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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 Teuk01 Korean Kim Se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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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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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의 어제와 오늘 김세중 국립국어원 공공언어지원단장 한국어는 어디에서 왔을까?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이런 궁금증은 누구나 가질 법하지만 속 시원한 답은 아직 없다. 분명한 것은 오늘날의 한국어는 아주 오래 전 시기부터 쓰여 오면서 꾸준히 변화해 왔을 것이라는 점이다. 흔히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했다는 데서 한 발 더 나아가 세종대왕 때부터 비로소 한국어가 쓰인 것으로 오해하는 사 람들이 적지 않다. 이러한 오해는 흔히 언어와 문자를 구별하지 못하고 뒤섞어 생각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세종대왕 은 새로운 문자를 창제한 것이지 언어를 새로 만든 것이 전혀 아니다. 한국어는 세종대왕 이전에도 세종대왕 이후와 마 찬가지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다만 세종대왕 이전에는 한국어를 적을 수 있는 표음 문자가 없었을 뿐이다. 언어와 문자는 전혀 다른 개념인데 이를 구별하지 못하고 혼동하는 사례는 평범한 보통 사람들에게 나타남은 물론이 요 상당한 지식층이라고 할 수 있는 교수, 언론인들에게서도 보인다. 다음은 그런 사례들이다. 뿌리깊은 나무 외국 반응 ‘후끈’… “한글은 세계 최고의 언어” 지금도 세계 언어학자들의 극찬과 그들의 한글 연구가 계속되는 한 가장 우수한 문자 ‘한글’이 세계 공용어가 되는 날도 멀지 않았을 것이라 짐작된다. 언어와 문자가 구별됨은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평생 문자를 사용하지 않고, 다시 말해 쓰지도 읽지도 않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을 문맹자 또는 비문해자라고 한다. 현재 한국의 문맹률은 매우 낮지만 광복 직후에는 매우 높았다. 아직도 70 대의 20% 가량은 비문해자라는 통계가 있다. 그들은 간판을 읽지 못하고 신문이나 책을 읽지 못한다. 비문 해자는 글을 읽고 쓰지 못할 뿐이지 말은 자유롭게 한다. 지구상의 언어 중에는 아예 문자가 없는 언어도 적지 않게 존재한다.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문자 생활 을 하지 않는다. 이런 예에서도 언어와 문자는 전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이 태어나서 처음부터 문자를 배우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입말을 배우고 학교에 들어갈 무렵 문자를 배우게 된다. 문자를 배우기 전의 유아들도 이미 모어 를 훌륭하게 구사한다. 이런 데서도 언어와 문자는 구별됨을 알 수 있다. 요컨대 언어는 문자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다. 언어가 있고 그 다음에 그 언어를 적기 위한 문자가 만들어졌다.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 이전에 한국인들은 사용하는 언어를 적기 위해 고심했다. 물론 한자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 다. 삼국시대의 비석에 새긴 금석문은 한자를 이용해 한국어를 적은 사례다. 552 년 또는 612 년에 쓰였다고 추정되는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은 비석에 한자 74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壬申年六月十六日 二人幷誓記’로 시작되는데 그 어 순이 중국의 한문 어순과 다른 우리말 어순으로서 “임신년 6 월 16 일에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하여 기록한다.”의 뜻으로 추정된다. 신라인들은 또 향가를 지었는데 한자의 훈과 음을 이용해서 절묘하게 한국어를 적었다. 오늘날 향가 25 수가 ‘삼국유 사’와 ‘균여전’에 전해지고 있다. 이두와 구결이 있다. 이두는 주로 실용문의 기록에 이용되었는데 완전한 한문도 아니요 완전한 한국어도 아니다. 한문을 바탕으로 하되 한국어의 조사, 어미 등의 요소를 한자를 이용하여 표기하였다. 구결은 한문에다 한문을 읽기 위하여 필요한 토를 한자를 이용하여 달아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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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한국인들이 사용했던 한국어 어휘를 보여주는 자료로는 ‘계림유사’가 있다. ‘계림유사(鷄林類事)’는 1103 년 고려 숙종 때에 송나라 사신 손목(孫穆)이 고려 수도 개경에 와서 고려의 문물을 기록한 책인데 당시 고려 사람들이 쓰던 말을 한자로써 기록해 놓았다. 天 曰 漢捺,(하늘), 鬼 曰 幾心,(귀신), 弓 曰 活 (활), 雲 曰 屈林,(구름), 被 曰 泥不,(니불), 畵 曰 乞林,(그림), 行 曰 欺臨,(걸름), 木 曰 南記,(남기) 역시 고려시대 자료인 ‘향약구급방’에는 당시의 약재 180 가지를 한자로 기록해 놓았는데 오늘날에도 사용되는 말이 많이 있다. ‘창포, 인삼, 맥문동, 황기, 결명자, 당귀, 오가피, 산수유, 호도, 박하, 우황, 웅담’ 등은 그런 예다. 물론 한자 로 표기되어 있으므로 그 한자의 당시 발음이 오늘날과 같은지 여부는 확실치 않으나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예들에서 오늘날 우리가 쓰는 한국어가 오래 전부터 쓰여 온 말임을 알 수 있다. 아쉬운 것은 한국어의 오래 전 모습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매우 한정되어 있고, 또 그것이 한자를 이용했기 때문에 당시 의 발음을 추정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다는 것이다. 이러한 한계를 딛고 고대 한국어의 역사를 밝히려는 학자들의 노력 은 계속되고 있다. 한국어의 역사에서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은 15 세기 초다. 조선 3 대왕 태종의 셋째 아들인 세종은 재위 32 년 동안 여 러 방면에 걸쳐 걸출한 업적을 남겼지만 한글 창제는 그 중에서도 후세에 끼친 영향으로 볼 때 단연 압도적이다. 국방에 힘써서 국경을 확실히 했고 농사법을 연구하고 음악을 정리했으며 과학기술의 발전에도 큰 업적을 쌓았으나 최만리를 비롯한 신하들의 끈질긴 반대에도 불구하고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기로 결심한 배경에 대해서는 훈민정음 서문에 잘 드러나 있다. ‘이르고자 할 바 있어 도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 내 이를 가엾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든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극소수 지식인만이 한문을 쓸 수 있었을 뿐 대다수 백성들은 문자 생활을 할 수 없었던 당시에 그들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문자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훈민정음의 창제는 누가 했느냐에 대한 논란이 꽤 오래 있었다. 설마 왕이 직접 했겠느냐는 의문이 끊임없이 제기되 었으나 그 근거는 박약하다. 세종이 친제했음을 의심할 만한 증거는 없다. 다만 해례본의 해례에 대해서는 정인지, 성삼 문, 박팽년 등 7 인의 신하에게 명해서 집필케 한 것은 분명하다. 훈민정음이란 이름으로 태어난 새 문자는 세계 문자사상 매우 특이한 존재다. 대부분의 문자는 어느 특정 시기에 갑 자기 만들어진 게 아니다.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서 끊임없는 변형을 거쳐서 형성되어 왔다. 페니키아문자에서 출발해 서 로마인들이 오늘날의 모습과 비슷하게 만들어 놓은 로마자가 그렇고 중국의 한자가 그러하다. 아시아의 수많은 문자 역시 오랜 세월에 걸쳐서 변형을 거듭하여 형성되었다. 이에 반해 훈민정음은 1443 년 세종대왕에 의해 만들어졌음이 분명하게 밝혀져 있고 더욱이 그 문자 하나하나에 대한 해설까지 집필되어 있다. 세계의 학자들이 훈민정음에 대해 높이 평가하는 것은 창제자와 창제 시기, 그리고 문자에 대한 해설서가 존재한다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문자의 역사를 보면 그림문자에서 표의문자로, 표의문자에서 표음문자로 발달되어 왔다. 그런데 한글은 표음문자 중에서도 자질문자라는 가장 앞선 단계의 문자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ㄱ’과 ‘ㅋ’의 관계는 가획의 원 리에 따라 획 하나의 차이로 드러난다.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로 배우기 쉽고 쓰기 쉬운 문자가 탄생했으나 그 혜택을 온 겨레가 누리는 데는 오랜 시일이 걸렸다. 조선조 500 년 동안 한문, 이두, 한글 이 세 가지 글쓰기 방식이 동시에 존재했으며 양반, 선비들은 한문을 계속 썼고 서리들을 중심으로 이두가 쓰였으며 한글은 부녀자들이 주로 썼다. 행정과 학문, 교육 등 공적 상황에서 한글은 사 용되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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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은 훈민정음 창제와 함께 바로 훈민정음을 이용한 서적을 발간하였다. 125 장에 이르는 용비어천가는 훈민 정음으로 쓰인 최초의 문헌으로서 조선 건국과 왕조의 정당성을 합리화하는 내용을 담았다. 또한 아들인 수양대군으로 하여금 석가의 일대기를 수록한 석보상절을 짓게 하였으며, 세종 스스로 부처의 공덕을 칭송한 월인천강지곡을 지었다. 세조 5 년인 1459 년에는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합쳐서 월인석보를 간행하였다. 15 세기에는 효자, 충신, 열녀들 의 뛰어난 행동을 소개하여 유교적 이념을 전파하고자 엮은 삼강행실도, 부녀자들의 교육을 위해 만든 내훈의 언해본이 각각 나왔다. 16 세기에 들어 훈민정음은 위기를 맞는다. 1504 년 연산군 10 년에 연산군의 폭정을 비판하는 투서가 훈민정음으 로 쓰였고 연산군은 이에 언문을 심각하게 탄압하였다. 연산군일기에 따르면 “언문을 가르치고 배우지도 말며, 이미 배 운 사람도 그것을 사용할 수 없다. 그리고 언문을 아는 사람을 고발케 하라. 사대부 집안에 소장하고 있는 언문과 구결로 된 책은 모두 불태우라.”라고 명을 내렸다. 그러나 이러한 연산군의 조치는 일시적인 것이었고 훈민정음은 여러 가지로 사용되었다. 최세진은 아동들에게 한자를 가르치기 위해 훈몽자회(1527)를 간행하였는데 오늘날 한글 자모로 쓰이는 ‘기역’, ‘니 은’, ‘디귿’, ‘리을’, ‘미음’, ‘비읍’, ‘시옷’, ‘이응’ 등이 훈몽자회에 ‘其役, 尼隱, 池末, 梨乙, 眉音, 非邑, 時衣, 異凝’으로 나 타난다. 15 세기와 마찬가지로 16 세기에도 유교의 이념을 전파하기 위한 목적으로 중국의 ‘소학집성’에 대한 번역이 이 루어져 1518 년에 ‘번역소학’이 1588 년에 ‘소학언해’가 간행되었다. 훈민정음은 한편으로 언중들이 일상 생활 속에서 편지글에서도 쓰이기 시작한다. 주로 부모, 모녀, 부녀, 남매, 부부 사이에 오간 편지글이다. 문학 작품에서도 훈민정음 은 쓰이기 시작한다. 구전되어 오던 고려가요를 ‘시용향악보’, ‘악장가사’, ‘악학궤범’ 등에서 훈민정음으로 기록하였다. 성종 무렵에는 정극인이 ‘상춘곡’을 지었으며 정철의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과 같은 작품이 탄생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도 훈민정음은 편지글에서 많이 쓰였으며 평민 문학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김만중의 ‘구운몽’을 비 롯하여 ‘홍길동전’, ‘유충렬전’, ‘토생전’, ‘숙영낭자전’, ‘사씨남정기’, ‘전우치전’, ‘장화홍련전’ 등의 국문소설이 간행되 었다. 또한 판소리계 사설도 국문으로 씌었다. 훈민정음의 사용이 여러 가지 형태로 이루어지기는 했으나 사회 상층부의 한문 고집은 강력하기 그지없었고 이것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1894 년 갑오개혁 때부터였다. 갑오개혁 이후 순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의 등장을 비롯하여 여러 언론 매체가 한글로 쓰이기 시작했고 한글로 된 교과서가 나오기 시작했다. 1894 년 11 월 칙령 제 1 호 공문식은 종전의 한문 대신에 국문을 공문(公文)으로 쓴다고 공표하였다. 훈민정음이 국 가의 공식적인 문자로서의 지위를 얻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칙령 제 14 조에는 국문을 본으로 하되 한문 번역 또는 국 한문을 덧붙인다는 과도기적인 규정이 있었고 실제로는 과도적인 국한문이 상당 기간 더 널리 쓰였다. 심지어 1908 년 2 월 ‘관보’에서는 각 관청의 공문 서류는 일체 국한문을 교용(交用)하고 순국문이나 이두, 외국 문자의 혼용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함으로써 국문 사용은 후퇴하였다. 그러나 언문일치에서 너무나 벗어난 한문 사용에서 한글을 사용한 언문일 치로의 변화는 역사적 대세였다. 여기서 독닙신문 제 1 호(1896 년 4 월 7 일)의 논설은 주목할만하다. 우리신문이 한문은 아니쓰고 다만 국문으로만 쓰는거슨 상하귀천이 다보게 함이라 또 국문을 이러케 구절을 떼여 쓴즉 아무라도 이신문 보기가 쉽고 신문속에 잇는말을 자세이 알어 보게 함이라 각국에셔는 사람들이 남 녀 무론하고 본국 국문을 몬저 배화 능통한 후에야 외국 글을 배오는 법인데 죠션셔는 죠션 국문은 아니 배오드 래도 한문만 공부 하는 까닭에 국문을 잘 아는 사람이 드물미라 죠션 국문하고 한문하고 비교하여 보면 죠션국 문이 한문 보다 얼마가 나흔거시 무어신고하니 첫재는 배호기가 쉬훈이 됴흔 글이요 둘재는 이 글이 죠션글이 니 죠션 인민 들이 알어셔 백사을 한문대신 국문으로 써야 샹하 귀쳔이 모도보고 알어보기가 쉬흘터이라 한문 만 늘써 버릇하고 국문은 폐한 까닭에 국문만쓴 글을 조선 인민이 도로혀 잘 아러보지못하고 한문을 잘알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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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그게 엇지 한심치 아니하리요 또 국문을 알아보기가 어려운건 다름이 아니라 첫재는 말마디을 떼이지 아니 하고 그져 줄줄내려 쓰는 까닭에 글자가 우희 부터는지 아래 부터는지 몰나셔 몃번 일거 본후에야 글자가 어데 부터는지 비로소 알고 일그니 국문으로 쓴편지 한쟝을 보자하면 한문으로 쓴것보다 더디 보고 또 그나마 국문 을 자조 아니 쓰난고로 서툴러셔 잘못봄이라 그런 고로 정부에셔 내리는 명녕과 국가 문적을 한문으로만 쓴즉 한문못하는 인민은 나모 말만 듯고 무삼 명녕인줄 알고 이편이 친이 그글을 못 보니 그사람은 무단이 병신이 됨 이라 한문 못 한다고 그사람이 무식한사람이 아니라 국문만 잘하고 다른 물졍과 학문이 잇스면 그 사람은 한문 만하고 다른 물졍과 학문이 없는 사람보다 유식하고 놉흔 사람이 되는 법이라 죠션 부인네도 국문을 잘하고 각 석 물졍과 학문을 배화 소견이 놉고 행실이 졍직하면 무론 빈부 귀쳔 간에 그부인이 한문은 잘하고도 다른 것 몰으는 귀죡 남자보다 놉흔 사람이 되는 법이라 우리 신문은 빈부귀쳔을 다름없시 이 신문을 보고 외국 물졍과 내지 사졍을 알게 하려는 뜻시니 남녀 노소 샹하 귀쳔 간에 우리 신문을 하로 걸너 몃달간 보면 새지각과 새학 문이 생길걸 미리 아노라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언중의 표현 욕구를 담기 위해서 한글 사용은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국한문혼용체의 사용이 상당 기간 지속되었다. ‘오등은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로 시작되는 1919 년의 독립선언문은 언문일치가 아직 요원함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갑오개혁 이후 한글 사용이 본격화되면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적지 않았다. 우선 한글 글자를 몇 글자를 써야 할지, 받침에는 어떤 글자를 써야 할지 등과 같은 문제부터 결정되어야 했다. 1446 년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반포 때에는 미처 받침을 어떤 원칙에 따라 어떻게 써야 할지가 명쾌하게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주시경(1876~1914)을 비롯한 20 세기 초기의 국어학자들은 본격화된 한글 사용에 대해 이를 뒷받침할 여러 문제 를 해결하고자 고심하였다. 아래아자를 폐지할 것인지, 된소리를 적을 때에 어떤 글자를 쓸 것인지, 받침에 어떤 글자를 쓸 것인지를 놓고 1907 년 설립된 국문연구소에서는 2 년 동안의 연구 끝에 1909 년 12 월 최종 방안을 마련하여 ‘국 문연구의정안’을 제출하였지만 1910 년 국권 상실로 공포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1912 년 보통학교용언문철자법이 제 정되어 아래아가 폐지되었다. 이후 1921 년, 1930 년에 정서법은 조금씩 개정되었다가 1933 년 조선어학회에서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만들어 발 표하기에 이르렀다. 그 때에 비로소 지금과 같은 11 개의 겹받침을 사용하기로 하였고 이 점은 남북한이 같다. 이 시기 에는 또한 한국어 사전 편찬이 시도되었다. 한국어 사전을 편찬하기 위해서는 표준어가 먼저 결정이 되어야 했고 1936 년에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이 발간되었다. 사전 편찬은 한국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1957 년 6 권으로 된 사전이 완간된다. 1857 년부터 편찬이 시작되어 1928 년 초판이 발간된 옥스퍼드 영어대사전에 비하면 매우 뒤늦었지만 짧은 동안에 이런 사전을 만들어낸 것은 대단한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여기서 ‘한글’이라는 명칭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훈민정음’은 줄여서 ‘정음’이라고도 불리었으나 ‘한문’에 대응되는 ‘언문’이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쓰였다. 20 세기 초 국권 상실 전까지는 ‘국문’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 국권 상실 후 1910 년 8 월 10 일에 발행된 ‘보중친목회보’에 주시경이 ‘국어’ 대신에 ‘한나라말’, 국문’ 대신에 ‘한나라글’을 썼고, ‘한 나라말’을 줄여 ‘한말’이라는 표현도 썼다. 이때의 ‘한’은 대한제국(大韓帝國)의 ‘한’임이 분명한데 동시에 ‘크다’, ‘하나’의 ‘한’이기도 하다. 그러다가 1911 년부터 1913 년까지 ‘배달말글’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한글’이란 말이 최초로 사 용된 것은 1913 년 3 월 23 일 “... 본회의 명칭을 ‘한글모’라 개칭하고...”라는 ‘한글모죽보기’이다. 이어서 1913 년 9 월 잡지 ‘아이들보이’에는 ‘한글풀이’라는 난이 보이고 1914 년 4 월 조선어강습원의 명칭을 아예 ‘한글배곧’(한글을 배 우는 곳)으로 바꾼다. 본격적으로 ‘한글’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것ㅇㄴ 1927 년에 동인지 ‘한글’이 간행되면서부터이 고 ‘가갸날’이라고 부르던 훈민정음 반포일을 ‘한글날’이라고 고쳐 부른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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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는 20 세기에 큰 변화를 겪었다. 일제강점기에 한국어는 절대적인 위기를 맞는다. 일제는 1930 년대 후반 한 국어 사용을 전면 금지하였다. 한국어로 간행되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1939 년 폐간된다. 학교에서는 한국어 사용 이 금지되었다. 완전한 암흑기였다. 한국어의 역사가 단절될 뻔한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러나 1945 년 8 월 15 일 일 본이 항복하고 한국어는 다시 광명을 찾았다. 미군정 초기인 1945 년 11 월 교과서를 한글로 만들 것을 명했으며 1948 년 정부 수립 후 공문서는 한글로 쓴다는 내용의 ‘한글 전용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었다. 한국어 교육은 정상화되 고 언어생활에 스며든 일본어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노력이 전개되었다. 일본어 잔재는 지난 수십 년의 노력 끝에 일본어임이 확실한 말은 대체로 청산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일본식 한자어는 여전히 한국어 속에 상당히 깊이 침투해 있다. ‘입장(立場)’, ‘역할(役割)’, ‘축제(祝祭)’와 같은 한자어를 쓰지 말아야 한 다는 주장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으나 받아들여서 쓰자는 주장도 있다. 일본어의 영향이 급속도로 줄어든 반면에 영어계 외래어의 유입은 가파르게 늘어나고 있다. 한국인들의 의식 속에 일 본어에 대한 경계심은 매우 강하지만 영어에 대한 거부감은 매우 약한 편이기도 하고 최근 들어 인터넷을 통해 정보의 교류가 예전에 비할 수 없이 빨리 이루어지기 때문에 영어계 외래어는 더욱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외래어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함께 존재한다. 어휘를 풍부하게 해주는 면이 있는 반면에 원래의 한국어를 위축, 약화시키는 면이 있다. 따라서 어떤 외래어를 놓고, 그것이 한국어 어휘를 풍부하게 해주는 것인지 다른 한국어 단어를 쓰면 될 뿐이요 불필요한 외래어 사용인지 하나하나 따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한국어는 오늘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가? 1999 년에 한국에 큰 논쟁이 벌어졌다. 조선일보가 영어를 공용어로 할 것 이냐를 찬반양론에 부쳐서 몇 개월에 걸쳐서 지상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뚜렷한 결론 없이 끝나고 말았지만 영어를 공 용어로 해야 한다는 주장도 상당한 세력을 갖고 있음이 드러났다. 물론 그 후로도 한국에서 영어를 공용어로 하려는 어 떠한 시도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쨌거나 한국에서 영어에 대한 열풍이 얼마나 강한지를 잘 보여준 사례이다. 영어의 힘이 과거 어느 때보다 강한 만 큼 영어를 배우고 영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작용한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강박관념은 지나친 것이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이 있다. 영어가 세력이 강하다고 한국어를 버리고 영어를 쓰자는 발상은 그 런 것과 같은 것이다. 일부 한국인들의 조급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언어는 문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한국어에는 한국문화가 스며들어 있다. 겨레의 고유한 사상, 감정, 생 각이 들어 있다. 한국어를 불필요하다고 부정하는 심리에는 한국문화를 부정하는 생각이 들어 있다. 이 점을 가볍게 여 겨서는 안 된다. 그럼 한국어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국어가 한국의 전통문화를 간직하고도 있지만 한국어로 쓰여진 문학, 사상, 과 학기술이 풍성하게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한국어로 쓰인 아름다운 문학작품이 계속 만들어지고 한국어로 된 과학기술 전문용어가 계속 만들어진다면 한국어는 튼튼히 살아남을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한국어는 존재 자체가 위협 받을 것이다. 한국어는 앞으로 갈 길이 멀다. 우선 남북한 언어 차이를 극복하는 일이 남아 있다. 남북의 언어 차이는 오랜 분단 경 험으로 매우 달라져 있다. 이를 극복하고 서로 소통이 원활하게 되도록 하기 위해 언어 차이를 해소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한편으로 표준어의 강력한 보급으로 지방 사투리의 붕괴, 소멸이 매우 심각한 실정에 있다. 이는 대가족 제도의 해체 와도 관련이 있기 때문에 쉽사리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대로 방치하다가는 방방곡곡의 아름다운 정 서가 살아 있는 말들이 사어가 될 위기에 있다. 표준어의 보급이 충분히 된 만큼 방언을 보존하는 노력이 활발히 이루어 져야 할 것이다. 표준어와 방언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고 양립이 가능하고 양립해야 한다. 문화 다양성의 시대에 방언의 소멸은 그만큼 문화의 소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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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의 위상은 한국의 국제적 지위 향상과 함께 오늘날 역사상 가장 우뚝 서 있다. 사용 인구 면에서 7,500 만 명 정도로 세계 13 위 정도로 평가된다. 최근 한국어는 국제적 위상이 더욱 공고해졌다. 국제특허협약조약(PCT, Patent Cooperation Treaty)의 국제 출원을 위한 국제 공개어로 되었다.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일본어, 러시아어, 스페인 어, 중국어, 아랍어에 이어 한국어와 포르투갈어가 추가됨으로써 특허를 출원할 때에 한국어로 작성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어의 문법을 세련되게 다듬고 어휘를 풍부하게 하는 일,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생소한 한자어나 낯선 외국어를 사 용하지 않도록 하는 일, 정보화시대에 한국어를 풍부하게 쓸 수 있도록 편리한 사전을 제공하고 동의어, 유의어 등을 찾 아볼 수 있게 하는 일, 여러 외국어로의 대역 사전을 만들어 언어 장벽을 해소하는 일 등 한국어 발전을 위해 해야 할 일 이 많이 남아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한국어는 더욱 활발하게 사용되어 한국어 사용자들의 소통과 문화 창달에 기여할 것이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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