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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폴 틸리히의 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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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폴 틸리히의 신론

I. 들어가는 말

폴 틸리히의 신학은 “변증적 신학”(apologetic theology)이다. 칼 바르트의 신학의 성격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출발하고 그 말씀에 집중하는 케리그마적 신학이라면, 폴 틸리히의 신학 의 성격은 시대적 물음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답하는 변증적 신학이다. 말하자면, 시대적 물음에 대해서 “대답하는” 것이 틸리히의 신학의 근본적인 특징이다. “변증신학은 대답하는 신학이다. 변증신학은 영원한 메시지의 힘 속에서 그리고 상황에 의해서 마련된 수단을 통해서 상황이 안고 있는 물음에 대답하려는 신학이다.”1) 그렇다면 폴 틸리히의 조 직신학의 신론이 대답하려고 시도한 시대적인 물음은 무엇인가? 틸리히는 그의 신론에서 다 양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지만 틸리히가 그의 신론을 통해서 대답하려고한 핵심적인 문제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근대세계의 무신론이다.2) 이것은 기독교 밖에서 오는 공격으로서 틸리히의 신학은 근대세계의 무신론적인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근대세계의 무신론과 철저히 씨름했다. 무신론은 그것이 과학적 무신론이든지 아니면 이념적 무신론이든지 간에 신학이 영원히 맞서 싸워야만 하는 근본적인 문제이다. 둘째는 이신론과 범신론이다.3) 이것 은 근대시대에서 형성된 그릇된 신관으로서 틸리히의 신학은 이 두 근대적인 신관을 넘어서 는 새로운 신관을 제시하고자 시도했다. 이신론과 범신론은 그것이 신학적 사유이든지 아니 면 철학적인 사유이든지 간에 현대신학이 근대신학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극복해야만 하는 근대세계의 전형적인 신관들이다. 사실, 이와 같은 근대세계의 문제들은 틸리히 뿐 만 아니라 대다수 현대신학자들이 직면했던 문제들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20세기 신학은 마치 초기 기독교의 신학이 기독교 안밖의 도전에 대해서 응답하는 가운데 변증신학으로 발전했 던 것처럼 모두 변증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현대신학의 변증적인 성격이 지시하고 있는 보다 중요한 것은 진정한 현대신학은 단순히 ‘현대’라는 시간적인 맥 락에 의해서만 규정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현대신학은 근대적인 사유와 비판을 극복한 신학에게만 부여될 수 있는 영예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틸리히 의 신론은 참된 현대신학의 전형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틸리히의 신학은 존재론적인 신

1) 틸리히, 유장환역,『폴 틸리히 조직신학』I (서울 : 한들출판사, 2001), 18. cf. 박만,『폴 틸리히-경계선상 의 신학자』(서울 : 살림, 2003), 7. “틸리히 신학을 공부하는 두 번째 이유는 20세기 최대의 변증신학자라는 신학사에서의 그의 자리 때문이다. 신학에는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을 제대로 진술하여 교회로 하여금 그 말씀 을 순종하도록 하는데 주된 관심을 갖는 케리그마적 신학과, 각 시대의 질문에 맞추어 하나님의 말씀을 재해 석함으로써 말씀의 상황적 적합성을 확보하는데 주된 관심을 갖는 변증적 신학이 있다. 그런데 틸리히 신학은 20세기 최고 수준의 변증신학이며, 교회사를 통틀어서도 가장 탁월한 변증신학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2) cf. Martin Leiner, “Tillich on God”, The Cambridge Companion to Paul Tillich, ed. Russel Re Manning(Cambridge :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8), 45. 틸리히에 따르면 무신론은 불가능한 태도 이다. 왜냐하면 무조건자의 감각이 모든 인간 존재에 현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은 검증될 수 있는 가설이 아니다. 신은 진리에 대한 모든 주장에 의해서 항상 이미 전제되어 있는 명제이다.

3) cf. L. Gordon Tait, The Promise of Tillich (New York : J.B. Lippincott Company, 1971), 56-57. Tait 에 따르면 틸리히의 신학의 공적인 제일의 적은 초자연적인 이신론이고 공적인 제이의 적은 자연주의적인 범 신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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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을 통해서 근대세계의 무신론적 세계관을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근대세계의 신학적인 사 유들의 대립 즉 이신론과 범신론 사이의 대립을 극복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본 논문 에서 틸리히의『조직신학』II 제2부 “존재와 신”에 대한 집중적인 고찰을 통해서 틸리히의 신론을 개관한 후에 틸리히의 신론이 지니고 있는 근대적인 사유를 극복한 현대신학으로서 의 신학적인 의의들을 해명해 보고자 한다.

II. 본론

틸리히의 신론은 방법론적으로는 “상관관계”(correlation)의 신학이고 내용적으로는 “존재 론적인”(ontological) 신학이다.4) 이 주장은 틸리히의 신론의 기본적인 명제들 속에 잘 나타 나 있다. “신학의 기본적인 물음은 신에 대한 물음이다. 신은 존재가 안고 있는 물음에 대 한 대답이다.”5), “신의 존재는 존재자체이다. 신의 존재는 다른 존재자들 곁에 또는 위에 있는 하나의 존재자의 실존으로서 이해될 수 없다.”6) 이처럼 틸리히는 방법론적으로는 물 음과 대답을 상호 연관시키는 상관관계의 방법에 따라서 신에 대한 보편적인 물음으로서의

“존재”와 존재의 물음에 대한 계시적인 대답으로서의 “신”을 상호 연관시키고 있고, 내용적 으로는 신학의 모든 주제들을 존재의 관점에서 전개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틸리히의 신 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의 존재론을 필수적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1. 존재의 본질

먼저, 존재론(ontology)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틸리히에 의하면 존재론이란 어떤 것이

“존재한다”(is)고 말할 때 그 존재 자체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존재 그 자체는 무엇인가? 특별한 존재자나 일단의 존재자들도 아니고, 구체적인 어떤 것이나 추상 적인 어떤 것도 아니고, 오히려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말할 때면 항상 함축적으로 또는 때때로 명시적으로 생각되고 있는 것, 그것은 무엇인가?”7) 말하자면, 존재론이란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말할 때 존재 그 자체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이 존재 자체를 구성하고 있 는 존재의 구조와 이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구성요소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 존재의 구성요 소를 결정하고 있는 범주는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틸리히에 따르면, 이러한 존재 론적인 탐구는 인간이 물을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물음으로서 모든 학문의 근본적인 토대 즉 “제일철학”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사유는 존재 배후를 탐구할 수 없고 오직 존재로부터 시작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사유는 존재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유는 물음의 형식 그 자체가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존재의 배후를 탐구할 수 없다. 만일 누군가가 왜 없 음은 존재하지 않고 없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는 존재를 없음에까지 귀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사유는 존재 위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고 사유는 이 토대를 떠날 수가 없다.”8) 이처럼 인간 의 사유는 오직 존재로부터 시작해야만 하기 때문에 존재에 대한 물음은 가장 근본적인 탐

4) cf. 방법과 존재론적인 패러다임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들을 참조하시오. 유장환, “폴 틸리히의 신 학방법에 대한 연구”, 조직신학논총」제13집(2005), 65-83 ; 유장환, “폴 틸리히와 존재론적인 패러다임”,「신 학과 현장」제13집(2003), 179-201. 존재론적 신론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는 기본적으로 선행연구를 참조함 ; 목창균,『현대신학논쟁』(서울 : 두란노, 1995), 205-206. “틸리히는 가장 영향력 있는 현대 기독교 사상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바르트처럼 개신교신학에 강한 영향을 끼치지 않았으며 그의 사상이 라인홀드 니버처럼 예언자적인 힘을 지닌 것도 아니었다. 그의 탁월성은 오히려 현대의 역사적 관점과 인간의 실존적 상황에 근 거하여 기독교 신학을 존재론적인 입장에서 해석한 것에 있다.”

5) 폴 틸리히, 유장환역,『폴 틸리히 조직신학』II (서울 : 한들출판사, 2003), 13.

6) 앞의 책, 131.

7) 앞의 책, 14.

8) 앞의 책.

(3)

구이다. 일부학자들은 틸리히의 신학이 역사나 자연이나 인간 사회의 현실적인 문제를 간과 했다고 비판하는데 그것은 틸리히의 신학에 대한 오해이다.9) 왜냐하면 존재의 개념은 이 주제들을 포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주제들의 토대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신학 적인 주제가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그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인간의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1)존재의 기본구조

그렇다면 어떤 것이 존재한고 말할 때 이 존재의 기본구조는 무엇인가? 틸리히에 따르면, 모든 물음이 주관과 객관의 구조를 전제로 하고 있듯이 대극적인 관계 속에 있는 자아와 세 계(the self-world polarity)가 모든 존재의 기본 구조이다. “자아와 세계의 상호의존성이 존재론의 기본구조이며, 이것은 그 밖의 모든 존재론적인 개념의 토대이다.”10) 말하자면,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여기에는 반드시 자아와 세계의 상호의존적인 변증법적인 구조 즉 자기가 속해있는 세계를 소유하고 있는 자아가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다. 먼저, 자 아(self)는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한 사물이 아니다. 자아는 모든 물음 을 선행하는 근원적인 현상으로서 중심화된 구조(a centered structure)를 뜻한다. 이러한 점에서 자아성 또는 자기중심성은 모든 유기물에서도, 심지어 무기적 영역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하지만 자아는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자아는 환경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인 간의 자아(ego-self)는 세계를 가지고 있다. 즉, 인간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 속해 있는 자로서 그리고 동시에 그 세계를 가지고 있는 자로서 자신을 경험하고 있다. 이처럼 무엇이 존재한다면 자아의 측면과 세계의 측면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두 측면은 분리되어 존재하 는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인 대극성 속에서 존재한다. 말하자면, 자아의 측면에서 보면 자 기가 속해 있는 세계가 없다면 자아는 공허한 것일 수밖에 없고 반면에 세계의 측면에서 보 면 자기가 속해 있는 세계를 소유하고 있는 자아가 없다면 세계는 죽은 것일 수밖에 없다.

결국, 존재의 기본구조는 상호 구별되는 자아와 세계이며 이 둘은 그 중에서 어느 하나가 상실된다면 다른 하나도 상실될 수밖에 없는 상호의존적인 대극적인 관계 속에 존재한다.

2)존재의 구성요소

다음으로, 존재의 구조가 선험적으로 주어져있는 대극적인 관계 속에 있는 자아와 세계라 면 이 존재의 기본 구조를 구성하고 있는 존재의 구성 요소는 무엇인가? 틸리히에 따르면

‘존재의 구성요소’(ontological element)는 존재의 구조처럼 대극적인 관계 속에 있는 개체 화와 참여, 역동성과 형식, 자유와 운명이다. 이 세 요소에 있어서 전자(개체화, 역동성, 자 유)는 존재의 기본 구조의 자아의 측면을 전제로 하고, 후자(참여, 형식, 운명)는 세계의 측 면을 전제로 한다.11)

먼저, 존재의 첫 번째 구성 요소는 대극적인 관계 속에 놓여 있는 “개체화와 참여”이다.

개체화는 존재자의 특별한 영역의 성격이 아니고 존재하는 모든 것의 존재론적인 요소이며 특성이다. 말하자면, 개체화는 모든 존재안에 포함되어 있으며 모든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본질적인 요소이다. 그러나 개체화는 동시에 참여를 내포한다. 왜냐하면 더 이상 분할될 수 없는 자아는 그의 세계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아는 자신이 참여하고 있는 그

9) ,『20세기 신학사상 I』(서울 : 연세대 출판부, 2003), 325. “실존적 상황의 문제들에 대한 틸리히의 분 석은 추상성의 문제점을 보인다. 개체화와 참여, 역동성과 형식, 자유와 운명이라는 양극들의 갈등이 과연 실 존적 상황 속에 있는 인간의 가장 현실적 문제라고 볼 수 있는가? 이러한 양극들이 더 이상 갈등 속에 있지 않고 완전한 조화 내지 균형 속에 있는 것을 가리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이라 말할 수 있는가?”

10) 폴 틸리히, 유장환역,『폴 틸리히 조직신학』II, 27.

11) 앞의 책, 31-51.

(4)

의 환경을 자신 안에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개체화는 항상 참여와의 상호 의존적인 관계 속에 놓여 있다.

다음으로 존재의 두 번째 구성요소는 대극적인 관계 속에 놓여 있는 “역동성과 형식”이다.

먼저, 형식은 내용과 대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은 형식을 가지고 있 다는 것을 뜻하는데 여기서 존재와 형식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떤 사물을 현재의 것으로 만드는 형식은 그 사물의 내용이며, 본질이며, 그것을 한정시키는 존재의 힘 이다. 물론, 형식은 정적인 개념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형식은 어떤 것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어떤 것’이 무엇인가이다. 틸리히는 이것을 ‘역동성’이라고 부른다. 따 라서 형식은 내용이 아니라 바로 이 역동성과 항상 대극적인 관계 속에 있는 것이다.12) 다음으로 존재의 세 번째 구성요소는 대극적인 관계 속에 놓여 있는 “자유와 운명”이다.

먼저, 인간은 자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다. 여기서 자유는 기능의 자유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완전한 자아와 합리적인 인격을 지니고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자유를 뜻한 다. 틸리히에 따르면 이러한 자유는 운명과의 상호 의존적인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왜냐하 면 운명은 장차 나에게 무엇이 발생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낯선 힘과 같은 것이 아니고 나의 자아가 처해 있는 환경, 즉 인간의 자유로운 숙고와 결단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을 가리키 는 것이기 때문이다. “운명은 장차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결정하는 낯선 힘이 아니다. 운명은 자연과 역사와 나 자신에 의해서 주어져 있는 나 자신이며 이들에 의해서 형성된 나 자신이다. 나의 운명은 나의 자유의 토대이며, 나의 자유는 나의 운명의 형성에 참여하고 있다”13) 이처럼 운명은 자유의 반대가 아니며 오히려 자유의 조건과 한계를 뜻하 는 것으로서 항상 자유와 대극적인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결국, 존재하는 모든 것 은 각각 대극적인 관계 속에 있는 개체화와 참여, 형식과 역동성, 자유와 운명이라는 존재 의 구성요소들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와 같은 틸리히의 존재론의 의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존재론의 재확 립이다. 틸리히에 따르면, 존재론적인 개념들은 선험적인(a priori) 것이다.14) 말하자면, 어 떤 것이 존재하는 한 존재의 구조와 구성 요소는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서 선험 적이라는 것은 경험이전에 미리 주어져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 경험될 때마다 현재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경험의 구조는 선험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경험이 존재하는 한 경험의 과정 안에서 인식되고, 비판적으로 구성되는 경험의 구조는 존 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존재론적 개념들의 선험성은 과정철학과 역사 상대 주의의 오류를 극복하는 토대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과정철학은 정적인 것처럼 보이는 모 든 것을 과정으로 해체하려고 시도한 점에서는 정당하지만 과정의 구조를 과정으로 해체하 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역사적인 상대주의는 인간의 본성이 역사적인 과 정 안에서 변화하는 이상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존재론적으로 명확하게 단언될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인간의 본성은 역사 안에서 변하고 있고 또한 모든 역사적인 변화 밑 바탕에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어떤 존재의 구조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틸리히의

12) cf. 책, 39. 역동성이 형식과 대극적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개념화 될 수 있는 모든 것은 존재를 가지고 있는데 여기서 존재는 형식없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틸리 히는 역동성은 ‘근원’(뵈메), ‘의지’(쇼펜하우어), 무의식(프로이트)와 같은 용어처럼 ‘아직 존재를 가지지 않는 것’으로 본다. “역동성은 상대적인 무(me on) 즉 존재의 잠재성으로서 형식을 가지고 있는 사물에 대해서는 비존재를 의미하고 순수한 비존재에 대해서는 존재의 힘을 의미한다”.

13) 앞의 책, 49.

14) 앞의 책, 18-21.

(5)

존재론은 과정(process)을 실재로 보는 과정철학과 역사상대주의에 맞서서 존재의 구조의 선험성을 밝혀냄으로써 존재론의 중요성을 재확립하였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15)

다음으로 틸리히의 존재론의 의의는 전통적인 실재관의 극복이다. 틸리히에 따르면, 존재 론적인 개념들은 상호의존적인 대극적인(polar) 것이다.16) 말하자면, 어떤 것이 존재하는 한 존재는 존재의 구조와 구성 요소들의 상호의존적인 대극성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19세기 고전적인 관념론의 전통에 따르면 실재를 이해하는 데에는 4가지 사유방식이 있었다.17) 첫 째는 연역적 관념론이다. 이것은 자아에서 비자아를 유추하려고 시도했다. 둘째는 환원주의 적 실재론이다. 이것은 실재에서 자아를 유추하려고 시도했다. 셋째는 동일철학이다. 이것은 무한에서의 정신과 자연의 무차별적인 동일성을 주장했다. 넷째는 이원론이다. 이것은 감각 의 세계와 물자체계 사이의 중재 불가능한 분리를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은 각각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관념론은 객관을 주관으로부터 이끌어내는 잘못을 범했고, 실재론 은 주관을 객관으로 넘겨주는 대상화의 위험성을 야기시켰고, 동일철학은 주관과 객관사이 의 구별을 폐기하는 잘못을 범했고, 이원론은 주관과 객관사이의 종합의 가능성을 폐기하는 잘못을 범했다. 그러나 주관과 객관의 관계는 유추의 관계도 아니고 동일성의 관계도 아니 고 이원성의 관계도 아니다. 틸리히에 따르면, 주관과 객관의 관계는 상호의존적인 대극성 (polarity)의 관계이다. 이와 같이 틸리히의 대극적인 존재론은 존재가 근본적으로 자아(주 관)와 세계(객관)의 대극적인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을 밝혀냄으로써 자아를 세계로부터 또는 세계를 자아로부터 유추하려고 했던 실재론과 관념론의 오류와 자아와 세계를 분리하거나 동일시하려고 했던 이원론과 동일철학의 오류를 수정하고 대체한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가 지고 있다.

2. 존재의 유한성과 신에 대한 물음

앞에서 우리는 존재의 개념은 선험적이라는 것, 존재의 기본 구조는 자아와 세계 또는 주 체와 객체의 대극적인 관계라는 것 그리고 존재의 기본 구조는 근본적으로 상호 대극적인 관계 속에 놓여 있는 개체화와 참여, 역동성과 형식, 자유와 운명이라는 요소에 의해서 구 성되어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선험적이고 대극적인 성격을 지닌 존 재가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틸리히에 따르면 그것은 존재의 유한성(finitude) 즉 현실적인 존재는 존재와 비존재가 결합된 존재로서 항상 비존재(nonbeing)에 의해서 위협 받고 있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신에게 있어서 비존재는 지속적으로 그의 존재의 힘 에 의해서 극복된다. 하지만 인간에게 있어서 비존재는 극복되지 않는다. 비존재는 인간 존 재의 대극적인 긴장 속에 존재하고 항상 위험과 위협으로 나타나고 있다. 인간은 그의 존재 를 상실할 수도 있다. 인간은 비존재에 굴복하고 죽을 수도 있다.”18) 이처럼 모든 존재는 존재와 비존재가 결합되어 있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매순간 비존재의 위협 속에 존재한 다. 특히, 인간은 이와 같은 비존재의 위협을 즉각적으로 자각하고 있는데 이 자각은 불안

15) cf. 경재,『폴 틸리히의 신학 연구』(서울 : 대한기독교출판사, 1987), 362-363.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만 물은 정지해 있는 “존재물”이 아니라 움직이고 있고 변하고 있는 과정적 실재이다. 이에 비하여 틸리히의 존 재철학은 태초에 존재가 있었다. 존재자체는 정적 실재가 아니고 그 안의 스스로의 생명이 무한한 생명력으로 충만한 동적 실재이지만 생성과 과정은 존재를 존재론적으로 전제한다고 본다.

16) 폴 틸리히, 유장환역,『폴 틸리히 조직신학』II, 31-32.

17) cf. 19세기 독일의 관념론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시오. 동서철학연구회편,『동서철학입문 연구』(서울 : 창학사, 1984), 91-105 ; 강재륜,『철학』(서울 : 일신사, 1986), 161-200.

18) Alexander J. Mckelway, The Systematic Theology of Paul Tillich (London : Luttherworth Press, 1964), 111.

(6)

(anxiety)으로서 나타나고 있다. 왜냐하면 유한성 즉 비존재의 위협의 자각은 존재에 대한 위협으로서의 불안을 야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불안은 존재론적인 특질로서 유한 성처럼 보편적인 것이다. 더욱이 불안은 어떠한 특별한 대상이 아니라 오직 비존재의 위협 에 의해서만 비롯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불안과 공포는 다른 것이다.19) 먼저, 불안의 대상 은 “무”이고, 무는 하나의 “대상”이 아니다. 반면에 공포의 대상은 특정한 대상이다. 다음으 로, 공포의 대상이 주는 두려움은 행동에 의해서 극복될 수 있다. 하지만 불안은 완전히 극 복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떠한 유한한 존재도 자신의 유한성을 극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안은 비록 때때로 잠재적으로 있을지라도 항상 현재하는 것이다. 인간은 이와 같 이 보편적인 불안 속에서 즉 비존재화의 충격 속에서 비존재를 극복한 존재에 대해서 묻지 않을 수 없는데 이 물음이 바로 신에 대한 물음이다.

틸리히에 따르면, 이와 같은 존재의 유한성과 그에 따른 비존재의 위협과 불안은 존재의 범주들(categories)에 있어서 명백하게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존재의 범주들은 유한성의 형식으로서 존재(긍정적인 요소-용기)를 나타내 주면서도 동시에 비존재(부정적인 요소-불 안)를 나타내 주고 있다.20) 먼저, 시간은 덧없음이라는 부정적 요소와 불가역적인 창조성이 라는 긍정적인 요소에 의해서 균형을 이루고 있다. 만일 시간적인 실존에 대한 불안이 시간 성을 긍정하는 용기에 의해서 균형을 이루고 있지 않다면 인간은 시간의 전멸적인 성격에 의해서 굴복하고 말았을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이 현재의 시간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인간이 시간의 부정성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존재론적인 용기를 통해서 현재를 긍 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존재론적인 용기의 궁극적인 토대는 무엇인가?

다음으로, 공간도 존재와 비존재, 불안과 용기를 결합하고 있다. 존재한다는 것은 공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공간에 대한 충동은 존재론적인 필연이다. 그러나 공간 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또한 비존재에 굴복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어떠한 유 한한 존재도 공간을 확실하게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유한한 존재는 불안전하다. 왜냐하면 확실한 공간과 궁극적인 공간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 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간상실에 대한 불안은 현재를 긍정하고 그것과 더불어서 공간 을 긍정하는 용기에 의해서 균형을 이루고 있다. 말하자면, 모든 것은 살아 있는 한, 그것은 공간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불안에 대해서 성공적으로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 간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존재가 어떻게 궁극적인 공간 없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이러 한 존재론적인 불안을 받아들이는 용기의 토대는 무엇인가?

다음으로, 인과성도 존재와 비존재 모두를 나타내주고 있다. 만일 어떤 것이 인과적으로 설명된다면 그의 실재는 긍정되고 있는 것이며, 그리고 비존재를 저항하는데 있어서 성공하 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한 사물의 원인에 대한 물음은 자신을 존재하게 하 는 그 자신의 힘을 한 사물이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즉, 사물은 자 존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결과 인과성은 불안으로 경험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자존성으로 인한 불안은 우연성을 받아들이는 용기에 의해서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렇다

19) 틸리히, 유장환역,『폴 틸리히 조직신학』II, 60. cf. 실존철학과 심층심리학이 불안의 의미를 재발견한 것 은 20세기의 업적 중의 하나이다. 이들은 명확한 대상과 연관되어 있는 공포와 유한성의 자각으로서의 불안 이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 개념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주었다. 불안은 존재론적인 것이며 공포는 심리학 적인 것이다. 심리치료는 존재론적인 불안을 제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유한성의 구조를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리치료는 불안의 강제된 형태를 제거할 수 있고 두려움의 빈도와 강도를 감소시킬 수 있다.

20) 앞의 책, 62-71.

(7)

면 이러한 용기는 어떻게 가능한가? 인과적인 우연성에 의존하고 있는 존재가 어떻게 이와 같은 인과적인 의존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이와 같은 의존과 모순되는 필연성을 자신에게 귀속시킬 수 있는가?

끝으로, 실체도 존재와 비존재를 결합하고 있다. 실체는 현상의 흐름 배후에 있는 어떤 것 으로서 우리가 어떤 ‘것’을 말할 때마다 현재하고 있다. 그러나 유한한 모든 것은 천성적으 로 그의 실체가 상실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존재에 있어서의 변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물음은 실체와 동일성을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의 표현이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용기는 실체의 상실의 위협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것은 유한한 것의 자기 높임 이 아니고 유한한 것을 긍정하는 용기이며, 자신의 불안을 스스로 떠맡으려는 용기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와 같은 용기가 어떻게 가능한가이다. 자신의 실체의 피할 수 없는 상실을 알고 있는 유한한 존재가 어떻게 이러한 상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결국, 존재의 범주들은 존재와 비존재의 결합 즉 불안과 용기의 결합을 나타내주고 있다.

특히 범주들은 비존재의 불안을 받아들이는 용기를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용기의 궁극적인 토대는 무엇인가? 틸리히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신에 대한 물음이다. “범 주들은 유한한 모든 것에 있어서의 존재와 비존재의 결합을 나타내주고 있다. 이들은 비존 재의 불안을 받아들이는 용기를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신에 대한 물음은 이러한 용기의 가능성에 대한 물음이다.”21)

한편, 틸리히에 따르면 존재의 유한성은 존재의 범주들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존재의 구성 요소들(ontological elements)에 있어서도 명백하게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존재의 구성요소 들도 비존재의 위협에 개방되어 있기 때문에 각각의 대극성은 균형을 잃고 긴장 관계 속에 던져지게 된다. 여기서 긴장(tension)은 통일성 안에 있는 여러 요소들이 서로 떨어져서 반 대방향으로 나아가려는 경향성을 의미한다. 인간 존재에 있어서 이러한 존재론적인 긴장은 한쪽 또는 다른 쪽의 대극적인 요소의 상실을 통해서 그리고 그 결과 그것이 속해 있는 대 극성의 상실을 통해서 존재론적인 구조자체를 상실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자각 되고 있다. 말하자면, 유한성은 존재론적 구성 요소들의 대극성을 긴장관계로 변형시키어 그 결과 있을 수 있는 파괴의 위협과 그에 따른 불안을 양산하고 있다. 먼저, 개체화와 참 여의 대극성은 존재의 유한성 속에서는 고독의 위협과 집단화의 위협 사이의 갈등으로 나타 나고 있다. 인간은 어느 한 쪽 극을 상실하면 그는 존재하기를 중단하게 된다는 것을 의식 하면서 개체화와 참여 사이에서 불안하게 동요하고 있다. 또한 역동성과 형식의 대극성은 존재의 유한성 속에서는 엄격한 형식의 위협과 혼돈의 위협 사이의 갈등으로 나타나고 있 다. 인간은 그의 생동성을 형식주의 속에서 상실하지 않을까 또는 혼돈 속에서 그의 지향성 을 상실하지 않을까 불안해하고 있다. 또한 자유와 운명의 대극성은 존재의 유한성 속에서 기계적인 필연성과 비결정론적인 우연성 사이의 갈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인간의 자유는 운 명 속에 포함되어 있는 필연성에 의해서 상실될 수 있는 위협을 받고 있고 마찬가지로 인간 의 운명은 자유 속에 포함되어 있는 우연성에 의해서 상실될 수 있는 위협을 받고 있다. 이 와 같이 유한성은 인간의 존재론적인 구조를 위협하고 그에 따른 불안을 양산하고 있다. 인 간 존재는 이러한 불안 속에서 존재의 유한성을 극복한 존재에 대한 물음을 묻지 않을 수 없다. 틸리히에 따르면 이 물음이 바로 신에 대한 물음이다. “신에 대한 물음이 존재의 유 한한 구조 속에 포함되어 있다.”22)

21) 책, 71.

22) 앞의 책, 90.

(8)

여기서 중요한 신학적인 문제가 제기된다. 과연 신에 대한 물음은 존재의 물음에서 시작될 수 있는가? 신정통주의자들처럼 신에 대한 물음은 계시 속에서만 시작되어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인간의 지식이 그의 존재의 근거인 계시의 하나님에 대한 자 각을 전달할 수 있는가?”23) 이에 대해서 틸리히는 전통적인 신 존재 증명을 새롭게 평가하 면서 존재의 물음이 신에 대한 물음의 시작점이 될 수 있고 또한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 다.24)

먼저, 틸리히에 따르면 신 실존 증명(the argument for the existence of God)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시도이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증명이 사용한 실존의 개념과 결론을 논증하는 방법 모두 신의 관념에 있어서는 부적절한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신의 실존”(the existence of God)은 그것이 어떻게 정의되든지 간에 본질과 실존의 창조적인 근거로서의 신의 개념과 모순된다. 모든 존재의 근거로서의 신은 존재자들의 총체 속에서는 발견될 수 없는 것이며, 또한 본질과 실존의 근거는 본질로부터 실존으로의 전이의 성격을 지니고 있 는 긴장과 분열에 참여할 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틸리히는 신은 본질과 실존을 초월한 모든 존재의 근거이기에 과감하게 신의 실존성을 부정한다. “신은 실존하지 않는다. 신은 본질과 실존을 초월한 존재자체이다. 그러므로 신이 실존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를 부인하 는 것이다.”25) 이와 같은 틸리히의 주장은 무신론에 대한 근본적인 반론이 될 있다. 사실, 무신론은 신의 실존을 주장하는 전통적인 신학에 대해서 신의 실존적인 부재를 주장하면서 전통신학을 비판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무신론의 비판은 틸리히의 주장으로 인해서 그 토대 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틸리히에 따르면 신은 본질과 실존을 초월한 존재자체이 지 증명여부가 논쟁될 수 있는 하나의 실존하는 사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결론을 통해서 논증하는 방법(the method of arguing through a conclusion)도 신의 관념과 모순된다. 모든 논증은 탐구하고 있는 어떤 것에 대해서 이미 주어져 있는 것 으로부터 결론을 이끌어 온다. 즉, 신의 실존에 대한 논증에서 세계는 주어져 있고 신은 이 세계로부터 유추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신을 세계로부터 이끌어온다면 신은 세계를 무한 히 초월할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은 실존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이 세계의 초월자로서의 신의 관념과 모순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실존의 개념과 결론을 논증하는 방법은 모두 신의 관념에 있어서는 부적절한 것 이기 때문에 신 실존 증명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전통적인 신 실존증명의 의의 는 무엇인가? 틸리히에 따르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신에 대한 물음의 가능성과 필연성을 표 현해 주었다는 점이다. 먼저, 신에 대한 물음은 “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신에 대한 자각 (awareness)이 신에 대한 물음 속에 현재하고 있기 때문이다.26) 말하자면, 무한에 대한 자 각이 신에 대한 물음을 가능케 해 준다. 이러한 무한에 대한 자각은 신에 대한 물음 보다 선행하는 것이다. 소위 존재론적인 증명은 무한자에 대한 자각이 유한성에 대한 인간의 자 각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만일 무한자에 대한 자각이 현재하지 않았다면 신에 대한 물음은 결코 물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또한 어떠한 대답도, 심지어 계시의 대답일

23) Alexander J. Mckelway, The Systematic Theology of Paul Tillich, 139. 틸리히의 존재론적 분석의 큰 문제는 신과 인간 사이의 자연적인 관계가 인간 안에 신에 대한 자각을 불러일으키고 인간으로 하 여금 유한한 범주를 신에게 적용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24) 폴 틸리히, 유장환역,『폴 틸리히 조직신학』II, 81-91.

25) 앞의 책, 82.

26) 앞의 책, 84. cf. Paul Tillich, Main Works vol,4., ed. John Clayton (Berlin : Walter de Gruyter, 1987), 296. “인간은 주관 객관의 분리와 상호작용 이전에 존재하는 무제약자를 즉각적으로 자각하고 있다.”

(9)

지라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다음으로, 신에 대한 물음은 “필연적인” 것이다. 왜냐 하면 인간은 반드시 인간의 존재를 위협하는 비존재(nonbeing)를 극복해야만 하고 이 위협 의 동반자인 불안을 극복해야만 하기 때문이다.27) 말하자면, 인간이 불안으로 경험하고 있 는 비존재의 위협이 인간으로 하여금 비존재를 극복하는 존재에 대해서 그리고 불안을 극복 하는 용기에 대해서 묻는 물음으로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만일 비존재의 위협이 없었다면 신에 대한 어떠한 물음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때에는 존재는 안전하기 때문 이다. 결국, 인간은 무한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에 신에 대해서 물을 수 있고 또한 자기의 존재를 위협하는 비존재를 극복해야만 하기 때문에 신에 대해서 묻지 않으면 안된다. 더욱 이 인간은 유한성의 불안을 받아들이고 그에 따르는 비존재의 위협에 저항할 수 있는 궁극 적인 용기에 대해서 묻지 않을 수 없다. 말하자면, 유한한 인간은 그의 존재를 위협하는 비 존재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비존재에 맞서서 자신을 용기있게 긍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와 같은 용기의 궁극적인 토대에 대한 물음이 바로 비존재를 영원히 극복한 존재인 신에 대한 물음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존재의 물음의 분석에서 신에 대한 물음의 가능성과 필연성을 주장하 는 틸리히의 존재론적 신론의 의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틸리히의 신론은 보편주 의적인 신론이라는 것이다. 존재는 보편적이다. 그리고 유한성과 비존재의 위협과 그에 따 르는 불안도 보편적이다. 이처럼 틸리히는 보편적인 존재의 분석에서 신론을 전개하고 있기 에 그의 신론은 보편성을 지닌다. 틸리히에 따르면, 신의 선행적인 은총이 보편적인 것이듯 이 신에 대한 물음도 보편적인 것이다.

4. 존재의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서의 하나님

우리는 앞에서 인간 존재는 비존재에 의해서 위협받고 있는 유한한 존재라는 것과 이 유한 성의 물음이 비존재의 위협에 저항할 수 있는 궁극적인 용기의 토대에 대한 물음이라는 것 을 살펴보았다. 틸리히의 상관관계에 따르면, 이와 같은 존재의 유한성의 물음에 대한 계시 적인 대답이 신이다. “신은 인간의 유한성이 안고 있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28) 그렇다면 인간의 유한성의 대답이신 신이란 무엇을 뜻하며, 존재의 유한성의 문제 즉 비존재의 문제 를 극복하는 신의 현실성은 무엇을 뜻하는가?

1) 존재 자체이신 하나님(God as Being-Itself)

먼저, 틸리히는 신의 의미에 대해서 무엇보다도 존재론적인 설명을 시도한다.29) 틸리히가 존재론적인 설명을 시도하는 것은 존재론적인 분석만이 전통적인 신관과 근대무신론 양자 모두를 극복할 수 있는 제3의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먼저, 틸리히에 따르면 신은 존재를 가지고 있지만 하나의 존재자가 아니고 존재자체

27) 틸리히, 유장환역,『폴 틸리히 조직신학』II, 87-88.

28) 앞의 책, 92.

29) cf. 앞의 책. 틸리히는 신에 대한 개념을 존재론적으로 정의하기 이전에 신의 의미를 명료하게 나타내기 위 해서 현상학적인 분석을 시도한다. 틸리히에 따르면, 신의 현상적 의미는 궁극적인 관심(Ultimate Concern)이 다. “신이란 인간의 궁극적인 관심이다. 즉, 신은 인간으로 하여금 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하는 것에 대한 이름이다. 이것은, 첫째로 신이라고 불리우는 하나의 존재자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둘째로 인간이 신 에 대해서 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는 주장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인간으 로 하여금 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에게 신이 된다는 것이며, 역으로 인간은 그에 게 신이 되는 것에 대해서만 궁극적으로 관심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 폴 틸리히, 유장환역,『폴 틸리히 조직신학』I, 26-31. “신학의 대상은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이다. 궁극적인 관심은 우리의 존재와 비존재를 결 정하는 것이다.”

(10)

(being-itself)이다. “신의 존재는 존재자체이다. 신의 존재는 다른 존재 곁에 또는 위에 있 는 하나의 존재자(a being)로서 이해될 수 없다. 만일 신이 하나의 존재자라면 그는 유한성 의 범주 특히 시간과 공간에 종속되게 된다.”30) 사실 전통적인 유신론의 가장 큰 문제점은 신을 존재자의 범주로 표현함으로써 많은 혼란과 변증적인 허약함을 초래했다는 점이다. 그 러나 신은 시간과 공간에 의해서 제약받는 하나의 존재자가 아니고 영원히 비존재를 저항하 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존재하는 존재 그 자체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존재자체인 신 에 대해서 다양한 용어로 표현할 수 있다. 즉, 존재자체로서의 신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존 재하게 만드는 존재의 근거(the ground of being)요, 존재하는 모든 것 속에 내재하고 있는 무한한 힘 즉 비존재에 저항하고 있는 존재의 힘(the power of being)이라고 표현할 수 있 다.31) 이와 같은 존재자체로서의 신 개념은 신을 하나의 존재자로 간주하고 비판하는 무신 론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존재자체인 신은 ‘본질’과 ‘실존’의 대립을 초월해 있는 존재이다. 이 세상에 존 재하는 모든 존재는 본질과 실존사이의 분열 속에 존재한다. 왜냐하면 실존은 본질로부터 실존으로의 전이 즉 비존재로의 참여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전이는 존재자체에 있어서는 제외된다. 왜냐하면 존재자체는 비존재에 참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 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존재자체는 모든 존재와 대립되고 있다. 전통적인 신학이 강조했 던 것처럼 신은 본질과 실존을 초월하여 있다. “존재자체는 유한한 존재의 근본 특징인 본 질과 실존의 분열 이전에 그리고 본질과 실존의 분열에 앞서서 존재한다.”32) 보다 구체적으 로 살펴보면, 먼저 신은 ‘보편적인 본질’이 아니다. 말하자면, 그는 유한한 잠재성의 총체가 아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신은 유한한 모든 잠재성들의 근거의 힘이기를 중단하고 따라 서 그것들을 초월하기를 중단하게 된다. 신은 그의 모든 창조력을 쏟아 부어 형상들의 체계 를 형성하게 되고 그 형상들에 구속되고 만다. 이것이 바로 범신론이 지시하고 있는 그릇된 신관이다. 다음으로 신은 ‘실존적인 존재’가 아니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신이

‘실존한다’고 말하는 것은 신을 그의 본질적 잠재성을 성취하지 못한 하나의 존재자로 만들 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틸리히의 존재자체로서의 신의 개념은 근대세계의 무신론의 공 격을 근본적으로 변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신의 실존을 부정하는 것이 무신론적인 주장인 것처럼 신의 실존을 긍정하는 것도 무신론적인 주장이다. 신은 존재자체이지 하나의 존재자 가 아니다.”33) 이처럼 신은 하나의 존재자로서 실존하지 않는다. 신은 존재자체로서 존재를 가지고 있는 모든 존재자들의 존재의 근거요 존재의 힘이다.

다음으로, 존재자체인 신은 세계와의 관계에 있어서 “내재적으로 초월적인 존재”이다.34) 존재자체인 신은 모든 존재와 이중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즉, 신은 한편으로는 존재의 힘

30) 틸리히, 유장환역,『폴 틸리히 조직신학』II, 131.

31) cf. 틸리히가 이외에 자주 사용하는 용어에는 “존재의 깊이”와 “하나님을 넘어서 계신 하나님”이란 용어가 있다. Paul Tillich, The Shaking of the Foundations (New York : Charles Scribner's Sons, 1948), 57.

“모든 존재의 이 무한하고 고갈되지 않는 깊이와 근거에 대한 이름이 하나님입니다. 이 깊이(depth)가 바로 하나님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것입니다” ; Paul Tillich, The Courage To Be(Glasgow : Collins, 1952), 176. “절대적 신앙의 내용은 하나님을 넘어서 계신 하나님(God above God)이다. 절대적 신앙과 그 결과 즉 급진적 의심을 자신 안으로 받아들이는 용기는 신에 대한 유신론적인 관념을 초월하는 것이다.”

32) 폴 틸리히, 유장환역,『폴 틸리히 조직신학』II, 133.

33) 앞의 책, 132.

34) cf. 몰트만, 김 균진역,『생명의 영』(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2), 53-62 하나님은 세계를 “완전히 넘어서 는” 영이다. “그는 절대적 영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는 놀라운 방법으로 이 세계에 대하여 가까이 계실 뿐 아니라 이 세계 안에 현존하며 어떤 의미에서 그 속에 내재한다. 그는 안으로부터 이 세계를 삼투하며 생 동시킨다.”

(11)

으로서 모든 존재와 존재자의 총체 즉 세계를 초월해 있다. 그렇지 않다면 신은 자신 이외 의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 제약될 것이고, 참된 존재의 힘은 그것과 그것을 제약하는 것 모 두를 초월하여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유한한 것은 존재자체에 참여하 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유한한 것은 존재의 힘을 가지지 못해 비존재에 의해서 삼켜 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자체는 모든 존재의 창조적인-심연적인 근거라는 이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즉, 모든 것은 존재의 무한한 힘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존재자체 는 존재의 창조적인(creative) 근거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존재의 힘에 유한한 방식으로 참 여한다는 점에서, 다시 말하면 모든 존재자는 그의 창조적인 근거에 의해서 무한히 초월되 고 있다는 점에서 존재자체는 존재의 심연적인(abysmal)근거이다.35) 결국, 존재자체인 신은 모든 존재의 영원한 창조적 근거로서 세계에 내재하는 실재이며 동시에 그의 자유를 통해서 세계를 무한히 초월하는 실재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존재자체인 신은 세계와의 관계에 있어서 “내재적 초월”이다. 이와 같은 존재의 근거로서의 신 개념은 신을 존재하는 모든 것 과 동일시한 자연주의적인 범신론에 대한 극복이며 또한 신을 하나의 존재자로 보는 초자연 주의적인 유신론에 대한 극복이 아닐 수 없다.

2) 살아계신 하나님 (God as living)

다음으로, 신이 하나의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자체라면 우리는 신의 현실성에 대해서 어떻 게 말할 수 있는가? 틸리히는 먼저 신이 존재자체라는 명제 이외에 신에 대한 모든 진술은 상징(symbol)이라고 본다. “신이 존재자체라는 것은 비상징적인 명제이다. 그러나 이것이 말해진 이후에는 어느 것도 신에 대해서 비상징적으로 말해질 수 없다. 그것은 간접적인 것 이며 그 자신을 넘어서 있는 어떤 것을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것은 상 징적인 것이다.”36) 이처럼 신에 대한 모든 구체적인 주장은 상징적인 것이 틀림없다. 왜냐 하면 구체적인 주장은 신에 대해서 어떤 것을 말하기 위해서 유한한 경험의 단편을 사용하 고 있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한한 실재의 단편이 어떻게 무한한 것에 대한 주장 의 토대가 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틸리히의 대답은 명료하다. “무한한 것은 존재자체이고 모든 것은 존재자체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가능하다.”37) 이런 점에서 틸리히는

“존재의 유비”, 엄밀히 말하자면 “상징적 존재의 유비”(symbolic analogia entis)를 긍정한 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의 단편적인 경험을 상징적으로 사용하여 말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가? 틸리히는 삶의 경험을 상징적 재료로 사용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해서 진술한다. 먼저, 우리가 신이 살아 있다 고 말할 때 여기서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틸리히에 따르면 삶은 잠재적인 존 재가 현실적인 것이 되는 과정이다. 즉, “삶은 통일과 긴장 속에 있는 존재의 구성적인 요 소들의 현실화이다.”38) 사실, 모든 삶의 과정에는 존재론적 요소들이 분산되거나 종합되고

35) 틸리히, 유장환역,『폴 틸리히 조직신학』II, 135.

36) 앞의 책, 137-138. cf. Paul Tillich, Dynamics of Faith(New York: Harper & Brothers, 1957), 41-43.

상징이란 무엇인가? 틸리히는 상징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구별한다. “첫째, 상징과 기호는 다같이 자신을 넘 어서 다른 어떤 것을 지시한다는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둘째, 기호는 그것이 지시하는 실재에 참여하지 않지만 상징은 그것이 지시하는 것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기호와 상징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셋째, 상징은 그 것이 상징하는 것을 지시하고 대표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닫혀져 있는 실재의 한 수준(level)을 열어준다.

넷째, 상징은 실재의 차원들과 요소들을 열어줄 뿐만 아니라 실재의 차원들과 요소들에 상응하는 우리의 영혼 의 차원들과 요소들을 열어준다. 다섯째, 상징은 의도적으로 생산될 수 없다.”

37) 폴 틸리히, 유장환역,『폴 틸리히 조직신학』II, 139.

38) 앞의 책, 142.

(12)

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존재론적 요소들은 삶의 과정 속에서 동시에 분리되고 재결합 되고 있다. 이러한 점에 볼 때 삶은 결합 없는 분리의 순간에 또는 분리 없는 결합의 순간 에 정지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은 살아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존재로서의 존재 의 동일성도 아니고 존재로부터의 한정된 분리도 아니라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즉, “신은 분리가 나타나지만 재결합에 의해서 극복되는 영원한 과정이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그는 살아있는 것이다.”39) 이런 맥락에서 틸리히는 신의 삶(divine life)을 존재론적인 요소들의 견지에서 기술한다. 물론, 그는 존재론적 요소들을 상징적으로 적용한다. 왜냐하면 존재론적 인 요소들은 유한한 인간의 삶에 있어서는 긴장과 갈등 속에 있지만 신적 삶에 있어서는 완 전한 균형과 통일 속에 있기 때문이다. “유한한 존재에 있어서 존재론적인 요소들은 긴장과 갈등 속에 있는 반면에 신적 삶에 있어서 존재론적 요소들의 대극성은 균형과 안정 속에 존 재한다. 이것은 또다시 그렇다. 왜냐하면 신 안에는 존재의 대극적인 요소들의 본질적인 통 일성을 파괴하려는 비존재의 위협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40)

먼저, 신의 삶은 개체화와 참여의 대극성을 포함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신은 ‘인격적인 신’으로서 일컬어질 수 있고 ‘절대적인 개체’로서 일컬어질 수 있다. 그러나 신을 그렇게 부 를 때에는 동시에 그를 ‘절대적인 참여자’라고 일컬어야만 한다. 한쪽은 다른 한 쪽 없이는 적용될 수 없다. 이것은 개체화의 요소와 참여의 요소가 모두 신의 삶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과 신의 삶은 이들 각각에 똑같이 가까이 있으면서도 이들 모두를 초월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우리는 신을 한 존재자라고 일컬을 수 없듯이 신을 한 인격이라고 일컬을 수 없다. 물론, 신은 인격이하의 존재가 아니다. 신은 모든 존재의 근거로서 인격적인 모든 것의 근거이며, 그는 그 안에 인격성의 존재론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 마찬가지로 신이 참 여자라고 일컬어진다면 이것은 어떤 것이 신과 나란히 존재하고 신이 그것에 참여한다는 것 을 뜻하지 않는다. 즉, 신적인 참여는 공간적인 또는 시간적인 현존을 뜻하지 않는다. 이것 은 상징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신의 삶은 역동성과 형식의 대극성을 포함하고 있다. 여기서 역동성이란 용어는 잠재성, 생명력, 자기초월을 함축하는 것이며 형식은 현실성, 지향성, 자기보존을 함축하는 것이다. 먼저, 틸리히는 잠재성과 현실성의 관계에 대한 고전적인 용어인 ‘순수형상’(actus purus) 즉 신은 모든 잠재적인 것이 현실화된 순수형식이라는 고전적인 이해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정식에 있어서는 역동적인 측면이 완전히 형식적인 측면에 의해서 삼켜지 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틸리히는 신은 순수 형상일 수 없으며 항상 역동성과 형식, 잠재 성과 현실성을 완전한 균형 속에서 포함하고 있는 존재라고 주장한다. “신의 삶에 있어서 역동적인 요소는 아직 아님(not yet)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 아직 아님은 항상 이미 (already)와 균형을 이루고 있는 아직 아님이다.”41) 이러한 주장은 과정(becoming)으로서 의 신이해 즉 신에 대한 비상징적인 이해를 거부하는 것이다. 사실, 신이 과정이라고 말한 다면 역동성과 형식 사이의 균형은 파괴되고 신은 숙명과 절대적인 우연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과정에 종속되게 된다. 그러나 존재는 과정과 균형 속에 있지 않으며 존재는 과정과 정지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즉, 과정은 형식과 균형 관계 속에 있는 존재의 한 요소일 뿐 이다. 그러므로 신이 존재자체라면 그는 정적인 요소와 역동적인 요소 모두를 포함하고 있 는 것이다.

39) 책, 143.

40) Alexander J. Mckelway, The Systematic Theology of Paul Tillich, 125.

41) 폴 틸리히, 유장환역,『폴 틸리히 조직신학』II, 150.

(13)

끝으로, 신의 삶은 자유와 운명의 대극성을 포함하고 있다. 먼저, 성서는 신의 자유를 절 대적으로 긍정하고 있다. 신은 그의 자유 속에서 창조하고 계시하고 구원하고 처벌한다. 신 학적으로 말해서 신은 자존성(aseity)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는 자유롭다. 신의 자유를 조 건 지울 수 있는, 그 보다 앞서 있는 어떤 것도 없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운명이란 용어 가 신의 삶에 적용될 수 있는가이다. 즉, 존재자체에 어떻게 운명이 귀속될 수 있는가? 이 에 대해서 틸리히는 ‘운명을 결정하는 힘’(destiny-determining power)이 신을 초월해 있 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신은 그 자신의 운명이며 신 안에서는 자유와 운명이 하나 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신은 그 자신의 운명이다. 신 안에서는 자 유와 운명이 하나이다.”42) 한편, 여기서 운명을 구조적인 필연성으로 또는 신의 존재를 그 자신의 법으로서 말하는 것이 보다 적절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해 석으로는 중요하지만 이것들은 운명이란 말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요소 즉 존재의 신비함 이나 역사와의 관계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은 그 자신의 운명이라 고 말한다면 우리는 존재의 무한한 신비와 역사에 대한 신의 참여 모두를 지시하고 있는 것 이다.

결국, 신은 존재자체이기 때문에 신의 삶은 모든 존재론적 요소들을 긴장이나 분열의 위 험 없이 완전한 균형 속에서 지니고 있다. 따라서 신은 한 인격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분리 속에 있는 한 인격이 아니라 모든 것에 대한 절대적이며 무조건적인 참여 속에 있는 한 인격이다. 또한 그는 역동적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는 형식과의 긴장 속에서가 아니라 형식과의 절대적이며 무조건적인 일치 속에서 역동적이다. 또한 그는 자유하다고 일컬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임의적이란 뜻에서 자유로운 것이 아니고 그의 운명과의 절대적이며 무조건적인 일치 속에서 자유로운 존재이다.43)

5. 비존재를 극복하시는 하나님(God as Overcoming Nonbeing)

우리는 앞에서 모든 존재들의 물음에 대한 대답인 존재자체로서의 신, 즉 존재의 근거요 존재의 힘이신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는 존재자체인 신이 어떻게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그에 따른 불안을 극복하는지, 즉 존재자체가 어떻게 비존재에 의해 서 위협받고 있는 유한한 인간 존재에게 존재에의 용기의 궁극적인 토대가 될 수 있는지를 살펴볼 차례이다.

1) 창조자 하나님(God as Creator)

틸리히에 따르면, 창조는 “아주 먼 옛날에” 발생했던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창조 는 신과 인간과 세계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설명이다. 말하자면 “창조는 인간의 유 한성과 유한성 일반에 포함되어 있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44) 여기서 신의 창조성은 필연 적인 것도 아니고 우연한 것도 아니다. 신에게 있어서는 어떤 것도 신이 그를 초월해 있는 필연성에 의존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필연적인 것은 있을 수 없다. 또한 창조는 신에게 있어 서 우연히 발생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창조는 신의 삶과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창조 는 신의 자유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운명이다. 신은 그가 신이기 때문에 창조자이고 그

42) 책, 154.

43) cf. 앞의 책, 154-155. 영은 존재론적 요소의 견지에서 어떻게 표현될 수 있으며, 영과 삶은 어떤 관계 속에 있는가? 틸리히는 이 물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영은 존재론적 요소의 통일이며 삶의 목표이다.

삶으로서 실현된 존재 자체는 영으로서 완성된다. 먼저, 영은 신의 삶 안에 있는 존재론적인 요소들의 통일이 다. 간단히 말하면 개체화, 역동성, 자유는 힘을 지시하고 있고 참여, 형식, 운명은 의미를 지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영은 힘과 의미의 통일(the unity of power and meaning)이다.”

44) 앞의 책, 158.

(14)

가 창조자이기 때문에 신이다. 틸리히는 신의 창조성을 신의 기원시키는 창조성(originating creation), 유지시키는 창조성(sustaining creation), 이끄시는 창조성(directing creation)으 로 구별한다.45)

(1)신의 기원시키는 창조성: 기독교의 전통적인 창조론은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 교리이다. 무로부터의 창조는 무엇보다도 신 이전에 또는 신과 나란히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원론에 대한 기독교의 궁극적인 방어이다. 신 이 창조할 때 신과 더불어 어떠한 물질도 힘도 영원히 존재하지 않았다. 신은 무로부터 만 물을 창조했다. 니케아 신조에 따르면 신은 “모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창조주이 다. 이것은 신이 영원한 본질들과 더불어서 함께 존재했다는 플라톤의 학설에 대한 적극적 인 비판이다. 또한 피조물이 무로부터 창조되었다는 것은 비존재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피조물은 비존재 이상의 것이다. 피조물은 자신 안에 존재의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피조물은 비존재의 유산(불안)과 존재의 유산(용기) 양쪽 모두를 포함하고 있 다. 이로써 무로부터의 창조의 교리는 근본적인 두 가지 진리를 주장한다.46) 첫째 진리는 실존의 비극적인 성격이 존재의 창조적인 근거 속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실존 의 비극적인 성격은 사물들의 본질적인 본성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둘째 진리는 피조성 안 에는 비존재의 요소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죽음의 자연적인 필연성과 비극적인 것의 가능성에서 명백하게 엿볼 수 있다.

(2)신의 유지시키는 창조성

틸리히에 따르면, 창조물은 여전히 창조자에 의존하고 있다. 왜냐하면 창조물은 존재자체 의 힘 속에서만 비존재에 저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보존론의 토대이다. 보존의 상 징은 파괴의 위협에 대한 보호의 필연성을 지시할 뿐만 아니라 보존되는 것의 독립된 실존 도 지시한다. 그 결과 세계의 보존의 교리는 이신론적인 개념들이 신학체계 속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통로가 되었다. 세계는 그 자신의 법칙에 따라서 움직이는 독립된 구조로서 간주 되었다. 신은 확실히 세계를 “태초에” 창조하였고, 세계에 자연의 법칙을 주었다. 그러나 신 은 세계의 시작 이후에는 전혀 세계에 간섭하지 않든지(일관된 이신론), 아니면 단지 때때 로만 기적과 계시를 통해서만 간섭하시든지(유신론적인 이신론), 아니면 그는 지속적인 상 호 관계 속에서 행동하신다.(일관된 유신론) 이와 같은 이신론들은 만물을 유지시키는 신 의 창조성에 대해서 부적절하게 말하는 이론들이다. 틸리히에 따르면, 세계의 보존에 대한 바른 이해는 “지속적인 창조”(continuous creation)이다. “보존은 지속적인 창조이며, 이 창 조 속에서 신은 영원으로부터 사물과 시간을 함께 창조하신다.”47) 이것은 이신론적인 사고 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이다. 신은 세계와 나란히 서 있는 한 존재자가 아니고 매순간 만물 에 존재의 힘을 부여하시는 지속적인 창조자이다. “신은 본질적으로 창조적이다. 따라서 신 은 시간적인 실존의 모든 순간에 창조적이며, 신적인 삶의 창조적인 근거로부터 존재를 가 지고 있는 모든 것에게 존재의 힘을 부여하신다.”48) 이와 같은 유지시키는 창조성은 실재의 주어져 있는 구조, 변화 속에도 지속하고 있는 것, 사물 속에 있는 규칙적이며 계산할 수 있는 것을 지시한다. 정적인 요소가 없다면 유한한 존재는 자신을 그 자신과 동일시할 수 없고 어떤 것을 어떤 것으로서 동일시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신의 유지시키는 창조성에

45) 책, 161-190.

46) 앞의 책, 162.

47) 앞의 책, 176.

48) 앞의 책.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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