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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부분대상(objet partiel)”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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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그 존재론적 미학적 의의의 탐색

김 재 인*

1)

Ⅰ. 들어가는 말

Ⅱ. 멜라니 클라인과 부분대상

Ⅲ. 들뢰즈의 부분대상 개념

1. ‘부분대상’: 클라인에서 들뢰즈로 2. 기계들

3. “원천-기계”와 “기관-기계”의 관계 4. 부분과 전체

5. 부분대상

Ⅳ. “부분대상” 개념의 미학적 의의

* 서울대학교 강사

이 논문은 한국미학예술학회 2014년 봄 정기학술대회 기획심포지엄에서 발표한 원고를 수정 보완하여 게재한 것임.

별도의 언급이 없을 경우 강조는 필자의 것이다.

(2)

Ⅰ. 들어가는 말

도무지 대상(objet)이란 무엇인가? 서양 근대철학의 환경에서, 대상은 주관 (主觀)에 대응하는 객체(客體)라고 인식론적으로 파악되었다. 여기서 주객관계는 기본전제(postulat; 公準)의 역할을 했다. 이 전제에 담긴 주객 분리 및 그 분리와 극복을 둘러싼 여러 문제가, 대체로 데카르트에서 칸트까지의 서양 근대철학의 가장 중요한 문제인 인식론의 문제를 구성했다. 현대철학은 바로 이 주객분리의 문제를 극복하는 데서 태동했으며, 19세기 맑스나 니체의 작업은 그 중요한 계기 로 평가될 수 있다.

본 논문에서 우리는 들뢰즈(Gilles Deleuze)의 철학에서 ‘대상’ 개념이 어떻 게 이해되고 있는지를 살피려 한다. 그런데 들뢰즈에게 모든 ‘대상’은 ‘부분대상 (objet partiel)’이다. 그리고 ‘부분대상’ 개념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혁신한 멜 라니 클라인(Melanie Klein, 1882-1960)에서 비롯했다. 들뢰즈는 클라인의 개념을 취해 그것을 혁신함으로써 새로운 사고 지평을 열었다. ‘부분’이라는 개념은 들뢰 즈의 첫 저작인 경험주의와 주체성(1953)1)에서부터 중요하게 취급된 바 있으며, 꽤 긴 침묵 끝에 출판한 둘째 저작 니체와 철학(1962)2)은 물론 이어지는 저작 (가령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도 중요한 주제로 취급되어 왔다. ‘부분’은 ‘전체’

와의 관계 속에서 심오한 의미 변화를 겪게 되는데, 흄과 니체에서 바로 유래했 다고 볼 수 있는 이런 해석3)은 이제 클라인의 ‘부분대상’ 개념을 혁신하는 데에도 활용되었다.

본 논문의 구성은, 우선 클라인의 부분대상 개념을 의미를 살핀 뒤, 들뢰즈 가 염두에 두고 있는 부분 개념을 특히 니체를 중심으로 검토하고, 부분과 전체

1) Gilles Deleuze, Empirisme et subjectivité. essai sur la nature humaine selon Hume, Paris: P.U.F., 1953. 이하 본문에서 ES로 약칭.

2) Gilles Deleuze, Nietzsche et la philosophie, Paris: P.U.F., 1962. 이하 본문에서 NP로 약칭.

3) 물론 그 후에 연구한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베르그손 등의 철학자를 해석하는 데서도 ‘부 분’ 개념의 혁신이 나타나지만, 들뢰즈 사고의 발전 단계상 이런 해석 역시도 흄과 니체를 거쳐서야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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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대한 혁신을 통해 클라인의 부분대상 개념에 어떤 변화를 주는지를 과타리 (Félix Guattari)와의 공저 안티 오이디푸스. 자본주의와 분열증(1972)4)을 중심 으로 살필 것이다. 끝으로, 이렇게 해서 정립된 들뢰즈의 부분대상 개념이 현대 미학의 맥락에서 어떤 의의를 지니는지 확인할 것이다.

Ⅱ. 멜라니 클라인과 부분대상

멜라니 클라인은 프로이트가 창시한 정신분석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고, 프 로이트의 탐구에서 많은 소재를 취했지만, 동시에 프로이트와는 상당히 다른 입 장을 견지했다. 클라인은 특히 아동에 주목했는데, 사실 아동 정신분석은 프로이 트로서는 근접하기 어려운 영역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여러 이유가 제시될 수 있을 테지만, 필자는 아이를 직접 낳고 키운 여성과 아이와 관련해서는 외부자로 머물 수밖에 없는 남성 간의 차이, 말하자면 아이와의 친밀도가 가장 큰 이유라 고 본다. 이유야 어찌됐건 간에, 클라인은 아동에 대한 정신분석을 통해 인간의 초기 단계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탐구했고, 그 결과는 성인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고 보았다.5)

프로이트와 클라인의 차이를 모두 지적하는 일은 본 논문의 목표가 아니기 4) Gilles Deleuze & Félix Guattari, L’Anti-Oedipe,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Paris:

Les éditions de Minuit, 1972. 이하 본문에서 AO로 약칭.

5) 이하 클라인의 사상에 대한 정리는 다음 문헌들을 참고했다. 장 라플랑슈 & 장 베르트랑 퐁탈리스, 정신분석 사전, 임진수 옮김, 열린책들, 2005. 박선영, 멜라니 클라인의 아동 정신분석. 이론 및 임상 체계의 비판적 재구성 , 이화여대박사학위논문 2004. Elizabeth Bott Spillius, Jane Milton, Penelope Garvey, Cyril Couve & Deborah Steiner, The New Dictionary of Kleinian Thought, New York: Routledge, 2011. R. D. Hinshelwood, A Dictionary of Kleinian Thought, Northvale, N.J.: Jason Aronson, 2nd edition, 1991. Julia Segal, 멜라니 클라인, 김정욱 옮김, 학지사 2009. 클라인의 영어판 전집은 멜라니 클라 인 재단(The Melanie Klein Trust)의 주도로 The Writings of Melanie Klein, New York:

The Free Press 1975 총 4권으로 출간되었다. Vol Ⅰ. Love, Guilt and Reparation and other works 1921-1945; Vol. Ⅱ. The Psycho-analysis of Children; Vol Ⅲ. Envy and Gratitude and other works 1946-1963; Vol. Ⅳ. Narrative of a Child Analy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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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자세히 분석할 수는 없고, 그 둘의 차이가 잘 드러날 만한 본질적 차이에 주목하려 한다. 그런데 이 차이는 인간 발달에 있어서의 전제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인간 발달이 단계(stage) 또는 국면(phase)을 거친다고 본 반면, 클라인은 몇몇 위치 또는 입장(position)을 떠돈다고 보았다. 프로이트가 인 간 발달을 통시적(通時的)인 것으로 본 데 반해, 클라인은 공시적(共時的)인 것 으로 본 것이다. 클라인은 ‘위치’를 두 극(極)으로 나누어 “편집-분열증 위치 (paranoid-schizoid position)”와 “우울증 위치(depressive position)”라고 명명하면 서, 인간은 단계나 국면을 거쳐 가면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일생 동안 이 두 위치를 극으로 해서 그 사이의 어느 지점엔가 있으면서도(위치 이전), 어느 한 극 이 완전히 사라지거나 하는 일은 없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클라인이 보기에, 프로 이트가 구별한 구강기, 항문기, 성기기 등의 단계도 시간적 순서에 따른 발달 단 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각각 어떤 특징이 두드러지느냐에 따른 강조점의 변 화만을 가리킬 뿐이다. 즉, 이들 각 단계 역시도 위치 이전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클라인에 따르면, 아이는 무의식적 환상6)을 통해 주변을 지각한다. “이 환상 은 외부 현실에서 구성되지만 자신의 감정과 기존의 생각과 지식에 의해 수정된 다.”7) 이 환상은 외부 현실, 가령 부모의 행동에 의해 수정되지만, 부모의 행동은 기존의 환상을 “확증”하거나 “부인”하는 방향으로 작용할 뿐이다. 환상의 작동에 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투사적 동일시(projective identification)”이다.

가령, 아이는 자신의 나쁜(=박해적인) 부분과 감정을 제거해서 다른 누군가에게 보내며, 그럼으로써 그 나쁜 것이 자기에게 있지 않다고 느낀다. 하지만 이와 동 시에 그 다른 누군가와의 관계는 이런 투사의 영향을 받아 아이는 그 상대를 미 워하거나 두려워하게 된다. 이 작용은 대상관계의 형성에 일차적이다. 물론 아이 는 자신의 좋은 부분을 타인에게 투사함으로써 다른 형태의 대상관계를 맺기도

6) 클라인은 프로이트의 영어 표준판 번역자인 스트레이치(James Strachey)를 뒤따라 ‘(의식 적) 환상(fantasies)’과 구별하기 위해 ‘(무의식적) 환상(phantasy)’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7) Julia Segal, 멜라니 클라인, 김정욱 옮김, 학지사 2009, 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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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이런 두 형태의 ‘투사적 동일시’는 아이의 삶에서는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삶의 가장 초기 단계에 있는 아이에게는 자신의 삶을 소멸시키는 것과 자신을 즐겁게 해주는 것을 구분하고 분리시키고 뒤섞지 않는 것이 꼭 필요하기 때문 이다. 젖먹이 아이는 편안하고 평화로울 때 지각되는 사랑스럽고 좋은 젖꼭지와 복통을 느낄 때 지각되는 상처 주는 무서운 젖꼭지 환상을 분열시켜야만 한다.

이런 분열이 없다면 사랑과 잔인함을 구별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런 환상은 타인의 부분들이 자기 안으로 들어오는 내입(introjection) 환상과 함께, 유아기 환 상의 두 방향을 이룬다. 말하자면, 투사와 내입은 유아기 환상의 두 방향을 가리 키며, 이런 환상을 통해 아이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리 또는 분열시키면서 살아간다.

클라인은 이런 환상이 지배하는 시기를 “편집-분열증 위치”라고 부른다. 이 것에 ‘편집증’이라는 수식이 붙는 까닭은, 유아의 환상이 좋거나 나쁜, 이상적이거 나 박해적인 방향으로 ‘망상적’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클라인이 “부분대상”을 발 견한 것은 “편집-분열증 위치”에서이다. 아이의 충동은 부분적이며, 바로 그 부분 충동이 향하는 충족의 대상이 부분대상이다. 가령 유아에게 젖가슴은 충동이 향 하는 부분대상으로, 자신을 기쁘게 해주는 좋은 젖가슴과 자신에게 고통을 느끼 게 해주는 나쁜 젖가슴으로 분열되어 존재한다. 대상을 부분대상으로 환상적으로 지각하는 것은 유아의 삶에서 자신을 지키는 훌륭한 수단이다. “우선, 이 모든 환 상의 대상은 어머니의 젖가슴이다. 유아의 관심이 한 사람의 전체(the whole)보다 한 부분(a part)에 국한된다는 점은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염두 에 두어야 하는 것은, 아이는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극히 미발달된 지각 능력을 갖고 있어서, 그래서 […] 유아는 오직 자신의 즉각적인 만족 또는 만족의 결핍에 만 관심을 둔다.”8) 여기서 유아에게는 만족을 주는 것은 ‘좋은’ 대상으로, 고통이 나 굶주림을 주는 것은 ‘나쁜’ 대상으로, 즉 모든 각각의 대상은 부분대상들로 여

8) Melanie Klein(1936), “Weaning”, in Melanie Klein pp. 290-291. The Writings of Melanie Klein, New York: The Free Press 1975, Vol I. Love, Guilt and Reparation and other works 1921-1945, pp. 290-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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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진다.

시간이 흘러 유아는 생후 3개월이 지나면서 인물을 그 자신의 현실적인 모 습으로 지각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하기 시작한다. 이제 아이는 ‘좋은’ 대상과 ‘나 쁜’ 대상이 사실은 하나의 대상, 즉 전체 대상(a whole object)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물론 전체 대상에 대해서도 감정들과 동기들이 뒤섞여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말하자면, 부분대상들의 통합이 시작되는 것이다. 젖가슴의 손실이 전적인 파괴인 것은 아니며, 좋은 체험은 영원 한 천국인 것도 아니다. 클라인은 이 단계를 “우울증 위치”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우울증’의 측면은 나쁜 대상마저도 좋은 대상과 하나라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아 이는 전체 대상을 어떤 식으로건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성숙에는 그만큼의 고통 이 따른다. 아이는 이제 부분대상들에서 전체 대상으로, 편집-분열증 위치에서 우 울증 위치로 이전해야 한다. 그렇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많은 사람들은 이 두 위 치 사이에서 방황하곤 한다.

Ⅲ. 들뢰즈의 부분대상 개념

1. ‘부분대상’: 클라인에서 들뢰즈로

지금까지 보았듯이, 부분대상을 발견한 공(功)은 클라인에게 돌려야 마땅한 데, 클라인은 이를 전체(엄마)에서 떨어져 나온 것(젖가슴)으로 이해해서 전체의 회복을 요구한다. 이것이 편집-분열증 위치에서 우울증 위치로의 변화, 또는 유아 의 발달이 의미하는 바였다. 클라인에 대해 들뢰즈는 부분대상의 발견에 대한 칭 찬과 더불어 그것을 전체에 종속된 이차적인 것으로 만들었다는 점에 대한 비판 을 곳곳에서 되풀이한다. 충동들 또는 충동의 대상들은 통합된 전체로 향하지도 않고 어떤 원초적 총체성에서 파생되지도 않는다. 들뢰즈는 클라인이 두 가지 이 유에서 부분대상들의 본성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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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로, 클라인은 “이 [부분]대상들을 환상이라 생각하고 이것들을 현실적 생산의 관점이 아닌 소비의 관점에서 판단한다. 그녀는 부분대상에 대한 관념론 적 착상을 강요하는 인과관계 메커니즘(가령 내입과 투사), 효과 발생 메커니즘 (만족과 좌절), 표현 메커니즘(좋음과 나쁨)을 배정한다”(AO 52). 하지만 들뢰즈 가 보기에 실제로 부분대상들은 “욕망 기계들의 경과라는 생산의 진정한 경과”에 결부되어 있다.

둘째로, 클라인은 “편집-분열증적 부분대상들이 하나의 전체에, 이 전체가 원초적 국면에 있는 본원적 전체이건 훗날의 우울증 위치에서 도래할 전체(완전 한 대상)이건, 어떻든 하나의 전체와 관련된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한다. 따라서 그녀에게 부분대상들은 온전한 인물들에서 채취된 것으로 보인다”(AO 52-53). 하 지만 들뢰즈에 따르면 부분대상은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것이라고 파 악해야 한다. “부분대상들은 외견상으로만 온전한 인물들에서 채취된다. 부분대상 들은 비인물적인 하나의 흐름 내지 휠레에서 채취를 통해 현실적으로 생산되며, 다른 부분대상들에 자신을 연결함으로써 이 흐름 내지 휠레와 소통한다. 무의식 은 인물들을 모른다. 부분대상들은 부모라는 인물의 대표가 아니며, 가족 관계들 의 받침대도 아니다. 부분대상은 욕망 기계들 속의 부품들이며, […] 환원 불가능 하며 1차적인 생산의 경과 및 생산 관계들에 관련된다”(AO 54).

들뢰즈는 클라인이 발견한 “부분대상”의 의미를 완전히 개정하여 일차적인 것으로, 존재론적인 것으로 만든다. “부분대상들은 무의식의 분자적 기능들이 다”(AO 387 - 원문 강조). 그런데 여기서 들뢰즈는 “부분”이라는 말의 의미도 약 간 수정한다. 그것은 외연적(extensif) 부분이라는 뜻에서 “부분적(partiel)”이기보 다는 내공적(intensif, 內鞏的; 强度的) 차원을 채우고 있다는 뜻에서 “편파적 (partial)”이라는 말에 가깝다는 것이다. “부분대상들은 펼쳐있는(延長) 부분들이라 는 의미에서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물질이 다양한 정도로 공간을 항상 채 우고 있는 내공들(물질의 정도들로서의 눈, 입, 항문)로서 “편파적”이다”(AO 368 ).9) 바로 이런 특성이야말로 들뢰즈가 누누이 강조하게 될 무의식의 분자적 요 9) 우리는 Ⅲ-3에서 흄과 관련해 이야기될 partiel과 partial의 의미가 뒤바뀐 것을 확인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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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서의 부분대상의 종합들을 설명해 준다(AO 368).

이제 들뢰즈에게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개념의 하나인 “부분대상”에 대해 살피도록 하자. 우선 그 표현이 처음 등장하는 대목부터 보겠다.

“연속된 흐름들과 본질적으로 파편적인 동시에 파편화된 부분대상들의 연 동을 욕망은 끊임없이 실행한다. 욕망은 흐르게 하고 흐르고 절단한다. […]

이 흐름들은 부분대상들에 의해 생산되며, 다른 흐름들을 생산하는 또 다 른 부분대상들에 의해 부단히 절단되고, 또 다른 부분대상들에 의해 재절 단된다. 모든 “대상”은 흐름의 연속성을 전제하며, 모든 흐름은 대상의 파 편화를 전제한다”(AO 11-2).

여기서 처음 등장하는 “부분대상” 개념은 (필자가 바로 뒤에서 살필) “기관- 기계”라는 개념과 실제로는 같은 뜻이다. 들뢰즈는 “원천-기계” 또는 “에너지-기 계”라 불리는 것과 쌍을 이루는 것으로 “기관-기계”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안티 오이디푸스의 첫 구절은 바로 이 개념들을 소개하면서 시작한 바 있다.10) 거기 서는 흐름을 방출하는 기계를 “원천 기계” 또는 “에너지 기계”라고 규정하고 이 를 절단하는 기계를 “기관-기계”라고 규정한다. 우리가 “부분대상” 개념을 이해하 기 위해 먼저 해명해야 할 개념 쌍은 바로 “원천-기계”와 “기관-기계”이다.

여기서 들뢰즈가 노리는 것은 두 가지이다. 우선, 프로이트의 “이드(le ça, das Es)”에 대한 비판이 그것이다. 무의식 또는 욕망을 가리키는 말로 프로이트 가 도입한 “이드”에 대해 들뢰즈는 그렇게 부르는 것이 “얼마나 큰 오류”냐고 지 적하면서 정관사를 떼어내어 “그것(ça)”이라고 고쳐 적는다. 이런 비판은 이미  있다. 그러나 흄에서의 “부분적”과 “편파적”의 의미가 여기서의 그것과 문맥을 달리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 문제는 다른 고찰의 자리를 요한다.

10) “그것(ça)은 도처에서 기능한다. 때론 멈춤 없이, 때론 간헐적으로. 그것은 숨쉬고, 열 내 고, 먹는다. 그것은 똥 싸고 씹한다. 이드(le ça)라고 불러버린 것은 얼마나 큰 오류더냐?

도처에서 그것은 기계들인데, 이 말은 결코 은유가 아니다. 나름의 연동들, 나름의 연결들 을 지닌, 기계들의 기계들. 원천-기계에 기관-기계가 접목된다. 한 기계는 흐름을 방출하 고, 이를 다른 기계가 절단한다. 젖가슴은 젖을 생산하는 기계고, 입은 이 기계에 연동된 기계다”(AO 7 - “이드”는 원문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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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와 반복(1968)에서도 모색된 바 있는데, 거기서는 이드 개념을 “하나의 “여 기 저기”(un “çà et là”)”11)라는 말로 해체하며 논의한 바 있다. 들뢰즈의 비판의 핵심은 프로이트의 “이드”가 욕망의 전 작동을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욕망은 결핍을 충족하려는 바람이 아니라 바람을 건설하려는 실천이다.12) 그리하 여 들뢰즈는 프로이트가 “그것”이라 지칭한 것에 “기계”라는 명칭을 부여하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서 살피기로 하자.13) 다음으로, 들뢰즈는 클라인을 정정하 려 한다. 여기 등장하는 “젖가슴”과 “입”이 클라인에게 얼마나 특권적인 사례인지 는 이미 확인한 바 있다. 그렇다면 “젖가슴”과 “입”의 관계는 어떠한가. 클라인이 구순기의 유아에게 한정시킨 작용을 들뢰즈는 존재론적으로 일반화한다. 그것 이 “기계” 작용이다. 그것은 아이와 엄마의 젖가슴의 관계가 아니라, 존재자들 일 반의 관계이다. 정확히 말하면, “흐름을 방출하는” 기계가 “원천-기계”요, “흐름을 절단하는” 기계가 “기관-기계”이다. 그래서 “젖가슴”은 “원천-기계” 또는 “에너지 -기계”라고, “입”은 “기관-기계”라고 불리게 되는 것이다.

11) Gilles Deleuze, Difference et Répétition, Paris: Les éditions de Minuit, 1968, p. 128.

12) Gilles Deleuze & Claire Parnet, L'Abécédaire de Gilles Deleuze, 1996. Video interview.

“D” in “Désir”.

13) 들뢰즈은 기계를 “욕망 기계(une machine désirante)”라고 이해한다. “욕망 기계”는 “욕망 적 기계”라는 뜻이다. ‘욕망’(désire) 또는 ‘욕망하다’(désirer)에 형용사 표현이 없기에 불가 피하게 사용된 désirante는 동사가 아닌 형용사로, 따라서 ‘욕망하는 기계’보다는 ‘욕망적 기계’ 내지 ‘욕망 기계’로 옮기는 것이 더 적절하다(영어의 desiring-machine도 마찬가지).

이는 들뢰즈가 종종 사용한 “욕망적 생산(production désirante)이라는 표현에서의 용법을 이해할 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만일 ‘욕망하는 기계’라고 옮기면, 욕망과 기계의 관계 에서 욕망은 그 기계의 활동으로 이해되는데, 이렇게 되면 ‘욕망’의 성격에 대한 전통적 오해에 다시 빠질 우려가 있다. 반면 ‘욕망적 기계’ 내지 ‘욕망 기계’로 옮기게 되면, 이번 엔 욕망이 기계의 특성으로 이해될 수 있어, 정확한 이해를 돕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 더 자세한 논의는 김재인, 들뢰즈의 비인간주의 존재론 ,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3의 3장 4절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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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계들

들뢰즈는 기계를 “절단들의 체계(un système de coupures)”(AO 43 - 원문 강조) 또는 “흐름의 절단들의 전 체계(tout système de coupures de flux)”14)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흐름”과 “절단”이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점에 주의해 야 한다.15) 주라비슈빌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흐름과 절단은 하나의 같은 개념을 형성한다”16)고 주장하는데, 이는 올바른 파악이다. 그 둘은 서로를 전제하 며 필요로 한다. 이 점은 안티 오이디푸스 1장 5절의 첫 대목에서 강조되고 있다.

“모든 기계는 이 기계가 자르는 연속된 물질적 흐름(휠레)과 관련을 맺 고 있다. 모든 기계는 햄을 절단하는 기계처럼 기능한다. 즉, 절단은 연합 적 흐름에서 채취를 수행한다. 가령 항문과 이것이 절단하는 똥의 흐름.

[…] 실제로 휠레란 관념 안에 물질이 소유하고 있는 순수한 연속성을 가리킨다. […] 절단은 연속성에 대립하기는커녕 연속성의 조건을 이루 며, 그것이 절단하는 것을 관념적 연속성으로서 내포하거나 정의한다.

이는, 우리가 앞서 보았듯, 모든 기계는 기계의 기계이기 때문이다”(AO 43-44).

이 구절에서 말하는 “채취(prélèvement)”는 광산에서 금을 캐내듯 선별하고 뽑아내고 골라내는 기능을 가리킨다. 이 작용은 “채취-절단(coupure-prélèvement)”

이라고도 불린다. 그런데 그것은 “연속된 물질적 흐름” 내지 “연합적 흐름”인 “휠

14) Gilles Deleuze, L'île Déserte et Autres Textes. textes et entretiens 1953-1974, édition préparée par David Lapoujade,, Paris: Les éditions de Minuit, 2002, p. 305.

15) 실제로 들뢰즈를 “흐름의 존재론”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논쟁적인 사고의 발 명품에 불과하다(cf. François Zourabichvili, Le Vocabulaire de Deleuze, Paris: Ellipses Édition Marketing S.A., 2003, p. 18) 사실 “절단”에는 셋이 있는데, 지금 맥락에서 중요한 것은 “채취-절단”이므로, 이 글에서는 “절단”을 대개 “채취-절단”의 의미로 쓴다. 다른 두 절단은 “이탈-절단”과 “잔여-절단”이다. 이에 대해서는 안티 오이디푸스의 1장 2, 3, 5절 및 김재인, 들뢰즈의 비인간주의 존재론 ,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3의 4장 참고.

16) François Zourabichvili, ibid., p.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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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hylē)”와 관련을 맺고 있다. 본래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질료”를 의미하는 휠레 는, 들뢰즈에 의해 “관념 안에 물질이 소유하고 있는 순수한 연속성”으로 재규정 된다. “휠레”는 희랍 철학 전통의 몇몇 국면과 관련된다. 거칠게 말하면, 우주는 무규정(apeiron, infini)의 측면과 규정(peras, fini)의 측면으로 구분된다. 특정한 규정을 받는 영역을 제외한 나머지 영역은, 그 규정의 관점에서는 무규정적인 채 로 머문다. 그런 점에서 무규정은 규정에 대해 상대적이다. 플라톤에서 규정의 측면은 ‘형상(eidos, idea)’이라고 이야기되는데, 그것은 논리적 차원에서는 ‘어떤 것의 어떤 것임 그 자체’를 의미하며 현실적 차원에서는 그 어원이 가리키듯이

‘본 것’, 즉 ‘눈이 도려내어 경계를 그어 지칭하는 그 어떤 것’을 의미한다. 침대 그 자체는 침대가 아닌 다른 모든 무규정성과의 구별과 더불어서만 지칭될 수 있다. 여기서의 무규정성이 바로 “휠레(질료)”이다. 말하자면 희랍 전통에서 형상 과 질료는 쌍을 이루는 형태로만 성립하는 개념이다. 들뢰즈가 절단이 연속성(=휠 레)에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연속성을 내포하거나 정의한다고 말하는 것 도 이런 까닭이다. 그런데 들뢰즈는 “형상”과 “질료”를 “채취-절단”과 “연속된 물 질적 흐름”이라는 용어로 바꾼다. “채취-절단”의 플라톤적 유래는 그가 이 개념을 설명하는 방식에서 잘 드러난다.17) 앞에서 “휠레”를 통해 “연속된 물질적 흐름”을 설명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오마주이며, 여기서 눈과 봄의 사례를 통해

“채취-절단”을 설명하는 것은 명백히 플라톤에 대한 오마주이다.18) 이 문장에서 는 눈이 중요한 사례인데, 눈은 우주의 모든 것을, 즉 무규정적 흐름을 ‘보기’의 견지에서 해석한다. ‘보기’라는 절단을 수행하는 기계가 바로 눈인 것이다. 눈에 따르면, 모든 것은 시각의 견지에서만 존재한다. 그렇다고 모든 존재자가 시각적 17) “물론 각각의 기관-기계는 자기 고유의 흐름에 따라, 이 기관-기계에서 흘러나오는 에 너지에 따라 전 세계를 해석한다. 가령 눈은 모든 것을, 즉 말하기, 듣기, 똥 싸기, 씹하기 등을 보기의 견지에서 해석한다. 하지만 하나의 횡단선 속에서, 어떤 다른 기계와 늘 하 나의 연결이 설립된다. 이 횡단선 속에서, 저 처음 기계는 다른 기계의 흐름을 절단하거나, 다른 기계에 의해 자신의 흐름이 절단되는 것을 ‘본다’”(AO 12).

18) 들뢰즈가 형상-질료 관계를 채택하면서도 이를 넘어서는 것은 시몽동의 입장을 수용하기 때문이다. 시몽동(Gilbert Simondon)은 질료가 단순한 수동성으로 이해될 수 없으며, 그 자체 수용적 능동성을 지닌다고 보았다. 들뢰즈가 형상-질료 관계를 넘어선 이유가 그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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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눈은 시각과 관련해서만 자신의 기능(채취-절단) 을 수행한다. 각각의 기계가 절단하는 방식은 바로 눈이 행하는 이런 식이다.

여기서 하나 더 살펴야 할 것이 “연속성”이라는 규정이다. 왜 흐름은 연속성 을 지니고 있다고 표현되는가? 그 까닭은 규정 바깥에 남아 있는 것은 원리상 구 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위의 사례에서 “보기”를 제외한 “다른 모든 것, 즉 말하 기, 듣기, 똥 싸기, 씹하기 등”은 구별되지 않으며 그런 점에서 연속적이다. 또는 들뢰즈 자신의 용어로 말하면, 이 다른 모든 것은 “횡단(transverser)”된다. 횡단 은 기존의 존재자들을 질료로 환원하면서 규정을 박탈한다는 뜻이다. 횡단이란 규정의 해체, 규정에서의 이탈(détachement)이다. 말하자면 기존의 대상들이 규정 성을 잃게 되어 새로운 규정을 부여받을 수 있는 상태로 바뀌는 과정이 바로 횡 단이다. 횡단은 기존의 규정들이 규정들로서 존재할 때의 구별들을 가로지른다.

기존의 규정들은 적어도 횡단의 운동 속에서는 해체된다. 이는 마치 일정한 코드 에 따라 결합되어 있던 어떤 사물이 화학 원소들로 분해되어 새로운 결합을 이룰 준비가 된 단계라고 보아도 좋다. 규정성이 해체되고(이를 들뢰즈는 “이탈-절단 (coupure-détachement)”이라 부른다), 무규정성으로 바뀌었다가(이것이 “흐름”이 다), 다시 규정성을 부여받는다(이것이 “부분대상”이다). 이 과정의 되풀이가 생산 의 경과를 구성한다. 우주는 이런 내재적 원리에 따라 생성한다. 뒤에서 다시 보 게 될 “횡단적(transversale) 내지 초한적(transfinie, 超限的) 연결들”(AO 44)이라 는 표현(즉 ‘한계 내지 규정성(finis, peras)을 가로지르다’)은 바로 이런 이유로 언급되었던 것이다. “횡단”이라는 개념은 바로 채취-절단과 상관적인 흐름의 연속 성 덕분에 작동할 수 있다. 그리고 들뢰즈가 말하는 “흐름(flux)”이 헤라클레이토 스 식의 흐름과 구별된다는 점도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흐름”은 단지 “절단”과의 상관성 속에서만, 어떤 점에서는 절단 사후에, 또는 절단과 동시에, 정립되는 그 런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우주는 흐름이다”라고 말한다 해도 이는 세 계에 구별되는 현상이 있다는 경험적 사실과 아무 모순도 없다. 나아가 “흐름”과

“절단”의 변전에서 들뢰즈의 생산 개념이 더 분명해진다. 생산은 “무에서의 창조 (creatio ex nihilo)”가 ‘이미 있는 것들의 재활용 또는 리모델링’(creatio in situ)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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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원천-기계”와 “기관-기계”의 관계

희랍 철학의 용어로 표현하면 흐름은 무규정자이고 채취-절단은 규정을 부 여하는 작용이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할 점은, 흐름을 원천-기계와 동일시하고 채 취-절단을 기관-기계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흐름과 절단’의 쌍은 채 취-절단에 의해 비로소 생겨나며, 채취-절단을 행하는 쪽이 기관-기계로, 그 결과 흐름을 방출한다고 규정되는 쪽이 원천-기계로 동시에 정립(定立)된다. 기관-기 계와 원천-기계의 쌍은 동시에 상호 규정된다. 들뢰즈가 드는 모범적 예가 거식 증인 입이다. “거식증인 입은 먹는 기계, 항문 기계, 말하는 기계, 호흡 기계 사이 에서 주저한다(천식의 발작)”(AO 7). 거식증인 입은 미규정 상태의 그 무엇, 즉 먹는 기능을 수행하는 기관이 아닌 그 무엇이며, 그래서 “입”이라고 편의상 잠정 적으로 불리고는 있지만 엄밀하게는 입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그 무엇이다. 들뢰 즈가 여기서 “입”을 예로 든 것은 물론 클라인에 대한 오마주이다.

“하나의 기관은 상이한 연결들에 따라 여러 흐름들에 연합될 수 있다. 그것 은 여러 체제 사이에서 주저할 수 있고, 심지어 어떤 다른 기관의 체제를 떠맡기까지 한다(거식증인 입). 이제 기능에 관한 온갖 종류의 물음이 제기 된다. 어떤 흐름을 절단할까? 어디서 절단할까? 어떻게, 어떤 식으로? […]

먹은 걸로 질식하고, 공기를 마시고, 입으로 똥 싸는 따위의 일을 해야 할 까, 그럴 필요 없을까?”(AO 46).

그것은 연결(connexion)의 성격에 따라, 다시 말해 “채취-절단”의 성격에 따 라, 먹는 기관, 토하는 기관, 말하는 기관, 숨 쉬는 기관 등으로 생성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연결의 상관항인 젖가슴, 똥, 말, 공기 등도 이 연결과 동시에 생성한다는 점이다. 즉, 미리 존재하는 “원천-기계”와 “기관-기계” 따위는 없으며, 양자는 연결 또는 채취-절단에 의해 비로소 생성하고 정립된다. “에너지-기계에 대해서는 기관-기계, 언제나 흐름들과 절단들”(AO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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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적으로 보면, 우선 에너지-기계 또는 원천-기계가 있으며, 이는 흐름을 방출하는 기능을 한다. 그 다음, 절단하는 기계가 있는데, 이것이 기관-기계이다.

가령 젖가슴과 입. 하지만 이는 젖가슴(원천-기계, 에너지-기계)이 미리 존재하고 입(기관-기계)이 미리 존재해서 이 둘이 만난다는 의미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여기서는 하나의 사건이 발생한다고 이해해야 한다. 한편에는 흐름을 방출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기계 즉 원천-기계가 다른 한편에는 흐름을 절단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기계 즉 기관-기계가 동시에 발생한다. 이 맞물림이 바로 연결 또는 연동(couplage)의 의미이다. 연결 종합 자체가 하나의 사건의 발생이다.

이제 한 단계 더 나아가 살펴볼 점은 “채취-절단”이 하나의 단일한 계열을 따라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주 사방에 “채취-절단”들이 얽히고설 키면서 동시에 일어난다.

“욕망 기계들은 […] 이항 기계이다. 하나의 기계는 언제나 다른 기계와 연동되어 있다. […] 흐름을 생산하는 어떤 기계와 이 기계에 연결되는, 절 단을, 흐름의 채취를 수행하는 또 다른 기계가 늘 있으니 말이다(젖가슴- 입). 그리고 저 처음 기계는 그 나름으로는 절단 내지 채취 같은 작동을 통 해 관계를 맺는 또 다른 기계에 연결되기 때문에, 이항 계열은 모든 방향 에서 선형(線形)이다”(AO 11).

절단하거나 흐름을 채취하는 또 다른 기계는 “늘” 있고, 또 “그 나름으로”

채취-절단 작동을 하며, “모든 방향에서” 선형 계열을 이룬다. 말하자면, 하나의 기계가 있을 때 그것은 행해지는 채취-절단에 따라 다른 기계들에 모든 방향으 로 동시에 연결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항 계열은 동시에 여럿 있을 수 있다. 이항 계열은 밧줄과 비슷한 어떤 것이 아니라 그물과 비슷한 어떤 것이 다. 어떤 기관-기계(물론 이 기관-기계는 절단의 산물이다)가 있다 할 때, 그것은 모든 방향으로 다른 기계들에 연결될 수 있다. 들뢰즈가 거식증인 입을 모범적인 사례로 드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다른 예를 들자면, 하나의 “대상”이 있다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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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시각의 견지에서 절단되는 동시에 청각의 견지에서, 촉각의 견지에서, 후 각의 견지에서, 그리고 여타 다른 견지에서도 절단될 수 있다. 절단은 배타적 (exclusive)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포괄적(inclusive)으로 이루어진다. 이 점 이 “분리(disjonction)”의 가장 중요한 특성이기도 하다.

“기계는 흐름을 생산한다고 상정된 다른 기계에 연결되는 한에서만 흐름의 절단을 생산한다. 그리고 물론 이 다른 기계도 현실적으로는 그 나름 절단 이다. 하지만 무한한 연속된 흐름을 관념적으로 ―말하자면 상대적으로―

생산하는 제3의 기계와 관련해서만, 이 다른 기계는 절단이다. 가령 항문- 기계와 장-기계, 장-기계와 위-기계, 위-기계와 입-기계, 입-기계와 가축 떼의 흐름(“그 다음에, 그 다음에, 그 다음에…”). 요컨대, 모든 기계는 자 신이 연결되는 기계와 관련해서는 흐름의 절단이지만, 자신에 연결되는 기계와 관련해서는 흐름 자체 또는 흐름의 생산이다. 이런 것이 생산의 생산의 법칙이다. 그렇기 때문에 횡단적 내지 초한적(超限的) 연결들의 극 한에서, 부분대상과 연속된 흐름, 절단과 연결은 하나로 합쳐진다 - 도처에 욕망이 샘솟는 흐름-절단들이 있는데, 이것들이 바로 욕망의 생산성이요, 생산물에 생산하기를 접붙이는 일을 한다”(AO 44).

4. 부분과 전체

사실 들뢰즈는 아주 이른 시기부터 ‘부분’과 ‘전체’에 대해 논의했다. 우선 첫 저작 경험주의와 주체성에서 ‘부분’의 문제는 아주 중요하게 거론된다. 흄에 대 한 논의에서, ‘부분(part)’은 두 종류로 구별된다. 하나는 물리적 대상으로서의 자 연의 부분이다. 이를 들뢰즈는 “부분들 밖의 부분들(partes ex partes)”(ES 20)이 라고 표기한다. 이것은 “펼쳐있는(延長) 크기”이며, “물리적 실험 및 계산”과 관련 되어 있다(ES 21). 여기서 ‘부분’은 규정의 문제이며, ‘전체’가 따로 있지는 않다.

“전체는 하나의 다발일 뿐이다(La totalité n’est qu’une collection)”(ES 21). 지성 의 앎은 부분들을 잘 규정하는 일반 규칙을 발명하는 데서 온다. 물리 세계는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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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적(partiel)’이다. 한편 도덕적 실천에서는 사정이 다른데, 여기서는 “편파성 (partialité)”(ES 21)을 극복하는 일반 규칙을 발명하는 일이 관건이다. 들뢰즈가 흄을 읽으면서 확인하는 바, 인간의 바탕에는 “이기심(égoïsme)”이 있는 것이 아 니라 “공감(sympathie)”이 있다(ES 23). 그러나 쉽게 생각하게 되는 것과는 달리, 공감에는 한 가지 역설이 있다. 인간은 “공동체의 인간”(ES 25)이기 때문에, 공감 은 그 공동체에 한정되며 서로 배타적이다. 가령 가족이라는 사회 단위는 “부분적 (partiel)이 아니라 편파적(partial)이다”(ES 26). 이런 측면에서의 부분들은 자연적 으로 전체화될 수 없으며, 따라서 도덕적 일반 규칙으로서의 ‘전체’는 발명해야만 한다. “도덕의 문제는 전체의 문제이다(Le problème moral est un problème d’ensemble)”(ES 29). 들뢰즈의 흄 읽기에서, ‘부분’이 두 의미를 띰에 따라 ‘전체 (whole)’도 두 의미를 띠는데, 펼쳐 있는 부분에 대응하는 전체(totalité)와 편파적 인 부분에 대응하는 전체(ensemble, totalité)가 각각 그것이다. 미리 말하자면, 우 리가 다루는 부분대상의 ‘부분’은 여기서는, 흥미롭게도, 전자(partialité)의 의미와 가깝다.

다음으로 들뢰즈가 ‘부분’과 ‘전체’의 문제를 상론하는 곳은 니체와 철학이 다. 들뢰즈는 ‘전체’와 관련된 니체의 상충되는 듯한 발언을 소개한다. (1) “전체 (tout) 바깥에는 아무것도 실존하지 않는다”(NP 26). (2) “전체(tout)는 없다”(NP 26). 이 구절들은 큰따옴표로 직접 인용되어 있지만, 실은 들뢰즈가 명제 형태로 재정리한 것이다. 들뢰즈 자신이 인용한 니체의 구절은 다음과 같다. (1') “전체는 판단할 수도, 측정할 수도, 비교할 수도, 심지어 부정할 수도 없다”(NP 26, 각주 1).19) (2') “전체를 산산조각내야 한다. 전체에 대한 존경심을 잊어야 한다”(NP 26).20) 이 구절들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부분’ 즉 ‘실존(existence)’ 또는 ‘다수(le

19) 독일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man kann das Ganze nicht richten, messen, vergleichen oder gar verneinen!”, Friedrich Nietzsche, Kritische Studienausgabe, eds. G. Golli & M.

Montinari, Berlin: Walter de Gruyter, vol. XIII 1999, p. 426. Frühjahr 1888 15[30].

20) 독일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Man mu[ß] das All zersplittern; den Respekt vor dem All verlernen.” Friedrich Nietzsche, Kritische Studienausgabe, eds. G. Golli & M. Montinari, Berlin: Walter de Gruyter, vol. XII, 1999, p. 317. Frühjahr 1887 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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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ltiple)’와 ‘전체’ 또는 ‘일자(l’un)’의 관계이다. 이 관계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

첫째 명제에 따르면, 부분들의 총체가 전체이다. 전체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 문이다. 여기서 부분은 전체에 종속된다. 전체는 일종의 그릇과 같은 것이요, 부 분은 그 안의 내용물이다. 또는 전체는 온전한 조각상이요, 부분은 조각난 파편들 이다. 둘째 명제에 따르면, 그리고 들뢰즈는 이 명제를 더 심오한 명제라고 보는 데, 전체는 없고 오직 부분들만이 있다. 이 경우 전체는 특정한 의미로 이해되어 야 한다. 즉, 그릇이 따로 없고 내용물들로만 이루어진 그 무엇으로서의 전체. 또 는 온전한 조각상으로 복원되지 않는 본래적 파편들. 들뢰즈의 니체 해석에서 이 런 의미로서의 전체는 다음과 같이 이해된다. “다수 너머에 일자는 없다(il n’y a pas d’un au-delà du multiple). […] 다수는 일자의 긍정이다. […] 생성의 긍정 자체가 존재이고, 다수의 긍정 자체가 일자이고, 다수적 긍정은 일자가 자신을 긍 정하는 방식이다. “일자, 그것은 다수이다(L’un, c’est le multiple)””(NP 27).21) 리는 이렇게 이해된 ‘부분’과 ‘전체’의 관계, ‘다수’와 ‘일자’의 관계를 하나의 이미 지로 떠올려 볼 수 있다. 즉, 들뢰즈가 종종 강조하는 ‘무리’나 ‘떼’ 현상. 가령, 벌 한 마리 한 마리를 부분이라고 한다면, 벌떼가 비행할 때 그것은 전체이다. 여기 서 전체는 부분들에서 파생되는 그 무엇으로, 부분들에 종속된다. 이 전체는 그릇 과 같은 어떤 것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통상적으로 이해되는 전체와는 전혀 다르다.

그런데 이런 들뢰즈의 해석은 사실은 니체의 원문을 보면 더 분명하게 이해 된다. 들뢰즈는 이 구절들에 대한 해석을 프랑스어 번역본에 기대고 있지만, 그런 데도 불구하고 원문의 차이를 정확히 간파한 것은 들뢰즈의 혜안이다. 니체와 철학의 독일어 판 번역자인 슈빕스22)는 해당 대목에서 각 구절을 정확히 옮긴 다. (1)은 “es (gibt) nichts außer dem Ganzen”으로, (2)는 “es gibe kein All”로.

우리는 ‘전체’와 관련해서 “tout”라고 들뢰즈가 번역-인용한 대목이 각각 “das 21) 또 더 뒤에 등장하는 다음 발언도 참고. “[비극적인 것(tragique)은] 다수를 긍정하며, 다수

에 대해 하나를 긍정한다(elle affirme le multiple et, du multiple, l’un)”(NP 41).

22) Gilles Deleuze, Nietzsche und die Philosophie, tr. Bernd Schwibs, Hamburg: Rogner und Bernhard GmbH & Co. Verlags KG, 1976, pp. 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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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nze”와 “das All”로 차이가 난다는 것을, 들뢰즈가 인용한 니체 독일어 원문에 서 확인할 수 있고, 슈빕스는 이를 반영해 각각 다르게 옮기는 지혜를 발휘했 다.23) 이로써 우리는 들뢰즈가 ‘전체’에 대해 생각할 때, das All이 아닌 das Ganze의 차원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었다는 점을 확인 했다. 전체는 그 전체를 하나로 묶어주는 끈이나 그 전체를 통합하는 중심에 의 해 부분들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그런 끈이나 중심 없는 부분들의 다발로 이해 되어야 한다. 이런 초기 사색의 결과는 훗날 ‘부분대상’ 개념을 발전시키는 데 크 게 기여하게 된다.

“전체와 부분들”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안티 오이디푸스의 1장 6절에는, 이상의 초기의 사색이 정리된 형태로 제시된다. “전체는 부분들과 공존할 뿐 아니 라, 부분들에 인접해 있고, 그 자체로 따로 생산되며, 부분들에 적용된다. […] 일 반적인 규칙을 보자면, 부분들과 전체라는 관계의 문제는, 고전적 기계론 및 생명 론[生起論]에서 전체를 부분들에서 파생된 총체성으로, 또는 부분들이 유출되어 나오는 본원적 총체성으로, 또는 변증법적 총체화로 고려되는 한 여전히 잘못 제 기되었다”(AO 52). 즉, das All로서의 전체가 아니라 das Ganze로서의 전체를 생 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체를 총체성으로 이해하고 부분들은 그 총체성을 이루 는 성분들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전체는 부분들의 파생물 그 이상이 아니며, 그 런 점에서 전체는 부분들과 공존하는 또 하나의 부분일 뿐이다.

5. 부분대상

우리는 앞에서 흐름의 절단과 흐름의 생산이 쌍으로 생겨난다는 점을 보았 다. “이 흐름들은 부분대상들에 의해 생산되며, 다른 흐름들을 생산하는 또 다른 부분대상들에 의해 부단히 절단되고, 또 다른 부분대상들에 의해 재절단된

23) 아쉽게도 영역본은 둘 모두를 “whole”로 옮기고 있는데(Gilles Deleuze, Nietzsche and Philosophy, tr. Hugh Tomlinson,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3, pp. 21 &

201 note 18), 각각을 구별해서 “whole”과 “all”로 옮겼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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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AO 12). 말하자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부분대상들인데, 이는 절단의 산물 로서 생겨나며, 다른 절단이 행해짐과 동시에 흐름의 자리에 놓인다. 일차적으 로 기관-기계는 부분대상이지지만, 각각의 기관-기계는 그 나름으로 원천-기계 들에 연결되기 때문에(그물의 한 그물코는 한편으로는 기관-기계지만 다른 한편 으로는 원천-기계이다), 기관-기계는 “기계들의 기계들”이라는 뜻에서 기계 그 자체이다. 나아가 기계는 들뢰즈에 따르면 “욕망 기계”와 동의어이므로, “부분대 상”은 “욕망 기계”의 다른 표현이다. 들뢰즈는 “부분대상으로서의 욕망 기계(les machines désirantes en tant qu’objets partiels)”(AO 368)라고 대놓고 말한다. 그 리고 들뢰즈에서 모든 “대상”은 “부분대상”이다.24) 대상이란 부분들의 통합 (integration)이나 통일(unité)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며, 부분대상이란 총체성 (전체성, 통일성)의 파편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부분대상은 일차적으로 대 상의 존재 방식을 일컫는 들뢰즈 철학의 중심 개념 중 하나이다. 부분대상은 흐 름의 연속성을 전제하며, 또 역으로 모든 흐름은 대상의 파편화 내지 규정 해체 를 전제한다. 이런 점에서 부분대상과 흐름은 존재에 있어서는 다른 것이 아닌, 하지만 그 잠정적 규정에 있어서는 상관적으로 구별되는, 하나의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직 기계의 기능인 절단만이 부분대상과 흐름의 구별을 생산할 뿐이다.

이제 들뢰즈가 착상하는 부분대상에 대해 조금 더 보자. 들뢰즈는 안티 오 이디푸스의 4장 4절에서 부분대상들의 개념과 작동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다 른 어떤 설명보다 낫기에, 들뢰즈의 서술을 그대로 따라가면서 꼼꼼히 읽는 것이 좋겠다.

“모든 부분대상이 하나의 흐름을 방출한다는 것이 참이라면, 이 흐름도 마 찬가지로 다른 부분대상에 연합되어 있으며, 이 부분-1대상에 대해서는 그 자체로 다양한 잠재적(potentiel) 현전의 장(場)을 정의한다(똥의 흐름에 대 24) Ⅲ-1절을 시작하며 인용한 “모든 “대상”은 흐름의 연속성을 전제하며, 모든 흐름은 대상의

파편화를 전제한다”(AO 11-2)라는 대목을 참조. 여기서 “대상”에 따옴표를 한 것은, 사실 대상이라 불리는 것은 모두 “부분대상”이라는 점을 환기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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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항문의 다양체(multiplicité)). 부분대상들의 연결의 종합들은 간접적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부분대상은, 장 안에서의 그 현전의 각 점에서, 다른 부분 대상이 상대적으로 방출하거나 생산하는 하나의 흐름을 언제나 절단하며, 또한 이 다른 부분대상 자체도 또 다른 부분대상들이 절단하는 하나의 흐 름을 방출할 태세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머리가 둘인 흐름들과도 같아 서, 이 흐름들을 통해 우리가 분열-흐름 내지 흐름-절단이라는 개념으로 고찰하려 했던 그런 생산적 연결 전체가 행해진다. 그래서 흐르게 하고 절 단한다는 무의식의 참된 활동들은, 수동적 종합이 상이한 두 기능의 상대 적 공존과 이전(移轉, déplacement)을 보증하는 한에서, 이 수동적 종합 자 체에 있다. 이제 두 부분대상에 연합된 각 흐름이 적어도 부분적으로 서로 겹쳐 있다고 해보자. 이 흐름들의 생산은 이 흐름들을 방출하는 대상들 x 및 y와 관련해서는 구별되는 채로 있지만, 이 흐름들의 현전의 마당은 이 흐름들을 서식시키고 절단하는 대상들 a 및 b와 관련해서는 구별되지 않으며, 그래서 부분 a와 부분 b는 이 점에서 분별될 수 없게 된다(가령 입과 항문, 거식증의 항문-입). 그리고 부분 a와 부분 b는 혼합 영역에서만 분별될 수 없는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이 영역에서는 기능이 바뀌어 버렸 기에 부분 a와 부분 b는 두 흐름이 더 이상 겹치지 않는 데서 한층 더 서로 배타적으로 구별될 수 없다고 언제든지 상정해 볼 수 있기 때문이 다. 이렇게 되면 a와 b가 포괄적 분리의 역설적 관계 속에 있는 하나의 새 로운 수동적 종합 앞에 있게 되는 것이다. 끝으로, 흐름들의 겹침의 가능성 이 아니라, 흐름들을 방출하는 대상들의 교체의 가능성이 남는다. 현전의 각 마당의 가장자리에서는 간섭무늬들이 발견되는데, 이 무늬들은 다른 흐 름 속에 있는 한 흐름의 여분을 증언하며, 한 흐름에서 다른 흐름으로의 이행 내지 느껴지는 생성을 이끌어주는 잔여적 결합 종합들을 형성한다. 2, 3, n개의 기관들로의 교체”(AO 388).

이미 앞에서 하나의 기계는 모든 방향들로 동시에 연결될 수 있다고 했을 때, 우리는 이 구절들에 언급된 부분대상의 특성을 거의 다 설명했다. 요컨대 부 분대상들은 절단이 행해지는 방향에 따라, 또는 절단이 생산하는 기능에 따라,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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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2, 3, n개의 기관들로 교체될 수 있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 새 롭게 추가되는 특성은 “부분대상들의 연결적 종합들”의 “간접적” 또는 “수동적”

성격이다. 이 “간접적” 또는 “수동적” 성격은 부분대상이 그 스스로 능동적으로 절단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절단이 부분대상들과 흐름들을 생산하기 때 문에, 다시 말해 “흐르게 하고 절단하는 무의식의 참된 활동들”(AO 388) 또는

“흐르게 하고 흐르고 절단하는 욕망”의 활동(AO 11)의 결과로서 부분대상들이 생 산되기 때문에, 지니게 된 성격이다.

Ⅳ. “부분대상” 개념의 미학적 의의

우리는 지금까지 클라인이 발견했고, 들뢰즈가 정정한, ‘부분대상’ 개념을 살 펴보았다. 부분대상은 존재론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만, 무엇보다도 예술과 미학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개념은 예술 작업에 있어 부분대상으로서의 대상은 언제든 다른 대상으로 변형될 수 있다는 특성을 잘 확인해 준다. 이는 예술가가 창작을 하며 재료를 다룰 때 탁월하게 드러나는 특성이기도 하다.25) 성된 작품으로서가 아니라 과정 중에 있는 재료로서, 대상이 지니는 가소성(可塑 性)은 존재물 일반을 부분대상으로 이해해야 할 필연성을 확인시켜 준다. 나아가 존재물 일반을 예술적 대상의 위치에 놓는다는 이러한 생각은 존재론을 일차적으 로 미학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있게 해준다.26) 존재는 변형과 생성이지 불변과 정지가 아니다. 존재는 ‘자기-생산(auto-production)’이다.27) 이는 존재론이 그 근

25) 재료와 예술 작품의 관계에 대한 들뢰즈의 입장은, 김재인, 들뢰즈의 미학에서 “감각들의 블록(un bloc de sensations)”으로서의 예술 작품 , 미학 76집(2013)을 참조.

26) 예술 창작을 존재의 근본 운동으로 해석하는 들뢰즈의 입장은, 김재인, 들뢰즈의 예술론 을 통해 본 예술가적 배움. 초기 프루스트론을 중심으로 , 미술과교육 15권 1호(2014)를 참조.

27) ‘자기-생산’이라는 존재론적 운동에 대해서는, Jae-Yin Kim, “Deleuze, Marx and Non-human Sex: An Immanent Ontology Shared between Anti-Oedipus and Manuscripts from 1844” in Theory and Event, vol. 16, issue 3, 201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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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 미학적 본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탁월한 철학적 성찰이다. 많은 현대 예술은 이 점을 증언하면서 동시에 존재론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데, 들뢰즈의 미학은 대부분 이에 대한 논의에 할애되어 있다.

지면의 한계 때문에 우리는 존 케이지(John Cage)의 작업을 좋은 사례로 제 시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28) 대상 자체는 부분대상이며, 전체에 종속되는 것이 아 니라 오히려 부분 자신의 독자적인 창작이다. 그것은 실패를 자신의 일부로 포함 한다. 들뢰즈는 과타리와 함께 쓴 저서에서 케이지의 사례를 인용한다. 우선 안 티 오이디푸스. “실험적이란 낱말은, 성공과 실패의 견지에서 나중에 판단될 행 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지 않고 단순히 그 결과가 미지인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면, 적절하다”(AO 445 재인용. “실험적”은 원문 강조). 다음으로

천 개의 고원. “우리는 계획을 이룰 수 없었다. 그것은 침묵의 한 형태이다. … 우리 계획이 실패했다는 것, 우리가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 모든 것이 실패했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다. 그 계획은 실패가 아니었다.”29) 후자에 대해 들뢰즈는 이 렇게 논평한다. “모든 해석에 맞서서 하나의 실험을 긍정하는, 이 음(音)의 고정 면(ce plan fixe sonore)을 가장 완벽하게 전개한 최초의 인물은 분명코 존 케이 지인데, 거기서는 침묵이 운동의 절대적 상태 역시도 표시한다.”30) 실패한 실험이 라고 했을 때 그것은 전체적 관점에서의 성공에 비추어 판단되는 것이다. 케이지 의 표현을 빌면 “나중에 판단될 행위”, 즉 ‘온전한 전체’에 비추어 판단될 그 무엇 이다. 그러나 실험은 그런 차원의 판단에 종속되지 않는, 그 자체로 완전한 행위 이다. 그렇기 때문에, 온전한 성공의 견지에서 실험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 실험 은 그 자체로 값어치가 있다. 실험은 “그 결과가 미지인 행위”를 가리킬 뿐이다.

실험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케이지의 말은, 전체에 종속되지 않는 부분대

28) 현재 활동 중이거나 근래에 활동한 작가들에 대한 언급이 빠진 것은 아쉽게도 지면의 한 계 때문이다. 그렇지만 부분대상 개념은 많은 작가들의 작업으로 확장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29) Gilles Deleuze & Félix Guattari, Mille Plateaux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2, Paris:

Les éditions de Minuit, 1980, p. 329. 재인용.

30) Gilles Deleuze & Félix Guattari, ibid., p. 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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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의 미학-존재론적 의미를 잘 드러낸다.

물론 실제로 실험은 아주 자주 실패한다. 그러나 실험을 실패하게 만드는 것은 대개는 실험의 시도를 방해하는 것들, 실험 자체를 행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들이 다. 사실이지, 실험이 시도조차 되지 못한다면 결과를 기대하기란 난망한 일이다. 예 술 창작에서 실험은 무한히 허용되어야 하며, 단순히 허용이라는 말로는 부족하고, 무한히 시도될 수 있게 권장되어야 한다. 실험은 무조건 옳다. 결과에 비추어 평가되 지 않는 실험,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는 실험, 결과에 종속되지 않는 실험, 이런 부류 의 실험은 무조건 해 봐야 하되, 결과의 무거움은 두려워하거나 기피하지 말아야 한 다. 나중에 보았을 때, 성공하지 못한 실험은 부질없이 잊힌다. 세월은 잊힌 실험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실험을 마다하랴. 작가는 실험하는 존재이며, 실 험하는 삶을 자신의 운명으로 긍정한다. 처음부터 결과를 걱정하는 자는 작가가 아니 다. 그는 실험할 자격이 없다. 완성된 전체 작품을 꿈꾸는 자는 실험을 시작하지조차 못한다. 실험은 부분의 건립이다. 모든 대상은 부분대상이다. 부분을 만드는 과정이 생물적 죽음에 의해 불가피하게 종결될 때, 그제서 사람들은 그것을 그 작가의 “전 체”라 부른다.

1)

* 논문투고일: 2014년 5월 2일 / 심사기간: 2014년 5월 28일-6월 9일 / 최종게재확정일:

2014년 6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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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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