月, 十月조 및 永初四年 二月조.

(14)

은 주변국 군장에게 戶口數를 신고하도록 하고

,

일종의 納稅 형태로 遠珍의 奇物을 貢獻하도록 하고

, ‘

의 형태로 徵稅

,

人事

,

法制 등과 관련한 각종 의무사항을 정했다고 한다

.

67)

이로 보아

111

년 고구려와 후한의 제

3

현도군이

內屬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도 먼저 제

3

현도군의 邊塞에 설치된

邊關

부터 제거하였다고 파악된다

.

이는 후한이 고구려와 교섭하기 위해 關門을 개방하였고

,

고구려 는 후한에 이 邊塞를 침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음을 의미한다

.

이에 따라 撫順 동쪽의 遼東故塞를 수리하 여 재구축한 제

3

현도군의 邊塞는 점차 양국의 교섭 창구

,

즉 새로운 국경선으로 변모하였을 것이다

.

68)

후한의 입장에서 본다면 고구려로부터 침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대신

,

2

현도군 시기에 비해 국 경선을 요동방면으로 크게 후퇴시켜야 했다

.

반면 고구려의 입장에서 본다면 후한의 요동지역에 대한 공격을 잠시 유보했지만

,

3

현도군 변새의 외곽 곧 요동동부 산간지대에서 후한의 제지를 받지 않고 영향력을 확장 할 수 있었다

.

고구려는 제

3

현도군과의 內屬關係 체결을 통해 후한과의 국경선을 요동방면으로 크게 후퇴시 켰을 뿐 아니라

,

요동동부 산간지대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세력 확장을 추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결국 고구려는 제

3

현도군과의 내속관계 체결을 통해 제

2

현도군 점령 이후의 변화된 상황에 맞게 후한과의 외교관계를 재정립하였던 것이다

.

이러한 점에서 양국의 交戰 기사가 보이지 않는

106~117

년은 양국 관계의 재정립기라 할 수 있다

.

이 기간 동안 제

3

현도군의 변새 곧 종전의 요동고새는 점차 양국의 국경선으로 고착 화되었을 텐데

,

사료 ③

-

㉡에서

121

년 漢軍의 고구려 공격을

出塞擊之

로 표현한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 121

년경 撫順 동쪽의 요동고새는 후한의 고구려 원정 출발점이었고

,

69) 그 외곽은 후한의 영향력이 직접 미 치지 않는 塞外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

그런데 ③

-

㉡에 따르면 후한군은 제

3

현도군 동쪽의

를 나선 다음

濊貊渠帥

을 참수하고 그의 兵馬財物 을 노획했다고 한다

.

濊貊渠帥

는 ③

-

㉠에서 보듯이 고구려와 명확히 구별되는 존재인데

,

고구려 공격에 앞서 참수했다고 하므로 제

3

현도군과 고구려의 중간지역에 위치했다고 파악된다

.

당시 후한군은 제

3

현도군 동쪽의 遼東故塞에서 출발했으므로 渾河 ‒ 蘇子河 유역을 거쳐 고구려 방면으로 진격하였다고 추정된다

.

이 로 보아 후한군이

를 나선 다음 참수한

예맥거수

는 종래 제

2

현도군이 설치되었던 蘇子河 유역의 주민집 단을 이끌던 유력자일 가능성이 높다

.

70)

후한이 고구려 공격에 앞서 소자하 유역의 주민집단부터 공략한 것은 이들이 고구려에게 병력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

다시 말하면 고구려가 소자하 유역의 주민집단을 후한과의 전쟁에 대거 동원했기 때문이다

.

이는 고구려가

121

년 이전에 蘇子河 유역의 주민집단을 강하게 예속시켰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

고구려는

111

년 제

3

현도군과의 내속관계 체결을 통해 종전의 요동고새를 양국의 국경선으로 탈바꿈시키고

,

나아가 그 외곽의 蘇子河 유역 일대 등에서 세력을 구축하여 나갔던 것이다

.

이처럼 고구려는 제

3

현도군의 내속관계 체결을 통해 후한의 제지를 거의 받지 않고 비교적 자유롭게 遼東

67) 小林聰, 「漢時代における中國周邊民族の內屬について」, 󰡔東方學󰡕82, 1991, 31~38쪽.

68) 漢代의 邊塞는 사실상 국경선으로 기능했다(吳礽驤, 󰡔河西漢塞調査硏究󰡕, 文物出版社, 2004, 182~183쪽).

69) 󰡔後漢書󰡕 권90 烏桓鮮卑傳에도 後漢이 鮮卑를 정벌하기 위해 ‘出塞’한 기사가 다수 확인된다. 70) 여호규, 앞의 글, 2007a, 34~37쪽.

(15)

故塞 외곽의 요동동부 산간지대를 석권할 수 있었다

.

이러한 점에서 제

3

현도군과의 내속관계 체결은 후한과 의 외교관계를 재정립하기 위한 절차였다고 파악할 수 있다

.

그리고 고구려는 제

3

현도군과의 내속관계를 통 해 후한과의 대결도 새로운 국면으로 변화시켜 나갈 수 있었다

.

Ⅲ. 後漢에 대한 공격루트 다변화와 鮮卑와의 연합 도모

고구려는

106~117

년 후한과의 관계 재정립기를 거친 다음

, 118

년부터 다시 후한에 대한 공격을 본격화하 였다

.

그런데

118

년부터 전개된 고구려의 후한 공격에서는 종전과 다른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

이를 고찰하 기 위해

118

년 이후 고구려의 후한 공격과 관련한 사료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

-

㉠ 元初五年

(118)

夏六月

,

高句驪與穢貊寇玄菟

. (

󰡔後漢書󰡕 권

5

孝安帝紀

)

-

㉡ 元初五年

(118)

復與濊貊寇玄菟

,

攻華麗城

. (

󰡔後漢書󰡕 권

85

동이열전 고구려전

)

-

㉢ 元初五年

(118)

夏六月

,

高句驪與濊貊寇玄菟

. (

󰡔資治通鑑󰡕 권

50

漢紀

42

安帝

)

-

㉣ 六十六年

(118)

夏六月

,

王與穢貊襲漢玄菟

,

攻華麗城

. (

󰡔三國史記󰡕 고구려본기

3

태조왕기

)

-

㉠ 建光元年

(121)

春正月

,

幽州刺史馮煥率二郡太守討高句驪

·

穢貊

,

不克

. (

중략

)

夏四月

,

穢貊復 與鮮卑寇遼東

,

遼東太守蔡諷追擊

,

戰歿

.

甲戌

,

遼東屬國都尉龐奮

,

承偽璽書殺玄菟太守姚光

. (

중략

)

冬十一月 鮮卑寇玄菟

. (

중략

)

冬十二月

,

高句驪

·

馬韓

·

穢貊圍玄菟城

,

夫餘王遣子與 州郡并力討破之

. (

󰡔後漢書󰡕 권

5

孝安帝紀

)

-

㉡ 建光元年

(121)

,

幽州刺史馮煥

·

玄菟太守姚光

·

遼東太守蔡諷等將兵出塞擊之

,

捕斬濊貊渠 帥

,

獲兵馬財物

.

宮乃遣嗣子遂成將二千餘人逆光等

,

遣使詐降

.

光等信之

,

遂成因據險阨以遮大 軍

,

而潛遣三千人攻玄菟

·

遼東

,

焚城郭

,

殺傷二千餘人

.

於是發廣陽

·

漁陽

·

右北平

·

涿郡屬國 三千餘騎同救之

,

而貊人已去

.

,

復與遼東鮮卑八千餘人攻遼隊

,

殺略吏人

.

蔡諷等追擊於新昌

,

戰歿

,

攻曹耿耗

·

兵曹掾龍瑞

·

兵馬掾公孫酺以身扞諷

,

俱沒於陳

,

死者百餘人

.

,

宮遂率馬 韓

·

濊貊數千騎圍玄菟

.

夫餘王遣子尉仇台將二萬餘人

,

與州郡幷力討破之

,

斬首五百餘級

.

是歲 宮死

,

子遂成立

.

姚光上言欲因其喪發兵擊之

,

議者皆以爲可許

.

尙書陳忠曰

:

「宮前桀黠

,

光不能 討

,

死而擊之

,

非義也

.

宜遣弔問

,

因責讓前罪

,

赦不加誅

,

取其後善

.

」 安帝從之

.

(

󰡔後漢書󰡕 권

85

동이열전 고구려전

)

-

㉢ 遼東太守蔡風

·

玄菟太守姚光以宮爲二郡害

,

興師伐之

.

宮詐降請和

,

二郡不進

.

宮密遣軍攻玄 菟

,

焚燒候城

,

入遼隧

,

殺吏民

.

後宮復犯遼東

,

蔡風輕將吏士追討之

,

軍敗沒

.

(

󰡔三國志󰡕 권

30

魏書 동이전 고구려전

)

-

㉠ 質桓之閒

(146),

復犯遼東西安平

,

殺帶方令

,

掠得樂浪太守妻子

. (

󰡔後漢書󰡕 권

85

동이열전 고구려전

)

-

㉡ 宮死

,

子伯固立

.

順桓之間

(145~146),

復犯遼東

,

寇新安

·

居鄕

.

又攻西安平

,

于道上殺帶方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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