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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폴 틸리히의 성령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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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폴 틸리히의 성령론

I. 들어가는 말

신학의 역사를 전반적으로 되돌아볼 때 성령론은 별로 큰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대부분의 교의학이나 조직신학에서 성령론은 생략되어 있거나 간단하게 진술되어 왔다. 예 를 들어 K. Barth의 Church Dogmatics에서 성령론은 극히 작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H.

G. Pöhlmann의 Abriβ der Dogmatik과 H. Ott의 Die Antwort des Glaubens등 여러 교의 학에서는 성령론이 신학의 한 주제로서 전혀 다루어지지 않았다. 이처럼 그리스도교 역사에 있어서 성령론은 오랫동안 경시되어 왔는데 이러한 경시의 근본적인 원인은 그 동안 신학이

‘그리스도 중심주의’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추세는 개신교의 신정통주의와 칼 바 르트의 바르멘 선언의 그리스도 중심주의에 대한 반응이었다.”1) 이런 점에서 Dilschneider 는 오늘날 그리스도교 신학이 ‘급성 성령 망각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냉소적으로 비판한다.

“수세기 이래로 신학이 사도신경의 둘째 조항의 그리스도론에만 집중하다 보니 구원사건으 로서의 오순절 사건을 망각해 버리고 말았다.”2) 그러나 아무리 그리스도론이 신학의 근원 적인 토대를 제공한다 할지라도 성령론은 신학의 영역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근본적인 주제이다. 왜냐하면 틸리히에 의하면 예수는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되었기 때문이요 또한 우리가 실존의 모호성을 극복하고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새로운 존재’에 참 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론은 성령론이 없다면 완성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영이며, 역사 속에서의 새로운 존재의 실현은 성령의 역 사이기 때문이다.”3)

이런 맥락에서 틸리히는 그의 조직신학 제4부「생명과 성령」에서 그의 신학방법론인 상 관관계의 방법에 따라서 실존적인 물음인 생명의 모호성을 분석하고 이에 대한 신학적인 대 답으로서 성령을 상세하게 제시하여 성령론의 중요성을 부각시킨 바 있다. 일반적으로 틸리 히의 신학은 실존적인 물음에 대한 철학적인 분석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에 사변적인 신학 1) J. , 김균진 역, 「생명의 영」(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2), p. 13.

2) O.A. Dilschneider, "Der Geist führt in die Wahrheit" Ev. Komm. 1973, H. 6, S333f. G. Pöhlmann, 이신 건 역, 「교의학」(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9), p. 347.에서 재인용.

3)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Vol. III(Chicago :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3), p. 285.

(이후부터는 Systematic Theology를 ST.로 표기하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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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서 비판받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신학의 보편성을 위해서 그런 방법을 택한 것뿐이다.

오히려 틸리히 그 자신은 성령을 하나님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상징’으로 보고 있다는 점 에서 그리고 신학에 있어서의 ‘황홀한 이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앞으로 살펴 볼 것처럼 ‘영 그리스도론’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성령의 신학자이다. 따라서 ‘성령 망 각’의 시대에 20세기의 지성인의 사도라고 불리우는 틸리히의 성령론을 고찰하여 성령에 대 한 신학적인 바른 이해를 추구하는 것은 시대사적인 큰 의의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본 글을 다음과 같은 틸리히의 성령론의 주된 문제를 중심으로 하여 전개하고자 한 다. 첫째, 인간의 영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의 특징과 그 내용은 무엇인가. 둘째, 인류 역 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의 특징은 무엇인가. 셋째, 인류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과 예수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의 관계는 무엇인가.

II. 본론

1. 인간의 영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의 현현 1)인간의 영과 하나님의 영

틸리히는 인간의 영과 하나님의 영의 관계를 해명하기 전에 먼저 성령이란 개념의 의미부 터 정의한다. 틸리히에 따르면 성령이란 인간의 영에 ‘현존하는 하나님’(God present)을 의 미한다. “하나님의 영은 피조물의 생명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의 현존을 의미한다. 하나 님의 영은 현존하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영은 분리된 하나의 존재자가 아니다.”4) 틸리히 는 이와 같은 성령에 대한 정의를 자신의 설교집인 『새로운 존재』와 『영원한 지금』에서 보다 분명하게 주장한다. “성령이란 우리 안에 거하고 있는 하나님 자신을 의미한다. 성령 은 우리를 뒤흔들고, 우리에게 영감을 주고,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는 현존하는 하나님에 대한 또 다른 말이다.”5), “우리의 영에 현존하시는 하나님 (God present to our spirit), 이것이 바로 성령의 의미이다. 성령은 신비적인 실체가 아니며 하나님의 한 부분도 아니다. 성령은 하나님 자신이다. 특히 성령은 만물의 창조적 근거로서의 하나님도 아니고, 역사를 이끌며 역사의 중심 사건 속에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도 아니다. 그는 공동체와 개인 속에 현존하는 하나님으로서 그들을 사로잡고 그들에게 영감을 주며 그들을 변화시키 시는 하나님이다.”6) 이처럼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한 부분이나 실체가 아니고 하나님 그 자신으로서 인간을 사로잡고 인간에게 영감을 주고 인간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는 현존하는 하나님을 의미한다. 곧 하나님의 영은 “현존하는 하나님”(God present)을 의미한 다. 이런 점에서 틸리히는 성령의 의미를 완전하게 나타내기 위해서는 성령(Spirit)이란 단

4) Ibid., p. 107.

5) Paul Tillich, The New Being (New York ; Charles Scribner's Sons, 1955), p. 137.

6) Paul Tillich, Eternal Now (New York ; Charles Scribner's Sons, 1963), p.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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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대신에 (하나님의) “영적인 현존”(Spiritual Presence)이란 단어를 사용해야만 한다고 주 장한다.

그러면 성령이 인간의 영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이라면 인간의 영은 하나님의 영과 어떤 관 계에 있는가? 이러한 물음은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영은 인간의 영 안에 거하며 역사한다’

는 은유적인 진술로 대답되어 왔다.7) 이 점에서 틸리히는 만일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영 안으로 들어온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영 속에서 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 고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영을 밖으로 이끌어 내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곧 하나님의 영 의 ‘안’(in)은 인간의 영의 측면에서 볼 때는 밖(out)인 셈인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영 안에 거하면 유한한 생명의 한 차원인 인간의 영은 성공적인 자기초월로 이끌려진다. 인 간의 영은 궁극적이며 무조건적인 것에 의해서 사로잡힌다. 물론 인간의 영은 여전히 인간 의 영이다. 인간의 영은 본래의 그것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인간의 영은 동시에 성령의 충 격(impact)에 의해서 자신 밖으로 나간다.”8) 이처럼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영 안에 거한다 는 것은 인간의 영이 성령의 충격에 의해서 자신 밖으로 이끌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황홀경(ecstasy)은 성령에 의해서 사로잡힌 인간의 상태를 정확하게 나타내 주는 전통적인 용어이다.

이런 맥락에서 틸리히는 성령에 의해서 창조된 인간의 황홀경의 상태는 다음과 같은 특징 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9)

첫째, 성령은 황홀경을 창조하는데 이 황홀경속에서 인간의 영은 자신의 본질적인 구조를 파괴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초월한다. “탈아(황홀경)는 통전된 자아의 중심을 파괴하지 않는 다. 만일 파괴한다면 마성적인 사로잡음이 성령의 창조적인 현존을 대체할 것이다.”10) 둘째, 성령의 경험의 탈아적인 성격은 인간의 영의 합리적인 구조를 파괴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인간의 영이 스스로 할 수 없었던 것을 창조한다. “성령이 인간을 사로잡을 때 성 령은 모호하지 않은 생명을 창조한다.”11)

셋째, 자기초월 속에 있는 인간은 모호하지 않는 생명에 도달할 수 있지만 인간이 먼저

7) ‘나는 하나님과 영혼을 알고 싶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알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이것은 영혼 이야말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나타나는 장소라는 것을 의미한다. 송기득 역, 「폴 틸리히의 그리스도교 사상 사」(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7), p. 156.

8) ST.III., p. 112.

9) Ibid., pp. 112-113.

10) Ibid., p. 112. cf. ST.I p.112. ecstasy는 본래 ec-stasis 곧 ‘자신의 자아 밖에 서다’(stand outside one's self)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황홀경은 자신의 자아를 파괴하지 않고 자아를 넘어서 신적인 근거와 연합 된 상태를 의미한다. 이 점에서 논자는 ecstasy에 대해서 주로 감정적인 상태를 지시하는 황홀경 대신에 인간 의 자아를 자신 밖으로 이끌어 가는 성령의 특징을 강조하기 위해서 탈아(脫我)라는 말을 사용하고자 한다.

cf. 이계준 역, 「문화와 종교」(서울; 전망사, 1984), p. 12. 틸리히는 ‘엑스타시’개념을 플로티누스에게서 받 아들였다. 플로티누스가 전개한 가장 중요한 개념의 하나는 자기를 잃지 않고 자기를 넘어서 간다는 것을 의 미하는 ‘엑스타시’의 개념이다.

11) Ibid., p.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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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에 의해서 사로잡히지 않는다면 인간은 성령을 붙잡을 수 없다. “인간은 그의 자기초월 의 본성에 의해서 모호하지 않은 생명에 대한 물음을 묻도록 이끌린다. 그러나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오직 성령의 창조적인 힘을 통해서 인간에게 오지 않으면 안 된다.”12) 이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영을 인간의 영 안으로 들어오도록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 한한 것은 무한한 것을 강요할 수 없다. 곧 인간은 하나님을 강요할 수 없다.”13) 이런 점에 서 볼 때 만일 종교적인 헌신과 도덕적인 순종과 과학적인 정직이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내려오도록’ 강요한다면 그 때 내려온 하나님의 영은 종교적으로 위장한 인간의 영일 것이 다.

이와 같이 성령은 인간의 영의 구조를 파괴하지 않지만 인간의 영은 성령에 의해서 사로 잡힐 때만 모호하지 않은 생명을 실현할 수 있다. 그러나 틸리히의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의 영과 인간의 영이 초자연주의적인 관계나 이원론적인 관계 속에 있지 않다는 전제 위에서 주장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틸리히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질문에 대답함으로써 인간의 영 과 하나님의 영 사이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해명한다.

첫째, 생명의 다양한 차원들의 통일성을 주장하는 생명의 다차원적인 통일성의 이론은 성 령과 어떻게 관계될 수 있는가?14) 곧 생명의 다차원적인 통일성은 인간론이나 인간과 하나 님의 관계의 문제에 있어서 이원론이나 초자연주의를 배제하였는데 이러한 성령의 특징은 이원론적인 또는 초자연주의적인 요소를 또다시 도입하는 것이 아닌가? 이에 대해서 틸리히 는 다음과 같은 방법을 사용할 때 하나님의 영과 인간의 영의 관계는 결코 이원론적인 관계 나 초자연적인 관계로 왜곡되지 않을 수 있다고 본다.15)

먼저, 틸리히는 하나님의 영에 대해서 ‘차원’(dimension)이라는 상징을 사용하는 방법, 곧

‘차원’이라는 은유를 깊이의 차원, 궁극적인 것의 차원 또는 영원한 것의 차원처럼 ‘상징’으 로 사용하는 방법이 있다고 본다. 사실 이처럼 차원이 하나님에게 상징적으로 적용된다면 하나님의 영의 ‘차원’은 생명의 각 차원들과는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차원이 하나님에 게 적용된다면 그것은 존재의 범주와 대극성처럼 상징적으로 사용된다. 여기서 차원은 기존 의 차원들의 실현에 의존하고 있는 일련의 생명의 차원들 중의 한 차원이 아니다. 이것은 생명의 모든 차원의 존재의 근거이며 그들이 지향하는 자기초월의 목표이다.”16) 이처럼 ‘차 원’이라는 용어가 ‘깊이의 차원’처럼 하나님의 영에 상징적으로 사용된다면 이것은 생명의

12) Ibid., p. 112.

13) Ibid., pp. 112-113.

14) cf. 다차원적인 통일성의 원리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고찰을 위해서는 다음을 참조하시오. 유장환,

“생명의 다차원적인 통일성의 원리”, 기독교사상 519호 2002년 3월호.

15) ST.III., pp. 113-114.

16) Ibid., p. 113. cf. Carl Heinz Ratschow, Paul Tillich Main Works (Berlin : De Gruyter-Evangelisches Verlagswerk, 1992), p. 408. 유비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은 모든 것 속에 현재하면서 동시에 부재하는 존재와 의미의 궁극적인 것의 차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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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차원들이 근거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것들이 부정되기도 하고 긍정되기도 하는 차원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에 대해서 ‘차원’이라는 은유를 상징적으로 사용한다 면 하나님의 영은 인간의 영의 궁극적인 차원, 영원한 차원으로서 결코 인간의 영과 이원론 적인 관계나 초자연적인 관계 속에 있지 않게 될 수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틸리히는 차원이라는 은유를 다음과 같은 진술로 대체하는 방법이 있다고 본 다. “유한한 것은 잠재적으로 또는 본질적으로 신적인 생명의 한 요소이기 때문에 유한한 모든 것은 신적인 생명과 본질적인 통일성의 관계에 의해서 규정될 수 있다. 물론 유한한 것이 현실적인 것으로 실현되는 실존적인 상황은 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의 본질적인 통일성 으로부터의 분리와 이러한 통일성에 대한 저항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유한한 것은 더 이 상 현실적으로는 무한한 것과의 본질적인 통일성에 의해서 규정될 수 없다.”17) 이처럼 하나 님의 영과 인간의 영이 현실적으로는 분리되어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통일성 속에 있다는 진 술에 의해서 결정된다면 인간의 영과 하나님의 영의 관계는 이원론적인 또는 초자연주의적 인 관계로 규정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진술 속에서 사용되고 있는 이원론적인 요 소는 잠정적인 것이고 일시적인 것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지 실제적인 것과 잠재적 인 것, 실존적인 것과 본질적인 것을 구별하기 위해서 사용된 것뿐이다. 결국 인간의 영은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과 본질적인 통일성의 관계 속에 있지만 실존적으로는 인간의 영 과 하나님의 영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인간의 영과 하나님의 영의 관 계를 대립된 관계로 정립한 이원론적인 또는 초자연주의적인 신학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무 한한 하나님의 영을 유한한 것의 차원으로 환원해 버렸다는데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제기되는 두 번째 물음은 차원(dimension)이라는 은유가 수준(level)이라는 이 원론적인 은유를 대체한다면 이것은 실존적 물음과 신학적 대답을 상관시키려는 상관관계의 방법(the method of correlation)과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18) 사실 하나님의 영이 일련의 생명의 차원들 중에 있는 새로운 어떤 차원을 대표하는 것이라면 이 물음은 타 당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은 결코 일련의 생명의 차원들 중의 한 차원이 아니다. 왜 냐하면 ‘차원’이라는 용어는 존재의 범주와 존재의 대극적인 요소처럼 하나님에게 적용될 때에는 상징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에 대해서 유비적으로 또는 상징적으로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일련의 차원들의 연속도 아니고 그들의 실현의 전제 조건도 아 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잠재성과 현실성 사이의 분리를 초월하고 있으며 또한 영원히 본 질로 있으면서 동시에 모든 생명의 과정에 창조적이며 이끄는 근거로서 현재한다.”19) 이처 럼 하나님이 본질과 실존 사이의 분열을 초월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의 실존적인 상황은 17) Ibid., pp. 113-114.

18) cf. 방법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고찰을 위해서는 다음을 참조하시오. 유장환 역, 「폴 틸리히 조 직신학I」(서울; 한들출판사, 2001), pp. 102-112.

19) Ratschow, op. cit., p. 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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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론이나 신학적인 초자연주의를 거부하면서도 상관관계의 방법을 필요로 하지만 인간의 영과 하나님의 영의 관계는 본질적으로는 이원론적인 관계일 수도 없고, 심지어 상관관계일 수도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틸리히는 하나님의 영과 인간의 영은 본질적인 통일성을 이 루고 있고, 하나님의 영은 인간의 영의 영원한 깊이의 차원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영과 하나 님의 영은 상호내재의 관계 속에 있다고 본다. “인간의 영과 하나님의 영의 본질적인 관계 는 상호내재(mutual immanence)의 관계이다.”20)

결국, 틸리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영은 초자연주의 신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어떤 초월적 인 실체나 존재자가 아니고 의미와 힘을 통일시키지 못한 채 분열상태로 있는 인간의 영을 고양시키고 충족시키고 완성시킴으로써 참 본래적인 자기로 회복시키는 인간의 영의 무한한 근거와 영원한 깊이를 뜻한다.21)

2)인간의 영의 구조와 탈아

우리는 앞에서 성령은 인간의 영에 나타나지만 인간의 영의 구조를 파괴하지 않고 인간의 영을 자기 밖으로 이끌어 성공적인 자기 초월이 가능하게 한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또한 우 리는 하나님의 영은 하나의 실체나 존재자가 아니고 생명의 모든 차원의 궁극적인 깊이의 차원으로서 인간의 영과 상호내재의 관계 속에 있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이제 틸리히는 인 간의 영의 구조와 성령의 관계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성령의 탈아적인 현현과 비 범한 심리적인 현상 사이의 차이점을 보여준다.

먼저, 틸리히는 다시 한번 성령은 인간의 영의 담지자인 중심을 가지고 있는 자아 (centered self)의 구조를 파괴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탈아는 자아의 구조를 부정하 지 않는다.”22) 사실 ‘수준’(level)의 이원론에서는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영에 나타날 때 인 간의 본질적인 구조는 파괴된다. 그러나 종교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세계 안에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서 본질적으로 선한 것인 창조된 세계를 파괴할 필요가 없는 것 이다.

이런 맥락에서 틸리히는 탈아와 구조의 통일성(the unity of ecstasy and structure)의 실 례를 바울에게서 제시한다.23) 본래 바울은 성령의 신학자로서 성령의 경험 속에 있는 탈아 적인 요소를 강조하였다. 예를 들어 그는 모든 성공적인 기도 곧 하나님과 재연합되는 모든 기도는 탈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롬8:26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탄식). 또한 바 울이 자주 사용하는 공식인 ‘그리스도 안에 있음’(Being in Christ)도 탈아적인 성격을 보여

20) ST.III., p. 114.

21) ,「폴틸리히 신학연구」( 서울 : 대한기독교출판사, 1992), p. 172.

22) ST.III., p. 114.

23) Ibid., pp. 116-117. 틸리히에 따르면 바울은 원래 성령의 신학자였다. 그의 기독론과 종말론은 모두 성령론 에 의존하고 있다. 그의 은혜에 의한 믿음 통한 칭의의 교리는 단지 그리스도의 출현과 더불어서 만물의 새로 운 상태가 성령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변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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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음’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심리학적인 감 정이입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은’ 성령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탈아적인 참여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동시에 자아의 구조를 파괴하는 탈아를 허용하려는 경향들과 맞서 싸웠다.

예를 들어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성령의 은사인 방언이 혼란을 낳고 교회 공동체를 분열시 킨다면 탈아적인 방언을 거부해야만 하며 또한 성령의 은사들이 아가페에 종속되어 있지 않 다면 이러한 은사들도 거부해야만 한다고 보았다. 결국 바울은 성령의 탈아적인 성격을 강 조하면서도 동시에 탈아적인 경험은 결코 인간의 자아의 구조를 파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틸리히는 이와 같은 성령의 현현의 특징에 비추어 볼 때 모든 교회는 구체적인 성령 운동 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것을 주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먼저 교회는 탈아와 혼돈의 혼동 을 막아야 한다. 곧 교회는 자아의 구조를 위해서 싸워야만 한다. 다음으로 교회는 성령의 제도적인 또는 환원주의적인 세속화를 피해야만 한다. 제도적인 세속화는 초기 카톨릭 교회 에서 은사를 직분으로 대체한 결과 나타났으며 환원주의적인 세속화는 오늘날 개신교에서 탈아를 교리나 도덕으로 대체함으로써 나타나고 있다.”24) 이 점에서 틸리히는 구조와 탈아 의 통일성이라는 바울의 기준은 교회들에게 있어서 언제나 현재하는 의무이면서 동시에 언 제나 현재하는 위험이라고 본다. “이것은 의무이다. 왜냐하면 성령의 탈아적인 측면을 무시 하면서 제도적인 형식 속에서 생존해가고 있는 교회는 혼돈을 일으키거나 분열을 일으키는 탈아의 형식들에 문을 열어주고, 심지어 성령에 대한 세속화의 증가하는 반발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위험이다. 왜냐하면 탈아적인 운동을 진지하 게 다루는 교회는 성령의 충격과 심리학적인 흥분 사이를 혼동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25) 이것은 성령의 탈아적인 성격을 무시하면 제도적인 세속화에 빠질 위험이 있고 반면에 성령 의 탈아적인 성격을 강조하면 심리적인 환원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다.

이런 맥락에서 틸리히는 제도적인 세속화와 심리적인 환원주의를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성 령의 탈아적인 현현을 보호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자한다.26)

먼저, 오늘날 권위적인 교회는 심리학과 연합하여 성령에 의해서 창조된 탈아적인 상태를 심리적인 현상으로 격하시키려고 한다. 여기서 기존의 성령운동은 이러한 비판에 대해서 자 신을 방어할 수 있는 논리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점에서 틸리히는

‘생명의 다차원적인 통일성’의 원리는 제도화된 교회와 심리학의 비판으로부터 성령의 탈아

24) Ibid., p. 117.

25) Ibid., pp. 117-118.

26) Ibid., pp. 118-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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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인 현현을 방어할 수 있는 확고한 원리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생명의 다차원적인 통일성 의 원리는 성령의 탈아적인 현현을 방어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 이 원리에 따르면 모 든 탈아의 심리학적인, 생물학적인 토대는 이 원리의 성립 과정의 문제로서 당연히 받아들 여진다. 여기서 영의 차원은 자의식의 차원에 잠재적으로 현재하고 있기 때문에 심리적인 자아의 생동성은 인격적인 자아의 의미의 담지자가 될 수 있다. 이것은 수학의 문제가 해결 되고, 시가 쓰여지고, 법적인 결정이 내려지고, 예언자의 선언이 선포되고, 모든 신비적인 명상과 모든 성공적인 기도가 행해질 때마다 나타나는 현상이다. 영의 차원은 자의식의 생 동성 안에서 그리고 생물학적인 조건들 아래에서 자신을 실현하고 있다.”27) 사실 제도화된 교회는 심리학과의 유대 속에서 성령의 탈아적인 현현을 심리적인 자아의 생동성으로 환원 하여 성령의 탈아적인 상태를 무시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영의 차원은 잠재적 으로 심리적인 차원에 현존하기 때문에 심리적인 생동성은 단지 인간의 영의 차원의 담지자 로서 작용하고 있는 것뿐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틸리히의 ‘다차원적인 통일성’의 원리는 제도화된 교회와 심리학의 비판으로부터 성령의 탈아적인 성격을 보호할 수 있는 확고한 토 대를 제공한다고 여겨진다.

다음으로, 오늘날 성령운동을 주창하는 교회들은 탈아적인 경험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탈아의 경험 속에는 인간의 자아로 하여금 자아의 중심성과 책임성 그리고 문화적인 합리성으로부터 도피하게 만드는 심리적인 현상이 상존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도취 (intoxication)의 가능성이다. “탈아가 주-객의 구조를 초월하는 순간에 그것은 자의식의 차 원아래에서는 위대한 해방하는 힘이 된다. 이 해방하는 힘은 정신의 주-객의 구조의 ‘이하’

의 것을 주-객의 구조의 ‘이상’의 것과 혼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 낸다. 이런 점에서 도취는, 그것이 생물학적 형태를 취하든지 감정적인 형태를 취하든지 자의식의 현실성에 도 달할 수 없다. 곧 도취는 객관적인 세계로부터 주어지는 모든 내용들을 무효화시키고 결국 자아를 공허하게 만든다.”28) 이런 점에서 볼 때 도취의 근본적인 특징은 “정신적인 생산 성”(spiritual productivity)과 “영적인 창조성”(Spiritual creativity)이 모두 결핍되어 있다 는 점이다.

반면에 틸리히는 성령에 의해서 창조된 탈아는 도취와는 달리 객관적인 세계의 다양한 풍 부함을 그 자체에 가지고 있다고 본다. 물론 이것은 성령의 내적인 무한성에 의해서 초월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은 사회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가처럼 그 시대의 사회적인 상황을 자각하고 있으면서 단지 영원의 빛 속에서 그것을 성령의 충격으로 탈아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또한 명상하고 있는 사람은 세계의 존재론적 구조를 자각하

27) Ibid., p. 118. cf. A. J. Mckelway, The Systematic Theology of Paul Tillich (London : Luttherworth Press, 1964), p. 199. 성령은 심리학적 자아의 생동성을 통해서 의미를 지닌 힘을 전해준다.

28) Ibid., p.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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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으면서 단지 모든 존재의 근거와 목표의 빛 속에서 그것을 성령의 충격에 의해 탈아적 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29) 이처럼 탈아의 경험에서는 도취와는 달리 객관적인 세계의 어떤 것도 단지 공허한 주관성으로 해체되지 않으며 오히려 이것은 모두 보존되며 심지어 증가된 다. 이런 점에서 틸리히는 이러한 탈아적인 경험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예가 기도라고 본 다. 왜냐하면 기도는 탈아적으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성공적인 기도는 근본적 으로 기도하는 사람에게 기도의 대상이 되어 준 하나님에게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은 만일 하나님이 동시에 주체가 아니라면 결코 객체일 수 없는 분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 리를 통해서 자신에게 기도하는 하나님에게만 기도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기도는 주-객의 구조가 극복될 때만 가능한 것이다. 곧 기도는 탈아적으로만 가능한 것이다.”30) 결국, 우리는 이와 같은 탈아와 도취의 특징을 통해서 정신의 비범한(extraordinary) 상 태가 성령이 창조한 탈아인지 아니면 주관적인 도취가 만들어낸 탈아인지를 구별할 수 있 다. 이러한 구별은 오늘의 종교적 상황에 있어서 매우 시급하면서도 중대한 것이다. 틸리히 는 그가 제시하는 기준이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교회가 그릇된 성령을 ‘판단하기 위해 서’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하게 타당한 기준이라고 말한다. “탈아와 도취를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은 성령에 의한 탈아에는 창조성이 나타나지만 도취에 의한 탈아에는 창조성이 결핍되 어 있다는 점이다.”31)

3) 하나님의 현현의 내용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의 영은 인간의 영과 상호내재의 관계 속에 있다는 것과 탈아는 구 조를 파괴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구조와 통일되어야한다는 것과 탈아와 도취의 근본적인 차 이점은 정신적인 창조성과 영적인 창조성의 유무에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제 틸리히는 성령은 ‘무엇’으로서 나타나는지에 대해서 곧, 성령의 현현의 내용에 대해서 고찰한다.

먼저, 틸리히는 생명의 모호성은 본질적인 요소와 실존적인 요소가 서로 혼합되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데 성령은 인간 영 안에서 이 두 요소의 초월적인 연합(transcendent union)을 창조함으로써 생명의 모호성의 문제를 해결한다고 말한다. “모호한 생명은 본질과 실존의 재결합 속에서 자신의 힘으로 성취할 수 없었던 자기초월로 이끌려진다. 따라서 초 월적인 연합은 생명의 과정과 영의 기능이 안고 있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32) 이런 맥락 에서 틸리히는 초월적인 연합은 인간의 영 안에서 탈아적인 상태로 나타나는데 이 상태를 한쪽에서 보면 ‘믿음’이고 다른 쪽에서 보면 ‘사랑’이며, 이러한 믿음과 사랑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믿음은 모호하지 않은 생명의 초월적 통일성에 ‘사

29) Ibid., p. 119.

30) Ibid., pp. 119-120. Prayer is an ecstatic possibility. 8;26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 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을 위해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31) Ibid., p. 120.

32) Ibid., p.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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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잡힌’(grasped) 상태이다. 또한 믿음은 모호하지 않은 생명의 초월적 통일성으로 ‘이끌 린’(taken) 상태로서의 사랑을 구현한다. 이러한 구별에서 볼 때 믿음이 논리적으로는 사랑 보다 선행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어느 한 쪽도 다른 한 쪽 없이는 존 재할 수 없다. 사랑 없는 믿음은 소외의 연속이며 종교적인 자기초월의 모호한 행위이다.

반면에 믿음 없는 사랑은 초월적인 연합의 기준과 힘이 없는 분리된 자들의 모호한 재결합 이다.”33) 이것은 믿음과 사랑은 성령의 창조로서 인간의 영이 모호하지 않은 생명의 초월적 인 통일성(transcendent unity)에 참여한 상태라는 것과, 믿음과 사랑은 모호하지 않은 생 명의 초월적인 통일성에 대한 참여에 있어서 본질적인 비분리성 속에 있다는 것과, 믿음과 사랑 어느 한 쪽 만을 내세우는 것은 성령의 기원적인 창조에 대한 종교적인 왜곡이라는 것 을 의미하는 것이다.

틸리히는 이와 같은 전제위에서 성령의 창조로서의 믿음과 사랑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하고 그 관계를 고찰한다.

(1)성령의 현존 : 믿음

먼저, 틸리히는 종교적인 용어 중에서 ‘믿음’이라는 말만큼 의미론적인 정화를 필요로 하 는 말도 없을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이 용어는 끊임없이 증거가 없는 것, 본질적으로 믿 을 수 없는 것, 부조리한 것 그리고 무의미한 것을 믿는 믿음과 혼동되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틸리히는 이와 같은 왜곡현상을 막기 위해서 믿음을 다음과 같이 형식적인 면과 내 용적인 면에서 정의한다.

먼저, 틸리히는 믿음을 형식적으로 정의한다. “믿음이란 자기초월의 목표 곧 존재와 의미 의 궁극적인 것에 의해서 사로잡힌 상태이다. 간단히 말해서 믿음이란 궁극적인 관심에 의 해서 사로잡힌 상태이다.”34) 이러한 형식적인 의미에서 볼 때 모든 인간 존재는 믿음을 가 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조건적인 영은 생명의 자기 초월의 방향인 무조 건적인 것과의 본질적인 관계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궁극적인 관심의 구체적인 내용이 아무리 가치 없을지라도 누구든지 그러한 관심 자체를 없앨 수는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틸리히는 이러한 형식적 정의에 근거해서 믿음을 내용적으로 정의 내린다. “믿 음은 성령에 의해서 사로잡혀 있는 상태이며, 모호하지 않은 생명의 초월적인 연합에 개방 된 상태이다. 그리스도론과 관련하여 말하면, 믿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타난 새로운 존재에 의해서 사로잡힌 상태이다.”35) 이것은 믿음이란 성령에 의해서 사로잡혀 모호하지

33) Ibid., p. 129.

34) Ibid., p. 130. cf. Paul Tillich, Dynamics of Faith (New York : Harper & Row, 1957), pp. 126-127.

다른 것과 나란히 있는 하나의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인격적 생명의 중심적인 현상으로서 감 추어져 있으며 동시에 드러나 있는 것이다. 만일 신앙이 궁극적 관심으로 이해된다면 어떤 종류의 현대 과학 이나 철학이 이것을 파괴할 수 없을 것이다.

35) Ibid., p.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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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은 생명의 초월적인 연합에 개방된 상태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믿음의 정의는 믿음의 행위가 지성, 의지 또는 감정과 동일시되는 전통적인 정의와는 조금도 유사한 점이 없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 점에서 틸리히는 비 록 전통적인 정의들이 심리학적인 조잡함을 보이고 있을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대중적인 믿 음의 개념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신적인 기능들과의 관계 속에서 믿음의 본래의 의미를 고찰한다.36)

먼저, 믿음은 실재의 주-객의 구조 안에서의 인식적인 긍정의 행위가 아니다. 곧 믿음은 실험이나 경험에 의해서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점에서 사실적인 명제나 가치판단 을 권위에 근거하여(이 권위가 신적인 권위라고할지라도) 받아들이는 행위를 믿음이라고 일 컬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때에는 ‘나는 무슨 권위에 근거해서 그러한 권위를 신적인 권위 라고 말하는가’의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 존재 증명’의 경우에서처럼 ‘하나님 이라고 불리우는 한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것과 같은 명제는 신앙적인 주장도, 충분한 근거 가 있는 인식적인 명제도 아니며 이러한 명제를 긍정하는 것이나 부정하는 것은 똑같이 불 합리한 것이다.

둘째, 믿음은 믿으려는 의지의 결과나 순종의 행위의 열매가 아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믿으려는 의지인가’, ‘누구에 대한 순종인가’라는 물음은 또 다시 인식의 문제로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으로 받아들이라고 요구받고 있다면 그 는 그가 들은 말씀을 하나님 말씀으로 인정하고 있는 믿음의 상태 속에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을 행하라고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종은 믿음을 전제하는 것이지 믿 음을 창조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셋째, 믿음은 감정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사실 전체 인격의 표현인 믿음은 감정적인 요 소를 포함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믿음은 테오리아와 프락시스 의 모든 요소를 포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차원의 생명의 과정들의 요소도 포함하고 있다. 또한 믿음은 동의의 요소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순종의 요소도 가지고 있다.37) 물론 믿음 안에는 감정적인 요소도 있다. 그러나 이 감정은 결코 규정될 수 없는 무한한 성 격을 가지고 있는 감정이 아니다. 이것은 유한성과 소외로 인한 불안과 초월적인 연합의 능 력 속에서 이 불안을 자신 안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탈아적인 용기 사 이에서 동요하고 있는 감정이다. 결국 믿음은 성령에 의해서 사로잡혀 성령에 탈아적으로 개방되어 있는 전인격의 상태로서 지성, 의지, 감정을 포함하고 있지만 결코 이것들과 동일 시될 수 없는 것이다.

36) Ibid., pp. 131-132.

37) 신앙의 순종은 신적-인간적 권위에 대한 타율적인 복종이 아니고 우리를 새롭게 하고 우리를 개방시 키는 성령에 대해서 계속해서 우리를 열어놓는 행위를 뜻하는 것이다. 곧 이것은 사랑의 관계에서처럼 참여에 의한 순종이지 복종에 의한 순종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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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리히는 이러한 논의를 통해서 믿음과 정신적인 기능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38)

첫째, 믿음은 정신의 기능들과 동일시 될 수도 없고, 이 기능들에서 이끌어 낼 수도 없다.

왜냐하면 믿음은 지성의 행위와 의지의 노력과 또는 감정의 활동에 의해서 창조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믿음은 정신의 모든 기능을 자신 안에 포괄하고 있으며 이 모든 기능을 성령의 변 화시키는 힘에 결합시키고 예속시킨다. 말하자면 인간의 영은 어떤 정신의 기능을 통해서도 자기초월의 목표인 궁극적인 것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궁극적인 것은 이 모든 기능들을 사로잡을 수 있고 믿음의 창조에 의해서 그들을 자신 넘어로 이끌어 갈 수 있다.

셋째, 믿음은 비록 성령에 의해서 창조된다 할지라도 인간의 영의 구조와 기능과 생동성 안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확실히 믿음은 인간‘으로부터는’ 아니지만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나는 성령에 의해서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없다’고 말한 다든지 ‘나는 단지 내가 믿는 것을 믿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결국, 틸리히에 있어서 믿음은 성령에 의해서 사로잡힌 상태로서 인간의 정신적인 어떤 기능에 의해서도 창조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믿음은 모호하지 않은 생명의 초월 적인 연합에 개방된 상태로서 인간의 모호한 생명은 이 믿음을 통해서만 모호하지 않은 생 명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틸리히의 믿음에 대한 이해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프로테스탄트의 원리’의 적 용이라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제까지의 믿음의 내용적인 이해를 요약해 보면 믿음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성령에 의해서 열려져 있는 개방성의 요소. 둘째, 하나님의 영과 인간의 영의 무한한 간격에도 불구하고 성령을 받아들이는 수용성의 요소.

셋째, 모호하지 않은 생명의 초월적인 통일성에 대한 궁극적인 참여를 기대하는 기대의 요 소.”39) 물론 여기서 이 요소들은 서로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 요소들은 어떤 것이 존재 한 후에 다른 것이 뒤따르는 관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요소들은 믿음이 발생하는 곳 마다 현재하는 것이다. 첫째 요소는 수용적인 성격 곧 성령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그의 수동 성을 지시하는 것이며, 둘째 요소는 역설적인 성격 곧 성령 안에서의 그의 용기있는 위치를 지시하는 것이며, 셋째 요소는 믿음의 예기적인 성격 곧 모든 것을 완성하는 성령의 창조성 에 대한 희망으로서의 그의 성격을 지시하는 것이다.

(2)성령의 현현 : 사랑

다음으로, 틸리히는 성령의 구체적인 내용으로서 사랑에 대해서 고찰한다. 그는 사랑은

38) Ibid., p. 133.

39) Ibid., p.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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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재연합(reunion)을 의미한다고 본다. “사랑은 정신의 모든 기능들 속에 실제하 며, 사랑은 생명 자체의 가장 깊은 핵심에 근거한다. 사랑은 분리된 자들이 재연합하려는 충동이다.”40) 이러한 정의는 믿음의 경우처럼 의미론적인 정화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사랑 도 믿음의 경우처럼 왜곡되거나 변질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틸리히는 다음과 같 이 사랑에 대한 의미론적인 정화를 시도한다.41)

첫째, 사랑은 감정이 아니다. 그러나 강력한 감정적인 요소가 사랑 안에는 포함되어 있다.

사실 우리는 사랑 속에 있는 감정적인 요소로 인해서 재결합의 과정 속에 있는 다른 존재의 중심에 참여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확실히 재결합의 원동력은 예상이 아니고 사랑 속에 있는 감정적인 요소이다.42) 그러므로 사랑은 감정과 동일시될 수는 없을지라도 감정적 인 요소는 결코 재결합을 의미하는 사랑과 분리될 수 없다.

둘째, 사랑은 감정적인 요소만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실존적인 분리를 극복하려는 의지적인 요소(존재론적으로 말하면, 결합하려는 의지)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의지는 모 든 사랑의 관계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분리의 벽은 의지 없이는 뚫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지 감정의 힘에만 의존할 뿐 사랑하려는 의지가 없는 사람은 결 코 다른 인격에 침투할 수 없다.

셋째, 사랑은 감정적인 요소와 의지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지적인 요소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사랑과 지성적인 기능과의 관계는 신비주의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헬라사상과 헬라 적-기독교 사상에서 가장 완전하게 발전되어 있다. 예를 들어 플라톤은 인식대상의 풍부함 에 비해서 인식주체의 공허함을 강조하는데서 사랑의 기능을 지적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에로스를 세계를 순수형식을 향해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보았다. 또한 헬라적-그리스 도교의 용어에 있어서 앎(gnosis)라는 말은 지식, 성교 그리고 신비적 연합을 의미하는 것 이었다.

결국, 틸리히에 따르면 사랑은 믿음처럼 감정, 의지, 지성과 동일시 될 수 없는 것이며 오 히려 성령의 창조로서 이러한 요소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전인격의 상태를 의미한다. “사 랑은 믿음처럼 전인격의 상태이다. 이 점에서 인간 정신의 모든 기능들은 사랑의 모든 행위 속에 살아있다.”43) 또한 사랑은 모호하지 않은 생명의 초월적인 연합으로 이끌려진 상태로

40) Ibid., p. 134. 헬라어에는 사랑을 의미하는 epithymia, philia, eros, agape 등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사랑으로 번역될 수 있는 공통된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여기서 공통된 특성은 분리된 것들을 재 결합하려는 충동’(the urge toward the reunion of the separated)이다. 이 점에서 모든 사랑은 동일한 것이 다.” cf. Paul Tillich, Love, Power and Justice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54). p. 25. 사랑 은 소외된 것의 결합으로서가 아니라 소외된 것의 재결합으로서 묘사될 수 있다. 왜냐하면 소외는 본래의 통 일성을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41) Ibid., pp. 135-137.

42) cf. Paul Tillich, Love, Power and Justice, p. 25. 틸리히는 생명과 사랑의 관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 한다. 생명은 현실성 속에 있는 존재이며, 사랑은 생명의 원동력이다.(life is being in actuality and love is the moving power of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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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인간의 영 자체로서는 창조할 수 없는 것이다. “아가페는 오직 성령에 의해서 주어지는 초월적인 연합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다.”44) 이런 점에서 볼 때 아가페는 다른 종류의 사랑 (epithymia, philia, eros)으로부터 독립할 수도 있고, 동시에 그들과 결합할 수도 있고, 그 들을 심판할 수도 있고 그리고 그들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 곧 아가페는 성령의 창조로서 모든 종류의 사랑의 모호성을 극복하는 모호하지 않은 사랑이다. 틸리히는 이처럼 아가페가 사랑의 모호성을 극복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가페가 신앙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존재 의 기본적인 구조인 수용적, 역설적, 예기적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가페 의 경우에 있어서 첫 번째 성격은 사랑의 대상을 제한 없이 수용하는데서, 두 번째 성격은 그 대상이 소외되고 세속화되고 마성화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수용을 확고히 지속 하는데서 그리고 세 번째 성격은 사랑이 대상을 수용함을 통해서 그 대상이 거룩함과 위대 성과 고귀함을 회복할 것을 기대하는데서 나타나고 있다.”45)

이제까지 우리는 성령의 현현의 내용인 믿음과 사랑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곧 우리는 믿 음과 사랑은 모두 모호하지 않는 생명의 초월적인 연합에 대한 탈아적인 참여의 상태라는 것과 이들은 인간의 유한한 영 자체로서는 또는 인간의 정신적인 기능으로서는 결코 창조될 수 없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틸리히는 이와 같은 자신의 주장은 신학적으로 볼 때 다음과 같은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46)

첫째, 믿음과 사랑이 모두 성령의 창조라는 주장은 믿음과 사랑에 대한 카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논쟁을 해결할 수 있다. 사실 믿음이 논리적으로 사랑보다 앞선다는 것은 이미 지적 했었다. 왜냐하면 믿음은 성령이 인간의 영 안으로 꿰뚫고 들어 온 것에 대한 인간의 반응 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믿음은 자기 충족성에 머무르려는 인간 정신의 경향성을 타파 하는 하나님의 영에 대한 탈아적인 수용이다. 이러한 관점은 믿음은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루터의 주장을 긍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모호하지 않은 초월적인 통일성에 대한 참여에 있어서의 믿음과 사랑의 본질적인 비분리성에 대한 통찰로 인해서 카톨릭적이며 어거스틴적인 사랑에 대한 강조도 똑같이 긍정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사랑은 믿음의 결과 이상이다. “사랑은 존재의 탈아적인 상태의 한 측면이고 믿음은 다 른 측면이다.”47) 그러므로 사랑의 행위는 결코 인간이 성령을 사로잡을 수 있는 조건이 아 닌 것이다. 이와 같은 왜곡에 대한 가장 강력한 무기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모든 것은 하 나님에 의해서 행해진다는 프로테스탄트의 원리이다.

43) Ibid., p. 137.

44) A. J. Mckelway, op. cit., p. 202.

45) ST.III., p. 138.

46) Ibid., p.135.

47) Ibid., p.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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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믿음과 사랑이 모두 성령의 창조라는 주장은 왜 희망을 성령의 세 번째 창조로 간 주하지 않고 단지 믿음의 세 번째 요소 곧 믿음의 예기적인 성격으로 간주하는지 그 의문점 을 해결할 수 있다. 여기서 근본적인 대답은 만일 희망이 성령의 세 번째 창조로 여겨진다 면 그 위치가 믿음과 대등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렇게 되면 희망은 예기적인 기대 (anticipatory expectation)의 독립적인 행위가 될 것이고 이로 인해서 희망과 믿음의 관계 는 모호하게 될 것이다. “희망은 ‘어떤 것을 믿는’ 태도에 빠지게 될 것이고 이러한 태도는 믿음의 의미와 정반대되는 것이다.”48) 이런 점에서 볼 때 희망은 믿음의 한 요소이거나 아 니면 성령 이전의 인간 정신의 행위(pre-Spiritual work)일 뿐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믿 음과 사랑의 본질적인 비분리성에 대한 통찰을 다시 한번 재확인하는 것이다.

결국, 믿음과 사랑은 모두 성령에 의한 창조로서 인간의 영이 모호하지 않은 생명의 초월 적인 통일성에 탈아적으로 참여한 상태이다. 그리스도론적으로 말하자면, 믿음과 사랑은 하 나님의 영이 인간의 영 안에 현존함으로써 창조된 존재의 상태 곧 인간 실존의 분열이 극복 되고 생명의 모호성이 극복된 새로운 존재의 상태이다.49)

2. 인류 역사에 나타난 성령의 현현 1)성령의 현현과 인류 역사

우리는 앞에서 인간의 영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의 특징과 그 내용을 고찰하여 성령은 믿음과 사랑을 통해서 모호하지 않은 생명의 초월적인 통일성으로 우리를 이끈다는 점을 살 펴보았다. 또한 우리는 모호하지 않은 생명의 초월적인 연합의 힘에 의해서만 생명의 모호 성을 극복한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제 틸리히는 인류역사에 나 타나는 하나님의 영의 성격에 대해서 고찰한다.

먼저, 틸리히는 다음과 같은 성령과 인류 역사의 관계를 통해서 인류 역사에 대한 하나님 의 영의 보편적인 현현을 지적한다.50)

첫째, 인간의 영에 대한 하나님의 영의 침입은 ‘고립된 개인’ 속에서가 아니라 사회 집단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의 모든 기능들 곧 도덕적 자기통합, 문화적 자기창조, 종교적 자기초월은 나와 너의 만남이라는 사회적인 맥락에 의해서 조건지워져 있 기 때문이다.

둘째, 성령은 역사 안에 나타나지만 역사 자체는 성령의 현현이 아니다. 성령이 역사집단 에 현현할 때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표지가 나타난다. 첫째, 사회적 집단이 성령의 영향에

48) Ibid., p. 135. cf. 신학의 초점으로 삼고 있는 몰트만의 신학에 있어서도 희망은 ‘신앙의 희망“이다.

”신앙은 희망을 세우는 기초이고, 희망은 신앙을 키우고 지원한다. 만약 먼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는다 면, 그 누구도 하나님으로부터 그 무엇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이신건 역, 「희망의 신학」(서울 ; 대한 기독교서회, 2002), p.27.

49) 김경재,「폴틸리히 신학연구」, p. 299.

50) ST.III., pp.139-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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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해 개방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들이 강하게 현재한다. 둘째, 이러한 상징들의 피 할 수 없는 세속화와 마성화에 대항해서 싸우는 인물들과 운동들이 등장한다.

셋째, 성령의 현현의 표지는 어느 장소나 어느 시대에서든지 결코 결여되어 있지 않다.

곧 하나님의 영(인간의 영 안에 현재하는 하나님)은 구원과 변형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계 시적인 경험 속에서 모든 역사 안으로 꿰뚫고 들어온다. “인류는 결코 홀로 남겨져 있지 않 다. 성령은 매순간 인류에 영향을 주고 있으며, 위대한 순간들에 인류 속으로 꿰뚫고 들 어온다. 이 순간들이 바로 역사적인 카이로스들(kairoi)이다.”51)

이와 같은 인류 역사에 대한 성령의 현현의 보편성은 인류는 결코 하나님에 의해서 홀로 남겨져 있지 않기 때문에 곧 인류는 끊임없이 성령의 영향 아래에 있기 때문에 역사 속에는 새로운 존재(New Being)가 항상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역사 속에 는 모호하지 않은 생명의 초월적인 통일성에 대한 참여가 항상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여기서 명심해야 할 사실은 이러한 참여는 단편적이라는 점이다. “단편성은 모호성과 는 다른 말이다. 성령, 새로운 존재 또는 아가페 자체는 모호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시간 과 공간 속에서의 성령의 현현은 단편적인 것이다. 따라서 완전한 초월적인 연합은 종말론 적인 개념이다. 바울이 하나님의 영과 진리와 하나님의 얼굴에 대해서 단편적이며 예기적으 로 말했듯이 단편은 예기이다.”52) 결국 새로운 존재는 역사 속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며 모 호하지 않게 현재한다 할지라도 단지 단편적으로만 그리고 예기적으로만 현재할 수 있는 것 이다. 곧 새로운 존재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는 생명의 모호성을 단지 단편적으로만 정복할 수 있는 것이다.

2)성령의 현현과 종교의 변천

다음으로, 틸리히는 이와 같은 성령의 현현의 보편성을 종교의 변천사를 통해서도 고찰한 다. 특히 그는 다음과 같은 종교에 대한 유형학적인 고찰을 통해서 성령의 현현의 참된 의 미를 고찰한다.53)

첫째 유형은 고대의 마나(mana) 종교이다. 여기서 성령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깊이’속에 위치하고 있다. “마나 종교에서 모든 사물들 속에 있는 신적인 능력은 비가시적이며, 신비 스러운 것이며, 단지 한정된 제의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으며, 특별한 집단의 사람들, 곧 제사장에게만 알려지는 것이었다.”54) 성령에 대한 이러한 실체론적인 시각은 오늘날 거의

51) Ibid., p. 140. cf. Protestant Era (Chicago :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48), p. 33. ‘형 식적인 시간’을 의미하는 chronos와 ‘의미와 내용으로 가득찬 시간’을 의미하는 kairos를 구별한다. 예수는 그 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그리고 언젠가 한 번은 때가 찬 순간(en kairo)이 왔다고 말했다.

52) Ibid., p. 140.

53) Ibid., pp. 141-143. cf. A. J. Mckelway. op. cit., p. 122. 틸리히가 종교사를 연구한 이유는 19세기 자유 주의가 했듯이 인간 역사의 종교적 발전과정을 그대로 보여주고자 한 것이 아니고 그가 증명하고자 한 것은 신에 대한 사고에는 변천과정이 있었음을 증명하고자 한 것이다.

54) Ibid., p. 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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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고등종교 속에 남아 있으며 심지어 그리스도교의 성례전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둘째 유형은 인도나 헬라의 신화와 같은 위대한 신화적 종교들이다. 여기서 신적인 능력 들은 그들이 세계를 지배할지라도 실존의 세계로부터 부분적으로 또는 전체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이로 인해서 신들의 현현은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매우 비범한 성격을 나타냈다. 곧

“성령이 자신을 나타날 때 자연과 정신은 탈아적인 상태로 변화된다.”55) 이와 같은 성령의 신화론적인 유형은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모든 종교의 발달에 엄청난 영향을 주 었다. 특히 여기서 성령의 경험이 탈아적이라는 점은 정당한 것인데 바로 이 때문에 종교를 탈신화화하려는 모든 시도는 헛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셋째 유형은 그리스와 헬라의 밀의적인 제의들(mystery cults)이다. 여기서 신적인 것은 제의 속에서 ‘밀의적인’ 신이라는 구체적 인물로 구현된다. 이처럼 구체적인 인물을 통해서 신의 운명에 탈아적으로 참여하는 방법은 유일신론적인 그리스도교에도 많은 영향을 주어서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이 유형에 근거하여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령의 경험을 표현했었다.

넷째 유형은 이원론적인 종교이다. 이원론적인 종교는 성령의 마성화에 대한 투쟁을 전개 했는데 이것은 먼저 페르시아에서 행해졌고 그 다음에 마니교에서 행해졌다. 여기서 한 인 물에게 마성적인 잠재성을 집중시키려는 시도는 그 반대편의 신적인 인물을 그 마성적인 오 염으로부터 해방하기 위한 시도였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성공하지 못했지만 후기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에 대한 그의 영향은 엄청난 것이었다. 이러한 성령의 마성화에 대한 불안은 사 탄과 그의 모든 행위에 대한 공포 속에 표현되어 있으며 또한 이원론적인 상징으로 가득 차 있는 그리스도교의 용어에서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다섯째 유형은 아시아와 유럽의 신비주의이다. 여기서 신비주의는 성령을 구체적인 매개 체를 넘어서 있는 것으로서 경험하려는 시도이다. 곧 신적인 인물들과 구체적인 실재들은 궁극적인 것에 이르는 영적인 단계의 등급들로서 예비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이 들 모두는 궁극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신비주의는 이러한 등급들이 사라 지고 정신이 탈아에 사로잡힐 때만 성령이 완전히 경험될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신비주의란 인간의 주-객 도식을 초월함으로써 신적인 것의 모든 구체적인 구현을 초월 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신비주의는 항상 성령의 탈아적인 경험의 주체인 중심 을 가진 자아를 폐기시킬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동양과 서양의 종교 적인 대화에 있어서 해결하기 가장 어려운 문제점이다. “동양은 모든 종교생활의 목표로서

‘형식 없는 자아’(formless self)를 긍정하려고 한다. 반면에 서양은 탈아적인 경험 속에서 믿음과 사랑의 주체인 인격성과 공동체를 보존하려고 한다.”56)

마지막 유형은 유대의 배타적인 유일신론과 서구의 그리스도교이다. 여기서는 앞에서 살

55) Ibid., p. 142.

56) Ibid., p.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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펴본 것처럼 인격과 공동체가 탈아적인 경험 속에서도 보존된다. 사실 구약성서의 종교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은 중심을 가진 자아들과 그들의 만남을 제거하지 않고 있고, 그들을 일 상적인 가능성을 초월하여 있고 인간의 의지에 의해서 생산될 수 없는 정신의 상태로 승화 시키고 있다. 곧 하나님의 영은 그들을 사로잡아 그들을 최고조의 예언자적인 능력으로 이 끌어 갔다. 이처럼 예언자적 종교는 인격과 공동체를 중히 여기는데 이러한 태도는 성령의 본래의 의미에 근거하는 것이었다. “예언자 종교에 있어서 성령은 인간성과 정의의 하나님 의 현존이다.”57) 이것의 구체적인 실례가 엘리야 선지자와 바알 제사장 사이의 싸움에 관한 이야기(왕상18장)이다. 여기에는 두 종류의 탈아의 상태가 나타나고 있는데 바알 제사장의 마음과 몸에 나타난 바알의 영의 현존에 의해서 만들어진 탈아는 자기도취와 자기분단을 보 여주고 있는 반면에 엘리야의 탈아의 상태는 확실히 강도와 효과에 있어서 일상적인 경험들 을 초월하고 있지만 기도 속에서의 인격과 인격의 만남의 탈아이며, 특히 이것은 예언자의 인격적인 중심을 소멸시키거나 분열시키지 않고 있고 신체적인 도취상태도 산출하지 않고 있다.

결국, 이와 같은 유형학적인 고찰은 성령의 ‘개념’은 역사적인 변천 과정을 거쳐서 형성되 었다는 것과 인간성과 정의가 없는 곳이라면 순수한 성령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성과 정의가 없다면 마성화되거나 세속화된 성령이 존재한다. 인간성과 정의는 종교의 마성화에 저항한 예언자들의 심판의 원리이다.”58)

3)성령의 현현과 예수 그리스도

우리는 앞에서 성령은 인류 역사에 보편적으로 현현한다는 것과 참된 성령은 인간성과 정 의의 하나님의 현존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주장은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뒤따르게 한다 :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 틸리히는 영 그 리스도론(Spirit-Christology)으로 대답한다. “하나님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떠한 왜곡 없이 나타났다. 예수 안에서 새로운 존재는 과거와 미래의 모든 성령의 경험의 기준으 로서 나타났다. 그는 비록 개인적인, 사회적인 조건에 예속되어 있었을지라도 완전히 성령 에 의해서 사로잡혀있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이 그 안에 있었다.”59) 이것은 예수를 그리 스도로 만들고, 그를 인류 역사에 있어서 새로운 존재의 ‘결정적인 구현’으로 만든 것은 다 름이 아닌 하나님의 영이라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영 기독론은 초대교회의 전통 에 있어서 지배적이었는데 공관복음서의 이야기들이 이를 잘 예증하고 있다. 이 전통에 따 르면 예수는 그의 세례의 순간에 성령에 의해서 사로잡혀 있었고 이 사건은 그를 선택된 하 나님의 아들로서 확증하였다. 또한 탈아적 경험들이 공과복음에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는

57) Ibid., p. 143.

58) Ibid., p. 144.

59) Ibid., p. 14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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