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舊韓末 日帝下 張道斌의 活動과 現實認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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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舊韓末 日帝下 張道斌의 活動과 現實認識

75)

김 진 한*

❙국문초록❙

이 글에서는 구한말부터 1920년대까지를 중심으로 장도빈의 활동과 현실인식에 대해 살펴보았다. 구한말 장도빈은 뺷대한매일신보뺸 논설위원이자, 신민회원으로서 활동하였다. 그는 ‘救國’이라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애 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교육·언론·국사연구 활동을 시작하였다.

장도빈은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조사받던 중 1912년 1월 만주로 망명하였다. 만주에서 신채호를 만나 함 께 생활하였으며 뺷권업신문뺸의 논설주필도 잠시 맡았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무르면서 비참한 한국인의 현실을 목격하였으며 그 원인을 게으름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하고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생활했던 2년여 간은 장도빈의 현실인식에 변화를 가져왔다. 그는 국내로 돌아와 일제 가 허용하는 범위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나섰다. 1920년대 조선에서는 ‘신문화운동’이 일어났 다. 그는 세계개조의 흐름에 따라 문화주의를 받아들여 사회 및 구례의 관습적 행위들을 개조할 것을 주장하 며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장도빈은 한성도서주식회사의 설립을 인가받았으며 뺷서울뺸·뺷조선지광뺸 등 출판사와 각종 잡지를 창간하 여 교육 및 계몽활동에 전념하였다. 국사연구자로서도 여러 권의 단행본을 출간하였다. 그리고 민족의 미래로 청년을 주목하고 이들에 대한 교육을 강조하였다. 이렇듯, 1920년대 장도빈은 민족주의계열에서 벗어나 문화 주의 계열로 돌아섰다.

[주제어] 장도빈, 현실인식, 교육, 신문화운동, 문화주의

❙목 차❙

Ⅰ. 머리말

Ⅱ. 舊韓末 國權回復 活動과 現實認識

Ⅲ. 武斷統治期 勸業會 活動과 海參威 記憶

Ⅳ. 文化統治期 新文化運動과 現實認識

Ⅴ. 맺음말

*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 historian77@hanmail.net

(2)

Ⅰ. 머리말

汕耘 張道斌

(1888~1963)

은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1960

년대 전반까지 격동의 시대를 살며 언론 인

·

교육자

·

사학자로서 폭 넓은 활동을 하였다

.

다만 신채호나 박은식

,

정인보 등 동시대 인물들에 비해 연 구자들의 관심은 덜하였다

.

장도빈이 사학사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후학들이

1981

년 汕耘學術文化財 團을 설립하면서부터이다

.

1) 이 재단에서는 장도빈이 저술한 논저들을 모아 뺷汕耘張道斌全集뺸

2

권을 간행2) 하였으며

1985

년 학술지인 뺷汕耘史學뺸을 창간하였다

.

그동안 장도빈에 대한 연구는 전기류3)와 역사인식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

역사인식의 경우 고대사 인 식4)과 근세사인식

,

5) 민족의식6)을 중심으로 연구가 진행되었으며 한국사인식 전반을 다루기도 하였다

.

7) 최 근에는 장도빈의 생애와 활동

,

사학사상의 위상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연구8)가 나오기도 하였다

.

이들 연 구는 대부분 민족주의 사학자로서 장도빈의 역사인식을 조명하였다

.

9)

그러나 민족주의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이를 드러내는데 주의를 기울인 나머지 시대상황에 따른 장도빈 의 현실인식의 변화과정에 대해서는 간과한 면이 있다

.

실제로

3·1

운동 이후 사회진화론 및 개조론

·

문화 주의 등 각종 외래 사조의 영향으로 조선에서는 신문화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 1920

년대 장도빈도 세계 개조의 흐름에 따라 문화주의를 받아들여 사회 및 구례의 관습적 행위들을 개조할 것을 주장하는 등 이전과 는 다른 현실인식의 변화가 보인다

.

이 글에서는 이런 점을 주목하여 구한말부터

1920

년대까지를 중심으로 장도빈의 현실인식에 대해 살펴 보려고 한다

. 1930

년대 이후부터 해방까지는 은둔생활을 하며 외부활동이 뜸하였기에 검토 시기에서 제외하 였음을 밝혀둔다

.

1) 산운학술문화재단은 1991년부터 고려학술문화재단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2) 汕耘紀念事業會, 뺷汕耘張道斌全集뺸, 1981.

3) 김중희, 뺷汕耘 張道斌뺸, 汕耘學術文化財團, 1985; 김동환, 뺷장도빈뺸, 역사공간, 2013.

4) 신형식, 「汕耘 張道斌의 歷史認識 古代史觀을 中心으로」, 뺷汕耘史學뺸 2, 1988; 신형식, 「汕耘 張道斌의 新羅史觀」, 뺷汕耘史 學뺸 3, 1989; 조휘진, 「汕耘 張道斌의 渤海史 認識」, 동국대 석사학위논문, 1993; 김동우, 「汕耘 張道斌의 뺷渤海太祖뺸 연구」, 뺷東北亞歷史論叢뺸 16, 2007; 박인호, 「산운 장도빈의 고구려인식」, 뺷中央史論뺸 30, 2009.

5)김창수, 「汕耘 張道斌의 民族主義史學1– 「韓國末年史」의 近代史像을 中心으로 –」, 뺷汕耘史學뺸 창간호, 1985; 김창수, 「汕耘 張道斌의 東學農民革命 認識」, 뺷東學硏究뺸 5, 1999; 조병로, 「汕耘 張道斌의 近世史認識」, 뺷汕耘史學뺸 3, 1989.

6)김창수, 뺷韓國近代의 民族意識 硏究뺸, 同和出版公社, 1987; 김창수, 「汕耘 張道斌의 史學과 民族意識 – 그의 論說에 나타난 歷史像」, 뺷汕耘史學뺸 2, 1988.

7)박걸순, 1920年代 韓國史 通史의 構成과 性格」, 뺷于江權兌遠敎授定年紀念論叢 民族文化의 諸問題뺸, 1994; 황종하, 「汕耘 張道斌의 韓國史 認識 – 國史槪論을 中心으로 –」, 단국대 석사학위논문, 1988.

8) 김희태, 「산운 장도빈 硏究」,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2.

9)다만, 박인호는 장도빈을 문화주의 역사학자로 구분하고 있다(뺷韓國史學史大要뺸, 이회, 1996, 170; 앞의 논문, 2009, 288~289).

(3)

Ⅱ. 舊韓末 國權回復 活動과 現實認識

장도빈은

1888

년 평안남도 중화군 상원면 신읍리에서 태어났다

.

어려서부터 조부인 張濟國으로부터 한학 을 배웠으며 평양감사의 추천을 받아

1902

년 한성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

이때 신학문을 접하기 시작하였 다

.

그는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고향으로 잠시 내려갔다가

1908

년 서울로 올라오게 된다

.

이때의 일을 장도빈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

a. 내가 二十一歲 때 즉 西紀 一九〇八年에 서울을 두 번째 訪問하였다.……그 시대에 나는 서울에 서 갖은 풍상을 겪으며 學窓에서 歲月을 보내는 한편 시사의 변천을 따라 개탄만 더해가는 끝이었다. 내가 민충정공의 집을 찾아 그 사랑마루방에 놓여 있는 민씨의 피묻은 옷, 그 곁에 말라가는 한줄기 참대나무를 볼 때에 또는 해아사건으로 고종이 쫓겨나고 순종이 즉위하는 현상을 볼 때에 그 깊이 잠 겼던 인상은 일생에 잊히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잠시 고향에 가서 부친장례를 지내고 그 다 음 해 곧 一 九〇八년 봄에 서울을 다시 訪問한 것이었다.

이때 서울은 人口가 약 二十萬이었는데 진고개 日人이 약 三萬이요, 우리 韓國人은 약 十七萬人이었 으며 日人은 그 勢力을 마음대로 펴서 화려한 생활, 웅장한 기세를 올리고 한국인은 거의 직업을 잃고 荒野에 呻吟하는 형편이었다. 나는 일본 순사, 헌병, 군병들의 사나운 주먹과 거치른 말굽에 유린당하 는 한국인을 볼 때에 오직 눈물만 어릴 뿐이었다.10)

장도빈은 몰락해가는 대한제국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울분과 앞길을 개척하기 위해 상경하였다

.

그가 서 울에서 마주친 한국인의 일상은

눈물만 어릴

만큼 참담한 것이었다

.

이러한 현실을 지켜보며 자신의 길을 찾 아 나섰다

.

b. 나의 經驗에 빛외어

一. 내가 二十歲時代의 한 일. 나는 二十歲時代에 매우 單純한 靑年이었었다. 그보다 數年前예 鄕里 에서 乙巳年 五條約된 報道를 쓴 新聞紙를 보고 눈물을 흘린 나로서 自來 家庭의 漢學 공부를 停止하 고 新學問을 探求하기 비릇하여 京城에 游學하였었다. 二十歲 時代는 무론 내가 官立師範學校를 卒業 한 後 二年으로 一邊 法律을 硏究하고 一邊 朝鮮歷史를 硏究하던 中이었었다. 마침 當時에 有名한 梁 起鐸, 朴殷植, 安昌浩, 李甲 諸氏를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大韓每日申報 記者가 되었다. 그 時代의 나 는 넘우 單純하여 當時 韓帝國의 末期를 當하여 感覺한 一切 觀念은 오직 朝鮮의 救濟를 위하여 一身 을 犧牲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럼으로 當時의 나는 아주 朝鮮民族的 精神으로 權化한 一靑年이었다. 다 른 일은 도모지 알려고도 아니하고 또 알지 못하였다. 그러고 아주 깨끗한 聖人이 되고저 하였다. 모든 物慾을 내어버리고 심지어 家庭과 生活을 저버리었다. 그리고 精神的 動作을 劇烈히하여 身體健康에 注意하지 아니하였다. 運動도 적게하고 興味的 遊戱도 絶然 禁止하였다. 當時 우리 先輩요 同志이던 10) 장도빈, 「暗雲짙은 舊韓末」, 뺷思想界뺸 19624月號, 284.

(4)

某某 諸氏가 우리의 努力을 同情하여 마침내 그 이듬해에 新聞 主筆의 任을 暫時라도 當하게 되었음은 무른 그들이 우리를 信賴할 靑年으로 認하였던 때문이다. 그러하메 나는 專力으로 新聞社의 事務와 學 校의 事務와 修學等에 盡力할뿐으로 아무 生活的 基礎를 세우지 못하고 또 身體의 健康은 도모지 돌보 지 못하였다.11)

c. 그때 서울에 유명한 선비로 애국심이 깊은 학자인 朴殷植氏가 있었는데 그는 「황성신문」 주필로 훌륭한 논문을 게재하여 우리민족의 애국심과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분이었다. 그리하여 청년들의 진취 를 도와주어 사회의 발달을 힘쓰는 분이었다. 나는 그 분을 수차 방문하였더니 그분이 매우 관심하여 그의 소개로 나는 大韓每日申報社 總務 梁起鐸氏를 만났다. 梁氏는 큰 新聞社를 經營하는 한편 독립운 동의 중심인물로서 유명한 분이었다. 梁氏는 나를 만나자 一面如舊로 깊이 교제하여 나에게 국가민족 을 위하여 진력하기를 바란다고 부탁하였다. 梁氏는 그 다음날부터 나를 「대한매일신보」기자로 천하는 한편 나더러 論說을 지으라고 委托하므로 그때부터 그 신문의 논설위원이 되었다. 그런데 그때 申采浩 씨가 그 신문사의 논설주필로 있어서 不幸히 病에 걸려 출근이 여의치 못하므로 대개 내가 논설을 쓰 게 되었는데 그러나 신씨가 혹 신문사에 오고 하여 나를 만나보고서 깊이 친한 친구가 되어 아주 가장 가까운 친구로 일생에 반가운 분이었다. 약 一년후에 申씨가 병이 대강 치료되어 신문사에 출근하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一주일은 신씨가 논문을 쓰고 一주일은 내가 논문을 썼다. 이것이 一九〇九年의 일 이다.12)

자료

b

에 따르면

,

장도빈은 양기탁

,

박은식

,

안창호

,

이갑 등을 알게 되면서 대한매일신보 기자가 되었다

.

자료

c

에서는 이때의 입사 사정을 좀 더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

장도빈이 가장 먼저 찾았던 사람은 박은식 이었다

.

그와의 만남은 장도빈의 일생을 바꿔놓았다

.

13) 이때 장도빈은 박은식의 소개로 만난 양기탁의 천거 를 받아 抗日論調를 강하게 펼치고 있던 뺷대한매일신보뺸

(

이하 뺷신보뺸

)

에 입사하게 되었다

.

자료

c

에 의하면

,

장도빈은

1908

년부터

1909

년까지 논설위원 및 주필로서 활약하였고

1909

년 신채호가 병상에서 일어나면서 공동주필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

자료

b

에서는

1909

년 잠시 주필의 임무를 맡았던 것으 로 쓰고 있어 일부 차이가 있다

.

따라서

회상에 의존하여 장도빈이 논설 주필로서 활약하였는지 여부를 판단 하는 것은 신중히 접근할 필요가 있다

.’

14)

먼저

,

장도빈이 뺷신보뺸 사원이었는지 여부를 확인해 보자

. ‘1908

년 통감부가 정치

·

사회

·

종교단체

,

언론 기관을 살펴 各會社調査를 작성한 문서나 뺷駐韓日本公使館記錄뺸 중

1908

5

28

일 警視總監이 外務部長 앞으로 보낸 문서에서 뺷신보뺸사의 담임부서를 자세하게 소개한 부분에서는 장도빈의 이름을 찾을 수가 없다

.

그가 뺷신보뺸의 사원이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은

1910

5

10

일 뺷신보뺸 광고면에서이다

.

당시 11) 뺷동광뺸 8, 1926121일자, 「만일 내가 다시 二十살의 청년이 될수있다하면」.

12) 장도빈, 「暗雲짙은 舊韓末」, 뺷思想界뺸 19624月號, 284~285.

13) 박은식은 1900년부터 경학원과 한성사범학교 교수를 지냈다. 장도빈이 1902년 한성사범학교에 입학하였으므로 이 때 그와 첫 만남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연구자들은 대체로 1905~1910년 구한말을 장도빈에게 민족의식을 싹틔우 고 인생의 변화를 가져온 시기로 인식하고 있다. 김창수, 앞의 논문, 1985, 118; 조병로, 앞의 논문, 1989, 131. 14) 박정규, 「뺷대한매일신보뺸의 참여인물과 언론활동」, 뺷대한매일신보 연구뺸, 커뮤니케이션북스, 2004, 83~84.

(5)

베델무덤 앞에 紀念碑碣을 세우려고 義捐金모집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신보 사원들이 제

2

차로 의연금을 낸 가 운데 장도빈의 이름이 들어있다

.’

15)이를 통해 본다면

, 1908

6

월 이후 신보의 사원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이 시기 장도빈은 신민회에서도 활동하였다

.

신민회는

1907

4

월 안창호의 발기로 조직된 비밀결사조직 이었다

.

「大韓新民會通用章程」에는 다음과 같이 그 목적을 규정하고 있다

.

d. 本會의 目的은 我韓의 腐敗한 思想과 習慣을 革新하야 國民을 維新케 하며 衰頹한 發育과 産業 을 改良하야 事業을 維新케 하며 維新한 國民이 統一聯合하야 維新한 自由文明國을 成立케 함

신민회는 민주주의사상에 기초하여 국가는 국민으로 구성되며 국가의 부강은 국가를 이루고 있는 국민의 부강에서 나온다는 사상에 의거하고 있다

.

신민회가 국권회복을 목표로 하면서 新民을 강조한 것도 이러한 사상에 의거한 것이며 그들의 실력양성은 新民에 의한 民力養成을 의미하였다

.’

16) 이러한 목적을 가진 신민 회에 입회하는 조건도 매우 까다로웠다

. ‘

국가관과 애국심이 투철한지 여부를 일정기간에 걸쳐 시험하였으며 담력과 용기도 갖추어야 했다

.

일단

,

입회가 허가되면 입회비와 월회비를 납부하고 신민회 기관지인 뺷大韓每 日申報뺸와 뺷少年뺸을 구독하여야 했다

.’

17)

당시 신민회는 양기탁

·

신채호

·

장도빈 등 대한매일신보계

,

이동녕

·

이회영 등 상동청년학원계

,

이동 휘

·

이갑 등 전직무관출신

,

안창호를 비롯한 서북지역 실업가와 계몽운동가 등 네 계열로 이루어졌다

.

대한 매일신보계는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보다는 국민에 대한 국가의식

,

국혼의 고취를 중요하게 보았다

.’

18) 장도빈은 신민회에서 중요한 책임을 맡고 있던 양기탁의 권유에 의해 회원으로 가입하였으며 그를 보좌하 며 비밀기록장부를 맡았다19)고 한다

.

장도빈은

신문사를 떠난 후에 무슨 事業을 하더라도 「新民會」의 精神 的中心을 가지고 있었다

20)고 회고할 만큼 그에게 신민회 활동은 사상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논설을 통해 이 시기 장도빈의 현실인식을 살펴보자

.

e. 現今 二十世紀에 猛劇 風潮가 全球를 震盪 此를 歡迎 者 優勝을 得고 此를 違背

 者 劣敗를 當나니 能히 此를 歡迎 術은 敎育一途라 故로 曰 敎育의 盛衰 國家勝敗의 原因이라노라. 夫自然界狀態가 人과 人의 間에도 學問이 有 人은 勝利를 得야 優勝地를 占有

고 擧問이 無 人은 劣敗에 陷야 低下位로 墮落니 個人間에도 亦然커든 況國과 國의 間이리오 彼優勝地를 占有 原運力은 敎育에 在지라 假令 甲國의 敎育力이 乙國을 勝야 乙國에 無

 學問을 甲國이 發達거  乙國에셔 幼稚 學問을 甲國이 盛大히야 甲國의 學問程度가 漸漸 乙國을 凌駕면 自然 乙國은 日日 甲國의 後에 落야 비록 狂呼疾走야도 甲國을 追及 能力이 15) 이광린, 「뺷大韓每日申報뺸 刊行에 대한 一考察」, 뺷韓國開化史의 諸問題뺸, 일조각, 1986, 265~268.

16) 신용하, 「新民會의 創建과 그 國權恢復運動(), 뺷한국학보뺸 3, 1977, 44. 17) 윤경노, 「新民會의 創立過程」, 뺷史叢뺸 30, 1986, 258.

18) 박찬승, 뺷한국근대정치사상사연구뺸, 역사비평사, 1992, 83. 19) 김중희, 앞의 책, 1985, 66~67.

20) 장도빈, 「暗雲짙은 舊韓末」, 뺷思想界뺸 19624月號, 287.

(6)

乏 야 漸次 低下야 畢竟에 幾千層의 下에 墮고 甲國은 益益 乙國前에 立야 勇力이 益壯고 步武가 漸闊야 倐然히 幾千層의 上에 登리니 譬言컨 步行 人이 汽車를 逐다가 步行

人은 自然後에 落고 汽車 임이 遠走과 如지라

學問程度가 如此히 高低 同時에 國과 國의 間에 國力의 比較가 亦是 學問의 程度를 隨야 高低

지라 甲國의 力은 强고 乙國의 力은 弱 結局에 甲國의 吸力이 乙國을 吸收야 自家物을 作

니 甲國에셔 抵抗 力이 旣無지라 비록 自家地位를 保全코져  自然形勢가 弱木이 頑斧 를 當홈과 如야 可救 道가 無지라 如此 現像을 觀면 國家勝敗의 原因이 敎育盛衰에 在홈을 可知로다

故로 國家의 將來前途를 推測코져 진 其國에 敎育이 如何홈을 先觀지라 優勝健全 地位를 得코져 진 반다시 急激競爭 敎育으로 以지니 敎育을 舍고 世界上 優勝 國이 되기를 求 者 食을 棄고 飽를 求과 無異도다

然則 國家의 優劣이 此法則을 依야 判決을 生고 禍福이 此原因을 從야 結果가 되니 진실 노 國家의 有一無二 大注意 바로다

今日世界가 何國이던지 敎育을 擴張야 文明을 是競며 進步를 是爭야 其勢力과 狀態가 益益 激烈니 吾人은 急히 是를 鼓舞며 是를 勉勵야 他人의 後에 勿落고 活潑勇進야 天演舞臺 에 先登지어다.21)

자료

e

에서 장도빈은 교육을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중요한 지표로 설정하고 있다

.

교육 정도의 차 이에 따라 국력의 우열을 가져옴을 인식하고 국가간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교육에 힘써야 함을 강조하 고 있다

.

주지하듯

,

사회진화론은 계몽주의를 특징짓는 기초사상이었다

.

사회진화론은 역사의 변천을 진보와 발전 의 논리로 설명하였지만 인간과 국가문제를 경쟁과 적자생존으로 보는 제국주의적 논리이기도 하였다

.

22) 장 도빈은 자연스럽게 구한말 지성계를 지배하고 있던 사회진화론을 따르고 있었다

.

그렇다면

,

국가간 우승열패 의 세계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장도빈이 강조했던 교육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

?

그것은 무엇보다 애국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했다

.

f. 특히 그 시대의 學問硏究는 國史이었다. 내가 그 時代에 普成專門學校(高麗大學)의 法科를 卒業 하였으나 世事가 急變하여 亡國에 처하므로 우리는 學問硏究의 枹를 돌려 國史를 硏究하게 되었다. 그 는 곧 우리나라가 亡한 후에 독립을 회복하려면 우리 國史를 잘 연구선전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때문 이었다. 나는 國史硏究의 一端을 가끔 신문에 발표하였다. 그때 신채호씨는 유명한 國史學者로 훌륭한 연구와 著述이 있었지만 우리의 國史硏究는 신씨와 大同小異한 것으로 약간의 이견이 있었을 뿐이었 다. 내가 하루는 昭格洞 旅館에서 밥을 먹고 일찌기 신문사(그때 大韓每日申報社는 太平路 左側에 있

21) 뺷서우뺸 16, 190831일자, 「敎育의 盛衰 國家勝敗의 原因」.

22) 조동걸, 「韓末啓蒙主義의 構造와 獨立運動上의 位置」, 뺷韓國民族主義의 成立과 獨立運動史硏究뺸, 지식산업사, 1989, 127~

132.

(7)

었다)로 오는 길에 六曺 앞에 와서 法部의 門碑가 떨어진 것을 보고 눈물을 禁치 못하였다. 나라가 날 마다 亡해가는 판에 어제는 軍部가 없어지고 오늘은 法部마저 없어지니 나라가 아주 없어질 날도 멀지 아니한 것을 넉넉히 알 수 있었다. 나는 國史硏究에 盡力하기를 시작하였는데 그것이 五十餘年을 계속 한 나의 國史硏究의 初步이었다.23)

장도빈은 이 무렵 독립을 위한 방편으로 국사연구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

아울러 국사연구를 신문지상에 발표함으로써 국권회복의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

그에게 국사는 국가가 없어도 잘 연구 선전한다면 독립을 회 복할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이었다

.

이는 역사를

’, ‘

’, ‘

정신

으로 강조하던 당시 민족주의사학자들의 입장 과 일맥상통한다

.

그리고 애국심을 고양하기 위한 국사교육으로 관심이 확대되어 갔다

.

g. 近來刊行 韓國歷史地誌數種類를 閱覽컨 或曰韓國人種이 日本出雲族의 壹部分이라며 或 曰日本人民이 古代부터 高麗에 移越者 甚衆故로 高麗가 麗倭의 稱이 有다얏더라.

嗚乎라 此等事實이 古記에 出바인가 新羅史에 出바인가 百濟史에 出바인가 高句麗史에出

바인가 抑何許博學士가 人種學或歷史學을 硏究야 得바인가. …

今曰韓國人에 出雲族壹部分이라며 又曰高句麗 麗倭의 名稱이 有다얏으니 嗚乎라 其不思의 甚이 엇지 此에 至뇨 此 彼日本人이 明治維新以後부터 其頸을 韓國에 誕고 轉機를 待 爲 先其筆端舌端으로 韓國을 誣辱야 自國人民의 外競思想을 鼓吹 曰韓國은 古代부터 日本의 屬國 이라며 曰神功皇后가 新羅를 征服얏다며 曰昔脫解가 日本人이라며 曰韓人은 太平日本種이라

야 古來歷史上에 本國歷史를 捏造이 無所不至인

惜乎라 挽近韓國內敎科書編纂人氏들이 其本을 不究며 其末을 不訊고 彼의 言을 妄信야 往往 此等語 其所撰敎科에 編入얏도다

此等荒說을 敎科에 編入하야 彼幼穉腦髓를 迷昏케야 國魂을 戕賊니 엇지 可惜 아니리오. 嗚乎라 敎科書 靑年을 指導 筏業이며 國民을 陶鑄하 轉機라 壹國家 存亡의 機와 壹民族興 滅의 由가 皆此中에 在거 엇지 如此魯莽히 筆을 下나뇨24)

이 논설에서 장도빈은 근래 한국내 교과서 문제를 국사를 예로 들며 비판하고 있다

.

그에게 교과서는

국 가 존망과 민족 흥망의 원인이 모두 담긴

것이었다

.

이에 왜곡된 한국사 인식을

國魂

을 해치는 것으로 보고 청년과 국민들에 대한 바른 국사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

이상에서 보듯

,

구한말 장도빈은 뺷대한매일신보뺸 논설위원이자

,

신민회원으로서 활동하였다

.

그는 사회진 화론적 시각을 받아들여 당시 현실을 국가간 우승열패의 경쟁사회로 인식하고 있었다

.

이에

救國

이라는 목적 의식 아래 세계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으로

애국심

을 고취할 수 있는 국사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

23) 장도빈, 「暗雲짙은 舊韓末」, 뺷思想界뺸 19624月號, 286.

24) 뺷대한매일신보뺸 19081027일자 「敎科書의 妄發 句語」. 이 논설은 무기명으로 작성되었다. 여기서는 장도빈의 논설 집필 기간 및 여러 전문가들의 검토를 거쳐 발행된 뺷단재 신채호 전집뺸(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에 수록되 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하여 장도빈의 글로 판단하였음을 밝혀둔다.

(8)

Ⅲ. 武斷統治期 勸業會 活動과 海參威 記憶

한일합병 이후 장도빈은 五星學校 學監으로 취임하여 교육활동에 종사하는 동안

105

인 사건에 연루되어 조사받던 중

1912

1

월 만주로 망명하였다

.

그는 해삼위 新韓村에 들어가 신채호를 만나게 되었으며 여기 서 함께 머물며 勸業會 기관지인 뺷勸業新聞뺸에 기고를 시작하였다

.

권업신문은

1912

4

22

일부터

1914

8

30

일까지 총

126

호가 발행된 한국어신문으로 국권회복과 민족주의를 간행목적으로 하는 민족지였다

.

이 권업신문에는 국내외 언론계에서 활동했던 신채호

·

이상설

·

윤해

·

김하구 등이 참여하였다

.

25) 장도빈은 권업신문에 글만을 기고했던 것이 아니라 잠시나마 주필로서 활 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

일본의 「대정원년

(1912) 11

월조 재외조선인 결사단체상황」에는 권업신문 주필로 신 채호 대신 장두빈이 소개되어 있다

.

여기서 장두빈은 물론 장도빈이다

.

당시 신채호는 심신의 병을 얻어 잠 시나마 권업신문을 떠나있었고 그 자리에 장도빈이 주필 노릇을 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

26)

h. 時時로 勸業報에 揭載되 虛粧은 萬分의 一이나 踐行될넌지 有事未遂케만 되이다. 如此한 局 勢에 吾儕 精神上 勢力은 遍滿다 지라도 無知 官力에 執勢 無으로 外形지 活動 能 力이 萬難야 申·張·黃·鄭·弟 五人이 相議고 비밀회원을 更히 확쟝려 야 同地에셔 六七 人을 입회식히고….27)

권업신문에서 그의 역할은 논설 작성에만 있지 않았다

.

위 기록에 보이는 張은 장도빈으로 사세를 확장하 기 위해 비밀회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

이를 통해 볼 때

,

장도빈은 비중있는 역할을 하고 있었 음을 알 수 있다

.

당시 권업신문에 실린 기사들은 대체로 조국독립을 위한 재러한인의 계몽

·

교육

·

경제

·

자치

·

민족의식 의 고취

,

국내 항일운동에 대한 내용을 많이 싣고 있었다

.

28) 이중

1912

11

10

일 게재된 논설 「단군대황 조셩탄졀」은 장도빈의 글로 추정된다

.

29)

i. 음력 十월 초삼일은 우리 단군대황조탄신 셩절이로다 오호라 우리가 무 각을 가지고 이 날을 마즐가……이 궁면 근본으로 도라온다고 오부터 니즌 단군을 다시 각만니라 고통이 이갓고 곤남이 이갓니 니즌 단군을 다시 각만니라. 각고 또 각야 우리가 25) 박 환, 「뺷勸業新聞뺸에 대한 일고찰」, 뺷사학연구뺸 46, 1993.

26) 김주현, 「신채호의 작품 발굴 및 원전 확정을 위한 연구 – 뺷권업신문뺸을 중심으로 –」, 뺷우리말글뺸 39, 2007, 275~280. 희태는 장도빈의 주필 담당 시점을 19129월 이후로 보고 있다(앞의 논문, 2012, 79).

27) 뺷島山安昌浩全集뺸 2, 白元普 → 安昌浩(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1913121(러시아曆).

28) 박 환, 앞의 논문, 1993, 188.

29) 김주현은 장도빈이 쓴 뺷국사뺸의 단군조 기록과 내용상 비슷하며, 지명비정 등을 고려하여 그의 글로 추정하였다(김주현, 의 논문, 2007, 287, 각주 30). 덧붙여 필자는 일본이 191211월 장도빈을 권업신문 주필로 파악하고 있었던 점을 고 려할 때 그의 글로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9)

다 단군의 손인지를 알면 동포이에 간졀히 사랑 마음이 나리라 우리가 다 단군의 유민인지를 알면 나라일에 야 분발 졍신이 기리라. 단군의 창조신 문명이 엇더지를 알면 우리가  천년 신성 민족으로 엇디오 남에게 굴복리오 의기가 발리라 단군의 셩취신 무공이 엇더지를 알면 우리가 넷적부터 무강던 죵로셔 엇지 기리 퇴보리오야 젼진 용이 발

니라 외국에 류쟈 더욱 단군을 각라 그리면 고국을 닛지 안으리라 궁길에 빠진쟈도 단군을 각하여라 그리면 희망의 빗을 차지리라 오너라 동포들아 오시오 동포들아 오날부터 니 즌 단군을 다시 각만니라 졍셩으로 형식을 신며 공경으로 희을 신야 대황조끼 들이 고 셩탄절 이날부터 사이 될지어다. 단군대황조 셩탄졀에 우리가 동포에게 고 바가 이며 바 라 바가 이로다.30)

이 논설에서 장도빈은 단군이 탄생한 기념일을 맞아 우리 민족이 모두 단군의 한 자손임을 상기시키며 동 포를 사랑하고 분발하면 언젠가 국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불어넣고 있다

.

j. 끝으로 내가 海蔘威에 있을 때에 깊이 느낀 몇가지 사실을 말하고자 한다.

一, 내가 海蔘威에서 어떤 親舊들과 함께 市街구경을 갔는데 日曜日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公園에서 낮잠자는 사람을 찾아가 보면 그는 韓國人이다. 이것을 보고 韓國人이 세계적으로 낙오한 懶怠者라고 통감하였다. 내가 外國에 가서 보면 그 나라 사람들은 男女를 물론하고 모두 熱心히 勞動하는데 우리 民族만이 懶怠하기 甚하고 외국인은 모두가 힘써 일하여 잘 살기를 촉진하는데 우리 民族만이 不勞而 得 곧 놀고 먹기를 생각한다. 이것이 韓國人으로 하여금 금일의 비참한 경우를 만든 것이다.

二, 내가 海蔘威의 東北쪽의 높은 山에 올라가 멀리 市街內外를 바라볼 때 어떤 土幕집이 默默히 山 밑에 보이므로 내가 同行者에게 물어보기를 저것은 무엇인가 하였더니 그 사람이 말하기를 그것은 우 리 한국사람의 움집이라 한다. 海蔘威가 비록 러시아의 邊方都會이나 화려한 建築, 完全 鋪裝된 道路, 男女의 생활상태가 거의 西歐에 상당하거늘 이때까지 움집 生活하는 민족이 있다면 西洋人이 볼 때에 이것은 野蠻의 土窟로 생각할 터이니 한국인의 생활상태가 이렇게 낙오된 것을 볼 때에 韓國人의 自暴 自棄가 이렇게 가련하게 된 것을 비탄 아니할 수 없었다.

三, 내가 해삼위에서 알아 본즉 日本人은 住居者가 四百名인데 그 中에 松田이란 者는 그곳서 돈을 모아 巨富가 되어 四百萬留資本의 松田銀行을 세웠고 中國人은 거대한 商街를 세워 富商大賈가 數百數 千戶에 達하는데 우리 民族은 露領에 居住하는 者가 二十萬人이요, 海蔘威에 居住者만도 萬餘名인데 모두가 빈곤한 者들이요, 오직 崔禮包가 거의 十萬留財産을 가진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즉 한국인은 어찌하여 그렇게 빈궁하게 되었는가 一考할 問題이다. 그것을 조사하여 보면 대략 아래와 같은 이유이 다. ① 한국인은 일을 잘하지만 계속하지를 않는다. 곧 一日勞動하여 二日 食價를 벌면 一日은 휴식하 고 食價가 盡하여야 또 노동한다. 勞動하여 一日食價를 벌면 또 노동을 아니하고 놀다가 食價가 盡하 여야 勞動한다. ② 한국인은 노동하여 金錢을 벌면 대개 곧 浪費하여 술도 마시고 遊興구경도 간다. 그 리하여 저축이 되지 못한다. ③ 한국인은 대개 遠慮가 없이 장구한 경영이 없으므로 目下의 일만 생각 30) 뺷권업신문뺸 제29, 19121028일자(러시아 曆), 「단군대황조셩탄졀」.

(10)

하고 耐乏生活을 忍耐하지 못한다. 이상의 이유로 한국인은 어데서나 貧窮하게 된다.

내가 깊이 느낀 것은 이상의 말한 한국인의 懶怠性 곧 게으른 習慣 그것이 오늘의 한국인을 이렇게 落伍케 만든 것을 確認 아니할 수 없었다. 나는 생각하기를 이렇게 한국인의 懶怠性은 日本보다도 더 무서운 우리의 敵인 것을 알았다. 그런즉 어떻게 하여야 우리 한국인의 懶怠性을 없이 할 수 있을 것인 가 이것이 큰 問題이다.

나는 연구한 결과에 한국人은 배워야 된다고 생각하였다. 精神的으로나 지식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배워야 된다고 생각하였다. 다시 말하면 한국인은 올바른 敎育을 받는 것이 곧 獨立을 회복하는 初步 라고 생각하였다.

내가 歸國한 後에 學校 또는 言論機關, 또는 出版會社를 설립하여 교육을 힘쓴 것은 海蔘威에서 얻 은 所感이 高潮된 때문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교육의 필요를 알았지만 海蔘威에서의 얻은 느낌이 크게 推進을 加해준 것이다.31)

자료

j

에 따르면

,

장도빈이 해삼위에 머무르며 목격한 한국인의 생활은 비참하였다

.

외국인들이 열심히 일 을 하며 넉넉한 생활을 하는 데 비해 한국인들은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놀고 먹으며 움집생활을 할만큼 가난 하였다

.

그는 한국인의 이러한 현실은 게으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외부의 적인 일본보다도 우리 자신의 懶怠性을 더욱 경계하였다

.

결국 교육에 대한 희망을 품으며 한국인의 습관인

懶怠性

을 올바른 교육으로 없 앨 수 있다면 독립을 회복하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는 전망을 제시하였다

.

훗날 그가 교육 및 언론

·

출판 활 동에 더욱 매진한 것도 바로 해삼위에서 깨달은 바 있었기 때문이었다

.

장도빈은 해삼위에 머무르는 동안 안창호의 초청을 받아 미국에 유학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건강상 의 이유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 1914

년 신병치료를 위해 귀국하여 영변 棲雲寺에 거처를 정하였다

.

이곳 에서 요양을 한 뒤

1915

년 가을 고향으로 돌아왔다

.

그는

1916

년 틈틈이 써놓은 원고를 모아 뺷國史뺸를 출간하였다

.

뺷국사뺸는 총

45

장과 연표로 이루어졌으며

1946

년 再刊하면서 내용을 보완하였다

.

이책은 왕조별 구분에 따라 시대를 나누었으며 단군조선부터 고려시 대까지를 고대로 설정하였다

.

이에 따라 고대사의 분량이 전체의

4/5

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

또한 단군을 기 점으로 하였으며 남북국시대를 설정한 점이 특징적이다

.

뺷국사뺸의 내용을 살펴보면 고대사 서술의 경우

,

뺷삼국사기뺸를 신뢰하는 입장에서 접근하였으며 분석적 연 구라기보다는 풀어쓴 경향이 강하다

.

이는 그가 아직 근대적 역사방법론을 체득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

다 만

,

개략적이나마 정치제도

·

문화

·

과학 등으로 형식분류적 방법론을 적용하려는 시도는 보인다

.

뺷국사뺸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英傑

·

英明

·

俊傑

·

雄傑

·

豪雄

·

英偉 등이다

.

이러한 용어 선택 은 훗날

별책으로 뺷위인전뺸을 남기기도 했지만 국난극복에 큰 업적을 남긴 위인의 역할을 부각시킴으로써 국민의 애국심을 환기시키고자 한 자취를 보여준다

.

이는 救國의 英雄을 바라는 논리가 강조된 것으로 다른 민족주의사학자들과 공통되는 영웅주의사관에 입각한 것이기도 하였다

.’

32)

31) 장도빈, 「暗雲짙은 舊韓末」, 뺷思想界뺸 19624月號, 291. 32) 천관우, 「通史解題」, 뺷汕耘張道斌全集뺸 卷1, 1981, 14.

(11)

또한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세웠으며 단군조선아래 각 지방 소국들이 朝鮮

·

扶餘

·

馬韓

·

卞韓

·

辰韓

·

·

沃沮의

7

대국이 되었다고 서술하였다

.

여기서 주목할 점은 장도빈이 기자에 대한 언급은 생략한 채 단군

→ 열국 → 삼국 → 남북국으로 연결함으로써 발해까지 그 정통으로 넣었다는 사실이다

.

이는

한국고대사의 체계를 단군 → 기자 → 마한 → 신라로 정통화 시켰던 조선후기 정통론

33)에서 벗어나 있었음을 보여준다

.

하지만 기자에 대한 언급을 생략한 까닭은 잘 알 수 없다

.

그가 기자에 대한 존재를 몰랐다기보다는 오히려 이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한 끝에 무시했을 가능성이 짙다

.

이는

1923

년 뺷朝鮮歷史要領뺸을 간행할 때 기자 가 등장하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

무단통치기 장도빈은 망명길에 올라 만주에서 신채호를 만나 함께 생활하였으며 뺷권업신문뺸의 논설주필도 잠시나마 맡았다

.

그는 해삼위에 머무르며 비참한 한국인의 현실을 목격하면서 그 원인을 게으름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하고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

하지만 그 원인을 민족의 나태성에서 찾을 뿐 식민지 현실의 구조적인 모순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었다

.

이 시기 경험은

1920

년대 세계개조의 흐름속에 문화주의를 받아들여 문화운동에 매진하게 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생각한다

.

Ⅳ. 文化統治期 新文化運動과 現實認識

1919

3·1

운동을 통해 분출된 민족역량은 일제의 지배정책을

문화정치

로 전환하게 하였다

.

이러한 변 화와 함께

1910

년대 일본유학을 통해 성장한 인물들이 사회운동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

이들은 직접 적인 저항운동이 아닌 사회 전반의 실력향상을 위한

문화

운동을 전개할 것을 주장하였다

.

34) 국내에 돌아와 칩거하고 있던 장도빈도

3·1

운동 이후 본격적인 활동을 벌이게 되었다

.

무엇보다 그의 건강이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

k. 나의 經驗에 빛외어

마침 己未運動以後에 나는 京城에서 民族的 文化運動에 着手하였다. 그러나 나는 一向 犧牲主義로 모든 일을 當하여 아무 내게 關係 많은 事業이라도 나는 决心하고 그 事業의 存在를 爲하여 내가 犧牲 하였다. 그 結果는 마침내 나의 生活基礎까지 專혀 破滅되고 말았다. 當時에 나는 再次 家庭을 構成하 였던 中이다. 그러나 生活의 困難으로 家族은 나의 心性과 處事에 不平을 抱하여 나는 再次 一家分散 의 悲境을 當하였다. 當時에는 朝鮮人의 發達을 爲하여 出版·敎育·言論의 三機를 必要하다 認하여 圖書會社·協成學校·朝鮮之光社 創立하였다. 그러나 나는 마침내 右 三個 機關을 다 干涉하지 않기로 决心하였다. 그는 나의 犧牲主義로 出生한 動作이었다. 그때 나로 因하여 犧牲한 同志가 많지마는 그 中에 나는 許憲氏를 잇지아니한다. 當時 許憲氏는 우리 唯一의 知己之友로 내가 하는 모든 일에 盡力 33) 이만열, 「朝鮮後期의 歷史學과 歷史家」, 뺷韓國近代 歷史學의 理解뺸, 문학과 지성사, 1981, 69.

34) 이태훈, 1920년대 전반기 일제의 문화정치(文化政治)’와 부르주아 정치세력의 대응」, 뺷역사와 현실뺸 47, 2003, 3~15.

(12)

犧牲한 이다. 나는 以上 身軆健康의 損傷과 自立基礎의 未成으로 公私間 多大한 損害를 當한 줄로 覺 悟하였다. 내가 三十六歲初 곳 三年前붙어는 모든 社會的 奉仕를 休止하고 鄕里에 歸하여 農業生活의 資料를 準備함이 全혀 그 때문이다.35)

1920

년대 유행하던 신문화운동의 흐름속에서 장도빈은

조선인의 발달을 위해 출판

·

교육

·

언론의 필요 성

을 인식하고 이에 따라 圖書會社

·

協成學校

·

朝鮮之光社를 창립하였다

.

그는 이를

희생주의

로 인해 만들 어진 것으로 인식하고 그에 따른 대가가 만만치 않았다고 하였다

.

1920

년대 들어 이러한 신문화운동이 전개된 데는

3·1

운동 이후 각종 외교운동의 좌절

,

사회진화론 및 개조론

·

문화주의 등 각종 외래 사조의 유입

,

일제의 산업정책 등 다양한 배경이 있었다

. 1920

년대 초반 문 화정치의 시작과 함께 새로 발간된 각 신문

·

잡지 지면은

개조

라는 용어가 유행어처럼 장식하고 있었다

.

특 히 한국

문화운동

의 주도이념은

문화주의

와 그로부터 파생된

인격주의

’, ‘

개인의 내적 개조론

으로 모두 당 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문화주의

사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는

신문화의 건설

에 큰 비중을 두었다

.

36) 아 래 글은 장도빈이 당시 유행하던 개조론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

l. 지금 세계는 개조의 세계이라. 민중주의라 인도주의라 하야 전세계의 인류가 大改造에 入하얏다. 무릇 세계는 얼마동안 一律로 지나면 반드시 변동이 생겨 가끔 개조하게 되나니 이 개조의 기회에 능 히 적응하야 잘 개조하게 되는 사회는 잘 생존, 확장하고 불행히 그 시대에 적응치 못하야 개조의 불능 또는 不善한 사회는 열패 쇠망하는 것이라. … 우리 조선은 근세 이래 동서양의 개조시대를 누누이 봉 착하얏스나 도모지 개조치 못하고 舊陋에 침체하다가 금일 현상에 至하얏나니 我人은 지금 개조시대를 당하야 금번에나 요행으로 기조의 列에 入하면 거의 桑楡의 補를 獲할지라. 만일 그러치 못하면 我人 의 전도는 비참뿐이리라.37)

장도빈은 근세 조선의 실패를 거울삼아 개조의 기회를 잘 활용하여 우승열패의 국제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

그는 세계개조의 시대에 대해

세계는 날로 좋아지고 있으며 구시대의 유물인 非正義

·

非人道

·

不便利

·

不快樂 등은 없어지고 정의

·

인도

·

편리

·

쾌락 등이 빛을 발

38)하는 사회로 나아가고 있 다고 생각했다

.

장도빈에게 문화주의는

“‘

정신

·

물질의 발달

·

연구를 군사상보다 평화

·

교통

·

산업

·

예술 등에 노력하며

,

정치는 압제보다 민중의사를 더 중시하며

,

경제는 자본가 보호보다 노동 본위를 주의하며 식민지통치책도 다 소 완화를 실현하고 국제간 문제도 국제연맹을 협의하는 것

39)등의 이념적 기반을 이루는 것으로 해석되기 도 했다

.

즉 이 시기 세계개조의 모든 이념적 기초로서 문화주의가 이해되었던 것이다

.”

40)

35) 뺷동광뺸 8, 1926121일자, 「만일 내가 다시 二十살의 청년이 될수있다하면」. 36) 박찬승, 앞의 책, 1992, 167~183.

37) 장도빈, 「希望과 批評」, 뺷서울뺸 제3, 1920427일자, 3~4(박찬승, 위의 책, 1992, 198쪽에서 재인용).

38) 장도빈, 「我等의 曙光」, 뺷서울뺸 제1, 19191215일자, 1.

39) 장도빈, 「現代의 思潮와 我人의 素質」, 뺷서울뺸 제4, 1920615일자, 3.

(13)

연도 월일 시간(오후) 지역 장소 주제 주최

1920

3. 27 2시 경성 團成社 古代朝鮮佛敎 朝鮮佛敎會

6. 5 8시 인천 엡웟男子靑年會內里禮拜堂 世界戰後의 朝鮮經濟 엠웟男子靑年會

6. 7 8시 경성 중앙기독교청년회 교육문제에 대하여 首陽學友會京城支會

7. 3 3시 경성 수송동 각황사 佛敎靑年의 使命 각황사

그리고 사회개조를 위해서는 구래의 풍속과 관습들을 없애거나 개량하여야 했다

. “

장도빈은 이에 대해 ① 부모와 자녀

,

부부간의 관계에서 전제적인 가족제도의 개조 ② 노예제도

,

반상관습 등 계급제도의 근절 ③ 조혼과 과도한 喪祭 등 婚喪제도의 개량 ④ 가옥개량

,

의복개량

,

식료개량 등 의식주 생활의 개량 ⑤ 여성들 의 외출

,

교육

,

취업 등 여성의 개조 등을 주장하였다

.”

41)

장도빈은 이러한 사회개조를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으로 교육을 강조하였다

. 1922

4

1

일자 뺷동아 일보뺸에는

新生을 追求하는 朝鮮人

,

現下 急務는 果然 何인가

라는 제목아래 각계 명사들의 의견을 구하고 있다

.

장도빈도 그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조선인의 단결

교육

’, ‘

공업발달

이라는 세 가지 문제를 언급하였 다

.

첫째

,

분열되어 서로 반목하는 조선인의 단결을 위한 해결책으로 개인 수양과 도덕적 살림을 하는 습관 을 가질 것을 강조하였다

.

둘째

,

교육을 조선민족의 존폐흥망이 달린 문제로 보고 턱없이 부족한 교육기관을 시급히 설립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

셋째

,

공업이 발달하지 못하면 생산품이 부족하여 어려움에 처할 수 있으 므로 청년학생들이 자연과학을 배워 공업을 발달시킬 것을 주문하였다

.

이상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

조선민 족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교육을 통해 분열을 지양하고 공업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

42) 이런 점에서 장도빈이 파악한 세 가지 現實的 急務는 교육문제로 종합해 볼 수 있다

.

장도빈은 뺷조선지광뺸 창간호

(1922. 11)

에 실린 「朝鮮民族의 未來를 論함」과 「朝鮮民族 發達史의 槪觀」을 통해 이 문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분석하였다

.

장도빈은 前論에서 조선민족이 쇠약한 원인을

革新치 못하고 繼續치 못하얏슴이라 다시 말하면 朝鮮民族은 固有의 美風은 退步식이고 時代의 進步에 落伍하얏도다

고 보 았다

.

이를 벗어나기 위해 우선 朝鮮古文化를 연구하고 세계 新文化를 수입하여 시야를 확대할 것을 강조하 였다

.

그리고 이러한 방침아래 각국의 교육 및 식산

(

경제

)

지표를 조선과 비교해 그 현실을 인지시키고 조선 민족이 협동을 통해 성취할 수 있기를 고대하였다

.

後論에서는 조선민족의 興起로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시 대를 개관하며 쇠퇴한 내외적 원인을 검토한 뒤에 신문화운동을 펼칠 것을 강조하였다

.

이렇듯

,

일련의

문화 운동

흐름 속에 직접 참여하며 교육을 통한 실력양성을 강조하였다

.

<표 1> 장도빈 강연회 일정표

40) 박찬승, 앞의 책, 1992, 209.

41) 장도빈, 「우리 改造의 一班」, 뺷서울뺸 제3, 1920427일자, 5~15(박찬승, 위의 책, 1992, 220~221쪽에서 재인용).

42) 장도빈은 앞서 1921년 臨時朝鮮人産業大會(委員長: 朴泳孝)發起總會에 참석하여 임원으로 선출되었으며(뺷동아일보뺸, 1921 730~81일자, 뺷매일신보뺸, 192181일자) 192211월 民立大學期成準備會에도 참여하는(뺷동아일보뺸, 19221130일자) 등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14)

연도 월일 시간(오후) 지역 장소 주제 주최 1920 7. 27 8시 황해도 朝陽普通學校 生活의 改造 鳳西靑年會

12. 26 7시 불교와 예술 海印寺布敎所

1921

4. 11 7시 경성 종로중앙청년회관 朝鮮敎育界의 變遷 고학생갈돕회 6. 10 8시30분 경성 경운동 텬도교당 理想的 朝鮮敎育 고학생구제회

12. 1 7시 경성 청년회관 現代靑年의 思想 朝鮮靑年聯合會

1925 4. 14 8시 경성 종로중앙청년회관 歷史로 본 우리의 文字 조선문정음부활회 1927 5. 24 8시30분 개성 중앙회관대강당 朝鮮史와 朝鮮人 개성중앙회관 1930 11. 15 7시 평양 白善行記念館 朝鮮文化建設史와

半萬年古都의 平壤 少年斥候隊平南聯盟

1931 8. 14 8시30분 평양 白善行記念館 朝鮮近世文化史 東方社(월간잡지)

1935 6. 22 8시 평양 白善行記念館 낙랑구락부

* 뺷매일신보뺸·뺷동아일보뺸 참고

장도빈은 강연회를 통해 교육문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하였다

.

위 표를 살펴보면

,

그의 활동지역은 대체로 경성과 평양이 중심이었다

.

교육을 강조한 점은 구한말이나

1910

년대와 달라진 것이 없다

.

다만 그 대상이 조선을 짊어지고 나갈 새로운 청년학생에 강조점을 두기 시작했다는 것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

.

청년

1920

년대 들어서면서 사회변화에 따라 민족을 단위로 하는 사회운동의 주체로 본격적으로 제기

되었다

. 1920

년대 초반 일본에 유학했던 신지식인층이 귀국하여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3·1

운동의 경험을 공

유한 세대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

여기에 민족주의가 고양되면서 문화는 식민지하에서 민족의 독자성 과 독립성을 유지하는 근거로 기능하였으며 이전의

문명개화

를 대신하여 민족이 도달해야 할 이상적 근대사 회의 상태를 의미하였다

.

이를 추진할 사회적 주체로 청년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

43)

m. 나의 經驗에 빛외어

一. 身軆健康에 노력할 것. 내가 二十六歲 붙어 三十歲까지의 最重要한 五個年間을 아무것도 못하 고 다만 身病治療에만 虛費한 것은 곳 나의 一生 幸福의 三分 一을 減한 줄로 앎다. 그 時代에 내가 美洲에 가서 공부를 하였더면 내가 얼마나 幸福스러웟겠는고. 나는 恨嘆하여 말지 아니한다. 그럼으로 내가 다시 二十歲가 될 수 있다면 身軆健康에 努力하여 健壯한 사람이 될 것이다.

二. 自立基礎에 努力할 것. 내가 二次나 一家分散의 悲慘을 當하고 또 모든 事業을 經營하다가 다 他人에게 맏기고 말은것은 거의 다 自立生活의 基礎가 없었음이 그 大原因이다. 一家分散한 것이 人生 으로 얼마나한 悲慘이며 事業을 애쓰어 成立하여 他人을 주고 말을 때에 事業經營家로서 얼마나한 눈 물이 갓나뇨. 그럼으로 내가 다시 二十歲의 靑年이 된다면 위선 自立的 生活의 基礎가 堅固하였던덜 43) 이기훈, 「청년의 시대 –1920년대 민족주의 청년담론 연구」, 뺷근대를 다시 읽는다뺸 2, 역사비평사, 2006, 259~263.

(15)

내 修養이나 내 活動이 今日보다 三倍나 五倍가 增大하였을 줄로 認한다.

三. 今日 靑年들. 나는 今日 靑年을 매우 걱정한다. 靑年 男女들의 所爲를 보면 男子靑年은 흔히 女 子를 抱擁하고 新生活의 재미를 보려는 이들이요 女子靑年은 흔히 貴族的 生活로 奢侈安樂을 取할 뿐 이다. 아아 朝鮮 靑年이여 지금 生活趨勢를 보라. 林野·漁業·土地·礦山·商業·工業等이 다 어떻 게 된 줄을 모르는가. 또 지금 水利組合等 問題로 朝鮮人의 生活은 큰 憂慮危殆에 더욱 向하지 아니하 는가. 이때 朝鮮 靑年은 質索·勇敢·勤勉等 中興 靑年의 元氣를 가지어야 할줄 모르는가.44)

장도빈의 청년교육에 대한 관심은 자신의

20

대 시절을 회상하며

건강한 신체와 자립

,

質索

·

勇敢

·

勤勉

등을 가질 것을 강조하고 있는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

위 글에서 주의할 점은 여자청년이 남자청년과 동 등하게 쓰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 “1920

년대 민족주의 청년담론에서 청년이란

,

상당한 지적

·

도덕적

·

경제력 을 갖춘 남성엘리트를 의미했으며 여성은 남성청년 주체의 일부 혹은 계몽의 대상이었다

.”

45)하지만 장도빈 은 남녀청년 모두에게 조선인이 당면한 현실적 문제를 직시하고 분발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

장도빈은 여러 잡지를 창간하여 스스로 이러한 문제들을 제기함으로써 풀어내고자 하였다

. ‘

뺷서울뺸은

1919

12

15

일 창간된 월간 종합잡지로써 그 편집 및 발행인이 장도빈이었다

.

이 잡지는 출판법에 의해 시사평론이나 정치적 논설은 실을 수가 없었다

.

실제로 「朝鮮獨立運動事件 顚末」

,

「世界에 對한 朝鮮人의 要 求」등

5

(

이상

6

),

「朝鮮靑年에게 告함」

,

「講和調約의 正文과 各國 現勢」

,

「朝鮮敎育의 根本問題」등

(8

)

의 기사가 전문 삭제를 당하는 등

,

일제의 언론 탄압으로 내용의 빈약함을 초래하고 말았다

.

그렇지만

3·1

운동 이후 국내에서 창간된 첫 종합지란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

46)

1920

12

15

일 제

8

호를 끝으로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

일제의 출판검열로 좌절을 경험하였던 그는 뺷동아일보뺸에

大問題인 出版法

이라는 題下로 출판제도의 사 전검열 문제를 지적하였다

.

47)그의 견해에 따르면

,

사회의 진보를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출판물의 보급이 일 제의 사전검열에 가로막혀 있었다

.

더구나 일본인이나 서양인은 검열을 받지 않는데도 유독 조선인만이 검열 을 받고 있다는 부당성을 제기하고 원고검열의 개정 및 출판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꾸도록 요구하였다

.

장도빈은 이후에도 또 하나의 잡지로 뺷朝鮮之光뺸을 발행하였다

.

이 잡지는 신문지법에 의해 발간한 사회 주의적 월간 종합잡지로써

1922

11

1

일 창간

,

통권

100

호로

1930

11

1

일 종간되었다

.

48)

1921

년 무렵 사회주의의 유입에 따라 실력양성운동이 분파되는 경향이 있었음을 고려할 때49) 장도빈은 일시적이나 마 사회주의계열과 손을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

하지만

1924

4

월 이후에는 잡지의 편집 및 발행인도 장도 빈에서 金東爀으로 바뀌었다

.

50)

44) 뺷동광뺸 8, 1926121일자, 「만일 내가 다시 二十살의 청년이 될수있다하면」. 45) 이기훈, 앞의 논문, 2006, 307.

46) 김근수, 「己未運動 前後의 雜誌 小考(), 뺷아세아연구뺸 10, 1967, 182. 47) 뺷동아일보뺸, 192133일자, 34일자.

48) 김근수, <文化政治>標榜時代의 雜誌槪觀」, 뺷아세아연구뺸 11, 1968, 213. 49) 전재호, 「자강론과 자유주의」, 뺷정치사상연구뺸 10: 2, 2004, 43.

50) 뺷檢察行政事務에 關한 記錄뺸(1) 京鍾警高秘 제7536호의 2, ‘조선지광사에 관한 건’(발신일 1924612).

(16)

그리고 뺷학생계뺸가 있다

.

뺷학생계뺸는 학생

,

특히 중학생을 대상으로 한 교양중심의 종합잡지였다

.

吳天錫 이 主幹

,

한성도서주식회사출판부 발행으로

1920

7

1

일에 창간되어 매월 발행되다가 朝鮮學生會의 기관 지가 되었다

.

이와 함께 편집 겸 발행인도 李時雄으로 변경되었으며

1924

6

5

일 통권

22

호로 종간하였 다

.

51) 그런데 뺷학생계뺸의 발행인이었던 오천석의 회고에 의하면

,

그가 뺷학생계뺸를 맡게 된 데는 장도빈의 추천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

52) 장도빈은 이밖에도 뺷아성뺸

,

53) 뺷한빛뺸 등에 글을 기고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 하였다

.

1928

년 창간된 뺷한빛뺸은 한국학 전문잡지로써 조선역사

·

조선지리

·

조선교학

·

조선예술 등 순전히 조선 의 것만을 소개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

기사는 학구적인 것을 피하고 되도록 통속적

·

실용적인 기사를 게 재하여 장래의 주인들인 소년들의 독서물로 애용되기를 바랐던 점을 특색으로 들 수 있다

.

54)

1928

1

15

일 창간되어 같은 해

8

1

일 통권

7

호로 종간되었다

.

장도빈은 이 잡지의 주요 집필진으로 참여하였다

.

55) 장도빈은 각종 잡지 및 출판사를 통해 자신의 국사연구와 관련 성과도 꾸준하게 발표하였으며 대중을 상 대로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뛰어났던 영웅이나 위인

,

혁명가 등을 조명하였다

.

이 무렵 일본은 출판법

,

교과서검정규정 등을 이용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역사서적을 통제하였으며

1920

년대부터는 사회주의사상이 수용되면서 사상계에도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

특히 국내에서 역사서 술은

1923

년을 전후한 시기 통사와 분류사의 저술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

56) 장도빈도 한국사 전반에 대한 체 계적인 역사서술을 시도하였다

.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뺷조선역사요령뺸과 뺷조선역사대전뺸이다

.

뺷조선역사요령뺸은

1923

년 간행되었으며 총

45

장으로 구성되었다

.

앞서 뺷국사뺸와 비교해 시대구분은 변함 이 없으나 각 시대마다

2

기 내지

3

기로 구분해 다루고 있다

.

고대사 분량도 전체에서 약

70%

를 차지할 만큼 비중이 높다

.

내용면에서 두드러진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

첫째

,

뺷국사뺸에서는 삼국을 서술할 때 신라를 먼저 언급하였 다면

,

뺷조선역사요령뺸에서는 고구려 동명왕을 먼저 내세워 서술하고 있으며 시기구분에서도 고구려를 기준 으로 하고 있다

.

둘째

,

앞서 서술방식이 뺷삼국사기뺸를 옮겨 쓴 경향이 강했다면 이 책에서는 분석적인 방법 을 통해 서술하는 면이 보인다

.

이는 근대적 역사서술방법을 체득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

셋째

,

각 시대별 로

제도 및 문화

를 따로 독립된 장으로 빼내어 서술하는 등 분류적 방법이 정착되어가고 있다

.

넷째

,

뺷국사뺸 에서는 기자에 대한 언급이 생략되었지만 이 책에서는 기자의 동래설을 인정하고 대신 조선에 동화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

다섯째

, ‘

中國

을 대신하여

支那

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

주지하듯

, ‘

지나

라는 용어는 일 본에서 일반적으로 쓰였다

.

장도빈 역시 이러한 일본식 개념을 은연중에 받아들이고 있었다

.

이상에서 보듯

, 1920

년대 장도빈은 식민권력이 부여하는 합법적인 공간안에서 신문화운동을 전개하였다

.

51) 김근수, 앞의 논문, 1968, 206~207.

52) 김중희, 뺷汕耘 張道斌뺸, 汕耘學術文化財團, 1985, 199~200.

53) 뺷아성뺸은 1921315일 창간되어 같은 해 101일 통권 4호로 종간하였다. 54) 김근수, 뺷한국잡지사연구뺸, 한국학연구소, 1999, 142.

55) 뺷중외일보뺸, 19271125일자.

56) 박걸순, 1920年代 韓國史 通史의 構成과 性格」, 뺷于江權兌遠敎授定年紀念論叢 民族文化의 諸問題뺸, 1994, 609~61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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