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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상징투쟁자로서의 천재: 백남준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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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상징투쟁자로서의 천재: 백남준의 경우

주요 수업 내용 수업자료 및 방법

- 단순한 괴짜, 기행을 일삼는 몽상가로서 천재보다 사회적 행위자로서 천재의 가능성을 알아보자.

- 당대 예술계의 상황 속에서 백남준이 비디오 아트가 갖는 새로움을 이 해해보자.

- 예술가들 사이에서 자신의 미학적 실천에 차별적인 위치를 부여하려는 예술가들의 ‘상징투쟁’을 이해해 보자.

에디트 데커, <백남 준>, 궁리, 2001 김동일, <예술을 유 혹하는 사회학>, 갈 무리, 2010

강의, 토론

1. 백남준의 수수께끼

백남준이 누구인가? 한국이라는, 국제 예술계의 변방 출신으로서 현대미술의 중심 에 선 최초, 최고의 거인이다. 백남준은 한국사회와 세계 예술장 모두를 동시에 석권한 천재라는데 이견이 없어 보인다. 그런 백남준에 관해 사회학적 관점에서 새로운 해석 을 시도한다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하지만, 백남준의 삶과 예술은 여전히 충분히 설 명되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신비스러운 수수께끼로 둔갑하고 있다. 이 수수께끼는 서 로 관련된 몇 가지 의문들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백남준은 어떻게 그가 살았던 역사와 사회의 질곡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둘째, 음악가이자 작곡가로서 미학적 실천을 시작했던 백남준은 과연 어떻 게 동시대 세계 미술계의 거장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을까? 백남준은 일제의 수탈과 식민지배, 그리고 분단과 동족전쟁이라는 유래를 찾기 힘든 현대사의 질곡을 겪으면서 도, 한국사회의 현실 속에서 결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가장 전위적인 예술을 실천했 다. 또한 음악가로서 아방가르드들의 아방가르드, 모든 파괴적인 전위들 가운데서도 가 장 파괴적인 자리에 자신을 위치시켰지만, 미학적 여정의 어느 순간 홀연히 미술가로 변신해 세계 예술장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 모든 과정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이 강좌는 백남준의 수수께끼를 앞 강좌에서 살펴본 사회학적 이론과 개념으로 풀어 내고자 한다. 먼저, 백남준의 성취는 단순히 미학적 결과물이 아니라, 백남준의 실천과 사회공간이 조응하는 지점에서 철저하게 사회화되는 과정과 분리할 수 없다는 가정 아 래에서,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장’(field)이론과 라투르(Brono Latour)의 ‘이해관 계 번역’(tranlation of interests) 개념을 도입하여, 백남준의 미학적 성취와 그 성취를 가능하게 했던 당대 장의 상황을 규명하고자 한다.

백남준이 자신의 전위적 예술을 지속하면서 그 경로의 궤적 속에서, ‘최초의 비디오 아트 예술가’로서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부르디외의 의미에서 예술장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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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자였을 뿐 아니라, 라투르의 관점에서 예술장과 사회공간 사이의 환류를 유발하는 이해관계 번역자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했기 때문으로 판단한다.

2. 백남준의 예술적 궤적과 생애

이 수업은 백남준의 비디오아트에 대한 장분석을 수행하기에 앞서 그의 미학적 실 천의 경로를 구분하고, 논의의 대상을 제한하고자 한다. 백남준은 “세개의 서양언어와 세 개의 동양언어를 배우고, 홍콩, 카이로, 레이카비치를 방랑한 소수 대륙의 소수 국 가에서 온 한국인”이라는 자신의 말처럼 파란만장한 삶으로 가득차 있는 “트랜스내셔 널한 노마드적 예술인이었다. 또 예술장 내에서도 “작곡가”와 ‘조각가’, 그리고 ‘실험적 독립영화제작자’ 사이를 오가는 복잡하고 다양한 미학적 실천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논 의의 대상과 관점을 효과적으로 제한하지 못할 경우, 백남준에 대한 장 분석은 쉽게 가능하지 않을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82년 휘트니미술관의 큐레이터로서 백남준의 회고전을 기획한 핸하르트의 시기 구분은 효과적인 준거점을 제시한다.

①1932-1964 경기중, 경기고 졸. 동경대 유학, 쇤베르크에 관해 졸업논문을 씀.

독일 뮌헨대학에 유학. 58년 존 케이지를 만나면서 플럭서스 가입.

최초의 비디오아트 전시회 <음악의 전시> 개최(63)

②1964-1968 뉴욕 이주. 샬럿 무어맨과 협연시작. 최초의 비디오 영상제작.

③1969-1976 백/아베 비디오 신서사이저 개발. 에버슨 미술관 회고전(74) 개최.

④1977-1982 휘트니 미술관 회고전(82)으로 뉴욕 예술계의 중심에 진입.

핸하르트의 시기구분은 그가 기획했던 휘트니 회고전이 열렸던 82년으로 끝나지 만, 백남준의 성공은 이후 예술장과 사회공간 사이의 환류를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확 장된다. 이러한 확장은 특히, 한국의 예술장과 사회공간에서 두드러지게 관찰되는데, 이를 핸하르트의 시기 구분에 다음과 같이 덧붙여 볼 수 있다.

⑤1982-1988 <굿모닝 미스터 오웰>(84), <손에 손잡고>(88) 등 다양한 위성작업 국립현대미술관 <다다익선>(87) 설치

⑥1988-1995 국립현대미술관 <비디오 때, 땅>전 개최(91)

베니스 비엔날레 황금사자상 수상(93), 호암상 수상(95) 광주비엔날레 설립(95)

⑦이후 1996년 뇌경색으로 쓰러짐.

뉴욕 솔로몬 R. 구겐하임 <백남준의 세계>전 개최(2000) 2006년 지병으로 서거

백남준은 32년 서울에서 당시 굴지의 제조업체였던 태창방직의 소유주 백낙승과 조 종희의 3남 2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경기중학교,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전 쟁 기간 동안 동경대학으로 유학하여, 미학과 예술사 등을 전공했으며, 이후 독일 뮌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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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으로 유학했다. 이때 다름슈타트 하계음악페스티벌(57-58년)에서 전위적 실험음악 집단인 플럭서스(Fluxus)의 정신적 지주이자 지도자였던 슈톡하우젠(Kalheinz Stockhousen)과 케이지(John Cage)를 만나면서 본격적인 예술활동을 시작한다. 63년 독 일 부퍼탈의 파르나스 갤러리에서 개최한 <음악의 전시-전자텔레비전 Exposition of Music-Electronic Television>은 백남준의 첫 번째 개인전이자 기념비적인 최초의 비디 오아트 전시회였다. 이 전시를 기점으로 백남준은 뉴욕으로 이주하여, 마치우나스 (George Maciunas), 히긴스(Dick Higgins), 그리고 첼리스트 무어맨(Charlotte Moorman) 등과 함께 플럭서스 공연을 활발하게 전개할 뿐 아니라, 본격적인 비디오아 티스트로 활동하게 된다.

74년 에버슨 미술관(Everson Museum)과 82년의 휘트니 미술관(Whiteney Museum of American art)에서 열린 회고전은 백남준의 예술적 성공에 결정적인 계기 를 제공했다. 이 전시들을 통해 비디오아트는 현대미술의 공식적인 개념이 되었고, 백 남준은 그 ‘창시자’로서의 인정을 획득한다. 뉴욕 예술계의 중심에 진입하는 데 성공한 백남준은 이 성공을 1984년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Good Mornig Mr. Owell)>이라는 위성 기획으로 연결시켰으며, 당시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문화적 동시 대성을 과시해야할 필요가 절실했던 대한민국 정부와 이해를 상호번역했다.63) 이후 백 남준은 9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한스 하케(Hans Haacke)와 함께 독일관 대표로 참여 하여 최고의 영예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고, 비슷한 시기에 『슈피겔

Der Spiegel

』,

『캐피탈

Capital

』등의 잡지가 발표하는 세계 미술인 순위에서 리히터(Gerhard

Richter), 나우만(Bruce Nauman), 폴케(Sigma Polke), 바젤리츠(Georg Baselitz) 등과 한 자리 수 내에서 경쟁하는 세계적 작가로 군림했다.

3. 사회공간 내 위치의 장내 굴절: “황색재앙! 그것이 바로 나다”

이 수업이 이 장에서 주목하는 것은 당대 예술장과 조응하는 백남준의 실천을 좀 더 사회학적으로 특정(特定)하는 것이다. 부르디외의 관점에서 살펴 본 것처럼, 예술장 은 장 내에서 생산된 특수한 상징자본을 불평등한 방식으로 배분하는 위계화된 공간이 며, 백남준 역시 이점을 지적하고 있다:

“우리 예술세계는 1마리의 수탉만이(다른 99마리의 수탉은 굶주리고 있는데) 1마리 또는 100마리의 암탉을 품는 행운을 얻을 수 있는 동물의 지배체계를 그대로 옮겨왔다. 예술과 헤비급 권투의 세계에서는 최고 실력자 다섯명만

63) 파리, 베를린, 서울을 인공위성으로 연결한 이 기획은 요셉 보이스(Joseph Beuys), 존 케이지(John Cage), 머스 커닝햄(Merce Cunningham) 등 백남준 네트워크의 핵심 동맹들 뿐 아니라 로리 앤더슨(Laurie Anderson), 피터 가브리엘(Peter Gabriel), 앨 런 긴즈버그(Allen Ginsberg), 벤 보티에(Ben Vautier), 이브 몽땅(Yves Montand), 필립 글래스(Philip Glass), 탐슨 트윈스 (Thompson Twins) 등 당대 최고의 유명인들이 출연했고, 재방송을 포함하여 전세계의 약 2천5백만 명이 시청했다. 백남준의 국제적 명성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스펙타클은 당시 국가권력의 필요를 충족시켰고, 이후 백남준은 대한민국 정부가 요 구하는 세계적 문화이벤트의 대표 메뉴가 되었다. 비슷한 시도는 이후 <바이바이 키플링(ByeBye Kippling)>(1986), <손에 손 잡고(Wrap the World)>(1988)를 포함하여, 뉴밀레니엄 기획 <호랑이는 살아있다>(2000. 1. 1), 2002년 한국/일본 월드컵 개막 공연 <평화의 종>(2002. 5. 31) 등, 대규모 국제행사들에서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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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세를 낼 수 있고, 다른 9만 9999명의 예술가와 권투선수는 배고픔을 참아야 한다”(백남준)

예술장이 장의 유지와 전복을 다투는 대립적인 위치들의 그물망이라면, 당대 예술 장의 참여자였던 백남준 역시 한정된 상징자본의 배타적 전유를 위해 경쟁하는 투쟁자 였음은 당연하다. 당대 예술장에 변증법적으로 조응하는 백남준의 실천은 장 내 대립 적 경쟁자들 사이에서 백남준이 수행하는 전면적인 투쟁으로 변환된다. 이처럼 백남준 의 실천을 고립된 개별 작가의 순수한 미학적 행위가 아니라 장 내 투쟁으로 이해할 때, 사회적 존재로서 백남준과 비디오아트의 사회적 속성은 더욱 더 분명해질 수 있다.

실제로, 백남준은 ‘나는 다소간 안티, 안티였다’(I'm more or less anti-, anti-)(백남준아 트센터, 2009에서 재인용)라는 자기규정처럼 동시대 예술사의 가장 극렬한 투쟁자 가운 데 하나였다.64) 백남준이 경험한 삶의 극단적인 모순은 그의 원초적인 위치취하기가 수행되는 독일체류기 이후 그의 장 내 투쟁에 반영되었다. 백남준은 서구에서 보잘 것 없는 아시아계 후진국 이주민이었으며, 이는 “황색재앙! 그것이 바로 나다”라는 선언에 서 나타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백남준 자신이 사회공간에서 자신의 인종적 사회적 위치가 미학장 내 미학적 투쟁과 실천으로 연결된다는 점이다.

“어쩌면 내가 한국인 혹은 동양인으로서 느끼는 ‘소수민족의 콤플렉스’ 덕분에 아주 복잡한 사 이버네틱스 예술작품을 만든 것은 아닐까?”(백남준).

백남준은 사회공간 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그 위치의 미학적 굴절을 강하게 의식하 고 있다. 이 때 사회적 위치에서 파생되는 ‘소수민족 콤플렉스’는 당대 예술장 내 저항 자로서 위치와 이 위치 속에서 수행되는 백남준의 전략에 의해 미학적으로 굴절된다. 그러한 굴절의 가장 백남준적인 형태이자, 최종적인 귀결이 바로 첨단 ‘사이버네틱스 예술’로서의 비디오아트였다. 따라서 백남준이 위치한 당대 예술장의 상황과 투쟁의 역 학은 백남준의 사회적 위치와 비디오아트라는 미학적 실천 사이를 매개하는 핵심적 조 건이다. 이점을 제외한 채, 백남준을 천재로서 신비화하는 작업은 비디오아트의 사회적 확장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백남준은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장 내 미학적 투쟁을 통해 당대 예술장의 상황에 정확히 조응시켜 나가면서, 비디오아트의 미래적 전망을 열어 나갔던 사회적 행위자였다.

백남준의 장 내 투쟁은, 당대 예술장 속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차별적인 지점에 위 치시킴으로써 나타났다. 그는, 쇤베르크를 따라서 음악에 입문했고, 존 케이지를 따라 서 음악장 내 전복자로서 자신을 위치시켰지만, 쇤베르크와 존 케이지 모두와 다른 위

64) 백남준은 그의 예술인생 대부분을 모든 대립되는 갈등구조가 첨예하게 만나는 치열한 전선 속에 위치했다. 그는, 일제의 수 탈이 극에 달한 유년기에 친일 자본가 가정에서 가장 부유한 삶을 보냈고,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한 지식인인 동시에, 스탈린 주의를 가장 혐오한 부르주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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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에 서고자 했다. 초기 독일음악장 내에서 행해진 과격하고 파괴적인 행위 역시 이러 한 차별화 전략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쇤베르크가 <무조성 atonal>을 썼습니 다. 존 케이지는 <무작곡 a-composition>을 썼습니다. 저는 <무음악 a-music>을 썼지 요.”(백남준, 1958: 401). 백남준이 수행했던 음악의 파괴는 결국, 당대 예술장 내에서 쇤베르크와 존 케이지, 그리고 백남준 자신 사이에 동일성 뿐 아니라 차별성을 설정해 나가는 투쟁의 구체적 과정이었다. 이러한 투쟁은 독일체류기에서 나타나는 원초적 위 치취하기 국면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백남준의 뉴욕시대에서도 공통적으로 발 견되는 특징이다. 뉴욕 예술장에서 백남준은 한낱 독일을 거쳐 더욱 거센 경쟁의 중심 에 뛰어든 아시아계 이방인이었다. 백남준은 ‘뉴욕에서 살아남기’를 ‘신문에 날 일’을 통해 가능한 엄청난 투쟁으로 표현한다. “뉴욕바닥에서 살아남는게 어려워요. 1년에 한 번씩은 신문에 나와야 하거든요.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예요”. 게다가 백남준은

“피아노도 못치고, 작곡도 못하고, 그림도 못그리”는 일종의 ‘무능력자’였다. 뉴욕 미술 장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자본으로서의 어떤 아비튀스도 갖지 못했던 것이다.

백남준: 그런데 본래 내가 테크닉이 없으니까. 피아노도 못치고, 작곡도 못하고, 그림도 못그리고 하니까 이것저것 해보는 거예요.

김재권: 그건 너무 겸손하신 말씀입니다.

백남준 아! 천만에 말씀. 사실예요. 사실.(김재권-백남준, 1990: 67, 밑줄은 연구자)

나는 처음에 작곡가로 시작했지만, 사실은 미학자, 산문가였죠. 그리고 행위예술을 했지만 배우는 아니었어요. 한번 도 배우 수업을 받아본 적이 없죠. 나는 심지어 수줍음을 타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는 TV를 연구했죠...나는 아무도 가보지 않은 곳을 가고 싶었던 거예요"(이르멜린 리비어와의 인터뷰, 백남준 외, 2010: 213, 밑줄은 연구자).

흥미로운 사실은, 백남준의 작곡이나 연주능력이 음악장을 전복할 수는 없었지만, 뉴욕 미술장 내 투쟁에서 전략적으로 사용되었을 때 자신의 존재를 차별화하기에는 충 분했다는 점이다. 특히 뉴욕 예술장 내 초기 활동 속에서 백남준은 무어맨과의 협연과 자신의 비디오아트를 결합시킨다.65) 이러한 결합은 음악장 내 전복전략을 위한 ‘음악의 시각화’의 과제를 뉴욕 미술장에서 확장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음악적인 아비튀스의 도입이 미술장 내 유사한 비디오아티스트들 사이에서 백 남준의 위치를 차별화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뉴욕에서 비디오아트의 제도화에 중요한 계기가 된 <창조적 매체로서 TV>(1969년 하워드 와이

65) 피아노를 때려 부수는 식의 파괴적인 퍼포먼스는 뉴욕에서 새로운 동반자 샬롯 무어맨과 함께 작업하면서 좀 더 섹시하고 대중적 흥미를 끄는 작업들로 바뀐다. 백남준은 무어맨과의 퍼포먼스를 TV와 결합시키고 있다. 1965년 1월 뉴욕의 뉴스쿨 에서 <백남준(Nam June Paik: Electronic TV, Color TV Experiments, 3 Robots, 2 Zen Boxes & 1 Zen Can)>전을 개 최했고 무어맨이 반라로 첼로를 연주하는 <성인용 첼로 소나타 No. 1(Cello Sonata No. 1 for Adults Only)>을 공연했다.

또 1967년 2월 9일에는 역시 무어맨과 <오페라 섹스트로니크Opera Sextronique>를 공연한 뒤 뉴욕 경찰에 연행되었는데, 이 사건이 신문에 보도되어 대중적 인지도를 높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무어맨은 오노 요코의 룸메이트이기도 했는데, 그 의 뉴욕 시대가 결국 플럭서스 네트워크의 연장이자 확장임을 보여주는 작은 단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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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 갤러리)에서 백남준은 무어맨과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TV 브라(TV Bra for Living Sculpture)>(1969)를 공연했는데, 이처럼 전위 음악적 퍼포먼스와 비디오의 결합은 전시 에 참여한 다른 어떤 비디오작가들의 작업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차이였다. 그런 의미 에서 음악의 시각화는 음악장 내 투쟁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뉴욕 미술장에 투쟁 속에서 확장되었으며, 비디오아트는 이 과정 속에서 형성된 결과라 할 수 있다. 백남준 은, 자신에게 불리한 예술장 내 ‘게임의 규칙’을 계승함으로써 불리한 게임을 수행하기 보다, 그 게임의 규칙을 전복하거나 변형함으로써 자신에게 유리한 새로운 규칙을 수 립하고자 시도했으며,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당신이 게임을 하려고 하는데 게임의 규칙을 모른다면, 게임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미 술계에서는 하룻밤 새에 게임의 규칙을 바꾸는 것이 가능하지요. 당신이 게임에서 질 것 같으 면, 규칙을 바꾸면 되는 겁니다”(르네 수잔느, 2010: 48-49).

4. 팝아트 vs. 비디오아트

백남준은 대립되는 갈등구조가 첨예하게 만나는 치열한 전선 위에서 자신의 투쟁을 전개했다. 음악장 내 원형적 위치취하기와 투쟁이 피아노와 바이얼린, 그리고 교향악을 중심으로 강고하게 구축된 지배 아비튀스와 쇤베르크의 12음계와 그에 대한 비판적 재 해석을 퉁해 전개된 저항 아비튀스 사이의 대립 속에서 전개되었다면, 미술장에서 백 남준의 투쟁 역시 당대 미술장을 지형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당대 뉴욕은 40년대 이후 세계 미술계에서 이미지 조직과 분류의 지배 아비튀스로 공인된 추상표현주의 (abstract expressionism)와 팝아트(pop art)가 장의 상징자본을 양분하는 시기였다. 흥 미로운 것은 백남준이 자신의 투쟁의 대척점에 둔 것은 추상표현주의보다는 팝아트였 다는 점이다(김광우, 2006).

“팝아트Pop Art를 죽여라/옵아트Op Art를 죽여라/폿아트Pot Art를 죽여라(말장난 pot=해시시)/백아트 Paik-Art 를 죽여라”(백남준).

여기서 백남준은 팝아트와 옵아트의 대립자인 동시에 그것들을 포함하는 다른 양 식들에 의한 대립을 통해 스스로 죽임을 당해야 하는 존재로 자신을 묘사한다. 백남준 은 자신과 자신이 속한 투쟁집단의 미학적 실천을 ‘가난한 예술’(poor art)로 규정하며, 노골적으로 ‘부자예술’인 팝아트와 대립시키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팝아트’라고 불리는 ‘부자예술’의 지배에 대항해서 우리 ‘가난한 예술’(케이지, 슈톡하우젠, 커닝 햄을 포함한 모든 아방가르드 퍼포먼스 예술)은 방어수단이 전혀 없다”(백남준 외, 2010: 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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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팝아트와는 달리

"비디오는 누가 독점할 수 없고, 모두가 쉽게 공유할 수 있는 공동체의 공동재산이다. 비디오는 유일한 작품의 독 점에 바탕을 둔 체제로 작동하는 예술세계에서 힘겹게 버텨내고 있다. 현금을 내고 사가는 작품, 순전히 과시하고 경쟁하는 작품들로 이루어진 예술세계에서 말이다”(백남준 외, 2010: 106).66)

여기서 이 수업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팝아트에 대한 백남준의 사적 경멸이 아 니라, 자신의 위치를 끊임없이 당대 예술장의 비어 있는 지점으로 위치시키고자 했던 백남준의 시도이다. 비디오아트는 이러한 차별화 과정에서 “다양한 영역 사이의 경계 지역, 그리고 음악과 시각예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전자공학과 고전적인 의미에서 의 인간성 같이 서로 상이한 매체와 요소들을 접목”(Decker, 2001[1998]: 50)을 가능하 게 하는 새로운 ‘가능성의 공간’(space of possibles)이었다.

5. 기원을 전유하기: 백남준 vs. 볼프 포스텔

백남준은 자신의 새로운 시도와 투쟁이 장 내에서 생산해 낼 인정과 그러한 인정 을 통해 재편될 장의 구조에 관해 알고 있었다. 백남준은 서로의 아이디어를 상호 공 유했던 플럭서스 동료들에게도 63년 3월의 <음악의 전시>까지 자신의 TV 실험을 알리 지 않았다. 플럭서스 집단은 특정한 저자가 작품에 대한 권리와 소유권을 전유하는 것 을 소위 자본주의적 창작방식으로 규정하고, 복수의 참여자들이 다양한 아이디어를 편 지와 문서를 통해 상호 공유하는 예술적 실천의 ‘사회주의’를 지향했다. 이러한 방식의 공동작업은, 몇몇 천재들에 의해 독과점된 상징자본을 미술시장이라는 특수조건에서 막대한 경제자본으로 전환하고, 이렇게 전환된 경제자본을 또다시 장내에서 신화화된 상징자본으로 재전환함으로써 외연을 확장해 나가는 당대 예술장에 대한 저항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식의 공동작업은 당대의 장내 상황에서 비디오아트라는 새로운 가능성의 공간의 ‘설립자’에게 주어질 인정과 그 인정이 가져올 상징자본의 전유를 불 가능하게 만들 수 있었다. 백남준은 비디오아트가 미학적 투쟁의 공간인 예술장에서 향후 초래할 결과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려하지 않았다. 특히 백남준과 볼프 포스텔 (Wolf Vostel)과의 비디오아트의 기원을 전유하기 위한 경쟁은 백남준의 장 투쟁의 한

66) 팝아트에 대한 맹렬한 적개심과는 달리,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백남준의 태도는 매우 우호적이다. 그 이유는 다음의 몇 가지 를 들 수 있다. 첫째, 무엇보다, 비디오 신서사이저를 통해 TV 수상기 화면에서 백남준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전자 이미 지들의 대부분이 추상적 도형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이는 양식상 추상표현주의에 속한다. 어떤 의미에서 백남준은 일면 전 자기술을 통해 추상표현주의를 TV 수상기 위에서 실현하고자 했던 실천자라 할 수 있다. 둘째, 당대 60년대 중반 이후 추상 표현주의는 미술장 내 지배 아비튀스의 위치를 내주고 있었지만, 여전히 팝아트에 대항하는 입지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팝아트에 대한 저항과 미술장내 최소한의 제도적 근거를 원했던 백남준의 필요에 적합했다고 볼 수 있다. 추상표현 주의에 대한 백남준의 우호적 입장은, 84년 <굿모닝 Mr. 오웰손>에 따른 경제적 파산 이후 작품판매를 목적으로 제작된 ‘오 일 온 캔버스’의 형태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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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면이라 할 수 있다. 포스텔 역시 백남준과 함께 플럭서스의 주요 멤버였으며, 백남준 의 <음악의 전시: 전자텔레비전>로부터 불과 두 달 뒤인 1963년 5월 22일 미국 스몰린 화랑(Smolin Gallery)에서 <텔레비전 데콜라주(Television Decollage)>를 개최했다. 여 기서 포스텔은 자신의 TV작품, <TV 데콜라쥬>의 제작년도를 58년에서 63년으로 기록 함으로써, 그가 백남준보다 앞서 비디오아트를 시작했음을 분명히 했다. 이후 포스텔의 기록한 제작년도는 플럭서스 평론가이자 동료들인 딕 히긴스(Dick Higgins)와 알 핸슨 (Al Hansen)에 의해 공인됨으로써, 백남준과 포스텔 사이에 누가 비디오아트의 시조인 가의 문제는 중요한 쟁점이 되었다.

비디오아트의 기원으로서의 자격을 두고 벌어진 이 논쟁은 백남준 자신의 투쟁인 동시에, 예술장의 참여자들의 투쟁이었다. 비디오아트의 기원에 관한 논쟁은 주로, 비 평가와 미술사가들에 의해 주장되고, 검증되었다. 포스텔과 투쟁에서 백남준의 승리 역 시 백남준 자신의 투쟁보다는 데이비드 로스, 존 핸하르트, 불프 헤어초겐라트 등의 적 극적인 지지와 동맹을 통해 가능했다. 특히, 1998년 백남준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에서 포스텔 기원설에 대한 실증적 검토와 비판을 수행했던 미술사가 에디스 데커(Edith Decker-Philips)는 “1963년 포스텔의 뉴욕전시회 이전에 텔레비전을 예술적으로 사용했 다는 것을 증명하는 문서는 존재하지 않는다”(Decker, 2001[1998]: 73)라고 지적하면 서, 포스텔 기원설에 관한 모든 주장을 부정하고 있다.

히긴스와 앤더슨이 언급한 포스텔의 텔레비전 작업은 스몰린 화랑에 전시된 텔레비전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 텔레비전은 텔레비전에 부착되어 있는 포장을 제외한다면, 백남준의 부퍼탈 전시회를 직접적으로 상기시키고 있다.

적어도 개개의 선이 들어 있는 화면은 백남준의 전시 작품을 그대로 반복한 것이다. 여섯 대의 방해된 텔레비전은 확성기와 테이프 리코더, 그리고 라디오와 연결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앨 핸슨이 곧바로 지적하고 있듯이 포스텔은 이러한 기술을 얼마 지나지 않아 이용했던 것이다. 게다가 포스텔은 스몰린 화랑에서 볼 수 있었던 전시회와 핸슨 이 묘사하는 행위들을 독일에서는 반복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포스텔의 진술과 1963년 5월 이전의 텔레비전 작업에 관한 사진들은 그 자신이 합법적이라고 여기면서 재구성한 시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날짜는 인정될 수가 없는 것이다.”(Decker, 2001[1998]: 79-80)

여기서 데커가 주장하는 논점은 분명하다. 포스텔이 히긴스나 핸슨의 주장처럼 백 남준보다 앞서 TV를 통해 작업했다는 증거는 없으며, 나아가 1963년 5월 열린 포스텔 의 <텔레비전 데콜라주> 전시는 3월에 열린 백남준의 <음악의 전시>의 모방이며, 아 류라는 것이다. “기술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고 진술하는 포스텔이 혼자서 그리 고 아무런 구체적인 자극도 없이 이러한 결과에 도달했다는 것은 믿기 어렵 다”(Decker, 2001[1998]: 78-79)

지금까지 살펴본 백남준의 투쟁은, 그가 철저하게 예술장 내 존재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백남준의 투쟁은 개인과 개인간의 투쟁이 아니라, 미학적 실천의 차별성을 가능하게 하는 객관적 조건인 동시에, 본질적으로 대립적인 위치들의 그물망인 예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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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백남준에게 요구한 실천의 형태였다. 백남준의 투쟁은, 그런 의미에서 백남준 개인 의 주관적 투쟁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예술장 내 참여자들 사이에 수행된 객 관적 투쟁이었다. 따라서 이 투쟁에서 백남준은 자신이 수행하는 투쟁의 주체인 동시 에 예술장 내 또 다른 타자들에 의해 수행되는 투쟁의 객체이자 목적이 된다. 독일 음 악장 내 원초적 위치취하기와 뉴욕 미술장으로의 장간 횡단기에 보여준 극렬한 투쟁이 백남준 자신이 주체가 되어 수행한 장 내 차별화의 시도라면, 포스텔과 비디오아트의 시조의 자격을 두고 벌어진 논쟁은 백남준을 객체로 삼아, 그에게 특정한 상징자본을 부여함으로써 역으로 자신들의 장 내 위치를 확보하려는 다양한 참여자들 사이의 투쟁 으로 나타난다. 이 수업이 여기서 백남준의 투쟁을 백남준 자신의 주관적 투쟁이 아니 라, 장이 요구하고 부여하는 객관적 투쟁임을 주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6. 이해관계 번역자로서 백남준

백남준은 사회공간에서 국가적 지배/저항, 이념의 좌/우가 식민과 전쟁의 폭력적 스펙타클로 나타난 시기에 한반도에서 태어나, 일본, 독일, 미국으로 삶의 거점을 옮겨 다니면서, 동/서의 세계관과 가치가 대립하는 지점 속에 자신을 위치시켰다. 대립과 갈 등의 첨예한 전선 위에 자신을 두는 방식은 사회적 ‘위치취하기’(positioning)인 동시에 미학적 위치취하기이기도 했다. 그는 음악장/미술장의 경계를 오갔고, 음악장 내 전통 /전위, 미술장 내 추상/팝/해프닝이 대립하는 지점에서 자신의 미학적 실천을 수행했 다. 흥미로운 것은 백남준이 이 경계를 유영하면서 효과적 방식으로 정교한 네트워크 를 짜내는데 성공해왔다는 점이다. 사회공간과 예술장에서 백남준의 여정이 계속될수 록 소위 백남준 네트워크는 그 규모나 두께를 더했고, 그 확장된 네트워크의 최종적인 결과물이 바로 ‘비디오아트’로 호명되었다. 백남준 네트워크의 반경은 말년에 이르러서 는 예술장을 넘어서 사회공간 전체에 포화되는 거대한 사회문화 권력에 도달하게 되는 데, 이 현상은 백남준 사후에도 계속되었다. 이 수업은 이러한 백남준 네트워크의 설립 과 확장이 백남준 혼자만의 ‘영웅적 개인주의’만으로 호명될 수 없으며, 백남준 자신을 포함하여 그를 둘러싼 예술/문화장 내 참여자들, 그리고 백남준의 이름을 통해 자신의 이해를 추구하려는 사회공간의 행위자들의 사회적 실천의 결과이며, 그런 의미에서 사 회학적 현상임을 주장하고자 한다.

이때, 라투르의 이해관계 번역 개념은 백남준 네트워크가 형성되는 과정을 설명하 기에 적합한 이론적 자원을 제공한다. 여기서 이 수업이 부르디외의 장 개념 속에서 백남준의 미학적 투쟁을 철저하게 장 내 실천으로 보았던 지금까지의 논의를 벗어나, 미시/거시, 내부/외부를 구별함으로써 장의 자율성을 부정하는 듯 보이는 라투르의 개 념에 관심을 갖는 이유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즉, 부르디외와 라투르가 서로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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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조를 통해 부각하고자 했던 자율성과 관계성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며, 이점을 백남 준의 비디오아트의 사회적 확장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즉, 부르디외적 관 점에서 장의 자율성을 획득하기 위한 장 내 투쟁은 라투르의 관점에서 이해관계 번역 을 통한 장내, 혹은 장들간 자원들을 동일한 그물망 내로 효과적으로 조직함으로써 가 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라투르의 관점에서, 이해관계 번역을 통해 조직되는 그물망 역 시 그 속에서 조직된 자원들의 모든 차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며, 이는 부르디외적인 관점에서 장의 자율성과 배치되어 보이지 않는다. 특히, 예술장과 같이 장 내 자율성과 장들 간 관계성이 비등한 장에서, 부르디외의 장의 자율성과 라투르의 이해관계 번역 개념을 결합하는 작업은 매우 필요해 보이며, 이는 백남준의 비디오아트에 대한 분석 에서 절실하게 요구된다. 왜냐하면, 부르디외적 관점에서, 음악장 내 원초적 위치취하 기와 독일음악장에서 뉴욕미술장으로의 장간 횡단, 그리고 미술장 내에서 또 다른 이 미지조직의 아비튀스를 갖는 자율적 하부장으로서의 비디오아트를 설립하기 위한 백남 준의 장 내 투쟁은, 라투르적인 관점에서, 이해관계 번역(translation of interests)을 통 해 장 내외의 다양한 자원들을 효과적으로 결집하여 강력한 네트워크를 조직하는 과정 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백남준의 명성과 비디오아트의 제도화는, 백남준이 조직하는 네트워크의 확장의 정도와 비례하며 증가했다. 백남준은 차별적인 참여자들, 심지어 대립적 참여자들의 이 익을 백남준 자신의 이익과 상호적으로 변환시켜내고 증폭하는 데 있어서 남다른 수완 을 보여주었다. 특히, 63년 부퍼탈에서의 <음악의 전시> 직후 뉴욕미술장에서 본격화 된 TV작업은 독일음악장에서 행해진 퍼포먼스 중심의 작업에 비해, 많은 TV수상기와 비디오 녹화기, 비디오 신서사이저 장비와 같이 막대한 재원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미술장 내에서 백남준과 경쟁하는 ‘오일 온 캔버스’(oil on canvas)의 비교적 손쉬운 작업 아비튀스에 비해서도 결코 유리한 상황이라 할 수 없었다. 여기에 당시 그를 후원했던 백남준 가문의 경제적 파산이 맞물린다. 이러한 조건은 백남준으 로 하여금 예술장 내 미학적 실천과 투쟁을 위해 필요한 자원을 외부에서 구해야만 하 는 상황을 가속화시켰다. 백남준이 수행했던 장들간 이해관계번역 역시 당대 예술장 속에서 백남준이 위치한 상황과 별개일 수 없는 것이다. 백남준은 자율적 예술장 내 참여자이자 투쟁자였을 뿐 아니라, 장들간 이해관계번역에 있어서도 유능했고, 그러한 이해관계번역을 통해 불리한 장내 투쟁의 한계를 극복해 나갔다. 그는 TV를 통한 자신 의 실험이 단순히 미학적 영역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접 분야에서 상상할 수 없는 성 과를 공유할 것이라고 설득하고 있다.

특히 브라운관과 비디오테이프 녹화기가 미술에 미칠 엄청난 중요성을 주목해야 한다. 또한 예술가들의 비관습적인 본능에 의해 추진된 컴퓨터 관련 비디오실험들은 순수과학과 응용테크놀로지 분야에서도 예기치 못한 성과를 가져 올 수 있다. [중략] 모든 영화와 TV기술은 혁명을 맞이할 것이고 전자음악의 영역은 새로운 전자오페라의 지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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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장될 것이며, 회화와 조각도 일대 변화를 겪을 것이다. [중략] 온갖 종류의 형태를 만들 수 있는 이 새로운 가능 성은 소위 지각의 구성이나 존재의 특성, 행동, 군집, 기억, 통찰, 학습 등 전 영역에 걸친 인지심리학의 연구에 도 움이 될 것이다. 또한 레이더나 反레이더는 말할 필요도 없고, 시각적 인식이나 광학적 특성인지, 고객의 시각적 스 케닝, 비디오폰, 방전함 사진 등등 오늘날 시각적 전자공학의 주된 관심사 해결에도 기여할 것이다(백남준)

백남준은 자신의 TV실험은 예술장의 상황과 구조를 변화시킬 뿐 아니라, 이러한 변환을 통해 예술장과 경계면을 맞대고 있는 다른 인접 장들의 구조를 상동적으로 재 편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라투르의 저작 속에서 파스퇴르가 "만약 가축 유행병, 그리고 더 나아가 역병에 대해 이해하고 싶다면, 당신은 단 한 곳, 즉 파스퇴르 실험실 로 가야하며, 당신 자신의 것을 대체할 단 하나의 과학, 즉 미생물학을 배워야 한다

"(Latour, 1983)라고 외쳤다면, 백남준 역시 자신의 TV실험에 대한 지원을 포드자동차 디자이너가 이용할 수 있는 ‘불법시청을 방지하기 위해 고안된 주파수의 코드화’, 경찰 의 신원확인용 ‘안면 이미지 합성기술’에서 ‘역사가, 사회학자, 심리학자들이 교육용으 로 사용할 수 있는 영상자료 목록’, 심지어 ‘제어가능한 전기조명장치를 장착한 무드 인테리어’, ‘전자환각, 전자수면을 포함하는 전자치료법’(Paik, 1974) 등을 포함하는 다 양한 이익으로 되돌려 줄 것이라고 설득하고 있다. 이러한 설득은 단순히 외부적인 재 정적인 지원 뿐 아니라, 사회공간을 구성하는 정치, 경제, 문화의 전 영역으로 가로질 렀고, 백남준은 예술장 내외에서 상대적으로 더 많은 비용이 소모되는 자신의 투쟁을 효과적으로 강화할 수 있었다.

7. 빅뱅의 시작: 백-TV-플럭서스 동맹

백남준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모든 자원들의 그물망을 이른바 ‘백남준 네트워크’로 부를 수 있다면, 당연히 백-TV 동맹은 백남준 네트워크의 핵심을 이룬다. 라투르의 행 위자 네트워크 이론이, ‘일반화된 대칭성’(generalized symetry)의 원칙 아래 ‘인간행위 자’(human actor)와 ‘비인간행위자’(non human actor)를 동등한 ‘행위소’(actant)로 규정 한다면, TV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네트워크가 집적된, 더 이상 의문되지 않는 ‘블 랙박스’(black box)(Latour, 1987)이자, 백남준의 미학적 실천에 포섭됨으로써, 동시대 예술개념을 변화시킨 핵심적인 비인간 행위소라 할 수 있다. 백-TV 동맹은 비로소 백 남준 네트워크의 사회적 ‘빅뱅’을 가능케한 ‘시초원자’(primeval atom)라는 것이다. 백 -TV 동맹은 한편으론 예술계 내외의 인적자원들을 규합하고, 다른 한편으로 아베 슈야 -백남준의 협력을 통해 발명된 비디오신서사이저를 통해, 물리[학]을 포함한 텔레커뮤 니케이션 테크닉,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상징되는 현대과학기술의 소프트-하드웨어와의 연합(association)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백남준 네트워크의 폭발적 팽창을 가능케 했다.

백-TV라는 시초원자에서 비롯된 백남준 네트워크의 확장은 화랑과 미술관 등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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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artworld)를 넘어 대학, 실험실, 정부, 방송국, 스포츠경기장, 오락, 심지어 광화문 네 거리, 인천공항의 대합실, 국내 굴지의 신문사와 보험회사(삼성생명)의 중앙로비, 안방 TV와 유튜브 홈피에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회적 사실로 제도화된다.

백남준과 플럭서스 동맹은 비디오아트의 성립을 위한 또 하나의 ‘기축동맹’(pivotal alliance)이었다. 백-TV 동맹이 각각 가장 원초적인 인간행위자와 비인간행위자의 단자 들을 잇는 원초적인 동맹으로서, 비디오아트의 직접적인 발화점이 되었다면, 백-플럭서 스 동맹은 그러한 발화점을 가능하게 하는 기본적인 조건을 제공해 주었다. 특히, 장 개념의 관점에서, 플럭서스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데, 바로 백남준의 독일음악장 내 원 초적 위치취하기와 뉴욕미술장으로의 장간 횡단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67) 존 케이지 에 의해 촉발되고, 플럭서스에 의해 집단적이고 국제적인 수준에서 전개된 전위의 미 학은, 쇤베르크, 안톤 베베른 등에 대한 막연한 관심 속에서 독일의 대학들을 전전하던 백남준에게 명확하게 객관적인 가능성의 공간 속에서 나름의 위치와 방향성을 제공해 주었다. 백남준의 플럭서스 가입은 그의 파괴적인 미학적 실천을 고립된 개인의 내면 으로 환원시키지 않고, 일종의 전위적인 미학운동으로 확장시킴으로써, 백남준으로 하 여금 당대 현대예술의 장에 이름을 올릴 수 있게 했다. 백남준의 예술가 데뷔 역시 마 치우나스(George Maciunas)와 플럭서스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슈톡하우젠이 기획한 초기 플럭서스 공연 <괴짜들(Originale)>(1961)이었다. 플럭서스는 가장 독일적인 전위 미학을 추구하면서, 뉴욕에 가장 성공적으로 적응한 실험집단이었다. 무엇보다, 백남준 이 뉴욕 입국허가를 얻는데 실제적인 도움을 준 것도 케이지, 마치우나스, 오노 요코와 같은 플럭서스 멤버들이었다(백남준 외, 2010). 또한 ‘해프닝(happening), 혹은 행위 (performance)’라는 형식을 통해 음악적 실험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 다(조광석, 2005; 김홍희, 2007). 즉, “단순히 시각적 의도라기보다 의도되지 않은 ‘뜻밖 에’ 소리와 마주치는 구성을 만들다 보니 연극적이며 행위적인 시각예술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조광석, 2005: 465). 음악장의 전복자로서 백남준이 추구한 음악의 시각화는 케이지가 수행하는 구체음악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문제였으며, 슈톡하우젠과 플럭서 스 구성원들, 그리고 백남준이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수행한 퍼포먼스는 이 문제를 집단적 실천을 통해 합법적인 아비튀스로 만들었다.

여기서 플럭서스가 중요한 이유는 음악의 시각화라는 문제의식을 확장하려는 그들 의 집단적 실천을 통해, 당대 음악장에서 시각미술장으로 연결되는 통로가 열렸으며, 존 케이지의 추종자이자 플럭서스의 정예멤버였던 백남준은 이렇게 열려진 통로를 가

67) 플럭서스는 조지 마키우나스, 슈톡하우젠, 라몬테 영, 볼프 포스텔, 딕 히긴스, 오노 요코, 그리고 65년 이후 백남준과 협력 관계를 맺어온 샬럿 무어맨 등이 참여한 느슨한 행위예술 집단이었지만, 존 케이지의 음악적 실험의 미학을 가장 명확하고 집단적인 형태로 추구한 국제적인 예술가 조직이었다. 그들은 여행, 서신교환, 시, 콘서트 등을 포함하여, 연극, 문학, 음악, 무용, 미술, 출판을 가로지르는 당대 예술장 내의 가용한 모든 예술적 아비튀스들을 실천했다. 플럭서스는 당대 예술장의 다 양한 하부장 내 전위적 행위자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국제적으로 확장되었다. 백남준의 장내, 장간 실천의 관점에서, 플럭서스 의 중요성은 거의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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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먼저, 가장 효과적으로 오고 간 투쟁자라는 것이다. 플럭서스를 통해 전체 미학장에 서 음악장과 미술장의 실천논리가 교차하는 가능성의 공간이 제도화되었을 뿐 아니라, 이 가능성의 공간을 통해 백남준은 독일과 뉴욕을 지리적으로 왕래하면서, 비디오아트 에 도달한 셈이다. 따라서 백남준의 음악장 내 원초적 위치취하기, 독일 음악장에서 뉴 욕 미술장으로의 장간 횡단은 그저 백남준 개인의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결단에 의해 벌어진 우연적 사건이 아니라, 백남준의 실천이 당대 예술장의 상황과 구조와의 변증 법적 조응하면서 이루어진 성취이며, 여기서 플럭서스는 백남준의 실천을 가능하게 하 는 예술장의 객관적 조건의 변화를 유발한 핵심적인 요인이었다.

백남준은 플럭서스 집단 내에서도 중심에 진입하는 특별한 능력을 보여주는 데, 특히 존 케이지, 요셉 보이스, 오노 요코와 같이 플럭서스의 범위를 넘어서는 핵심적 실천자와 정합적 동맹을 맺어 나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68) 이러한 정당한 미학적 실천 과 집단 운동을 통한 정합적 동맹관계는 백남준 네트워크의 확장에서 승수효과를 더했 다. 예컨대 요셉 보이스(Joseph Beuys)의 예술적 명성이 상승할 때 백남준의 그것 역시 상승작용하는 효과를 내는 것이다. 이 상승효과는 유럽 내 백남준 연결망을 견고하게 강화시켜 주었고, 이후 현대미술의 새로운 수도 뉴욕으로 진출하는 교두보가 되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8. 60년대 이후의 백남준: 휘트니 회고전(1982)과 <다다익선>(1987)

백남준의 뉴욕시대는 백남준 네트워크 형성의 절정을 이룬다. 60년대 이후 미국은 미학장의 위계구조에서 유럽을 능가하는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고, 뉴욕은 그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다. 뉴욕을 중심으로 팽창하는 미술시장과 모마, 구겐하임, 휘트 니 등 제도적 기관들의 활발한 실천은 사회공간에서 미국의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국 제적 미학장에서 효과적으로 변환하는데 성공했다. 따라서 뉴욕의 인정은 백남준에게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다. 에버슨 뮤지엄과 휘트니 미술관은 각각 전문 비디오아 트 큐레이터인 로스와 핸하르트를 중심으로 당대 뉴욕 뿐 아니라 세계 미술장에서 정 당한 이미지 조직과 분류 방식으로서 비디오아트에 합법성을 부여하는데 기여했다. 특히, 당대 미술장에서 가장 실험적인 스타일의 작품을 중심으로 휘트니 비엔날레를 조직했던 휘트니 미술관은 뉴욕의 주요 미술관들 가운데서도 비디오아트에 가장 적극 적이고 긍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 가운데서도 백남준은 휘트니 미술관이 미술관 단 위의 개인전을 주최한 최초의 비디오아티스트였다. 휘트니 회고전의 성공으로 인해 백

68) 백남준의 실질적인 데뷔라 할만한 작업이 1959년 장-피에르 빌헬름이 운영하는 갤러리 22에서 행해졌던 <존 케이지에 바 침(Homage a John Cage)>이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같은 맥락에서 요셉 보이스와 함께 플럭서스의 창시자에 헌정된

<조지 마치우나스를 추모하며(In Memorium George Micianus)>(1978), <머스 옆에 머스(Merce By Merce)>를 제작했고, 가장 핵심적인 동맹 가운데 하나였던 보이스 서거했을 때 <보이스 로봇(Beuys Robot)>(1988), <보이스 추모굿>(1990) 등 이 제작되거나 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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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준 네트워크 역시 확장을 가속화하게 된다. 백남준은 동시대 미술장의 참여자들 가 운데서 미술관의 제도적 장점과 공간적 특성에 가장 잘 적응했을 뿐 아니라, 그것들을 가장 잘 이용하였다. 이제 뉴욕 뿐 아니라 세계적인 주류 미술관의 주요 레파토리 가 운데 하나가 된 백남준은 전시공간의 물리적 조건과 그러한 거대미술관들이 매개할 수 있는 외부자원을 최대한 이용했다.

82년 휘트니 회고전 이후 80년대 후반 백남준 네트워크의 중심은 뉴욕과 대한민국 을 오가는 이중적, 혹은 나선형 구조를 보여준다. 백남준과 백남준 네트워크 내에 포섭 된 다양한 행위자들은 뉴욕에서 백남준의 이름으로 축적된 상징자본의 효과를 한국에 서 확대, 강화했고, 제도적 안정성과 경제적 후원으로 번역했다. 이 안정성과 후원은 다른 경쟁자들이 갖지 못한 장점이었고, 백남준 네트워크의 참여자들은 이점을 뉴욕과 유럽 미학장 내에서 자신들의 상징투쟁에 이용했다. 백남준은 대한민국 정부와 국가기 간 방송사를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87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중앙회 랑에 설치된 <다다익선>은 백남준 이 대한민국 예술계에서 그의 위치를 증거한다. 적 어도 공간적으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한국 근현대 미술의 역사는 백남준을 중심으로 조직되고 나열되어진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거대한 “백남준 기념관”의 기능을 암묵적으 로 수행하게 된다. 하지만 이 역시 국립현대미술관이 일방적으로 백남준의 명성에 굴 복했던 것은 아니다. 그 자체로 한국예술계 내외부에서 자기 이해를 추구하며 경쟁하 는 조합적 행위자(corporative actor)로서 국립현대미술관은 86년 과천 이전(移轉) 이후 소위 ‘국립’(national)이라는 제도적 지위에 걸맞는 위상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 필요에 백남준은 자신의 작품 가운데 최대 최고의 작품을 제공함으로써 응답했다. 백 남준과 국립현대미술관 가운데 어느 한 일방의 요구가 아니라 상호적인 공모가 성립한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문화투쟁의 전선 위에서 유일무이한 백남준의 TV 스펙타클 을 보유함으로써 국제적 동시대성을 만족시킬 수 있었고, 과천 이전 이후 한국 예술장 에서 상당한 주도권을 유지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입성은 백남준 네트워크의 국내적 확장에 또 다른 중요한 계기를 얻는데, 바로 거대자본 삼성과의 제휴가 그것이다. 특히 <다다익선>의 스펙타클은 1,003대의 TV를 요구하는 무모한 작업이었고, 삼성은 이 무모함을 현실화하는 데 기꺼 이 참여했다. 삼성과의 제휴가 단순한 협찬만은 아닌 것이 이 제휴와 더불어 삼성이 한국문화예술계에 개입하는 통로이자 공식적 대리인인 호암재단과 연결망을 형성했던 것이다. 삼성-호암은 백남준 작품의 거대한 제도적 콜랙터가 되었고, 문화적 지평에서 삼성이 변환할 수 있는 최대한의 상징자본을 제공했다. 백남준은 미술계에서 삼성과 등가로 변형되는 거의 유일한 존재였고, 삼성 역시 예술장 내외에서 백남준의 명성을 기업 이미지의 제고효과로 되돌려 받을 수 있었다. 홍라희는 다음과 같이 삼성과 백남 준의 관계를 회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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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선생과 삼성과의 인연은 1984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백남준 선생이 35년만에 처음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당시 국제적 성장의 기틀을 마련한 삼성전자의 TV모니터를 자신의 작업에 사용하면서부터였습니다. 이건희 회 장과 함께한 어느 날 백선생이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세계인으로서 조국에 대한 애정과 삼성에 대한 기대를 재치 와 유머를 섞어가며 표현하였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다음 해 백선생은 삼성전자와 정식으로 계약을 맺어 자신의 작 업에 삼성 TV 모니터를 지원받아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1988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기념비적인 작품

<다다익선>의 전자장비 제작지원을 시작으로, 1992년의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의 회고전과 1997년 독일의 뮌스터 조 각프로젝트, 그리고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의 <백남준의 세계전>과 호암갤러리와 로댕갤러리의 <백남준의 세계전>에 이르기까지 선생의 핵심적인 프로젝트에 삼성문화재단이 직-간접적으로 지원할 수 있었던 것도 참 크나큰 보람이었 습니다. 백남준 선생이 비디오아트의 거장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동안 삼성의 첨단기술과 기업이미지도 한층 발전되어 갔습니다. 예술과 기업의 멋진 만남, 결국 우리의 협력작업은 한국의 기술과 문화를 세계 곳곳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홍라희, 2007).

백남준은 국가의 정치적 이해와 제도의 이해를 문화적으로 ‘번역’할 수 있었고, 또 훌륭하게 충족시킬 수 있었으며, 백남준 역시 대한민국 국가와 방송을 포섭함으로써, 제도적인 안정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백남준은 일종의 국가적 문화권력이 되었다. 더 이상 확장할 여지가 없는 포화상태에 이른 백남준 네트워크는 이제 제도적 안정화의 단계에 진입한다. 백남준은 더 이상 파괴를 일삼는 신화적인 몽상가가 아니라 이제 거 대한 사회적 실재(social fact)가 되어 버린다. 백남준과 비디오아트는 이제 긍정 혹은 비판, 혹은 호불호의 대상이 아니라, 압도적인 현실이자 더 이상 의문되지 않는 당연한 실재로 존재하게 된다. 그 실재의 모습은 95년 <광주비엔날레>라는 제도적인 스펙타클 의 형태를 띠고 나타났다. 백남준은 광주비엔날레 설립의 미학적 근거였던 것이다. 광 주비엔날레를 통해 백남준 네트워크는 국가와 미디어와 예술계와 자본을 얽어매는 웅 장한 그물망을 완성하였으며, 이후 <부산비엔날레>, <서울미디어아트페스티벌>로 확장 되었다. 한국의 비엔날레들은 대한민국이 백남준으로부터 비롯된 매체미술의 세계적 종주국이라는 사실에 대한 선언에 다름 아니었다. 백남준은 이 보잘 것 없는 이미지 제국의 변방 대한민국이 세계미술계에서 존재감을 알리기 위한 미학적 근거가 되었다. 제 1회 광주비엔날레 특별전인 <정보예술 Info Art>전은 백남준에 대한 직접적인 오마 주였으며, 국립현대미술관의 <다다익선>이 그러한 것처럼 이 모든 비엔날레 행사장들 의 현관에서 가장 먼저 관객을 맞는 것은 예외 없이 백남준의 작품이었다.

<쟁점토론>

1. 단순한 괴짜, 기행을 일삼는 몽상가로서 천재보다 사회적 행위자로서 천재의 가능성을 알아보 자.

2. 당대 예술계의 상황 속에서 백남준이 비디오 아트가 갖는 새로움을 이해해보자.

3. 예술가들 사이에서 자신의 미학적 실천에 차별적인 위치를 부여하려는 예술가들의 ‘상징투 쟁’을 이해해 보자.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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