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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동 기 시 대 청 동 기 시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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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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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청 동 기 시 대

(2)

1. 정의

1) 환호취락 성행

2) 묘제 : 지석묘, 석관묘, 옹관묘 등 새로운 무덤 형식 출현 3) 생업경제 : 농경의 보편화 및 도작 농경

4) 토기상 : 무문토기의 사용

5) 석기상 : 마제석기의 보편적 사용,

6) 청동기 : 비파형동검, 동부 등 청동기의 제작· 사용

1. 정의

1) 환호취락 성행

2) 묘제 : 지석묘, 석관묘, 옹관묘 등 새로운 무덤 형식 출현 3) 생업경제 : 농경의 보편화 및 도작 농경

4) 토기상 : 무문토기의 사용

5) 석기상 : 마제석기의 보편적 사용,

6) 청동기 : 비파형동검, 동부 등 청동기의 제작· 사용

(3)

2. 편년안 : 2 기 또는 3 기 구분

1) 남한 : 3기 (조기)→전기(역삼동·가람동·흔암리식)→중기(송국리식)→후기(원형점토대토기) 2기 (조기)→ 전기(역삼동·가람동·흔암리식) →후기(송국리식)

- 전기 : BC11~9세기, 세장방형 평면의 복수 화덕 가진 주거지, 이단병식 마제석검, 지석묘와 비파형동 검 출현

- 중기 : BC8~5세기, 외반구연 호형토기, 원형 평면 주거지, 일단병식 마제석검, 유구석부, 지석묘(묘역 식, 구획식 등) 및 석관묘 성행, 정착 도작농경,

- 후기 : BC4~3세기, 송국리 유형 주거지 지속, 점토대토기·흑도·세형동검·, 고지성 집락, 초기철기시대와 의 중복이 문제

2) 북한 : 청동기시대(기원전 2천년기 전반, 대동강 및 압록강 하류, 요동반도남단) → 고조선(미송리형토기, BC8~7세기)

2. 편년안 : 2 기 또는 3 기 구분

1) 남한 : 3기 (조기)→전기(역삼동·가람동·흔암리식)→중기(송국리식)→후기(원형점토대토기) 2기 (조기)→ 전기(역삼동·가람동·흔암리식) →후기(송국리식)

- 전기 : BC11~9세기, 세장방형 평면의 복수 화덕 가진 주거지, 이단병식 마제석검, 지석묘와 비파형동 검 출현

- 중기 : BC8~5세기, 외반구연 호형토기, 원형 평면 주거지, 일단병식 마제석검, 유구석부, 지석묘(묘역 식, 구획식 등) 및 석관묘 성행, 정착 도작농경,

- 후기 : BC4~3세기, 송국리 유형 주거지 지속, 점토대토기·흑도·세형동검·, 고지성 집락, 초기철기시대와 의 중복이 문제

2) 북한 : 청동기시대(기원전 2천년기 전반, 대동강 및 압록강 하류, 요동반도남단) → 고조선(미송리형토기, BC8~7세기)

(4)

천안 백석동 ( 전기)

(5)

춘천 천전리 B지역다지구 수전전경

부여 송국리유적( 사적249 호)

송국리 주거지

(6)

부여 송국리 : 석관묘와 탄화미

부여 송국리 : 석관묘와 탄화미

(7)

보령 관창리유적( 중기~ 후기)

(8)

보령 관창리 송국리형주거지

(9)
(10)

울산 검단리 환호취락

(11)

요녕성 해성 석목성 고인돌

(12)

강화도 부근리 고인돌 (인천시 기념물44호)

(13)

창원 덕천리 1호지석묘

(14)

덕천리1호 조사진행과정

(15)
(16)

전북 진안 용담댐의고인돌

(17)

보성 동촌리 지석묘

(18)

보성 동촌리 지석묘

(19)
(20)

[ 마야의 신전]

Teotihuacan의달과 태양의신전

Chichenitsa의 신전

(21)

사우나 = 사랑과 우정을 나누자

오바마 = 오직, 바라는대로, 마음먹은 대로.

당나귀 = 당신과 나의 귀한 만남을 위하여.

진달래 = 진하고 달콤한 내일을 위하여.

중 국 = 乾杯 일 본 = 乾杯

미국/영국/호주 = cheers, cheer up

캐나다 = toast(영국에서 찰스2세 때 술맛을 내려고 유리잔 속에 토스트 한 조각을 넣은 데서 유래)

독일/네델란드 = prost

프랑스 = a votre sante(아 보트르 상테).

사우나 = 사랑과 우정을 나누자

오바마 = 오직, 바라는대로, 마음먹은 대로.

당나귀 = 당신과 나의 귀한 만남을 위하여.

진달래 = 진하고 달콤한 내일을 위하여.

중 국 = 乾杯 일 본 = 乾杯

미국/영국/호주 = cheers, cheer up

캐나다 = toast(영국에서 찰스2세 때 술맛을 내려고 유리잔 속에 토스트 한 조각을 넣은 데서 유래)

독일/네델란드 = prost

프랑스 = a votre sante(아 보트르 상테).

(22)
(23)

초기철기문화의 유입 ; 주조철기

초기철기문화의 유입 ; 주조철기

★ 철기는 동아시아에서 언제부터 만들어지고, 한반도에는 언 제쯤 유입되었을까?

★ 철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사회의 모습은?

★ 고대국가와 철기 : 역동적 사회의 기반

★ 철, 왜 가공스러운 도구인가? 탄소(C)의 마술사(FeCO3) - 鐵이 鐵다울 수 있는 이유

* 철종류 : 순철(탄소 0.01% 이하), 탄소강(탄소 0.01∼2.07%), 선철(탄소 2.07∼6.7%)

* 철 용융점 1,539℃ ⇒ 탄소 4.3% 가량되면 1,146℃에서 용융

(24)

[ 초기철기시대의 양상]

1. 주요 특징 1) 철기 의 유입

2) 청동기문화의 성행 : 세형동검, 세혈동모, 잔무늬거울[精文鏡], 3) 흑도와 점토대토기 문화의 성행

4) 분묘 : 토광묘 유입( 금산 수당리, 대전 궁동) 2. 시기 : BC3~1 세기

3. 주요 유적 : 당진 소소리, 부여 합송리, 장수 남양리, 사천 늑도, 논산 정지리· 원북리 ( 동경, 철부)

4. 고지성 집락 발달

1) 삼국시대 이후 산성과 입지가 공통적

2) 방어시설 ; 상당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집단 간의 갈등 양상반영?, 1. 주요 특징

1) 철기 의 유입

2) 청동기문화의 성행 : 세형동검, 세혈동모, 잔무늬거울[精文鏡], 3) 흑도와 점토대토기 문화의 성행

4) 분묘 : 토광묘 유입( 금산 수당리, 대전 궁동) 2. 시기 : BC3~1 세기

3. 주요 유적 : 당진 소소리, 부여 합송리, 장수 남양리, 사천 늑도, 논산 정지리· 원북리 ( 동경, 철부)

4. 고지성 집락 발달

1) 삼국시대 이후 산성과 입지가 공통적

2) 방어시설 ; 상당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집단 간의 갈등 양상반영?,

(25)

[ 동아시아( 중국) 철기역사 및 철의 특성]

1) BC11∼10세기경 隕鐵(운석 속에서 채취한 철) 사용

2) 戰國時代(BC5∼3) : 철기사용 본격화, 鑄造철기문화(燕나라, 楚나라 중심) 3) 漢 : 단조철기문화 발달, 강철 대량생산

4) 철 종류 : 순철(탄소 0.01% 이하), 탄소강(탄소 0.01∼2.07%), 선철(탄소 2.07∼6.7%) - 鑄造철기 : 쇳물을 틀에 부어 만든 것, 탄소 함유량 2%이상으로 너무 단단하여 깨지기

쉬움

- 鍛造철기 : 쇠를 불에 달구어 여러 번 두드려서 원하는 형태의 철기를 만드는 것, 탄소 함유량 1% 이하일 때 단조 가능, 많이 두드리고 담금질(기름, 물, 소금, 오줌 등등) 을 할수록 깨지거나 부러지지 않는 아주 강력한 철기가 됨(長劍 등 강철제 무기, 百 鍊鋼)

5) 철기의 역할

- 강력한 농공구 : 深耕 및 경작지 개발⇒ 생산력 확대

- 강철제 무기 : 단조를 통해 길이 70∼80cm 이상의 長劍과 大刀 대량생산, 다른 무기 압도

1) BC11∼10세기경 隕鐵(운석 속에서 채취한 철) 사용

2) 戰國時代(BC5∼3) : 철기사용 본격화, 鑄造철기문화(燕나라, 楚나라 중심) 3) 漢 : 단조철기문화 발달, 강철 대량생산

4) 철 종류 : 순철(탄소 0.01% 이하), 탄소강(탄소 0.01∼2.07%), 선철(탄소 2.07∼6.7%) - 鑄造철기 : 쇳물을 틀에 부어 만든 것, 탄소 함유량 2%이상으로 너무 단단하여 깨지기

쉬움

- 鍛造철기 : 쇠를 불에 달구어 여러 번 두드려서 원하는 형태의 철기를 만드는 것, 탄소 함유량 1% 이하일 때 단조 가능, 많이 두드리고 담금질(기름, 물, 소금, 오줌 등등) 을 할수록 깨지거나 부러지지 않는 아주 강력한 철기가 됨(長劍 등 강철제 무기, 百 鍊鋼)

5) 철기의 역할

- 강력한 농공구 : 深耕 및 경작지 개발⇒ 생산력 확대

- 강철제 무기 : 단조를 통해 길이 70∼80cm 이상의 長劍과 大刀 대량생산, 다른 무기 압도

(26)

5. 철기 관련 용어

1) 철원료

(1) 괴련철 : 철광석 상태 그대로 숯에 넣어 달구어 800∼1,000℃에서 반복 단타, 대량생산 불리, 탄소함량 적고 불순물 많음(불순물 많을수록 깨지기 쉬움)

(2) 제련철 : 용광로에서 광석을 녹여 생산한 철, 선철

(3) 炒鋼法 : 탄소 2%이상이면 단조 불가능, 고탄소의 선철을 용광로에서 다시 끓이면서 탈산제와 탈탄제로 철분과 석회나 조개 등을 넣어 탄소를 직접 제거함으로써 단조 가능한 저탄소 상태의 철을 얻는 방법, 대량으로 손쉽게 단조가 가능한 질 좋은 철을 생산하는 방법으로 중국 漢代에 개발

2) 철 종류 : 순철(탄소 0.01% 이하), 탄소강(탄소 0.01∼2.07%), 선철(탄소 2.07∼6.7%)

3) 단조철기 : 반복 단타하고, 쇠를 불에 달구어 여러 번 두드리고 담금질(기름, 물, 소금등)을 통해 연성과 인성 부여하여 원하는 형태의 철기를 만드는 것, 탄소 함유량 1% 이하일 때 단조 가능, 많이 두드리고 담금질(기름, 물, 소금, 오줌 등등)을 할수록 깨지거나 부러지지 않는 아주 강력 한 철기가 됨(長劍 등 강철제 무기, 百鍊鋼)

4) 주조철기 : 서양에 없는 독특한 제작기술, 쇳물을 틀(용범)에 부어 만든 것, 탄소 함유량 2% 이상 으로 너무 단단하여 깨지기 쉬움

5. 철기 관련 용어

1) 철원료

(1) 괴련철 : 철광석 상태 그대로 숯에 넣어 달구어 800∼1,000℃에서 반복 단타, 대량생산 불리, 탄소함량 적고 불순물 많음(불순물 많을수록 깨지기 쉬움)

(2) 제련철 : 용광로에서 광석을 녹여 생산한 철, 선철

(3) 炒鋼法 : 탄소 2%이상이면 단조 불가능, 고탄소의 선철을 용광로에서 다시 끓이면서 탈산제와 탈탄제로 철분과 석회나 조개 등을 넣어 탄소를 직접 제거함으로써 단조 가능한 저탄소 상태의 철을 얻는 방법, 대량으로 손쉽게 단조가 가능한 질 좋은 철을 생산하는 방법으로 중국 漢代에 개발

2) 철 종류 : 순철(탄소 0.01% 이하), 탄소강(탄소 0.01∼2.07%), 선철(탄소 2.07∼6.7%)

3) 단조철기 : 반복 단타하고, 쇠를 불에 달구어 여러 번 두드리고 담금질(기름, 물, 소금등)을 통해 연성과 인성 부여하여 원하는 형태의 철기를 만드는 것, 탄소 함유량 1% 이하일 때 단조 가능, 많이 두드리고 담금질(기름, 물, 소금, 오줌 등등)을 할수록 깨지거나 부러지지 않는 아주 강력 한 철기가 됨(長劍 등 강철제 무기, 百鍊鋼)

4) 주조철기 : 서양에 없는 독특한 제작기술, 쇳물을 틀(용범)에 부어 만든 것, 탄소 함유량 2% 이상 으로 너무 단단하여 깨지기 쉬움

(27)

6. 철기문화의 유입

1) 1차 파급 : 전국 燕나라 주조 철기문화 유입, 지역 따라 시간 차이 (주조도끼, 끌 등), (1) 한반도 북부

- BC4∼3세기, 영변 세죽리 明刀錢 유적, 황해도 봉산 송산리·백천 석산리, - 평안남도 甑山郡과 大同郡 斧山面 : BC2세기 추정 鑄型 발견, 銑鐵생산?) (2) 한반도 중남부 : 고조선 준왕의 남천(?) 또는 그 이전(?)

- BC 2세기 : 당진 소소리, 부여 합송리, 장수 남양리, 논산 원북리, 공주 수촌리 등

- 유리 성분분석 결과 중국 戰國∼漢代의 납-바리윰 계통 유리 : 철기+유리제작기술 유입(?) 2) 2차 파급 : 衛滿朝鮮系 철기문화의 파급(漢의 단조 철기문화기반)

(1) 위만조선 철기문화 실체는 아직 명확하지 않으나, 강철제 무기를 기반으로 한 철기문화였을 것 으로 추정 → 낙랑군 설치(BC 108년)로 인한 위만조선의 멸망과 함께 남하한 유이민에 의해 유 입되었을 가능성

- 영남 지역 주로 유입(?) : 대구 팔달동 등 ⇒ 辰弁韓 문화의 기반(?)

* 漢四郡 초기 武帝의 마노관 정책 : 철기 금수, 흉노 견제책

6. 철기문화의 유입

1) 1차 파급 : 전국 燕나라 주조 철기문화 유입, 지역 따라 시간 차이 (주조도끼, 끌 등), (1) 한반도 북부

- BC4∼3세기, 영변 세죽리 明刀錢 유적, 황해도 봉산 송산리·백천 석산리, - 평안남도 甑山郡과 大同郡 斧山面 : BC2세기 추정 鑄型 발견, 銑鐵생산?) (2) 한반도 중남부 : 고조선 준왕의 남천(?) 또는 그 이전(?)

- BC 2세기 : 당진 소소리, 부여 합송리, 장수 남양리, 논산 원북리, 공주 수촌리 등

- 유리 성분분석 결과 중국 戰國∼漢代의 납-바리윰 계통 유리 : 철기+유리제작기술 유입(?) 2) 2차 파급 : 衛滿朝鮮系 철기문화의 파급(漢의 단조 철기문화기반)

(1) 위만조선 철기문화 실체는 아직 명확하지 않으나, 강철제 무기를 기반으로 한 철기문화였을 것 으로 추정 → 낙랑군 설치(BC 108년)로 인한 위만조선의 멸망과 함께 남하한 유이민에 의해 유 입되었을 가능성

- 영남 지역 주로 유입(?) : 대구 팔달동 등 ⇒ 辰弁韓 문화의 기반(?)

* 漢四郡 초기 武帝의 마노관 정책 : 철기 금수, 흉노 견제책

(28)

3) 철기문화 3차 파급

- 樂浪郡(BC108∼AD313년)을 통한 漢 단조 철기문화 지속적 유입

(1) 廉斯鑡 설화 : AD 1세기 전반, 1500여명의 漢人이 벌목하다가 韓人에게 포로로 잡혀 머리 깎이 고 강제로 사역을 당함. [막대한 양이 소모되는 제철용 숯을 얻기 위해 벌목?, 원삼국시대 유적 에서 숯가마 급증]

(2) 弁辰지역의 철생산 : 원삼국시대(AD1∼3세기)에는 경주 斯盧國과 김해 狗邪國(『日本書紀』에 須那羅 또는 素那羅로 표기되었는데, 須나 素는 쇠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이 유력한 철생산 후보로서, 이 지역의 철이 연안 항로를 따라 한반도 거의 대부분 및 바다건너 倭지역까지 공급 (韓, 濊. 倭, 樂浪郡, 帶方郡 등),

(3) 철 유통 : 중간소재나 완제품 형태로 유통되었는데, 주로 납작한 도끼모양(板狀鐵斧)이나 Ⅰ字形 철판(鐵鋌) 같은 중간소재 형태로 널리 유통되었을 것으로 보임

(4) 郡縣 공인집단의 유입 : AD2세기 후반 이후 중국 군현의 세력 약화로 공인집단을 포함한 대규모 유이민 집단이 발생하여 韓地로 이동 정착한 것으로 보임

(5) 철기생산

- 충주 금릉동, 진천 석장리, 경주 황성동, 화성 기탄리 유적(3세기 경 제련 가능성?) 등 - 주조괭이도 사용, 단조철기 확대 보급 : 단순 괴련강 ⇒ 百鍊鋼 or 炒鋼

3) 철기문화 3차 파급

- 樂浪郡(BC108∼AD313년)을 통한 漢 단조 철기문화 지속적 유입

(1) 廉斯鑡 설화 : AD 1세기 전반, 1500여명의 漢人이 벌목하다가 韓人에게 포로로 잡혀 머리 깎이 고 강제로 사역을 당함. [막대한 양이 소모되는 제철용 숯을 얻기 위해 벌목?, 원삼국시대 유적 에서 숯가마 급증]

(2) 弁辰지역의 철생산 : 원삼국시대(AD1∼3세기)에는 경주 斯盧國과 김해 狗邪國(『日本書紀』에 須那羅 또는 素那羅로 표기되었는데, 須나 素는 쇠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이 유력한 철생산 후보로서, 이 지역의 철이 연안 항로를 따라 한반도 거의 대부분 및 바다건너 倭지역까지 공급 (韓, 濊. 倭, 樂浪郡, 帶方郡 등),

(3) 철 유통 : 중간소재나 완제품 형태로 유통되었는데, 주로 납작한 도끼모양(板狀鐵斧)이나 Ⅰ字形 철판(鐵鋌) 같은 중간소재 형태로 널리 유통되었을 것으로 보임

(4) 郡縣 공인집단의 유입 : AD2세기 후반 이후 중국 군현의 세력 약화로 공인집단을 포함한 대규모 유이민 집단이 발생하여 韓地로 이동 정착한 것으로 보임

(5) 철기생산

- 충주 금릉동, 진천 석장리, 경주 황성동, 화성 기탄리 유적(3세기 경 제련 가능성?) 등 - 주조괭이도 사용, 단조철기 확대 보급 : 단순 괴련강 ⇒ 百鍊鋼 or 炒鋼

(29)

[ 철기문화 보급 효과와 사회적 변화]

1) 획기적 생산력 증대 : 深耕 및 경작지 개발⇒ 생산력 확대

2) 도작농경을 위한 수리관개 시설 등 대규모 토목공사의 효율성 제고 3) 강철제 무기의 대량생산 : 다른 무기 압도

4) 대규모 잉여생산물이 특정 집단이나 개인에게 집중 ⇒ 개인간· 집단 간에 긴장 고조, 살상 효과가 매우 큰 철제 무기로 무장하여 치열한 전투와 전쟁 ⇒ 공격용 무기 발달은 철제 갑옷과 투구 같은 방어용 무구 발달을 촉진

5) 철 자원의 확보가 곧 고대 국가의 승패를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님

[ 철기문화 보급 효과와 사회적 변화]

1) 획기적 생산력 증대 : 深耕 및 경작지 개발⇒ 생산력 확대

2) 도작농경을 위한 수리관개 시설 등 대규모 토목공사의 효율성 제고 3) 강철제 무기의 대량생산 : 다른 무기 압도

4) 대규모 잉여생산물이 특정 집단이나 개인에게 집중 ⇒ 개인간· 집단 간에 긴장 고조, 살상 효과가 매우 큰 철제 무기로 무장하여 치열한 전투와 전쟁 ⇒ 공격용 무기 발달은 철제 갑옷과 투구 같은 방어용 무구 발달을 촉진

5) 철 자원의 확보가 곧 고대 국가의 승패를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님

(30)

거석

거석 고인돌에서 고인돌에서 토광묘문화로 토광묘문화로

초기철기시대의

초기철기시대의 토광묘 토광묘

거석

거석 고인돌에서 고인돌에서 토광묘문화로 토광묘문화로

초기철기시대의

초기철기시대의 토광묘 토광묘

(31)
(32)

보령 교성리주거지( 점토대토기)

(33)

대전 괴정동 ( 후기? 초기철기)

(34)

傳 영암

거푸집

(35)

부여 구봉리

(36)

중국식

동검

(37)
(38)
(39)

위원 용연동, 영변 세죽리 ( 명도전, 주조철기류 )

(40)

당진 소소리

요녕 윤가촌 상층

(41)

부여

합송리

(42)

장수 남양리유적(좌:3호묘, 중:2호 3호 출토 금속기, 우상:4호 출토 철기, 우히:2호와 5호출토 토기)

(43)

경주 구정동

(44)

대구 평리동

(45)

안성 반제리유적 : II 형 위석토광묘

(46)
(47)

금산 수당리 위석토광묘

(48)

논산 원북리

(49)

논산 원북리유적

나-1호토광묘

(50)

함평 초포리

(51)

遼寧 尹家村 下層 12 호묘 (BC5~4 세기)

(52)

공주 수촌리1 대전괴정동

[ I 유형 토광묘]

(53)

홍성 도청이전부지 토광묘

(54)

[ 한과 마한 : 韓 의 시작]

1. 상한 : 韓과 辰國

○ 侯準旣僭號稱王 爲燕亡人衛滿所攻奪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 其後絶滅 今韓人猶有 奉其祭祀者. 漢時屬樂浪郡 四時朝謁 魏略曰 初 右渠未破時 朝鮮相歷谿卿以諫右渠不用 東之辰 國 時民隨出居者二千餘戶 亦與朝鮮貢蕃不相往來 (《三國志》魏書 東夷傳 韓條)

○ BC2세기 무렵 : 위만조선(대동강유역) - 眞蕃 - 辰國(한강유역?) - 韓(금강유역) ⇒ BC2세기 초 준 왕 남천시 진변한은 없었으므로 三韓이라 할 수는 없으나, 이 韓=馬韓으로서 즉 準王 南奔 이전 부터 마한 존재하였다고 보기도 함.

○ BC 3세기 무렵의 韓은 과연 馬韓인가?

○ 물질문화 : 초기철기시대 토광묘와 세형동검·점토대토기·흑도장경호

- BC4세기말 ∼ 3세기초 : 연장 秦蓋의 고조선침입에 따른 유이민의 남하를 남쪽 지방 점토대토기문 화의 시작이자 삼한의 기원으로 보기도 함⇒ 최근 점토대토기 연대 상향되고 있어 근거 부족 2. 하한

○ AD 3~4세기 금강유역 : 원삼국~백제 교체기의 물질문화 양상

○ 영산강유역 : AD5세기경까지 비교적 독자적인 문화상 보여주고 있어 그 성격에 대한 해석에 문제 1. 상한 : 韓과 辰國

○ 侯準旣僭號稱王 爲燕亡人衛滿所攻奪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 其後絶滅 今韓人猶有 奉其祭祀者. 漢時屬樂浪郡 四時朝謁 魏略曰 初 右渠未破時 朝鮮相歷谿卿以諫右渠不用 東之辰 國 時民隨出居者二千餘戶 亦與朝鮮貢蕃不相往來 (《三國志》魏書 東夷傳 韓條)

○ BC2세기 무렵 : 위만조선(대동강유역) - 眞蕃 - 辰國(한강유역?) - 韓(금강유역) ⇒ BC2세기 초 준 왕 남천시 진변한은 없었으므로 三韓이라 할 수는 없으나, 이 韓=馬韓으로서 즉 準王 南奔 이전 부터 마한 존재하였다고 보기도 함.

○ BC 3세기 무렵의 韓은 과연 馬韓인가?

○ 물질문화 : 초기철기시대 토광묘와 세형동검·점토대토기·흑도장경호

- BC4세기말 ∼ 3세기초 : 연장 秦蓋의 고조선침입에 따른 유이민의 남하를 남쪽 지방 점토대토기문 화의 시작이자 삼한의 기원으로 보기도 함⇒ 최근 점토대토기 연대 상향되고 있어 근거 부족 2. 하한

○ AD 3~4세기 금강유역 : 원삼국~백제 교체기의 물질문화 양상

○ 영산강유역 : AD5세기경까지 비교적 독자적인 문화상 보여주고 있어 그 성격에 대한 해석에 문제

(55)

완주 신풍유적 : 초기철기, 고조선 준왕이 내려왔을까?

나지구 나지구

가지구 가지구

(56)

Ⅱ군군

Ⅲ군군 가지구 초기철기시대토광묘 51

Ⅰ군군

Ⅳ군군

(57)

19 18

21

26 50

51

29

27 28

30

31

49

24 20

22 23 19

18

24 20

251X84X(81)cm 251X84X(81)cm

III

III 군군 2222

19 18

21

26 50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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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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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2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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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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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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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X84X(81)cm 251X84X(81)cm 251X84X(81)cm

(58)

19 18

21

26 50

51

29

27 2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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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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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23 19

18

24 20

III

III 군군 31

19 18

21

26 50

51

29

2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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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20

22 23 21

26 50

51

29

27 28

30

31

49

24

22 23

236X51X(33)cm 직경 18cm

(59)

사사 성성 과과 --나지구나지구

(60)

완주 갈동유적

(61)

갈동 3 호

(62)

3 호 출토 양익청동촉

(63)

고조선과 위만조선

고조선과 위만조선

(64)

1) 고조선 명칭 : 삼국유사 처음 사용, 이씨 조선과 구별 2) 성립시기와 실체

① 三國志 위서 동이전 한조에 인용된 魏略 : BC4 세기말∼3 세기초에 연나라 장수 秦開 에게 서쪽 땅 2 천리를 뺏김

② 史記 조선전 : 기원전 2 세기초 무렵(BC 180 년대?) 위만에게 쫒긴 準王 이 남쪽으로 피난하여 韓王 이 됨

3) 위치 : 고조선 수도에 낙랑군 설치됨

① 대동강설: 50 년대와 90 년대 이후 북한 주장

② 요녕설 : 요동 개평 부근, 패수- 대릉하 ( 신채호, 60 년대 북한 주장)

③ 이동설 : 요동( 비파형동검문화) -> 대동강 ( 세형동검문화)

4) 고조선의 문화 : 요녕식동검문화권, 미송리형토기, 고인돌, 목관묘 -> 문화 적 공통성과 정치적 실체의 일치 여부

5) 고조선 영역 : 시대에 따라 변화 가능성

6) 箕子朝鮮 : 殷 나라 傑王 때의 3聖(箕子, 비간, 미간) 1) 고조선 명칭 : 삼국유사 처음 사용, 이씨 조선과 구별 2) 성립시기와 실체

① 三國志 위서 동이전 한조에 인용된 魏略 : BC4 세기말∼3 세기초에 연나라 장수 秦開 에게 서쪽 땅 2 천리를 뺏김

② 史記 조선전 : 기원전 2 세기초 무렵(BC 180 년대?) 위만에게 쫒긴 準王 이 남쪽으로 피난하여 韓王 이 됨

3) 위치 : 고조선 수도에 낙랑군 설치됨

① 대동강설: 50 년대와 90 년대 이후 북한 주장

② 요녕설 : 요동 개평 부근, 패수- 대릉하 ( 신채호, 60 년대 북한 주장)

③ 이동설 : 요동( 비파형동검문화) -> 대동강 ( 세형동검문화)

4) 고조선의 문화 : 요녕식동검문화권, 미송리형토기, 고인돌, 목관묘 -> 문화 적 공통성과 정치적 실체의 일치 여부

5) 고조선 영역 : 시대에 따라 변화 가능성

6) 箕子朝鮮 : 殷 나라 傑王 때의 3聖(箕子, 비간, 미간)

(65)

衛 滿 朝 鮮

1. 시기 : BC2 세기 초 ∼ BC108 년

2. 성립 : BC190~185 년경 漢 의 연나라 왕 노관이 흉노로 망명하자, 무 리 천여명 이끌고 연나라 탈출하여 준왕의 허락( 박사에 봉해짐) 으로 요동지역 거주 => 수도 방어 핑계로 도성( 왕험성) 에 난입하여 정권 탈취 => 쫓겨난 준왕은 배를 타고 남쪽 韓 나라 땅으로 망명 韓王 을 칭함

3. BC108 년 漢 武帝 가 흉노를 멸한 후 위만조선을 멸하고 郡縣 설치 4. 위만의 출자 : 朝鮮人 인가 漢人 인가? ( 魋結 상투, 조선 국호 및 관직제

도 사용)

5. 식민사관의 극복 : 국적에 얽매이기보다 당시 요즘과는 다른 당시의 역사 상황을 고려해야 cf> 페루의 일본 국적 후지모리 대통령( 페루 가 일본사인가?)

6. 문화 : 철기문화기반, 강철제 무기, 목관· 목곽묘, 수레 1. 시기 : BC2 세기 초 ∼ BC108 년

2. 성립 : BC190~185 년경 漢 의 연나라 왕 노관이 흉노로 망명하자, 무 리 천여명 이끌고 연나라 탈출하여 준왕의 허락( 박사에 봉해짐) 으로 요동지역 거주 => 수도 방어 핑계로 도성( 왕험성) 에 난입하여 정권 탈취 => 쫓겨난 준왕은 배를 타고 남쪽 韓 나라 땅으로 망명 韓王 을 칭함

3. BC108 년 漢 武帝 가 흉노를 멸한 후 위만조선을 멸하고 郡縣 설치 4. 위만의 출자 : 朝鮮人 인가 漢人 인가? ( 魋結 상투, 조선 국호 및 관직제

도 사용)

5. 식민사관의 극복 : 국적에 얽매이기보다 당시 요즘과는 다른 당시의 역사 상황을 고려해야 cf> 페루의 일본 국적 후지모리 대통령( 페루 가 일본사인가?)

6. 문화 : 철기문화기반, 강철제 무기, 목관· 목곽묘, 수레

(66)

사기 조선열전

±

朝鮮王滿者, 故燕人也. 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爲置吏, 築鄣塞.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云浿水出遼東塞外, 西南至樂浪縣西入海. 浿普大反.屬燕. 燕王盧綰反, 入匈奴, 滿亡命, 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 稍役屬眞番․朝鮮蠻夷及故 燕齊亡命者王之, 都王險.

±

會孝惠․高后時天下初定, 遼東太守卽約滿爲外臣, 保塞外蠻夷, 無使盜邊, 諸蠻 夷君長欲入見天子, 勿得禁止. 以聞, 上許之, 以故滿得兵威財物侵降其旁小邑, 眞番․臨屯 皆來服屬, 方數千里.

±

朝鮮王滿者, 故燕人也. 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爲置吏, 築鄣塞.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云浿水出遼東塞外, 西南至樂浪縣西入海. 浿普大反.屬燕. 燕王盧綰反, 入匈奴, 滿亡命, 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 稍役屬眞番․朝鮮蠻夷及故 燕齊亡命者王之, 都王險.

±

會孝惠․高后時天下初定, 遼東太守卽約滿爲外臣, 保塞外蠻夷, 無使盜邊, 諸蠻

夷君長欲入見天子, 勿得禁止. 以聞, 上許之, 以故滿得兵威財物侵降其旁小邑,

眞番․臨屯 皆來服屬, 方數千里.

(67)

± 진나라가 연나라를 멸하고, 요동의 바깥으로 나갔다. 한나라가 일어서자 그곳이 멀고 지키기 어 려워 요동의 옛 요새를 고치니, 경계가 패수로 [정의: '지리지'에, '패수'는, 요동의 요새밖에서 나오며, 서남으로 흘러, 낙랑현 서쪽에 이르러, 海로 들어간다.] 연나라에 속한다. '연왕 노관' 이 반하여 흉노로 도망가고,'만'이 명령을 버리고[정의: 命은 敎令이라 한다.] 그 무리 천여명과 상투를 틀고 '만이'의 복식으로 바꾸고 동쪽으로 달아나 요새를 벗어났다. 패수를 건너 진나라 의 옛 '공지'인 '상하장' 땅에 살다가[색은: 지리지에 보면 낙랑에 '운장'이 있다.] 차츰 '진번조 선'에 속하게 되고, 만이,연,제나라의 망명자들의 왕이 되어 '왕검'에 도읍을 하였다

± 이 때가 孝惠 高后의 시기로서 마침 천하가 처음 평정되었다. 요동태수가 '만'과 약속하기를 “(

漢의) 外臣이 되어 塞外의 蠻夷를 보호하고 변경을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만약 여러 蠻夷 의 군장들이 천자를 알현하고자 할 경우 이를 막지

말라”고 하였다. 요동태수가 이를 보고하니 황제가 허락하였다. 이렇게 하여 병기와 재물을 얻은 滿이 주변의 작은 나라를 침략하여 항복받 으니, 진번과 임둔 등이 모두 복속되어 그 땅이 사방 수천리가 되었다.

± 진나라가 연나라를 멸하고, 요동의 바깥으로 나갔다. 한나라가 일어서자 그곳이 멀고 지키기 어 려워 요동의 옛 요새를 고치니, 경계가 패수로 [정의: '지리지'에, '패수'는, 요동의 요새밖에서 나오며, 서남으로 흘러, 낙랑현 서쪽에 이르러, 海로 들어간다.] 연나라에 속한다. '연왕 노관' 이 반하여 흉노로 도망가고,'만'이 명령을 버리고[정의: 命은 敎令이라 한다.] 그 무리 천여명과 상투를 틀고 '만이'의 복식으로 바꾸고 동쪽으로 달아나 요새를 벗어났다. 패수를 건너 진나라 의 옛 '공지'인 '상하장' 땅에 살다가[색은: 지리지에 보면 낙랑에 '운장'이 있다.] 차츰 '진번조 선'에 속하게 되고, 만이,연,제나라의 망명자들의 왕이 되어 '왕검'에 도읍을 하였다

± 이 때가 孝惠 高后의 시기로서 마침 천하가 처음 평정되었다. 요동태수가 '만'과 약속하기를 “(

漢의) 外臣이 되어 塞外의 蠻夷를 보호하고 변경을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만약 여러 蠻夷 의 군장들이 천자를 알현하고자 할 경우 이를 막지

말라”고 하였다. 요동태수가 이를 보고하니 황제가 허락하였다. 이렇게 하여 병기와 재물을 얻은 滿이 주변의 작은 나라를 침략하여 항복받 으니, 진번과 임둔 등이 모두 복속되어 그 땅이 사방 수천리가 되었다.

(68)

± 傳子至孫右渠 所誘漢亡人滋多, 又未嘗入見; 眞番旁衆國欲上書見天子, 又擁閼不通.

元封二年, 漢使涉何譙諭右渠, 終不肯奉詔. 何去至界上, 臨浿水, 使御刺殺送何者. 鮮 裨王長, 渡馳入塞, 歸報天子曰殺朝鮮將. 上爲其名美, 拜何爲遼東東部都尉. 朝鮮怨 何, 發兵襲攻殺何.

± 天子募罪人擊朝鮮. 其秋,

遣樓船將軍楊僕從齊浮渤海 兵五萬人, 左將軍荀彘出遼東 討 右渠. 右渠發兵距險. 左將軍卒正多率遼東兵先縱, 敗散, 多還走, 坐法斬. 樓船將軍將

齊兵七千人先至王險. 右渠城守, 窺知樓船軍少, 卽出城擊樓船, 樓船軍敗散走. 將軍楊 僕失其衆, 遁山中十餘日, 稍求收散卒, 復聚. 左將軍擊朝鮮浿水西軍, 未能破自前.

± 天子爲兩將未有利, 乃使衛山因兵威往諭右渠. 右渠見使者頓首謝:「願降, 恐兩將詐殺臣 今見信節, 請服降.」

遣太子入謝, 獻馬五千匹, 及饋軍糧. 人衆萬餘, 持兵, 方渡浿水, 使

者及左將軍疑其爲變, 謂太子已服降, 宜命人毋持兵. 太子亦疑使者左將軍詐殺之, 遂不 渡浿水, 復引歸. 山還報天子, 天子誅山.

± 傳子至孫右渠 所誘漢亡人滋多, 又未嘗入見; 眞番旁衆國欲上書見天子, 又擁閼不通.

元封二年, 漢使涉何譙諭右渠, 終不肯奉詔. 何去至界上, 臨浿水, 使御刺殺送何者. 鮮 裨王長, 渡馳入塞, 歸報天子曰殺朝鮮將. 上爲其名美, 拜何爲遼東東部都尉. 朝鮮怨 何, 發兵襲攻殺何.

± 天子募罪人擊朝鮮. 其秋,

遣樓船將軍楊僕從齊浮渤海 兵五萬人, 左將軍荀彘出遼東 討 右渠. 右渠發兵距險. 左將軍卒正多率遼東兵先縱, 敗散, 多還走, 坐法斬. 樓船將軍將

齊兵七千人先至王險. 右渠城守, 窺知樓船軍少, 卽出城擊樓船, 樓船軍敗散走. 將軍楊 僕失其衆, 遁山中十餘日, 稍求收散卒, 復聚. 左將軍擊朝鮮浿水西軍, 未能破自前.

± 天子爲兩將未有利, 乃使衛山因兵威往諭右渠. 右渠見使者頓首謝:「願降, 恐兩將詐殺臣 今見信節, 請服降.」

遣太子入謝, 獻馬五千匹, 及饋軍糧. 人衆萬餘, 持兵, 方渡浿水, 使

者及左將軍疑其爲變, 謂太子已服降, 宜命人毋持兵. 太子亦疑使者左將軍詐殺之, 遂不 渡浿水, 復引歸. 山還報天子, 天子誅山.

(69)

± 전하여 손자'우거'[정의: 그 손자의 이름이다.]에 이르러, 한나라의 망명자들을 불러 유인하니, 그 숫자는 많았다. 또한 입견하지 않고 '진번'지역의 여러나라에서, 글을 올려 천자를 뵙고자 하 였으나, 역시 가로막아 만나게 하지 못하게 하였다. 원봉2년, 한나라 사신 '섭하'[색은: 설문에, ' 초'는 꾸짖다,諭는 권유하다,는 의미라 했다. '초'음은 웃게 만드는 것의 반대이다.]가,'우거'를 회유하고 꾸짖었으나, 끝내, 말을 듣지 않았다. 섭하가, 돌아가는길에 '패수'에 이르니, 길잡이[

색은: 즉 섭하를 따라온 길잡이 이다.]가 마중나온 '조선비왕' '長'[정의: 안사고는, '長'은 비왕의 이름이며, 섭하를 보내러 패수까지 나왔다가 죽었다. 생각컨데 비왕은 장사급에 미치나 감히 안 사고는 알지 못한다 했다.]을 찔러 죽였다. 달려 요새로 들어가,[정의: 들어간 곳이 평주 유림관 이다.] 왕[한무제]에게, '조선의 장수를 죽였다'고 보고하니,왕이 그 명예를 부추겨[색은: 살해 한 장수의 이름이 있다.], 힐책하지 않고, 섭하를'요동 동부도위'에 임명하였다.[정의: 지리지에, 요동군 무차현은,동부도위가 다스린다.] '조선'이 섭하에게,원한을 품고 병사를 일으켜, 습격하 여 섭하를 죽여버렸다.

± 전하여 손자'우거'[정의: 그 손자의 이름이다.]에 이르러, 한나라의 망명자들을 불러 유인하니, 그 숫자는 많았다. 또한 입견하지 않고 '진번'지역의 여러나라에서, 글을 올려 천자를 뵙고자 하 였으나, 역시 가로막아 만나게 하지 못하게 하였다. 원봉2년, 한나라 사신 '섭하'[색은: 설문에, ' 초'는 꾸짖다,諭는 권유하다,는 의미라 했다. '초'음은 웃게 만드는 것의 반대이다.]가,'우거'를 회유하고 꾸짖었으나, 끝내, 말을 듣지 않았다. 섭하가, 돌아가는길에 '패수'에 이르니, 길잡이[

색은: 즉 섭하를 따라온 길잡이 이다.]가 마중나온 '조선비왕' '長'[정의: 안사고는, '長'은 비왕의 이름이며, 섭하를 보내러 패수까지 나왔다가 죽었다. 생각컨데 비왕은 장사급에 미치나 감히 안 사고는 알지 못한다 했다.]을 찔러 죽였다. 달려 요새로 들어가,[정의: 들어간 곳이 평주 유림관 이다.] 왕[한무제]에게, '조선의 장수를 죽였다'고 보고하니,왕이 그 명예를 부추겨[색은: 살해 한 장수의 이름이 있다.], 힐책하지 않고, 섭하를'요동 동부도위'에 임명하였다.[정의: 지리지에, 요동군 무차현은,동부도위가 다스린다.] '조선'이 섭하에게,원한을 품고 병사를 일으켜, 습격하 여 섭하를 죽여버렸다.

(70)

± 왕[한무제]이 죄인들을 모아 '조선'을 쳤다. 그해 가을, 누선장군'양복'을 보내어, '제<齊>'를 따라 ' 발해'를 건너가게하였다. 병사가 오만이었다. 좌장군 '순체'는 요동으로 나가, '우거'를 쳤다. '우거' 가 병사를 일으켜, 험준한 곳에서 대항하였다. 좌장군 이 요동의 병사를 거느리고 먼저 갔으나, 패하 여 흩어지고, 대부분 되돌아서 도망나오므로, 죄를 물어 참수했다. 누선장군이 제나라 병사7000명 을 이끌고, 왕검성에 먼저 도착하니, '우거'가 성을 지키고 있다가, 누선군의 규모가 작음을 보고,즉 시 성을나와 공격하니, 누선군이 패하여 달아나고, 장군'양복'은, 그 병사를 잃고 산속에서 10여일을 숨어지내며, 패잔병을 수습했다. 좌장군이,조선의 '패수서군'을 공격했으나, 지난번과 같이 패하고 말았다.

± 왕[유철]이 2장군의 불리함을 보고,'위산'을 사신으로 보내어,'우거'에게 군세로 위협하여 달래었다.

'우거'가 사신을 보내어,사죄하기를, "항복코자 하나,2장군이 신하를 죽이려함이 두려워,이제 믿음의 징표를 보이는것이니, 항복을 받아주시기 바랍니다"하고, 태자를 보내어,사죄를 하고, 말5000필을 주니, 군량으로 사용하고, 백성1만명으로 특별군을 만들어 패수를 건너려 하니, 사자와,좌장군이 그 돌변한 정세에 의심하며, 태자에게,이미 항복했으면, 마땅히 특별군은, 없어야 한다 하니, 태자 역시 ,사자와 좌장군이, 속여서 죽이려 하는것으로 알고, 패수를 건너지 않고, 되돌아왔다. '위산'이 돌아 와, 왕에게 보고하니, 왕이 위산을 주살했다.

± 왕[한무제]이 죄인들을 모아 '조선'을 쳤다. 그해 가을, 누선장군'양복'을 보내어, '제<齊>'를 따라 ' 발해'를 건너가게하였다. 병사가 오만이었다. 좌장군 '순체'는 요동으로 나가, '우거'를 쳤다. '우거' 가 병사를 일으켜, 험준한 곳에서 대항하였다. 좌장군 이 요동의 병사를 거느리고 먼저 갔으나, 패하 여 흩어지고, 대부분 되돌아서 도망나오므로, 죄를 물어 참수했다. 누선장군이 제나라 병사7000명 을 이끌고, 왕검성에 먼저 도착하니, '우거'가 성을 지키고 있다가, 누선군의 규모가 작음을 보고,즉 시 성을나와 공격하니, 누선군이 패하여 달아나고, 장군'양복'은, 그 병사를 잃고 산속에서 10여일을 숨어지내며, 패잔병을 수습했다. 좌장군이,조선의 '패수서군'을 공격했으나, 지난번과 같이 패하고 말았다.

± 왕[유철]이 2장군의 불리함을 보고,'위산'을 사신으로 보내어,'우거'에게 군세로 위협하여 달래었다.

'우거'가 사신을 보내어,사죄하기를, "항복코자 하나,2장군이 신하를 죽이려함이 두려워,이제 믿음의 징표를 보이는것이니, 항복을 받아주시기 바랍니다"하고, 태자를 보내어,사죄를 하고, 말5000필을 주니, 군량으로 사용하고, 백성1만명으로 특별군을 만들어 패수를 건너려 하니, 사자와,좌장군이 그 돌변한 정세에 의심하며, 태자에게,이미 항복했으면, 마땅히 특별군은, 없어야 한다 하니, 태자 역시 ,사자와 좌장군이, 속여서 죽이려 하는것으로 알고, 패수를 건너지 않고, 되돌아왔다. '위산'이 돌아 와, 왕에게 보고하니, 왕이 위산을 주살했다.

(71)

± 左將軍破浿水上軍, 乃前, 至城下, 圍其西北. 樓船亦往會, 居城南. 右渠遂堅守城, 數月未能下

± 左將軍素侍中, 幸, 將燕代卒, 悍, 乘勝, 軍多驕. 樓船將齊卒, 入海, 固已多敗亡; 其先與右渠 戰, 困辱亡卒, 卒皆恐, 將心慙, 其圍右渠, 常持和節. 左將軍急擊之, 朝鮮大臣乃陰閒使人私 約降樓船, 往來言, 尙未肯決. 左將軍數與樓船期戰, 樓船欲急就其約, 不會; 左將軍亦使人求 閒郤降下朝鮮, 朝鮮不肯, 心附樓船: 以故兩將不相能. 左將軍心意樓船前有失軍罪, 今與朝鮮 私善而又不降, 疑其有反計, 未敢發. 天子曰將率不能, 前(及)[乃]使衛山諭降右渠, 右渠遣太 子, 山使不能剸決, 與左將軍計相誤, 卒沮約. 今兩將圍城, 又乖異, 以故久不決. 使濟南太守

公孫遂往(征)之, 有便宜得以從事. 遂至, 左將軍曰:

「朝鮮當下久矣, 不下者有狀.」 言樓船數 朝不會, 具以素所意告遂, 曰: 「今如此不取, 恐爲大害, 非獨樓船, 又且與朝鮮共滅吾軍.」 遂 亦以爲然, 而以節召樓船將軍入左將軍營計事, 卽命左將軍麾下執捕樓船將軍, 幷其軍, 以報 天子. 天子誅遂.

± 左將軍破浿水上軍, 乃前, 至城下, 圍其西北. 樓船亦往會, 居城南. 右渠遂堅守城, 數月未能下

± 左將軍素侍中, 幸, 將燕代卒, 悍, 乘勝, 軍多驕. 樓船將齊卒, 入海, 固已多敗亡; 其先與右渠 戰, 困辱亡卒, 卒皆恐, 將心慙, 其圍右渠, 常持和節. 左將軍急擊之, 朝鮮大臣乃陰閒使人私 約降樓船, 往來言, 尙未肯決. 左將軍數與樓船期戰, 樓船欲急就其約, 不會; 左將軍亦使人求 閒郤降下朝鮮, 朝鮮不肯, 心附樓船: 以故兩將不相能. 左將軍心意樓船前有失軍罪, 今與朝鮮 私善而又不降, 疑其有反計, 未敢發. 天子曰將率不能, 前(及)[乃]使衛山諭降右渠, 右渠遣太 子, 山使不能剸決, 與左將軍計相誤, 卒沮約. 今兩將圍城, 又乖異, 以故久不決. 使濟南太守

公孫遂往(征)之, 有便宜得以從事. 遂至, 左將軍曰:

「朝鮮當下久矣, 不下者有狀.」 言樓船數 朝不會, 具以素所意告遂, 曰: 「今如此不取, 恐爲大害, 非獨樓船, 又且與朝鮮共滅吾軍.」 遂 亦以爲然, 而以節召樓船將軍入左將軍營計事, 卽命左將軍麾下執捕樓船將軍, 幷其軍, 以報 天子. 天子誅遂.

(72)

± 좌장군이 浿水上軍을 격파하고, 지난번처럼 성아래 이르러, 그 서북을 포위하고, 누선군도 역시 성의 남쪽에 와서 진을 쳤다. 우거가 성을 굳게지키니, 수개월동안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 좌장군은, 천자를 모신적이 있고, 다행히 장군 '연대'의 군사가 사나워 승리하곤 했으나, 군이 교 만해졌다. 누선장'제'의 병사들이 海로 들어갔으나, 고립되어 패망했다. 그전에 '우거'와 싸워서 패하였던 군사들이라, 모두 공포에 질려있었으며, 장수들은, '우거'를 포위하고 있으면서도 항상 화친사절을 보내야함을 매우 수치스러워했다. 좌장군이 급히 공격하니,'조선'의 대신이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항복을 약속하고, 누선과 왕래하며 대화했으나, 항상 결론은 없었다. 좌장군이, 수차례 누선과 함께 공격하고자 했으나, 누선은,그 약속을 얻고자 욕심을 부려, 협공을 하지 못 했다. 좌장군 역시 사람을 보내어,조선의 항복을 권했으나, 조선은 듣지 않고, 누선과만 연락했 다. 이리하여, 2장군은, 서로 협력하지 못했다.

± 좌장군이 浿水上軍을 격파하고, 지난번처럼 성아래 이르러, 그 서북을 포위하고, 누선군도 역시 성의 남쪽에 와서 진을 쳤다. 우거가 성을 굳게지키니, 수개월동안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 좌장군은, 천자를 모신적이 있고, 다행히 장군 '연대'의 군사가 사나워 승리하곤 했으나, 군이 교 만해졌다. 누선장'제'의 병사들이 海로 들어갔으나, 고립되어 패망했다. 그전에 '우거'와 싸워서 패하였던 군사들이라, 모두 공포에 질려있었으며, 장수들은, '우거'를 포위하고 있으면서도 항상 화친사절을 보내야함을 매우 수치스러워했다. 좌장군이 급히 공격하니,'조선'의 대신이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항복을 약속하고, 누선과 왕래하며 대화했으나, 항상 결론은 없었다. 좌장군이, 수차례 누선과 함께 공격하고자 했으나, 누선은,그 약속을 얻고자 욕심을 부려, 협공을 하지 못 했다. 좌장군 역시 사람을 보내어,조선의 항복을 권했으나, 조선은 듣지 않고, 누선과만 연락했 다. 이리하여, 2장군은, 서로 협력하지 못했다.

(73)

± 좌장군은 속으로 누선의 지난번 패전을 생각하고, 지금은 조선과 몰래 통하여 항복치 않게 하니, 그 배반을 의심했으나, 밖으로 말하지는 못했다. 유철이 말하기를, '장수 로서의 통솔력이 없다. 지난번에 '위산'을 보내어, '우거'에게 항복하기를 회유하여, 우거가 태자를 보냈으나, 위산이 결말을 못짓고 좌장군의 오판이 겹쳐, 약속이 어그 러졌다, 지금 2장군이 성을 포위하고 있으나, 또다시 의견이 어긋나니,오래도록 결말 이 없다.' '제남태수' '공손수'를 보내어, 바로잡게 하면 마땅히 섬기어 그 말을 따르리 라. 공손수가 이르니, 좌장군이 말하기를, '지금 조선을 이기기는 시일이 많이 걸리 고, 함락치 못하는 것 역시 그와 마찬가지 이다'하고, 누선과 수차 약속하고도 시행치 못한 것과, 그로 인해 가지게 된 뜻을 말하니, '지금 이리하여 함락치 못한다면, 큰 손 실이 될까 두렵고, 더더구나, 조선과 우리의 군사가 같이 멸한다면, 누선 혼자의 잘못 이 아닐 것이다,' 공손수 또한 그러할 것이라 하여, 누선장군을 좌장군의 진영으로 불 러들일 계획을 세우고, 누선장군을 좌장군 휘하에 붙잡아 두게 하고 그 군사 역시 병 합하여, 왕[유철]에게 보고하니, 왕이 공손수를 주살하였다.

± 좌장군은 속으로 누선의 지난번 패전을 생각하고, 지금은 조선과 몰래 통하여 항복치 않게 하니, 그 배반을 의심했으나, 밖으로 말하지는 못했다. 유철이 말하기를, '장수 로서의 통솔력이 없다. 지난번에 '위산'을 보내어, '우거'에게 항복하기를 회유하여, 우거가 태자를 보냈으나, 위산이 결말을 못짓고 좌장군의 오판이 겹쳐, 약속이 어그 러졌다, 지금 2장군이 성을 포위하고 있으나, 또다시 의견이 어긋나니,오래도록 결말 이 없다.' '제남태수' '공손수'를 보내어, 바로잡게 하면 마땅히 섬기어 그 말을 따르리 라. 공손수가 이르니, 좌장군이 말하기를, '지금 조선을 이기기는 시일이 많이 걸리 고, 함락치 못하는 것 역시 그와 마찬가지 이다'하고, 누선과 수차 약속하고도 시행치 못한 것과, 그로 인해 가지게 된 뜻을 말하니, '지금 이리하여 함락치 못한다면, 큰 손 실이 될까 두렵고, 더더구나, 조선과 우리의 군사가 같이 멸한다면, 누선 혼자의 잘못 이 아닐 것이다,' 공손수 또한 그러할 것이라 하여, 누선장군을 좌장군의 진영으로 불 러들일 계획을 세우고, 누선장군을 좌장군 휘하에 붙잡아 두게 하고 그 군사 역시 병 합하여, 왕[유철]에게 보고하니, 왕이 공손수를 주살하였다.

(74)

±

左將軍已幷兩軍, 卽急擊朝鮮. 朝鮮相路人․相韓陰․尼谿相參․將軍王唊相與謀 曰 「始欲降樓船, 樓船令執, 獨左將軍幷將, 戰益急, 恐不能與, (戰)王又不肯 降. 」 陰․唊․路人皆亡降漢. 路人道死. 元封三年(BC108)夏, 尼谿相參乃使人殺 朝鮮王右渠來降. 王險城未下, 故右渠之大臣成巳又反, 復攻吏. 左將軍使右渠 子長降 相路人之子最 告諭其民, 誅成巳, 以故遂定朝鮮, 爲四郡. 封參爲澅淸 侯, 陰爲狄苴侯, 唊爲平州侯, 長[降]爲幾侯. 最以父死頗有功, 爲溫陽侯.

±

左將軍徵至, 坐爭功相嫉, 乖計, 弃市. 樓船將軍亦坐兵至洌口, 當待左將軍, 擅 先縱, 失亡多, 當誅, 贖爲庶人.

±

太史公曰: 右渠負固, 國以絶祀. 涉何誣功, 爲兵發首. 樓船將狹, 及難離咎. 悔 失番禺, 乃反見疑. 荀彘爭勞, 與遂皆誅. 兩軍俱辱, 將率莫侯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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左將軍已幷兩軍, 卽急擊朝鮮. 朝鮮相路人․相韓陰․尼谿相參․將軍王唊相與謀 曰 「始欲降樓船, 樓船令執, 獨左將軍幷將, 戰益急, 恐不能與, (戰)王又不肯 降. 」 陰․唊․路人皆亡降漢. 路人道死. 元封三年(BC108)夏, 尼谿相參乃使人殺 朝鮮王右渠來降. 王險城未下, 故右渠之大臣成巳又反, 復攻吏. 左將軍使右渠 子長降 相路人之子最 告諭其民, 誅成巳, 以故遂定朝鮮, 爲四郡. 封參爲澅淸 侯, 陰爲狄苴侯, 唊爲平州侯, 長[降]爲幾侯. 最以父死頗有功, 爲溫陽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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左將軍徵至, 坐爭功相嫉, 乖計, 弃市. 樓船將軍亦坐兵至洌口, 當待左將軍, 擅 先縱, 失亡多, 當誅, 贖爲庶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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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史公曰: 右渠負固, 國以絶祀. 涉何誣功, 爲兵發首. 樓船將狹, 及難離咎. 悔

失番禺, 乃反見疑. 荀彘爭勞, 與遂皆誅. 兩軍俱辱, 將率莫侯矣.

(75)

± 좌장군이 이미 양군을 합하고 '조선'을 급히 공격하니, 조선의 승상 '로인','한음',이계상 '삼 ',장군 '왕겹',[집해: 한서음의에,相은, 5인이다. 융적(戎狄)은, 관직의 위차를 몰라서, 모두, 相이라고한다. 음은 頰(jia)이다] [색은: 응소는, 相은, 5인이다. 융적(戎狄)은, 관직의 위 차를 몰라서, 모두, 相이라고한다. '로인<路人>'은, 어양현<漁陽縣>사람이다. 여순은, 相은 그나라 재상이며, '로인'은 이름이다, '겹'은, 겹, 協,으로도 발음한다.]등이 서로 모의하여 말하기를, '처음 누선에게 항복하고자 했으나,지금은 누선이 붙잡혀있고, 좌장군이 홀로 군 을 지휘하니, 전쟁이 점점 급해지므로 대항치 못할까 두렵고, 왕께서도 항복을 허락치 않습 니다'하고, 한음,왕겹,로인등이 모두 한나라에 항복했으며, 로인은 길에서 죽었다. 원봉3년 , 여름, 니계상 '삼'이 조선왕 '우거'를 죽이고 항복해왔으나, '왕검성'은 항복치 않았다. 즉 ‘ 우거'의 대신인 성사(成巳)가 반기를 들고 다시 공격해 왔다. 좌장군이, 우거의 아들, 장항(

長降),집 재상 '로인'의 아들, '최'[색은: '최(最)'는,'로인'의 아들이다.]를 보내어, 그 백성을 회유하여, '성사'를 죽이고 조선을 정복하여, 4군으로 하였다. '삼‘은 화청후, '한음‘은 적상 후, 왕겹은 평주후, 장항은 '기후’. 최는 죽은 아비의 공으로 온양후에 봉했다.

± 좌장군이 이미 양군을 합하고 '조선'을 급히 공격하니, 조선의 승상 '로인','한음',이계상 '삼 ',장군 '왕겹',[집해: 한서음의에,相은, 5인이다. 융적(戎狄)은, 관직의 위차를 몰라서, 모두, 相이라고한다. 음은 頰(jia)이다] [색은: 응소는, 相은, 5인이다. 융적(戎狄)은, 관직의 위 차를 몰라서, 모두, 相이라고한다. '로인<路人>'은, 어양현<漁陽縣>사람이다. 여순은, 相은 그나라 재상이며, '로인'은 이름이다, '겹'은, 겹, 協,으로도 발음한다.]등이 서로 모의하여 말하기를, '처음 누선에게 항복하고자 했으나,지금은 누선이 붙잡혀있고, 좌장군이 홀로 군 을 지휘하니, 전쟁이 점점 급해지므로 대항치 못할까 두렵고, 왕께서도 항복을 허락치 않습 니다'하고, 한음,왕겹,로인등이 모두 한나라에 항복했으며, 로인은 길에서 죽었다. 원봉3년 , 여름, 니계상 '삼'이 조선왕 '우거'를 죽이고 항복해왔으나, '왕검성'은 항복치 않았다. 즉 ‘ 우거'의 대신인 성사(成巳)가 반기를 들고 다시 공격해 왔다. 좌장군이, 우거의 아들, 장항(

長降),집 재상 '로인'의 아들, '최'[색은: '최(最)'는,'로인'의 아들이다.]를 보내어, 그 백성을 회유하여, '성사'를 죽이고 조선을 정복하여, 4군으로 하였다. '삼‘은 화청후, '한음‘은 적상 후, 왕겹은 평주후, 장항은 '기후’. 최는 죽은 아비의 공으로 온양후에 봉했다.

(76)

±

좌장군은 먼저 잘못된 계책으로 병사를 잃고 전쟁을 실패하였으므로, 기시 의 형에 처하고, 누선장군 역시, 전쟁실패로, ' 열구’ 로 끌려와, 서인이 되었 다.

±

태사공이 말하기를,' 우거' 는 고립된 것이 부담이 되어, 나라가 망했으며, ' 섭하' 의 거짓된 공은, 병사를 잃케 하였다. 누선장군의 좁은 안목은[ 집해:

서광은, 누선장군의 통솔력이 폭좁은 것이라 하였다.], 급기야 돌이킬 수 없는 실패를 자초했다. ' 번우' 를 잃은 후회는, 결국 서로를 의심케 되었고, ' 순체' 의 노력도, 결국 공손수와 함께 주살당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양군이 , 모두 치욕을 당하니, 이것은 차의 교훈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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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장군은 먼저 잘못된 계책으로 병사를 잃고 전쟁을 실패하였으므로, 기시 의 형에 처하고, 누선장군 역시, 전쟁실패로, ' 열구’ 로 끌려와, 서인이 되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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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사공이 말하기를,' 우거' 는 고립된 것이 부담이 되어, 나라가 망했으며, ' 섭하' 의 거짓된 공은, 병사를 잃케 하였다. 누선장군의 좁은 안목은[ 집해:

서광은, 누선장군의 통솔력이 폭좁은 것이라 하였다.], 급기야 돌이킬 수

없는 실패를 자초했다. ' 번우' 를 잃은 후회는, 결국 서로를 의심케 되었고, '

순체' 의 노력도, 결국 공손수와 함께 주살당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양군이

, 모두 치욕을 당하니, 이것은 차의 교훈으로 남게 되었다.

(77)

<<三國志>> 魏書 東夷傳 韓條

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方可四千里.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 韓. 辰韓者 古之辰國也. 馬韓在西…… 侯準旣僭號稱王. 爲燕亡人衛滿所攻奪

魏略曰: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 以 尊周室. 其大夫禮諫之 乃止. 使禮西說燕 燕止之 不攻. 後 子孫稍驕虐 燕乃遣將秦開 攻 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 及秦幷天下 使蒙恬築長城 到遼東. 時 朝 鮮王否立 畏秦襲之 略服屬秦 不肯朝會. 否死 其子準立. 二十餘年而陳項起 天下亂 燕齊 趙民愁苦 稍稍亡往準 準乃置之於西方. 及漢以盧綰爲燕王 朝鮮與燕界於溴(浿)水. 及綰 反 入匈奴 燕人衛滿亡命 爲胡服 東度溴水 詣準降. 說準求居西界 故(收)中國亡命 爲朝 鮮藩屛. 準信寵之 拜爲博士 賜以圭 封之百里 令守西邊. 滿誘亡黨衆稍多 乃詐遣人告準 言漢兵十道至 求入宿衛 遂還攻準. 準與滿戰 不敵也.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

魏略曰:其子及親 留在國者 因冒姓韓氏. 準王海中 不與朝鮮相往來.

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方可四千里.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 韓. 辰韓者 古之辰國也. 馬韓在西…… 侯準旣僭號稱王. 爲燕亡人衛滿所攻奪

魏略曰: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 以 尊周室. 其大夫禮諫之 乃止. 使禮西說燕 燕止之 不攻. 後 子孫稍驕虐 燕乃遣將秦開 攻 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 及秦幷天下 使蒙恬築長城 到遼東. 時 朝 鮮王否立 畏秦襲之 略服屬秦 不肯朝會. 否死 其子準立. 二十餘年而陳項起 天下亂 燕齊 趙民愁苦 稍稍亡往準 準乃置之於西方. 及漢以盧綰爲燕王 朝鮮與燕界於溴(浿)水. 及綰 反 入匈奴 燕人衛滿亡命 爲胡服 東度溴水 詣準降. 說準求居西界 故(收)中國亡命 爲朝 鮮藩屛. 準信寵之 拜爲博士 賜以圭 封之百里 令守西邊. 滿誘亡黨衆稍多 乃詐遣人告準 言漢兵十道至 求入宿衛 遂還攻準. 準與滿戰 不敵也.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

魏略曰:其子及親 留在國者 因冒姓韓氏. 準王海中 不與朝鮮相往來.

(78)

其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 漢時屬樂浪郡 四時朝謁.

魏略曰:初右渠未破時 朝鮮相歷谿卿 以諫右渠不用 東之辰國 時 民隨出居者 二千餘戶 亦與朝 鮮貢蕃不相往來. 至王莽地皇時 廉斯鑡爲辰韓右渠帥 聞樂浪土地美 人民饒樂 亡欲來降. 出 其邑落 見田中驅雀男子一人 其語非韓人. 問之 男子曰 「我等漢人 名戶來 我等輩千五百人 伐材木 爲韓所擊得 皆斷髮爲奴 積三年矣.」鑡曰「我當降漢樂浪 汝欲去不」戶來曰「可」

辰鑡因將戶來來出 詣含資縣 縣言郡 郡卽以鑡爲譯 從芩中乘大船 入辰韓 逆取戶來. 降伴輩 尙得千人 其五百人已死. 鑡時曉謂辰韓「汝還五百人. 若不者 樂浪當遣萬兵 乘船來擊汝.」

辰韓曰「五百人已死 我當出贖直耳.」乃出辰韓萬五千人 弁韓布萬五千匹 鑡收取直還. 郡 表鑡功義 賜冠幘 田宅 子孫數世 至安帝延光四年時 故受復除.

其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 漢時屬樂浪郡 四時朝謁.

魏略曰:初右渠未破時 朝鮮相歷谿卿 以諫右渠不用 東之辰國 時 民隨出居者 二千餘戶 亦與朝 鮮貢蕃不相往來. 至王莽地皇時 廉斯鑡爲辰韓右渠帥 聞樂浪土地美 人民饒樂 亡欲來降. 出 其邑落 見田中驅雀男子一人 其語非韓人. 問之 男子曰 「我等漢人 名戶來 我等輩千五百人 伐材木 爲韓所擊得 皆斷髮爲奴 積三年矣.」鑡曰「我當降漢樂浪 汝欲去不」戶來曰「可」

辰鑡因將戶來來出 詣含資縣 縣言郡 郡卽以鑡爲譯 從芩中乘大船 入辰韓 逆取戶來. 降伴輩 尙得千人 其五百人已死. 鑡時曉謂辰韓「汝還五百人. 若不者 樂浪當遣萬兵 乘船來擊汝.」

辰韓曰「五百人已死 我當出贖直耳.」乃出辰韓萬五千人 弁韓布萬五千匹 鑡收取直還. 郡 表鑡功義 賜冠幘 田宅 子孫數世 至安帝延光四年時 故受復除.

(79)

岡上· 樓上 무덤

(80)
(81)
(82)

관전현 요동장성종점 호산 남록 요동장성

(83)

묵방리 고인돌 유적 전경

(84)

묵방리유적 30 호 지석묘와 미송리형 토기

(85)
(86)

遼寧 尹家村 下層 문화(BC5~4 세기)

(87)

영변 세죽리유적 (BC3 세기)

윤가촌 상층

(88)

낙랑토성 : 고조선과 관계있을까?

(89)

상리고분(평양시 은정구역) 정백리채토장 일괄유물(평양시 낙랑구역)

(90)
(9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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