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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과 금융, 패션의 도시, 밀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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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종종 이탈리아에 대하여 설명할 때“이탈리 아 역사란 없다. 하지만 로마, 피렌체, 밀라노 등의 역사는 있다. 이탈리아 음식이란 없다. 그러나 로 마, 피렌체, 밀라노 등의 음식은 있다”라는 말로 서 두를 시작하곤 한다. 그만큼 이탈리아는 여러 면에 있어서 다양성과 독창성을 지닌 나라다.

이탈리아는 뒤늦게 근대국가로 바뀌었기 때문 에 자본주의가 탄탄하게 자리잡지 못한 상태에서 불균등한 발전을 하였다. 일부의 산업, 견공업, 면 공업, 광업 등의 초기 발전단계는 농업에 의존하게 마련이다. 즉, 이탈리아 사회는 근대조직과 봉건제

도가 서로 어우러져 구축한 것이다. 봉건적 잔존은 어느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이탈리아의 경우에는 봉건적 잔존이 다양하며 그 정점에 왕정 (王政)과 교회(敎會)가 자리잡고 있었다는 데 특 징이 있다.

이탈리아의 또 다른 특징을 들자면, 지형적으로 나 지질적으로나 북부 지역과 남부 지역이 큰 차이 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전자가 유럽 대륙의 일 부라고 하면 후자는 아프리카 대륙의 일부를 이루 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보리와 쌀 등 주 요식량은 북부에서 생산되고, 과실과 올리브유는

상업과 금융, 패션의 도시, 밀라노

이기철|한국외국어대학교 이탈리아어학과 교수

밀라노 대성당에서 본 밀라노시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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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에서 생산되는 등 농산물의 성질이 전혀 다르 다. 게다가 남부에는 불모지도 많아 남북의 빈부 차를 더욱 분명하게 한다. 더구나 이탈리아가 근대 국가로 되면서는 북부와는 협조하고 남부를 희생 시키는 방식으로 산업이 발전하였기 때문에 북부 의 여러 도시는 급속히 팽창하였으며, 근접한 농촌 들도 자본주의화되면서 남부와의 격차는 더욱 커 졌다. 남북의 불균형과 함께 오랜 도시국가의 존속 으로 지방적 절대군주국(絶對君主國)이 너무 오 래 유지되면서 지방분권의 풍습이 계속해서 남아 있다. 이는 20세기 초 중앙집권체제의 확립에도 불구하고 각 지방은 상대적인 독립을 유지하였기 때문에 각 도시간의 강한 배타의식(排他意識)을 낳았다. 나폴리∙로마∙피렌체∙베네치아∙밀라 노∙토리노∙제노바 등 이탈리아 주요 도시들은 거의 공통성이 없는 독립된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이탈리아 제2의 도시로 경제, 산 업, 금융, 문화, 언론의 최대 중심지이며, 인구 150 만 명의 밀라노라는 도시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경제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역사의 도시 밀라노

이탈리아인은 명랑하고 개방적이라는 것이 정설 이지만, 밀라노를 비롯한 북부의 공업도시 사람들 은 지적이고 차가운 느낌이 든다. 고층건물이 빽 빽하게 들어선 도시의 인상부터가 그렇다. 그러나 아무리 근대적인 공업도시라고는 하지만, 역시 밀 라노는 이탈리아의 역사적인 도시다. 두오모를 중 심으로 한 거리에는 중후한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밀라노는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한 롬바르디아 (Lombardia)주의 수도다. 롬바르디아주는 스위스

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알프스 산맥에서 시작하여 코모 호수(Lago di Como), 마조레 호수(Lago di Maggiore)와 같은 대형 호수를 포함하고 있으며, 포(Il Po)강이 가로지르는 기름진 파다나(Padana) 대평원을 지니고 있다.

밀라노는 기원전 400년경에 갈리 인수브리 (Galli Insubri)족에 의하여 건설되었다. 기원전 196년에는 로마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고 로마인 들은 밀라노를‘평야의 가운데’라는 의미의‘메디 올라눔(Mediolanum)’이라고 명명하였다. 이로부 터 현재의‘밀라노’라는 이름이 생겨나게 되었다.

밀라노는 동서남북을 가로지르는 지정학적 위 치로 인하여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당시인 292년 서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었으며, 이는 404년에 서 로마 제국의 행정부가 이탈리아 동부에 위치한 해 안 도시 라벤나(Ravenna)로 이전할 때까지 지속되 었다. 밀라노가 서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313년에 콘 스탄티누스 대제는 그 당시까지 로마제국 내에서 박해를 받아왔던 그리스도교의 자유를 공인하는 밀 라노 칙령을 발포하였다. 그로부터 약 반세기가 지 난 후인 374년에 암브로지오(Ambrogio) 성인이 밀라노의 대주교가 되면서부터 밀라노는 북부 이 탈리아의 종교적인 중심지로 자리잡게 되었다.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게 되자 밀라노도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되어 부르군트족 (Burgundi), 비잔틴족(Bizantini), 고트족(Goti)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이처럼 끊임없이 외세의 침략 을 받던 밀라노는 마침내 569년에 이르러 현재의

‘롬바르디아’라는 이름이 유래하게 된 롱고바르디 족(Longobardi)의 지배에 놓이게 되었다. 롱고바 르디족은 밀라노 대신에 근교에 위치한 파비아 (Pavia)를 그들의 수도로 정하면서 밀라노는 프랑 크족(Franchi)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 7세기까지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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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규모의 고딕건축물, 두오모 성당

레오나르도 다빈치의‘최후의 만찬’이 그려진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치적∙경제적 중요성을 잃게 되었다. 샤를마뉴의 치하에 놓였던 1000년경부터 밀라노는 지리적인 위치의 중요성에 대한 재인식과 유럽 대륙과의 교 역량이 증가함에 따라 상업의 중심지로 다시 발돋 움하게 되었다.

귀족을 비롯한 성직자와 상공업 발전에 힘쓰고 있었던 시민층과의 대립1)이 있은 후, 밀라노는 1097년 자유도시국가(Libero Comune)를 형성하 였다. 밀라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하여 1167년에 롬바르디 아 동맹(Lega Lombarda)을 설립하여 프리드리히 황제를 무찔렀다. 이 승리로 인하여 밀라노는 광범 위한 자치권을 획득하게 되었으며, 풍부한 농산물 생산, 모직물 공업과 광산업을 통하여 롬바르디아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국가로 발전하게 되었다.

1278년 귀족세력의 지지를 받은 비스콘티 (Visconti) 가문이 밀라노를 통치하게 되면서 밀라 노는 상업으로 번창하였고, 특히 수공업 제품인 벨 벳, 실크, 귀금속, 무기를 생산하여 전 유럽에 수출 하였다. 또한 밀라노 대성당2) 건축이 시작되었으 며, 이를 위하여 운하가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스 포르차 가문이 지배하던 시기에 지어진 루도비코 스포르차(Ludovico Sforza) 궁정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정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그 궁정 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브라만테 같은 예술가 들이 활동함으로써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1706년에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롬 바르디아 지역을 점령하게 되자 밀라노는 다시금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통 치기간 동안 밀라노는 이탈리아 계몽주의의 중심

1)이러한 대립 중에서 기억할 만한 것으로는‘파타리아(Pataria) 운동’이 있다. 파타리아 운동은 봉건세계와 관련이 없는 상인, 수공업자, 토지소유 자들이 연합하여 성직자와 귀족들에 대항하여 일으킨 사회적, 종교적 운동이다. 11세기 중반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대 주교는 도시 서민층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만 했다

2) 로마의 바티칸, 스페인의 세빌리아 성당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성당으로 1386년에 쟌 갈레아조 비스콘티의 명에 의하여 기존의 성당이 있던 곳에 건축되기 시작했다. 1774년에는 지상에서 108.50m 높이에 마돈나 동상이 완성되는 등 현재의 모습은 1887년에야 완성되었다. 다만 정면의 다섯 개의 청동문은 1948�1965년 사이에 완성되었으며 좌로부터 첫째 문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공인 칙령 내용을, 둘째 문은 밀라노 성인인 암브로지오의 생애를, 셋째 문은 마리아의 생애를 넷째 문은 밀라노의 역사를, 다섯째 문은 밀라노 대성당의 역사를 각각 묘사하 고 있다. 수많은 사람과 시간 그리고 건축가가 동원된 이 성당의 규모는 길이 157m, 넓이 92m, 높이 109m의 초대형 건축물이다. 밀라노 대성당 건축에 사용된 대리석은 마죠레 호수(Lago di Maggiore) 근교의 칸돌리아(Candoglia)채석장에서 채취, 수로로 밀라노로 운반하여 사용하였는데 지금도 이 채석장의 대리석은 밀라노 대성당 보수용으로만 사용하도록 규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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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의 응접실’이라고도 불리는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거리 나빌리모 운하

에 서게 되었으며, 비엔나뿐만 아니라 파리와도 새 로운 관계를 설립하였다. 이 당시 밀라노는 지역 행정을 개선하였고, 도로를 정비하였으며, 성직자 들의 특권을 제한하였고, 상업적∙문화적 활동을 증진하였다. 브레라(Brera) 국립도서관과 스칼라 (Scala) 오페라극장이 설립된 것도 바로 이 시기 동안이었다.

1796년 5월 나폴레옹(Napoleone)이 밀라노에 입성하게 되자 밀라노는 나폴레옹을 대통령으로 하고, 프란체스코 멜지 데릴(Francesco Melzi d’

Eril)을 부통령으로 하는 치살피나 공화국 (Repubblica Cisalpina)의 수도가 되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의 바람이 이탈리아에까지 불어왔고, 밀라노는 나폴레옹의 지배에 반기를 들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의 영향과 유럽 대륙에 가깝다는 지리 적 요인 때문에 롬바르디아 지역은 이탈리아의 그 어느 지역보다도 산업혁명을 일찍 받아들임으로써

앞선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피에몬테 지역의 사보이아(Savoia) 왕국과 합병한 밀라노는 1861년 에 이루어진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상업과 경제, 금융의 중심지로 떠오르게 되었다.

풍부한 문화재의 도시

밀라노는 이탈리아의 여타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역사적 유물을 가득 담고 있는 도시다.

역사적인 건축물로는 시의 중심부에 있는 두오 모(Duomo 대성당)가 대표적이다. 앞서 설명했듯 이 비스콘티가문 통치시절 착공되어 500여 년 이 상의 공사기간을 거쳐서 완성되었다. 하지만 밀라 노 두오모 광장에 서있는 안내판에는 완성연대가 표기되지 않아 아직도 어느 한구석에는 공사가 여 전히 진행되고 있는 듯하다.

그밖의 건축물로는 스포르차 가문이 기거했던

3) 비스콘티 가문의 갈레아초 2세가 지었던 궁전이 1450년 스포르차 가문의 프란체스코 스포르차 시대부터 시작하여 성채로 변형∙증축되어 사용 되었다. 스포르차 가문이후 군대 훈련소로 사용되던 이 성은 1800년대 말에 루카 벨트라미(Luca Beltrami)에 의해 복원되었으며, 이때에 정문 입 구 위에 있는 필라레테 탑(Torre del Filarete)이 재건축되었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4)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은 1465년부터 1490년 사이에 솔라리(G. Solari)의 설계로 건설되었다. <최후의 만찬(Ultima cena)>은 레오나르 도 다빈치(1452-1519) 가 1495년에서 1497년에 걸쳐 완성한 걸작으로 수도사들의 식당으로 쓰이던 방에 보존되어 있다. 또한 이 성당의 회랑은 브라만테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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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르체스코 성(Castello Sforzesco)3),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불후의 명작‘최후의 만찬’이 소장 되어 있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Santa Maria delle Grazie) 성당4), 베네치아의 페니체(Fenice) 극 장, 나폴리의 산 카를로(S. Carlo) 극장과 더불어 유명한 오페라의 전당 스칼라(Scala) 극장5), 두오 모 광장과 스칼라 극장 앞의 광장을 연결하는 천장 이 있는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거리(Galleria Vittorio Emmanuele)6)등이 있다.

각종 유물과 예술품들을 전시해 놓은 박물관과 미술관으로는 두오모 박물관7), 브레라 미술관 (Pinacoteca di Brera)8), 암브로지아나 미술관 (Pinacoteca Ambrosiana)9)등이 알려져 있다.

대학으로는 국립대학인 밀라노 대학을 비롯하 여 사립대학인 보코니 대학, 가톨릭 대학 등이 있 고,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탈리아가 낳은 세계적인 작가 알레산드로 만초니(Alessandro Manzoni)10)가 있다.

밀라노와 더불어 근교에 있는 롬바르디아주에 소속된 도시들도 수많은 문화유산을 지니고 있다.

작곡가 도니제티의 고향 베르가모, 롱고바르디 족 의 수도였던 파비아, 바이올린이 처음 만들어지고 현재에도 악기 제작으로 유명한 크레모나 (Cremona), 곤자가(Gonzaga) 가문과 화가 만테

냐, 그리고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렛토의 배경인 만 토바(Mantova) 등의 도시에서 우리는 과거와 현재 를 만날 수 있다.

전통적 수공업을 세계적 산업으로

이탈리아는 과거 프랑스 패션의 OEM 생산을 담당 했던 경험과 오래 전부터 발달한 피혁 수공예 기 술, 세계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원단시장으로서 의 장점 등을 기반으로 독자적인 브랜드를 개발했 다. 그 결과 독특한 미적 감각에 상업성을 가미한 베르사체와 아르마니, 프라다 등과 같은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을 배출하여 밀라노 컬렉션을 세계적인 패션쇼로 키워냈다.

세계적인 패션도시로 군림하고 있기는 하지만 밀라노 사람들은 의외로 실용적인 것을 선호한다.

디자인 자체가 단순해서 유행을 타지 않으면서도 입었을 때 착용감이 좋은 소재와 패턴을 선호하는 것이 이들의 경향이다. 물론 파티문화가 발달해 드 레스 등 화려한 옷차림에 우리보다 익숙한 것이 사 실이지만 평소엔 직장 여성들도 거의 메이크업을 하지 않고 매우 실용적인 복장으로 생활한다.

또한 밀라노는 패션도시로도 유명하지만 사실 이탈리아에서 가장 공업화된 경제 중심도시다. 전

5)스칼라 극장의 네오클레식한 전면부는 1778년에 쥬셉페 피에르마리니(G. Piermarini)에 의하여 설계되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파괴되었으나 원 래의 설계대로 재건축되었다. 이 극장 내에는 베르디, 도니제티 등의 악보와 오페라 의상 등이 전시되어 있는 박물관이 있다. 스칼라 극장의 왼 쪽에는 1898년에서 1903년까지 그리고 1906년에서 1908년까지 두 번 스칼라 극장의 수석 지휘자를 역임했던 아르투로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를 기념하는 600석 규모의 작은 스칼라(Piccolo Scala) 극장이 있다

6) 1800년대 중반에 건설되었으며, ‘밀라노의 응접실’이라고 불린다

7)비스콘티 가문이 살았던 왕궁(Palazzo Reale)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파괴된 천장을 복구하였으며,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두오모 박물관에는 밀라노 두오모와 관련된 유물들이 있으며, 특히 16세기와 17세기의 목재 성당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이 왕궁에는 또한 현대미술박물 관(Museo di Arte Contemporanea)이 자리하고 있다

8)이 미술관은 1776년에 설립되었으며, 이탈리아 화가들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이탈리아 최대 미술관 중의 하나다. 특히 이곳에 는 15세기에서 18세기까지 롬바르디아 학파와 베네토 학파로 활동했던 만테냐(Mategna), 티치아노(Tiziano), 베로네제(Veronese), 라파엘로 (Raffaello), 카라바조(Caravaggio) 등의 걸작이 전시되어 있다

9)브레라 미술관과 마찬가지로 롬바르디아 학파와 베네토 학파로 활동했던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10) 1785년 밀라노에서 출생, 1873년 사망하였다. 대표작으로는‘약혼자들 I Promessi sposi’, ‘카르마뇰라 백작 Il Conte di Carmagnola’등이 있다.

밀라노 시내에 위치한 그의 생가는 현재 박물관과 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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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적으로 발달하였던 섬유공업을 바탕으로 1880년 대에는 알프스 산맥의 풍부한 수량을 이용하여 금 속, 화학, 기계공업 등의 중화학공업이 성장하기 시 작함으로써 밀라노는 모든 종류의 공업을 포함하는 이탈리아 최대의 종합적인 공업도시가 되었다. 제2 차 세계대전 중에 시가지의 많은 부분이 폭격의 피 해를 입었으나 중앙역을 중심으로 한 지대는 근래 고층건물이 줄을 이은 오피스거리로 변모되고 지하 철도 정비되어, 로마와는 다른 근대적인 상공업도 시로의 성격을 뚜렷이 나타내고 있다.

밀라노는 이탈리아의 통일국가 성립 이후 경제, 문화, 사상의 분야에서 선두적 역할을 해왔다. 때문 에 밀라노 시민들은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전통 적인 지역주의에 근거하여, 또한 전통과 현대가 잘 조화된 특성을 들어 밀라노가 이탈리아의 정신적 수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밀라노가 로마에 밀려 제2의 도시로 된 데에는 로마의 역사적, 신화적, 상 징적, 피렌체를 중심으로 한 문예부흥의 흡수, 통 합, 고전적 도시경관을 선호하는 경향 등이 많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 중에서 밀라노 는 우리나라의 서울과 같은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곳일 것이다. 국제적인 상업도시여서 주변 도시로부터는 물론, 유럽 각국의 출입이 많 고 사방으로 관통하는 도로와 철도가 지나는 교통 의 요지인 만큼 매우 북적거림을 느낄 수 있기 때 문이다. 유럽 경제시장과 패션을 주도하고 있는 대 도시 밀라노는 볼거리뿐만 아니라 얻을 것도 많은 도시다.

소박함과 우아함으로 요약되는 패션거리 몬테 나폴레떼

밀라노 시내와 아르마니 패션쇼

*사진은 이흥렬(사진작가), 김지희(자유기고가)님과, 이탈리아 관광청에서 협조해 주셨습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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