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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水力調査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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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水力調査書

조선수력조사서

1930년 / 조선총독부 체신국 / 총 6권 / 05.10-04 조53조 1930

조사서는 1930년 3월 조선총독부 체신국에서 발행한 것으로 총 6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수력조사기간은 1922년 11월부터 1929년까지 7년 간에 걸쳐 조사비 29만 4,684엔을 투입하여 압록강을 비롯 하여 청천강, 대동강, 한강, 낙동강 및 두만강 등 6대 하천에 대한 수력지점 조사였다.

조선총독부는 이 조사에 앞서 1911년부터 1914년까지 3년 6개월 간 9만 엔을 투입해 서 1차 수력조사를 실시했다. 이 조사는 당시 실시 중이던 ‘조선하천조사’와 병행해서 실시했는데 이 조사에서 얻은 성과는 80개 유력지점에 5만 7천㎾의 발전이 가능하다고 추정했다. 2차 수력지점조사에서는 유망 수력지점이 150개소였고 추정 수력발전량은 220만㎾였다.

당초 일본은 우리나라를 강제점령(합병)한 다음 세 가지의 통치방침을 세웠다. 첫째, 조선을 영원한 농업국가로 통치한다. 즉 공업화하지 않고 농업생산을 증가시켜 일본의 부족식량을 보충하겠다는 것이었다. 둘째, 일본의 상품판매시장으로 통치한다. 1868년 명치유신 이후 급격한 공업화를 달성한 일본은 이미 해외시장이 선진공업국들에 의해 점거당한 후였기 때문에 취해진 조치였다. 셋째, 대륙침략(그들은 진출이라 함)을 위한 병참기지로 통치하겠다는 것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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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게, 합병 이후 1920년까지는 모든 부문의 개발을 위한 준비단계였다. 일제는 개발준비가 거의 끝나자 1920년에 조선인의 기업활동을 금지했던 ‘조선회사령(朝鮮會社 令)’을 철폐하기도 했다. 그리고 2차 수력지점조사에서 220만㎾의 발전 가능성이 보이 자 ‘영원한 농업국가’로 통치한다는 방침을 변경하는데, ‘남농북공(南農北工)’ 정책이 그 것이다. 즉 남쪽은 농업을 주로 하고, 북쪽은 공업화한다는 것이다. 왜 이런 정책이 나왔 는가 하면 당시 만주(동북 3성)에 주둔한 100만 관동군의 군수물자, 주로 무기 수송비 때문이었다.

그들의 비밀보고서에 따르면 일본에서 만주까지 무기 수송을 위해 3천 톤짜리 선박 3,000척이 연중 왕래했다니 그 경비는 가히 짐작할 만하다. 이리하여 그들은 압록강 유 역의 허천강, 장진강, 부전강에 댐을 만들어 154만㎾의 전력으로 함흥-흥남, 청진, 평양 -진남포, 신의주-다사도 등 4개소에 세계적인 군수공업단지를 건설했다. 이때 압록강 개발은 토목사상 세계 최초의 유역변경(流域變更) 공법을 사용했고, 일본 건설업도 여기 서 처음으로 이른바 기계화 시공을 시작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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