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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공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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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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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기 역사문화아카데미 “국립공주박물관 특별전시 기행”

우리나라[韓國] 일생의례 옷[一生儀禮服]

高 富子 이학박사, 우리 입성 연구[韓國衣生活 : 服飾]

1. 일생의례 옷. 의미意味

의생활衣生活이나 복식사服飾史연구에 필요한 자료는 유물遺物, 글[문헌 文獻], 그림[회화繪畵], 형상물(조각: 부조浮彫, 용俑 등), 이야기[구전口傳, 전설] 등이 있다. 이것들은 시대, 장소(국가), 신분, 환경(인문ㆍ자연) 등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엄격한 계급사회에서는 신분에 따라 제한이 심하였으 며, 시대 및 쓰임새[용도用度]에 따라 크기 ․ 색 ․ 무늬 ․ 재료 등이 달랐다. 입는 것을 우리 옛 어른들은 “입성거리”라고 하였다 근대 학술용어로 “의복衣服” 또는 “복식服飾”이라 하고 있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크고 작은 일들을 겪는데 그 때마다 신분 이나 처해진 환경에 맞는 의례儀禮를 치렀다. 의례는 인간의 일생사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큰일이기 때문에 이에 맞는 복잡한 절차와, 예복儀禮服을 갖 추었다. 일생의례복이란 이럴 때 차리는 옷이나, 치레거리를 말한다. 조선朝鮮시대 중ㆍ후기부터 이 범위를 관례冠禮ㆍ혼례婚禮ㆍ상례喪禮ㆍ 제례祭禮로 나누고 이를 “사례四禮”라 하였으며, 이것들을 인간 도리의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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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이요 사회관습의 한 범례로 정하고 살았다. 그러나 이 사례四禮에는 일생 에서 처음이루어지는 ‘출생出生’이 빠져있다. 이는 일금과 부모님을 섬기는 ‘충忠과 효孝’를 으뜸으로 여겼던 사회관습 때문이다. 의례복儀禮服은 나름대로 명목名目을 붙이면서 최대한 예禮를 갖추려 하였으며, 독특한 의미와 내면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경사慶事에는 이것들 을 통하여 무병장수無病長壽와 부귀공명富貴功名을 얻고자 하여 신분에 벗 어난 치레와 과욕過慾으로 사회의 물의를 일으키기기도 하였다. 이 속에는 “유類는 유類를 낳는다”는 ‘유사연상類似聯想’에 맞추는가하면 ‘주술呪術행 위’로써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살아온 조상들의 생활이념과 철학이 배어 있다. 오래살기[장수長壽]를 바라면서 배내옷에 옷고름을 실로 다는 일, 두 루마기는 막힌 옷 이므로 ‘출세를 못 한다’고 믿는 일 등이 그 예이다. 따라서 이들을 토대로 상하귀천上下貴賤의 신분에 따라 꼴[모양, 형태] ․ 수량 ․ 색 ․ 종류 등이 구별되는가 하면, 여러 가지 의생활 형태를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이 내용들은 내가 40여년 우리나라 전국을 다니면서 조상들로부터 전 해들은 예기와, 살면서 직접 경험했거나 목격한 주변 것들을 모은 것이다. 시기는 우리의 마지막 ‘전통민속’이 살아있었던 조부모님이나 부모님 세대 1900년대 중반까지가 된다.

2. 구 분

본 자료에서 일생의례는 크게 출생, 혼례, 사망으로 나누었다. 출생복은 생후生後 처음 입는 옷, 혼례복은 두 번째로 이 세상에서 가 장 좋은 치레거리였다. 사망에는 돌아가신 분[망자亡者]에게 입히는 최상의 비단옷 수의壽衣와, 망자亡子를 위해서 후손들 즉, 죄인이 입는 가장 거친 삼베옷[마포麻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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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복喪服을 입는 각기 다른 단면을 보게 된다. 1) 출생 옷出生服 출생의례는 사례四禮에는 포함되지 않았으나 중요한 항목이었다. ‘부모 섬기는 일[효孝]’을 인간의 첫째 덕목德目으로 삼았던 전통사회 에서 아이(기)들은 경시輕視되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특히 출생은 겉으 로 드러내지는 못했지만, 가문번창과 종족번식에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특 히 남존여비男尊女卑나 ‘남아선호男兒選好사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아이들의 옷 의례는 출생 직후 처음으로 싸고 덮는 피부에 접하는 피복 被服 거리부터, 삼칠일(21일간)ㆍ 백일ㆍ돌까지 입는 것과, 머리에 쓰는 것, 발에 신는 것까지 포함된다. 초생아에게 처음 입혔던 옷은 많은 금기와 주술을 가지고 있다. 아기는 ‘삼신할머니’가 언제나 지키고 있으므로 옷이나 물건을 잘 못 다 루는 것은 할머니의 노여움을 사는 일이며, 그 보복은 아기를 아프게 하는 등의 ‘해꼬지’로 나타나기 때문에 매우 조심해야 했다. 따라서 옷이 낡거나 필요성이 없어져도 다른 사람에게 주거나 버리지 않고, 태우거나 행주로 사 용하였다. 밤에 널지 않으며, 방망이질도 심하게 하지 않았다. 잘 못 취급하 면 경기驚氣를 하거나 병에 걸리고, 하찮은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특히 첫 아들과 장손長孫 것은 더 소중하게 취급되었다. ‘아기 것’들은 옷은 물론 기 저귀나 포대기까지는 대부분 무병장수하고 부귀영화를 누린 남자 ‘조상祖上’ 의 헌옷으로 하되 웃옷[상의上衣]을 더 귀하게 여겼다. 이는 조상의 음덕蔭 德이 아이에게 옮겨가서 조상처럼 된다는 이유에서이다. 웃옷 중에서도 가난 한 집에서는 적삼赤衫으로 있는 집에서는 도포나 웃옷로 해야 ‘웃[상上]사 람’이 된다는 것이다. “여자가 사용했던 것은 출세 못 한다”하여 금기하였다. 색色을 쓰거나, 모양에도 양반의 기준에 맞췄다. 경상북도 봉화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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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官발 받으라”고 돌 때 입힐 ‘돌저고리’의 ‘깃[령領]’은 관복冠服의 둥그런 모양을 본떠서 끝을 살짝 굴리고 이것을 “관디[관대冠帶. 관복冠服]깃”이라 하였다. 아기들의 “수돌 띠”도 빨강 옷감에 수繡를 놓고, 고름도 빨강으로 달았다. 태몽 꿈에 ‘홍띠[홍대紅帶]’만 보아도 “정승판서 날 태몽”이라 좋아 하였다. 빨강은 양반 중에서도 상층上層에서만 사용되는 색이었기 때문이다. (1) 출생직후 아기 싸개[피복被服] : 포대기 아기는 모체母體에서 떨어지면 배꼽을 처리한 후에 사흘三日동안 포대기 에 싸 두었다. 이 포대기는 지역에 따라 “쌀포대기ㆍ쌀깃ㆍ두대기ㆍ두랭이 ㆍ두렁이ㆍ지성귀" 등으로 불렸다. 옷감은 주로 새 것으로 하였으나, 드물게 남자 조상祖上의 헌옷으로도 하였다. 그러나 삶이 각박하였던 제주도濟州島 는 다르다. 제주아기들의 기저귀나 포대기는 남자 노동복 바지였던 감물[시 즙柿汁]들인 ‘갈중이’로, 귀한 자식들은 악신惡神의 해꼬지를 피하기 위해서 여자가 속에 입었던 아래옷[하의下衣]인 ‘단속곳(갈굴중이)’을 쓰기도 하였 다. (2) 첫 옷 첫 옷은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면 처음으로 ‘사흘[삼일三日]아침’에 포대기를 벗기고 목욕을 시킨 후 부터 ‘삼칠일三七日(21일)’동안 입었다. 명칭은 지역마다 달랐는데 “배옷ㆍ배냇저고리ㆍ이래안옷ㆍ일안옷”, 제주 도에서는 “봇뒤창옷”이라 했다. 깃이나 섶은 달지 않고, 옷고름은 오래 살라 고 무명[목면木棉]실로 달며 이를 “명命줄”이라 하였다. 옷감은 조상의 헌 웃옷으로 하거나, 주로 무명이나 ‘융(모달리)’이었는데 제주에서는 일손이 모 자라고 물이 귀했으므로 “인내ㆍ피부병예방ㆍ강인성을 기르기에 알맞다”하 여 삼베[마포麻布]로 하였다. “첫아이 옷과 포대기는 친정에서 만들어 온다”고 하였다. 출산 전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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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주로 친정에서 만들었다. 그러나 “아기 옷은 아기가 태어난 다음에 만 드는 것”이라고도 한다. 미리 만들면 삼신할머니의 노여움으로 출산 등에 해 꼬지를 당하기 때문이다. 만들기는 첫아들 낳고, 부부해로하고, 무병장수하 고, 행동거지가 바른 ‘복덕福德있는 사람’이 하였다. “아들이 입었던 것은 재수가 좋다”하여 잘 간직하여 두었다가 전쟁터에 갈 때, 시험 보러 갈 때, 재판정(소송사건)에 갈 때 몸에 지니고 다녔다. 아 들 중에서도 ‘장남長男이 입었던 것, 그 보다는 장손長孫 것이 더 효험이 크 다’고 하였다. (3) 백일 옷 어머니 때 까지만도 먹을 것이 없어 아기 때 많이 죽어서 “반타작이 어 렵다”고 하였다. 무엇보다도 무병장수가 최대의 목표였다. 옷은 흰색으로 만들었다. ‘흰 옷’은 ‘색이 희다’는 의미의 한자어 “백白” 과, 숫자 “백百”과 같은 데 숫자는 “백발노인, 백살[百歲], 즉 장수長壽”와 같은 맥으로 여겼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흰색은 자주 빨아야 하기 때문에 물 [염색染色]이 빠지지 않고 간편하여 실용적이다. 또한 아기 옷은 누빈 것이 많은데 이는 “한 땀씩 누비는 만큼 장수를 기원함”이라 하지만, 솜옷보다는 세탁 등 실용성에서도 간편함이 더 크다. 모양은 깃과 섶은 어른 것과 같지만, 옷고름은 허리를 한 바퀴 돌려 맬 수 있도록 길게 하였다(돌띠). 여유가 있는 집에서는 타래버선도 만들어 신 겼다. (4) 돌 옷 돌부터는 색이 있는 것으로 만들었는데 색깔 있는 옷을 “무색옷[유색有 色]”이라고 하였다. 대부분 젖먹이 때는 남녀구별 없이 저고리만 입히는 정도였다. 그러나 여유가 있어 치레를 하는 집에서는 남아는 저고리에 풍차바지나 가랑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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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래바지)를 입히고, 버선도 신겼다. 저고리 옷고름은 가슴을 한 바퀴 돌려 맬 수 있도록 길게 하였다(돌띠). 이 위에 쾌자[전복戰服]나 까치두루마기 를 덧입히고, 허리에는 빨강에 길상吉祥무늬의 수繡를 놓은 ‘수繡돌띠’를 두 르고, 머리에 복건(幞巾, 福巾)을 씌우면 최상의 치레였다. 2) 관례 옷[관례복冠禮服] 관례는 단발령 이전에는 일생의례의 첫 관문이었다. 남녀 만 15세가 되 면 ‘예비 어른[성인成人]’이 되는 행례行禮였다. 그러나 1894년 단발령斷髮 令으로 상투가 없어지면서 혼례에 흡수되고, 약화되다가 사라졌다. 남자는 “관례冠禮”라 하여 머리를 올려 상투를 틀었다. 어른이 되었으니 학문에 전념하여 관직자[양반兩班]가 되기를 암시하고, 염원하는 큰 의미를 담고 있다. 의례는 나이가 들면서 높은 관리로 승진하는 것처럼 세 차례로 나누어 모자[관冠]와 옷을 갖추면서 행하였다. 여자는 “계례髻禮”라 하여 족두리를 얹고 ‘쪽머리’를 하였다. 남자와 달리 옷과 관足頭里을 한번 차려 입었다. 3) 혼례 옷[혼례복婚禮服] 혼례 날은 ‘양반兩班을 상징하는 차림’을 하였다. 남자[신랑新郞]는 사모관대紗帽冠帶, 여자[신부新婦, 색시]는 원삼ㆍ족 두리이다. 엄격한 신분제사회에 양반은 그 이름 하나만으로도 누구나 동경하는 권 력과 부富를 가졌고, 사람의 판단기준이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일반 백성들 도 일생에 한번은 양반처럼 행세를 해볼 기회를 가졌으니 바로 혼례 날에 사모관대차림을 하고, 하인이 이끄는 말은 타고, 초롱을 든 하인과 호령하는 아랫것들이 모심을 받는 일이었다. 신랑이 행차하는 길에는 관직자라도 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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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을 입었으면 행렬 지날 때까지 자리를 양보하며 머리를 숙여 주었다. 색시 의 머리는 ‘큰 낭자에 금봉채비녀’를 꽂고, ‘첩지에 족두리’를 올렸다. 옷은 삼회장저고리와 홍紅ㆍ청靑치마에 원삼圓衫을 입었다. 치마도 “이성지합二姓之合, 백복지원百福之原”이라 하여 홍紅과 청靑색 을 입었는데, 이는 서로 다른 것끼리 화합하고 ‘하나 되어 살아감’의 상징이 었다. 혼사婚事에는 ‘남색藍色’이라는 말은 쓰지 않았다. 이는 말의 유사연상 類似聯想에서 “남 남”이며, “타인他人”이라는 ‘불길함’ 즉, ‘헤어짐[이혼離 婚]’을 암시한다고 해서였다. 혼수품을 만들거나 마련하는 일, 특히 색시나 신랑 옷을 만드는 사람은 복덕福德있는 사람이라야 했다. 과부나 이혼한 사람은 금기했다. “복과 운運 이 따라 간다”해서이다. 4) 죽음 옷[수의壽衣] 죽은 사람[망인亡人]이 입는 옷으로 지역마다 “수의ㆍ머능 옷ㆍ저승 옷 ㆍ맹인 옷ㆍ호상 옷ㆍ시집가는 옷”이라고 하였다. 장손부長孫婦나 큰며느리 는 난리 때(전쟁, 물난리) 제일 먼저 챙긴 것은 자식보다도 “족보族譜와 수 의였다‘할 만큼 비중이 컸다. 혼례 때처럼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옷감으로, 입을 것은 물론 이불ㆍ요 ㆍ베게 등 침구류까지 모두 갖추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치레한 옷은 ‘양반 옷’이요, 이는 혼례 때 입었던 것이 다. “영생불사永生不死한다”는 저승에서 입을 옷도 혼례 때 입었던 것처럼 제일 좋은 비단으로 만들었다. 혼례 때 남자는 사모관대이고, 여자는 원삼이 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남자들의 사모관대는 저승에서는 용납되지 않 는다. 저승은 평등한 곳이기 때문에 이승의 관직은 하등 소용이 없으므로 관 복冠服[단령團領]은 마련하지 않았다”한다. 그러나 조선시대 양반의 무덤에 서 출토出土되는 것들에는 관복冠服입은 사람도 많다. 여자들도 말기에는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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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圓衫을 입었으며, 임진왜란 전후도 더러 보인다. 관직자가 아닌 남자들은 도포道袍나 심의深衣를 입었다. 그런데 조선말 1884년 갑신의제계혁甲申衣 制改革부터 통용된 두루마기는 수의로 입히거나, 관棺의 빈곳을 채우는 물건 [보공補空]으로 넣는 것도 꺼려[금기禁忌]하였다. 그 이유는 ‘두루마기는 사 방이 두루 막힌 옷이기 때문’이다. 길을 가다가도 막히면 앞으로 못나가듯이 막힌 옷을 입으면 자손들의 앞길이 막혀서 출세를 못한다고 믿었기 때문이 다. 옷감으로 가장 좋은 것은 비단이었으나, 민간에서는 “맹지가 비단”이라고 했듯이 명주明紬로 하였다. 요즘 삼베로 하고 있는데 할머니 세대만 해도 “오죽했으면 삼베랴”고 했다. 삼베로 만드는 것에 대해서 “그건 잘못 하는 일이다. 내세에서 영원토록 입을 옷인데 어찌 삼베로 하느냐. 주로 삼베를 많이 짜는 곳이거나 없는 사람들이 하였다”고 한다. 삼베는 여름 철 일반이 나 하인들의 노동복을 겸한 ‘여름옷’이며 무엇보다도 거친 것은 죄인, 즉 상 주가 이는 상복喪服감이었기 때문이다. 수의는 노인들의 ‘재산목록 1호’였다. 자식이 마련하여 드리는 것이 원칙 이며, 부모의 환갑還甲 전 윤년閏年이나 윤달 중에 좋은 날을 받고 하였다. 윤년이나 윤달을 가리는 것은 저승의 관리들이 휴가를 가서 ‘감독관이 없는 날’이며 그래서 “공空날, 공달”이라 했다. 이때는 무슨 일을 해도 흉허물이 없으니 편안한 마음으로 정성껏 만들 수 있다. “이사 끝, 상사喪事 끝”이라 는 말이 있다. 이사 잘못 가고, 장례를 잘 못 치르면 자손에게 나쁜 일이 생 기는 후탈[후한後恨]이 있다는 것이다. 수의 만들기는 해가 뜨면 시작하고, 해가 지기 전에 마쳤다. 일손이 많아 야 하므로 친척이나 온 동네 바느질 잘하는 사람들이 동원되어 축수祝壽ㆍ 축복祝福ㆍ극락極樂 가기를 기원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손과 마음을 모아 만들었다. 만든 자들도 복을 받을 것이고, 또 흉허물 안 잡히는 탈이 없는 날이므로 평안과 ‘가문발복家門發福’을 얻고자 함이다. 이때 자식들은 팥죽과 음식들을 대접하여 잔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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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럼 북적대었다. 바느질은 뒷바느질도 하지 않고, 실 끝도 맺지 않았다. ‘뒷바느질’을 하 면 망자가 저승에 안착하지 못하며, ‘매듭’을 지으면 “이승에서 쌓인 원한을 풀지 못하고 저승으로 안고 감”이라 하였다. 그래서 염殮할 때 묶은 끈도 입 관入棺 후 뚜껑을 덮기 전에 풀었다. 어떤 가문에서는 보공補空으로 넣는 옷 들의 고름이나 끈을 잘라버리기도 하였다. 수의가 마련되면 죽음에 대한 대비를 마친 셈이다. 옷을 다 만들면 “언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하며 주인공이 입어보기도 하였다. 만든 것은 좀이 슬 지 않도록 ‘담뱃잎이나 궁궁이풀ㆍ박하잎’을 옷 갈피에 두고, ‘칠월칠석七月 七夕에는 거풍’시키기도 하였다. 돌아가시면 언제나, 누구나 꺼내도 입힐 수 있도록 안방 좋은 자리에 잘 보관하였다. 5) 상 옷[상복喪服] 상복은 각기 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상례 때는 상복을 입는 ‘상주喪主’와, 수의를 입는 ‘죽은 사람[망자亡子]’ 사이에서 가장 상반되는 대립성을 갖게 된다. 즉 “상주는 죄인”이라 하여 가장 거친 삼베로 입으며, 죽은 자[망인亡人]는 이 세상에서 최상의 치레로 서 양반은 비단으로 하지만 일반민들은 적어도 명주로 마련하였다. 상주들은 부모님의 죽음을 막지 못하고, 또 부모님 대신에 죽지도 못한 죄인이다. 그래서 가까운 혈육부터 등급은 다섯으로 나누고 삼베옷을 ‘오복 제五服制’에 따라 입었다. 부모상에는 3년, 조부모祖父母는 1년이다. 이는 삼 베옷의 질, 즉 거칠고 고운 옷감으로 옷[복服]을 만들고, 입는 기간도 3년, 1년, 9개월, 5개월, 3개월로 구분된다. 임금이 돌아가시면 상투 튼 남자[성 인成人]들은 모두 삼개월[시마복緦麻服]을 입었다. 삼베는 이 세상에서 가장 거친 옷감이다. “아버지를 여윈 것은 하늘이 무 너짐[천붕天崩]이고, 어머니는 땅이 꺼지는 일[지붕地崩]이다”고 하였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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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서 아버지상[부상父喪]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거친 ‘석새베[삼승포三升 布](240올)’로 하고, 어머니상[모상母喪]은 조금 고운 넉새[사승포四升布: 320올]로 했다. 옷의 단은 ‘아버지 상’에는 푼 채로 감쳤고[참쇠斬衰], ‘어머 니상’에는 접어서[자쇠刺衰] 바느질하였다. 3년간 밤에는 짚으로 만든 ‘거적’에서 자고, ‘베개(북심)’를 베고 잤다. 외 출할 때도 죄인이기 때문에 하늘을 볼 수 없도록 얼굴을 덮는 ‘방립方笠’을 썼다. 물론 부부관계는 금물이었다. 어쩌다 상중喪中에 아기가 태어나면 ‘불 효’라 그 아이는 “두건둥이”로 낙인찍혔다. 6) 제사 옷[제복祭服] 제사祭祀[제례祭禮]에 입는 옷을 “천담복淺淡服”이라 하였으며, 남녀 가 의관衣冠을 갖추었다. 형편에 따라 남자들은 흰색의 도포나 두루마기에 갓[흑립黑笠]이나 유건儒巾을 썼다. 여자도 “제사 옷”이라 하여 여유가 있 는 집에서는 엷은 옥색의 치마와 저고리를 입고, 관冠은 반가班家에서는 장식을 하지 않은 ‘검정민족두리’를 썼다. 딸이 혼인할 때 여유와 법도가 있는 집에서는 반드시 ‘제사 옷’을 만들어줬다.

3. 반성, 작은 바람[소망所望]

우리 아버지 어머니 때만 해도 격에 맞춰 머리에 쓰고, 입는 것을 갖추었 다. 아기 때는 배내옷 입고, 예비 어른 되는 상투 틀고, 어른 된다고 사모관 대 입고, 자식도리 한다고 상복 입었다. 아무리 가난해도 머리에는 다 떨어 진 갓이라도 써야 했다. 의관衣冠을 바르게 함이 ‘사람도리’로 여겼다. 이는 단군檀君)부터 가르치심이며,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의 자부심이었다. 의례복에는 인간이 갖추어야 하는 격식과 염치심이 있고, ‘사람다움[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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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人間愛]’과, ‘인륜도덕의 멋’이 있었다. 비록 까다롭고 거추장스럽고 번잡 하기는 하였지만 지켰다. 양풍洋風시대. 이제 일생의례복이란 개념은 사라진지 오래이며, 현대인들에게는 옛 어른 들의 기억 속에서나 남아있는 잊혀진, 전근대적인 것이며, 골동품이며, 촌스 러운 악패惡弊로 전락하고 말았다. 정녕 우리에게 인간다움의 맛이나 멋이나 예의는 떠나 버린 걸까? 요즘 아기 옷은 ‘메이커’ 있는 비싸고 좋은 상품으로, 혼례의례나 옷은 서양식이다. 상주들은 머리에 두건頭巾이나 쓰고 팔에는 삼베로 된 완장이나 두른다. 삼년상三年 喪을 지내는 일은 뉴스거리이고, 일 년이나 100일상을 지내면 대단한 거다. ‘49일’을 지내는 ‘사십구제四十九祭’도 큰 거고, 대부분 ‘삼일탈상三日脫喪’이다. ‘시간 없고, 힘들다’는 거다. 부모님 사진을 장례식장 상청喪廳에 차려 놓고, 아들ㆍ딸ㆍ며느리 상주들 사우나로 찜질방으로 간다. 우리 부모님 그런 신세밖에 안되었나? 수의는 장례식장에 만들어 놓은 거나, 부모님이 생전에 마련해 두신 거나 모두 삼베로 만든 거다. 삼베는 중국 거다. 나일론 섞인 거다. 값싸다. 삼베는 죄인罪人(상주)들이 입었던 ‘상복喪服거리’였는데 말이다. 정성도, 의미도 없 다. 며느리와 딸이 값을 놓고 줄다리기 한거다. 관계자들의 말에 의하면 딸은 조금 비싼 것으로 며느리는 싼 것으로 고른단다. 이리 저리 줄다리기 한 옷 입고 가야하 는 부모님. 미래來世(저승)를 믿는다면, 기독교 찬송가에 나오는 ‘요단강 건너가 만난 다’면, 불교에서 믿는 ‘극락가서 만난다’면 어떨까? 이러기엔 마지막 길이 너무 안 됐다. 험하다. 하늘이 주신 귀한 생명은 한평생 살다가는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다 만 시체덩이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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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상주들 상복 검정치마ㆍ저고리 왠 일? 검정상복은 서양이나 일본 사람들이 입는다. 아쉽게도 우리나라에서 검정 상복은 주로 도시, 식자識者, 지도자, 서양종교인 입는다. 1∼2년 전 부터 여자 상주들 한복 도 아닌 국적불명의 이상한 검정색 옷 입는다. 시골 할머니, 시골사람들 흰 것 입는 다. 제주도에서는 그런데로 어머니 때처럼 비록 중국 삼베지만 상복을 갖추고 있다. 일본사람, 서양사람 흐뭇해할 일이다. ‘코리아’는 언제까지 통일 신라이후 1400 여년을 답습해온 ‘사대주의事大主義테’를 벗지 못하는 걸가. “독도는 우리 땅, 동북 공정, 위안부”로 애 타는 이때에…. 우리의 전통적인 의생활衣生活 상도 1950년대를 전후로 달라지기 시작했 다. 1970년대부터 고픈 배를 채우려고 열심히 노력하였다. 덕택에 편한 세 상을 맞이하게 되었다. 놀라울 만큼 달라졌다. 그러나 자연과 우리 인간들의 심성은 얼마나 망가졌는가. 집안에서는 부모나 조상은 물론 형제간에 서열 이, 학교에서는 스승이, 사회에서는 지도자가 없어졌다. 농사를 지어야 하는 데 ‘농꾼’이 없다. 장長이 있으면 하下가 있어야하는데 신하는 없다. 우리의 예절, 우리 삶의 바른 지침을 이제는 찾아 둬야, 바르게 찾아 줘 야 한다. 바르게 알고, 바르게 실천해야 한다. ‘우리를 바로 앎’은 내가 대한 민국 ‘백성’임이며, 이를 지킴은 그 많은 풍파속에서도 지켜온 조상에 대한 ‘보답’이요, 후손에 대한 ‘도리’인 까닭이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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