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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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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르네상스는 원래 프랑스어로 ‘재생’을 뜻하며, 역사적으로는 14-16세기에 걸쳐 그리스․로 마의 학문과 문화가 부활한 것을 가리킨다. 그 기원은 바사리가 저술한 『예술가 열전』에 서 미켈란젤로에 의해 완성된 고전고대 미술의 부활을 ‘레나시타’(renascita) 즉 ‘재생’이라고 불렀던 데에 있다.

1. 르네상스에 관한 다양한 해석들

(1)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 :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14세기로부터 고전고대 문화의 부활을 발판으로 근대문화 창조의 움직임이 일어났다고 파악

→ 르네상스를 중세와의 단절로 파악해서 많은 비판과 수정이 이루어짐.

(2) 중세와의 연관성을 주장하는 입장

- 하스킨스(Haskins) : 12세기의 르네상스 주장

→ 이러한 주장은 르네상스의 독자성과 근대적 성격을 흐리게 할 수 있음.

(3)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으로 파악하는 입장

- 퍼거슨 : 중세와의 연속성을 인정하면서도 르네상스의 근대적 성격을 인정하려는 태도

※ 무려 200년간에 걸쳐 진행된 르네상스 운동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시대적 성격을 갖는다고 해도 될 것이다.

2.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르네상스는 14-16세기 서유럽 전체에서 불었던 인간정신의 변화였지만, 그것은 이탈리아에 서 가장 먼저 시작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가장 먼저 발생할 수 있 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① 이탈리아는 로마 문화 유산을 이어받은 터전으로 고대문화가 가장 잘 보존되어 있던 지 역이다. 따라서 이탈리아인에게 르네상스는 게르만에 의해 파괴된 옛 전통을 되찾는 일이기 도 했다.

(그런데 르네상스 연구의 대표적인 학자들에 이탈리아인이 포함되지 않은 이유는 19세기 무 렵 이탈리아는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어 많은 학자들은 통일 문제에 더욱 신경을 쓸 수밖 에 없었기 때문이다.)

② 봉건제가 유럽의 어느 지역보다 미약하였으며, 고대도시의 전통이 잘 유지되고 있었다.

게다가 십자군 전쟁 이후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가 되면서 도시의 경제 성장이 빨랐으며, 부 유한 시민층이 성장할 수 있었다. 이처럼 도시가 발달하고 귀족과 부르주아지의 구별이 모 호했던 이탈리아에서는 교육열이 다른 어느 지역보다 높았으며, 정치적 성공과 현세적 행복 이 중요시되었다.

③ 중세 말기에 다른 지역보다 유난히 부휴했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화려한 공공 기념물 을 건축하고, 서신과 연설문을 통해 도시 공화국을 찬양해 줄 작가들을 후원했다. 15세기에 이르러 도시 국가들은 군주 가문의 세습지배에 예속되자 군주들은 자신들을 칭송하기 위해 궁정에서 예술과 무학을 후원했으며, 이에 대한 모방이 르네상스를 확산시켰다.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지도자들은 자기 재능과 현실의 타산을 믿는 자들로 종교적․윤리적 규범을 무시하였으며, 지배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정통성이 없는 지 도자들은 자기처럼 재능만 있는 예술가들을 사랑하였으며, 예술품들을 통해 명성을 얻고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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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려 했다.

3. 북유럽의 르네상스

15세기 이후 많은 학생들이 이탈리아에서 유학을 하게 된 계기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알프스 이북으로 전파됨.

* 이탈리아와 북유럽의 차이

- 알프스 이북에서도 도시가 발달하고 봉건제가 무너지고 있었지만, 정치의 중심은 절대군 주였다.

- 북유럽은 기독교적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어 원시 크리스트교와 성경의 원리에 더 관심 을 가짐 → 기독교적 휴머니즘

4. 휴머니즘(Humanism)

중세의 크리스트교적인 가치관과는 다른 문화와 인생관을 고대문화 속에서 찾는데 중심이 되었던 사람들을 바로 인문주의자라 한다.

인문주의란 용어의 역사적 기원은 1808년 독일의 교육자인 니타머(F. J. Niethammer)가 그 리스 및 라틴 고전 교육을 강조하기 위해 humanismus란 용어를 만들었으며, 1859년 게오르 그 보이트의 논문에서 르네상스에 처음으로 적용되었다. 이처럼 인문주의라는 말은 이후에 사용된 것이고, 15세기 후반 경에는 학생들 사이에서 고전언어와 문학을 가르치는 교사를 속칭 umanista라고 부른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교사들이 가르쳤던 내용에 대한 르네상 스적 용어는 studia humanitatis였다. 이것은 요즘으로 말하면 인문학(humanities)이라 번역 될 수 있는데, 15세기에는 문법, 역사, 문학, 도덕, 철학 등의 일련의 과목들, 그리스 책의 라 틴어 번역본을 포함한 기원전의 라틴어 고전들, 그리고 드물게는 그리스 원전의 독해와 관 련된 연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인문주의란 철학적 경향이나 체계가 아 닌, 전통적 고대성의 재발견이나 부활과 관련된 고전 문학의 연구에 한정된 것이었음을 알 게 된다.

※ 르네상스 휴머니즘의 특징

(1) 새로운 인간관의 형성 : 르네상스의 인간관은 근대적 인간관의 출발로 이탈리아에서는 신분이나 혈통 등은 별문제가 되지 못했는데, 그것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인식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인간을 중세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타고난 재능과 개성을 존중. 이러한 새로 운 인간상을 고전의 모범으로부터 찾으려 하였다.

(2) 현세적인 성격이 강하다. 내세지향적인 중세적 가치를 버리고 현실에 대한 분명한 인식 을 토대로 세속적인 경향을 띠게 된다. 예를 들어 인간이란 이러한 존재란 것을 나타내주는 마키아벨리의 인식이 대표적이다.

(3) 중세의 공리공론적 스콜라 철학을 비판하고 현실적인 지혜와 지식을 줄 수 있는 역사 학, 수사학, 정치학 등에 관심 집중.

(4) 자연에 대한 태도도 공포와 경외의 대상에서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묘사하고 관찰하려 함. 그래서 사실적인 그림에서 원근법이 등장하고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 등이 합리적 사 고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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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교 개 혁

종교개혁은 중세 가톨릭의 절대적 권위를 타파하고 미신에서 벗어나 계몽으로 인도한 근대 적 운동으로 기억되고 있다. 과연 종교개혁은 그러했는가? 이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종교개 혁이 이후의 서양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그 지향하는 바와 개혁의 목표를 놓고 볼 때 그리고 운동의 실천적 측면들은 놓고 볼 때 과연 근대적 성격의 운동이라 말할 수 있 는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종교개혁은 일반적으로 루터에 의한 독일의 개혁만을 지칭하기도 한다. 그런데 실상 종교개혁에는 관 주도적 종교개혁, 급진적 종교개혁, 가톨릭의 반동 종교개혁 등이 포함되어 있다.

1. 중세 말의 사회상 (1) 교회의 지도력 약화

① 성직자의 타락 : 불법적인 성직 매수를 통해 성직자가 된 자들은 라틴어 미사도 제대로 집전하지 못했으며 불경한 생활을 했다. 이노센트 8세는 서자가 8명 이상이었고, 레오 10세 는 2000여 개 이상의 성직을 매매했다고 한다. 알렉산더 3세 때 (12세기 초) 성직자의 독신 제도가 확정되었으나, 실제로는 교황과 기타 성직자들이 결혼도 하고 사생아도 낳았으며, 때 로는 교황청에 고급 매춘부를 불러들이는 등 호사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② 교회 부의 증가 : 내세를 보장받길 원하는 군주와 제후들은 교회와 수도원에 자신의 재 산을 후하게 기부하였으며, 십일조는 교회의 가장 정규적인 수입원이었다. 한편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은 봉건영주이기도 했으므로 장원에서의 수입도 있었다. 그러나 교회는 더 많은 부 를 원해 성직을 돈을 받고 팔았으며, 전 유럽 성직자들로부터 납입금을 징수했다.

③ 교황의 권위 약화 :

- 십자군 전쟁은 교황의 권위가 절정에 올랐음을 보여주는 것인 동시에, 그것이 실패로 끝 나자 교황의 권위를 실추시켰으며, 상대적으로 군주권을 강화시켜 교황권 약화에 결정적인 원인 제공이 된 사건이었다.

- 바빌론 유수(1305-1378) : 프랑스의 필립 4세와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와 분쟁이 일어나 자 필립 4세가 교황을 체포하고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였다. 이 기간동안 교황은 프랑스 왕 의 직접적인 통제 아래 있었다.

- 대분열(1378-1417) : 시간이 지날수록 로마로의 복귀에 대한 압력이 강해지자 추기경들은 이탈리아인 우르바누스 6세를 교황으로 뽑았으나, 이내 강압에 의한 결정이었다며 클레멘트 7세를 다시 교황으로 선출했다. 이렇게 시작된 대분열은 1417년 콘스탄쯔 공의회에서 마르 티누스 5세를 선출함으로써 종식되었으나, 실추된 교황의 권위는 회복되지 않았다.

(2) 지적 풍토의 변화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영향으로 인해 중세적 가치의 인간상이 변화하고 있었으며, 교회의 획 일적 통제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증가하고 있었다. 이에 더해 평신도들의 문자 해독률이 증가하면서 성서를 직접 읽을 수 있게 되자 성직자들의 삶이 성서에서 명하는 바와 다르다 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3) 중앙집권 국가의 등장

중세 말 봉건질서의 해체는 왕 중심의 중앙 집권적 통일 국가의 성립으로 이어지고, 각국의 왕들은 교회의 지배에 대항하였다. 특히 프랑스는 1438년의 법령을 통해 자국내 성직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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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명과 조세 권한 등 교황의 권리를 제한했다.

경제적인 면에서도 상비군과 관료제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돈이 필요로 했던 각국의 국왕은 교회와 수도원의 재산에 세금 부과를 금지하는 교회법을 폐지하고 싶었다.

(4) 신앙심

이러한 사회적 혼란은 신앙심을 더욱 부추겨서 강력한 경건 운동과 헌신 운동이 일어났다.

신비주의와 금욕주의에 대한 관심이 증가했으며, 대중들은 이러한 운동에 자선금을 기부했 고, 경건 문학의 출판도 늘었으며, 새로운 형태의 예배와 설교가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이 러한 것들은 전형적인 수도원식의 경건 운동이 아니라 낮은 수준의 기독교적 관행이었다고 할 수 있다.

2. 종교개혁의 선구자들

(1) 영국의 위클리프(1330-1384) : 가톨릭 제도와 성직자들의 비도덕성을 비판하고, 화체설 을 부정했으며, 성서를 믿음의 근원으로 삼아 참된 신자의 삶을 살 것을 주장하였다. 처음에 는 교회의 재산을 탐내는 귀족들의 후원을 받았으나, 후에는 위클리프의 개혁사상이 너무 급진적이어서 후원자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옥스퍼드에 유학 온 체코 학생들에 의해 중 부 유럽에 위클리프의 사상이 소개되었으며 후스에 영향을 주었다.

(2) 보헤미아의 후스(1373-1415) : 프라하 대학의 후스 역시 교회의 세속화를 비판하고 성서 를 믿음의 권위로 인정했다. 후스의 개혁운동은 보헤미아의 민족주의와 연관이 되어 많은 인민들은 물론 보헤미아의 왕과 여러 귀족들도 후스를 후원했다. 그러나 1415년 콘스탄쯔 공의회에서 화형을 당하자 그를 따르던 많은 지지자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가톨릭교회도 이 들을 무마하는 선에서 타협을 지었다.

(3) 신비주의자 : 가톨릭에 대한 반란을 설파하지는 않았지만 중세 교회가 제안하는 구원의 의례적 절차에 대해 반발하여 믿음과 경건함이 구원의 필수적 요소임을 강조

3. 독일의 종교개혁

- 마르틴 루터는 법률가가 되기 위해 대학에 들어갔으나 번개에 맞아 죽을 뻔한 경험을 통 해 수도승이 되기로 결심하고 아우구스투스의 수도사가 되었다. 이 수도원에서 죄에 대한 강박관념에 빠져있던 루터는 인간의 행위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깨닫고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로마서 1장 17절의 구절을 바탕으로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 을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그 성문 앞에 95개조항의 반박문을 게재함으로써 시작된 루터 의 종교개혁이 최초의 표적으로 삼았던 것은 바로 면벌부였다.

* 테쩰이라는 수도사가 독일 전역을 돌면서 “동전이 짤랑하고 떨어지는 순간 당신의 죄는 사하여진다”라고 외치며 팔던 면벌부는 원래 자선, 단식, 십자군 등에 참여할 때 돈을 받지 않고 판매되었으나 사치스러운 생활을 영위하던 교황들은 경비 마련을 위해 돈을 받기 시작 했고, 성 베드로 성당을 건축하느라 후거가에 빚을 진 교황은 후거가에 면죄부 판매를 대행 하도록 했다.

- 루터의 반항은 즉각 독일 전지역과 유럽 각지로 확산되었고(인쇄술의 영향), 이에 당황한 교황은 루터에게 철회할 것을 명령했으나 응하지 않자 결국 1521년 보름스 국회에서 루터를 파문하였다.

- 이후 루터는 1546년에 죽을 때까지 여러 논문과 서한들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전파시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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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며, 독자적인 독일 교회를 건설하는데 몰두하였다.

- 루터의 주장

① 선행이 구원에서 아무런 역할도 못하므로 금식, 순례, 유물 숭배 같은 형식적인 관행을 폐지해야 한다.

② 세례와 성만찬만 성사로 인정 - 성만찬도 그 자체로는 아무런 효력이 없다고 주장해 화 체설 부정.

③ 예배의 의미를 모두가 알기 위해서는 라틴어 대신 독일어로 예배해야 한다.

④ 사제와 평신도간의 구분이 없어졌기 때문에 사제는 목사라고 부르며 목사도 결혼할 수 있다.

※ 종교개혁의 핵심 교리

(1) 믿음지상주의(sola fides) : 신과 인간과의 관계 재설정

중세의 구원 교리는 두 가지 길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는 ‘신의 은총’에 의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선행에 의한 것이었다. 반복되는 고해성사와 교회 의식의 준수는 인간을 개 선시켜 도덕적 선행을 가능하게 하며, 이것은 결국 구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것 이다. 이러한 중세의 교리는 외형화, 습관화, 도식화되어 타락할 위험성이 있는 동시에 동시 대인의 심성을 짓누르는 부담이었음을 종교개혁가들은 지적하였다.

루터는 구원이란 개인이 성취하는 무엇이 아니라 믿음만으로 하나님이 주는 선물임을 강조 하였다.

(2) 만인사제주의(priesthood of all believers) : 성직자와 평신도와의 관계 규정

중세 교회에서 사제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었다. 모든 성사를 인도할 뿐 아니라, 고백 을 듣고 죄의 경중을 판단하며, 신을 대신해서 죄를 용서한다.

그러나 경건한 행위나 예배 의식이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되면 의식의 인도 자인 사제의 역할은 축소되며, 더 나아가 구원이 신과 개개인의 문제라면 사제라는 중재자 는 필요가 없어진다.

(3) 성경지상주의(sola scriptura)

중세교회는 교황의 칙서나 종교회의의 결정, 교회법 등이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갖는 것으 로 인정하였다. (ex) 면벌부는 성경적 근거도 없으며, 롬바르드의 “전거집”은 성경 이상의 권위를 가졌다.

이에 대해 프로테스탄티즘은 성경만이 유일한 권위임을 주장하여 모든 신앙적 판단과 구원 의 문제를 오직 성서에서만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 왜 독일에서 종교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는가?

루터의 성공은 단지 루터가 대중들의 인기를 얻어서도 아니고 그의 주장에 모두가 공감해서 도 아니다. 무엇보다 독일의 제후들이 루터를 지원했기 때문이다.

① 독일은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어 교황의 착취가 가장 심했다. 예를 들어 프랑스나 에스 파냐는 교황으로부터 자국내의 종교 정책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양보를 얻어낸 반면, 독일은 “교황청의 젖소”라고 불릴 정도로 교황의 착취가 심하였다.

→ 독일 제후들과 국민들은 反교황적 정서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민족주의적 성향은 루터의 팸플릿에서도 나타난다.

② 신성로마 황제인 카알 5세는 친 교황파였으므로, 이를 견제하고자 하는 타 제후들이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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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개혁을 암암리에 지원했다.

4. 깔뱅의 종교개혁

다소 감정적이고 격렬한 투쟁가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루터와는 달리 깔뱅은 냉철한 이론가 요 조직가라고 할 수 있다. 깔뱅은 체계적으로 정리될 필요가 있었던 프로테스탄트 운동에 교리적 체계를 뒷받침해주는 “기독교 강요”를 저술하였으며, 교회 구성과 예배 형식을 정립 하여 아직까지도 모범이 되고 있다.

원래 독실한 가톨릭 신자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깔뱅은 최초에는 법률 공부를 하였으나 친구인 니콜라스 콥을 도와 작성한 취임연설에서 루터 사상이 언급되면서 도망자 의 신세가 되어 여기 저기 떠돌다가 기욤 파렐의 초청으로 이제 막 가톨릭을 몰아낸 제네바 로 가서 개혁운동을 시작하였다. 한 번 쫓겨나기도 했지만 결국은 시민총회에서 복음주의 형태의 예배를 드리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도덕적으로 사회적으로 타락한 상태에 있던 제네바를 바로 잡기 위해 법률가적 소양을 갖춘 깔뱅은 설교와 두 가지 성례(성찬식과 세례)를 담당하는 목사와, 교육을 맡는 교사, 신자들의 규율을 감독하는 장로, 병자와 가난 한 자를 돌보는 집사 등의 직책을 만들어서 제네바를 개혁하기 시작했다.

엄격한 신앙적 경건 생활을 주장하는 깔뱅은 장로와 목사로 구성된 교단회의를 설치하여 미 신을 몰아내고, 교황주의 서적을 불태웠으며, 이단을 처단할 뿐 아니라, 인간의 쾌락을 경멸 하여 도박, 카드놀이, 춤, 음악, 술, 매춘부, 연극 등도 철저히 금하였다. 4년 동안 58명이 처 형당하고 76명이 유배되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발도 적지 않았는데, 미카엘 세르베투스는 혈액을 순환을 연구한 의사이기도 했는데, 삼위일체설을 부정한다는 이유로 화형에 처해졌 다.

※ 예정설 : 인간은 신의 의지에 완전히 종속 → 아담 이후의 원죄 →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은 선택한 자에게는 구원을 허락 → 그러면 인간은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되는 것인가?

→ 선택받은 인간에게는 정의로운 삶을 영위하려는 욕망과 절제를 하락하셨다.

따라서 깔뱅주의자들은 선민으로서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신의 영광을 위해 행동할 것을 요구받는다.

5. 영국의 종교개혁

헨리 8세는 원래 루터의 논문에 반대하는 “7성사를 위한 변론”이라는 논문을 써서 교황에게 헌정할 정도였다. 헨리 8세가 왕비 캐더린과의 이혼문제로 교황에게 승인을 요청했는데, 교 황이 이를 들어주지 않자 켄터베리 대주교인 토머스 크랜머로 하여금 자신의 결혼이 무효임 을 선언하게 했다. 1534년 수장령을 선포하여 국왕이 영국 국교회의 우두머리임을 공표하였 으며 수도원을 해체하여 수도원의 재산을 몰수하였다. 그러나 헨리 8세는 가톨릭적 교리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 뒤이어 왕에 오른 에드워드 6세 때는 영국에서 깔뱅주의의 영향이 강화되기도 했다.

에드워드 6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캐더린의 딸 메리는 가톨릭적 교육을 받고 자라났으 며 그 외에도 여러 이유로 가톨릭으로의 복귀를 단행하여 이전에 국교도를 돌아섰던 수많은 사람들의 목을 베었다. 메리여왕의 뒤를 이어 엘리자베스가 왕위에 오르게 되면서 다시 가 톨릭을 버리고 깔뱅주의에 기초한 교리를 유지하는 한편 가톨릭적인 의식과 성직제도를 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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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 영국 국교회를 만들어 나갔다.

※ 영국의 종교개혁은 가톨릭과 개혁파 사이의 중간노선을 유지한 것이다. 영국에서 종교개 혁이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영국 국민들 사이에서 교황에 반대하는 민족정신이 싹트고 있었고, 백년전쟁과 장미전쟁 이후에 평화를 갈망하는 마음이 왕실에 대한 지지로 이어져서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6. 프로테스탄티즘의 공통적인 성격은 무엇일까?

(protestant란 용어는 1526년 슈파이어 제국회의에서 루터파를 인정했다가 1529년 2차 회의 에서 이를 번복하자 이에 대해 제후들이 항의하자 가톨릭교도들이 이들에게 붙여준 명칭.) 권위에 대한 반란이었다는 점이다. 모두가 중세 로마 가톨릭의 획일적인 체계에 대해 저항 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아이러니 한 사실은 이들 역시 권위를 세우고 거기에 protestant하는 자들을 억압하고 박해했다는 사실이다.

7. 종교개혁에 대해 생각해 볼 점들 (1) 민주주의의 길을 열었는가?

① 평등과의 관련성

“만인사제주의”의 주장은 민주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 단초를 제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러나 개혁가들은 실제에 있어 평등론자라고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루터는 1524년 남부 독 일을 중심으로 농민반란이 일어나자 처음에는 방관하다가 후에는 제후들과 귀족의 편에 서 서 농민들을 “베고 참살하라”로 할 정도였다. 일반적으로 종교개혁가들은 군주의 지위는 민 중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신이 허락한 것이므로 통치자에 대한 복종은 당연한 것이라고 가르쳤다. 만약 군주가 신의 뜻에 거역한다면 그땐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저항을 하라고 주 장하였다.

※ 민주의 항거를 정당화한 개혁가로는 스코틀랜드의 종교지도자 존 낙스와 독일 농민전쟁 을 지도했던 토마스 뮌처가 있다. 존 낙스는 메리 여왕의 반프로테스탄트 정책을 강하게 비 판하면서 무력으로 타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뮌처는 천년왕국사상을 바탕으로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지상낙원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검에 피가 마르지 않도록 사악한 지배자들 을 죽여야 한다고 호소했다.

② 개인주의와의 관련성

“믿음지상주의”는 신과 신도의 개인적인 접촉을 가능케 했다. 이제 신앙은 교회를 통한 집 단적 구원이 아니라 신자 개개인의 몫이기에 개인주의의 발전과 연관된다 할 수 있다. 그러 나 종교개혁가들 역시 교회의 역할을 다시 한번 강조하였으며, 형태만 조금 바뀐 성직체계 는 사실상의 신자 개인과 신을 아직도 매개하고 있었다. 종교개혁가들은 인간이 자유롭게 방임되어서는 죄에 빠질 위험이 많다고 봤던 것이다.

(2) 종교적 관용을 초래했는가?

초기 기독교는 자신들을 국가와는 별개의 자유종교로 간주하고, 종교 문제에 있어서 강압을 거부하였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마태 22:21)

콘스탄티누스 이후 국가 종교가 된 후 종교적 통일이 강조되었고, 중세에는 불관용이 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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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이단과 분파가 나타나면 교회법과 세속 기독교 정부들의 법률에 충실할 것을 강조 하는 등 비 기독교인보다 이단이 오히려 더 박해를 심하게 받았다. 이제 종교에 대한 위협 은 세속 권력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었고 종교 재판의 권위는 날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에스파냐에서는 하나의 국가 안에서 여러 종교들, 즉 기독교, 유대인, 이슬람이 평화 롭게 공존하기도 했으며, 종교적 소수파는 기독교와 이슬람 왕국들에서 너그럽게 다루어졌 다. 그러나 15세기말이 되어 가톨릭 군주들인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는 통일된 왕국에서 종 교적 관용을 용인하지 않았다. 기독교인의 이슬람에 대한 재정복이 완료된 후 1492년에는 유대인을 추방하기 시작했으며 이베리아 반도에 남아있는 이슬람교도들을 개종하기 위한 노 력을 경주했다.

한편 종교개혁가들은 자신들의 힘이 약한 시기에는 종교적 관용의 주장을 통해 자신들의 위 치를 강화시키지만, 일단 자신들의 힘이 막강해진 곳에서는 새로운 권위로 무장하고 신조를 달리하는 종파에 대해서는 엄격하고 단호하게 대처하였다. 관용을 주장하는 자들의 논리적 근거는 무엇인가? 신만이 참된 신자를 알고 있을 뿐 우리 인간은 누가 이단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엄밀한 의미에서 중세 말 근대 초에는 관용이 존재하기 어려웠다. “군주가 자신의 지역의 종교를 결정한다”는 아우구스부르그 화의(和議)로 인해 개인이 종교를 선택할 여지가 없었 다.

(3) 종교개혁가들은 개혁될 미래의 청사진을 가지고 있었는가?

이들이 추구하는 바는 오직 ‘옛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차원에서 개혁운동을 진행하지 않았다. 이들이 관심을 둔 것은 오직 가톨릭 교회에 의해 퇴색되고 타락한 초기 기독교 정신을 회복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들은 자신들 이 혁명을 하고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루터나 깔뱅 등 관 주도적 개혁가 모두는 교회 를 벗어난 어떤 것에도 반대했으며, 자신들의 주장이 교회 안에서 받아들여지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하자 중세 교회를 박차고 나와 새로운 교회를 건설하여 신실한 신앙 운동을 이끌어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개혁은 순수한 신앙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임을 파 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4) 교회의 분리

교회의 통일성을 깨트리려 하지는 않았지만 다시 말해 교회의 분리를 목표로 한 것은 아니 었으나 결과적으로 교회는 분열되었고, 그 분열의 바탕에는 기성 교회에 대한 저항정신이 자리하고 있었다. 결국 프로테스탄트라는 명칭이 함의하고 있듯이 프로테스탄티즘 속에는 저항의 속성이 자리하고 있으며, 루터와 깔뱅 등은 자신들이 세운 교회의 통일을 유지하고 자 했으나 프로테스탄티즘의 속성은 어쩔 수 없이 또다른 분열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고 결 국 기독교의 다양화를 초래하게 되었다.

(5) 종교개혁과 자본주의와의 관련성

① William Cobett (19세기) : 지배 계급은 교회의 돈을 필요로 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종교 개혁이 일어나 이 계급 집단들은 루터의 추상적이고 신학적인 사상들을 자신들의 강탈을 정 당화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 지배계급은 상인과 은행가 등에게 빚을 지고 있었는 데, 몰수한 재산이 이들에게 귀속되면서 자본가라는 새로운 계급이 나와 자본주의의 서막을 열었다.

↔ 독일에서는 군주들의 이익이 가장 컸으며, 가톨릭을 지속시킨 곳이 프로테스탄티즘으로 전환된 곳보다 자본주의의 발전이 빨랐다는 증거는 없다.

(9)

② 마르크스주의자 : 새로이 흥기하고 있던 부르주아들은 토지 재산에 기반을 두고 있는 귀 족들과 교회가 가르치는 경제에 대한 중세적 가치관(교환이익 취득, 이자)을 보호하는데 불 만을 품고 있었다. 이에 가톨릭에 반기를 든 프로테스탄티즘을 지원하게 되었다. 도식적으로 말해서 구교도에 대한 신교도의 반란은 전통적 지배계급과 신흥 부르주아지의 저항이라는 것이다.

↔ 최근 나탈리 데이비스의 연구에 의하면 구교도와 신교도를 나누는 선이 계급을 구분하는 선과 일치하지 않는다. 즉 구교도에도 부르주아지가 있었고 신교도에도 귀족이 있었다는 것 이다.

③ Max Weber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소명론과 예정론, 그리고 세속 적 금욕주의가 근대 자본주의 정신의 본질이며 따라서 서구적 자본주의는 합리적 윤리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 소명론 : 자기에게 주어진 직업에 충실한 것이 신의 소명을 완수하는 길이다.

- 예정론 : 선행과 현세에서의 성공은 예정된 구원의 증표

- 세속적 금욕주의 : 적극적으로 이윤을 추구하되 근면, 검소, 엄격한 자기절제를 통해 이익 을 증대하고 이를 재투자하여 부의 극대화를 도모

↔ 만일 프로테스탄티즘이 자본주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일어난다면 특정 지역에서 양자가 일치하는 지도가 그려져야 하는데 완전히 그렇지는 못하다. 새로운 경제의 중심지였던 밀라 노, 피렌체, 아우구수부르크 등은 프로테스탄티즘의 영향을 거의 받지 못한 지역이었다.

※ 브린튼 같은 역사가는 오히려 민족주의 운동이 활성화되었던 곳에서는 종교개혁이 성공 을 거두었다고 본다.

(6) 종교개혁은 근대적/합리적 성격의 운동이었나?

19세기의 합리주의자들은 종교개혁을 합리주의의 선구자로 생각한다. 종교개혁가들은 중세 의 주술적 미신적 신앙에서 벗어나게 한 운동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 종교개혁 가들은 악마의 존재를 굳게 믿고 있었다.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에 머물고 있을 때 벽에 있는 마귀를 향해 잉크병을 내던져 생긴 검은 자국이 있으며, 이들은 여전히 마귀, 요술쟁이 등의 존재를 믿고 있었다. 특히 마녀 사냥이 가장 극성에 달했던 시기가 15-17세기임을 상기할 때 이들은 아직 중세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심성상으로는 중세인이었다.

※ 종교개혁가들이 지향한 바는 결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개혁운동이 아니었다.

그들이 추구한 것은 단지 가톨릭교회의 잘못된 교리체계와 관행들을 바로 잡아 초기 교회의 순수한 신앙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지향하는 목표는 과거였으며, 이들이 운동을 전개하면서 나타나는 실천들 속에서는 근대적 요소보다 권위적 요소가 강하 게 드러날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설파한 교리 속에는 근대민주사회의 뿌리가 될 씨앗들이 존재하고 있었고, 권위에 대한 반항은 보다 진보적인 운동과 사고에 영향을 끼 칠 수밖에 없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종교개혁 자체는 근대의 출발이 아니나 그 내면에 는 근대를 열어가기에 충분한 잠재력이 내포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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