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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선사고고학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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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선사고고학의 시작

E.OLDFIELD 는 1852년에 발간된 고고학 저널에서 “아주 오래지 않아서 고대유물 연구는 경멸을 벗어나 대중적으로 존중을 받으며 상당한 각광을 받게 되었다.”라고 언급하였다. 19세 기 이전의 고대유물 연구는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신화나 전설에서 언급되었다.

또한 고대유물에 대한 연구는 문헌기록에 의존하여 유물 자체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 지 못하였다. 19세기가 되어서는 이전 시기와는 구별되는 체계적 연구가 두 가지 독특한 움직 임을 통해 발달하였다. 그 가운데 첫째는 19세기 초와 1850년대 후반에 시작되었다. 스칸디나 비아에서 고고 자료들을 가려내어 연대 추정하는 기법을 고안하였고 이러한 연구기법은 선사 고고학의 시발점이 되었다. 두 번째 흐름은 프랑스와 영국에서 이루어졌는데 구석기시대 연구 를 개척하면서 인류의 기원을 소급하여 연구하게 되었다.

1. 상대연대 추정법과 톰센의 삼시대체계

이전 시기의 문헌기록에 의존하여 고대유물에 대해 편년을 수립하였다면 덴마크 학자 크리 스티안 위르겐센 톰센은 문헌기록에 의존하지 않고 편년을 수립하였다. 톰센의 연구 동기는 이전 시기의 호고가들과 마찬가지로 애국심과 낭만주의였다.

톰센은 젊었을 때 파리에서 공부를 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로마와 스칸디나비아 동전을 수 집하였다. 당시에 동전과 메달을 수집하는 것은 18세기 동안 신사들의 취미로서 널리 알려져 톰센 또한 그 취미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동전의 가장 큰 특징은 만들어진 년도를 알 수 있고 명문 또한 적혀져 있어 순서대로 배열을 할 수 있다.

1806년 코펜하겐대학의 도서관 사서였던 라스무스 니에룹은 파리에 세워진 프랑스기념물박 물관을 모델로 한 국립고대유물박물관을 세울 것을 제창하는 책을 발간한다. 이후에 고대유물 수집과 보존을 위한 왕립위원회가 발족되어 니에룹이 총무에 위임된다. 위원회는 덴마크 전역 에 걸쳐 고대유물들을 수집하였고 곧 유럽에서 가장 크고 대표적인 기관이 되었다. 1816년에 위원회는 톰센을 초빙하여 수집품 목록을 만들고 전시를 준비하도록 하였다.

톰센은 전시 준비를 하면서 큰 문제점에 부딪치게 된다. 덴마크 전역에서 수집한 다양한 고 대 유물들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시하는 것이다. 톰센은 우선 편년적으로 석기, 청동기, 철기 라는 시대로 나누기로 한다. 하지만 이 세 개의 시대로 나누면서 석기와 금속기조차도 기계적 인 분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시대에만 그 도구들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청동기시대에 석기가 만들어지기도 하고 철기시대에는 청동기와 석기 둘 다 제작되어 사용되 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세 시기로 분류하는 것이 아니라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진 석기 와 철기를 구분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톰센은 덴마크의 수집품 중에는 분묘, 저장고 및 다 른 맥락에서 동시기에 묻혔다고 생각되는 유물조합들이 있었다. 각각의 유구에서 나온 유물들 을 비교하면 어떤 형식들이 나오는지 구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톰센은 먼저 유물들을 칼, 자귀, 취사용기, 안전핀, 목걸이와 같이 다양한 사용 범주 에 따라 나누어 분류하였다. 그리고 재질과 형태에 따라 다시 세분하였다. 이렇게 비공식적으 로 유물형식을 세운 다음에 어떤 형식들이 공반하는지 유구를 검토하였다. 톰센은 형태와 장 식에 바탕을 두고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진 청동 유물과는 공반하지 않으면서도 철기시대에 만 들어진 유물들과 공반하는 유물형식들을 가려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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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센은 다음에 이 집단들을 역사적 연쇄로 배열하였다. 이 배열을 통해서 전기 석기시대, 후기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로 나누었고, 철기시대는 장식을 바탕으로 전기와 후기 두 단계로 나누었다.

이러한 톰센의 분류는 개별 유물과 유구 안에서 공반되는 유물들의 모든 특성들이 재질, 양 식, 장식, 출토 맥락과 관련하여 일관된 유형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일관성을 바탕으로 각 유 물들을 톰센의 다섯 집합 가운데 하나에 대응시킬 수 있었다. 이렇듯 특정 유물 발생에 관한 거칠지만 효과적인 기법을 통해 동시기 공존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 따라서 편년 연쇄를 나타 낼 가능성이 큰 분류 단위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톰센의 연구는 편년이라는 돌파구를 마련함으로써 학문적 토대 위에 선사시대의 연구를 개 척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연구를 비웃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톰센의 단계들은 유물들을 기 계적으로 분류한 것이 아니라 양식, 장식, 맥락 등을 동시에 분석한 것에 토대를 두어 기초적 이지만 효과적인 편년을 생산해 낸 것이다.

톰센의 연구는 인류 발달에 진화적인 관점을 주었다는 것에 주목할 수 있다. 톰센과 그를 계승한 어느 누구도 삼시대를 스칸디나비아 지역 내에서만 보이는 진화적 연쇄로 생각하지 않 았다. 오히려 이주와 전파로 인해 다른 지역에서 들어왔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또한 19세기 진화고고학자들은 전파와 이주를 진화와는 대조적인 과정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진화 적 변화를 촉진시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진화적 관점으로 인해서 중세시대에 석기시대 를 문화적으로 종교적으로 퇴보한 산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원초적인 조건을 가진 시대로 인식하였다.

2. 스칸디나비아 고고학의 발달과 확산

스칸디나비아의 고고학이 어떻게 발달하게 되었는지는 톰센의 연구에서 알아볼 수 있다. 톰 센은 유물 자체나 시간의 흐름에 따른 발달뿐만 아니라 유물이 발견된 맥락, 그리고 그 맥락 이 매장 관습의 변화 및 선사시대 생활의 다양한 양상들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지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유물들이 만들어지고 사용되었는지를 알기위해 파손된 유물들을 연구 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19세기 전반 스칸디나비아의 고고학은 선사시대 동안 생활양식의 진화와 관련된 학문으로 발달하였던 것이다.

·닐손과 보르소에의 업적

스칸디나비아의 고고학이 생활양식의 진화와 관련된 학문으로 발달하는데 스벤 닐손이라는 사람의 영향을 받았다. 닐손은 룬트대학의 동물학 교수였으며 고생물학자였던 조르주 퀴비에 의 저술에 큰 영향을 받고 있었다. 톰센이 양식과 장식에 따른 기술의 진화에 관심을 가졌던 반면에 닐손은 생계경제의 발달에 더 관심을 가졌다. 닐손이 선사학 연구에 크게 기여한 바는 전 세계에서 수집되는 민족지 표본들과 비교를 통해서 석기와 골기의 사용을 판단하는 방법론 이었다. 스칸디나비아의 석기들은 유기질인 나무와 같은 현재는 썩어서 없어진 도구들과 결합 시켜 만든 도구의 일부분이였기 때문에 원래 어떤 방식으로 사용되었는지를 추론하는 것은 아 주 어려웠다. 하지만 민족지적 연구는 선사유물들에 대한 재현 실험이나 마모 유형에 대한 연 구를 통해 입증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닐손은 플린트를 떼어내는 실험을 한 첫 고고학 자로 인정되고 있다. 닐손은 이러한 민족지적 실험과 연구를 통해 생계유형을 추론하고자 하 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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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손은 톰센의 석기시대 사람들은 사냥이나 물고기 잡이를 하였으며 농경은 스칸디나비아에 청동기시대 동안에 들어왔다고 결론을 내렸다. 루크레티우스는 이른 시기의 도구는 손, 못, 이빨 등이고 그 다음에 청동, 한참이 지난 뒤에야 철기가 사용되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술 진화와 계몽주의의 생계유형의 진화에 대한 관심을 결합시켜 사냥과 어로, 농경이 순서대로 일어나게 되었다고 설명하였다. 이전에는 기술과 생계가 별개로 취급되었지만 닐손으로 인해 서 기술과 생계가 인간행위에서 같이 진화하는 양상이 되었다.

스틴스트룹은 환경변화 연구에 관심을 가진 젊은 덴마크 지질학자로서, 덴마크의 습지대에 서 행한 발굴을 통해 선사시대 스칸디나비아에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층위 증거를 찾게 되었 다. 이 발굴에서 후빙기의 포플러 숲이 소나무, 참나무, 너도밤나무와 느릅나무 숲으로 변화되 는 양상도 알려졌다. 1840년이 되면 스틴스트룹은 석기와 청동기는 자신이 나눈 참나무 시기 와 대응됨을 확신하게 되는데 환경변화의 역사와 문화진화를 연결시킨 것이다. 그래서 소나무 숲을 석기시대, 참나무 숲을 청동기, 너도밤나무와 느릅나무 숲을 철기시대와 대응시켰다. 이 것은 톰센의 유물 발달 단계와 환경변화를 상응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스틴스트룹은 숲의 변 화는 2000년 이상에 걸쳐 일어난 것이 확실하다고 평가하였기 때문에 스칸디나비아의 석기시 대에 대해 그 정도의 연대를 제시한 첫 연구자였다고 할 수 있다.

옌스 보르소에는 최초의 선사고고학 전문가가 되었다. 톰센과 함께 일하는 자원봉사자로서 시작하였지만 처음으로 고고학 훈련을 받은 연구자이기도 하다. 주로 박물관의 연구원에 머물 렀던 톰센과는 다르게 야외조사를 하였다. 그의 발굴과 많은 유구들을 제공함으로써 톰센의 편년을 확실히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선사고고학에 한 가장 큰 기여는 더 이상 지역의 전설과 설화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1859년에 보르소에는 스칸디나비아 석기시대에 대 한 톰센의 전기와 후기의 구분을 공식화시켰다.

보르소에는 1846~1847년 덴마크 왕의 재정 지원을 받아 영국과 아일랜드를 방문하여 바이 킹 유물들을 연구하였는데 이 나라들에서 유물들에 대한 관찰을 통해 톰센의 삼시대의 틀이 많은 지역들, 유럽 전역에서도 적용될 수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1837년 셸란드의 선사시대 유물들을 포함하고 있는 굴과 조개더미가 해안선에서 멀지 않 은 내륙에서 관찰되어 보르소에 스틴스트룹과 요한 게오르크 포르크하메르가 주도하여 연구된 바 있다. 이 연구는 조개더미의 퇴적 유형을 추적하면서 패총 안의 화덕과 유물들의 분포에 대해서 다각적인 면으로 다가간 연구였다. 이러한 연구에도 불구하고 1843년 스칸디나비아에 들어온 최초의 사람들은 석기를 사용하였고, 수렵과 채집에 의존하였으며 현재와는 다른 환경 에 살았음이 처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840년대에 비로소 다학문적인 연구가 더 활발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스칸디나비아 고고학의 영향

스칸디나비아에서 발달한 고고학은 다른 지역의 연구에 모델을 제공하였다. 스코틀랜드의 호고가 대니얼 윌슨은 보르소에와의 접촉을 통해서 톰센의 삼시대체계를 적용하였다. 이를 이 용하여 스코틀랜드호고가협회가 소장하고 있는 유물들을 재정리하였다. 윌슨은 스칸디나비아 고고학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것과 동일한 진화적 사고와 낭만적 민족주의에 자극을 받았다.

반면에 윌슨은 스칸디나비아 고고학자들과는 달리 석기시대를 계몽철학자들이 그러하듯이 모 든 발달은 필연적이고 동일선상에서 변화가 지속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스칸디나비아 고고학은 스위스의 고고학에도 모델을 제공하였다. 스위스는 1853~1854년 겨 울 가뭄으로 스위스 서부의 호수 층이 낮아져 고대 주거지가 습지 환경에서 드러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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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운데 첫 유적으로 오베르메일렌 청동기 유적을 취리히호고가협회의 회장인 페르디낭 켈 러가 연구하게 되었다. 이 발굴에서 나뭇더미들, 건축물의 기초, 나무로 만든 자루에 끼워져 있는 돌이나 골기, 멍석, 바구니, 많은 음식물이 출토되었다. 스위스의 고고학자들은 이 주거 지를 통해 자연환경, 경제 및 생활방식의 변화를 연구하였다. 이렇게 확인된 증거들은 서유럽 사람들이 문화진화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하였고 고고학 증거만으로 고대를 연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하였다.

·상대연대 추정법과 선사고고학의 성립

이렇듯 선사고고학은 1859년 이전에 스칸디나비아에서 체계적인 편년 법을 고안하여 스코 틀랜드와 스위스에 영향을 미치면서 잘 정의된 학문으로 발달하였다. 유물은 더 이상 물건으 로서의 가치가 아니라 인간 행위에 대한 정보로서 인식하게 되었다. 선사고고학이라는 학문의 본질적인 토대는 고고 자료만으로 상대편년을 구축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세 지역에서 유물자료에 대한 상대편년들이 그 지역뿐만 아니라 전 지역의 유물에 성립될 수 있는 것이었 다.

선사고고학은 지질학자들과 고생물학자들이 구성한 층위적인 편년이 선사시대의 고고학 편 년의 발달에 모델을 제공하였다고 생각되어 왔다. 하지만 톰센은 유구의 편년적 의미에 대한 의미와 양식적 변화에 대한 지식들에 영감을 받아 인류의 선사시대 편년을 시도하였다. 선사 고고학의 뿌리는 유럽의 호고주의적인 전통에 있다는 것이다. 즉 선사고고학은 다른 학문으로 부터 지식을 빌린 것이 아니라 고고 자료에 적절한 상대연대 추정법이라는 새로운 기법을 통 하여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스칸디나비아 고고학자들이 제시한 역사는 단지 문화진보는 지속적이고 자연적인 원인에 따 른 것이라는 계몽주의의 문화 진화론적 시작이란 측면에서만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하지만 보르소에는 선사고고학자들은 어떤 사람이 선사시대 도구를 제작하였는지 파악할 수 없음을 지적하면서 반대적인 입장을 가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초 문화진화에 대한 계몽주의적 관점이 흥미롭게 받아들여졌던 것은 중간계급의 희망 때문이었다. 비록 덴마크 고고학은 강한 민족주의를 띠었고 왕가의 후원을 지속적으로 받았지만 고고학자들과 그 독자층은 중간계급 구성원들로 구성되어 갔던 것이었다.

진화론적 접근은 문헌자료를 통하거나 단지 문헌을 통한 비판에 그치고, 호사품의 복원과 연구에 치중한 연구가 아니라 사물자체에 대한 연구를 가능하게 하였다. 스칸디나비아의 선사 고고학자들은 여러 민족들의 환경, 사회생활, 종교 신앙과 더불어 구체적인 기술과 생계경제 에 대해 고찰하고자 하였다. 고고학자의 목적은 특정 시기의 생활에서 죽기 전까지의 유형들 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변화되어왔는지 고고학 증거를 가능한 많이 얻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고고학자들은 고고자료에 남은 흔적이 어떤 행위를 의미하는지 를 알기 위해 고고 자료와 민족지 자료를 체계적으로 비교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반제품과 부러진 도구들을 연구하고 복제실험도 수행하였다. 또한 고고자료를 통해 선사시대 사람들의 식생활을 알아내기 위하여 지질학자, 생물학자들과 협동하여 고환 경을 복원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이러한 접근은 스칸디나비아 고고학에서 선사시대에 어떤 민족이 한 나라에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고 싶어 하는 낭만적 민족주의를 비추기도 한다.

따라서 초기 스칸디나비아 선사고고학에서 진화, 문화사, 기능 과정적 접근들의 기원을 찾 아볼 수 있다. 진화론적 접근은 단선진화론적인 접근을 의미하는데, 이는 일련의 단계들을 거 친다는 것으로 톰센의 삼시대체계처럼 단계들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문화사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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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단지 유물들에 대한 기술만 하는 것이다.

스칸디나비아 고고학자들이 하지 않았던 것은 성경의 편년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성경에 따 르면 인류사는 전체적으로 기껏 수천 년의 시간밖에는 갖지 못한다. 톰센, 보르소에, 스틴스트 룹조차도 고고자료를 밝히기 위해서는 수천 년이면 족하다고 생각하였다. 보르소에는 덴마크 에 최초로 사람이 들어온 것은 서기전 3000년경의 일이며 청동기시대의 시작은 서기전 1400 년에서 서기전 1000년 사이, 그리고 철기시대의 시작은 서력기원 초기까지 내려간다고 추정하 였다. 스코틀랜드, 스위스는 모두 뷔름 빙하기 동안 빙하에 덮여 있어 지금까지로 홀로세 이 전으로 올라가는 인류의 점유의 증거는 거의 없다. 18세기 계몽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스칸디 나비아 고고학자들은 전통 성서의 편년에 도전하지 않았으며 인류의 생물학적 기원에 대한 진 화적 관점을 포용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3. 인류의 기원과 서유럽의 선사고고학

스칸디나비아의 선사고고학은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대체로 무시되었다. 19세기 전반 동안 영국과 프랑스는 이전 시기의 호고주의적인 성향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선사시대 연구에 관해서 형질인류학, 민속학, 언어학 자료에 대한 사용이 강조되어 갔지만 고고 자료에 대한 고찰은 켈트족, 로마인, 앵글로색슨족, 메로빙거인과 같은 역사시대의 민족들과 중세시대에 집 중되어 있었다. 톰센의 삼시대체계가 보르소에에 의해서 유럽 전역에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이 알려짐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프랑스는 별로 다루지 않았다. 이러한 보수적인 태도는 선사고고 학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1850년대 말 이전에는 시작되지 않았음을 확인시켜 준다.

·절멸동물 뼈와 인류 유물의 공반

스칸디나비아가 선사시대의 생계경제에 집중하였다면 영국과 프랑스는 초기 고고학 연구는 주로 구석기 시대, 인류의 기원에 대한 확인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구석 기 시대와 인류의 기원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프랑스와 영국 남부에서는 전기 구석기시대까지 올라가는 인류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 동굴과 빙하 퇴적층들이 존재하고 있어 스칸디나비아, 스코틀랜드, 스위스에는 없는 아주 이른 단계에 속하는 인류를 연구할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구석기고고학은 지질학에 진화적 시각이 등장하고 고생물학 지식이 축적됨으로써 발달하게 되었다. 이런 분야들에서 이루어진 진보는 성경 기록보다는 인류의 기원에 대한 과학적 연구 에 필요하였다.

구석기고고학에 대한 본격적 연구는 18세기에 들어서 시작되었다. 조르주 뷔퐁과 같은 과학 자들이 세계의 박물학적인 기원에 대해 의견을 발전시켜 어쩌면 수만 년 또는 수백만 년이나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18세기와 19세기 동안에는 산업혁명이 진행 되어 광산, 채석, 운하 건설행위가 늘어나 지질 층위에 대해 새로운 지식들이 알려지게 되었 다.

조르주 퀴비에는 프랑스의 지질학자로서 고생물학을 과학적 학문으로 세우고 닐손의 선사시 대 유물 연구에 영감을 주기도 하였다. 퀴비에는 동물 뼈 부위들이 한 개체의 일부였을 것이 라고 판단하고 당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화석 동물들을 현존 동물 종과 유사한 방식으로 복 원하였다. 이러한 방법으로 수많은 동물 종들이 절멸하였다는 증거를 찾았다. 지역마다 천재 지변으로 인하여 그 지역의 동물 종 전체가 소멸하고 그 지역의 지질학적 형상이 면하게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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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식으로 인식하였다. 그 지역으로 다른 종들이 들어와서 살게 되면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 세계적으로 종의 수가 감소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을 지역 가타 스트로피즘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고생물 자료가 많이 알려지게 되면서 보편적 카타스트로피 즘이라 부를 수 있는 개념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많은 카타스트로피가 대부분의 종들 을 절멸시킨 보편적인 것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즉 이러한 카타스트로피가 일어나게 되는 이유는 신이 새로운 종들을 재창조하여 과거의 것들을 대체하였다는 것이다. 즉 천재지변은 신에 의해서 발생하게 된다는 설이다.

18세기 후반에는 고고학 조사 연구에서 절멸된 동물 뼈와 인류의 유체와 석기들이 공반되 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 부분이 가장 논쟁이 많이 있었던 문제이다. 과연 인류의 흔적과 유물이 절멸 포유동물과 동시기적인 맥락에서 발견될 수 있는지 하는 것이었다. 매머드와 털 코뿔소의 뼈는 프랑스와 영국 남부의 빙하 퇴적층에서 발견되었다. 19세기가 시작되면서 이 퇴적층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에 의해서 생긴 것으로 생각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아직까지도 중세적인 성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퇴적층에 관한 문제들은 자크 부셰 드 페르트의 연구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페르트는 프랑스 서북부의 솜강 옆의 아 베빌의 세관의 장이었다. 1830년대 지역의 의사가 이곳에서 석기와 뿔로 만들어진 도구가 나 왔다는 보고를 듣고 1837년부터 이 발견물들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그 지역의 이탄층 보다 선행하는 하안단구 자갈퇴적층 깊은 곳에서 절멸 매머드 및 코뿔소와 전기 구석기시대의 주먹도끼가 공반하여 나오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부셰 드 페르트는 확실한 층위 관찰을 통하 여 석기와 절멸 동물이 똑같이 오래되었을 것임을 확신하게 된다. 그렇지만 카타스트로피를 믿는 사람으로서 이런 도구들이 성서의 대홍수 이전에 일어난 대규모 홍수로 완전히 사라져버 린 대홍수 이전의 종족들이 만든 것이라는 판단을 내린다. 이러한 발견을 바탕으로 페르트는

<고대 켈트족과 대홍수>라는 책을 발간하는데 프랑스와 영국의 학자들이 이 설을 모두 거부 하였다. 왜냐하면 지질학자들과 호고가들은 여전히 유물들은 끼어들어간 것일 수 있으며, 따 라서 늦은 시기의 것일 수 있다는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질학의 발달과 진화론의 성립

인류의 기원이 얼마나 올라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지질학의 발달이 있어야 했다. 1785년에 외과의사 제임스 허턴은 암석과 토양이 침식되고 지각의 융기로 균형을 이룬다는 지질사에 대 한 동일과정반복의 시각을 제안하였다. 이러한 동일과정반복에 대한 가정은 1830년에서 1833 년까지 영국의 지질학자 찰스 라이엘의 저서<지질학 원론>에서도 드러난다. 이 책에서 라이엘 은 시칠리아에 있는 에트나산 근처에서 관찰한 자료에 근거하여 많은 양의 자료를 제시하여 과거에 일어난 지질 변화는 아주 오랜 시기 동안 작용하고 있는 동일한 자연력의 결과이며 그 속도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과정과 유사하다는 동일과정반족의 가정을 지지하게 된다. 지질학 에서는 라이엘의 동일과정설의 원칙이 곧바로 지지를 받게 된다. 그 이유는 카타스트로피는 모든 분야에서 한 번에 사라졌다가 다시 생산된다고 보는 것이지만 동일과정설은 끊어지지 않 고 장시간 이어진다는 것, 반복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장시간 이어진다는 것은 생 물진화의 가능성을 고려하도록 하였다는 점에서 다른 학자들에게 지지를 받았던 것이다.

진화론은 철학자 허버트 스펜서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스펜서는 1850년대부 터 학문 및 정치적 문제들에 대해 일반 진화적 접근을 제창하기 시작한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발전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개인의 동기와 자유 기 업정신이 문화진화를 추동하는 힘이며 중간계급 기업인의 자기 이익을 위한 행위가 인류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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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내 진보를 불러온 과정의 지속 및 집중화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식으로 스펜서는 중간계급 이 생물진화와 인류의 기원이 과거에 까지 거슬러 올라가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주장에 동조 적으로 이바지하게 되었고, 이러한 감정의 변화로 인해 인류의 기원에 대해 무엇인가를 알려 줄 고고학적 기록에 대한 관심은 커져갔다.

진화론의 논쟁이 가장 컸던 설은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1859년에 출간하였던 시기이 다. 이 책은 동일과정설의 지질학에 영감을 받아 거의 30년에 이르는 연구 결과를 요약한 것 으로서 라이엘의 <지질학 원론>이 지질학에 그랬던 것처럼 진화생물학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 다. 다윈이 제시한 자연 선택 개념은 많은 과학자들과 일반 대중들에게 생물진화의 과정이 현 대 종들의 기원과 분포를 설명해 주면서도 고생물 자료에서 관찰되는 변화가지도 설명해주는 메커니즘을 제공해 주는 것으로서 인정을 받게 된다. 자연선택은 생물학적으로 자본주의적 경 쟁과 동등한 것으로 인식되었는데 경쟁은 경제 및 문화적 발전을 일으키는 추동력이라고 생각 되었다. 스펜서는 자연선택을 적자생존이라 재명명함으로써 자연선택 개념의 분위기를 고취시 켰다. 그렇지만 선사고고학자들과 인류학자들은 다윈의 진화이론보다는 단선적인 문화진화에 경도되어 있었는데 이는 스펜서의 관점 및 18세기 계몽철학자들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다윈은 생물진화가 단선적인 형태가 아니라 나뭇가지를 치는 방식으로 일어난다고 하였으며 자연선택은 우연적인 상황이지 예측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던 것이다.

다윈의 종의 기원은 인류의 기원이 영장류에서 진화하였다는 것을 통해 경험적으로 연구되 어야 할 이슈일 뿐만 아니라 다윈의 생물진화 학설에 대한 격한 논쟁의 핵심 부분이 되었다.

이에 다라 구석기 고고학은 대중의 관심을 끌었던 문제들과 관련된 논쟁에서 지질학과 고생물 학과 함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4. 구석기고고학의 성립

구석기고고학이라는 주제는 1865년 존 러복이 석기시대를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로 나눈 데서 유래하였다. 구석기시대는 뗀석기를 사용하고 인류발달 초기 시대로 정의하였다. 신석기 시대는 간석기를 사용한 시기로 정의되었다. 뗀석기는 간석기보다 이전에 만들어졌다는 것은 보르소에로부터 얻은 것이지만 이미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 사이의 시기를 정의하였다는 것 을 간과하였다. 이렇게 초기 구석기고고학자들이 중석기시대를 인지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프 랑스와 영국의 고고학자들이 스칸디나비아의 고고학의 연구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은 것을 의 미한다.

1860년대 이후 구석기고고학의 주된 발전은 프랑스에서 이루어졌다. 프랑스에서는 영국보다 좋은 자료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유적들의 주된 목적은 인간이 이 지역에서 얼마나 존 재했었는지, 그리고 구석기시대 안에서 진화적 경향을 찾을 수 있는지 판단하는 것이었다. 구 석기 고고학자들의 첫 목적은 유적을 편년 적으로 배열하고 그런 경향이 일어났는지를 찾는 것이었다.

프랑스에서 초기 구석기 연구를 한 사람은 에두아르 라르테이다. 라르테는 부셰 드 페르트 의 발견이 가지는 중요성을 공식적으로 인정을 하였다. 라르테는 구석기시대를 유물이나 공반 되는 동물 뼈에 따라 일련의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고생물학적인 범주에 바탕을 두어 네 시대로 나누게 되었다. 들소시대, 순록시대, 매머드 및 털꼬뿔소 시대, 동굴곰 시대로 나누었다. 그러나 라르테는 시간이 지나고 두 시기는 시간적으로 구분되지 않음을 점 차 인식하게 되었다. 르무스티에 유적은 동굴곰 및 매머드 시기의 전형적인 유적으로 지칭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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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는데 이 시기에 펠릭스 가리구는 이른 시기인 하마 시대를 첨가하였는데 인간은 주로 야외 유적에서 살고 있어서 프랑스 남부의 동굴에는 없다고 하였다.

·모르티에

라르테의 연구는 모르티에가 이어받았다. 모르티에는 고고학으로 전향한 지질학자이자 고생 물학자였다. 모르티에는 라르테의 연구를 이어받기는 했지만 구석기시대의 세부적인 분기는 고생물학적인 범주만이 아니라 문화적 범주에 바탕을 두어야 생태적 차이가 시간적 차이로 생 각되는 실수를 최소화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런 점에서 모르티에는 러복과 보르소에의 사례 를 따랐던 것이다. 그럼에도 모르티에의 고고학 접근 방법은 지질학과 고생물학의 영향을 많 이 받았다. 그는 각 시기를 구분하기 위해서 한시기의 특징되는 유물형식들을 가려내려고 하 였다. 이렇게 유물형식들을 가려내는 것이 지질학자들과 고생물학자들이 지질시대에 속하는 층들을 구분할 때 지표화석을 형식분류하는 것과 유사한 것이다. 이와 같이 19세기 구석기고 고학은 순서배열법을 편년을 수립하는 수단으로서 보조적인 역할만을 하였던 것이다.

라르테가 나눈 시기에 펠릭 가리구가 하마 시대를 추가하였는데, 하마 시대는 나중에 파리 북쪽에 있는 유적의 이름을 따서 셸리안기로 명명되었고, 동굴곰 및 매머드 시대는 대부분 무 스테리안이 되었다. 여기서 모르티에는 동굴곰 및 매머드 시대 말미에 위치를 지웠던 오리냑 에서 나온 유물들을 오리냐시안기로 구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모르티에는 오리냐시안의 연 대에 대해서는 확신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자신의 분류에서 빼버렸다. 모르티에 의 연쇄는 시간이 흐를수록 기술적인 정교함이 증가하고 석재 사용에서도 경제성이 높아짐을 보여주었다. 셸리안과 아슐리안 주먹도끼들은 르발루아 몸돌로 준비한 무스테리안 도구들로 대체되었으며 다시 후기 구석기시대의 돌날 도구들에 대체되었다.

모르티에는 트네시안기와 피쿠르니안기를 추가하여 셸리안기 이전의 유물들을 포괄하였다.

포함되는 유물들은 아주 거칠게 만들어 진 것들이였는데 진화이론에서는 최초의 도구들은 아 주 거칠어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돌들과 구분하기 어려울 것이라 하였다. 하지만 모르티에는 자연적으로 깨진 것과 의도적으로 깨진 돌들을 구분하는 데 쓰일 수 있는 범주들을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범주들을 만들기 위해서 어려 실험들이 이루어졌다. 수억 년 된 퇴적층에 서 채취한 돌을 비교연구하고 깨진 플린트에서 줄무늬 현상을 관찰, 깨진 날의 각도까지도 섬 세하게 연구가 되었다. 이런 연구 과정을 거쳐 석기 제작에 관한 많은 정보들이 알려지게 되 었고 많은 유적들이 인간의 기원을 연구하는 증거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못하였음을 알게 되었 다. 모르티에를 비롯한 많은 구석기고고학자들은 주로 인간의 기원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를 파악하는데 매달렸는데, 라르테와 모르티에가 세운 시기들이 인간의 기원을 추적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19세기 구석기고고학의 한계

스칸디나비아의 고고학자들은 주로 생계문화에 관심을 두고 연구를 하였는데 구석기고고학 자들은 이들보다 관심이 덜 했다. 구석기고고학자들은 진화적인 단계들을 수립하는데 관심을 많이 두었다. 이런 점에서는 고생물학자들과 유사한 점이 많다. 왜냐하면 고생물학자들은 당 시에 개별 시기의 암석포메이션에 보존된 식물 및 동물 종들 사이에 생태학적인 관계를 연구 하는 것보다는 진화적 연쇄를 세우는 것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고고학 발굴 조 사가 이루어지더라고 자세한 층위적 관찰이 이루어지지 못하여 사람들이 어떤 생활을 하였는 지에 대한 정보를 얻지 못하였다. 화덕이나 야영지의 증거는 인지하지도 못하였고 공반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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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유물과 동물 뼈들이 어떠한 관련을 맺고 있는지도 알지 못하였다.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 는 유물들은 단지 시대나 유적의 문화적인 친연성을 확정하는데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만 생각 되었다. 그리하여 유물들은 연대추정을 위한 장치들이며 진보의 증거물이라는 좁은 시각이 자 리 잡게 되었다. 스칸디나비아에서는 패총이 인간이 남긴 것이라는 결과물을 얻기도 한 반면 에 구석기고고학은 화덕이나 야영지의 흔적을 인지도 하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확연히 다른 접 근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생태 또는 종족적 차이로 나타날 수 있는 다양성의 가능성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 고, 구석기시대의 시대구분은 단지 단선적인 단계들로만 생각이 되었다. 이러한 단선진화론에 토태를 두고 현대의 민족지 문화를 이용하여 특정한 시기의 생활양식을 복원할 수 있다는 믿 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연구가 계속되어짐에 따라 민족지 접근 방법에 의존하여 고고 자료 의 연구를 추구하게 되면서 특정한 형식의 고고 자료로부터 인간의 행위를 추론하는 방법이 발달하지 못하였다. 이런 연구 방법은 선사고고학을 민족학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었 다.

·구석기고고학과 진화

모르티에는 19세기 중반에 진화적인 것에 사로잡혀 있었다. 글린 대니얼 역시 진화적인 관 점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진화고고학의 가장 중요한 속성 가운데 하나는 서로 다른 인간 집단 들이 단일한 연쇄를 그리며, 암석 층위들에서 지질 연쇄를 읽을 수 있듯이 하나의 동굴 유적 의 단면을 드러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는 점이다.

모르티에는 또한 민족학에 대한 영향도 받았다. 1860년대 이후 민족학자들이 다른 발달 수 준에 있는 현대사회들을 비교함으로써 유럽 사회들이 선사시대로부터 진화하여 온 일련의 단 계들을 설정할 수 있다는 이론상의 역사가 크게 부활하였다. 18세기의 호고주의와는 달리 민 족학적 주장들은 철학적 공상보다는 학설로 제시되었다. 이러한 민족학적인 연구들은 고고 자 료가 늘어남에 따라 인류의 증거를 더 확실히 해 줄 수 있다는 자신감에 근거하고 있다. 민족 학적인 연구들이 19세기 중반의 진화적 유행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구석기고고학은 당시까지 기대하지 못했던 인류의 역사와 유럽 문명의 진화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학문적으로 중요하였고 대중에게도 크게 호응되었다. 또한 구석기고고학은 지질학과 고생물학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면서 연구되어 온 만큼 같이 학문적으로 중요하게 생각되었다.

전술하였듯이 프랑스와 영국은 스칸디나비아보다 연구를 할 기회가 많이 있었기 때문에 더 많 은 관심을 모았다. 그렇지만 프랑스와 영국의 구석기고고학은 단지 연대추정을 위한 수단으로 만 생각을 하여서 스칸디나비아의 고고학이 생활양식에 중점을 둔 것과 비교하면 좁은 시각이 라고 생각된다. 즉 스칸디나비아의 고고학자들도 마찬가지고 지질학자와 생물학자와의 협력관 계가 있었지만 이들은 다 같이 협동하여 목적을 이루려 했지만 구석기고고학자들은 자연과학 적 방법에만 의존했다는 점에서 대조를 이룬다.

5. 진화에 대한 반응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고고학자들은 계시 종교 및 진화론 지지자들 사이의 논쟁에서 각 각의 편에 모두 섰다. 인간의 기원에 대해서 진화적 설명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다양하게 대응 하였고 창조론자들은 인간이 훨씬 전에 창조되었음을 인정하였다. 다만 초기 인류의 유골이 발견되었을 때 유인원의 형태가 아니라 현대 인간과 가까울 것이라는 생각에 희망을 품고 있 었다. 이외에 고고학적으로 진화적 해석을 거부하였던 창조론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퇴보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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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의를 부활시키고자 하였는데 대표적으로는 아마추어 고고학자였던 존 윌리엄 도슨이 있다.

그는 인류 화석과 절멸 동물이 공반한다는 사실은 받아들였지만 이것들이 함께 출토되는 것은 플라이스토세 자갈층이 최근의 것임을 확증해 주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자신의 스승 이었던 동일과정설을 주장한 찰스 라이엘의 주장을 무시해버리는 것과 같다. 그 퇴적층이 가 장 오래된 것이라는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19세기에 도슨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논박하는 학 자들의 의견에 대해 그냥 무시해버리고 말았다.

서아시아의 고고학자들과 성서가 진실하는 것을 증명하려는 사람들 사이에는 깊은 친밀성이 있었다. 메소포타미아 고고학은 1870년대에 바빌로니아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진흙 판을 발굴 함으로써 부활하였다. 이외에 이집트, 우르, 등에서 발굴이 이루어졌지만 1890년대까지고 성 서의 연대기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기를 두려워한 역사고고학자들은 서아시아에는 선사시대 유 적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는 고대 유물로서 매력이 넘쳤지만 성경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해 고고학 조사를 하는데 매우 제한적 이였지만, 팔레스타인에서 조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재정지원을 꾸준히 받을 수 있었다.

6. 북아메리카의 고고학 : 마운드빌더족 논쟁

라틴아메리카의 선사시대는 유럽에서 온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산발적으로 조사되었다. 선사 시대가 아메리카의 고고학자가 아닌 유럽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조사가 되었지만 미국은 19세 기 말 이전 선사고고학 연구의 전통을 발전시킨 유일한 나라이다.

당시에 인디언들은 포악하고 싸우기를 좋아하고 문화발달을 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다는 주 장이 광범위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특정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생각되어 지던 것 이다.

이때 유럽에서 들어 온 이주민들이 아팔레치아 산맥 서쪽으로 진출하게 되는데 이 곳에 정 착하기 시작하면서 오하이오강과 미시시피강 합류 지역에서 토루와 커다란 마운드를 마주하게 된다. 이러한 구조물에는 토기, 조개, 운모 등으로 만들어진 유물들이 들어있었는데, 곧 다양 한 공상의 대상이 되었다. 토루와 마운드를 축조한 사람들이 누구인지가 중점이 되었다. 여 기에는 미국인들, 데인족, 톨텍인, 바이킹족, 멕시코인 등 여러 설이 등장하게 되었다. 마운드 와 토루들을 퇴보론의 증거로 해석하였던 사람들을 문제 삼지 않고 대부분의 학자들과 사람들 은 이 유적들을 마운드 빌더라는 상상의 족속이 만든 것이라고 보았다. 그 뒤에 마운드빌더라 는 족속은 야만적인 인디언 약탈자들에 의해 북아메리카로 쫓겨나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다. 그러므로 토루와 마운드를 인디언이 만든 것이 아니라 다른 족속이 마운드빌더가 만든 것 이라고 주장하면서 인디언의 무능력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이외에 인디언을 하나의 종족으로서 인정을 하지 않으려는 부정적인 측면이 있었다면 긍정 적인 측면이 있었다. 이 아팔레치아 산맥 서부에서 마운드와 토루들이 발견된 것은 처음으로 미국에서 산사시대의 기념물을 묘사하고 유물들을 수집하는 데 관심을 불러왔다. 18세기 말 하이오강 유역에 주둔한 군장교들은 토루의 평면도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미국에서 마운드와 토루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체계적으로 연구가 진행되었다. 미국 철 학회의 1799년 당시 회장이었던 토머스 제퍼슨은 학회의 학술 프로젝트 중 하나로 선사시대 의 요새, 분묘, 인디언 유물들에 대한 정보를 소개하였다.

이후에 미국고고학에 큰 기여를 한 것은 에프레임 스콰이어와 에드윈 데이비스에 의한 <미 시시피 강 유역의 고대 기념물>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들은 많은 마운드와 토루를 조사하였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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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그 가운데 몇 개는 발굴을 하기도 하였고 다른 연구자들이 연구한 것을 종합하였다. 그래 서 이들은 형태적인 기준에 따라 형식 분류를 하여 미시시피강 상류의 조상 마운드와 오하이 오의 대칭 인클로저, 그리고 남부의 절두 마운드로 나누었다. 이들이 마운드빌더족이 축조했 다는 가설을 강하게 주장하였지만 이보다 이른 것은 물리학자이자 스미스소니언연구소의 첫 사무관이었던 조셉 헨리가 마련하였다.

조셉 헨리는 베이컨의 접근 방식은 귀납적인 전통으로 과학적 조사를 지지하였다. 마운드빌 더족에 대한 공상을 헨리는 삭제하고자 하였다. 헨리는 <미국의 고고학>이라는 책을 출간한 다. 여기에서 미국 선사시대에 대한 공상들을 상상으로 추정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정보를 토대로 고찰함으로서 잘못된 생각임을 알렸다. 이 책에서 마운드빌더설이 주된 공격 대상이었 던 것이다. 그리고 헨리는 유럽 고고학의 발전에 대한 복서를 <스미스소니언연구소 연보>로 내서 북아메리카 전역에 배포하였다. 가장 성공한 보고서는 <고고학에 대한 개관>인데 유럽 고고학의 최신 성과, 특히 덴마크와 스위스의 연구들을 요약한 내용이었다. 덴마크에서 이루 어진 “쓰레기더미”에 관한 발굴 조사 설명은 미국에서는 패총은 더불어 화덕과 야영지의 흔적 조차 인지를 못하고 있던 상황에서 이러한 보고서를 통해서 북아메리카에서도 패총의 연구에 자극을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많은 공상적인 생각을 하는 일반 대 중들의 생각에 큰 변화를 미치지는 못하지만 고고학 연구에 대해 체계적인 연구를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함으로서 1860년대 이후 고고학의 전문화 시대를 준비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7. 결론

유럽에서 선사고고학은 19세기 초반과 중반 문화진화에 대한 이성적인 연구와 더불어 역사 기록 이전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낭만적인 연구로서 발달하였다.

선사고고학의 두 가지 움직임은 덴마크에서 처음으로 일어나고 그다음 영국과 프랑스에서 구석기고고학으로 나타났다. 덴마크에서는 톰센이 석기, 청동기, 철기 이 세 단계로 선사시대 를 구분하여 삼시대체계라고 불렀다.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구석기고고학이 발달되었다. 하지 만 스칸디나비아와 영국, 프랑스의 선사고고학에 대한 접근방식은 확연히 달랐다. 스칸디나비 아는 사람들의 생활양식에 초점을 맞추었고, 이에 반해 구석기고고학은 연대추정을 하기위한 수단으로서 발달되었다.

이 선사고고학의 발달의 진보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도 있다. 산업혁명의 결과로서 중간계급 의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이 이런 진보의 물결에 동참하는 것을 만족스러워 하였다. 하지만 이 런 물결에 인디언들까지 같이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백인들에게 원주민들이란 예외적인 종족 이였고 생물학적으로 열성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같이 동참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던 것이 다. 그래서 유럽에서 유럽인과 비유럽인을 구분짓는 것은 강력한 제국주의적 틀 속으로 통합 되어 갔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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