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조선 평양화교의 실태
‒ 배화폭동 이전을 중심으로 ‒*
59)
이 은 상**
❙국문초록❙
이 글에서는 식민지 조선 북부지역 화교에 관한 일련의 연구 중 하나로 배화폭동 이전 평양화교의 실태를 살펴보았다
.우선
,평양의 지역적 특징과 화교의 규모를 서술하였다
.평안도의 전통적 상업중심지 평양은 진남포 개항
2년 뒤 개방되었다
.경의선 개통은 평양의 도시 발전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평양은
1910년대 후반부터 공 업도시로 주목받았는데
,중소공업 분야에서 조선인의 상공도시라는 특징을 갖는다
.이러한 상황은 평양화교의 규모에 반영되었다
.다음으로
,평양화교의 경제력을 분석하였다
. 1920년대 평양화교의 구심점은 직물수입상이었다
.다른 지역 과 달리 평양은 조선인 중신조합을 통해 화교직물도매상과 조선인 직물소매상 간의 거래가 이루어졌다
.평양 직물업계에서 화교직물상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이다
.또한 평양의 화교상인은 조선 북부지역 화교상 인 네트워크의 거점 역할을 하였다
.신의주에서 화교제조업자가 생산한 양말은 이들을 통해 전국에 유통되었 다
.잡화도매상 경흥덕
(慶興德
)의 경영자는
1920년대 중반 조선인 양말제조공장에 자금을 융통해줄 정도의 유 력 상인으로
,별도의 양말제조공장을 운영하면서 경영의 다각화를 꾀했다
.마지막으로
,평양의 화교조직으로 중화상회를 검토하였다
.평양의 화교조직은 평양이 개방되기 이전부터 존 재하였다
.이후 상회법
(商會法
)에 따라 중화상회로 개칭되었고
,신
(新
)상회법에 따라 위원제
(委員制
)로 개조되 었다
. 1919년 중화상회 임원 명단을 살펴보면 직물상
,잡화상이 대부분이고
,화농
(華農
)이 포함되었다
. 1930년 명단에서는 직물상과 잡화상 외에 주물업자와 요리업 경영자의 약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이 폭동 이전 화교사회의 주류로 구심적 역할을 하였다
.[
주제어
]평양화교
,평양중화상회
,평양
,진남포
❘목 차❘
Ⅰ
.서 론
Ⅱ
.평양의 위상과 화교의 규모
Ⅲ
.평양화교의 직업별 현황과 경제력
Ⅳ
.평양화교와 중화상회
Ⅴ
.결 론
* 이 과제는 부산대학교 기본연구지원사업(2년)에 의해 연구되었음
**부산대학교 교양교육원 교수 / eunha@pusan.ac.kr
Ⅰ. 서 론
필자는
20
세기 전반기 식민지 조선 북부지역 화교에 관한 일련의 연구를 추진하였다.
여기에는 원산,
신 의주,
청진 등지 화교가 포함된다.
1) 또한 북한화교의 대표적 연구자 송우창(
宋伍强)
은 필자보다 앞서 신의 주,
원산 화교상인의 상업 활동을 분석하였다.
2)반면
,
평양화교는 조선 북부지역의 화교 중 규모,
경제력 등의 측면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에 관한 연구는 구체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평양화교가 일반적으로 배 화폭동이라는 사건으로 소환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주목하지 않았던 평양화교의 실태를 폭동 이전 시기를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살펴보 려고 한다
.
평양 화교상인을 분석한 기존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3) 다음 두 가지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 를 전개하고자 한다.
우선,
평양의 지역적 특징에 주목할 것이다.
평양은 조선인 공업도시로 잘 알려진 곳이 다.
대표적으로 조선인 양말공업,
조선인 자본가의 경제 활동 등에 관한 연구성과가 한국사학계를 중심으로 축적되었다.
4) 그러나 이들 연구에서는 일본과 조선의 관계에 주목할 뿐 화교의 세력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 하지 않거나 주변화하였다.
5)다음으로 조선인 공업도시 평양에서 화교의 경제력을 살펴보고
,
화교의 사회조직으로 중화상회의 상황을 서술할 것이다.
이로써 폭동 이전 평양화교의 위상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폭동으로 인한 실상을 정확하게1)이은상, 「중일전쟁 이전 시기(1912~1936) 조선의 원산화교」, 인문과학60, 성균관대학교 인문학연구원, 2016a; 이은상,
「20세기 전반(1912~1936) 식민지 조선의 신의주화교」, 중국근현대사연구70, 중국근현대사학회, 2016b; 이은상, 「원산화 교와 배화폭동」, 중국근현대사연구72, 중국근현대사학회, 2016c; 이은상, 「식민지 시기 조선 청진화교의 위상」, 동양학
78,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2020.
2) 宋伍强, 「關于民國初期新義州的朝鮮華僑及其商業活動之考證: 圍繞二十世紀二三十年代新義州華商之絲織品行業的商業活動情況」,
世界華僑華人硏究 2, 廣州: 曁南大學華僑華人硏究院, 2010; 宋伍强, 「1920年代におにる新義州朝鮮華僑の商業活動につい て: 靴下製造業を中心に」, 星陵臺論集 43: 3, 兵庫: 兵庫縣立大學大學院 學園都市キャンパス硏究會, 2011; 宋伍强, 「植民 地朝鮮における華僑商人の經濟力分析: 1920年~1937年の元山華僑織物雜貨商を中心に」, 東アジアの思想と文化5, 京都; 東 アジア思想文化研究會, 2013.
3)조선화교사의 대표적 연구자 이정희는 신의주 화교양말제조업의 흥기와 성쇠를 서술하면서 평양 화교상인과의 관계를 살펴 보았다. 李正熙, 朝鮮華僑と近代東アジア, 京都: 京都大學學術出版會, 2012, 231~239쪽. 또한 평양 배화폭동의 원인(遠因) 을 검토한 논문에서 화교직물상의 상황을 검토하였다. 李正熙, 「1931年排華事件の近因と遠因」, 朝鮮華僑と近代東アジア, 京都: 京都大學學術出版會, 2012, 462~474쪽.
4)주익종, 「일제하 평양의 메리야스공업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4; 오미일, 「1910~1920년대 공업 발전 단계와 조선인 자본가층의 존재 양상」, 한국사연구87, 한국사연구회, 1994; 오미일, 「평양지역 조선인자본가들의 조합 조 직과 공업 발달」, 한국사연구 137, 한국사연구회, 2007.
5)예컨대, 주익종은 1930년대 평양 메리야스공업의 공황(恐慌)과 회복(1930~1932)을 설명하면서 회복의 요인으로 첫째, 메리 야스 공업자의 대응 둘째, 외부 경제 환경의 호전 즉, 배화폭동을 거론하였다. 그에 따르면, 배화폭동으로 이득을 본 집단은 조선인자본가이고, 이 사건으로 1920년대 중엽 이래 평양 메리야스공업의 가장 유력한 경쟁자였던 신의주 화교양말제조업을 몰락시키는 역할을 하였다(주익종, 앞의 논문, 154~158쪽). 이정희의 연구에 따르면, 신의주양말제조업은 배화폭동 그 자체 로는 큰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평양 배화폭동으로 신의주양말제조업의 판매망에 편입되어 있던 평양의 화교상인이 몰락함으 로써 연쇄적으로 쇠락하였다(李正熙, 앞의 책, 237~239쪽). 배화폭동이 없었다면 평양 조선인 메리야스공업의 호황(1933~
1937)이 과연 가능했을까, 한국화교사에서 가장 부끄러워해야 할 사건을 단순히 경제적 관점에서 외부 경제 환경의 호전이라 는 용어를 쓰는 것이 적절할까 하는 의문이 든다.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이 글의 작성을 위해,
주조선(
駐朝鮮)
영사관 자료 등 중국 측 자 료 외에,
조선총독부와 평양부,
평양상업회의소 등 일본 측 자료를 활용하였다.
Ⅱ. 평양의 위상과 화교의 규모
일본은 평안남북도와 황해도를
‘
서선3
도’(
西鮮三道)
로 구분하며,
전략적으로 중시하였다.
청일전쟁 시기 일본군의 상륙지로 주목받은 진남포는 평안남도의 한적한 어촌에 불과했지만 일본 측의 지속적 요구로1897
년 자개상부(
自開商埠)
의 형식으로 개항되었고, 2
년 뒤 평양은 외국인의 잡거지(
雜居地)
로 개방되었다.
6)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진남포 개항
,
평양 개시(
開市)
이전부터 평안남북도,
황해도 등 서해안은 전통적 으로 조·
청(
朝淸)
무역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이다.
개항 이후 조선의 전통 상권은 개항장을 중심으로 재편되 었다.
평안도의 전통적 상업 중심지 평양은 개항장 원산,
그 후에는 인천에 연결되었다.
중국상인은 조청상민 수륙무역장정의 내지행상권(
內地行商權)
등을 활용하여 평양의 상권을 침투하였고,
중국 산둥성(
山東省)
연안 에서 건너온 중국 재래선은 서해안 일대 포구에 입항하여 밀무역을 하였다.
이 활동의 근저에는 산둥 현지의 사회적 요인 곧,
높은 인구밀도,
흉년으로 고향을 떠나는 이주민의 증가 등의 상황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7)이런 이유로 청일전쟁 이후 정치적으로 일본의 세력이 우세해졌다고 하지만 중국상인의 영향력이 쇠락했 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
진남포 개항2
년 뒤 중국은 부영사관을 진남포에 설치하고 평양의 화교 업무를 같이 처리하도록 했다. 1907
년 주한총영사 마정량(
馬廷亮)
의 보고에 의하면 진남포와 평양의 화교는 각각429
명, 402
명으로, 1880
년 개항된 원산의 화교가203
명에 불과한 것과 대비된다.
8)<
표1>
은 평양의 인구수를 정리한 것이다.
9) 이에 따르면,
평양의 중국인은1912
년647
명으로 시작하여,
이후 증감의 폭이 있었으나1917
년 회복세를 보이며 매년 꾸준히 늘어났고, 1929
년1
천 명을 훌쩍 넘기고, 1930
년에는 거의2
천 명에 육박하면서 중일전쟁 이전 최고를 기록하였다. 1929
년 중국인의 증가는 평양부 의 부제(
府制)
확장으로 평양 인구가15
만 명을 돌파하여,
경성에 이어 조선 제2
의 대도시가 된 것과 무관하 지 않다.
10)6) 진남포 개항, 평양 개시(開市)의 경과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저를 참고할 것. 손정목, 한국 개항기 도시 변화 과정 연구, 일지사, 1982, 270~276쪽, 319~325쪽.
7) 김동희, 「진남포의 개항과정과 무역구조의 변화(1897~1910)」, 역사연구26, 역사학연구소, 2014, 108~111쪽; 이시카와 료타(石川亮太), 「국경을 뛰어넘는 지역의 다중적 구조: 개항기 조선과 아시아교역권론」, 한국학연구19, 한국학연구소, 2008, 247~248쪽.
8) 증남포부영사, 원산부영사는 ‘화상’(華商)이라고 표현했지만 여기에는 화교상인, 농민, 노동자 등이 모두 포함된다. 증남포부 영사 張國威 → 주한총영사 馬廷亮, 光緖三十三年分甑南浦曁平壤華商人數籍貫事業淸冊, 1907.9.17, 「華商人數淸冊―淸査旅 韓商民案卷」(馬廷亮, 02-35-056-15), 駐朝鮮使館檔(臺灣中央硏究院近代史硏究所檔案館 소장), 55~85쪽(이하 駐朝鮮使館 檔출처 생략); 원산부영사 黎子祥 → 주한총영사 馬廷亮, 1907.10.26, 丁未年元山府華商人民淸冊, 「華商人數淸冊―淸査旅 韓商民案卷」(馬廷亮, 02-35-056-15), 86~93쪽.
9) 朝鮮總督府, 朝鮮總督府統計年報, 各年.
10) 朝鮮總督府, 平壤府(調査資料 第34輯), 朝鮮總督府, 1932, 54쪽.
<표 1> 평양부의 인구수(1912~1942) (단위:명)
연도 조선인 일본인 중국인 기타 외국인 합계 비고
(진남포 화교)
1912 43,250 7,868 647 67 51,832 854
1913 36,680 8,300 501 60 45,541 1,246
1914 34,770 8,635 388 72 43,865 469
1915 36,539 8,670 508 76 45,793 303
1916 37,162 9,023 348 57 46,590 306
1917 45,577 11,609 613 79 57,878 317
1918 48,649 13,429 615 82 62,775 424
1919 51,062 14,878 652 82 66,674 459
1920 54,643 16,289 684 86 71,702 516
1921 60,086 17,731 690 114 78,621 522
1922 66,549 19,157 698 115 86,519 539
1923 73,231 20,991 708 119 22,550 551
1924 80,168 21,672 714 120 102,674 565
1925 85,898 22,527 739 121 109,285 1,017
1926 89,972 23,545 728 126 114,371 1,044
1927 94,439 24,426 732 132 119,729 1,058
1928 100,628 25,559 768 148 127,103 1,072
1929 127,402 27,438 1,321 281 156,442 1,084
1930 116,650 18,157 1,995 125 136,927 1,086
1931 124,156 19,268 655 136 144,215 365
1932 124,620 19,459 1,238 138 145,455 363
1933 129,297 20,052 1,284 138 150,771 484
1934 136,715 20,581 1,604 122 159,022 612
1935 149,363 21,696 1,597 90 172,746 681
1936 155,633 22,852 1,833 103 180,421 725
1937 160,875 23,564 871 109 185,419 289
1938 207,804 25,347 1,456 119 234,726 434
1939 221,367 25,652 2,056 110 249,185 553
1940 253,698 27,635 2,154 30 283,517 705
1941 296,974 29,252 3,154 13 329,393 893
1942 352,914 32,207 3,970 14 389,105 890
<출처> 朝鮮總督府, 朝鮮總督府統計年報, 各年에 의거하여 재구성
1920
년대 후반 화교 인구의 증가는 평양 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확인된다.
11) 그 원인은 조선 측의 유입 요인도 있지만 중국 측의 유출 요인 곧,
산둥 출신의 이주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1920
년대 산둥은 홍 수,
가뭄 뿐 아니라 군벌 전쟁의 피해를 입었다. 1927
년 산둥 출신의 관동(
關東,
만주,
동삼성)
이주가80
만명
, 1928
년100
만 명을 넘은 이유는 이 때문이다.
이들은 생존을 위해 관동을 선택하였고 같은 이유로 식민지 조선을 향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
12) 이들의 대량 유입으로 식민지 조선에서 화교의 정주화가 이루어졌 다.
그 지표는 화교 여성 인구의 증가,
화교학교의 설립 등으로 확인 가능하다.
13)평양화교는 배화폭동의 충격으로
30%
이상 급감했으나1932
년1
천 명을 다시 넘어섰고, 1936
년에는 거 의 폭동 이전 수준을 회복하였다.
중일전쟁으로 다시 급감하였지만1939
년2
천 명을 돌파하고, 1942
년에는4
천 명에 육박하였다.
진남포는 평안도의 전통적 상업중심지 평양을 배후지로 했기에 개항 이후 그 상권을 흡수할 것이라고 기 대하였다
.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진행되지 못했다.
그 연유는 종관열차 경의선 개통과 관련이 있다.
경의선 이1908
년부터 산업철도로 영업을 시작하면서 평양의 수이출입(
輸移出入)
이 수로(
水路)
로 진남포를 거치지 않고,
육로(
陸路)
로 철도를 통해 가능해졌다.
진남포세관 평양출장소의 설치는 이러한 상황을 가속화했다.
14) 따라서 경의선 개통은 평양의 도시 발전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5)진남포 개항 이후 평양과 진남포 간 기선이 운항되었지만 경의선 부설 이후 수로의 비중은 약화되었다
.
이는 평양의 수이출입 무역의 추세에서도 확인된다.
아래<
표2>
는 수로,
육로별 수이출입액을 연도별로 정 리한 것이다.
16)<
표2>
에 따르면,
수이입의 경우1909
년부터 육로의 비중이 줄곧 높았다.
반면 수이출의 경우1914
년까 지는 수로의 비중이 높았지만, 1915
년부터 상황이 역전되었다.
게다가1918
년부터1920
년까지 진남포와 평 양을 오가는 기선이 폐쇄되었다. 1921
년 다시 운항이 재개되었지만 육로의 대세를 바꿀 수는 없었다.
11) 예컨대, 조선 북부 신의주화교는 1928년만 해도 743명에 불과했지만 1929년 부제(府制) 확장으로 1,497명, 1930년에는 1,784명으로 급증하였다. 이은상, 앞의 논문, 2016b, 62쪽. 원산, 청진화교도 1930년 각각 1,186명, 1,348명으로 중일전쟁 이전 최고의 수준을 기록하였다. 이은상, 앞의 논문, 2020, 5쪽.
12) 이은자·오미일, 「1920~1930년대 국경도시 신의주의 華工과 사회적 공간」, 사총 79,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2013, 322~324쪽.
13) 왕언메이(王恩美)(저), 송승석(역), 동아시아 현대사 속의 한국화교: 냉전체제와 조국 의식, 학고방, 2013, 95~97쪽. 평양 에서는 1927년 처음으로 평양화교소학교가 세워졌다. 제2학교는 1928년 동평양(東平壤)화교소학교, 제3학교는 1937년 선 교리에 설립된 선교(船橋)화교소학교이다. 이정희, 「중일전쟁과 조선화교: 조선의 화교소학교를 중심으로」, 중국근현대사 연구35, 중국근현대사학회, 2007, 122쪽.
14) 김동희, 앞의 논문, 124쪽.
15) 평양의 육로 교통 곧, 철도 노선은 다음과 같다. 우선, 조선의 간선인 경의선의 중앙 지점이다. 둘째, 동쪽으로 평양탄광선 은 오노다(小野田)시멘트공장 소재지 승호리(勝湖里)에 이른다. 셋째, 서쪽으로 평남선은 진남포에 이른다. 넷째, 평양과 동 해안의 중요 항구 원산을 접속하는 조선횡단철도 평원선은 1926년 공식적으로 공사가 개시되었다. 평원선이 완공되면 평양 은 동해안의 원산과 연결되고, 동해횡단항로에 의해 우라니혼(裏日本)의 쓰루가(敦賀) 등지를 경유하여 한신(阪神) 지방과 통하며, 함경선으로 중·러 국경과 서로 이어진다. 평양의 수로(水路) 교통으로, 중국의 다롄, 칭다오, 상하이 등 북중국 주 요 도시 및 일본의 시모노세키, 오사카, 고베 등 일본 항구와 연락항로가 있다. 朝鮮總督府, 앞의 책, 1932, 372쪽. 16) 平壤商業會議所, 平壤全誌, 平壤商業會議所, 1927, 394~395쪽.
<표 2> 평양부의 육로(陸路), 수로(水路)별 수이출입액(1909~1926) (단위:엔)
연도 수이출 수이입
육로 수로 계 육로 수로 계 합계
1909 6,681 26,724 33,405 1,298,105 280,398 1,578,503 1,611,908 1910 56,062 555,986 612,048 1,396,051 583,396 1,979,447 2,591,495 1911 69,446 312,171 381,617 1,851,894 624,234 2,476,128 2,857,745 1912 46,874 325,341 372,215 2,082,252 1,143,399 3,225,651 3,597,866 1913 43,372 380,001 423,373 2,336,321 858,243 3,194,564 3,617,937 1914 83,856 200,749 284,605 2,147,429 703,671 2,851,100 3,135,705 1915 263,415 156,457 419,872 2,019,202 534,952 2,554,154 2,974,026 1916 374,464 77,303 451,767 2,616,064 616,634 3,232,698 3,684,465 1917 451,500 55,572 507,072 4,073,489 747,651 4,821,140 5,328,212 1918 432,264 0 432,264 7,282,105 56,595 7,338,700 7,770,964 1919 680,393 0 680,393 12,333,094 199,710 12,532,804 13,213,197 1920 2,029,425 0 2,029,425 11,269,265 70,038 11,339,303 13,368,728 1921 1,266,730 110,000 1,376,730 8,850,141 531,754 9,381,895 10,758,625 1922 1,476,067 678,896 2,154,963 8,554,648 1,824,456 10,379,104 12,534,067 1923 1,772,594 130,828 1,903,422 6,408,529 1,576,971 7,985,500 9,888,922 1924 1,966,100 891,405 2,857,505 7,057,519 3,833,476 10,890,995 13,748,500 1925 2,807,728 385,256 3,192,984 9,408,180 2,173,069 11,581,249 14,774,233 1926 2,592,073 361,693 2,953,766 9,375,894 1,962,819 11,338,713 14,292,479
<출처> 平壤商業會議所, 平壤全誌, 394~395쪽.
<비고> 원자료의 숫자 오기를 정정하여 재구성
이러한 상황은 진남포와 평양화교의 규모에 반영되었다
. <
표1>
에 따르면, 1915
년을 기점으로 평양이 앞 서기 시작하였고, 1925
년부터 진남포에 역전되었으나1929
년을 기점으로 다시 급증하여 그 지위를 유지하였 다. 1942
년 평양화교는3,970
명으로 최고를 차지하는데,
당시 진남포는890
명에 불과하였다.
<
표2>
에 따르면, 1909
년 수이출입 합계는161
만 엔에서 출발하였지만, 3
년 뒤1912
년에는359
만 엔으 로2
배 이상 증가하였다.
그 뒤 변동이 크지 않았으나1917
년532
만 엔, 1918
년777
만 엔, 1919
년1,321
만 엔으로 급증하였다.
그 이유는 다음 두 가지 요인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선, 1911
년 신의주와 안둥(
安東)
을 잇는 압록강철교가 완공되면서 조선의 경의선과 중국의 안봉철도(
安東―奉天)
가 연결되었다.
17) 이는 경의선의 중앙 지점에 위치한 평양의 수이출액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제
1
차 세계대전에 따른 호황과 그 여파이다. 1
차 대전을 계기로1910
년대 중,
후반 조선 에서 공장 설립이 급증하는 현상을 보이는데,
평양의 경우 특히 두드러졌다.
평양 조선인자본가는 전쟁의 영 향으로 수입대체공업에 관심을 갖고 자기제조업,
제사업,
연초업,
제지업 등 제조업에 투자하였다.
일본 자본 은 전쟁의 호황으로 축적된 자본의 투자처로 평양을 주목하고 전기회사,
병기제조공장,
광업소,
조선소,
시멘 트공장 등을 설립하였다.
18)수이출과 수이입 상황을 살펴보면
, 1918
년 수이입은733
만 엔이지만 수이출은43
만 엔으로 수이입의6%
정도에 불과하였다
.
그러나1920
년 처음으로 수이출이200
만 엔을 넘었고, 1925
년에는300
만 엔을 돌파하 였다.
전체적으로 수이입이 많고 수이출이 매우 적은 편무적 무역 상태를 보이고 있지만,
각종 산업의 개발,
공업의 발흥으로 점차 수이입,
수이출이 모두 증가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19)수이출입의 증가는 평양이1910
년대 후반 제1
차 대전의 호황 이후 공업도시로 주목을 받게 된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사실 평양은 전력,
원료,
용수,
노동력의 측면에서 공업에 유리한 천혜의 자연적 조건을 갖춘 도시이다.
20) 대공업은 모두 일본 인이 경영하였지만,
정미업,
고무공업,
양말공업,
철공업 등 중소 제조공업은 조선인 경영이 더 큰 비중을 차 지하였다.
이런 연유로 평양은 다른 도시와 달리 조선인의 공업도시라는 특징을 갖는다.
21)그러면 조선인의 공업도시 평양에서 화교의 위상은 어떠했을까.
다음 장에서 구체적으로 검토해보자.
Ⅲ. 평양화교의 직업별 현황과 경제력
1. 평양화교의 직업별 현황
1920
년대 평양화교의 직업별 현황을 평양부 거주자 전체와 비교해보자.
아래<
표3>
은1922
년 평양부 거주자의 직업별 분류표이다.
22)우선
,
민족별 현황을 살펴보면 일본인은 상업교통업이 가장 높고,
그 뒤로 공무자유업,
공업,
기타유업자,
중국인은 상업교통업을 필두로 공업,
공무자유업,
기타유업자 순이다.
조선인은 상업교통업을 선두로 기타유 업자,
공무자유업,
공업이 뒤를 이었다.
직업별로 상업교통업 비중은 중국인(48%),
일본인(39.2%),
조선인(33.7%),
공업 비중은 일본인(24.5%),
중국인(20.2%),
조선인(15.6%)
순으로,
상업교통업은 중국인,
공업 은 일본인의 비중이 높았다.
17) 이은상, 앞의 논문, 2016b, 55쪽.
18) 오미일, 앞의 논문, 2007, 117~122쪽; 오미일, 앞의 논문, 1994, 202~214쪽. 19) 平壤商業會議所, 앞의 책, 389~390쪽.
20) 위의 책, 522쪽.
21) 평양 조선인공업의 대표적인 3대 업종은 고무, 양발, 정미업이다. 이상 1920년대 평양의 조선인공업에 대한 구체적 내용은 다음 연구성과를 참고하라. 오미일, 앞의 논문, 1994, 193~233쪽.
22) 平壤府, 平壤府事情要覽, 平壤府, 1923, 52~53쪽.
<표 3> 평양부 거주자의 직업별 분류(1922)
민족별 일본인 조선인 중국인
분류 호수(호) 인구(명) 비율(%) 호수(호) 인구(명) 비율(%) 호수(호) 인구(명) 비율(%)
농업
/
목축업95 299 1.6 394 2,037 3.1 8 22 3.2
어업
/
제염업14 69 0.3 55 380 0.6 0 0 0
공업
1,596 4,695 24.5 2,795 10,403 15.6 45 141 20.2
상업
/
교통업2,108 7,514 39.2 4,676 22,426 33.7 89 335 48.0
공무/
자유업1,438 5,021 26.2 2,495 12,506 18.8 32 105 15.0
기타 유업자
169 951 5.0 3,293 14,025 21.0 27 91 13.0
무직
/
未신고자146 608 3.2 1,603 4,772 7.2 4 4 0.6
합계
5,566 19,157 100 15,311 66,549 100 205 698 100
<출처> 平壤府, 平壤府事情要覽, 52~53쪽 표를 재구성
<표 4> 평양부 거주자의 직업별 분류(1929)
민족별 일본인 조선인 중국인
분류 호수(호) 인구(명) 비율(%) 호수(호) 인구(명) 비율(%) 호수(호) 인구(명) 비율(%)
농업
/
목축업71 308 1.1 3,443 20,060 15.7 58 449 34.0
어업
/
제염업9 53 0.2 64 263 0.2 0 0 0
공업
801 3,736 13.6 3,130 15,535 12.2 59 148 11.2
상업
/
교통업2,968 9,649 35.1 6,594 35,999 28.3 345 609 46.1
공무
/
자유업1,596 5,186 18.9 2,860 10,829 8.5 14 46 3.5
기타 유업자
2,315 7,240 26.4 10,104 36,350 28.5 24 64 4.8
무직
/
未신고자360 1,284 4.7 2,198 8,366 6.6 2 5 0.4
합계
8,120 27,456 100 28,393 127,402 100 502 1,321 100
<출처> 朝鮮總督府, 平壤府(調査資料 第34輯), 55~56쪽 표를 재구성
<
표4>
는1929
년 평양 거주자의 직업별 분류표이다.
23) 우선,
민족별로 일본인은 상업교통업,
기타유업자,
공무자유업,
공업,
중국인은 상업교통업을 선두로 농업목축업,
공업,
기타유업자가 뒤를 이었다.
조선인은 기 타유업자가 가장 높고,
상업교통업,
공업,
공무자유업으로 이어졌다.
직업별로 보면 공업은 일본인(13.6%),
조선인(12.2%),
중국인(11.2%)
이 비슷한 규모이고,
상업교통업은 중국인(46.1%),
일본인(35.1%),
조선인(28.3%)
순으로 중국인 비중이 높았다.
중국인의 경우 농업 비중이 조선인과 일본인을 훨씬 앞서고 있음도23) 朝鮮總督府, 앞의 책, 1932, 55~56쪽.
주목된다
.
이상
1920
년대 평양부 거주자의 직업별 현황에서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공업 종사자의 비율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1922
년에는 일본인,
중국인,
조선인의 비중 차이가 각각5%
정도였지만, 1929
년 에는 거의 차이가 없었다.
조선인의 공업도시 평양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중국인의 농업종 사자 비율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24) 이러한 상황은 화교사회에서 화농의 세력화로 이어진다(
후술).
2. 평양화교의 경제력
우선
, 1923
년 조선총독부 조사 자료를 중심으로 평양화교의 상공업 현황을 검토해보자.
25)<표 5> 평양부 주요 화교 상업 상황(1923)
상호 업종 경영자 과세표준액(만엔)
1
春盛永 직물수입상 梁鳳坡15.6
2
春盛興 직물수입상 劉聿軒14.0
3
德盛號 직물수입상 王鼎元13.4
4
謙合盛 직물수입상 王鈺13.4
5
慶興德 수입잡화상/
도소매상 孟憲時33.9
6
泰安洋行 수입잡화상/
도소매상 楊培昌18.5
7
德興裕 잡화소매상 程肅泰10.0
<출처> 朝鮮總督府, 朝鮮に於ける支那人, 156~157쪽에 의거하여 재구성
<비고> 과세표준액 1만엔 이하는 생략
잡화소매상으로 과세표준액 1만엔 이상은 5호임. 상호명이 확인되지 않는 4호는 생략 4번, 7번 상호명은 <표 7>(후술)에 의거함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평양화상의 주류는 직물수입상이다
. <
표5>
에서 춘성영(
春盛永),
춘성흥(
春盛興),
덕성호(
德盛號),
겸합성(
謙合盛)
등4
호가 대표적이다.
26) 직물상이 취급하는 상품은 거의 대부분 인천,
경성 의 화상을 경유하여 판매되었다.
직물수입상 외에 수입잡화상으로 경흥덕(
慶興德),
태안양행(
泰安洋行)
등2
호가 있다.
이들 직물수입상4
호,
수입잡화상2
호가 화교 상업을 주도하였다.
24) <표 4>에서 중국인 농업종사자 호수는 58호인데 인구는 449명으로 기재되었다. 호수에 비해 인구수가 지나치게 많다. 상 업교통업의 경우 345호 609명, 공업의 경우 59호 148명으로 인구수는 호수의 2~3배 정도이다. 농업종사자 인구 449명 (34.0%)은 과장되었거나 아니면 숫자의 오류로 추정된다. 그러나 평양화교의 구성원 중 농업종사자의 비중이 높음을 짐작 할 수는 있다.
25) 朝鮮總督府, 朝鮮に於ける支那人, 朝鮮總督府, 1924, 156쪽.
26) 1923년 조선총독부 자료에서는 ‘德盛號王鈺’의 상호명을 병기하고 있지만, 일본 상업신흥소(商業信興所)가 발행하는 商工 資産信用錄」 1922년 조사 자료에 의하면, 덕성호는 왕정원(王鼎元), 겸합성은왕옥을 각각 경영자로 명기하고 있으므로 구 분하였다. 商工資産信用錄 조사 자료는 이정희의 저서를 참고할 것. 李正熙, 앞의 책, 附表(이하 출처 생략).
흥미로운 사실은 수입잡화상의 과세 규모가 오히려 직물수입상을 능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
예컨대,
중국 인 최고 납세자는 영업세와 시가지세의 경우 태안양행의 양배창(
梁培昌),
가옥세와 호별세의 경우 경흥덕의 맹헌시(
孟憲時)
이다.
27)<표 6> 평양부 중국인 공장 상황(1922~1923)
상호 종류 위치 경영자 직공수(명) 1년생산고(만엔) 창립년도
1
雙和利 주물 柳町 賈廣發20 2.0 1921
2
雙盛公 주물 柳町 韓文財32 1.3 1921
3
雙盛東 주물 黃金町 朱莊臣26 2.0 1922
4
주물 柳町 苗芝蓉20 1.0
5
公和昌 목공 水玉里 劉乾信4
6
소맥제조 景昌里 金明一7 0.7
<출처> 朝鮮總督府, 朝鮮に於ける支那人, 158쪽; 平壤府, 平壤府事情要覽, 165~167쪽.
<비고> 3번 상호명은 <표 8>(후술)에 의거함
<
표6>
에 따르면, 1923
년 중국인 공장으로 목공장,
주물공장,
소맥제조공장 등을 확인할 수 있다.
28) 성격 상 제조와 판매를 겸하기 때문에 상업에도 포함된다.
주물공장4
호의1
년 생산고는2
만~1
만 엔이고,
기타 목공장과 소맥제조공장의 생산고는1
만 엔 미만으로 추정된다.
다음으로
, 1920
년대 후반 화교의 경제력을 검토해보자.
관련 자료는 첫째, 1928
년 경성상업회의소 조사 자료,
29) 둘째,
일본 상업신흥소(
商業信興所)
가 발행하는 상공자산신용록(
商工資産信用錄)
조사 자료이다.
1923
년 직물수입상4
호,
수입잡화상2
호(<
표5>
참고)
는1920
년대 후반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
앞서1923
년 조선총독부 자료에 의하면 평양의 화교직물상이 취급하는 상품은 대부분 인천,
경성의 화상을 경유 하여 판매되었다.
그런데1927
년 평양상업회의소 자료에 의하면 평양 화교상인은 기존과 마찬가지로 경인 화상과 거래하고 있지만,
일본의 한신 지방 화교상인과도 네트워크를 형성하였고,
상하이,
타이완 항로가 개 시되면서 그들 지역 상인과도 제휴하였다.
30)주지하듯이
1924
년 조선총독부의 사치품 관세 조정 정책으로 중국산 주단을 취급하는 화교직물상은 타격 을 입었다.
이에 조선의 화교직물상은 사치품에 해당되지 않는 중국산 마포 외에,
일본 한신 지방에서 생산 된 견직물,
면직물 등을 취급하였다.
평양의 화교직물상 역시 유통망을 확대하여 일본산 제품을 판매함으로 써 위기에 대처하려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31)27) 朝鮮總督府, 앞의 책, 1924, 153~154쪽. 28) 위의 책, 158쪽; 平壤府, 앞의 책, 165~167쪽.
29) 京城商業會議所(編), 「朝鮮に於にる外國人の經濟力」, 朝鮮經濟雜誌 159, 1929.
30) 平壤商業會議所, 앞의 책, 364쪽.
31) 원산, 신의주 화교직물상의 대응 방식에서도 확인된다. 이은상, 앞의 논문, 2016b, 72쪽; 이은상, 2016c, 102~103쪽; 宋伍
<표 7> 평양부 주요 화교 상업 상황(1928~1929)
京城商業會議所 조사 자료(1928) 商工資産信用錄 조사 자료(1929)
상호 업종 소재지 대표자 연간매상액
(만엔) 상호 업종 대표자 추정자산
(만엔)
1
春盛永 견면포 도매 鷄里 梁鳳坡30.6
春盛永 직물 張景賢2.0~3.5
2
德盛號 견면포 도매 竹典里 王鼎元30.0
德盛號 직물 王鼎元2.0~3.5
3
謙合盛 견면포 도매 竹典里 王鈺44.9
謙合盛 직물 王鈺5.0~7.5
4
同源興 견면포,
마포도매 竹典里 王融寶
37.8
5
慶興德 식료잡화 도매 履鄕里 孟憲時27.0
慶興德*
양말 제조 孟憲時10.0~15.0
6
泰安洋行 서양잡화 도소매 巡營里 楊培昌 도매0.65
소매
4.50
泰安洋行 서양 잡화 楊培昌2.0~3.5
7
永興德 잡화도매 履鄕里 劉子平17.0
永興德 잡화 劉子平5.0~7.5
8
德興裕 식료잡화 소매 衙廳里 程肅恭2.0
9
源興德 잡화도매 里門里 劉德增5.8
源興德 잡화 劉德增2.0~3.5
9-1
잡화소매 竹典里 劉聿軒1.0
10
黃興福 잡화소매 旭町 杜廷和1.0
11
寶聚永 식료잡화 소매 泉町 宋貴浦1.0
12
義昌棧 잡화소매 水玉里 張寶亭2.3
義昌棧 잡화 張寶亭2.0~3.5
<출처> 京城商業會議所(編), 「朝鮮に於にる外國人の經濟力」; 商工資産信用錄, 1929년 조사 자료
<비고> 京城商業會議所 조사 자료 중 연간생산액 1만엔 이하는 생략
商工資産信用錄 조사 자료 중 추정자산액 1만엔 이하는 생략 / 慶興德의 조사일은 1928년 4월
<
표7>
에 따르면,
직물상으로 춘성영(1
번)
의 연간매상액은30.6
만 엔,
덕성호(2
번)
는30
만 엔,
겸합성(3
번)
은44.9
만 엔으로 선두 그룹을 이루고 있다.
특히,
겸합성은 본점은 진남포에 있고 지점이 평양에 있다. 1923
년 진남포의 겸합성 본점의 과세표준액이7.4
만 엔이므로 그 규모가 크다고 볼 수는 없다.
32) 그러나1928
년 평양 지점의 연간매상액이 수위를 차지한 것으로 보아 상세가 비약적으로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
직물상’
춘성흥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후술할<
표8>
에서 춘성흥은 당면제조업으로 기재되었다(<
표8> 6
번, 6-1
번).
춘성흥은1920
년대 후반 직물상으로 상세가 약화되어 소맥제조업을 겸업했을 가능성 이 있다.
33)强, 앞의 논문, 2010, 46~48쪽. 32) 朝鮮總督府, 앞의 책, 1924, 168쪽.
33) 商工資産信用錄1922년, 1925년 조사 자료에서 춘성흥은 직물상으로 경영자는 유경수(劉敬修)로 기재되었다. 따라서 최 소한 1925년까지 춘성흥은 직물상으로 경영자는 유경수 혹은 유율헌(劉聿軒)이다. 그런데 후술할 <표 8>에 의하면, 1928~1929년 당시 춘성흥은 소맥제조업(2호)을 운영하였고 경영자는 각각 유경수, 유율헌이다. 이 두 사람은 친인척 혹은
‘
직물상’
춘성흥을 대신하여 직물상 동원흥(
同源興, 4
번)
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동원흥은1923
년 조선총독 부 자료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34) 상공자산신용록1922
년, 1925
년 조사 자료에 등장한다.
후술하겠지만1919
년 중화상회 회동(
會董)
으로 동원흥 경영자2
명이 이름을 올렸다. 1928
년 연간매상액은37.8
만 엔으로 겸합성의 뒤를 이어 두 번째를 차지한다.
따라서 동원흥은1920
년대 유력한 직물도매상의 위상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
표7>
에서1920
년대 후반 대표적인 직물도매상으로 춘성영,
덕성호,
겸합성,
동원흥 등4
호를 확인할 수 있다.
평양부는 다른 지역과 달리 화교직물도매상과 조선인 직물소매상 간의 거래가 조선인 중신조합
(
仲信組合)
을 통해 이루어졌다.
소매상은 중신조합을 통해 직물을 공급받아 판매하였는데,
화교도매상과 중신조합,
중 신조합과 조선인소매상 간에 대금 지불 기간과 중계료 등을 둘러싸고 대립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35) 평양 직물업계에서 화교직물상4
호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사례이다.
36)1923
년 조선총독부 자료에서 잡화상2
호는 경흥덕과 태안양행이다.
이 중 경흥덕의 경영 형태는 흥미롭 다.
경흥덕은 상공자산신용록1918
년 조사 자료에서 조선인 상대 잡화상으로,
경영자는 맹헌시이다.
그런 데 같은 자료에서 선천(
宣川)
의 경흥덕(
경영자 孟憲謨)
을 확인할 수 있다. 1921
년 조사 자료에서는 강경(
江 景)
의 경흥덕(
경영자 劉墨齊)
이 보인다.
따라서 경흥덕은 평양을 중심으로 선천,
강경에 지점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표7>
에 의하면 경흥덕은 식료잡화도매업을 하면서 동시에 양말제조업을 겸하고 있다.
경 영자는 모두 맹헌시이다(5
번).
그 이유는 무엇일까.
1925
년4
월 평양양말직공조합은 임금 인하를 반대하고 중국인노동자 고용에 반대하는 회의를 개최하였 다.
그리고 중국인노동자를 채용한 공신상회(
共信商會)
를 타겟으로 직접 행동에 나섰다.
공신상회는 평양의 대표적인 조선인 양말제조공장이다.
경흥덕은 경영이 어려워진 공신상회에 자금을 융통해주었다.
이에 공신 상회는 자금을 대부받는 조건으로 실직한 중국인10
명을 고용하고 공장명을 경흥공창(
慶興工廠)
으로 바꾸었 다.
또한1928
년에 설립된 경흥덕공창(
慶興德工廠)
에도 경흥덕의 자금이 투입되었다.
37) 경흥덕의 업종이 양 말제조업으로 기재된 이유는 이 때문이다.
평양의 화교직물상은 평양 직물업계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조선 북부지역 화교상인 네트워크의 거점 역할을 하였다
.
대표적인 사례로 신의주에서 화교제조업자가 생산한 양말은 이들을 통해 전 국에 판매되었다.
신의주 화교양말제조업자와 거래하였던 평양화교상점으로 춘성영,
춘성흥,
덕성호,
겸합성,
동업자 관계로 추정된다. <표 7>에서 유율헌은 원흥덕(源興德, 잡화소매, 9-1번)의 경영자로 등장하는데, 원흥덕과 춘성흥 이 어떤 관계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34) 동원흥은 1923년 조선총독부 자료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1923년 외국인무역상과 조선인포목상 간에 상품 대금의 지불기간 을 단축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이견이 발생했을 때 외국인무역상을 대표하는 상호로 거론되었다. 「平壤布木商會, 對外國人貿 易商問題」, 동아일보 1923.7.11.
35) 李正熙, 앞의 논문, 2012, 471쪽.
36) 이러한 상황은 배화폭동 직전 시기까지 계속된다. “평양의 조선인포목상 상대로 중국인 포목무역상 4명과 일본인 2명이 최 근 평양포목상보다 지방에 있는 포목상에게 차별적 가격으로 공급하고 부내에서도 다시 전에 하지 않던 소매를 개시하여 가지고……(이하 중략)”「中國貿易商의 專橫에 六十布木商 蹶起」, 동아일보1931.1.27.
37) 李正熙, 앞의 책, 219~223쪽.
경흥덕
,
태안양행 등 직물상과 잡화상이 확인된다.
38) 또한 경흥덕의 사례에서 화교상인이 직접 양말제조업 을 겸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표7>
에서 새롭게 확인할 수 있는 잡화도매상2
호가 있다.
하나는 영흥덕(
永興德, 7
번)
으로 경영자는 유 자평(
劉子平)
이다.
태안양행(6
번)
과 비교하여 연간매상액,
추정자산액 규모가 훨씬 크다.
영흥덕은1923
년 조선총독부 자료,
상공자산신용록1922
년, 1925
년 조사 자료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1920
년대 후반부터 태안양행을 능가하는 잡화도매상으로 부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원흥덕
(
源興德, 9
번)
으로 경영자는 유덕증(
劉德增)
이다.
원흥덕의 연간매상액과 추정자산 액은 태안양행과 비슷한 규모이다.
영흥덕과 마찬가지로1920
년대 초반 자료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새롭게 부각된 영흥덕의 유자평,
원흥덕의 유덕증은 중화상회 임원으로 선출되었다(
후술).
<표 8> 평양부 중국인 경영 공장 현황(1928~1929)
공장명 업종 소재지 대표자 자본금(엔) 직공수(명) 수량가액(엔) 추정자산(만엔)
1
永盛公 철공장 黃金町 韓文生3,500 20 24,000
2
雙盛公 철공장 柳町 韓文財5,000 20 25,000
3
雙盛東 철공장 黃金町 朱莊臣4,000 27 24,000
4
永昌合 철공장 柳町 鮑羽臣4,000 22 25,000
5
雙和利 철공장 柳町 賈廣發3,000 25 25,000 0.3~0.5
6
春盛興 소맥제조 府外 箕林里 劉敬學5,000 13 9,000
6-1
春盛興 소맥제조 劉聿軒2.0~3.5
7
소맥제조 府外 箕林里 楊培昌5,000 15 1,000
<출처> 京城商業會議所(編), 「朝鮮に於にる外國人の經濟力」; 商工資産信用錄, 1929년 조사 자료
<
표8>
은1920
년대 후반 중국인 경영 제조업 상황이다.
39)앞서 언급했듯이 제조와 판매를 겸하였기 때문 에 상업의 성격도 갖고 있다.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
표8>
에 의하면 유율헌의 춘성흥(6-1
번)
추정자산액은2.0~3.5
만 엔이다.
소맥제조업 경영만으로 획득하기에는 적지 않은 자산 규모이다.
직물상 과 소매제조업을 겸업하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아닐까.
또한 서양잡화를 취급하는 태안양행의 양배창
(
楊培昌, <
표7> 6
번)
이 소맥제조공장의 경영자로 기재되어 있음도 흥미로운 사실이다(<
표8> 7
번).
양배창은 미국인이 설립한 태안양행에서20
년 이상 경리로 재직하 였다.
40) 따라서 태안양행의 경리로 있으면서 소맥제조공장을 같이 운영한 것으로 짐작된다.
38) 위의 책, 231~234쪽.
39) 京城商業會議所(編), 앞의 논문; 商工資産信用錄, 1929년 조사 자료.
40) 「平壤刦餘調査錄」, 上海新聞報1931.7.30., 中國國民黨中央委員會黨史史料編纂委員會(編), 革命文獻33, 臺北: 中央文 物供應社, 1964, 687쪽.
1927
년 평양상업회의소 자료에 의하면 평양부 담세자와 영업세액을 조선인,
일본인,
중국인별로 확인할 수 있다.
41)<표 9> 평양부 거주자, 담세자와 영업세액(1927)
거주자 총수(명) 담세자(명) 담세자 비율(%) 영업세 총액(엔) 영업세 총액 부담률(%)
1인당 평균 부담액(엔)
조선인
38,105 1,129 2.96 13,444 32.4 11.97
일본인
11,156 794 7.1 25,819 62.1 32.51
중국인
619 64 10.34 2,285 5.5 35.64
<출처> 平壤商業會議所, 平壤全誌, 408~409쪽의 표를 재구성
<비고> 거주자 총수는 상업과 교통업, 목축과 목축업, 공업에 종사하는 남녀 수 계산 / 공무자유업, 무직자, 기타유업자 제외 거주자 총수 중 담세자 비율, 영업세 총액 부담률은 원자료의 오기를 정정하여 재계산
영업세 부담 기준은 연수 2천 엔 이상
<
표9>
에 의하면 평양부 거주자의 영업세 총액(41,548
엔)
부담률 순위는 일본인(62.1%),
조선인(32.4%),
중국인(5.5%)
이다.
반면 담세자 비율은 중국인(10.34%),
일본인(7.1%),
조선인(2.96%)
순이다. 1
인당 평균 부담액은 중국인(35.64
엔),
일본인(32.51
엔),
조선인(11.97
엔)
순으로,
중국인이 일본인을 약간 앞서고 조선 인의3
배를 넘는다.
42) 말하자면 중국인이 거주자 총수 중 담세자 비율, 1
인당 영업세 평균부담액이 일본인,
중국인에 비해 높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자료를 통해1920
년대 후반 평양부에서 화교상인의 경제력을 짐 작할 수 있다.
Ⅳ. 평양화교와 중화상회
평양에 화교조직이 만들어진 시점은 언제일까
.
중화민국이 들어서면서 중화민국 정부는,
기존의 중화회관(
中華會館),
중화공소(
中華公所),
서보사(
書報社)
등은 대표를 선출하여 인가를 받아야 한다고 명하였다.
평 양 화상공회(
華商公會)
는 청나라 말기1902
년(
光緖28
年)
에 성립되어 대표자인 동사(
董事)
를 선출한 바 있 다.
정부의 명에 따라1912
년 말 화상공회는 대표를 선출하고 인가를 요청하였다.
43) 다만,
평양 화상공회가 대표를 선출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그 조직과 대표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찾을 수 없다.
근대 상회의 설립은
1904
년(
光緖30
年)
공포된‘
상회간명장정’(
商會簡明章程)
에 의거한다.
조선에서는 이41) 平壤商業會議所, 앞의 책, 408~409쪽.
42) “중국상인 세력은 날로 강해져 조선인 상대의 잡화도매, 시장 순회의 소매상 뿐 아니라 각 방면에 손을 뻗쳐, 심지어는 일본 인 상대의 식료 잡화소매까지도 침식하였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위의 책, 410쪽.
43) 증남포부영사 張國威 → 조선총영사 馬廷亮, 1912.12.26., 「各口商務情形―商務報告」(二)(馬廷亮, 02-35-056-18), 90~91쪽.
성명 원적 주소 업종 상호명 직위
1
徐秉銑 山東 福山 竹典里 주단 德盛東 會長2
孟憲詩 奉天 履鄕里 잡화 慶興德 副會長3
梁樹慶 山東 牟平 鷄里 주단 春盛永會董
4
王鈺 山東 福山 竹典里 주단 謙合盛5
黃克基 山東 牟平 館後里 주단 德成和6
劉敬修 山東 牟平 鷄里 주단 春成興7
鍾寶林 山東 牟平 竹典里 주단 同成和8
孫建恩 山東 牟平 鷄里 주단 同源興9
荊光儀 山東 福山 鷄里 주단 源生祥10
楊培昌 山東 文登 巡營里 양화(
잡화)
泰安洋行11
張金益 山東 榮成 水玉里 잡화 義昌棧12
張城賓 山東 牟平 鷄里 주단 春盛永13
宋元彩 山東 榮成 鷄里 주단 德成和14
鄒安平 山東 黃縣 衙廳里 잡화 恒盛永15
王維法 山東 牟平 鷄里 주단 永成和16
鄭士魁 山東 黃縣?
주단 乾太和17
徐秉鑑 山東 牟平?
주단 德盛興장정에 의거하여 최초로 경성
,
이어서 인천에서 상무총회가 만들어졌다.
중화민국 정부는1915
년12
월 상회 법(
商會法)
을 공포하여 기존의 상무총회를 총상회(
總商會)
로 개칭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경성,
인천을 비롯 하여 전국 각지의 화교조직은 중화(
총)
상회로 개조되었다.
44)그러면 평양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
평양을 관할하는 진남포부영사의 보고에 의하면,
평양의 화상공회는 상회법에 따라1916
년12
월 중화상회로 개조되었고1917
년1
월 정부의 인가를 받았다.
45)아쉽게도 상회의 장정(
章程),
당선된 임원 이력에 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46) 다만, 2
년 뒤 임기가 만료된 이후 선거인단 의 부족으로5
개월 뒤(1919
년5
월)
임원을 선출하였는데 이 명단은 남아있다.
47)<표 10> 평양중화상회 임원 명단(1919.5)
44) 이정희·송승석, 근대 인천화교의 사회와 경제: 인천화교협회소장자료를 중심으로, 학고방, 2015, 201쪽. 45) 진남포부영사 胡襄 → 조선총영사 富士英, 1917.2.14., 「各華商會選擧及改組」(1917年, 03-47-045-01), 15쪽.
46) 평양중화상회의 조직과 기능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찾지 못했다. 조선을 대표하는 경성중화상회의 구조와 기 능 등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문을 참고하라. 김희신, 「재조선 중화상회의 설립과정과 존재 양태: 1912~1931년 경성지역을 중심으로」, 중국근현대사연구 73, 중국근현대사학회, 2017.
47) 진남포부영사 胡襄 → 조선총영사 王守善, 1919.6.26., 「商會改選會員」(1919年, 03-47-070-01), 3~6쪽.
성명 원적 주소 업종 상호명 직위
18
王鐸 山東 福山?
주단 同順福會董
19
王熙樂 山東 海陽 鷄里 주단 同源興20
劉景海 山東 牟平 竹典里 주단 同成和21
劉景貴 山東 牟平 竹典里 건축22
姜鴻恩 山東 捿霞 평양 시외 농업23
曹慶恭 山東 榮成 평양 시외 농업24
丁維鑒 山東 日照 평양 시외 농업25
黃鳴西 山東 日照 평양 시외 농업<출처> 진남포부영사 胡襄 → 조선총영사 王守善, 1919.6.26., 「商會改選會員」(1919年, 03-47-070-01), 3~6쪽.
<
표10>
에 따르면1919
년 당시 중화상회 임원은 전체25
명이다.
이와 관련하여 몇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직물상이 대부분으로16
호,
잡화상은4
호이다. 1923
년 조선총독부 자료에 따르면 대표적 직물도 매상은 춘성영,
춘성흥,
덕성호,
겸합성이다. <
표10>
에서 덕성호를 제외하고3
호를 확인할 수 있다.
중화상 회 회장은 덕성동(
德盛東)
의 서병선(
徐秉銑)
으로 기재되었는데 구체적 이력은 확인되지 않는다.
48) 부회장은 경흥덕의 맹헌시이다.
경흥덕은 평양화교를 대표하는 수입잡화상으로 앞서 서술하였다.
다음으로
, 16
호의 직물상 중 중복되는 상호명이 확인된다.
예컨대 춘성영,
동원흥,
동성화(
同成和),
덕성화(
德成和)
는 각기2
명이 회동(
會董)
으로 이름을 올렸다.
49) 춘성영,
동원흥은1920
년대 평양을 대표하는 화교 직물상으로 앞서 서술하였다.
반면,
동성화,
덕성화에 관한 이후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50) 수입잡화상 태 안양행에 관해서도 앞서 언급하였다.
셋째로
,
농업종사자4
명이 포함되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51) 앞서1920
년대 중국인의 직업별 분류에 서 농업종사자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음을 언급하였는데,
화농이 화교사회에서 일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음 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상호의 주소를 살펴보면 죽전리5
호(
竹典里, 1
호는 건축),
계리(
鷄里) 8
호,
평양 시외4
호(
농업종사자),
그 외 이향리(
履鄕里),
관후리(
館後里),
순영리(
巡營里),
수옥리(
水玉里),
아청리(
衙廳里)
각1
호이다(
나머지3
호는 동일 주소이나 한자 확인 불가능).
주요 화교 상호는 일본인 거주지역 신시가지가 아48) 상공자산신용록1915년 조사 자료에서 직물상 덕성동(德盛東)의 경영자는 서자성(徐子聲)으로 기재되었다. 1919년 중화 상회 회장 서병선(徐秉銑)과 서자성은 친인척 관계로 짐작되는데, 이후 자료에서 상호 덕성동, 경영자 서병선 혹은 서자성 은 확인되지 않는다.
49) 춘성영(3번 梁樹慶, 12번 張城賓), 동원흥(8번 孫建恩, 19번 王熙樂), 동성화(7번 鍾寶林, 20번 劉景海), 덕성화(5번 黃克 基, 13번 宋元彩) 등이다.
50) 덕성화는 商工資産信用錄1917년 조사 자료에 기재되었다. 그러나 이후 자료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동성화 관련 기록은 전무하다.
51) <표 10>에서 정유감(丁維鑒, 24번)은 농업 종사자로 기재되었으나 1923년 조선총독부 자료에는 목욕업 경영자로 과세표준 액 3,150엔이라고 하였다. 조선총독부, 앞의 책, 1924, 157쪽. 최소한 1923년 시점에서 농업에서 목욕업으로 업종을 전환 하였던가 아니면 두 가지를 같이 경영하는 것으로 추정 가능하다.
성명 원적 상호 업종 직위 비고
1
孟憲時 遼寧 莊河 慶興德 잡화 주석‒
1917~1919
년 會董‒
1920
년 개조로 特別會董‒
1922
년11
월3
等獎章‒
1924
년 부회장‒
1927
년 회장‒
1929
년 특별회동2
張景賢 山東 牟平 春盛永 직물 상무집행위원 ‒1922
년11
월3
등장장‒
1929
년 특별회동3
劉子平 山東 榮成 永興德 잡화 상무집행위원 ‒1927
년 부회장‒
1929
년 특별회동4
劉聿軒 山東 牟平 春盛興 직물/
소맥제조 상무집행위원5
王壽廷 山東 牟平 謙合盛 직물 상무집행위원6
劉德增 山東 榮成 源興德 잡화 집행위원7
劉景貴 山東 牟平 건축업 건축 집행위원8
鄭肅恭 山東 黃縣 德興裕 식료잡화 집행위원 ‒1925
년 부회장‒
1929
년 회동9
姜鴻恩 山東 捿霞 鴻陞樓 요리 집행위원‒ 현 평양 中華料理同業公會 주석
‒ 전임 평양 中華料理組合 조합장
5
차 피선‒
1929
년 회동10
許維敏 山東 榮成 東興德 잡화 상무감찰위원 ‒1929
년 회동11
黃振堂 山東 榮成 泰源樓 요리 감찰위원 ‒ 현 평양 중화요리동업공회 상무위원‒
1929
년 회동12
于東山 山東 牟平 東華園 요리 감찰위원13
賈廣發 河北 交河 雙和利 주물 감찰위원 ‒1929
년 회동니라 조선인 거주지역 구시가지에 있음이 확인된다
.
난징국민정부는 앞의 상회법을 개정하여
1929
년8
월 신상회법(
新商會法)
을 공포하였다.
그에 따라 기존의 동사제(
董事制)
대신 위원제(
委員制)
가 도입되었다.
52) 신상회법에 의거하여 선출된 평양중화상회 임원 명단 은 다음과 같다.
53)<표 11> 평양중화상회 임원 명단(1930.2)
52) 신(新)상회법에 따르면, 각급 상회는 기존의 정, 부회장과 회동(會董)을 두지 않고, 회장 대신 주석(主席), 회동 대신 집행 위원과 감찰위원을 선임하였다. 상무위원은 집행위원(감찰위원) 중 호선하고, 주석 1인은 상무위원 중 선발하였다. 朱英,
「1920年代商會法的修訂及其影響」, 歷史硏究2014: 2, 中国歷史研究院, 2014, 101~103쪽.
53) 평양중화상회 → 조선총영사 張維城, 1930.2.28., 「商會改組」(1930年, 03-47-191-04), 87~88쪽; 진남포부영사관 → 조선총 영사 盧春芳, 1931.5.25., 「僑民嘉獎案」(1931年, 03-47-205-10), 17~21쪽.
성명 원적 상호 업종 직위 비고
14
韓文生 河北 交河 永盛公 주물 감찰위원 ‒1929
년 회동15
鞠中經 山東 榮成 中和德 잡화 후보집행위원16
鄒子均 山東 黃縣 恒盛永 식료잡화 후보집행위원17
丁維鎥 山東 日照 永厚堂 목욕업 후보감찰위원<출처> 평양중화상회 → 조선총영사 張維城, 1930.2.28., 「商會改組」(1930年, 03-47-191-04), 87~88쪽; 진남포부영사관 → 조선 총영사 盧春芳, 1931.5.25., 「僑民嘉獎案」(1931年, 03-47-205-10), 17~21쪽.
<비고> 직원표에서 업종은 기재되어 있지 않아 이 글에서 활용한 자료를 토대로 필자 작성 직원표에서 서기 겸 번역(李信)은 생략
東興德(10번), 中和德(15번)의 업종은 확인되지 않으나 상호 명칭으로 보아 잡화상으로 추정 丁維鎥(17번)은 <표 10>에서 농업 종사자, 조선총독부 1923년 조사 자료에서는 목욕업 경영자
<
표11>
은1930
년2
월 중화상회 임원 명단으로 배화폭동 직전 이들이 화교사회의 주류였다.
이들 중 맹 헌시 등9
명의 이력은 중화상회 임원‘
청장’(
請獎)
에 관한 자료에서 확인 가능하다(
비고 난 참고).
전체 선출 임원은17
명으로(
서기 겸 번역1
명 제외),
집행위원11
명(
주석1
명,
상무집행위원4
명,
집행위원4
명,
후보 집행위원2
명),
감찰위원6
명(
상무감찰위원1
명,
감찰위원4
명,
후보감찰위원1
명)
으로 구성되었다.
이 명단에서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
우선,
직물잡화상은10
호(
직물상3
호,
잡화상7
호)
로1919
년16
호(
중복 상호 포함)
에 비해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주류를 차지하였다.
중화상회를 주도하는 상무위원5
명 중 잡화상은2
명,
직물상은3
명이다.
잡화상으로 중화상회 주석 맹헌시(
경흥덕, 1
번)
는1917
년 회동, 1919
년 부회장, 1924
년 부회장, 1927
년 회장, 1929
년 특별회동으로 명실상부하게 평양 중화상회를 대표하 는 인물이다.
상무집행위원 유자평(
영흥덕, 3
번)
은1927
년 중화상회 부회장, 1929
년 특별회동으로 이름을 올렸다.
원흥덕의 유덕증(6
번)
은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다만,
태안양행은 명단에서 빠졌다.
직물상 춘성 영의 장경현(
張景賢, 2
번),
춘성흥의 유율헌(4
번),
겸합성의 왕수정(
王壽廷, 5
번)
은 모두 상무집행위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다만,
덕성호,
동원흥은1920
년대 후반 유력한 직물도매상임에도 불구하고 제외되었다.
다음으로
,
화농이 빠진 대신 그 자리에 주물업,
요리업 경영자가 포함되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쌍화리(
雙 和利,
경영자 賈廣發, 13
번),
영성공(
永盛公,
경영자 韓文生, 14
번)
은 평양의 대표적인 화교주물업 상호이다.
요리업으로 홍승루(
鴻陞樓, 9
번),
태원루(
泰源樓, 11
번)
의 경영자는 각각 중화요리동업공회(
中華料理同業公 會)
주석,
상무위원을 겸직하였다.
54) 평양 중화상회에서 직물업(
잡화상 포함)
과 요리업 양측 세력의 대립이 극심했다는 진남포부영사의 보고는 이러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55) 폭동 전후 중화상회를 둘러싼 구체적 상황에 대해서는 후속연구에서 다루고자 한다.
54) 강홍은(姜鴻恩, 9번)은 1919년 임원 명단(<표 10>)에서 농업종사자로 기재되었다. 농업에서 요리업으로 업종을 전환하였던 가 아니면 두 가지를 같이 경영하는 것으로 추정 가능하다.
55) 진남포부영사 楊佑 → 조선총영사 盧春芳, 1932.1.9., 「賑款分配救濟案」(1932年, 03-47-218-15), 126~129쪽.
Ⅴ. 결 론
이 글에서는 식민지 조선 북부지역 평양화교의 실태를 배화폭동 이전 시기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
이상 에서 밝혀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선
,
평양의 지역적 특징과 화교의 규모를 서술하였다.
평양은 평안도의 전통적 상업중심지로 진남포 개 항2
년 뒤 외국인의 잡거지로 개방되었다.
경의선 개통은 평양의 도시 발전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경의선 이 산업철도로 영업을 시작하면서 수로로 진남포를 경유하지 않고 직접 육로 무역이 가능해졌다.
또한1910
년대 후반 제1
차대전 호황 이후 평양은 공업도시로 주목받았다.
특히 중소공업 분야에서 조선인의 상공도시 라는 특징을 갖는다.
이러한 상황은 진남포와 평양화교의 규모에 반영되었다. 1915
년부터 평양화교가 진남 포를 앞서기 시작하였고, 1920
년대 중반 잠시 역전되었지만1929
년 급증하면서 진남포를 능가한 이래 그 지 위를 계속 유지하였다.
다음으로
,
평양화교의 경제력을 분석하였다. 1920
년대 평양화교의 구심점은 직물수입상이었다.
평양은 다 른 지역과 달리 조선인 중신조합을 통해 화교직물도매상과 조선인 직물소매상 간의 거래가 이루어졌다.
평양 직물업계에서 화교직물상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사례이다.
또한 평양의 화교상인은 조선 북부지역 화교상인 네트워크의 거점 역할을 하였다.
신의주에서 화교제조업자가 생산한 양말은 이들을 통해 전국에 유 통되었다.
잡화도매상으로 경흥덕 경영자는 평양 뿐 아니라 선천,
강경에 지점을 두고 상세를 확대해갔다.
특히1920
년대 중반 조선인 양말제조공장에 자금을 융통해줄 정도의 유력한 상인으로,
양말제조업을 겸하면 서 경영의 다각화를 추진하였다.
마지막으로
,
평양의 화교조직으로 중화상회를 검토하였다.
평양 중화상회의 전신은 화상공회로 평양이 개 방되기 전에 만들어졌다.
이후 상회법에 따라 중화상회로 개칭되었고,
신상회법에 따라 위원제로 개조되었 다. 1919
년 중화상회 임원 명단을 살펴보면 직물상,
잡화상이 대부분이고,
화농이 포함되었다. 1930
년 명단 에서는 직물상과 잡화상 뿐 아니라 주물업자와 요리업 경영자의 약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이 화교사회의 주류로 구심적 역할을 하였다.
폭동 전후 중화상회 내 구체적 상황에 대해서는 후속연구에서 살펴볼 것이다.
※ 익명의 논문 심사위원 세 분의 조언에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