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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의 민족 정체성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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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김현우*

목 차 1. 들어가는 말

2. 나철의 대종교 설립과 민족의식 3. 대종교의 교리와 민족인식 4. 결론

<국문초록>

근대전환기 발생한 4대 민족종교는 민족의 위기를 종교를 통해 극복하고자 노 력하였다. 그 중 대종교는 단군신화를 종교화하였다는 점에서 우리사회에 근대적 민족주의 형성에 기여하였다.

본 연구는 대종교 형성과정에서 우리 민족을 정형화하고 교리화하는 과정을 고 찰하고자 한다. 나철은 1900년대 도쿄[東京]로 가서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를 비 판하였으며, 을사오적 암살 시도라는 급진적 항일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던 그는 1909년 이후 소수 지식인의 한계를 느끼고 전 국민이 참여하는 항일운동을 도모하기 위해 대종교를 창설하였다. 그는 유교적 지식을 버리고 신화 속의 남겨 진 단군을 민족적 신으로 재정립하였다. 이 과정에서 단군은 민족의 시조로 등장 하고 민족적 정체성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대종교는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근거지를 간도로 옮기고 지속적으로 항일운동 을 펼쳤으며,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 등의 무장투쟁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해방 으로 항일투쟁이 종료된 이후 대종교는 타 민족종교와는 달리 교세가 급격히 위축 되었다. 민족적 위기 극복에 치중한 나머지 해방이후에는 교단의 방향성이 모호해 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개천절, 고조선, 배달민족 등 근대전환기 우리 민족의 정

* 조선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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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성을 성립하는데 있어서 대종교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주제어 : 대종교, 단군교, 나철, 오기호, 단군, 한얼, 개천절, 민족정체성

1. 들어가는 글

大倧敎는 1909년 羅喆이 우리나라 단군을 토대로 설립한 민족종교이 다.1) 근대 전환기 민족종교는 유불도 및 기독교 등 수입종교와는 달리 우 리민족의 원형적 신앙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교단을 갖춘 새로운 종교로써 구체적으로는 東學(天道敎), 大倧敎(檀君敎), 甑山敎, 圓佛敎 등을 지칭 한다. 이중 대종교는 고유의 전통을 중심으로 했다는 점에서 민족 정체성과 관련이 깊었다.2)

나철은 오기호, 정훈모 등과 함께 1909년 1월 15일 대종교(창립시 명칭은 단군교)를 설립한다. 이 과정에서 나철은 두 차례에 걸쳐 道人과의 만남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伯佺과의 만남이다. 1906년초 나철은 을사조약에 가 담한 대신들을 암살하기 위해서 서울로 돌아온 후에 백전을 만났는데, 이때 그에게서 대종교의 경전인 뺷三一神誥뺸, 뺷神事記뺸을 받았다고 한다.3)둘째

1) 1909년 나철이 설립한 대종교의 초기 명칭은 단군교이다. 대종교로의 개칭은 1910년 7월, 일제 탄압을 피하고 교단내 친일세력을 제거하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정훈모 는 이에 반발하여 ‘단군교’라는 명칭을 고수하였으며 이때 대종교와 단군교가 분리하였 다. 본 연구에서 사용하는 단군교는 모두 대종교로 정훈모의 단군교를 의미하지는 않는 다. 한편, 대종교 교리상으로 보면 檀君은 일반적인 신의 명칭이고 大倧은 종교적 능력 과 관련한 의미로, 기독교의 예수와 그리스도간의 관계라고 볼 수 있다.

2) 檀君은 三國遺事, 帝王韻紀 등의 단군신화의 주연이다. 이를 근거로 단군과 고 조선의 실존에 대한 많은 논쟁이 있었다. 특히 일제감정기에는 식민지화로 인해 단군신 화를 역사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많은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고대 신화가 단순히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에서 볼 때, 단군은 우리 민족의 원초적 모습을 담고 있다 고 보아야 하고, 본 연구에서도 이 같은 관점에 근거하여 논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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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4차 도일시였던 1908년 12월에 杜一白과의 만남이다. 이 때 두일백은 나철에게 뺷檀君敎佈明書뺸와 뺷古本神歌集뺸 및 뺷入敎節次뺸 등의 책을 주 었고, 나철이 단군교를 창설하게 하는데 큰 영감을 주었다고 한다.4)

대종교가 창립된 후 교세가 급속히 확장하였는데, 뺷대종교중광60년사뺸에 의하면 1910년 6월말에는 서울 2,748명, 지방 18,791명 등 약 2만여 명의 교 우가 있었고, 그해 10월 25일에는 만주 북간도 삼도구에 지사를 설치하였다 고 한다. 일제는 이후 대종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1911년에 본거를 백두산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이후 대종교는 자연스럽게 만주지역에 있는 독립군 집합소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교세가 30만에 다다 르자 일제의 간섭과 탄압으로 그 본거지를 국내에서 만주, 중국, 러시아 등 으로 옮기게 되었으며, 1915년 종교통제안으로 국내에서는 폐교처분을 당 하였다. 하지만 국내와는 달리 만주에서는 2세교주인 金獻(또는 金敎獻) 과 3세교주 尹世復(또는 尹世麟)에 의해 급속도로 교세가 확산되었으며, 1920년에는 산하의 북로군정서가 청산리전투에서 대승하는 전과도 올리게 된다. 이를 볼 때, 근대전환기 대종교는 단순히 종교에 한정되지 않고 항상 민족의 독립운동과 연결되어 있었다.

본 연구는 이러한 대종교의 민족주의를 나철의 민족관 변화와 종교 교리

3) 본 연구에서 인용하는 三一神誥와 神事記는 대종교유지재단 인터넷사이트 (http://www.daejonggyo.or.kr/), 종학자료실 자료이다. 한편 이 두 책에 나오는 ‘神’자 는 원래 ‘ ’자이나 글자가 유니코드화되지 않아 유사한 글자인 ‘神’으로 표기했다.

4) 대종사총본사, 대종교중광60년사, 1971.을 참조 바람. 한편, 무라야마 지준[村山智 順]에 의하면, 근대시기 단군교의 효시는 金廉白이라고 한다. 김영백은 묘향산에 들어 가 천일기도를 드린 끝에 단군으로부터 성령을 받고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이후 정훈 모는 김염백을 선각자로 받들었다고 한다. 또 韓明允도 김염백에게 신교를 배워 포교했 다고도 한다. 나철과 관련이 있는 白峰과 伯佺도 1904년 10월 3일에 단군교를 포명하였 다고 한다. 이를 종합해 보면, 1909년 나철의 단군교 창립이전 20여 년 전부터 이미 단군 을 주신으로 모시는 단군교가 북한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홍철, 「단군신앙의 실태와 그 특성」, 고조선단군학 1, 1999, 228~229면 참조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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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이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통해 철학적으로 추론하고자 한다.5) 즉 단군이 나 단군신앙에 분석보다는, ‘대종교의 활동과 인식이 근대전환기 한국사회 에서 민족이라는 전통의 단절과 근대의 형성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하였고, 또 현재까지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중점적으로 다룰 것이다. 이 를 위해 2장에서는 1905년 을사늑약의 시점부터 1910년 한일강제합방까지 의 대종교 초기의 민족의식 형성을 정리하고, 3장에서는 대종교의 일제강 점기 독립운동 및 조선학운동 등과의 관계 등을 정리하고자 한다.

한국 근대를 연구함에 있어서 근대적 민족의식의 정립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이러한 민족의식은 종교와 결합하여 보다 강화되었다. 대종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다른 종교, 다른 민족종 교와는 달리 대종교는 우리의 전통 신화인 단군을 신으로 모신다. 이런 점 에서 대종교는 다른 종교보다 강한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본 연 구를 통해 현재도 사회 각 영역에서 다양한 영향을 미치는 한국의 민족주 의가 다소나마 규명되기를 기대한다.

2. 나철의 대종교 설립과 민족의식

나철은 실질적인 대종교 창시자로서 교단에서는 홍암대종사로 불린다.

나철의 본명은 羅寅永으로 1863년 전라남도 보성에서 출생했다. 29세 때

5) 현재 근대전환기 민족종교에 관한 연구는 주로 종교적인 측면에 국한되고 철학적인 면에서의 고찰은 다소 미진한 편이다. 다만, 대종교의 경우는 민족사와 연관된 부분이 있기 때문에 철학과 사상적인 측면에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엄진성은 「단군연구의 철학사적 전개와 전망」(민족문화논총 52,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12)에서 ‘선 행연구들이 대부분 역사, 민속, 신화 등에 기초한 연구들로 철학적 접근은 제한되고 있 다고 설명하고 있다. 다만, 이럴 경우 한국적 측면의 단군이 철학이라는 보편학문으로써 인정받기 위해서는 철학개념의 재설정이 요구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김현우․이경원도

「민족종교에 나타난 한국 정신문화의 원류」(한국철학논집 52, 한국철학연구회, 2017) 에서 민족종교를 광의의 철학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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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에 급제하여 承政院假注書와 承文院權知副正字를 거쳤으며, 33세 때 徵稅署長으로 발령받았으나 응하지 않고 구국운동에 뛰어들어 1904년 오기호, 이기, 김인식, 정훈모 등 호남출신 우국지사들과 維新會를 조직하 였다.6) 러일전쟁이후 국권이 급격히 일본에게 넘어가는 1905년 6월에 그는 오기호와 함께 일본으로 가서 일본의 국권침탈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오기 호는 나철과 더불어 일본에서의 활동한 내용을 ≪황성신문≫에 기고하여 국민들과 정부에 일본의 침략성을 알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금일 저희들의 일본행이 바로 우리 한국 이천만 국민의 동정이요 의무입니다.

이 강화결과에 감히 마냥 좌시하지 못하여 귀경[도쿄]에 들어온 지 벌써 며칠이 지났으나 감히 뵙기를 청하지 않고 격식에 맞지 않으나 감히 충정을 펼쳐 또한 아래 6개조를 덧붙이니 삼가 각하께서는 행여나 우리 세 사람의 고함을 배척하 지 마시고 특별히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6개조

1. 한일청 삼국 연합동맹으로 동양의 국면을 보존하는 일

2. 한국의 독립과 주권을 보전하고 의정서 제3조의 취지를 실천하는 일 3. 주한국공관의 공사이하 직원을 공렴과 강단으로 아우르고 한국 관료와 친

하지 않은 자를 택하여 보내고 의정서 제1조의 취지를 실천하는 일 4. 한국조정에 권고하여 나라를 망치는 간세배를 출척하고 시무를 아는 준걸

로써 정치를 쇄신하고 국민의 의혹과 원한을 없애도록 하는 일 5. 무릇 한국인이 일본에 들어오는 것은 물론 관인, 평민 이른바 운동 및 소개

하는 잡류배들을 축출하여 이로써 양국의 사로를 막고 양국 교제를 중히 여기는 일

6) 허태근, 弘巖 羅喆의 大倧敎 重光과 朝天 硏究, 부경대학교 박사논문, 2015. 11~

12면 참조 바람. 한편, 김동환은 지금까지 나철에 대한 연구는 주로 독립운동사 측면에 서만 다루어졌고 그의 종교 및 정신적 측면에서의 연구는 소홀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 나철의 사상은 유교적 우국주의, 단군교계승주의, 단군민족주의, 사해일가주의, 만교합일주의, 국수주의, 종교적 민족주의 등으로 부르고 있는데 이는 모두 일차적인 분석이다. 김동환, 「홍암 나철의 사상과 독립운동방략」,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9, 2002, 99면 참조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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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무릇 일본인이 한국에 거주하면서 공장을 벗어나 사적 이익을 도모하는 것 을 일체 금지시켜 한국인이 각각 그 사업에 안주하도록 하는 일

7)

그러던 중 나철은 을사늑약 체결 관련 소식을 듣고 1906년 1월에 급히 서울로 귀국하였다. 그는 이때 서울에서 伯佺이라는 백발노인을 만나게 된 다. 백전은 자신을 ‘호는 頭岩이고 나이는 90세라 소개하고 백두산에 있는 白峯神兄의 명으로 뺷삼일신고뺸와 뺷신사기뺸를 전한다.’하고 사라졌다 한다.

대종교 창시에 있어서 이 이야기는 ‘나철이 신에 의해 선택된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설화로 정확한 사실여부는 확인하기 힘들다. 당시 나철은 백 전 또는 대종교에 크게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을사늑약을 체결한 일본과 이를 추진한 정부 대신들에 그의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른바 을사오적을 척결하기로 결의하고 오기호 등과 함께 자금을 모 아 권총 50여정을 구입하고 결사대를 모집하였다. 1907년 1월에 길에서 오 적을 암살하려고 했지만 지방에서 결사대원이 원하는 시간에 모이지 않았 다. 또 성급히 이루어졌던 권중현의 암살이 실패로 끝나고 이로 인해 대원 들이 체포되자 나철은 동지들의 석방을 위해 자수하여 10년 형을 받게 되 었다. 이후 고종의 특사로 사면되었으나 이로 인해 나철의 독립투쟁은 전환

7) 오기호, 「寄書」, ≪황성신문≫, 1905. 09. 02 ; 僕等今日之行이 卽我韓二千萬國民之 同情也오 義務也 而迨玆媾和結果之日에 不敢偃然坐視 故로 跋涉入貴京이 已有 日 而不敢請謁하고 不拘公格하고 敢陳愚衷而又敢附達六條하니 伏惟閣下 幸勿 以三個人所告로 斥之하고 特加採納焉하소셔

附六條

一 日韓淸三國聯合同盟永保東洋大局事 一 保全韓國獨立主權實踐議定書第三條趣旨事

一 駐韓公舘公使以下幷以公廉剛斷及不與韓官人親面者擇送實踐議定書第一條 趣旨事

一 勸告韓廷誤國奸細輩幷卽黜斥而以識時賢俊選擧使政治刷新使國民無疑怨事 一 凡韓國人之入日本者勿論官人平民所謂運動及紹介之雜類輩隨卽逐出以杜兩

國私路以重兩國交際事

一 凡日本人之僑居韓國侵越公章及營圖私計者一幷痛禁使韓民各其安業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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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기 시작한다.

나철은 1906년에 이어 1908년 11월에 다시 일본으로 가서 을사늑약의 부 당성을 알리고자 하였다. 그런데 그해 12월 5일 일본 동경에서 杜一白이라 는 사람을 만난다. 그는 나철이 일전에 서울에서 만난 백전을 언급하면서

‘그가 백전 등 32인과 함께 白峯神師에게 도를 받았다’고 소개했다. 또한 그는 나철에게 뺷檀君敎佈明書뺸, 뺷古本神歌集뺸, 뺷入敎節次뺸 등의 책을 주었다고 한다. 두일백은 12월 9일에도 나철을 찾아와 “국운이 이미 다하였 는데 어찌 이 바쁜 시기에 쓸데없는 일로 다니시오. 곧 귀국하여 단군대황 조의 교화를 펴시오.”라고 하며 동석했던 鄭勳模에게 靈戒를 주었다.8)

두일백이 전한 세 권의 책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뺷단군교포명서뺸로 그 안에는 ①단군(대황조)과 그 후세의 통치, ②箕子의 유입과 혼란, ③고구려 의 발흥과 단군 숭배, ④불교의 유입과 백제, 고구려의 멸망, ⑤단군의 계승 한 발해 성립과 불교와 유교로 인한 통일신라의 멸망, ⑥고려태조의 단군숭 배와 이후 불교의 폐단, ⑦조선태조의 단군숭배와 유교의 폐단, ⑧단군과 우리민족과의 관계, ⑨민족종교로서 단군교의 정당성과 필요성 등의 내용 이 포함되어 있다.

이 책은 우리민족이 단군을 숭상했을 때는 민족이 흥했고, 불교와 유교 등으로 인해 단군이 잊혀 졌을 때는 어김없이 나라가 혼란에 빠지거나 멸 망했다고 적고 있다. 이러한 기술은 민족이 하나의 사상으로의 통일되어야 한다는 사고로 이어졌다. 나철은 이 포명서를 수용하면서 우리민족의 당대 현실국가인 조선도 당연히 창건과 융성 그리고 쇠퇴와 멸망을 겪는데, 당대 는 그 생명력이 다하는 시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선 역시 역대 우리 민족의 국가들처럼 멸망의 길을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때부 터 그는 국가를 구성함에 있어서 민족 또는 민족정신을 體로, 현실의 국가 를 用으로 보는 사고의 전환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나철은 일본에서 귀국

8) 대종교중광60년사(1971), 44~45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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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이후 1909년 1월 15일에 단군교 즉 대종교를 창시하게 된다. 그의 이러 한 결정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사고의 전환을 설명하고 있다.

국운의 회복은 어느 애국정객 몇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오 전 민족이 거족적으로 一致團合하여 생명의 근본체인 단군대황조를 至誠으로 숭봉하고 그 교화의 大恩 아래에서 신화의 大力이 없는 한 성취 될 수 없다. 國破民滅의 근본 원인이 오로지 장구한 세월에 걸쳐 모화, 사대의 왜곡된 교육을 받아온 민 족이었으므로 의당 있어야할 그 민족의식이 가려졌던 까닭이다. 이미 나라는 망 하였으나 민족에게만은 진실한 의식을 배양시켜 민족부흥과 국가재건의 원동력 을 만들어야 한다.

9)

이 전환은 그가 민족과 국가에서 분리하여 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과정에서 ‘宗敎는 政治와 法律을 포함한다.’는 사고가 강조되었는데, 이는 당시 지식인들의 종교관을 대변한 것이다. 당시 유행했던 ‘宗敎’는 일본 근 대사상가들의 번역어로써 원어는 ‘religion’이다. 이는 좁은 의미로는 ‘基督 敎’, 넓은 의미로는 ‘절대자가 있는 조직적 신앙체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반면 유교적 배경이 컸던 한국에서 번역어 ‘宗敎’는 ‘religion’이라기 보다는 글자 그대로 ‘으뜸이 되는 교지’의 경향이 강했다. 유교지식인들은 ‘敎’를 뺷中庸뺸의 ‘修道之謂敎’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宗敎’를 해당 사회 의 현재적 문화의 핵심으로 이해하였고, 이는 나철에게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그가 당시 정치와 법률 대신 종교를 선택한 것은 현실의 부정이 라기보다는 그 근원적 해결책을 찾기 위해 현실을 초월한 ‘敎’영역의 정립 즉 종교의 정립을 추구했던 것이다.

1910년 한일강제합병으로 갈수록 나철을 비롯한 지식인들은 두 가지 측 면에서 종교를 긍정하게 되었다. 첫째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단행한 일본과 같이 ‘서구문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서 근대 국가로 만들 수 있다’

9) 대종교중광60년사(1971), 45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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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계몽적 사고가 근본적인 한계에 봉착했다. 일본을 모델로 한 서구수용이 여러 가지 내외적 이유로 조선의 독립으로 이어지기 않았기 때문이다. 을사 늑약 이후 이미 재정과 외교가 일본에 넘어간 보호국체제에서 국가의 독립 이 점점 더 요원해져만 갔다. 이런 상황은 서구문명같이 현실적으로 나타나 는 외재적 요인보다는 민족, 전통 및 종교 등의 내재적 요인을 강조하는 태 도로 이어져갔다.

둘째는 보통 국민의 참여와 동의를 모으는데 있어서 종교보다 효과적인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지식인들은 국민들의 참여와 동의를 구하였 지만, 서구수용이라는 계몽으로는 이들을 이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종교들 은 그렇지 않았다. 초기 개신교계 기독교, 동학의 천도교 등의 교세확장은 지식인들에게 종교를 통한 사회 개혁을 제시하였다. 1904년부터 1907년까 지 改新敎 계열의 基督敎는 일반 국민들을 대상으로 선교하여 북삼도를 중심으로 급속한 교세 확장을 이루었다. 東學革命의 주체인 東學도 ‘惑世 誣民’, ‘邪說’이라는 비판과 더불어 1905년에는 일진회와 합병하면서 친일 파로 비난을 받았지만, 손병희의 귀국과 天道敎로의 개칭한 후 일반 국민 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세확장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바람은 기성 유교계도 일정한 변화를 일으켰다. 陽明學의 ‘良知論’와 ‘親民思想’의 근간으로 설 립한 박은식의 대동교가 대표적이다.

이들 지식인들은 관료지식인 중심의 전통적 유교체제가 일반 국민의 정 치적 성장을 가로막고 나아가 국가의 발전과 독립을 막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당시 사회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전통적 유교를 대체하 는 새로운 가치관으로 종교를 선택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들 종교들은 인간에 보편적으로 내재한 宗敎性 즉 靈魂, 聖靈, 良知, 靈性 등의 內在神 觀을 강조하였다. 이를 통해 이들 종교들은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근대 적 사고를 이끌어 냈고, 또 당시 국민들의 적극적인 사회 참여를 이끄는 이 론으로도 활용했다. 단군교 즉 대종교도 유사했는데, 1910년 5월 25일 ≪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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城新聞≫에 게재한 「檀君敎說筆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종교의 범위는 어떤 교단을 막론하고 전 인류의 화생한 초기에 하늘이 부여한 靈覺性을 順修하여 사람마다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여 하늘이 내린 복을 함께 보존하게 한다. 정치와 법률의 범위는 민생의 지식과 욕구가 확장되는 대로 모 든 행동을 제한하여 각자의 권리를 서로 침해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종교든지 종교가의 사상범위는 정치가보다 위에 있어야 결코 인류의 사욕 경쟁에는 간섭함이 없다고 단언할 것이다.

10)

대종교는 영성과 더불어 민족성도 강조하였는데, 건국신화 속 단군을 기 독교의 성부인 하나님이나 불교의 최고신인 帝釋桓因와 같은 신적 지위에 올려놓았다.

대체로 우리 교의 연혁을 개론하자면, 우리 천조 단군께옵서 장백산에 發祥 하신 시대는 중국의 요임금의 戊辰年間이오, 西歷의 기원전 2330년이니 天荒 이 肇判하고 人文이 未開 때였다. 우리 천조께옵서 천신과 합의하시고 上天 의 말없는 작용을 인간에 널리 전하여 森羅한 萬類를 극진히 구하실 無極大道 를 품으시고 太白山 檀木靈宮에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 강림하신 後天度를 應하여 인간에 366가지 일을 주재하시었다. 이것이 즉 뺷古語뺸에 이른바 “有神 人이 태백산 단목에 내려왔다”고 한 것이다. 천신께옵서 사람의 형상으로 변화 하여 구세의 도를 친히 선포하심이니 이것을 미루어 생각해보면 유교에서 말하 는 上帝이며, 불교에서 말하는 帝釋이며, 기독교에서 말하는 聖父로써 각 교문 의 칭호는 서로 다르나 그 실체는 모두 天神을 봉양함이라.

11)

10) 「檀君敎說筆記」, ≪皇城新聞≫, 1910.05.25 : 宗敎의 範圍 何敎를 勿問고 一切 人類의 化生 厥初에 天賦신 靈覺性을 順修야 人人마다 善을 作고 惡을 避

야 天予신 福利를 共同保守케이오 政治와 法律의 範圍 民生의 智慾이 長養 되로 一切行動을 制限야 各其權利을 無相侵害케이니 所以로 何敎이던지 宗敎家의 思想範圍 政治家의 以上에 存在야 决코 人類의 私慾競爭에 叅涉 이 無다 斷言지며.

11) 「檀君敎說筆記」, ≪皇城新聞≫, 1910.05.25 : 大凡我敎의 由來沿革을 槪論진

(11)

위 글에서 보면 이 시기 대종교에서 말하는 단군이 민족의 시조신이자, 보편적인 유일한 천신으로써 기독교에서는 하나님, 불교에서는 帝釋桓因 과 같은 신으로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대종교는 단 군이라는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천신 신앙을 다시 복원한 것이라고 할 것 이다. 실제 우리민족의 원형적 사고에는 하늘을 숭배하고 제사지내는 경천 사상이 있다. 이 경천사상은 불교와 유교의 한국화 과정에 일정한 영향을 미쳐 왔으며, 근대시기 東學은 물론 大倧敎, 甑山敎 등 민족종교에도 직접 적인 영향을 미쳤다.12) 대종교에서는 이러한 우리민족의 원형적 경천사상 이 바로 단군을 천신으로 믿는 전통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고 있다. 한편 이 러한 전통은 조금만 노력하면 당시에도 쉽게 찾을 수 있다고 한다.

풍속에 고사 지내는‘成造’라 하는 귀신은 옛적에 집집마다 위하던 우리나라를 成造하신 대황조 신위인데 지금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家屋을 成造한 鬼神”이 라 하니 그 망령됨이 가장 심하도다. 그러므로 그 고사가 10월 초에 많이 행하기 는 대황조 경절을 따라한 바다. 강원도 옛적에 신라 고승 率居가 그림으로 전한 대황조 화본에 고려 평장사 李奎報가 찬송한 詩에 이르기를, “嶺外(嶺東) 사람 의 집집마다 모신 성조의 화상은 당년에 태반이 명인의 손으로 전하였다”고 하 我 天祖檀君셔 長白山에 發祥신 時代 支那의 唐堯戊辰年間이오 西歷의 紀 兀前二千三百三拾三年이니 地球東西에 天荒이 肇判고 人文이 未開 際會라 我 天祖셔 天神과 合議시고 上天의 嘿嘿신 功能을 人間에 普運야 森羅

萬類를 極救실 无極大道를 包有샤 太白山檀木靈宮에 人形을 顯化야 降臨

신 後天度를 應야 人間에 三百六拾六事를 主宰시니 此ㅣ即古語에 云바 有神 이 降于太白山檀木下라이니 天神셔 人形을 化야 救世의 大道를 親佈

심이니 此로 推想면 儒敎家의 穪云上帝시며 佛敎家의 穪云帝釋이시며 耶蘇家의 穪云聖父시라야 各敎門의 穪呼 相殊나 其實은 皆天神을 崇奉이라.

12) 김현우, 「민족종교에 나타난 한국 정신문화의 원류」, 한국철학논집 52, 한국철학사연 구회, 2017 참조바람. 한편, 1909년에 창시한 대종교와 20세기 초에 교단으로 형성된 증산교의 경우에는 동학과는 달리 降臨한 천신을 강조하는데, 이는 기독교와 유사한 부분이다. 동시에 기독교계 일부에서도 한국 전통의 경천사상과 기독교를 연관시켜 이 해하려는 태도가 있다. 시기적으로 이 두 종교는 기독교의 정착과 급속한 부흥 이후에 출현하였기에 기독교를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유사한 부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12)

였으니, 이것을 보건대 집집마다 숭봉함을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예의가 무 너지자 시골에서 구한다”하며 “풍악이 망함에 오랑캐 땅에 있다”하더니 지금 길 가에나 고개 위에 ‘仙靈堂’이라 하는 신령은 대황조의 명을 받아 고산대천을 다 스리던 ‘彭吳’의 사당이고, 들 가운데 농부가 점심을 대하면 먼저 한술 밥을 던 지고 비는 것은 대황조의 명을 받아 농사짓는 법을 가르치던 ‘高矢’를 제사함이 고, 만주 철령 등지에 왕왕히 수목 중에 고묘 유적이 있는데 그 땅에 사는 사람 들이 말하기를, “壇神을 제사하는 집과 터라”하는데, ‘壇’이라 함은 檀君이라 하 는 ‘檀’이니 이는 고구려 때에 대황조를 숭봉하던 증거다. 임진왜란 때 일본 장수 島津義弘(시마쓰 요시히로)이 우리나라 자기 만드는 공장 열여덟 사람의 집을 일본 鹿兒島 伊集院(가고시마 이쥬인 ; 도예가 심수관의 고장으로 유명함)이라 하는 땅에 옮겼더니 그 열여덟 집이 우리나라 옛날 풍속을 따라 대황조 성신을 지금까지 숭봉하여 집집마다 제사하니 예로부터 본교의 성함을 가히 알지라. 슬 프다. 옛 지나 경전이 공벽과 급현 무덤에서 나오고, 서양 선비의 신령한 사적이 로마 굴 속에서 드러나니 교문의 진퇴하며 성쇠함은 고금과 동서가 매 한가지로 다.

13)

이러한 사례들은 단군신앙이 우리민족 특히 민간에서 여전히 지속되고

13) 단군교포명서, www.daejonggyo.or.kr. 風俗上에 民間에 賽祭한 成造라하는 神은 卽古代에 家家尊奉하든 家邦을 成造하신 大皇祖 神位어늘 今人이 不知하고 家屋成 造한 神이라하니 其誣妄이 太甚하도다 是以로 其祭가 十月朔에 多行함은 卽 大皇祖 慶節을 應한바이오 嶺東古寺에 新羅率居가 畵傳한 大皇祖 御眞에 高麗 平章事 李 奎報의 題贊한 詩에 曰“嶺外家家神祖像은 當年半是出名工”이라 하였으니 此를 觀 한즉 家家마다 尊奉함을 可知로다 禮崩에 求野하고 藥亡에 在蠻이라 하더니 今日의 山道嶺路에 仙靈堂이라 稱하는 神은 大皇祖의 命을 受하야 高山大川을 莫하든 彭 吳의 祠오 田疇間에 農夫가 午饁을 對하면 一匙를 先爲恭投하고 高聲念呼함은 大 皇祖의 命을 受하야 稼穡을 敎하든 高矢의 祭오 滿洲 鐵嶺等地에 往往 樹林中에 古廟遺蹟이 存한대 土人이 相傳曰 太古壇神祭餘墟라하니 壇者는 壇字의 誤也니 는 高句麗朝의 本敎盛行할 時에 大皇祖를 崇奉하든 確掾오 壬辰之役에 日本 島 津義光이 我國磁器工 十八姓을 擧家移遷하야 日本鹿兒島 伊集院에 住居하였는데 其十八姓이 本國古俗을 仍襲하야 大皇祖 聖神을 崇奉하야 至今까지 家家에 亨祀 하니 古昔 本敎의 盛함을 於此에 可히 推知할바라 鳴呼라 禹城의 經典이 孔壁汲塜 에 出하고 西土의 靈蹟이 羅馬穴居에 露하니 敎門의 劫厄顯晦는 古今東西가 同然 하도다.

(13)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단군신앙이 계층으로는 지식인들 보다 보통의 국민들에게, 지역적으로는 서울지역보다 지방에 나아가 만주 나 일본에도 산재하여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대종교의 지향점이 중앙 보다는 지방에 지식인보다는 보통 국민에게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동시 에 이러한 지향은 자연스럽게 근대적 평등의식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대종교의 민족의식은 교리중 하나인 5종지에서 명확히 나타난다. 대종교 의 5종지는 尊奉祖神, 感通靈誠, 愛合族友, 安固基土, 勤務産業이다.14) 순서대로 보면 대종교는 朝神 즉 단군을 섬기는 신앙에서 族友 즉 民族을 거쳐 국가를 보존하고 산업을 증진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단군신앙이 민족과 국가의 발전임을 천명한 것이다. 또 이와는 대조적으 로 단군신앙이 부족하거나 없었을 경우 민족과 국가가 위기에 처했음도 분 명히 하고 있다.

그런 즉 우리 민족이 天賦를 일찍 받아 영원한 역사와 감각한 영성이 각종 인류 중에 寂古한 분명한 증거요, 이후 천여 년을 경과하매 천시의 한서교체와 같이 人文이 점차 옮겨지고 私慾이 점차 자라나 物我의 경쟁이 어지럽게 발생 하니 천조께옵서 인류를 징벌시기 위하여 복음을 내리시지 아니하시니 우리 민 족이 발생 후 초유의 비운을 당한 이 시기는 은나라의 기자가 주무왕의 혁명을 피해 우리나라에 들어오니 한 모퉁이에 기거함을 수용하시고 그 나라의 교리와 유사한 팔조교를 우리나라 한 지방 민족에게 베풀어 점점 감화시키니 이는 우리 민족이 漢나라 문화에 沉醉하여 우리 천조의 교화를 점차 잊게 된 원인이다. 그 후에 우리 檀君敎와 우리 민족의 關係한 盛衰는 세세히 전하기 지루하니

15)

14) 「宗旨와 任員」, ≪대한매일신보≫, 1910.04.27 ; 「檀君敎說筆記」, ≪皇城新聞≫, 1910.05.25 기사참조. 한편 중광60년사에서는 五大宗旨가 1909년 12월 1일에 발표한 것으로 “1. 敬奉天神 - 인물의 본원을 아는 것, 2. 誠修靈誠 - 인생의 良能을 가질 것, 3. 愛合種族 - 人世의 평화를 얻을 것, 4. 靜求利福 - 인간의 자유를 누릴 것, 5.

勤務産業 - 인류의 문명을 늘릴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대종교중광60년사(1971), 80 면 참조 바람) 다만 본 연구에서는 시기적으로 최신인 ≪대한매일신보≫와 ≪皇城新聞≫

기사를 근거로 삼았다.

(14)

이 구절을 보면, 초기 대종교는 우리민족이 당대와 같은 깊은 비운에 빠 진 이유를 箕子의 고조선 渡來로 인한 中華文化의 수용에서 비롯되었다 고 보았다. 여기서 말하는 중화문화란. 당시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단순히 중국의 문화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자기 것을 잊고 쉽게 외국 문 화에 동화하려는 의식으로 일종의 사대주의 근본이라고 볼 수 있다. 나아가 당시 대종교는 ‘기자가 중화문화의 소산인 팔조목을 가르치자 우리 민족이 전통의 단군신앙을 잊게 되었고, 삼국시대에 불교와 유교와 들어와 이후 당 시까지 단군을 잊었으며, 비록 일시적으로 단군을 회복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고려, 조선 등이 창립하고 초기 국력이 신장되었으나 결국 외래 문화에 빠져 쇠퇴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특히 유교에서 숭상하는 기자를 직접적으로 비판했다는 점에서 볼 때, 유교체계를 중심으로 한 기성질서에 대한 강한 비판과 부정이 포함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대종교 는 ‘민족이 독립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서구와 일본의 문화를 무비판적 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 원형적 정서가 깃든 단군신앙으로 돌아 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를 나철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오늘날은 우리 天祖가 입도하신지 4243년이오 서역 기원에서 20세기라는 시 대이다. 湖漠한 동서에 사람과 사람이 생존을 바로 경쟁하고 국가와 국가가 이 해를 바로 교류하여 私慾의 脫鬪가 한계점에 달하였으니 만약 이것이 그치지 않으면 인류의 慘禍가 장차 殄滅에 이를 것이므로 국가마다 宗敎說을 創論하 고 사람마다 宗敎門을 건립하여 人事의 競爭熱을 住心하고 天道의 普濟運을 15) 「檀君敎說筆記」, ≪皇城新聞≫, 1910.05.25 : 然則我民族이 天賦를 早受야 久遠

 歷史와 感覺 靈性이 各種人類中에 寂古 明証이오 其後千餘年을 經過

天時의 寒暑交迭과 如히 人文이 稍移야 私慾이 漸萠고 物我의 競爭이 紛起

 天祖셔 人類를 懲罰시기 爲야 福音을 降賜치아니시니 我族이 發生後 初有 悲運을 當 此時에, 殷土의 箕子가 周武王의 革命을 厭避야 我土에 窮投

야 一隅의 安接을 容受시고 其國의 政敎叅同 八條敎를 我一方民族에게 施設

야 稍稍感化케니 此 我族의 漢土文化에 沉醉야 我 天祖의 神化를 漸忘

起因이라 其後에 我敎의 我族에 關係盛衰 歷歷口述기 支離니

(15)

歡迎하는 이 날에 우리 천조께서 衆類를 널리 가르치시기 위하여

16)

위를 보면, 대종교는 20세기 초 풍전등화의 국가적 위기 속에서 민족의 의지를 하나로 묶기 위해 단군신화를 중심으로 천군사상을 종교화한 민족 종교라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비록 그 형식은 종교의 모습이었지만, 그 내용은 조선의 식민지화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국제질서를 인류의 보 편애적 종교정신으로 극복하는 과정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대종교는 자기정체성 즉 종교적 교리를 확보해 나간다. 특 히 대종교의 교리는 우리나라의 역사와 언어 등 고유의 정체성과 연결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다음 장에서는 대종교에서 보는 우리 민족을 교리로써 정리해 보고자 하였다.

3. 대종교의 교리와 민족인식

대종교의 大倧이란 한얼 즉 神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대종교는 한얼교라 고도 할 수 있다. 한얼은 환인, 환웅, 단군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중 개국 신이자 통치자인 단군을 보다 강조하고 있다. 대종교의 경전 중 뺷삼일신고뺸, 뺷신사기뺸 등은 한문으로 작성된 고대의 경전들로 통상적인 음독보다는 가 차나 이두식으로 재해석하여 기존과는 다른 별도의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 가 많다. 이들 경전들은 나철이 백전과 두일백 등으로부터 받은 것들로 실 제로 고대부터 전해졌다는 명확한 근거는 없다. 아마도 대종교가 민족의 정

16) 「檀君敎說筆記」, ≪皇城新聞≫, 1910.05.25 : 今日은 我 天祖의 立道신 四千二百 四十三年日月이오 西歷紀元의 二十世紀다 時代이라 浩漠 東西에 人與人이 生 을 是爭고 國與國이 利害를 是交야 私欲의 奮鬪가 極点에 達얏스니 若此而 不已면 人族의 慘禍將至 殄滅겟기로 國國마다 宗敎說를 倡論고 人人마다 宗 敎門을 建立야 人事의 競爭熱을 住心고 天道의 普濟運 歡觬 此日에 我 天祖셔 衆類를 博救시기 爲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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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성을 종교적 배경으로 하다 단군을 비합리적으로 신격화하면서 견강부 회한 측면인데, 대종교가 교단화하는 과정에서 나온 특징들이라 볼 수 있 다. 현재 대종교 경전은 신전, 보전, 보감의 세 부분으로 총 22개 경전으로 나누어져 있다. 세부 구성은 다음과 같다.

<대종교 경전의 분류>

분류 경전명 종경수록 설명

신전

천부경 조화 경전. 81자로 구성. 삼일신고 교화 경전. 원문 366자로 구성. 참전계경 치화 경전. 366조로 구성.

보전

신리대전 대종교 신관 이해에 필독. 신사기 삼신의 역사가 간결하게 기록. 회삼경 서일(백포종사)의 저술. 진리도설 서일의 저술.

구변도설 서일의 저술.(서문과 발문만 전함) 삼문일답 서일의 저술.(서언만 전함) 삼법회통 윤세복의 수행서.

보감 종 사

단조사고 × 대종교 협제회 간행. 신단실기 × 김교헌(무원종사)의 역사 저술. 신단민사 × 김교헌의 역사 저술. 배달족역사 × 김교헌의 역사 저술. 배달족강역형세도 × 원대 이원태의 역사 저술.

종 리

대종교신리 × 고경각 간행. 종지강연 × 김교헌의 저술.

종리문답 × 호석 강우의 문답식 교리 해설. 신형유훈 나철의 유서.

한얼노래 대종교 예식 노래.(이극로 편저)

단군교포명서 × 백봉이 반포한 문건. 오대종지서 × 백봉이 반포한 문건.

하지만 이 밖에도 다양한 관련 저술이 있다. 박은식이 서간도에 머물면서 대종교 학교 교재로 사용하기 위해 집필했던 뺷東明聖王實記뺸, 뺷渤海太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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建國誌뺸, 뺷夢拜金太祖뺸, 뺷明臨答夫傳뺸, 뺷泉蓋蘇文傳뺸, 뺷大東古代史論뺸 등의 책을 비롯해서, 뺷國祖檀君實記뺸, 뺷神檀民史뺸, 뺷檀祖事攷뺸, 뺷倍達族 形勢疆域圖뺸, 뺷朝鮮上古史뺸, 뺷史誌通俗考뺸 등도 읽혔다고 한다. 이런 정 황은 우리민족의 역사를 경전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종교의 교리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교리는 天神人三一論이다. 이 삼 일론은 뺷三一神誥뺸과 뺷神事記뺸에서 나타나고 있다. 뺷三一神誥뺸는 실제 로는 天과 神 그리고 天宮을 ‘한울’, ‘한얼’, ‘한울집’으로 설명하고 있다.

(한울가르침天訓) 단제께서 이르셨다. “맏도비 팽우야! 저 푸른 것이 한울 아 니며 저 까마득한 것이 한울 아니니라. 한울은 허울도 바탕도 없고, 처음도 끝도 없으며, 위 아래 사방도 없고, 겉도 속도 다 비어서 어디나 있지 않은 데가 없으 며, 무엇이나 싸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한얼가르침神訓) 한얼님은 그 위에 더 없는 으뜸자리에 계시사, 큰 덕과 큰 슬기와 큰 힘을 가지시고 한울을 내시며, 수없는 누리를 주관하시고 만물을 창 조하시되, 티끌만한 것도 빠트리심이 없고, 밝고도 신령하시어 감히 이름지어 헤 아릴 길이 없느니라.

그 음성과 모습에 접하고자 원해도 친히 나타내보이지 않으시지만, 저마다의 본성에서 한얼 씨알을 찾아보라, 너희 머리속에 내려와 계시느니라.

(한울집가르침天宮訓) 한울은 한얼님의 나라(天國)라. 한울집이 있어 온갖 착함으로써 섬돌을 하고 온갖 덕으로써 문을 삼았느니라. 한얼님이 계신 데로서 뭇 신령과 모든 밝은 이 들이 모시고 있어 지극히 복되고 가장 빛나는 곳이니, 오직 참된 본성을 통달하고 모든 공적을 다 닦은 이라야 나아가 길이 쾌락을 얻 을지니라.

여기서는 천지와 인간을 연결시켜 주는 神 즉 한얼에 대해 설명하고 있 다.17)한울은 천지자연 또는 우주의 질서의 자연신으로 볼 수 있다. 한얼은

17) 김홍철은 대종교는 단군을 국조인 단군한배검을 주신으로 삼고, 1965년대 신정일이 창립한 한얼교가 한얼을 주신으로 삼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홍철, 「檀君信仰의 實態와 그 特性」, 고조선단군학 1, 1999, 230~231면 참조. 그러나 삼일신고와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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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을 창조하고 관장하는 신이자 인간의 본성에서 찾을 수 있는 내재신의 모습도 있다. 중요한 것은 天宮 즉 天國이다. 이것은 단순히 천국이 아니라 이른바 한얼에 의해 형성되는 홍익인간, 재세이화의 인간세상으로써 우리 민족 현실의 민족국가라고도 할 수 있다.

뺷신사기뺸에서는 이 한얼을 환인, 환웅, 단군의 셋의 신격으로 설명하고 있다.

삼가 상고하건대, 만드는 임자인 조화주는 한임(桓因)이시니, 천국(天國)을 여시어 뭇누리를 만드시고, 대덕(大德)으로 만물을 기르시나니라. (중략)

삼가 상고하건대, 가르치는 임자인 교화주는 한웅이시다. 한얼님으로써 사람 이 되시어 큰 도리를 세우시고 큰 교화를 베풀어 어리석은 백성들을 감화시키시 되, 삼일신고를 널리 펴시어 뭇사람들을 크게 가르치시니라. (중략)

삼가 상고 하건데, 치화주는 한검이시니, 다섯 가지 일들(五事)을 맡으사 널리 인간세상을 유익케 하시며, 나라를 처음 세우사 법통을 만대에 드리우시니라.

18)

대종교의 세계관은 우주자연인 한울, 만물을 만들고 운용하는 한얼, 그리 고 한얼에 의해 창조되고 운영하는 한울집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 신관은 한얼은 환인(한임), 환웅(한웅), 단군(한검)로 나타나 세상을 주관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天神人의 三位論은 천의 뜻을 받아 인간을 다스리는 민 족신 한얼을 설명하는 교리라고 할 수 있다.19)

사기를 보면 단군보다는 한얼( )이 主神으로 설명되고 있다. 다만 대종교 태동기에 우리민족의 중요한 문제는 국가독립의 문제였으므로 이후 전개과정에서 단군이 강조되 었다고 볼 수 있다.

18) 역해 신사기, 대종교유지재단 인터넷사이트(http://www.daejonggyo.or.kr/), 종학자 료실.

19) 일제강점기 권덕규도 단군신앙을 ‘하늘에 있으면 환응(桓雄)이고, 신 또는 검[神]으로 는 蘇塗 곧 檀君이고, 사람의 몸으로 나타나서는 王儉 즉 임금이라는 것이 이 교리의 핵심이다.’라고도 설명하고 있다. 「大倧敎觀, 大倧敎는 歷史上으로 어떠한가」, ≪삼천 리≫ 8권 4호, 1936.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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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과 인 그리고 이 사이를 회통하는 한얼’이라는 대종교의 교리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민족공동체를 유지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대종교에서는 역사적으로 세 가지 한얼 중 단군을 보다 강조하였다. 한편 단군신앙의 폐 지는 우리민족의 불운과도 연결된다는 것이 대종교의 역사관이다. 즉 우리 가 단군을 성심껏 받들면 민족의 삶과 위상이 높아지지만 그렇지 않을 경 우 수난이 발생한다는 역사적 논리이다. 이를 최초로 기술한 것이 바로 백 봉의 뺷檀君敎五大宗旨佈明書뺸이다. 이 책에서는 단군교와 국가의 쇠퇴를

‘7회 비운’으로 논거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7대 비운>

순번 내용 비고

1 기원전 1209년 천도문제를 두고 삼천단부간의 극심하게 분열하고 대

립함 고조선

2 기원선 1104년 기자의 팔조교를 허용하고 이후 여러 종교가 유입되어 신교가 유명무실해짐

고조선 (기자조선) 3 기원전 232년 기자왕조말 箕準 재위시 서북단부가 궤멸당해 동남단

부들과 언어와 풍속이 달라짐

고조선 (기자조선) 4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 말 한나라의 침범으로 단군조의 거점이 유린

당하고 한사군이 설치됨

고조선 (위만조선) 5 668년 고구려말 영류왕 이후 불교의 유입과 보장왕시 당나라의 신교

세력 축출 고구려

6 고려말 몽골침입이후 신교 제례의 소홀과 명맥의 단절됨 고려 7 한말 교문의 제사가 끊기고 만주의 고묘와 고적이 폐허로 남음 대한제국

이러한 기술은 결국 당대의 위기를 천신인 단군에 대한 신앙의 회복으로 극복하려는 의지를 포함하고 있다. 또한 이는 한얼의 현실적 작용으로도 이 해할 수 있다. 민족사와 단군신앙 간의 일치는 김교헌에게서도 나타나고 있 다. 대종교의 2대종사인 그는 1917년 만주로 이전하여 활동하면서 우리민 족에게 민족정신과 항일구국투쟁이 둘이 아님을 확인시켰고 이러한 교리 의 확립은 청산리전투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만주로 이전하기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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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1914년에 뺷神檀實記뺸와 뺷神檀民史뺸를 저술하였다. 이 두 책은 건국시 조인 단군과 대종교를 연결시켜 그 연원을 역사적으로 추론한 것으로, 대종 교인뿐만 아니라, 만주한인사회에 민족의식을 불어 넣은 저술이었다. 이 두 책은 일제에 의해 나라는 사라졌으나, 단군이라는 민족 시조와 이에 근거한 민족사와 민족종교가 있다는 것을 환기시키는 일종의 국사교과서였다. 특 히 뺷신단민사뺸에서는 고조선의 영토이면서도 한민족과 분리된 채 있는 만 주의 역사 즉 요와 금의 역사를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훗날 박은식 의 뺷몽배금태조뺸와 같은 책이 나오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는 또한 1922년부터 1923년 사이 현재의 대종경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뺷神誥講義뺸, 뺷神理大全뺸, 뺷會三經뺸, 뺷神事記뺸, 뺷朝天記뺸, 뺷神歌集뺸(이상 1922년), 뺷倧理問答뺸, 뺷重訂神歌集뺸, 뺷增删倧禮抄略뺸, 뺷國漢文三一神誥뺸, 뺷神聖大全뺸(이상 1923년)등을 교열하였고, 현재 경전에 포함되어 있는 이 원태 뺷倍達族疆域形勢圖뺸도 감수하였다.

이러한 대종교의 역사인식은 이후 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대 표적인 학자가 박은식이다. 박은식은 1911년 서간도에 망명하면서 윤세복 등과 교류하였고 당시 학생들을 지도하기 위한 교재를 다수 만들었다. 이러 한 노력은 1915년 뺷韓國痛史뺸로 이어지는데, 특히 이 책에 나온 國家魂魄 論은 대종교의 민족의식과 연결되는 것이다. 즉 국가는 ‘혼과 백으로 나눌 수 있고 백이 없더라도 혼을 잘 간직하고 있으면 국가를 되찾을 수 있다.’는 논리는 대종교의 논리와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혼을 박은식이

‘國史’, ‘國敎’, ‘國文’, ‘國語’로 규정한 것도 대종교와 유사하다. 물론 여기 서 말하는 국교가 반드시 대종교라 할 수는 없으나 민족국가를 지향하는 데 있어서 종교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양명학자로 알려진 鄭寅普도 대종교의 역사인식과 많은 부분을 공유하 고 있다. 뺷대종교독립운동연원뺸에는 정인보를 대종교 비밀결사원으로 설명 하고 있으나,20)정인보 연보에는 해당 내용이 없어 사실여부를 확인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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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없다. 다만 정인보가 1911년과 1912년 두 차례 중국 동북성의 懷仁縣, 興道村 그리고 柳河縣, 三源堡 등지에서 활동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대종 교와 연결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그는 1930년대 조선학운동을 하면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얼’로 규정하고 ‘일제치하에서 단절된 우리 얼을 선양’하 고자 노력하였는데, 이때 ‘얼’이 한얼과도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안확 역시 대종교에 영향을 받은 사상가이다. 그는 「조선철학사상개관」

(뺷신천지뺸 7, 1921.11월)에서 한국철학을 상고, 중고, 근세로 구분하고 그중 상고는 ‘倧’의 철학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종(倧)이란 신인 즉 단군과 연 결되며 대종교의 삼일사상을 대종교 경전인 뺷삼일신고뺸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이는 우리민족만의 고유성과 독자성을 드러내어 일제강점이라는 시 대적 고민이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민족주의적 설정이 개인종교로서의 발전을 저해한 측면 도 있다. 즉 한얼의 내재신적 요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통치자인 단 군을 강조함으로써 보통국민들이 다가갈 수 있는 근대종교로의 발전이 저 해된 것이다. 이는 해방이후 교단으로서의 대종교의 영향력이 감소한 원인 이기도 하다.

근대전환기 대종교의 등장은 단군을 신화 속 존재에서 구체적인 종교교 단을 형성하고 나아가 신앙대상으로 만들었다. 비록 영성과 초월성 등의 비 논리적인 한계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국가의 멸망이라는 위기에 처해 있는 우리 민족에게 민족정체성에 대한 강한 모티브를 주기에 충분했다. 이를 이 어 많은 학자이자 독립투사들이 조선사, 조선어 및 조선문화 등의 조선학 운동을 이어갔다. 그러므로 대종교가 근대전환기 민족정체성 형성에 기여 한 공은 매우 지대하다고 할 것이다.

20) 이현익, 대종교독립운동연원, 1962. 2면 참조. ; 그때 비밀결사원(秘密結社員)을 예 거(例擧)하면 일해(一海) 이세정(李世揁, 수당(水堂) 맹주천(孟柱天), 일석(一石) 백 남규(白南奎), 보본(普本) 엄주천(嚴柱天),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외 30여명(三 十餘名)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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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결론

대종교는 나철, 오기호 등의 항일투쟁이 민족종교로 승화한 교단이다. 이 두 사람은 대종교 창립이전부터 이미 을사늑약 체결에 앞장선 대신들을 암 살하려는 계획을 수립하는 등 항일투사의 색채를 띠고 있었다. 이러한 항일 정신이 단군이라는 민족정체성과 만나면서 대종교가 성립하게 되었고 때 문에 대종교는 청산리전투처럼 항일무장 투쟁의 선봉에 설 수 있었다.

이 시기 단군의 재조명은 민족 정체성을 확인하는 작업으로 신채호, 주시 경, 박은식, 정인보, 안확 등의 독립운동과 조선학운동으로 이어졌다. 현 대 한민국에서도 개천절을 경축일로 지정한 것을 비롯하여 일제강점기를 거 치면서 신화의 영역으로 한정된 고조선을 역사화하는 지속적인 시도로 이 어지고 있다.

더불어 ‘한얼’이라는 민족공동체의 정신적 공유점을 설정했다는 점에서 도 주목할 만하다. 전통에 대한 복원뿐 만 아니라 근대 사회와의 교점도 제 시했다는 점도 중요하다. 대종교는 ‘五大宗旨’를 통해 산업을 활성화시켜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는 근대지향적 정신의 함유로 우리 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종교는 동학, 증산교, 원불교와 유사한 민족종교지만 나름의 특징이 있 다. 가장 중요한 것은 창립자가 관료 출신의 유교지식인이었다는 점이다.

나철, 오기호, 김교헌, 윤세복 등은 모두 유교지식인 집안 출신이었다. 그러 다 보니 증산교나 원불교 같은 다른 민족종교보다는 보다 민족주의를 위한 고차원적인 종교교리를 지향하였다. 이로 인해 대종교는 일반 국민들에 대 한 종교적 위로와 현실적 구제보다는 민족 정체성 확립이나 독립운동을 강 조하는 측면으로 발전하였고, 나아가 해방이후 교세가 위축되었다고 볼 수 도 있다.

그럼에도 근대전환기 대종교의 민족적 역할에 의문을 갖는 이는 거의 없 을 것이다. 그만큼 대종교는 일제강점기 시대에 민족적 가치에 충실했기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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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 연구를 통해 근대 전환기 대종교의 민족주의적 가치를 다시 한 번 살펴보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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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Daejonggyo’s Understanding of Korea National Identity

21)Kim, Hyon-woo*

4 Korea ethnic religions tried to overcome national crises with religionism in modern transition times. Daejonggyo, one of them, contributed to our modern nationalism to establish the myth of Dangun as religion.

I studied on the modern standardization of traditional ethnic thoughts in process of Daejonggyo formation in this paper. La Cheol(羅喆), who is one of founders, criticised the colonialization by Japan in Tokyo, and tried to assassinate Five Eulsa Traitors after Japan-Korea Treaty. But feeling limit of minority intellects in 1909, he established Dajonggyo to lead all nation people to anti-Janpanese struggle. He left from traditional Confucianism and rebuilded the national god from Dangun(檀君) in the myth. In processing, Dangun was developed to the national spirit and expanded the national identity.

Daejonggyo moved the base into Gando because of Japan’s suppression but had been fighting for Korea independence from Japan, like Battle of Bongodong and Battle of Cheongsanli, the since 1945. However, not needing struggle after 1940, Daejonggyo was rapidly intimidated unlike other ethnic religions. Because it had concentrated on overcome national crises for Japan ruling era but it directionality blurred after 1945.

Nevertheless, the role of Daejonggyo was very important to establish modern national identity like the National foundation Day of Korea(開天 ), The Ancient Joseon and Baedal nation(倍達民族).

Key Words : Daejonggyo, Dangungyo, La Choel, O Giho, the Myth of Dangun, Han Eol,

* Chosun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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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ational foundation Day of Korea(開天節), National Identity

<필자 소개>

이름: 김현우 소속: 조선대학교

전자우편: kf16cd@naver.com

논문투고일: 2017년 7월 15일 심사완료일: 2017년 8월 17일 게재확정일: 2017년 8월 22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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