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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진골 귀족들 사이에서 전제주의 타도를 위한 운동이 일어났 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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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사 - 통일신라사를 중심으로

제 7주차 : 진골귀족의 분열과 6두품의 등장1

경덕왕대(742~765)는 신라의 문화가 절정기에 도달한 때였지만, 그 속에서 사회적으로는 새 로운 변화가 싹트고 있었다. 즉, 진골 귀족들 사이에서 전제주의 타도를 위한 운동이 일어났 던 것이다. 경덕왕은 이 움직임을 막기 위하여 한화정책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개혁을 실시하 였으나, 이렇다 할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드디어 혜공왕대(765~780)의 대혼란을 초래하게 되 었다.

정치적 혼란은 혜공왕 4년(768)에 일어난 대공의 난으로부터 비롯하였다. 대공의 반란은 전 국의 96각간이 서로 싸웠다고 전할 정도로 일찍이 보지 못하던 대란으로 확대되어 3년 동안 을 계속하였다. 혜공왕 10년(774)에는 드디어 귀족파인 양상이 정권을 탈취하는데 성공하여 혜공왕은 헛되이 빈자리를 지키다시피 하였다. 이에 김은거 등이 몇 차례에 걸쳐서 왕권의 회 복을 꾀하였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양상 등에 의하여 혜공왕은 죽음을 당하였다. 혜 공왕의 뒤에는 양상(선덕왕)이 즉위하였는데(780)그는 나물왕의 10대손이라고 하였고, 선덕왕 의 뒤에는 경신(원성왕)이 즉위하였는데(785) 그는 나물왕의 12대손이라고 하였다. 그 뒤에는 모두가 원성왕의 계통에서 왕위에 오른 것이다. 이리하여 중대에 왕위를 이어오던 태종무열왕 계는 끊어지고 원성왕계가 왕위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이후를 보통 하대라 부르 고 있다.

이러한 중대에서 하대로의 변동은 왕권의 전제주의에 대한 귀족등의 반항에 의해서 초래된 것이었다. 그 결과 하대의 신라는 귀족연립적인 방향을 걷게 되었다. 집사부의 중시 대신에 상대등이 다시 시대적 각광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적 조류에 대한 반동이 일어 났다. 헌덕왕 14년(822) 김헌창의 난은 그러한 것이었다. 김헌창은 무열왕계로서 선덕왕이 죽 은 뒤에 당연히 왕이 될 것이었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인하여 원성왕에게 그 자리를 빼앗긴 김주원의 아들이었다. 그 불만이 폭발하여 김헌창은 웅주(공주)를 근거로 하고 국호를 장안, 연호를 경운이라고 할 정도로 대규모의 난을 일으켰던 것이다. 한때 무진주, 완산주, 청주, 사 벌주 등의 광범한 지역이 이에 호응하였으나, 중앙 귀족들의 연합세력에 의하여 실패로 돌아 가고 말았다. 그 뒤 그의 아들 범문이 또다시 한산에 도읍을 정하고 반란을 계속하려고 하였 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그러나, 전제적인 왕권을 타도하는 데 힘을 같이한 귀족들 상호간에도 대립과 항쟁이 일어 났다. 녹읍을 부활시키는 데 성공한(경덕왕 16년, 757) 귀족들의 개인적인 재산의 증대가 이 러한 경향을 가속화시켰다. 그들은 정치적 권력의 증대를 목적으로 자기 휘하에 문객을 모으 고 또 사병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노동이나 사방으로 흘러다니는 유민 을 모집하여 무장한 것이다. 이제 왕위는 혈통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실력과 무장력의 우열로 결정되었다. 흥덕왕이 죽은 뒤에 벌어진 왕위계승전은 그 표본이었다.

처음, 흥덕왕의 4촌동생인 균정이 궁성으로 들어가서 왕이 되었으나 균정의 조카인 제륭은 실력으로 균정을 내쫓고 즉위하여 희강왕이 되었다(836). 그런, 희강왕도 죽음을 당하고 그의 6촌형제인 민애왕이 그 뒤를 이었다(838). 이 때 균정의 아들 우징은 청해진 대사 장보고의 군대를 빌려 가지고 서울로 쳐올라와 민애왕을 축출하고 즉위하였다(신무왕, 839). 이러한 상 태였으므로, 비록 왕위에 오른다 하더라도 그는 과거와 같이 귀족 전체의 대표자일 수는 없었 다. 그를 추대한 일파의 대표자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반대파의 보복을 받기가 일쑤였다.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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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 중사성 같은 근시기구를 통하여 왕권의 강화를 괴하였으나 성공을 거두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하대 약 150년 사이에 20명의 왕이 즉위하였고, 그 중 상당한 수의 왕이 내란에 희생 되었다는 것은 이 시대의 사회상을 단적으로 말하여 주고 있다.

육두품은 그의 신분적인 제약으로 말미암아 정치적인 실권을 장악할 수 있는 기회가 허락되 어 있지 않았다. 이러한 사회적 처지가 그들로 하여금 정치적 지위의 승진보다는 학문적인 식 견에 의한 정치적 참여의 길을 밟게 하는 경향을 나타내게 하였다. 강수나 설총과 같이 왕의 극진한 사랑을 받은 유학자를 비롯해서, 원성와의 꿈 해몽을 잘하여 유명한 여삼이나, 상대등 충공의 인사행정에 대한 고민을 적절한 충고로써 풀어 준 녹진, 혹은 또 진성여왕에게 10여 조의 「시무책」을 건의한 최치원 등이 모두 이 육두품 출신이었다.

이들은 당에서 과거제도에 의하여 개인의 능력에 따라 관리를 등용하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서는 점차 신라의 골품제도에 대한 비판이 싹트고 있었다.

최치원이 건의했다고 하는 10여 조의 「시무책」에는 과거제도에 의한 인재의 등용과 주장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고, 따라서 최치원은 벼슬 을 버리고 유랑생활을 하게 되었다. 최치원뿐만이 아니라 다른 육두품 출신 학자들에 있어서 도 그들의 골품제도에 대한 비판적 태도는 마찬가지였으며, 심지어는 반신라적이기도 하였다.

최승우가 후백제에서 벼슬을 하고, 최인연이 고려의 신하가 된 것은 이러한 사정을 말하는 것 이다. 육두품 귀족 속에서 자라나는 신라 진골 귀족에 대한 반항을 역력히 찾아볼 수가 있다.

제 9~10주 호족의 대두

9세기 중엽의 문성왕(839~857) 이후에는 진골 귀족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던 왕위의 쟁탈 을 에워싼 심한 정치적 투쟁은 석어가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일단 귀족들 사이에서 타협이 이루어졌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타협은 이때에 점점 그 힘을 과시하기 시작하는 지방세력들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필요에서 일어났던 것 같다. 이제 신라의 역사 무대가 중앙에서부터 지방으로 바뀌는 새로운 전환점에 다다른 것이다.

골품제에 의하여 중앙의 정치 무대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막혀 있는 이들 지방세력은 그 눈을 해외로 돌렸다. 이리하여 그들은 자기들의 중요한 활동 무대를 해상무역에서 찾게 되었 던 것이다. 지금까지 신라의 대외무역은 공적인 조공의 형식을 빌려서 행해졌다. 그러나, 이제 민간무역이 성행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사사로이 무역을 행할 수 있는 세력 들의 성장을 뜻한다. 이들은 당 뿐 아니라 일본과도 활발히 교역을 하였으며, 이에 따라서 일 본은 대마도에 신라와의 통역을 맡은 신라역어를 증설하기까지 하였다.

이리하여 신라인의 왕래가 빈번한 산동반도나 대운하 ․ 회수 유역 같은 곳에는 신라인의 거 류지가 생겼는데 이를 신라방이라불렀다. 이들 거류지에는 그들을 관할하기 위한 신라소 라는 행정기관이 설치되고, 그 직원에는 신라인이 임명되고 있었다. 이들 거류민은 거기에 사원을 세워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신라원이라고 불리었는데, 장보고가 문등현 적산촌에 세운 법화원이 가장 유명하였다. 문성왕 2년(840)에 당으로 갔던 일본인 승려 자각 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의하면 법화원에 강도를 듣기 위해 모여든 신라인은 일시에 250명 이나 되었다고 한다.

크게 해상무역 활동을 벌인 대표적 인물은 청해진(완도)의 장보고였다. 그러나 그 밖에도 강 주(진주) 지방의 왕봉규나 송악(개성)지방의 작제건(왕건의 조부) 같이 그 이름이 알려진 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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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비록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남양이나 나주 같이 해상무역을 활발히 하던 근 거지에는 그와 비슷한 세력가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신라의 군진(軍鎭)은 본래 변경의 수비를 위하여 육지에 설치된 것으로, 북진(삼척)이나 패 강진(평산)이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해상에서 해적들의 활동이 심해지자, 이에 대비하여 청 해진(완도) ․ 당성진(남양) ․ 혈구진(강화) 등 해안의 요지에도 차례로 군진이 설치되기에 이르 렀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이 패강진과 청해진이었다.

패강진은 선덕왕 3년(782)에 설치된 것으로서 예성강(패강) 이북, 대동강 이남의 광범한 지 역의 군사적 임무를 담당하는 군진이었다. 그러므로 패강진은 평산을 중심으로 신라의 서북 변경지대의 국방을 담당하는 중요 군사기지였던 셈이다. 그러면서도 한산주와는 별도로 이와 동등한 지위를 누리는 독립된 행정구역으로서의 구실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이 지역의 토착세 력가들은 뒤에 반신라적인 세력으로 성장하여 궁예나 왕건과 결탁하기에 이르렀다.

청해진은 흥덕왕 3년(828)에 장보고에 의하여 설치된 것이었다. 장보고는 본래 당에 가서 군인으로 출세하였다. 그러나, 해적이 성행하여 신라인을 잡아다가 노비로 매매하는 일이 있 음을 분개한 그는, 본국에 돌아와서 흥덕왕에게 청하여 남해의 요해지인 와도에 청해진을 두 고 그 대사에 임명된 것이다. 그는 사병적인 성격을 지닌 1만의 해군을 거느리고 해안 지대를 경비하여 당 해적의 출몰을 제압하였다. 뿐만 아니라, 당 및 일본과 활발히 무역을 하여 황해 의 왕자가 되었다.

장보고는 비단 해상의 왕자가 될 뿐 아니라, 중앙의 정치에도 간여하였다. 그는 왕위쟁탈전 에 패하여 보호를 청하여 온 우징에게 군대를 제공하여 민애왕을 축출하고 왕위에 오르게 하 였다(신무왕). 그러나, 문성왕 때에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들이려는 문제를 계기로 해서 중앙 귀족들에 의하여 암살을 당하고(문성왕 8년, 846), 청해진은 이어 폐지되고 말았다(문성왕 13 년, 851).

장보고의 청해진 세력은 일시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 중앙의 정치무대에 직접 등장 하거나 혹은 이와 대항하는 새로운 정권을 세우기까지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비록 갈라 지고 무너져 가는 중앙귀족들이었지만, 그들의 세력 기반인 골품제도를 보존하기 위한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리하여 신라사회의 이단자인 해도인 장보고는 몰락하였다. 그의 지휘 아래 있던 1만의 군대는 벽골군(김제)에 옮기어 그 세력의 재생이 억제되었다. 그러나, 청해진 이나 마찬가지 위치에 놓여 있던 다른 여러 군진들은 장차 지방세력가들에게 군사적인 힘을 제공하여 주는 근거지가 되었던 것이다.

장보고는 완도를 고향으로 하는 호족 출신이었던 것 같다. 그는 자기 고향에다가 근거지를 설치하고 아마도 일족의 무리를 중심으로 사병을 길러 군진을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와 비슷하게 지방에서 일정한 지역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대를 이어가며 행사하는 세력 가들이 허다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그들은 보통 성(城)을 쌓고 그 주인으로 자처하여 성주라 칭하였고, 그 성을 중심으로 조직된 사병의 지도자였기 때문에 장군이라고도 칭하였다.

성주들 중에는 지방으로 몰락해 내려간 중앙귀족 출신들이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중앙귀 족 중에는 진골 출신도 있었지만, 또 육두품 출신도 있었다. 그들은 일족을 거느리고 지방으 로 내려가서 새로운 기반을 닦아 갔을 것이다. 한편, 오랫동안 지방에 토착해서 살던 촌주(村 主) 출신도 있었다. 이들은 군현의 행정 체제 밑에서 지방민을 통제하는 구실을 담당해 왔으 나, 이제 강력한 촌주들은 주위의 여러 지역을 지배하여 그 세력을 확장하였던 것이다. 이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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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성장한 성주들은 실질적으로 군 ․ 현의 장관을 대신하는 지위를 차지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성주들은 자기 세력 안에 있는 촌락들에 대하여 경제적인 지배력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독 자적인 농법 개량을 통해 농업생산량을 증가시키는 한편, 촌락민에게 일정한 조세와 역역을 부과하였다. 성주에 의한 촌락민의 경제적 지배는 결국 중앙정부의 경제적 기반을 좀먹어 가 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것은 신라의 존망을 가늠하는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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