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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폴 틸리히의 기독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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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폴 틸리히의 기독론

I. 들어가는 말

기독교 신학의 모든 주제의 결정적 기초와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다. 왜냐 하면 신학적인 성찰은 그것이 어떤 주제에 관한 것이든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에 중 심을 두지 않으면 기독교적인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1) 따라서 한 신학자에 대한 평가 는 과연 그의 신학이 얼마나 신학의 결정적인 기초인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충실 한가에 달려있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참된 신학은 항상 신학의 기초에 대한 충실성 (identity)과 동시에 시대적인 물음에 대한 적합성(relevance)이라는 이중적인 표지를 요구 한다. 왜냐하면 신학이 신에 관한 학문이기에 우리는 신에 관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충 실히 신을 진술해야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신학적인 진술이 시대적인 물음에 대한 적합한 대답이 되지 않는다면 그 진술은 힘과 의미를 상실하기 때문이다.2) 이런 점에서 볼 때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기독론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구원의 궁극적인 기준으로 삼고 있 으면서도 동시에 전통적인 용어를 현대적인 언어로 끊임없이 재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상적인 신학의 모형이라고 생각된다.3) 특히, 폴 틸리히의 기독론은 현대신학의 기독론이 반 드시 다루어야만 하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에 대해서 균형있는 해결책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의 기독론에 대한 평가는 시사적인 의의가 크다고 판단된다 : 첫째, 초대교회의 기독론적 인 신앙고백(니케아신조, 칼케돈신조)을 어떻게 재해석할 것인가. 둘째, 기독론에 어느 정도 역사비평적 방법론을 적용할 것인가. 셋째, 기독론의 다양성을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가.

넷째, 현대 기독론은 특정성의 걸림돌을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가.4) 이제까지 틸리히의 기독론 연구는 상당부분 틸리히 자신의 신학적인 관점과 방법론을 존중하지 않은 채 상이한

1) cf. Timothy F. Lull, ed., Martin Luther's Basic Theological Writings (Minneapolis : Fortress Press, 2005), 57. 규범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두려는 시도는 루터신학에 명백히 나타나 있다.(하이델베르크 논제20)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안에 참된 신학과 하나님 인식이 있다.”

2) cf. J. 몰트만, 김균진역,『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서울 : 한국신학연구소, 1980), 13. 몰트만도 현대신학과 교회에 있어서의 정체성과 관계성의 문제를 중요시했다. “신학, 교회 그리고 인간의 기독교적 실존은 오늘날 과거보다 더 심각한 이중의 위기에 처하여 있다. 곧 관계성의 위기와 동일성의 위기에 처하여 있다. 이 두 가 지 위기는 서로 보충하면서 연관되어 있다. 신학과 교회가 현대의 제반 문제들에 대한 어떤 관계성을 가지려 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들은 그들 고유의 기독교적 동일성을 상실할 위기에 빠진다. 그 반면 신학과 교회가 전 통적 교리, 예배의식 그리고 도덕적 표상 하에 자기의 동일성을 주장하면 주장할수록 그들은 더욱더 현실과 무관하게 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되어 버린다.”

3) cf. 폴 틸리히, 유장환역,『폴 틸리히 조직신학』I (서울 : 한들출판사, 2001), 13. 틸리히의 신학이 신학의 기 초에 대한 충실성과 시대적인 물음에 대한 적합성 양쪽 모두를 충족시키고 있다는 것은 틸리히의 신학개념의 정의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신학은 교회의 한 기능으로서 교회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봉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곧 모든 신학체계는 다음과 같은 교회의 두 가지 기본적인 요구사항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기독교의 메시지의 진리를 진술하는 일과 이 진리를 모든 새로운 세대를 위해서 해석하는 일.”

4) 다니엘 L 밀리오리, 장경철역,『기독교 조직신학개론』(서울 : 한국장로교출판사, 1994), 208-211.

(2)

신학적 관점에서 그의 기독론을 분석하다보니 그의 기독론이 지니고 있는 본래적인 가치와 의의가 저평가 되어왔다. 예를 들어, 우리는 틸리히의 기독론이 지니고 있는 신학사적인 의 의, 즉 전통주의 기독론(초자연주의 신학)의 문제점과 자유주의 기독론(자연주의 신학)의 문 제점을 극복한 신학적인 대안으로서의 가치를 주목하지 못했었다.5) 이런 점에서 본 연구자 는 틸리히의 기독론의 핵심 텍스트인『조직신학』III(한들출판사, 2005)을 집중적으로 분석 한 후에 그의 기독론이 지니고 있는 실존론적인, 존재론적인, 포괄주의적인, 주-객 통일적인 의의들을 해명하고자 한다.

II. 본론

먼저, 틸리히는 그의 기독론을 그의 신학방법론인 상관관계의 방법(the method of correlation)에 따라서 구성한다. 상관관계방법이란 물음과 대답의 상호의존을 통해서 신학 의 주제를 설명하는 방법이다. “상관관계의 방법은 물음과 대답, 상황과 메시지, 인간의 실 존과 신의 현현을 상관시키려는 방법이다.”6) 여기서 “correlation”은 실존적인 물음과 신학 적인 대답이 내용적으로는 서로 독립되어 있지만 동시에 형식적으로는 서로 의존하고 있다 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물음의 내용은 실존적인 곤경에서 온 것이고 대답의 내용은 계시적인 경험에서 온 것이기에 상호간에 독립적이지만 동시에 물음은 대답의 형식 속에서 제기되고 대답은 물음의 형식 속에서 받아들여지고 있기에 물음과 대답은 형식적으로는 상 호간에 의존성 속에 있다. 틸리히는 이러한 상관관계의 방법에 따라서 물음과 대답을 서로 구별하면서도 상호 연관시켜 신학의 주제를 설명한다. 이것은 기독론에 있어서도 명백하다.

기독론에 있어서 물음은 “실존적인 소외”이고 대답은 “새로운 존재로서의 그리스도”이다.

여기서 실존은 신학적인 대답인 그리스도의 분석에 의해서 유추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는 실존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 아니다. 실존과 그리스도는 내용적으로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 다. 하지만 틸리히는 실존과 그리스도를 상호 연관시켜 진술함으로써 그리스도라는 대답을 찾지 않을 수 없는 인간 실존의 보편적인 상황을 해명해주고 동시에 실존의 물음을 극복하 는 대답 속에서 그리스도의 의미를 명료하게 제시해 준다.

이와 같은 틸리히의 상관관계방법은 신학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의를 지닌다고 생각된다.

첫째, 틸리히의 신학방법은 실존론적 신학이 기본적으로 신에 대해서 말할 때 신자체가 아 니라 우리와의 관계 속에 있는 신을 말하는 신학이라는 점에서 실존론적 신학의 근본 특징 을 잘 보여 주고 있다.7) 틸리히는 항상 그리스도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실존과의 관계 속 에서 그리스도의 의미를 진술한다는 점에서 그의 신학방법은 실존론적인 신학방법이다.

“『조직신학』제2권은 인간의 실존적인 자기 소외와 이런 상황 속에 포함되어 있는 물음들 을 분석하고 이에 대한 대답이 그리스도임을 제시하려고 한다. 따라서 이 부분은 “실존과 그리스도”(Existence and Christ)로 일컬어지고 있다.”8) 둘째, 틸리히의 신학방법은 위로부 터의 방법도 아니고 아래로부터의 방법도 아니고 위와 아래 사이를 중재한 “사

5) ,『폴 틸리히 생애와 사상』(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1986), 219. “틸리히 신학이 위대한 것은 정통주의 적 초자연주의와 19세기 자유주의신학을 극복하고 인간 실존상황과 기독교 진리의 메시지 그 둘 중 어느 것 하나를 버리거나 약화시킴이 없이 그의 신학적 과제를 성취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6) 폴 틸리히, 유장환역,『폴 틸리히 조직신학』I (2001), 21.

7) cf. 목창균,『현대신학논쟁』(서울 : 두란노, 1995), 184. 실존론적 신학의 특징은 불트만의 실존론적 성서해 석에 잘 나타나 있다. “실존론적 성서해석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과거의 역사적 사실보다는 오히 려 그 사건이 오늘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그 사건의 교리적 내용보다는 오히려 인간 실존과의 관계성을 문제시하는 것이다.”

8) 폴 틸리히, 유장환역,『폴 틸리히 조직신학』I (2001),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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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between)의 신학방법이다.9) 말하자면, 상관관계의 방법은 인간의 물음에서 대답을 이 끌어 온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아래로부터의 신학방법의 문제점과 신학적 대답에서 물음 을 유추해 온 20세기 정통주의 신학의 위로부터의 신학방법의 문제점을 극복한 제3의 신학 방법으로서 의의가 있다. 혹자는 틸리히 신학을 아래로부터의 신학으로 단정지어 19세기 자 유주의신학의 연장으로 규정짓고 있으나 틸리히의 신학이 물음에서부터 시작한 것은 그리스 도가 인간 실존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기에 그리스도가 대답하는 물음을 먼저 분석하기 위해 서 물음으로부터 출발한 것뿐이다. 틸리히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의 역사이지 결 코 실존에서 온 존재가 아니다.10)

틸리히는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의 실존적인 소외의 물음에서 시작해서 신학적인 대답의 궁 극적인 규범인 그리스도 예수에 나타난 새로운 존재의 묘사로 나아간다.

1. 물음

우리는 왜 그리스도를 찾는가?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없이는 해결될 수 없는 물음 속에 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없이는 해결될 수 없는 물음은 무엇인가?

틸리히에 따르면, 이 물음의 근원은 우리가 실존한다는 것이다. 즉, 실존이 물음 그 자체이 다.

1) 실존

먼저, “실존”(existence)이란 말은 상당히 모호한 말이기에 어원학적인 분석을 통해서 그 의미를 정의할 필요가 있다. 어원적으로 볼 때 실존이란 말은 라틴어 existere에서 온 말로 서 existere(to exist)는 “밖에 서있다”(stand out)는 것을 의미한다. 즉각적으로 우리는 다 음과 같이 묻게 된다. 무엇의 밖에 서 있는가? 이에 대한 일반적인 대답은 우리는 비존재 (non-being 없음, 무) 밖에 서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물이 실존한다’는 것은 사물이 존재를 가지고 있다는 것, 즉 사물이 비존재(없음) 밖에 서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실존이란 “비존재 밖에 서 있음(standing out of non-being)”11)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 서 비존재는 헬라철학자들의 이해처럼 절대적인 비존재인 욱크 온(ouk on)과 상대적인 비 존재인 메온(me on)으로 구별될 수 있기에 실존한다는 것, 즉 밖에 서 있다는 것은 절대적 인 비존재와 상대적인 비존재 밖에 서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12) 먼저, 실존은 절대적인 비 존재의 텅 비어있음 밖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밖에 서다”라는 은유는 논리적으로 볼 때 “안에 서 있다”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고 어떤 점에서는 안에 서 있는 것만이 밖에 서 있을 수 있기에 실존한다는 것은 여전히 절대적인 비존재 안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절대적인 비존재 밖에 있다는 것, 말하자면 존재와 비존재가 하나로 통일되어 있는 존재, 곧 없지 않 고 있지만 그 있음은 여전히 없음에 의해서 위협받고 있는 존재의 유한성(finitude)을 의미 한다. 다음으로, 우리가 어떤 것이 실존한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단순한 잠재성의 상 태를 떠나서 현실적인 것이 되었다는 것, 즉 상대적인 비존재 밖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예

9) cf. Anne Marie Reijnen, “Tillich's Christology” in The Cambridge Companion to Paul Tillich, ed.

Russel Re Manning(Cambridge :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8), 68. “ 위로부터의 기독론과 아 래로부터의 기독론이라는 일반적인 대립이외에 제3의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즉, 틸리히는 위와 아래 “사 이”(between)의 기독론이다.”

10) 폴 틸리히, 유장환역,『폴 틸리히 조직신학』III (서울 : 한들출판사, 2005), 185. ; 홀스트 G 푈만,『교의 학』(서울 : 한국신학연구소, 1994), 270. “전형적인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은 틸리히와 판넨베르크의 그리스도 론이다. 틸리히의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은 인간의 상황과 접촉하는 그의 상관관계의 신학의 귀결이다.”

11) 앞의 책, 39.

12) 앞의 책, 37-38.

(4)

를 들어, 어떤 것이 현실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상대적인 비존재, 즉 메온의 상태를 극복 해야만 한다. 그러나 또다시 이것 또한 완전히 상대적인 비존재의 상태 밖에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상대적인 비존재 밖에 있으면서 동시에 안에 있어야만 한다. 이 경우 실존한다는 것 은 잠재적인 비존재 밖에 있지만 여전히 잠재적인 비존재의 저항 속에서 잠재적인 비존재와 하나를 이루고 있는 존재, 곧 잠재성을 실현하면서도 여전히 잠재성에 속해 있는 존재의 현 실성(actuality)을 의미한다. 결국, 실존은 비존재 밖에 나와 있는 유한한 현실적인 존재를 의미하는 데 비존재 밖에 나와 있는 현실 존재는 끊임없이 비존재의 위협 속에 있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이 비존재의 위협을 극복하는 것이 실존의 근본적인 문제이다.

한편, 잠재적인 존재와 현실적인 존재 사이의 분열(split)은 실존주의와 본질주의 사이의 대립의 역사를 초래했다. 고대철학자 플라톤에 따르면 실존은 단지 억견, 실수, 악의 영역이 고 참된 존재는 영원한 이데아들의 영역 속에 즉 본질들 속에 존재한다. 인간은 본질적인 영역으로부터 실존으로 떨어져 있기에 이 실존으로부터 본질적인 영역으로 되돌아가야만 한 다. 이런 식으로 플라톤은 실존을 본질로부터의 타락으로 해석했다. 반면에 고전적인 본질 주의자 헤겔에 따르면 세계사는 신의 자기실현의 과정으로서 본질이 자신을 실존 속에 실현 할 때 여기에는 어떠한 분열도, 어떠한 궁극적인 불확실성도, 어떠한 자기 상실의 위험도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성적이다. 따라서 실존은 본질로부터의 타락이 아니라 본질의 실현이다. 이와 같은 헤겔의 본질주의에 저항하기 위해서 등장한 것이 현대의 실존주의이 다.13) 현대 실존주의자들의 공통된 주장은 그의 본질적인 본성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소외 의 상태가 인간의 실존적인 상황이라는 것이다. 헤겔은 이러한 소외를 잘 알고 있었지만 그 는 이 소외는 극복되어져 있으며 인간은 그의 참된 존재와 화해되어있다고 생각했다. 하지 만 모든 실존주의자들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헤겔의 근본적인 잘못이다. “화해는 예기와 기대의 문제이지 현실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는 개인에게 있어서도(키에르케고르가 보여주 고 있듯이), 사회에 있어서도(맑스가 보여주고 있듯이), 삶 자체에 있어서도(쇼펜하우어와 니체가 보여주고 있듯이) 화해되어 있지 않다. 실존은 소외이지 화해가 아니다. 실존은 비인 간화이지 본질적인 인간성의 표현이 아니다.”14) 이처럼 인간의 실제적인 상황은 실존주의자 들이 올바르게 지적했듯이 그의 본질적인 본성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소외의 상태이다. 화 해, 참된 인간성, 평화는 인간의 본질 상태에 속하는 것이지 인간의 실존상태가 아니다. 인 간의 실존상태는 소외와 비인간화와 갈등이다.

2) 타락

실존이 비존재에 의해서 위협받고 있는 유한한 현실존재요 본질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소외 의 상태라면 인간은 어떻게 본질에서 실존 속으로 ‘타락’하게 되었는가? 이와 관련하여 기 독교는 일반적으로 타락을 언급할 때 창세기의 “아담의 타락”이야기만을 언급한다. 틸리히 에 따르면 이것은 부분적으로만 옳다. 왜냐하면 타락은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상징

13) cf. ,『서양철학사의 이해』(서울 : 철학과 현실사, 2000), 342-343. “샤르트르에 의하면 실존은 다음 두 가지 특성을 갖는다. 하나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은 본질에 의해서 한정되는 존 재가 아니고 자유로운 존재이고 가능성이 있는 존재이며 자기의 본질을 만들어 가는 존재임을 뜻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실존은 주체성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실존은 자기가 지신의 주인임을 뜻한다.”

14) 폴 틸리히, 유장환역,『폴 틸리히 조직신학』III (2005), 44. 틸리히에 따르면 실존주의의 공로는 “옛 시대”, 즉 소외의 상태 속에 있는 인간과 인간의 세계의 곤경을 탁월하게 분석해 주었고 그 결과 인간 실존에 대한 기독교의 전통적인 해석을 재발견하는데 크게 도움을 주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실존주의는 기독교의 동 맹군이이다.

(5)

(symbol)이기 때문이다. “신학은 타락을 ‘아주 먼 옛날에’ 일어났던 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 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인 상황에 대한 상징으로서 분명하고도 모호하지 않게 설명해 야만 한다.”15) 사실, 인간은 보편적으로 본질(하나님과의 연합의 상태)로부터 분리된 실존의 상태 속에 존재한다. 성서의 타락이야기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따라서 우 리는 창세기의 타락이야기를 역사적으로나 문자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며, 본질의 상태에 서 실존의 상태로, 즉 영원에서 시간으로 전이된 인간의 보편적인 상황을 나타내주는 상징 적 계시로 이해해야만 한다. 이런 맥락에서 틸리히는 타락을 “본질로부터 실존으로의 전 이”(transition from essence to existence)로 해석한다. 여기서 본질로부터 실존으로의

“전이”란 두 가지의 것을 의미한다.16) 먼저, 본질로부터 실존으로의 전이는 원사실(original fact-原事實)을 뜻한다. 본질로부터 실존으로의 전이는 시간적인 의미에서의 최초의 사실도 아니고, 다른 사실들 곁에 또는 이전에 있는 하나의 사실도 아니다. 오히려 이 전이는 과거 와 현재와 미래의 시간과 공간이 그 위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시간과 공간 안에서 발생한 모 든 것을 존재론적으로 선행하고 있는 초역사적인-기원적인 사실이다. 다음으로, 본질로부터 실존으로의 전이는 원사실에 대한 상징으로서 영원에서 시간으로의 비합리적인 도약의 성격 을 지니고 있는 것이지 본질에서 유추될 수 있는 논리적인 필연의 성격을 지니고 있지 않 다. 말하자면, 본질에서 실존으로의 전이는 하나의 사실, 즉 말해져야만 하는 이야기이지 변 증법적으로 유추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 “신학은 본질로부터 실존으로의 비약은 원사실 이라는 것과 이 원사실은 구조적인 필연성이 아니라 비약(leap)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 을 주장해야만 한다. 실존이란 그의 비극적인 보편성에도 불구하고 본질로부터 유추될 수 없는 것이다.”17)

그렇다면 본질에서 실존으로의 전이 즉 타락은 어떻게 발생한 것인가? 틸리히에 따르면, 인간의 타락은 창세기에 제시되 바 있는 것처럼 그의 자유 때문에 발생했다.18) 인간은 그의 자유로 인해서 그 자신이나 그의 본질적인 본성과 모순될 수 있다. 여기서 인간의 자유는 완전한 자유가 아니고 유한한 자유(finite freedom)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유는 운명에 의 해서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한한 자유를 지닌 인간은 본래 ‘몽상적인 순진무 구’(dreaming innocence)의 상태 속에 존재한다. ‘몽상적인 순진무구’의 상태는 아직 실현 되지 않은 잠재성의 상태를 지시하는 용어로서 현실이전, 역사이전, 실존이전의 상태를 의 미한다. 하지만 이 상태는 완전의 상태는 아니다. 이 상태에서는 유혹이 가능할 뿐만 아니 라 그것을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몽상적인 순진무구의 상태는 미경쟁의, 미결단의 상태이 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순진무구의 상태 속에서 자신의 유한한 자유를 자각한 순간 그 의 자유를 실현하고자하는 욕망과 그의 몽상적인 순진무구를 보존하고자 하는 요구 사이에 서 이중의 불안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리고 인간은 그의 유한한 자유의 힘 속에서 실현을 결단함으로써 본질의 상태에서 실존의 상태로 옮겨지게 된다.19) 이와 같은 틸리히의 타락의

15) 책, 50-51. 틸리히에 따르면, 본질로부터 실존으로의 전이는 타락의 신화의 반탈신화화(half-way demythologization)이다. 여기서 ‘아주 먼 옛날’의 요소는 제거된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탈신화화가 아니 다. 왜냐하면 본질로부터 실존으로의 전이는 여전히 시간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16) 앞의 책, 51-62.

17) 앞의 책, 73.

18) 앞의 책, 53-60.

19) cf. 앞의 책, 60-61. 틸리히에 따르면, 우리는 이와 똑같은 분석을 내적으로부터도 즉 유한한 자유에 대한 인간의 불안한 의식으로부터도 수행할 수 있다. “인간이 그의 자유를 의식하는 순간에 그의 불안스러운 상태 의 자각이 그를 사로잡는다. 그는 이중의 위협을 경험한다. 즉, 그는 그의 유한한 자유 속에 뿌리박혀 있는 위 협과 불안을 통해서 표현되는 위협을 경험한다. 인간은 자신과 자신의 잠재성들을 실현하지 않음으로써 자신

(6)

이해는 다음과 같은 신학적인 특징을 지닌다. 첫째, 타락은 개인의 자유의 행위의 사건이면 서 동시에 보편적인 운명의 행위의 사건이다. 말하자면, 인간 실존은 윤리적인 자유와 비극 적인 운명 모두에 뿌리박혀 있기 때문에 타락은 개인이 책임져야만 하는 사건이면서 동시에 온 우주가 참여하고 있는 비극적인 보편적인 사건이다. “기독교는 소외의 비극적인 보편성 을 인정하는 동시에 소외의 비극적인 보편성에 대한 인간의 인격적인 책임성을 인정해야만 한다.”20) 둘째, 창조와 타락은 동일한 사건이다. 이에 대해 니버(R. Niebuhr)는 틸리히의 주장은 죄를 인격적인 책임이나 범죄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인 필연으로 만든 것이 아닌 가라고 의문을 제기한다. “인간의 죄성은 존재론적인 숙명이다. 인간은 이 숙명을 모든 시 간적인 실존과 함께하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실존은 그것이 현실적인 것이 될 때 신적인 근거로부터 분리되기 때문이다.”21), “틸리히의 명제에 따르면, 죄는 인간의 자유의 실현으 로 말미암은 신과 인간 사이의 본질적인 통일성의 분열이다. 즉, 죄는 분리이다. 죄는 존재 론적인 숙명 곧 모든 특수한 시간적인 실존의 숙명이다.”22) 하지만 틸리히에 따르면, 피조 된 선이 실현되어 실존을 가졌던 지점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는 어느 곳에도 있을 수 없는 한, 실현된 창조와 소외된 실존은 동일한 것이다. 말하자면, 창조는 그 본질적인 성격에 있 어서는 선한 것이지만 만일 창조가 실현된다면 그것은 자유와 운명을 통해서 보편적인 소외 속으로 떨어지게 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신생아를 창조한다면 그가 창조한 신생아는 실 존적인 소외의 상태에 떨어지게 된다. 이 지점이 창조와 타락이 일치하는 곳이다.

3) 죄

타락이 본질로부터 실존으로의 전이라면 이 전이의 결과는 무엇인가? 틸리히에 따르면, 타 락의 결과는 비극적인 실존적인 소외이다. “실존의 상태는 소외의 상태이다. 인간은 그의 존재의 근거로부터, 다른 존재자들로부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본질로부터 실존으 로의 전이의 결과는 개인적인 죄책과 보편적인 비극이다.”23) 이런 맥락에서 틸리히는 죄를 하나님으로부터의 인간의 분리 즉 소외(estrangement)로 해석한다. 말하자면, 인간은 본질 의 상태에서는 하나님과의 연합(또는 하나님과의 통일성)의 상태 속에 있었지만 타락으로 인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소외의 상태 속에 있게 된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의 에덴동 산에서의 추방에 잘 예시되어 있다. 물론, “소외”라는 용어는 “죄”(sin)라는 용어를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죄라는 용어는 “소외”라는 용어에는 내포되어 있지 않은 것, 즉 자신이 속해 있는 것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인격적인 행위를 나타내 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외의 개념은 죄의 본질을 잘 나타내 주는 용어이다. 왜냐하면 죄란 근본적으로 도 덕적인 위반이 아니라 우리가 속해 있는 것 즉 하나님, 자기 자신, 자신의 세계로부터 소외 되어 있는 소외의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상실하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자신과 자신의 잠재성들을 실현함으로써 자신을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경험한다. 그는 존재의 현실성을 경험하는 것 없이 자신의 몽상적인 순진무구를 보존할 것인가 아니면 지식, 힘, 죄책을 통해서 자신의 순진무구를 상실할 것인가 사이에 서게 된다. 이런 상황의 불안이 유혹의 상태이다.

인간은 자기-실현을 결단하는데 이로써 몽상적인 순진무구는 끝나게 된다.”

20) 앞의 책, 66.

21) Chales W. Kegley and Robert W. Bretall, eds., The Theology of Paul Tillich (New York : The Macmillan Company, 1959), 220.

22) 앞의 책, 222. 이에 대해 틸리히는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타락의 보편성과 불가피성은 존재론적인 사변에 서 유추된 것이 아니고 인간과 그의 마음과 그의 역사에 대한 현실주의적인 관찰에서 유추된 것이다. 보편적 죄성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를 가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책임져야만 하는 어떤 것 그리고 동시에 타락을 불가 피하게 만드는 어떤 것이 유한한 자유 속에 있다는 것을 지시한다.”

23) 폴 틸리히, 유장환역,『폴 틸리히 조직신학』III (2005), 74.

(7)

틸리히는 인간의 소외된 실존의 모습을 세 가지 표지로 묘사한다 :불신앙(unbelief), 교만 (hubris), 욕망(concupiscence).24) 먼저, “불신앙”은 교회의 교리들을 믿으려 하지 않는 것 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그의 전 존재로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행위, 즉 자신 의 중심을 신적인 중심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릴 때 그 결과 인간은 그의 존재와의 본질적인 통일성을 상실하게 되어 하나님과의 인식적인 연합이 파괴되고(하나님 존재 부인), 하나님의 의지로부터 인간의 의지가 분리되고(불순종), 신적인 생명으로부터 분리된 생명이 신적인 생명의 축복으로부터 분리된 생명의 쾌락으로 나아가게 된다(자기사랑). 다음으로, “교만”은 인간의 도덕적인 특성을 지시하는 용어가 아 니고, 신의 영역으로의 인간의 자기-높임(self-elevation), 즉 자신을 자신과 그의 세계의 중심으로 만드는 것을 뜻한다. 말하자면, 소외된 인간은 자기초월의 능력에 의해서 자신과 세계의 중심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 인간은 그의 자기초월의 능력이 유한하다는 것을 무시 하고 무한한 것으로 드높일 때 인간은 휘브리스에 떨어지게 된다. 휘브리스의 주된 징후는 인간이 그의 유한성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끝으로, “욕망”은 실재 전체를 자신 의 자아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무제한적인 욕구(unlimited desire)을 의미한다. 이 욕망으로 서의 죄는 자주 성적인 쾌락에 대한 갈망으로만 축소되어 왔지만 이것은 인간의 관계의 모 든 측면들 예를 들어 신체적인 궁핍과 성, 지식과 권력, 물질적인 부와 정신적인 가치 모두 에 해당되는 것이다. 여기서 권력이나 성이나 지식 그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권력과 성과 권력을 향한 갈망이 지니고 있는 무제한적인 성격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모 든 것을 자기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무한한 욕구(욕망으로서의 리비도)와 특정한 대상과의 재결합을 갈망하는 욕구(사랑으로서의 리비도) 사이를 구별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 한 일이 아닐 수 없다.

4) 악

죄가 소외라면 소외의 결과는 무엇인가? 틸리히에 따르면, 인간의 실존적인 소외는 그의 본질적 존재와 모순되는 것으로서 이 모순은 자기-파괴를 가져오는데 이 자기-파괴의 구조 가 바로 “악”이다. 말하자면, 죄는 소외이고, 이 소외는 소외의 구조를 지니게 되는데 악은 이 소외의 구조가 “파괴의 구조”(structure of destruction)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25) 이런 점에서 볼 때 실존적인 소외 속에서 겪는 파괴는 특별한 신적인 간섭이나 마성적인 간 섭의 역사가 아니고, 소외의 구조 그 자체의 결과이다. 틸리히에 따르면, 자기-파괴의 구조 로서의 악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근본적인 표지들로 나타난다.26) 먼저, 존재론의 기본구조 인 자아-세계의 대극성의 구조는 실존적인 소외 속에서는 자기-파괴의 근본적인 구조로 변 형된다. 말하자면, 소외 속에서는 자아는 세계로부터 그리고 세계는 자아로부터 분리되어 그 결과 자아상실과 세계상실이 초래된다. 이것은 존재론의 기본구조(자아-세계)를 형성하 고 있는 구성요소들(개체화와 참여, 형식과 역동성, 자유와 운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24) 책, 74-90.

25) 앞의 책, 96-97. 틸리히에 따르면, 죄는 존재의 분리이고 악은 존재의 파괴이기 때문에 악은 죄의 결과이다.

26) 앞의 책, 96-117. 틸리히에 따르면, 존재의 기본 구조는 자아와 세계의 대극 관계(the self-world polarity) 이고, 이 기본 구조는 개체화와 참여, 역동성과 형식, 자유와 운명이라는 ‘존재의 요소’(ontological element) 에 의해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세 요소들은 존재론의 다른 개념들처럼 대극적인 관계 속에 있으면서 각각 존 재의 기본 구조인 자아와 세계를 전제하고 있다고 본다. 곧 각각의 요소에서 전자(개체화, 역동성, 자유)는 존 재의 기본 구조의 자아의 측면을 전제하고 있으며, 반면에 후자(참여, 형식, 운명)는 세계의 측면을 전제하고 있다.

(8)

존재론의 각각의 구성요소들은 본질의 상태에서는 서로 구별되지만 분리되지 않고 상호의존 성 속에서 통일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실존적인 소외 속에서는 서로로부터 분리되어 서로 를 상실케 만들고 그 결과 대극성 자체를 파괴시킨다. 예를 들어, 자유와 운명은 본질의 상 태에서는 서로 안에 내재하지만, 실존 속에서는 자유는 운명으로부터 분리되어 운명없는 자 의가 되고 운명은 자유로부터 분리되어 자유없는 기계적인 필연성이 되고 만다. 그 결과 존 재는 무의미한 존재가 되든지 아니면 부자유한 존재가 되어 스스로 파괴된다.27) 다음으로, 유한성의 구조는 실존적인 소외 속에서는 자기-파괴의 구조로 변형된다. 사실, 인간은 본질 의 상태에서는 존재자체의 힘 속에서 비존재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유한성은 자연스러운 것 이지만, 존재의 궁극적인 힘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실존의 상태 속에서는 유한성은 비존재 (죽음)를 악의 화신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것은 유한성의 주요 범주인 시간, 공간, 인과성, 실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본질의 상태 속의 범주들은 존재에의 용기로 비존재를 받아 들이고 있기에 존재와 비존재가 명백하게 통일되어 있지만 존재의 궁극적인 힘에 대한 관계 를 상실한 소외의 상태에서는 범주들이 실존을 지배함으로 인해서 이에 대한 이중의 반발 즉 저항과 절망이 초래된다. 예를 들어, 시간이 존재 자체의 힘의 현존을 통한 “영원한 지 금”(eternal now)없이 경험될 때, 시간은 현실적인 현재가 없는 단순한 무상함으로서 경험 된다. 여기서 무상함은 시간이 창조했던 것을 파괴하는 마성적인 파괴의 구조로 변형된다.

이에 대해 인간은 영원한 시간을 구축하려고 시도하지만 그 모든 시도는 실패하게 되고 좌 절과 절망으로 끝나고 만다. 인간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명백하다. 인간은 존재자체 의 힘이 없다면 유한성 속에 있는 비존재의 요소에 저항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소외의 결과들은 고난과 고독과 의심과 무의미와 관련해서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고난과 고독은 본질에 있어서는 유한성의 한 요소이지만 실존 속에서는 존재의 근거와 단절 됨으로써 파괴의 구조 곧 악으로 변형된다. 예를 들어, 본질적인 유한성에 있어서 고독은 인간의 완전한 중심성의 표현으로서 홀로있음(solitudo)으로 일컬어지지만 소외 속의 인간 은 궁극적인 차원으로부터 단절되어서 고독한 존재(aloneness)가 되는데 이 고독한 존재는 자신의 고독을 견딜 수 없음으로 인해서 자기-파괴로 나아가든지 아니면 자신을 거절한 타 자에 대한 적대감으로 타자-파괴로 나아간다. 또한 본질의 상태에서는 불안전성과 불확실성 이 영원한 것의 차원의 힘 속에서 받아들여져 있지만, 실존 속에서는 불안과 의심은 절대적 이 것이 되어서 불안은 존재의 가능성에 대한 절망으로 나아가고 의심은 모든 유한한 진리 를 거부하는 절망으로 나아간다. 결국, 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유한성의 구조는 소외의 조 건들 속에서는 악 즉 파괴의 구조로 변형되고 만다.28)

이제까지의 논의를 요약하면, 인간은 본질적으로는 존재의 근거와 연합되어 있는 존재이 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적인 상태이다. 이 본질적인 인간이 자신의 유한한 자유를 실현하는 가운데 본질로부터 실존으로의 전이 즉 신적인 생명과의 연합으로부터 분리되는 소외가 발 생한다. 인간은 실존적인 소외 속에서 존재의 근거로부터,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소외된다. 소외의 결과는 자기-파괴의 구조 곧 악이다. 즉, 존재론적 대극구조

27) 역동성은 형식으로부터 분리되어 자기초월을 향한 무형식의 충동이 되고 형식은 역동성으로부터 분리되어 외적인 법이 된다. 그리고 개체화는 참여로부터 분리되어 고독이 되고 참여는 개체화로부터 분리되 어 집단으로 침잠케 만든다. 결국 소외의 자기파괴구조는 자아-세계의 상호의존성을 파괴하여 인간의 대상화 와 비인간화를 초래한다.

28) 앞의 책, 124. 틸리히에 따르면, 파괴의 구조들이 실존의 유일한 표지는 아니다. 파괴의 구조들은 소외된 것 의 치유와 재연합의 구조들에 의해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인간은 결코 존재의 근거로부터 단절되어 않지 않 다. 심지어 저주의 상태 속에서도 인간은 존재의 근거로부터 단절되어 있지 않다.”

(9)

와 유한성의 구조는 소외 속에서 인간의 존재를 분열시키고 파괴하는 악의 화신으로 변형된 다. 그 결과 인간은 이에 대해 저항하지만 그 모든 시도는 실패하게 될 수밖에 없어 좌절과 절망 속에서 죽음으로 내몰린다.

죄가 존재의 근거로부터의 소외이고 그 결과는 죽음이라면, 구원은 소외와 죽음의 극복이 다. 그것은 존재의 근거와의 재연합이요 화해이다. 여기서 질문이 제기된다. 화해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5) 새로운 존재에 대한 요청

인간이 그의 행위를 통해서 실존적인 소외를 극복하고 하나님과의 재결합을 이루겠다는 것은 명백한 불가능성이다. 인간은 그의 존재자체가 실존적인 소외 속에 있기 때문에 인간 은 그의 힘으로는 하나님과의 재결합을 성취할 수 없다. 틸리히는 이 문제를 간결하게 표현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인간은 하나님 없이는 아무 것도 행할 수 없다. 그는 행 하기 위해서는 받지 않으면 안 된다. 새로운 존재가 새로운 행위에 선행한다. 나무가 열매 를 맺는 것이지 열매가 나무를 맺는 것은 아니다. …자녀처럼 행동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 저 자녀됨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즉, 하나님과의 결합이 재확립되어야만 한다. 오직 새로운 존재만이 새로운 행위를 낳을 수 있다.”29) 이처럼 틸리히는 ‘새로운 존재가 새로운 행위에 선행한다’(new being precedes new acting)는 신학적인 원리를 강조한다. 이것은 틸리히 가 20세기의 변증법적 신학자들과 동일하게 구원이 하나님의 주도적인 은총의 행위의 결과 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한편, 인류역사는 끊임없이 다양한 형태의 자기-구원의 방법들(율법주의적, 금욕적, 신비 적, 성례론적, 교리적, 감정적 방법들)을 사용하여 하나님과의 재결합을 시도하였다. 인간은 이 모든 자기-구원의 방법들을 시도했지만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예를 들어, 금욕주의는 자기억제나 자기 훈련의 수단으로서는 사용 되도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자기금욕의 행위들 을 통해서 무한자와의 재결합을 강제로 구현하는 자기구원의 방법이 될 때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존재자체가 실존적인 소외 속에 있기 때문에 그의 행위로는 소 외를 극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30)

결국, 인간은 그 스스로는 소외를 극복할 수 없음으로 인해서 실존적인 소외를 극복한 새 로운 존재(New Being)를 찾고 요청하게 된다. 이 요청은 보편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 의 실존적인 곤경은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새로운 존재에 대한 요청은 모든 종교 속 에서 엿 볼 수 있는데, 새로운 존재가 역사를 초월하여 추구되고 있는 비역사적인 유형의 종교들(다신론의 종교들, 브라만교, 불교)에서도 엿 볼 수 있고 새로운 존재가 역사의 목표 로서 추구되고 있는 역사적인 유형의 종교들(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서도 엿 볼 수 있 다. 기독교의 진리주장에 따르면, 새로운 존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다. 그리고 기독교의 주장은 보편적으로 타당한 주장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그리스도’의 상징은 역사 적인 성격을 지닌 메시아사상과 인자와 같은 우주적인 상징을 포괄함으로써 새로운 존재의 역사적 의미(역사적 실존의 극복자)와 초역사적인 의미(우주적 악의 세력의 정복자) 모두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29) 책, 126-127.

30) 신비주의의 방법도 마찬가지이다. 신비주의는 신적인 것의 현존의 경험을 특징짓는 범주로서는 종교의 본질 적인 범주이지만 신비주의가 무한자와이 결합을 시도하는 자기구원의 방법이 될 때는 실패한다. 왜냐하면 무 한자와의 재결합은 주어져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구원에 대한 물음은 구원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 에 가능한 것이다. 새로운 존재에 대한 탐구는 새로운 존재의 현존을 전제로 한다.

(10)

틸리히에 따르면, “새로운 존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났다”(the New Being has appeared in Jesus as the Christ)는 주장은 세 가지 오해로부터 해명될 필요가 있다.31) 첫째, 새로운 존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났다는 주장은 비합리적인 것도 아니고, 부 조리한 것도 아니고, 반성적으로 합리적인 것도 아니고, 변증법적으로 합리적인 것도 아니 고, 역설적인 주장이다. “실존의 조건들 아래에서의 새로운 존재의 나타남은 기독교 메시지 의 역설이다. 이것은 오직 역설이며 기독교의 모든 역설적인 명제들의 원천이다.”32) 여기서 역설적이라는 것은 경험적인 것과 합리적인 것을 포함하여 인간의 일반적인 경험 전체에 근 거하고 있는 억측(doxa)과 모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기독교의 주장은 인간의 자기이 해나 기대들과 모순되는 것이 나타났다는 것 즉 실존의 조건하에서 실존적 소외를 극복한 새로운 존재가 나타났다는 역설적인 주장이다.

둘째, 새로운 존재인 그리스도가 신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 “중보자”(mediator)로서 간주 된다면 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제3의 실재로서 간주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하나님을 대표하고 인간에게 본질적인 인간을 대표하는 자로서 기대된 것이다. 따라서 중보자가 하나 님과 인간 곁에 있는 존재론적인 실재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한 것일 뿐만 아니라 잘 못된 기독론들의 근원이 되고 있다. 이것은 반신반인에 불과한 존재이다. 그와 같은 제3의 존재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을 대표할 수도 없고 인간들에게 인간을 대표할 수도 없다. “인간 에게 인간을 대표할 수 있고 인간에게 하나님을 대표할 수 있는 자는 바로 본질적인 인간 (essential man)이다. 왜냐하면 본질적인 인간은 그 본질상 하나님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33) 따라서 기독교의 메시지의 역설은, “한사람”의 인격적인 삶 속에서 본질적인 인간성이 실존의 조건들 아래에서 그 조건들에 의해 정복되는 것 없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성육신(Incarnation)의 개념은 요한복음의 진술에 따라

“로고스가 육신이 되었다”는 명제로 해석되어야만 한다. 여기서 “로고스”(logos)는 하나님 과 우주, 자연과 역사 안에서의 하나님의 자기 현현의 원리이고, “육”(flesh)은 물질적인 실 체를 의미하지 않고 역사적인 실존을 나타내고, “되었다”(became)는 하나님이 그를 받아들 이지 않는 것에 그리고 그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것에 참여하신다는 역설을 지시한다. 따라 서 “성육신은 형태변환(transmutation)의 신화가 아니고 하나님이 한 인격적인 삶의 과정 속에서 인간의 곤경에 참여하는 구원자로서 나타났다는 주장이다.”34)

결론적으로 요약하면, 인간은 자신을 구원할 수 없고, 화해의 역사를 수행할 수 없다. 이 것이 행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신적인 생명이 소외된 실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기 독교는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삶 안에서 발생했다고 증언한다. 즉, 새로운 존재가 그리스 도로서의 예수 안에 나타났다. 하나님이 새로운 존재의 담지자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인류세계에 참여하셨고(성육신) 소외된 인류를 하나님과 재결합시키셨

31) 책, 142-150.

32) 앞의 책, 143-144. cf. 목창균,『현대신학논쟁』(1995), 93-94.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영원한 진리는 그 자체만으로는 역설지이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 있어서 사상과 존재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존 적인 인간과의 관계에서 그것은 역설적이다. 왜냐하면 현세의 인간에게는 사상과 존재는 별개의 것으로 나뉘 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진리는 역설의 형식을 통해서만 시간 속에 있는 실존적인 인간에게 자 신을 계신한다.

33) 앞의 책, 147-148.

34) 앞의 책, 149-150. cf. Paul Tillich, Main Works, ed. Gert Hummel (Berlin : Walter de Gruyter, 1992), 308. “성육신의 역설은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고 신을 대표하는 신적인 존재가 실존의 형태 속에서 자신을 현현했다는 것이다. 성육신의 역설의 본질은 무한과 유한의 통일성이 아니고 실존적인 인간으로의 기 원적인 천상적 인간의 현현이다.”

(11)

다(중보자). 새로운 존재인 그리스도는 인류역사가 갈망한 새로운 존재의 궁극적인 계시요 궁극적인 담지자이다. 이 새로운 존재는 소외된 실존을 변형시키고 신과 인간, 인간과 그의 세계, 인간과 그 자신을 화해시킨다. “새로운 창조는 분리된 것이 그 안에서 재결합되는 현 실이다. 새로운 존재는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 안에서는 분리가 그와 하나님 사이의, 그와 인간 사이의, 그리고 그와 그 자신 사이의 통일성을 결코 넘어서 지 못하기 때문이다.”35)

2. 대답

틸리히에 따르면, 실존적 소외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그리스도 예수이다. 그리스도 예수는 실존적 소외를 극복한 새로운 존재로서 우리의 존재의 구원자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예수 는 누구이며, 그는 어떤 점에서 그리스도이며, 그는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는가?

1) 그리스도로서의 예수 (Jesus as the Christ)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기독교의 토대라고 할 때 기독교의 토대는 역사의 예수인 가? 아니면 신앙의 그리스도인가? 이 물음은 신학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물음이다. 왜냐하면 19세기 역사적 예수 연구는 역사적 예수 위에 기독교를 세우고자 했고 반면에 20세기의 신 정통주의는 신앙의 그리스도의 위에 기독교를 세우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틸리히 는 기독교의 토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인데 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예수라는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과 그리스도라는 신앙적 수용(believing reception이 통일성을 이루고 있는 사건이라고 본다.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는 역사적인 사실인 동시에 신앙적인 수용의 주제이다. 우리는 이 두 측면을 주장하지 않고서는 기독교가 근거하고 있는 사건에 대한 진 리를 말할 수 없다.”36)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는 두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는 “나사렛의 예수”라고 불리우는 객관적인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그를 그리스도로서 받아들였던 사람들에 의한 이 사실의 주관적인 수용이다. 이것은 틸리히의 기독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주장이다. 왜냐하면 틸리히에 따르면 객관적 사실과 주관적 수용, 두 측면 중 어느 한 쪽이 완전히 무시된다면 기독교 신학은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일 신학 이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지시하는 사실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본질적인 신-인간성이 실존 속에서 나타났고 실존의 조건들에 의해서 정복당하는 것 없이 자신을 실존의 조건들에 종속 시켰다는 기독교의 근본적인 주장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 만일 실존적인 소외를 극복한 인 격적인 삶이 없었다면 새로운 존재는 여전히 탐구와 기대에 불과했을 것이고 시간과 공간 속의 한 현실일 수 없었을 것이다.”37) 이처럼 신학이 객관적인 사실을 무시한다면 신학은 영지주의적 가현설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를 신앙 적으로 받아들인 것 또한 똑같이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주관적인 수용이 없었다면 그리스 도는 그리스도 곧 시간과 공간에 있어서의 새로운 존재의 현현일 수 없었을 것이고 단지 역 사적인, 종교적인 중요한 인물로서만 기억되고 말았을 것이다. 결국, 틸리히에 따르면 기독 교의 토대는 객관적인 역사적인 사실이나 주관적인 실존적인 신앙 어느 한쪽만이 아니라 객 관적 사실과 주관적 수용, 이 두 측면이 결합된 통일성이다.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사건 에는 객관적으로 분석될 수 있는 측면과 신앙에 의해서만 개방될 수 있는 측면이 결합되어

35) Paul Tillich, New Being (New York : Charles Scribner's Sons, 1955), 22.

36) 틸리히, 유장환역,『폴 틸리히 조직신학』III (2005), 155.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의 주-객 통일성은 이미 유장환, “폴 틸리히의 주-객 통일성의 신학”,『한국조직신학논총』제29집(2011), 262-264에 언급된 바 있음.

37) 앞의 책, 155.

(12)

있다. 이 사건에는 틸리히의 신학방법처럼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행위사이의 상관관계가 존재한다.”38)

다음으로, 기독교의 토대가 사실(예수)과 신앙(그리스도)의 통일성이라면 역사적 예수연구 의 의의는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틸리히는 ‘역사적 예수 연구’는 기독교 신학과 신앙에 역 사적인 토대를 제시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분석한다. 틸리히에 따르면, 역사적 예수 연구는 성서문헌 기록 배후에 있는 실제적인 예수에 대한 탐구로서 다음과 같 은 3단계로 이루어졌다.39) 제1단계는 역사적 예수의 생애(Life of Jesus)연구이다. 이것은 성서자료 자체의 문제 즉 나사렛의 예수에 대한 보도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서 받아들인 사 람들에 의해서 제공된 보도들이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제2단계는 역사적 예수의 형태(Gestalt)연구이다. 이것은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본질적인 것들”로 환원시키려는 시도 즉, 특수한 것들에는 의문의 여지를 남겨둔 채 형태(Gestalt)를 섬세하게 완성하려는 시도였 다. 그러나 이것은 성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역사적 연구는 모든 특수한 특성들을 제거 한 후에 하나의 본질적인 상을 그려야만 했는데 하나의 본질적인 상은 여전히 특수한 것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3단계는 역사적 예수의 말(Words of Jesus)의 연구이다. 이 연구는 두 가지 방식으로 시도되었는데 하나는 예수의 말들을 “예수의 교훈”(Teachings of Jesus), 즉 인간의 보편적인 법칙들을 제시한 말씀으로 보았고 다른 하나는 예수의 말들을

“예수의 메시지”(Message of Jesus),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결단해야만 한다는 메시지 로 보았다. 그러나 틸리히에 따르면 두 가지 방법 모두 기독교 신앙에 토대를 제공할 수 없 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결단의 요구가 어떻게 성취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지 못한다. 결단해야만 하는 상태는 여전히 율법 아래에 놓여 있는 상태이다. 이것은 구약의 상태, 그리스도를 요청하는 상태를 초월하지 못한다. 우리는 첫 번째 방식의 신학을 “율법 주의적 자유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 반면 두 번째 방식의 신학을 “실존주의적 자유주의”라 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의 방법도 예수의 가르침에 순종할 수 있는 힘이나 하나님 의 나라에 대해서 결단하려는 힘이 어디에서 오는지의 물음에 대해 대답할 수 없다.”40) 이 와 같이 역사적 예수 연구는 다방면으로 발전해 왔지만 결국 역사적 연구는 기독교 신앙의 토대를 제공하는데 실패했다.41)

그러나 바로 여기서 조직신학적으로 중요한 핵심적인 문제가 제기된다. 즉, 역사적 연구 가 기독교 신앙의 역사적 토대를 제공할 수 없고 또한 성서기록에 대한 완전한 회의주의를 초래한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기독교 신앙의 확실성을 얻을 수 있는가? 이에 대해 역사적 연 구는 아직까지 역사적 회의에 대한 어떠한 증거도 제시하지 못했다거나 신앙이 기독교의 역 사적 토대를 보증한다고 말하는 것은 충분한 대답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앙은 언제가 미래에는 일어날지도 모르는 불확실성에는 근거를 둘 수 없고 또한 신앙이 보증할 수 있는

38) Alexander J. Mckelway, The Systematic Theology of Paul Tillich (London : Luttherworth Press, 1964), 160.

39) 틸리히, 유장환역,『폴 틸리히 조직신학』III (2005), 159-168.

40) 앞의 책, 167.

41) cf. 역사적 연구방법에 대한 틸리히의 평가는 결코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틸리히에 따르면, 역사적 연구에 대한 평가는 부정과 긍정 모두를 포함하고 있는데 역사적 연구는 기독교 신학에 다음과 같은 긍정적인 영향 을 주었다. “첫째, 역사적 연구는 성서문헌의 세 가지 의미론적인 수준들을 분석해 주었다(역사적인 요소, 전 설적인 요소, 신화적인 요소). 둘째, 역사적 연구는 기독교의 주요 상징들의 발달의 단계를 보여주었다(종교적 인 문화와 언어 속에서 발생-실존적 곤경에 대한 대답-기독교적인 의미변화-문자주의적인 왜곡). 셋째, 역사 적 연구는 모든 역사학에서 전개되고 있는 최선의 방법을 사용하여 성서 문헌에 대한 언어적인, 역사적인 명 확한 이해를 제공해 주었다(기독교 상징들을 문자주의적인 왜곡 즉 미신과 부조리로부터 해방시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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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은 자신의 토대, 즉 신앙을 창조한 실재인 새로운 존재만을 보증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앙은 실존적인 소외를 극복하고 이로써 신앙을 가능케 한 새로운 존재를 보증하지만 새로 운 존재의 구체성을 보증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새로운 존재의 구체성이 확실히 증명될 수 없다면 “그리스도”라고 불리우는 새로운 존재는 어떻게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 새로운 존재의 구체성이 없다면 그의 새로움은 공허한 것이 아닌가? 이에 대해 틸리히는 역사적인 예수와 성서적 그리스도의 모습 사이에는 상의 유비가 존재한다’는 상의 유비(analogia imaginis)를 통해서 해결책을 제시한다. “새로운 존재는 그리스도의 모습 속에서 나타났다.

이 모습의 특별한 어떤 특징도 확실하게 증명될 수 없다. 하지만 새로운 존재가 이 모습을 통해서 그것에 의해서 변형된 사람들을 변형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명확하게 주 장될 수 있다. 이것은 상의 유비가 있다는 것, 즉 상과 이 상이 자라나온 실제적인 인격적 인 삶 사이에는 유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자들과의 만남 속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모 습을 만들 낸 것은 이 실재였다. 새로운 존재의 변형시키는 힘(transforming power)을 중 재한 것은 이 모습이었고 지금도 이 모습이다.”42) 결국, 기독교의 토대는 성서적 그리스도 의 모습 속에서 증언되고 있는 새로운 존재의 현현이다. 새로운 존재가 역사적 예수의 삶 속에서 현현했고 성서기자들이 그 현현을 성서적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증언했고 그 증언 속 에 담겨있는 새로운 존재의 힘이 제자들을 변화시켰다면 성서적 모습과 이 모습이 자라나온 실제적인 인격적인 삶 사이에는 명백하게 유비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틸리히의 상의 유 비(picture analogy)를 도표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도표1)

2) 새로운 존재로서의 그리스도 예수

그렇다면 그리스도 예수는 누구인가?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를 어떻게 돕는가? 전자 는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물음으로서 기독론적인 물음이고 후자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 한 물음으로서 구원론적인 물음이다. 틸리히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은 서로 분리되지 않고 상보적인 관계 속에 놓여있다. 즉, 그리스도의 인격은 그리스도의 사역 속에 서 표현되고 있고, 그리스도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전제로 하고 있다.

먼저, 그리스도 예수는 누구인가? 기독교 상징에 따르면, 그리스도 예수는 새로운 존재와 새로운 시대를 가져온 존재이다. “기독교는 새로운 창조와 새로운 존재, 즉 예수의 출현과 더불어 나타난 새로운 현실에 대한 메시지이다. 예수는 이런 이유로 그리고 오직 이런 이유 로만 그리스도라고 불리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혹은 메시아 즉 선택되고 기름부음을 받으 신 분은 만물의 새로운 상태를 가져오시는 분이기 때문이다.”43) 이 맥락을 자칫 잘못 이해 하면 그리스도를 단지 새로운 존재의 담지자로만 이해할 수 있는데 엄밀히 말하면, 그리스 도 예수는 새로운 존재로서 새로운 존재의 담지자이고 새로운 존재의 담지자로서 새로운 존

42) 책,179. 틸리히에 따르면, 상의 모습(picture)은 인상파의 초상화와 비슷하다. “인상파(expressionist)화 가는 그가 그리려고 하는 사람의 가장 깊은 수준에 들어가려고 시도한다. 여기서 그는 그의 주제의 실재와 의 미에 깊이 참여할 때만 그렇게 할 수 있다. 오직 그렇게 할 때만 그는 그 인물의 표면적인 특성들이 사진처럼 재현되거나 화가의 미적인 이상에 따라서 이상화되지 않고, 단지 그 특성들이 화가가 그의 주제의 존재에 대 한 그의 참여를 통해서 경험했던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방식으로 인물을 그릴 수 있다.”

43) Paul Tillich, New Being (195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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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이다. 여기서 새로운 존재란 무엇보다도 “실존의 조건들 속에 있는 본질적인 존재이며, 본질과 실존 사이의 분열을 극복한 존재”44)를 뜻한다. 따라서 새로운 존재는 실존의 조건 하에서 본질을 실현하고 본질과 실존 사이의 분열을 현실적으로 극복한 존재라는 점에서 새 로운 존재는 본질과 실존이 대립하고 있는 옛 존재의 끝 즉 ‘율법의 끝’이며 ‘실존의 끝’이 며 ‘역사의 끝’이다.45)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난 새로운 존재에 참여함으로써 성 령에 의해서 단편적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다(고후5:17).

이와 같이 틸리히의 기독론은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적 삶 속에 실존적 소외를 극복한 새 로운 존재가 나타났다’는 새로운 존재로서의 기독론이다. 그렇다면 틸리히의 새로운 존재로 서의 기독론이 이전의 기독론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46)

첫째, 새로운 존재(New Being)로서의 그리스도 예수의 존재. 그리스도 예수는 그의 존재 의 어떤 특수한 표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존재 전체에 의해서 새로운 존재의 현현이 다.47) 명백하게 그는 그가 말했던 경이로운 말들 이상이며 그가 수행한 놀라운 행위들 이상 이며 그가 당한 고통스러운 고난과 희생적 죽음이상이다. 그의 말, 행위, 고난은 단지 새로 운 존재의 표현들이다. 사실, 고대와 현대의 합리주의 신학은 예수의 “말”을 그의 존재로부 터 분리시키려고 했고, 경건주의와 신앙부흥운동은 예수의 “행위”를 그의 존재로부터 분리 시키려고 했고, 정통주의는 예수의 “고난”을 그의 존재로부터 분리시키려고 시도했다. 그러 나 예수를 그리스도로 만든 것은 새로운 존재로서의 그의 존재이다. 그의 말도, 그의 행위 도, 그의 고난도, 심지어, 그의 “내적인 삶”도 그를 그리스도로 만들지 못한다. 이 모든 것 들은 그의 존재의 특성인 새로운 존재의 표현들뿐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존재가 새로운 존 재이기에 그리스도이다.

둘째, 유한성(finitude)과 비극성(tragedy)에 참여한 그리스도 예수의 삶. 그리스도의 성서 적 모습은 그의 유한성을 특히 강조한다. 그는 유한한 존재로서 스스로 있지 않고 실존 속 으로 “내던져 있는” 모든 것의 우연성에 종속되어 있었다. 그는 죽지 않으면 안 되었고, 죽 을 수밖에 없다는 불안을 경험했다. 더욱이 그는 삶의 비극적인 요소에 의해서 얽매여있었 다. 그 당시의 종교지도자들과의 갈등은 비극적인 것이었다. 이것은 예수가 그의 적대자들 로 하여금 불가피하게 범죄 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는 범죄의 비극적인 요소에 연관되 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는 진정한 유혹을 겪었다. 틸리히는 직접적으로 언급한 다. “그리스도 예수가 유한한 자유이기 때문에, 그는 또한 실제적인 유혹에 직면해 있었다 .”48) 따라서 예수가 유혹을 물리쳤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한 것이다. 그러나 유혹의 극복은 그의 욕구(desire)의 존재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욕구는 있었지만 그에게 있어서 욕 구는 항상 하나님과의 통일성 밖에서가 아니라 통일성 안에서 요구되었다. 예수는 그의 욕 구가 왜곡된 욕망(힘과 쾌락을 통한 모든 것의 이용)으로 변질되는 것을 물리쳤다. 이처럼

44) 틸리히, 유장환역,『폴 틸리히 조직신학』III (2005), 185. 새로운 존재는 두 가지 측면서 새로운 것이다.

먼저, 새로운 존재는 본질적인 존재의 단순한 잠재적인 성격에 비해서 새로운 것이다. 다음으로, 새로운 존재 는 실존적인 존재의 소외된 성격에 비해서 새로운 것이다. 새로운 존재는 현실적인 존재이며, 현실적인 실존 의 소외를 극복한 존재이다.

45) cf. 조성호 역,『본회퍼의 그리스도론』(서울 : 종로서적, 1999), 56-57. “말씀과 성례전과 교회 안에 임재하 는 분은 인간의 존재의 중심 안에, 역사의 중심 안에, 그리고 자연의 중심 안에 존재한다. …그리스도는 이제 인간의 경계와 심판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새로운 존재의 시작이며 그것의 중심이다. 인간 존재의 중심으 로서의 그리스도는 인간의 심판이며 칭의임을 의미한다.”

46) 폴 틸리히, 유장환역,『폴 틸리히 조직신학』III (2005), 189-232.

47) 앞의 책, 189-194.

48) 앞의 책, 19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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