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실주의 - 인상주의 - 입체파
▪
▪표현주의
▪야수파
▪추상화 구상, 비구상,
추상 추상화의 세 가지 길
▪다다이즘
‣‣‣ ▪초현실주의 마그리트, 샤갈 미로, 달리 클레(바우하우스) C ha p te 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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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 적 형 상 의 사 라 짐 : 표 현 주 의 , 추 상 미 술 , 다 다 이 즘
▼ 그 당시 세계는...
‣1896년 제1회 올림픽 개최
‣1900년 세기말 흥분과 긴장감이 돌던 시대
‣1911년 중국 신해혁명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상징주의 Symbolism
만학도 고갱Paul Gauguin(1848-1903)과 상징주의1)
1) (象徵主義)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서 프랑스를 중심으로 나 타난 예술 사조이다. 자연주의나 고답파(高踏派)에 대해서, 주관을 강조하고 정 조(情調)를 상징화하여 표현하는 것을 주안(主眼)으로 했다. 《악의 꽃》의 보들 레르를 비롯하여, 베를렌, 랭보 등이 대표적인 시인.
고갱은 전통적인 인습을 탈피하여 단순한 형태와 색으로 새롭고 순수한 개인적 시각을 창조한 화가입니다. 종교는 또한 고갱의 작품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물론 그는 종교인처럼 생활하지는 않았습니다.
종교에 관하여 그린 예술가입니다. 고갱이 예술가로 전향한 것은 고흐보 다 후의 일이었습니다. 35세까지 그는 부유한 사업가였으며 때때로 그림 을 그리기도 하고 근대 회화를 수집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 때 세잔의
《과일 그릇, 유리잔, 그리고 사과》를 소장했었습니다. [그림07.34]
결국 그는 예술가가 되어, 아내와 아이들은 덴마크로 보내고, 홀로 브르타 뉴-타이티-마르키즈 섬으로 떠나 작품 활동을 했습니다. 1899년 상징주 의Symbolism라고 불리는 새로운 예술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그의 양식은 고흐 정도로 붓터치가 강렬하고 개성적인 것은 아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인상주의의 울타리를 뛰어 넘은 대담한 비약飛躍이었습 니다. 고갱은 서구 문명은 관절이 빗나갔다고 강하게 느꼈습니다. 우리의 산업 사회는 인간에게 돈벌이하는 데만 봉사하는 불완전한 생활을 강요하 고 있고, 인간의 감정과 행복한 일상생활이 무시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 다. 그는 스스로 이 숨겨진 감정의 세계를 재발견하기 위하여, 서프랑스로 가서 브르타뉴의 농부들과 함께 생활했습니다. 여기에서 그는 이 지방 사 람들의 일상생활에는 아직도 종교가 큰 역할을 하며 그들이 내적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림08.01]
《황색의 그리스도》(1889)에서 고갱은 단순하고 솔직한 신앙을 표현하려 고 했습니다. 인간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달린 그 숭고한 모습을 노 랗게 표현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림08.02]
이 그림은 여러모로 특이한 점이 많습니다. 우선 밝고 강렬한 원색을 쓴 것이 먼저 눈에 띕니다. 황금색의 예수와 들판, 거기에 아낙네들의 청 색 옷이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또 나무들은 가을을 강조해서 붉게 그 렸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는 초월한 표정으로 농민 아낙네들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고딕 후기의 양식이지만, 전경의 농사꾼
여인들을 그려 넣은 것 기법은 민속 예술의 차원으로 그렸습니다. 고갱은 프랑스 브르타뉴 농민들의 생활 모습에 특별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농사일의 과정을 주의 깊게 관찰했습니다. 씨를 뿌리고, 곡식이 영글면 추 수해 이듬해 봄 다시 씨를 뿌리는 과정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리 스도의 탄생과 성장, 죽음, 그리고 부활을 이처럼 계절에 따라 순환하는 농사일에 비유해 그린 것입니다. 특히 가을(노랑으로 상징)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봄은 예수의 부활과 연관되어 상징적으로 나타납니다.
또 고갱은 전통적인 원근법을 무시하고 그림을 평면적으로 그렸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에 검은색 테두리 선을 긋기도 한 것이, 중세 성당 스테인 드글라스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뿐만 아니라 나무나 언덕, 들판 등도 검은 선으로 테두리를 그려 그 안을 색으로 채워 넣었습니다.
이러한 기법을 클루아조니즘Cloisonnism이라고 합니다. '구분'을 뜻하는 프랑스어 '클루아종'에서 따 붙인 이름입니다. 그림 그리려는 대상을 단순 화시켜 윤곽선을 강조해 그리는 방법입니다.
고갱은 자기만의 시각으로 바라본 주관적 해석과 상상력을 중요시했습 니다. 자신이 원하는 예술을 위해 낯선 세계를 보여 주는 일을 두려워하 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성격도 활발하고 거침이 없었습니다. 남이 인정하 든 안하든, 항상 자신을 위대한 인물, 천재적 화가라고 생각했다고 합니 다. 이런 배포 덕분에 그가 위대한 거장으로 성장할 수 있던 것 같습니다.
브루타뉴에서 그린 《황색의 그리스도》(1889)와 더불어 《설교 후의 상상 도》(1888)가 타히티로 떠나기 전의 고갱의 대표적인 양식입니다. 《설교 후의 상상도》는 교회에서 고갱이 천사와 씨름한 야곱에 대한 설교를 들을 후 착상한 것입니다. [그림08.03]
그림 밑 부분에는 신부와 흰 모자를 쓴 시골 부인들이 기도를 드리고 있고, 대각선으로 굽어 있는 큰 소나무 건너편에는 날개 달린 천사가 야 곱과 씨름하는 모습이 붉은 배경 위에 그려져 있습니다. 나뭇가지 밑에 있는 한 마리 양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합니다. 붉은 배경의 색채는
밤의 등불에서 나오는 색이지만 천사와 야곱과의 싸움을 상징합니다. 고 갱의 붉은색을 전통적인 기법과는 달리 추상적이고 표현적인 색상으로 이 용했습니다. 여인들의 흰 모자들은 붉은 배경과 대비되어 종교적인 경건 함과 신앙적인 순결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갱의 서구 문명에 대한 비판적이고 비관적인 태도와 낙원을 꿈꾸는 그의 정신은 타히티 섬에서 마르키즈 제도의 섬으로 한 번 더 이동하도록 합니다. 그는 마르키즈 섬에서 결국 생을 마감했습니다.
《귀신이 지켜본다》(1892)에서 고갱의 새로운 정서와 이국적 색감과 강한 상징성을 읽을 수 있습니다. 타이티의 정부를 그린 그림입니다. [그림08.04]
단순한 폴리네시아 여인의 누드를 그린 것이 아니라, 젊은 처녀와 죽은 영혼이 연결되어있다는 그들의 정서를 담은 것입니다. 유황 불꽃 튀는 벽 기둥에 기댄 검정 옷에 무서운 눈을 한 유령이 그녀의 침대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녀는 무서워 고개를 틀고 입을 벌린 채 양팔과 어깨를 개구 리처럼 펴서 납작 엎드려 있습니다. 평면적 꽃무늬와 독특한 핑크‧녹색‧노 랑은 고갱의 간결하고 추상적이고 신비한 새로운 원시주의 미술의 특성입 니다. 고갱의 정신세계의 묘사와 간결한 추상적 형식은 상징주의 화가들 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야수파Fauvism
뭉크와 마티스 [그림08.05]
야수파는 야수가 울부짖는 것 같은 강렬한 원색만 사용한 그림이라고 불린 것에서 유래합니다.2) 야수파(야수주의, fauvism)는 순수 독립적인
2) 1905 파리. 전통과 형식을 중시하는 《살롱》전과는 달리, 진보적인 성향의 전 시회《살롱 도톤느》의 세 번째 전시가 개최되었다. 마티스는 이 전시회에 추구 하는 예술 성향이 같은 앙드레 드랭, 모리스 블라맹크, 알베르 마르케 등과 함 께 작품을 출품했다. 이들의 혁신적인 작품들은 마르케가 출품한 소년 두상을 가운데에 두고 빙 둘러져 진열되었는데, 이를 본 당대 미술평론가인 루이 보셀
색채를 중요시 하여 원근 및 깊이감은 부수적인 것 이었습니다. 면과 윤 곽선은 파괴되었는데, 색채와 색면과 선을 종래의 약속(재현을 위한 원근 법, 아카데미의 조형론 등)에서 해방시켰다는 점에서 미술사적 의의가 있 습니다. 야수파 작가들은 의도적으로 강렬한 색채와 변형된 형태, 단순하 면서도 극적인 구성을 취했습니다. 작가의 내면과 주관, 감정을 강렬하게 표현하였습니다.
노르웨이 세기말의 화가, 뭉크Edvard Munch(1863-1944)
고갱의 사상은 1890년대 다른 예술가들에게 계승됩니다. 그 중에 뭉크 가 있습니다. 뭉크의 대표작은 《절규The Scream》(1893)입니다. [그림08.06]
《절규》는 우리에게 두려움이란 어떤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공포를 느끼 며 놀라는 표정과 흘러가는 듯한 붉은 배경을 그려 내어 지금도 여러 모 로 회자되고 패러디되는 작품입니다. 이 그림이 엄청난 인기를 끄는 이 유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보편적인 경험을 묘사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합 니다. 즉, 이 그림에는 일상생활의 긴장과 스트레스를 담아 표현한 것으 로 봅니다. 이 절규 모티브로 템페라 회화, 판화 등 여러 방법으로 표현 하였습니다. [그림08.07]
우선 뭉크는 이전에도 끔찍한 공황 발작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충격 받은 것처럼 인물의 얼굴을 원초적 두려움의 모습으로 변형, 일련의 요동치는 선을 통해 절규 하는 것을 묘사하였습니다. 또한 자신의 뒤에 걸어오는 두 명의 인물을 아무렇지도 않게 그림으로써 이 효 과를 강조하였고, 결국 이 공포감은 외부 세계에서 온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에서 기인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저 해골바가지 같은 남
“야수들에 둘러싸인 도나텔로!”라고 외쳤다 한다. 루이 보셀의 ‘야수’라는 언급은 강렬한 원색의 거침없는 색채구사와 정리되지 않은 투박한 선으로 그려 진, 당시로서는 충격이 아닐 수 없는 이들의 작품을 폄하하는 의도로 사용된 용어이지만, 곧바로 언론을 통해 세간에 알려지면서 ‘야수들’의 작품은 관심을 받게 된다. 20세기 미술의 시작을 알리는 ‘야수주의’는 이렇게 탄생하였다.
자로 인해 실상은 매혹적으로 빛났을 오렌지 빛 하늘은 불안하기만 한 핏 빛으로 흐르고, 분명히 아름다웠을 석양의 바다는 검푸른 괴물이 되어 남 자를 덮칠 것만 같습니다.
“친구들과 산책을 했다. 해가 지기 시작하자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 었다. 친구들은 산책을 계속했지만 나는 두려움에 떨며 서 있었다. 그때 나는 자연을 관통하는 절규를 들었다.”라고 뭉크는 일기를 남깁니다. 아무도 듣지 못한 절규를 혼자서만 들은 것입니다.
뭉크는 외롭고 불안하고 두려움의 감정에 휩싸여 살았습니다. 그도 그 럴 것이 뭉크는 다섯 살 때 세상의 중심인 엄마를 잃고, 열네 살 때는 엄 마 대신해준 한 살 위의 누이를 잃어버립니다. 젊은 엄마도, 열다섯 꽃다 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누이도, 모두 피를 뿜고 토하며 죽어가는 결핵이 었습니다. 여린 어린 남자 아이,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 소년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를 잃은 불가해한 운명 앞에서의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 는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뭉크는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자신을 짓누르고 있었던 무거운 운명을 그림으로 그려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림은 좋은 친구이며 치유책이었 습니다.
“불안과 질병이 없었다면 내 인생은 방향타 없는 배와 같았을 것이다.” “내 가 그리는 선과 색은 모두 내면의 눈으로 본 것이다. 나는 기억에 의존한다.
다른 것을 더하지는 않는다.”
사실 기억이란 묘한 것입니다. 사실에 의존하나 사실이 아니고, 지나간 것이나 지나간 것이 아닙니다. 기억은 끊임없이 되돌아와 현재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상의 단순화와 주관적 색채의 화가, 마티스Henri Matisse(1869-1954)
“평생 미술을 계속 할 수 있게 당신을 이끈 힘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순진함을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마티스가 죽기 1년 전 한 신문기자와 나눈 문답입니다. 이 말처럼 마티 스가 평생 추구한 작품 세계에는 무엇보다 순수성을 향한 열정이 느껴집 니다. [그림08.08]
마티스는 곡물 상인이었던 아버지와 아마추어 화가였던 어머니 밑에서 20살 때까지는 그의 천재성을 모른 채 지낸 프랑스 시골 마을의 평범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1887년 파리에서 법률을 공부했으며 자격시험에 합 격하여 법률 사무실 서기로 일했습니다. 그러나 건강상의 이유로 입원을 하게 되는데 같은 병실의 남자가 가끔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고 그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마티스는 마을 어귀의 경치를 담은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는 법률을 포기했습니다. 파리로 가 서 아카데미 줄리앙에 들어갔습니다. 처음에는 푸생과 샤르댕 등의 작품 을 모사하는 보수적 경향의 그림을 배웠습니다. 이듬해 에콜 데 보자르에 등록하였습니다. 그 때 귀스타브 모로 교수의 주의를 끌게 되어 모로의 자유로운 지도를 받았습니다. 그 때 마티스는 색채 화가로서의 천부적 자 질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마티스 부인의 초상 (녹색선의 초상화)》(1905) [그림08.09]
이 그림이 처음 공개 되었을 때, 비평가는 물론이고 부인까지도 불쾌감 을 느꼈던 작품입니다. 색상의 변화만으로 명암을 그려 넣어 마티스 부인 을 그렸습니다. 이 그림에서 마티스는 아주 강렬한 색채, 있는 그대로의 원색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색이란 다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물감 튜브에 서 나온 그대로 강렬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작가의 생각이었습니다.
왼쪽의 따스한 색상과 오른쪽의 차가운 색상이 묘한 조화를 갖고, 인간의 양면성을 표현하여 그려내고 있습니다.
《빨간 방Red Studio》(1948) [그림08.10]
이 작품은 마티스가 말년에 그린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입니다. 결 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서로 다른 형태의 테이블 위에 꽃이며 과일들이
가득 놓여 있는 등 모든 것들이 꽉 차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화면 을 가득 채우고 있는 선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잡하거나 어지러워 보 이지 않고 어우러지는 것은 바로 이 모든 것들이 주조색인 빨간색 속에 융합되어 흡수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외적세계에 대한 감정적 반발 다시 말해, 반 아카데미즘형태로 나타나는 야수파Fauvism 성격을 마티스 는 치열하면서도 단순화된 색채 조화와 세련된 소묘력을 보다 높은 차원 에서 성취해 나가는 위업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춤The Dance》(1910) [그림08.11]
러시아의 무역상인 시츄키의 의뢰에 의하여 그려진 이 작품은 모스크바 에 있는 저택의 계단을 장식하기 위하여 그려진 것입니다. 손을 맞잡은 5 명의 댄서들의 포즈가 아라베스크의 문양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원시 부 족의 축제의 춤을 연상케도 합니다. 푸른색과 초록색, 붉은 색의 활기 있 는 조화가 리듬과 생명감을 느끼게 합니다. 이 작품은 대담한 화면 구성 과 색채로 당시 화단에 신선한 충격을 던집니다. 즉 붉은색에 가까운 역 동적인 인물들의 포즈와 하늘과 땅으로 나눈 대범한 바탕 처리는 그림의 스케일을 압도적으로 느끼게 합니다. 또한 이 그림은 빈틈없는 구성으로 긴장감을 높이고 있습니다. 구성을 살펴보면 손과 손의 연결, 인물이 화면 에 배치된 위치와 크기, 뒤에 보이는 한 발로 서 있는 인물이 매우 동적 인 포즈를 취하면서도 균형감을 잃지 않고 있고, 발이 짚고 있는 땅의 위 치도 땅의 움푹 들어간 부분에 정확히 일치하고 있는 점 등이 눈에 띕니 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물들이 제각기 다른 자유분방한 포즈를 취하면서 도 전체적으로는 잘 어우러지는 조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드 3 Nude 3》 [그림08.12]
《컷 아웃 The Cut-Outs》 [그림08.13]
《달팽이 Snail》 [그림08.14]
노년 투병을 하며 작품을 한 것이 컷 아웃 작품입니다. 관절염, 내장 장 애, 암 등으로 붓을 들 수 없게 되자 가위와 색종이를 들었습니다. 그 컨
“ 무엇이 되고 싶은가?”
“마티스가 되고 싶다.” by 워홀
디션에도 하루에 4시간 이상 매일 그림 그리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림은 붓과 물감을 이용해서 그리는 것이 제대로 된 회화 작품이라는 발상을 뒤 집은 것입니다. 새로운 방식으로 더 단순하며 더 강렬함을 추구한 작품입 니다. 이는 84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로 숨을 거둘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특히 ‘마티스 블루’라는 이름이 붙은 파란색을 즐겨 사용했으며, 이 순 수한 신체의 사람을 모티브로 회화 외에도 조각, 동판화, 직물 디자인 등 의 다양한 분야에서도 뛰어난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는 색종이 컷아웃 그림을 통해 간결하고도 대범한 구획 속에서 고전 적인 질서를 보여줍니다. 마티스의 색종이 그림은 색의 즐거움이 두드러 지는, 그의 작품 세계의 완결이라고 표현될 수 있습니다. 그는 병상에서 색종이에 밑그림을 그리고 가위로 오려 그만의 독특한 색채의 조화를 시 작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가위가 연필보다 더 감각적이라고도 말하였 습니다. 천천히 휘돌아 나가는 색종이의 배열이 달팽이를 연상시킵니다.
후배인 피카소하고는 라이벌 관계였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도 했습니 다. 후원자의 환심을 사려고 서로 경쟁을 벌었다는 일화도 있지만 의외로 말년에 둘의 사이는 양호했습니다. 피카소가 마티스의 화실에 자주 놀러 왔다고 합니다. 피카소가 현대 미술가 중에서 유일하게 인정했던 화가가 바로 앙리 마티스입니다. 그는 '마티스의 배 속에는 태양이 들어있다'라는 표현으로 마티스의 뛰어난 색채 감각을 인정하는 말을 했습니다. 또한 스 스로 팩토리맨factory-man이라 부른, 가장 상업적인 순수 미술가, 팝아 트의 거장 앤디 워홀도 마티스를 가장 존경했습니다.
추상화Abstract Art
추상 회화의 세 가지 길
추상 회화란 특정한 이미지를 재현한 그림이 아니라 순수한 점, 선, 면, 색채로 표현되는 그림을 말합니다. 추상 미술의 역사는 신석기 시대 빗살 무늬 토기 문양이나 청동기 시대 거울의 뒷면, 암각화 등에서부터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즉, 인류의 문명, 역사, 주술적 기원과 상징의 의미를 나 타냅니다. [그림08.15]
20세기 들어 서양에서는 화가나 조각가들이 미술의 정신성 및 자율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경향의 추상 회화가 태동합니다. 사실 19세기 말부터 세계는 급변하고 있었고, 이전의 사실적 표현 방식은 진부하고 부 적절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20세기 초 약속이나 한 듯 거의 동시에 새로운 미술의 움직임이 나타나고, 나아가서 주재도 양감도 없는 다양한 색의 원, 사각형, 점, 선, 면 즉 추상이 예술가들의 새로운 표현 수단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추상미술은 크게 세 가지 방식으로 추구 됩니다.
먼저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1866-1944)가 중심이 된 표현주의 방식의 추상회화입니다. 정신적인 혼과 인간의 감성을 표현한 추상 회화 입니다. 뜨거운 추상이라고도 불립니다.
《Composition no.8》(1923) [그림08.16]
둘째, 세잔의 계승자인 피카소와 브라크의 입체주의 방식에서 영향을 받은, 몬드리안Piet Mondrian(1872-1944)의 추상회화가 있습니다. 이것 은 예술 세계의 근본적인 조형 원리를 탐구하기 위한 추상입니다. 차가운 추상이라고도 불립니다.
《브로드웨이의 부기우기》(1943) [그림08.17]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1930) [그림08.18]
마지막으로, 위 양자 어느 것도 계승하지 않은 러시아의 말레비치
Kazimir Malevich(1878-1935)의 절대주의 추상화가 있습니다.
《검은 사각형》(1915) [그림08.19]
《검은 십자》(1915) [그림08.20]
《검은 원》(1923) [그림08.21]
이 추상 회화들은 이후 모더니즘 디자인, 추상 표현주의, 색면 추상 등 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절대주의 회화는 물질 세계(자연과 인간의 삶 등)와 회화의 연계성을 단절 시킨 회화로 획기적인 사고의 전환이며, 예술가와 비평가들에게 정신적 충격을 주게 됩니다.
몬드리안, 모든 사물 속에 내재된 본질을 탐구하다
피에트 몬드리안Piet Mondrian(1872-1944)은 독일의 표현주의자들이 인간 내면에서 끌어올린 강렬한 표현을 추구하고 있을 때, 반대로 미술에 서의 감정 표현을 억제하려는 방향으로 네덜란드의 모더니즘을 이끈 인물 입니다. 몬드리안의 목표는 이 세계의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근원적인 구 조를 파악해 드러내고, 모든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한 핵심 요소를 간단명 료하게 드러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목표 에 입각한 몬드리안의 그림이 추구하는 것은 움직이지 않는 그림 속에서 의 역동적인 에너지였습니다. 몬드리안의 인생은 직선과 반듯한 면, 그리 고 몇 가지 컬러로만 이루어진 대단히 금욕적인 그의 작품들처럼 수도자 에 비유되는 검소한 삶이었습니다. 그는 부양할 가족이 없었으므로 가족 의 생계를 염려할 필요도, 고요함속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을 방해받을 이 유도 없었습니다. 세계적인 작가로 자리매김한 그였지만 일부러 재산을 최소한으로 유지하며 스스로를 더욱 엄격하게 다루었습니다. 바로 이점이 몬드리안에게 철학적인 영감을 작품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집중하게 해주 는 원동력이었습니다.
“미술이란 자연과 인간을 점차적으로 소거해 나가는 것이다”
몬드리안은 칸딘스키와 더불어 추상회화의 선구자로 불리지만, 그의 초 기작품들은 차분한 컬러로 풍경을 묘사한 자연주의적인 스타일이었습니다.
그는 자연의 형태를 점차적으로 단순화 시켜 몬드리안 특유의 스타일에 도달하였는데, 1908-1913년에 그린 나무 연작을 보면 자연주의에서 추상 화로 변해가는 과정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그림08.22]
다다이즘Dadaism
합리주의와 이성에 대한 비판, 다다와 초현실주의
다다Dada는 제1차 세계 대전을 기점으로 하여 탄생했던 운동으로, 유 럽의 많은 문예가와 미술가들은 기존의 전통과 질서, 즉 이성 중심주의적 사고와 발전에 경도된 산업 주의 등이 서구 사회를 바로 전쟁으로 몰아 넣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들은 유일한 인류 구원의 길은 정치적 무정부 상태, 비합리적인 것 등에 있다고 생각하며, 파피에꼴레에서 발전된 콜라 주와 같은 새로운 기법, 퍼포먼스와 미술을 결합한 전시 등 전위적인 형 태를 채택하여 활동했습니다. [그림08.23]
19세기 이후 점차적으로 발전해 온 산업과 도시화의 물결에 대한 반성 이었으며, 규칙, 질서, 조화 등 기존의 미 개념을 무너뜨렸습니다. 반이성, 반합리성을 지향했던 이 미술 사조는 전쟁에 대항하는 것이었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을 통해 등장한 다다는 취리히 다다(1916-1919), 뉴욕 다다(1915-1920), 베를린 다다(1918-1923), 파리 다다(1919-1922) 등 으로 국제적인 예술 활동이었습니다.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시작, 취리히 다다
몇 명의 시인들이 모여 아무 의미가 없는 시구를 즉흥적으로 읊조리거 나 공연을 통해 해프닝과 같은 퍼포먼스를 하였습니다. 취리히 다다이스 트들은 동시성, 우연성, 소음의 요소를 우선시 하였습니다. 그들은 이 요
소들을 파괴적인 힘으로 생각했으며, 그들의 창조 활동의 토대가 된 것입 니다.
취리히 다다의 대표적 인물은 장 아르프입니다. 그는 유기적 추상 형태 를 표현하였습니다. 그리고 임의적 묘사를 통해 얻어지는 색채가 아닌 비 묘사적 색채를 사용하여 보이는 세계를 거부하고 환상적 세계를 창조하였 습니다. [그림08.24][그림08.25]
베를린 다다
전쟁의 여파로 정치‧사회가 불안했던 시점에서 신문이나 잡지 기사를 콜 라주하여 병치한, 사회 비판적인 풍자가 강한 포토 콜라주가 유행하게 됩 니다. 이 기법은 후에 소위 포스트모던 시대 미술에 연계되는 기법으로 발전합니다. 이러한 효과는 큐비즘의 파피에 콜레에서 유래 되었으나, 다 다의 경우는 주제 지향적인 것이 주된 차이점입니다. 베를린 다다의 대표 적 작가로는 존 하트필드, 막스 에른스트가 있습니다. [그림08.26][그림08.27]
아모리쇼
아모리쇼The Armory Show, 병기고 전시회 [그림08.28]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최초의 현대 미술 전시회는 아모리쇼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13.2.17.-3.15 당시 유럽에서는 피카소, 마티스 등 비구상 및 추상 미술을 향한 실험적 경향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던 반면, 미국 에서는 여전히 구상 미술과 사실주의 계통 미술과 국지주의가 우세하였습 니다. 이러한 미국적 경향에 파문을 던지면서 이 전시는 유럽의 아방가르 드 미술 사조가 미국에 처음 소개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후기인상 주의(탈인상주의, post-impressionism)나 마티스의 야수파 미술이나 피 카소 입체파 그림에 익숙하지 않았던 미국인들에게는 이 미술 작품들은
대단한 충격이었습니다. 이는 향후 미국 현대 미술의 진로를 예고하는 전 시가 됩니다.
전시 작품 중 다다이스트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계단을 내 려오는 누드 No.2》(1912)는 가장 큰 센세이션을 일으킨 작품입니다. 계단 을 내려오는 여인의 모습은 하나의 모습으로 그려진 것이 아니라 내려오는 동안의 움직이는 동작을 입체적으로 분석, 나열하는 방법을 사용하였습니 다. 사실주의 화풍에 길들여져 있던 미국인들에게 이 그림은 판이하게 달 라 여인으로 보다는 분절된 면들의 조합으로 보였습니다. [그림08.29]
미술과 개념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
뒤샹은 《샘 Fountain》(1913)이라는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20세기를 통 틀어 미술 변혁에 가장 중대한 영향을 끼쳤던 작품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작품입니다. 뒤샹은 레디메이드ready-made, 즉 대량 생산되는 기성품(이 작품에서는 남성 소변기를 선택한 것) 자체에 단지 R.Mutt라는 사인만을 하고 전시회에 출품합니다. [그림08.30]
이 작품을 통해 뒤샹은 단지 예술의 개념concept과 선택만을 가지고 작품이 가능할 수 있음을 보여 주면서 기존 전통 미술에서의 미술가, 작 품, 대중의 관계를 다시 생각할 것을 적극적으로 제안했습니다. 외적 또는 내적 동기에 의해 창의력과 기술을 가지고 작품을 제작해 왔던 기존 전통 미술에 대한 급진적 전복이었습니다.
레디메이드
뒤샹이 처음으로 창조한 미술 개념입니다. 기성품의 미술 작품이라는 의미입니다. 1917년 뉴욕 ‘독립미술가전시회’에 R. Mutt라고 사인 한
《샘 Fountain》 작품이 그의 레디메이드 작품 중 가장 논란의 대상이 되
‣‣‣ 볼거리
마르셀 뒤샹과 레디메이드에 관한 BBC 인터뷰 영상
었습니다.
뒤샹에 의하면 레디메이드, 즉 기성품을 그 일상적인 환경이나 장소에 서 옮겨 놓으면 본래의 목적성을 상실하고 단순히 사물 그 자체의 무의미 성만이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브라크나 피카소 등 입체파cubism 작가들 또는 초현실주의surrealism 작가들이 바닷가의 조약돌이나 짐승의 뼈 등을 주워 작품 구성 요소(오브제object)로 삼아 회화(그림)작품을 꼴 라주 기법으로 완성한 것과 그 맥이 통합니다. 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에 대한 이러한 개념은 전후 유럽 미 술, 특히 팝아트 계열의 작가들과 누보레알리즘nouveau realisme 및 개 념 미술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