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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康成의 말을 살펴보면, 그는 “銘이라는 것은 명칭이다.”라 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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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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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銘의 기원에 대하여

이라는 문류의 명칭에 대하여 유협은 『文心雕龍』에서 아 래와 같이 언급하였다. “銘이라고 하는 것은 명칭이니, 기물 을 관찰함에는 반드시 그것의 명칭을 이해하여야 한다. 명칭 을 바르게 정하고, 기물의 작용을 명확하게 하니, 이것은 언 행을 삼가는 미덕을 중요하게 본 것이다.” 유협은 위의 문장 에서 銘이라는 문류명은 名과 통한다고 하면서, 모든 기물의 명칭은 바르게 정해져야 하며, 그리고 그 기물은 정해진 명 칭에 따라서 절도 있고 조심스럽게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라 고 밝히고 있다.

(2)

여기에서 유협이 사용한 ‘正名’이라는 말은 공자가 춘추 말기 의 정국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子路에게 답한 글 ‘必也正名乎’라고 한 것에서 살필 수 있다. 이 말은 사람들 의 관계 속에서 명분을 바르게 한다는 뜻으로 사용된 것인데, 유협이 이를 차용하여 한문문류銘의 字義와 효용성을 나타 내는 데 사용한 것이다.

유협은 銘이라는 문류의 명칭을 인간이 일상생활에서 부딪 히는 모든 일상 속에서 도덕상 구별된 名義에 따라 반드시 지켜야 할 사람된 행위의 한계, 즉 군신․부자․부부 등에 의 한 각각의 본분, 즉 名을 지키게 한다는 뜻에서 유래된 것으 로 파악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오눌의『文章辨體』, 서사증의『文體明辨』

등에서도 일관되게 수용되었음을 살필 수 있다.

(3)

銘이라는 字意를 살펴보면 명칭과 서로 통하는 것이니, 그 뜻은 기물들에 이름한 것으로서 스스로를 경계하는 것이다.

鄭康成의 말을 살펴보면, 그는 “銘이라는 것은 명칭이다.”라 고 하였다. 유협은 “사물에 접하여서 그 사물의 이름을 바르 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말하길, “기물을 만 들어서 명분대로 행할 수 있으면 대부가 될 수 있다.”고 말한 것이 다.

1)陸侃如․牟世金, 『文心雕龍譯注(上冊)』, 齊魯書社, 1990.4, p.

128(故銘者 名也 觀器必也正名 審用貴乎盛德).

2)子路曰 衛君待子而爲政 子將奚先 子曰 必也正名乎, 『論語․

子路』.

3) 吳訥, 『文章辨體序說』, 銘條, p.46(按銘者 名也 名其器物以 自警也).

(4)

의 발생기원에 대하여 최초로 논한 자료로는 『文章流別論』

을 살필 수 있다. 지우가 설명한 銘의 기원을 보면,

문장이라고 하는 것은 하늘과 땅의 현상을 명시하고, 인륜의 질서를 밝히는 것이니, 이치를 궁구히 하고 개성을 파헤쳐 만물의 뜻을 추구하는 것이다. 왕의 덕택이 넘쳐 흐르게 되 면 시가 이루어지고, 사업이 성공하여 백성에게 그 혜택이 이르게 되면 頌이 일어나며, 공훈을 세운 것은 銘으로 드러 나며, 훌륭하게 죽게 되면 이것을 아름답게 여겨 誄가 모여 지게 되는 것이니, 史祝官은 卜辭를 늘어놓고 百官은 임금의 결점을 지적한다.

(5)

4)徐師曾 著 羅根澤校點, 『文體明辨序說』, 銘條, p.141(按鄭 康成曰 銘者 名也 劉勰云 觀器而正名也 故曰 作器能銘 可以 爲大夫矣).

5)本稿에서 考釋한 原文은 『全上古三代晋漢三國六朝文(淸 嚴可均編, 대만 세계서국, 중화민국 52년, 영인본)』의 「文章 流別論」 輯錄 全文과 近人 許文雨의 『文論講疏(대만 正中書 局 중화민국 56년)』와 『中國歷代文論選 第1冊(廓紹虞․王文 生 編, 上海古籍出版社, 1982)』에 실린 輯錄 全文을 對照 校 勘하여 살폈다.

(6)

6)『中國歷代文論選 第1冊』, 廓紹虞․王文生 編, 上海古籍出版 社, 1982, p.190(文章者 所以宣上下之象 明人倫之敍 窮理盡 性 以究萬物之宜者也 王澤流而詩作 成功臻而頌興 德勳立而 銘著 嘉美終而誄集 祝史陳辭 官箴王闕).

7)“藏武仲曰 … 夫銘天子令德諸侯言時計功大夫稱伐 『春秋左 傳襄公十九年』”, “銘者論讚其先祖之有德善功烈勳勞慶賞聲名 列於天下 『禮記, 祭統』” 등의 기록을 통해서도 銘이 지배계 층의 功勳을 기록하기 위하여 쓰여진 문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7)

사람을 다스리는 법은 예보다 더 급한 것이 없고, 예에는 제 사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음을 밝혀 예에 있어서도 제사를 으뜸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인륜의 예와 관련 된 祭, 祀, 哀, 誄의 문장이 『禮記』에서 발생하였다는 것은 타 당한 것이라 하겠다. 끝으로 유협의 『文心雕龍』을 통해 『春 秋』에서 발생하였다는 書, 奏, 箴, 銘 각 문류의 요체를 살펴 보면,

書의 본질을 자세히 종합하여 본다면, 그 근본은 하고 싶은 말을 다하는 데 있는 것이다. 말이란 가슴 속의 답답한 기운 을 발산시키고, 또 자기의 風度를 남에게 보이는 것이다. 그 러므로 조리가 暢達해서 보는 이의 정신을 맑게 하고, 문장 이 우아하고도 부드러워서 상대방의 마음을 기쁘게 하며, 교 양이 높으면서도 여유 있는 태도가 또한 마음소리의 대변인 것이다.

(8)

24)『禮記』, 祭統篇(凡治人之道 莫急於禮 禮有五經 莫重於祭).

25)『文心雕龍․書記篇』, 『新釋漢文大系 64』, 戶田浩曉 著, 明 治書院, 昭和 58年, p. 376(書: 詳總書體 本在盡言 所以散鬱陶 託風采 故宜條暢以任氣 優柔以懌懷 文明從容 亦心聲之獻酬 也).

26)위와 같은 책, p.340(奏: 夫奏之爲筆 固以明允篤誠爲本 辨 析疏通爲首 强志足以成務 博見足以窮理 酌古御今 治繁總要 此其體也).

27)위와 같은 책, p.174(箴: 箴全禦過 故文資确切).

28)위와 같은 책, pp.174-175(銘: 銘兼褒讚 故體貴弘潤 其取 事也 必覈以辨 其摛文也 必簡而深).

(9)

최초의 작품에 대해서 劉勰은 『文心雕龍․銘箴篇』에서

옛날 황제는 타고 다니는 수레의 팔걸이에 글을 새겨서 자기 스스로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禹王은 鐘을 걸어놓는 나무에 글을 새겨서 남들의 諫하는 말을 구했다. 殷의 湯王은 물동 이에 “날로 새롭게 하라”는 規範을 썼고, 周의 武王은 창문이 나 자리에 “반드시 경계”하라는 교훈을 썼다. 周公은 銅象에

“말을 삼가라”고 새겼고, 仲尼는 그릇에 물이 가득 차면 기우 는 것을 보고 얼굴빛을 고쳤다. 이것을 보면 지난 날의 聖人 들이 어떠한 일에서 경계할 것을 깨달은 것은 실로 그 유래 가 오랜 것이라 하겠다.

(10)

유협에 의해 언급된 黃帝, 禹, 湯, 武王, 周公, 仲尼의 銘에 대 한 구체적인 기록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먼저 황제의 銘을 거론하고 있는 최초의 기록을 살펴보면, 班固의 『前漢書』에

“黃帝銘六篇”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그 실제 작품은 살펴 볼 수가 없다. 宋의 羅泌가 편찬한 『路史』에서는

故作巾几之銘 曰毋弇弱 毋俷德 毋違同 毋敖禮 毋謀非德 毋 犯非義

라고 하여 황제가 나라의 기틀을 닦아가며 교훈을 삼기 위해 지은 <巾几之銘>의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宋의 胡 宏도 『皇王大紀』에서 황제의 덕업을 서술하면서

(11)

황제가 <輿几之箴>과 <金几之銘>을 지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禹임금이 銘을 새겼다는 기록은 鬻態가 찬한 『鬻子』

에서 라고 한 것에서 살필 수 있다.

禹임금은 다섯 가지 소리를 듣는 것으로서 천하를 다스렸으 니, 簨簴에 鍾鼓鐸磬을 설치하고, 그 아래 땅에는 흔들어 치 는 작은 북을 설치하여 온 세상의 선비를 구하였다. 그리고 악기가 설치되어 있는 簨簴에 銘을 다음과 같이 나란히 새겼 다. “나를 道로써 가르치고자 하는 사람은 鼓를 두드려라. 나 를 義로써 가르치고자 하는 사람은 鐘을 두드려라. 나에게 자신이 행할 수 있는 일을 말하고 싶은 사람은 鐸을 흔들어 라. 나에게 근심을 말하고 싶은 사람은 磬을 두드려라. 나에 게 訟事로서 하소연하고 싶은 사람은 鞀를 흔들어라.”라고 하 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다섯 가지의 소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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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文淵閣四庫全書』, 『鬻子』, 鬻態撰, 雜家一. 848冊, 1項, pp.13-14(禹之治天下也以五聲聽 門縣鍾鼓鐸磬 而置鞀 以得 四海之士 爲銘於簨簴 曰敎寡人以道者擊鼓 敎寡人以義者擊 鍾 敎寡人以事者振鐸 敎寡人以憂者擊磬 敎寡人以獄訟者揮 鞀此之謂五聲).

35)『大學』, 傳二章(湯之盤銘 日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36)『文淵閣四庫全書』, 大戴禮記, 武王踐阼, 漢의 戴德撰, 禮 三類, 128冊, 399項(王聞書之言 惕若恐懼 退而爲戒書 于席之 四端爲銘焉 于机爲銘焉 于鑑爲銘焉 于盥槃爲銘焉 于楹爲銘 焉 于杖爲銘焉 于帶爲銘焉 于履屨爲銘焉 于觴豆爲銘焉 于牖 爲銘焉 于劍爲銘焉 于弓爲銘焉 于矛爲銘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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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눌과는 달리 황제는 거론하지 않고 三代의 物銘을 시초로 삼으면서, 『大學』의 <盤銘>을 最古의 작품으로 보고 있다.

또한 오눌과 마찬가지로 銘의 본격적인 대두를 周 武王 이후 로 거론하고 있는 것을 살필 수 있다. 이상에서 두 사람의 논 의를 정리해 보면, 유협의 설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살 필 수 있다. 이들의 논의도 발생시기는 상고시대로, 현존하는 最古의 작품으로는 『大學』의 <盤銘>, 銘이 본격적으로 지어 졌던 때는 周 武王 때라고 정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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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록문의 문체이해

원 문 : 按金石例云 『記者 紀事之文也』 禹貢顧命 乃記之祖 而記之名 則昉於戴記學記諸篇 厥後 揚雄作蜀記 而文選不列 其類 劉勰不著其說 則知漢魏以前 作者尙少 其盛 自唐始也 其文以敍事爲主 後人不知其體 顧以議論雜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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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陳師道云 『韓退之作記 記其事耳 今之記乃論也』 蓋亦有感 於此矣 然觀燕喜亭記已涉議論 而歐蘇以下 議論浸多 則記體 之變 豈一朝一夕之故哉 故今採錄諸記 而以三品別之 如碑陰 之例 欲使學者得有所考 而去取焉 庶乎不失其本意矣

又有託物以寓意者 有首之以序而以韻語爲記者 有篇末系以詩 歌者 皆爲別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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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幷列于三品之末 仍分三體 庶得以盡其變云 至其題或曰某 記 或曰記某 則惟作者之所命焉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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