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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은 빈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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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공간공감(空間共感) 18

59

공간은 빈틈이다

토지정보 구축 및 관리체계가 채 성숙하지 않은 국가들의 토지정보 현황을 보면 과연 이래도 괜 찮은지 싶을 정도로 심각하게 우려되는 경우를 심심찮게 마주친다. 필자가 관여했던 어느 개발 도상국의 사례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국토 면적은 넓은 편이나 토지 전산 등록률은 5~60%

선에 그치고 있으며, 그 전산 등록된 토지정보 역시 질적으로 오류가 많다 보니 여전히 종이 서 류 기반의 행정 처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스마트폰과 같은 국민의 IT 사용 수준은 우리나라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일 정도로 발달해 있지만, 정부가 구축해 놓은 디지털 정보는 신뢰를 못 주 는 것이다. 여전히 민원 행정을 위해서는 일일이 행정당국을 방문해야 하며, 단계별 업무를 처 리하는 데 수일 혹은 수 주의 기간이 소요되고, 정보의 현행화 여부를 알 수 없으니 각종 공증과 인증 과정을 부가적으로 거쳐야 하는 등 숱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전산 등록 자료를 훑어보는데 오류투성이다. 필지정보의 주요 요소를 다루는 각종 필드의 필 수 입력 값이 누락되어 있는 경우도 많고, 숫제 단위 혼용으로 전혀 다른 면적이 등록돼 있기도 하며(헥타르와 제곱킬로미터를 혼동하는 바람에), 탈세 목적이나 공무원 결탁 등에 의해서 고의 누락된 정보도 꽤 여럿 있었다. 속성 데이터의 오류 현황이 이 정도 상태이다 보니 도형 데이터 의 오류 역시 예상대로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옆 필지와의 경계가 중첩되거나 이격되 어 정합이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는 비일비재하고, 다수의 필지가 동일한 도형 모양의 동일 좌표 로 등록되어 있는 것도 무수히 발견되었다. 누군가 ‘복사 붙이기’의 무한 반복 수행으로 작업물 량을 채우고 넘긴 것을 검수 과정 없이 시스템에 등록한 탓일 게다.

어쩌면 이러한 자잘한 오류 추적 및 수정 작업을 하느니 차라리 아예 새로 우리나라 지적재조 사와 유사한 사업을 통해 데이터를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게 더 효과적일 것 같다는 의견도 나누 었으나 사실 이 작업에 투입될 예산이나 작업 기간을 고려할 때 그리 녹록치 않은 상황이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무자들의 의지일 텐데, 데이터 오류로 인해 분쟁이 발생하면 그때그때 해 임영모 | (주)웨이버스 부장, 「맵인사이트: 지도를 보는 따스한 시선」 저자(0dur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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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국토 제457호(2019. 11) 공간공감(空間共感) 18

결하면 되며, 위치의 정확성은 면적의 정확성보다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담당자와의 인 터뷰는 이 문제 해결이 쉽지 않을 것을 예견케 하였다. 아무리 문화적 차이를 고려한다 쳐도 쉽 게 수긍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모든 게 ‘빈틈없이’ 딱 맞아떨어져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의 시각으로는 향후 더 큰 문제를 야기하기 전에 오류 정비가 필요할 것으로 판단되었지만, 그러한 문제에 아랑곳없이 일단은 목표 작업물량 채우기에만 급급한 모습에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빈틈없이 딱 맞아떨어지는 것에 대한 기획 분야의 용어로 ‘MECE(Mutually Exclusive Collectively Exhaustive, 상호 배제와 전체 포괄)’라는 것이 있다. 쉽게 풀어서 설명하자면 다 수의 요소가 있는 집합을 특정 기준으로 분류할 때 ‘겹치지 않으면서 빠짐없이 나눌 수 있는’ 기 준에 의한 분류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1).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기획 분야 는 현상이나 자료 분석에 대한 남다르고 월등한 감각을 요구하게 된다. 같은 사물이나 사실을 보더라도 자신의 시각으로 보려고 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흔히 말하는 통찰(Insight) 능력이 요 구되는데, 이를 위해서 기획 분야에 입문하는 후배들에게 가장 먼저 설명하고 훈련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MECE 분류법이다. 수많은 자료를 하나의 그룹 안에서 병렬로 나열하는 게 아 니라 다양한 분류 기준을 통해 특징적으로 그룹화해 보면서 사용자의 편리성이나 고객 요구사 항 부합성, 서비스 차별성 등을 기획해 나간다. 데이터들을 각종 기준에 의해서 그룹화하고, 요 구사항들을 분류하고, 화면 메뉴를 구성하는 등 많은 작업들이 MECE 분류 원칙을 기본으로 하 고 진행된다. 이러한 분류 과정에서 가장 큰 원칙은 앞서 말한 ‘겹치지 않으면서 빠짐없이 나눌

1) https://ko.wikipedia.org/wiki/MECE (2019년 10월 27일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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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수 있는’이라는 기준이다. 집합 내 모든 원소가 분류에 의해서 소진되어야 한다. 부분집합의 총

합이 전체집합과 맞아 떨어지는 것으로, 여기에는 빈틈이 없으며 생겨서도 안 된다.

습관처럼, 지도와 같은 공간정보라는 것은 마땅히 빈틈이 없어야 한다, 라고 정의하려고 하 다가 문득 손을 멈추었다. 토지정보에서 빈틈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MECE에 의해서 모 든 원소를 어느 집합에든지 포함해서 소진해야 했던 것처럼, 대부분의 공간정보는 모든 공간이 특정 속성에 의해서 분류되고 정의돼 완결된 형태로 다가왔다. 토지나 행정 경계 데이터를 지도 위에 그리면 그로 인해서 모든 공간이 경계 구분되어 남음이 없어야 하며, 토지피복도를 그리거 나 토지이용도를 그리게 되면 정의된 어느 분류에든지 반드시 포함되어 있어야만 하는 게 원칙 이다. 그것이 과학적이고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결과인데, 갑자기 생각을 뒤집어보고 싶어졌다.

지도 역시 그림의 일종이라고 생각한다면, 어쩌면 ‘여백의 미’라곤 전혀 없이 모든 공간이 온갖 정보로 빡빡하게 들어차 있는 갑갑한 그림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공간정보라는 용어에서 ‘공간(空間)’이라는 한자는 ‘빌 공(空,)’ ‘사이 간(間)’, 즉 ‘빈틈’이라고 해석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졌다. 영어의 ‘space’, ‘spatial’ 역시 한자의 공간과 마찬가지로 ‘비어 있음’을 뜻한다. 공간이라는 개념은 원래 빡빡하게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니라 느슨하게 비어 있 는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말이었을 것이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글자 사이를 스페이스 바를 눌러 서 떼어 놓듯이 정보 사이에 빈틈을 만드는 것이 space의 개념일 것 같다. 원래 비어 있음이 매 력인 공간을 정보라는 이름으로 정의하고 데이터라는 잣대로 채우려고만 했던 것은 아닌가 돌 이켜 보게 되었다. 지금까지 이 분야에서 근무하면서 그 빈틈을 정보로 채우는 작업을 주로 진 행했다. 어릴 적 도화지에 빈틈없이 물감을 칠하듯이 모든 대상을 분류에 의해서 나누고 포함하 고 정의하는 작업이었다. 그렇게 만든 결과물은 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라는 것이 불가능할 것 처럼 완성된 구조의 흔들림 없는 작품처럼 여겨졌다.

지금까지 공간을 무언가로 가득 채우려던 것에서 한 걸음 물러나서, 공간을 관망하며 빈틈 을 만들기 위해서 비워내 보는 것은 어떨까 싶어졌다. 문득 근대 서양지도 곳곳에 적혀 있던 ‘테 라 인코그니타(Terra Incognita, 미지의 땅)’라는 용어가 다시 떠올랐다. 아직 가보거나 발견하 지는 못했으나 무언가 있음직한 땅에 대해서 공간정보업계 선조들은 ‘테라 인코그니타’라고 버 젓이 표기하곤 했다. 그들은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굳이 허투루 정의하거나 섣불리 채우려고 하지 않았다. “저 바다 너머 공간에 뭔가가 있을 것 같은데 잘 모르겠어. 저 빈틈에는 그냥 미지 의 땅이라고 붙여두겠어.”

공간에 대해서 기존에 정의되었던 것을 덜어내면 또 다른 형태의 빈틈이 생기고, 그 빈틈은 다 양하고 무한한 가능성으로 주어질 것 같다. 어차피 ‘공간은 빈틈’이라는 생각으로 그 빈틈을 굳이 성급하게 채우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될 것 같기도 하고, 너무 골똘히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 같기 도 하다. 그러한 공간에 대한 생각의 여유가 또 다른 창조적인 발상을 이끌 테니 말이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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