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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 이후의 식민지 조선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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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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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글

(1)

연 도

개봉 일

제목

(일본어) 감독 제작단체 권

원작형식

(원작자) 필름보존 상황 1

9 4 2

1.10 신개지

(新開地) 윤봉춘 한양영화사 10 근대소설

(이기영) 1.14 풍년가

(豊年歌,豊年の歌) 방한준 고려영화주식회사 시나리오 (감독동일)

1 9 4 3

4.5 우러르라 창공

(仰げ蒼空) 김영화

고려영화협회 기획, 사단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8 시나리오 (西龜元貞)

4.29 망루의 결사대

(望樓の決死隊) 今井正 고려영화협회 기획

東寶 10

시나리오 (山形雄策, 八木隆一郞)

필름보존

6.16 조선해협

(朝鮮海峽) 박기채 사단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9 시나리오

(佃順) 필름보존

12.1 젊은 모습 (若き姿)

豊田 四郞

사단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9 시나리오

(八田尙之) 필름보존

1 9 4 4

2.24 거경전

(巨鯨傳) 방한준 사단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8 시나리오 (佃順) 6.16 병정님

(兵隊さん) 방한준 조선군 보도부 8 시나리오

(西龜元貞) 필름보존

11.4 태양의 아이들

(太陽の子供たち) 최인규 사단법인

조선영화사 8 시나리오

(西龜元貞) 1

9 4 5

5.24 사랑과 맹세 (愛と誓ひ)

최인규, 이마이 다다시

사단법인

조선영화사 12 시나리오

(八木隆一郞) 필름보존

게 10편 7명 조선소재:5개

일본소재:1개

시나리오:8편

소설, 희곡:2편 필름보존:5편 한국영화사 1 제13강 : 태평양전쟁 이후 조선영화의 특징 (~1945)

태평양전쟁 이후의 식민지 조선영화

1.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제작된 조선 극영화 목록

태평양전쟁 이후 일본과 조선의 모든 분야가 일원화되던 추세에 따라, 또한 조선영화 제 작, 배급, 상영 체계가 일원화됨과 더불어 조선영화의 제작경향 역시 전쟁영화로 집중되었 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이 전쟁개시와 함께 갑작스럽게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1942년까지 만 하더라도 전쟁영화의 제작이 활발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표8〕은 당시 조선에서 제작, 개봉된 극영화를, 조선에서의 개봉일 순으로 목록화한 것이다.

〔표8〕1942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에서 제작, 개봉된 극영화

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1942년 이후 조선에서 제작된 극영화는 총 10편에 불과하다. 그

(2)

나마도 2편은 일본인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일본영화라는 점을 감안하면, 연간 제작편수는 평균 2편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1942년의 경우, 조선의 모든 영 화사가 사단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로 통합되는 과정 중이었기 때문에 조선에서 영화제 작 자체가 쉽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1944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사단법인 조선영화제작 주식회사가 사단법인 조선영화배급사로 흡수되어 사단법인 조선영화사 체제로 전환되면서, 2편의 영화의 제작이 촬영 직전에 취소되기도 하였다.1) 해방년도인 1945년의 경우에는, 신 경균 감독의 <우리들의 전장(我等の戰場)>처럼 제작이 완료된 상태에서 개봉되지 못하거나 이병일 감독의 <고향이야기(故鄕)>처럼 촬영이 중단되거나 방한준 감독의 <춘향전(春香傳)>

처럼 촬영이 취소된 영화들도 있었다.

2. 사단법인 조영 및 조선군 보도부 제작 극영화들

1943년부터 1945년까지 개봉된 조선인 청년의 입영 과정이나 군영생활을 묘사한 조선영 화는 모두 4편이었다. <조선해협>(1943)은 사단법인 조영에서, <병정님>(1944) 조선군 보 도부에서, <태양의 아이들>(1944) 및 <사랑과 맹세>(1945)는 사단법인 조선영화사에서 제 작되었다. 이들 영화는 모두 지원병제나 징병제를 선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따 라서 이들 영화의 주인공은 지원병제이나 징병제의 대상이었고, 내용상의 축은 그가 어떠한 계기로 군대에 들어가며 어떻게 군대에서 생활하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또한 이들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창씨개명을 하였고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모두 일본어였다. 그 래서 이들 작품에서 그들은 조선인이기 전에 일본인으로 비추어졌다. 이렇듯, 이들 4편의 작품은 일본의 군사정책과 동화정책을 반영한 철저한 국책영화였다.

조선에서 군사정책과 동화정책이 연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 둘의 관계가 상보적이 기 때문이었다. 군사정책과 동화정책은 서로 목적이 되기도 하고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즉, 군사정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동화정책이 전제되어야 하였으며, 군사정책은 동화정책의 가 장 상징적인 조건이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동화정책이란 과연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동화 assimilation란 “원래 다른 것이 같게 되는 것, 같은 성질로 변하는 것, 또 다른 것을 감화 시켜 자신과 같도록 하는 것”이라 정의되며, 이것이 국가 수준에서 정책적으로 전개될 때 동화정책 assimilation policy으로 불린다.2) 일본은 조선통치 전기간에 걸쳐 동화정책을 꾸 준히 실시하였다. 특히 전시체제 하에서는 동화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는 조선이 일본 과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으며 조선인은 일본인과 같은 인종에 속하기 때 문이었다. 그러나 이보다는, 조선인들을 상상의 공동체로 묶어 일제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하고 이로 인해 조선에 대한 수탈을 강화할 수 있게 하는 목적이 더욱 컸다. 동화 정책은 모든 동원 및 수탈 정책의 하부에 위치하는 일제 식민지정책의 기초였던 것이다.

조선에서 제창된 동화정책의 슬로건으로는 내선융화와 내선일체가 있었다. 그 가운데 1936년 부임한 제7대 총독 미나미 지로에 의해 동화정책의 슬로건으로 내세워진 것이 바로 내선일체였다. 우가키 총독 시기의 내선융화보다 내용이 한층 강화된 내선일체는, 조선인과

1) 안석영 감독의 <어머니의 품에(母の胸に)>와 최인규 감독의 <마의 산(魔の山)>이 그러하다. 한상언, 앞의 논 문, 416쪽.

2) 홍일표, 「일본의 식민지 ʻ동화정책ʼ에 관한 연구 : ʻ창씨개명ʼ정책을 중심으로」, 서울대 대학원 석사논문, 1999, 9쪽.

(3)

일본인은 다 같이 천황의 신민이기 때문에 동등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3) 이러한 논리 에 따라 일본은 조선인에게 완전한 일본인이자 진정한 황국신민이 되어 대동아공영권의 중 추적 일원으로서 역할과 의무를 다하도록 강요할 수 있었다.4) 이로 인해, 1943년 이후 조 선 전쟁영화는 내선일체를 기저에 둔 채 국가의, 즉 일본의 군사정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 였다.

(1) <조선해협>

박기채 감독의 <조선해협>은 극영화로서는 사단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의 제1회 제작 및 개봉 작품이었다. 이 영화는 1942년 공포되어 1944년부터 실시된 징병제를 선전하기 위해 기획된 작품이기도 하였다. 그렇기는 하나, 영화의 주제 및 선전효과를 강화하기 위해 징병제에 응하는 주인공보다는 지원병으로서 입대하는 주인공을 내세운다. 이 영화는 과거 양반층으로 보이는 한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노부부의 큰아들은 지원병으로서 전사하였고, 작은아들 세키(남승민 분)는 긴슈쿠(문예봉 분)과 살림을 차렸다. 세키의 부모, 특히 아버지는 긴슈쿠를 근본 없는 여자라며 며느리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세키는 긴슈 쿠가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을 듣지 못한 채 지원병으로 입대한다. 결국 세키는 전장 에서 부상을 입고 후방 병원으로 후송되며, 긴슈쿠는 군수공장에서 열심히 일하다가 과로로 쓰러진다. 이를 계기로 세키의 부모는 긴슈쿠를 며느리로 인정하고, 세키와 긴슈쿠는 현해 탄을 사이에 두고 전화를 하게 된다.

멜로드라마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고 주인공이 지원병으로 입대함으로써 모든 문제가 해결 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지원병>과 비슷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남녀 간의 사랑 및 이에 따른 결혼 문제는 ‘약혼’이 아닌 ‘사실혼’의 형 태로 발전한다. 문제해결 방식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다. 남자가 지원병으로서 입대하는 것 만으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동시에 여자 또한 ‘총후부인’으로서 후방에서 열심히 일해 야만 한다. 이러한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에 비로소 행복이 찾아오고 평화가 찾아오는 것이 다.

한편, 김려실은 이 영화가 “당시 징병제에 대한 거부감이 가장 높았던 구(舊) 양반 부유 층을 선전 대상으로”5) 한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그렇다 보니 이 영화의 논리적 비약은 대 부분 세키의 아버지의 태도나 행동으로부터 나온다. 그는 긴슈쿠를 며느리로 삼지 않는 부 분에 있어서는 매우 단호한 태도를 보이는 반면, 자신의 아들을 전장에 내보내는 일에 있어 서는 상당히 관대하다. 큰아들이 전사한 상태에서 작은아들까지 출병하였다가 죽어버린다 면, 집안의 대가 끊기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긴슈쿠를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 는 보수성이 ‘지원병’이라는 거대장벽에 가려져서 정작 집안의 대를 이어야만 하는 데까지 는 적용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영화 후반부에서, 그가 긴슈쿠를 며느리로 받아들 이는 장면을 통해서도 보여진다. 긴슈쿠의 신분이나 처지에는 전혀 변화가 없는 상태에서

3) 박성진에 따르면, 첫째, “내선융화 단계의 동화 이데올로기는 상대적이며 점진적인 특징을 포함”하는 반면에

“내선일체 단계의 동화 이데올로기는 일방적인 일본화를 특징으로 한다”는 점, 둘째, “내선융화 단계에서의 동화의 주요 타깃은 대체로 중상류층 또는 지식인 계급에 초점이” 맞춰진 반면, “내선일체 단계에서는 일반 민중으로 보다 확대”되었다는 점에서 내선일체는 그 이전의 내선융화보다도 훨씬 강제적, 보편적 성격을 지닌 다. 박성진, 「한말-일제하 사회진화론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논문, 1999, 113쪽.

4) 함충범, 『일제말기 한국영화사』, 국학자료원, 2008, 133~134쪽.

5) 김려실, 『투사하는 제국 투영하는 식민지』, 삼인, 2006, 311쪽.

(4)

그녀를 받아들이게 된다는 설정으로, 선전효과는 높아졌는지 모르나 적어도 극적 논리성은 파고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지원병>을 연상시키는 이러한 결말구조를 선택하였다는 것은 이 영화의 성격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2) <병정님>

방한준 감독의 <병정님>은 지원병훈련소의 두 명의 훈련병을 주인공으로 하는데, 히라마 쓰 선기와 후지모토 영일이 바로 그들이다. 이 영화는 훈련병들의 일상을 세세하게 묘사한 다. 조선영화에서 지원병훈련소는 이미 <지원병>과 <그대와 나>에서 선보인 적이 있었으나 이들 영화에서는 병사들의 훈련장면만이 비추어졌을 뿐이다. 이 영화가 그려내는 훈련소의 풍경은 당연히 밝고 따뜻하다. 훈련은 힘들고 고되지만 전우가 있어 외롭지 않다. 엄격한 규율이 존재하는 곳이지만 가정과도 같이 인정이 넘친다. 입는 것, 먹는 것, 씻는 것, 자는 것 어느 하나도 부족함이 없다. 이러한 곳에서 훈련을 받는 훈련병들은 적어도 이 영화에서 만큼은 선택받은 자들이다. 그들이 받는 훈련은 ‘조선인’이라는 신분을 벗어내고 ‘일본인’으 로 도약하는 과정으로 논리화된다. 그렇기에 그들의 가족, 친구, 애인, 마을 사람들 모두가 그들을 지지하고 부러워한다. 특히, 지원병 입대를 알리는 통보장을 받은 어머니와 아버지 는 의연함을 넘어 비장함을 보이며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그럼으로써 선기와 영일은 다른 수많은 지원병들처럼 ‘씩씩하고 당당하게’ 전장을 향해 진군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 럼, <병정님>은 지원병훈련소에서 즐겁고 보람 있게 생활하는 훈련병과 이들을 뒷받침하는 주변사람들을 통해 누구라도 안심하고 지원병에 입대하라는 메시지를 제시하는 영화였다.

(3) <사랑과 맹세>

뒤를 이어 개봉된 <태양의 아이들>과 <사랑과 맹세>는 모두 최인규 감독의 작품이면서 청소년의 입대를 다룬 영화였다. <태양의 아이들>은 어느 섬마을의 국민학교 여교사(김신재 분)가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교육을 통해 학생들로 하여금 군대에 지원하게 한다는 내용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사랑과 맹세>는 고아 출신으로,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던 한 소년 이 군에 입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하자, 일본은 1943년 8월과 10월에 조선에서도 각각 해군특별지원병령과 학도특별지원병령을 공포하여 조선의 소년들을 전장에 끌고 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태양의 아이들>과 <사랑과 맹세>는 바로 그것들을 선전하는 영화였다. 이들 영화가 어떠한 방식으로 조선의 젊은이들을 전장에 내몰았는지를 현재 필름이 남아 있는 <사랑과 맹세>의 경우를 통해 알아보자.

<사랑과 맹세>는 일본 해군 보도부가 기획한, 사단법인 조선영화사와 도호의 합작영화였 다. 그리고 일본 해군성과 조선총독부가 후원한 작품이었다. 최인규 감독과 이마이 다다시 감독이 공동으로 연출하였고 조선과 일본의 스텝들이 공동으로 작업하였다. 조선의, 일본의, 만주의 배우들이 출연하기도 하였다. 그러하였던 만큼 영화의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도 ‘내 선일체’가 시도된 작품이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에이류(김우호 분)는 고아 출신의 조선인 소년이다. 그는 일본인 양부 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정에 적응하지 못한다. 그에게 불만이나 반항기가 있는 것은 아 니지만 그는 항상 의기소침하다. 그러던 어느 날, 에이류는 양부가 근무하는 신문사의 옥상 에서 우연히 일본인 무라이(독은기 분)를 만나 함께 사진을 찍는다. 무라이는 ‘가미가제(神

(5)

風)’로 알려진 해군특별공격대 소속의 소위로서 얼마 되지 않아 전사하는 인물이다. 무라이 의 전사 소식은 신문에 대서특필되고, 이에 양부는 에이류에게 무라이의 집에 기거하며 특 집기사를 써올 것을 권고한다. 이에 에이류는 무라이의 집을 방문하고, 이를 계기로 그는 서서히 변화된다. 마을의 국민학교 교장인 무라이의 아버지는 학생들이 자신의 아들처럼

‘진정한 황국신민’이 될 것을 주문한다. 한편 무라이의 부인 에이코(김신재 분)는 남편의 뒤 를 이어 묵묵히 자리를 지킨다. 특기한 점은 그녀가 조선인이라는 사실이다. 어느 날 마을 에서 한 조선인 청년의 출정식이 열리는데, 에이류는 마을에 남고 싶은 마음에 마을을 오고 가는 버스의 엔진을 고장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은 열심히 달려 부대로 향한다. 이를 계기로 에이류도 무라이에 대한 특집기사를 완성한 후 무라이의 뒤를 이어 해군특별지원병 에 입대한다.

이렇게 이 영화는 주인공 에이류를 둘러싼 여러 인물들을 통해 황국신민화 및 내선일체의 모범을 제시한다. 그 양태가 복잡하게 보이나, 실제로 그것은 상당히 교묘하게 조합되어 있 다. 에이류의 영웅으로 등장하는 무라이는 일본인으로서 장렬하게 전사하고, 조선인과의 결 혼을 통해서는 내선일체를 몸소 실천한다. 그의 용맹성과 희생정신, 다정다감함은 에이류에 게 귀감이 된다. 무라이의 부인 에이코 역시 에이류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다. 에이류처럼 고아 출신인 그녀는 에이코의 심연에 자리하던 (조선인으로서의) 열등감을 서서히 해소시켜 준다. 누가 봐도 정숙한 조선여인으로 보이는 그녀는 전쟁영웅 무라이의 아내로서, 그리고 떳떳한 일본국민으로서 의연하게 총후를 지켜낸다. 무라이의 양부모 역시 내선일체의 모범 으로 등장한다. 조선인 고아를 데려와서 길러주기 때문이다. 고아를 데려와 보살피는 인물 로는 이미 최인규 감독의 <집 없는 천사>에서의 ‘방 목사’가 있었다. 하지만 그가 조선인으 로서 고아들을 집단적으로 보살피는 데 반해, 에이류의 양부모는 일본인으로서 조선인 고아 를 가족의 일원으로 길러낸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여러 사람들의 영향으로 에이류의 마음은 움직이고 결국 그는 변화한다. 그런데, 그 ‘변화’는 보통의 청소년으로부터 나오는 표정이나 언행의 범위를 넘어선다. ‘전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에이류는 맹목적으로 의미 없는 전쟁의 희생양이 되기 위해 ‘스스로’ 전화(戰火)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출정하는 마을 청년의 등장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에이류의 비교대상이자 경쟁상 대가 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이 작품은 에이류 주변에 황국신민으로서 ‘모범’이 될만한 조선 인과 일본인을 적절히 배치하여 에이류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지원병이 되도록 강요한다.

결국 에이류는 이들에 의해 전장으로 내몰리고 말았다고 볼 수 있다.

이 영화는 1945년 5월부터 촬영되어 7월에 개봉되었다. 전쟁 막바지에 나온 최후의 조선 영화라 할만하다. 일본의 동맹국 독일이 항복하고 일본의 수도 도쿄가 공습당한 때가 1945 년 3월이었으니, 당시 조선 및 일본 영화인들은 이 영화에 자신이 지니고 있던 모든 영화적 재능과 역량을 ‘조선’이라는 또 다른 ‘일본’에 투입하였을 것이다. 침략국 일본의 ‘최후의 발 악’이 비단 전장에서만 나왔을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이를 통해 조선의 수 많은 젊은이들이 하나밖에 없는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다. 전쟁은 끝나고 조선은 독립을 하였지만 이들은 다시 살아 돌아오지 못하였다.

이로 볼 때, 이 작품을 포함하여 일제강점기 전시체제 하에서 만들어진 이른바 ‘친일영화’

는, 그리고 이러한 영화의 제작에 참여한 ‘친일영화인’은 역사의 냉정한 평가로부터 자유롭 지 못하며 또한 자유로워서도 안 될 것이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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