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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의 관점에서 본 한국사회의 특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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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KERI 정책제언

14-07

통합의 관점에서 본

한국사회의 특질

서울대학교 경제학부이 영 훈

(yhrhee@snu.ac.kr)

조선왕조의 토지와 인간에 대한 지배체제는 지방세 력의 중개를 용인하지 않은 일원적인 중앙집권성을 기 본 특질로 하였다. 흔히들 지방세력으로 알려져 온 농 촌 양반은 중앙권력에 그 연원을 둔, 중앙권력이 부여 하는 특혜에 존립의 근거를 둔 집단이었다. 그들은 지 방사회의 제반 공공기능을 창출하고, 지방의 산업을 육 성하고, 그를 통해 자신의 계급적 이해를 도모하는, 진 정한 의미의 지방세력이 아니었다. 양반 신분은 그들 만의 계를 결성하여 신분적 지위와 특권을 추구하였다.

17∼19세기는 이 같은 양반 신분의 친족집단과 그들의 촌락으로서 반촌이 이전의 원주 사회를 종속시키면서 확산하는 ‘유교적 전환’의 역사였다.

‘유교적 전환’ 이전의 원주 공동체가 17세기 이후 어 떠한 동향을 보였는지는 자료의 결여로 알기 힘든 영역 이다. 香徒로 불린 그 공동체는 ‘유교적 전환’의 지배적 흐름에 밀려 위축되거나 해체되어 갔다. 원주 사회는 낮은 위계의 鄕班으로 상승하거나 높은 위계의 양반에 의해 지배되는 下民으로 분화하였다. 상민 신분의 이른 바 民村이 독자의 규범과 연대로 건재했다는 증거는 없

다. 농촌사회의 기층을 이룬 일반 농민이 활발한 사회 협약의 능력을 발휘하였다는 통설적인 주장도 그 근거 를 찾기 힘든 가설이다.

20세기에 들어 일제의 지배를 계기로 ‘근대적 전환’

이 개시되었다. 私權의 주체로서 個人의 범주가 창출되 고, 사유재산제도가 확립되었으며, 그 토대 위에서 근 대적 경제성장이 이루어졌다. 농촌사회에는 관료제적 행정체제와 더불어 각종 근대적 결사체가 이식되었다.

그런데 근대의 이식은 전통의 형식을 빌거나 그와 결합 하는 형태를 취하였다. 그러한 연관에서 ‘유교적 전환’

도 그 진행을 멈추지 않았다. 근대적 평등의 이식은 유 교적 평등의 확산을 그 실질적 내용으로 하였다. 점점 더 많은 한국인들이 자신의 원 신분을 양반으로 입증할 친족집단과 족보 등의 상징을 추구하였다. 인간의 사회 적 지위를 班과 常으로 차별한 신분제의 질서와 감각은 사회의 곳곳에서 건재하였다. 20세기의 한국사는 ‘유 교적 전환’과 ‘근대적 전환’이 상호규정으로 전개하는

‘복선의 전환’이었다.

1937년부터 1953년까지 전쟁, 해방, 분단, 건국,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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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차례의 전쟁에 이르는 격동의 정치과정은 유교 적이든 근대적이든 이 사회를 구성한 대부분의 결 사체를 해체해 버렸다. 살아남은 것은 친족집단 정 도에 불과하였다. 농지개혁은 전통 신분제의 유제 와 그에 부대한 문화를 청소하는 혁명적 계기였다.

그렇다고 한국인들이 곧바로 시민적 연대를 체결한 것은 아니었다. 신분제의 굴레에서 해방된 인간들 이 추구한 것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유교적 인간화’

였으며, 그러한 한에서 ‘복선의 전환’은 이후에도 그 흐름을 이었다. 한국인들이 더 이상 그들의 원 신분을 의식하지 않고 진정한 의미의 시민적 연대 를 창출하는 것은 1980년대가 되어서였다.

그 도중에 놓인 1950∼1970년대의 한국사회는, 농어촌과 도시에서나, 농촌 장시와 도시 재래시장 에서나, 어디에서나 고립적 개인들이 최소한의 이 웃효과로 맺는 對面關係와 그것의 누적으로 존재하 였다. 인간 제관계를 공동의 이해로 안정시키는 개 인과 국가 사이의 중간단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원 자화된 인간들은 그들이 접근할 수 있는 교육을 포함한 다양한 경로와 연고를 통해 중앙권력으로 향하는 위계 속에서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끌어올 릴 수 있는 기회를 맹렬하게 추구하였다.

필자는 17∼19세기의 ‘유교적 전환’과 20세기의

‘복선의 전환’이 초래한 1950∼1970년대 한국사회 의 조직적 특질을 두고 ‘선풍사회’라고 규정하였다.

일찍이 핸더슨이 제안한 ‘소용돌이’의 비유를 한국 인의 언어감각에 맞게 개선한 표현이다. 헨더슨이 관찰한, 세계사에서 유례가 드문, 한국사회의 동질 성은 처음부터 어떤 영속적인 토착성이라기보다 이 글에서 필자가 ‘유교적 전환’과 ‘복선적 전환’으로 설명한 17∼20세기 사회사의 흐름이 1950년대에 도달한 현주소로 이해함이 정당할 것이다. 핸더슨 의 생각도 원래 그러했지만, 그러한 시각에서 오랫 동안 무시되어 온 핸더슨의 한국사회론을 정당하게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나라마다 경제체제가 유형을 달리하는 것은 나 라마다 사회구조의 특질이, 다시 말해 인간들이 신

뢰하고 협동하는 원리가 상이하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들은 역사로부터 익숙하게 물려받은 규범과 행 동양식에 따라 그들의 경제체제를 구축하였다.

1960년대에 들어 고도성장을 개시한 한국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이 團體社會라면, 그리고 중국 이 關係社會라면, 한국은 旋風社會였다. 박정희정 부는 소수의 선별된 기업가들을 적극 지원함으로써 중앙권력에 비견되는 위계의 선풍을 불러일으킴에 성공하였다. 기업가들은 한국사회가 반상제의 시련 을 통과하면서 축적한 성장의 잠재력을 한껏 빨아 올려 대규모 기업집단을 조직하였다. 이 선풍들은 정부에 의해 육성되었지만 세계시장에 노출된 연고 로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점점 이 사회를 다원적 구조로 발전시켰다.

이상이 지난 4세기에 걸친 한국 사회사에 대한 필자 나름의 이해이다. 왕조의 토지와 인간의 대 한 일원적이고 직접적인 지배체제 하에서 그로부 터 자립적이며 자율적인 사회단체는 존재하지 않 았다. 지연, 직능, 신앙에 바탕을 둔 공동체는 존 재하지 않았다. 동리는 신분을 달리하는 인간들의 混居로서 신분적 지배를 그 구조로 하였다. 한국 전통사회가 잘 단합된 고신뢰의 공동체 사회였으 리라는 대중적 이해는 근거를 결여한 선입견에 불 과하다. 이 같은 전통사회의 구조적 특질은 20세 기 일제하에서 개시된 근대화 과정에서 해소되지 않았으며, 길게 1980년대까지 이어졌다. 그 사이 사회적 유동성의 증대와 더불어 전국이 중앙권력 을 지향하는 거대 규모의 선풍에 휩쓸리는 대중사 회가 성립하였다. 혁명적인 변화는 1960년대 이래 고도성장의 과정에서 생겨났다. 중앙권력의 권위를 상대화하는 복수의 거대 위계집단이 대기업들에 의해 창출됨으로써 이 사회는 진정한 의미의 다원 사회로 바뀌었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신뢰 수준은 국제적으로 낮 은 편이다. 제반 갈등의 수준은 OECD 국가 가운 데 높은 그룹에 속하고 있다. 삶의 질을 대변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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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지표는 한국인들이 저신뢰와 고갈등의 사회에 서 그리 행복하지 않은 삶을 영위하고 있음을 이 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한국사회가 아직도 역사적 이행의 커다란 와중에서 그들의 사회구조를 안정시 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뢰와 같은 비공식적 규범 의 역사에서 변화는 느린 속도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 경제체제와 사회구조의 진정한 개선은 어떤 외생적 이념이나 생활양식의 도입에 따른 단절적 인 변혁에 의해서라기보다 인간들이 역사로부터 물려받은 제반 규범의 총체로서 그들의 문화에 익 숙하게 행동하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관철하는 점 진적 진화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 점을 銳意 의식한다면 한국사회의 신뢰수준을 증진하기 위한 정책적 과제는 이상과 같은 4세기 간의 사회사로 부터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시사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한국 사회는 유럽대륙의 독일이나 북유럽 의 스웨덴, 덴마크와 같은 고신뢰·저갈등의 사회 로 갑자기 이행할 수는 없다. 이들 나라는 오랜 전 통의 직능 단체로 짜인 공동체사회이다. 한국은 그 러한 공동체사회가 아니다. 이미 충분히 설명했듯 이 한국은 분산적 개인이 중앙 지향의 관료제적 위계로 익숙히 통합되어 온 사회이다. 이런 사회에 서 대륙유럽이나 북유럽의 경제체제나 사회구조를 이식하는 것은 그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될 법 한 일이 아니다. 김대중 정부 때 성립한 勞使政委 員會가 지금까지 기능 정지 상태에 있음이 그 좋 은 예이다. 같은 근로자라 해도 대기업의 정규직 근로자와 중소기업의 근로자는 결코 동질의 사회적 지위가 아니다. 이 같은 사회적 문화적 배경에서 근로자 계층의 공동이해를 대표하는 전국적 범위의 단체는 좀처럼 조직되기 힘든 것이 한국 노동시장 의 현실이다. 그간 한국이 지향할 선진적 사회통합 의 모델로서 유럽대륙과 북유럽의 모델이 자주 소 개되었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한 것은 이 같은 엄 연한 역사적 배경의 차이 때문이다.

둘째, 한국이 지향할 선진화 모델은 오히려 미국 과 영국의 자유시장경제와 더 친화적이라는 사실이

다. 이들 앵글로색슨 사회는 역사적으로 개인주의 사회이며, 경쟁과 위계에 의한 신뢰와 통합의 원리 를 성숙시켰다. 이미 충분히 설명한대로 한국사회 는 그 역사적 특질에서 공동체사회가 아니라 개인 주의사회이다. 한국인들을 협동으로 이끌고 신뢰를 증진시키는 것은 관료제나 대기업집단이 제공하는 위계이다. 이 점에서 한국사회는 영미형의 사회통 합과 훨씬 더 친화적이다. 흔히들 영미형의 사회·

경제체제는 한국이 지향할 바가 아니라고 이야기되 고 있지만(조영철 2007),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 한 이해가 충분치 않은 탓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영미형에 대한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노동시장과 금융시장에서의 실제 동향은 이미 상당한 정도로 영미형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 (조성재 외 2009: 63). 연구자를 당혹시키는 이 같 은 현상은 한국의 사회구조가 영미형과 친화적이라 고 판단하는 필자에게는 오히려 자연스런 것으로 이해되고 수용된다. 따라서 사회를 선진적으로 통 합하기 위한 정책적 과제는 개인주의 고유의 自助 와 協同의 정신문화, 그에 입각한 공정경쟁의 질 서, 그리고 경제활동의 전면적 자유을 대대적으로 고양하는 것이다. 이 같은 자유주의적 지향은 지금 보다 훨씬 수가 많고 규모가 큰 대기업과 그의 집 단을 양성할 것이다. 그에 따라 점점 더 많은 사람 들이 대기업에 제공하는 위계 조직이 포섭되는 가 운데 그들의 경제생활을 안정시키고, 그들의 정신 생활을 고양하고, 나아가 상호 신뢰하고 협동하는 문화를 성숙시킬 것이다.

셋째, 정부의 역할은 앞으로도 여전히 중요하다.

사회는 아직 자립적이고 자율적인 단체로 충분히 조직되어 있지 않으며, 이 같은 상태에서 사회·경 제생활에 깊숙이 개입해 온 정부의 갑작스런 후퇴 는 커다란 공백과 더불어 큰 혼란을 초래할 것이 다. 정부의 통합적 역할은 강건하게 유지되어야 하 며, 시대가 요구하는 제 역할을 찾는 가운데 점진 적으로 질서 있게 철수해야 한다. 정부가 해야 할 새로운 역할은 교육과 복지에 그 중점을 두어야 한다. 한국의 전통 문화와 걸 맞는 선진적인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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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을 확립해야 한다. 自助, 協同, 自由의 덕목이 야말로 젊은 세대를 선진사회로 이끄는 가장 훌륭 한 嚮導이다. 또한 정부는 점점 심해지는 소득의 양극분화와 빈곤계층의 증가에 대응하여 사회복지 를 생산적으로 풍부하게 공급할 필요가 있다. 기업 의 경제활동을 제약하는 온갖 수준의 법제와 규제 는 혁명적으로 철폐되어야 한다. 그 대신 중소기업 과 영세 자영업을 상대로 한 대기업의 불공정 내

지 약취 행위는 형법상의 범죄로 엄격히 처벌되어 야 한다. 단기적으로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사회갈 등을 조정하는 역량을 제고하는 일이다. 법치의 원 리를 엄격히 고수하는 가운데 제반 갈등을 그 원 인과 수준에 맞추어 대화, 타협, 강제 등의 다양한 수단으로 관리, 조정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진정 한 의미의 社會工學이 시대가 요구하는 정부의 새 로운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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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한국은 저신뢰의 사회로 분류되고 있 다. 예컨대 1995년 후쿠야마는 세계의 저신뢰 사회를 열거하면서 한국을 거기에 포함시켰다(Fukuyama 1995). 그에 대해 지금까지 한국의 연구자들은 이의 를 제기하지 않았다. 한국의 연구자들 역시 그들이 저신뢰의 사회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2001년 김지 희는 한국 사회의 신뢰 수준에 관한 제반 경험적 조 사와 연구를 종합한 뒤, 한국인은 강한 가족주의의 영향으로 혈연집단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개인이나 집 단을 신뢰하지 않고, 사회적 신뢰 역시 법 규범과 절 차의 정당성에 대한 불신 때문에 낮은 수준이라는 결 론을 내렸다(김지희 2001: 274). 2009년 이동원과 정 갑영도 같은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들이 계산한 한국 사회의 신뢰지수는 OECD 29개국 가운데 24위의 낮 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이동원·정갑영 외 2009:

181).

나아가 한국 사회의 신뢰 지수는 점점 낮아지는 추세라고 지적되고 있다. 이재열에 의하면 한국 사회 의 일반적 신뢰의 수준은, 곧 “일반적으로 말해서 대 부분의 사람들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사람을 대할 때 조심하는가”라는 질문에 긍정적으로

대답한 비율은 1982년 36%를 기록한 이래 1990년 33.6%, 1996년 30.3%, 2001년 27.3%로 점점 하락하 였다. 저신뢰는 많은 사회적 갈등을 유발한다. 이재 열에 의하면 한국 사회는 아시아의 신흥경제국들에 비해서는 낮지만 OECD 국가 중에서는 가장 높은 갈 등 지수를 보이고 있다(이재열 2011: 61, 77). 이외에 도 한국이 저신뢰와 고갈등의 사회라고 하는 경험적 조사와 분석은 모두 다 소개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저신뢰와 고갈등의 사회 를 고신뢰와 저갈등의 사회로 바꿀 수 있는가. 한국 사회의 통합 수준을 높이기 위한 정책적 과제는 무엇 인가. 이에 대답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저신뢰 또는 고갈등의 원인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다.

이와 관련하여 사회학자들이 제시하는 대답도 대개 비슷한 내용이다. 김지희는 한국이 저신뢰의 사회가 된 것은 인간들을 감시하고 억압한 과거의 권위주의 정치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하였다(김지희 2001: 275).

임현진은 해방 후 또는 일제시대부터 시작한 근대화 의 역사 자체가 불균등성과 파행성을 특징으로 하여 사회의 분열과 갈등을 증폭시켰다고 주장한다. 곧 한 국에서 근대화는 농촌공동체를 파괴하여 공동체 가치 를 훼손하였으며, 물질만능주의와 생명경시의 개인주 의 풍조를 만연시켰다는 것이다(임현진 200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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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이 같은 부류의 언설은 일찍부터 대중적 글쓰기 에 능숙한 문필가들에 의해 널리 전파되어 온 것이기 도 하다.

필자는 이러한 일종의 ủႶᇝ의 ᢉᚫ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암묵적으로 19세기까지의 한국 전통 사회가 공동체로 단합된 고신뢰의 사회였다는 이해를 공유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 검증된 적이 없는 환 상의 가설일 뿐이다. 필자는 이미 여러 차례 그 같은 민족주의적 언설을 비판해 왔다(이영훈 2001, 2011).

이 글은 그 연장선에서 17 20세기에 걸친 한국 사 회의 역사를 총괄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논의의 출 발을 이루는 것은 19세기까지의 ᱰᚠᦕᱰ의 토지와 인간에 대한 지배체제이다. 그것은 전통 한국사회의 구조와 특질을 깊숙이 규정하였으며, 오늘날 21세기 초의 한국사회도 그 역사적 유산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 다음 19세기까지 한국인들이 결성한 단체로 서 ሷ፦와 ཨ의 역사를 살필 것이다. 연후에 20세기 에 들어 전개된 근대화의 역사를 검토하고, 그 과정 에서 결정된 한국 사회의 유형과 그 비교적 특질을 추출할 것이다. 끝으로 맺음말에서는 이상의 논의를 요약하고 한국 사회의 신뢰와 통합 수준을 제고할 수 있는 몇 가지 정책 과제를 제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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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ଢ଼

조선왕조의 지배체제를 두고 왕조와 양반이 권력을 분점한 ‘이중적 권력구조’라 한 아오키의 주장은(Aoki 2013: 247 248) 16세기까지는 어느 정도 타당하다.

1392년에 문을 연 조선왕조는 이전 ྡྷኰᦕᱰ의 지 배체제를 계승하여 ࿛ጒ와 ᳯᠧၤ으로 이루어진 지 배층에게 ࿍ᯭ과 ၤᬁᯭ으로 불린 토지를 지급하고

그로부터 조세를 수취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였다.

그렇지만 과전과 군인전은 전국의 토지 가운데 얼마 되지 않았으며, 그것마저 16세기 전반에 이르러 그 제도적 근거가 소멸하였다. 이로써 특정 부류의 개인 이 그의 정치적 지위를 ၷ᨟으로 하여 토지를 지배 하는 관계는 한국사에서 사라졌다. 이후 모든 토지는 상속, 개간, 매매, 증여와 같은 경제적 행위에 권원을 두는 ᗳᯈ ᛜᩧᴆ로 변모하였다. 모든 토지는 왕조 에 대해 조세를 부담했으며, 지배 신분인 양반의 토 지라 해서 그로부터 면제되는 법은 없었다. 17세기 이후 전국의 토지는 조선왕조의 독점적인 지배체제 하에 있었다.

18세기 중엽 조선왕조가 지방에 설치한 군현은 332개였다. 당시의 인구는 총 1,860만 정도로 추정되 며(ၷỻ⃊·ះ᧡᾵ 1977: 327), 이에 군현 당 인구 는 5 6만 정도였다. 그에 비해 중국의 황제는 인구 20 30만의 군현에 1명의 관료를 파견하였다. 조선 의 왕은 중국의 황제에 비해 1/5 내지 1/3의 소규모 인구집단에 1명의 관료를 내려 보냈다. 다시 말해 지 방에 미친 중앙권력의 밀도는 조선 측이 3 5배나 높았다. 중국에서와 같은 중앙권력과 지방세력 간의

‘상호침투적’ 또는 ‘중개적’ 관계가(Aoki 2013: 241 246) 조선에서 성립할 여지는 거의 없었던 편이다.

조선왕조가 군현에 파견한 ᜠዑ은 ―ፓ들의 도움 을 받아 조세를 수취하였다. 군현에 따라 50 200명 의 집단을 이룬 향리들은 지방행정을 독점하고 세습 하였다. 그들은 양반과 상민의 중간신분으로서 양반 으로부터 차별을 받는 처지였다. 군현의 조세는 향리 집단의 구성원인 ᙠᨠ들에 의해 수취되었다. 수령은 서원들이 주도한 조세 행정에 개입하거나 감독할 능 력이 없었다. 그렇다고 조세 행정이 오로지 서원들의 자의적 권한이나 처분에 맡겨진 것은 아니었다. 조선 왕조는 개별 토지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체제를 포기 하지 않았으며, 서원들의 조세 행정은 그 위에서 관 행적으로 구축된 절차와 규범에 충실하였다.

(6)

조선왕조는 전국의 모든 ᯭ, ᇎ, ᇞ에 개별 필지 별로 ᴆᓕ을 부여하고 그 등급과 크기를 조사한 다 음, 조세의 부담을 나타내는 ࿐ᾎ를 부과하였다. 매 년 8 9월 서원은 Ꮤ 단위로 할당된 자신의 구역을 다니면서 매 필지의 경작자와 ᮘ῾의 상태를 조사하 였는데, 이를 ‐៝이라 하였다. 다른 한편 군현의 수 령은 봄부터 정기적으로 풍흉과 재해의 상황을 중앙 정부에 보고하였다. 이 보고를 근거로 중앙정부는 8 9월 각 ሓ에 조세의 감면액을 통보하였다. 도의 ຬᤗ은 이를 예하의 군현으로 분배하였는데, 이는 다시 서원들에 의해 개별 필지에 지급되었다. 이렇게 중앙정부의 방침에 따라 조세를 감면하고 조정하는 조세 행정을 ᾉᮘ라 하였다. 연후에 12월 서원들은 그들의 사무소인 군현의 ᭐Ḇ에서 개별 농가가 부담 할 조세의 양을 결정하고 징수 책임자를 선정하는 작 업을 벌였는데, 이를 가리켜 ᭐ᕍ라 하였다(᫠ᤎ℧

1980: 88 89).

작부가 시작되면 서원들은 우선 행심과 표재에 기 초하여 전년의 깃기(Ⴣᄆ)를 수정하였다. 깃기는 농 가 별로 납세 필지를 ᣦᄆ한 징세대장이다. 이 단계 에서 가장 힘들고 번잡했던 것은 ᫩ኌ᫩໭ 작업이 었다. 개별 토지의 경작자는 해마다 빈번하게 교체되 었다. 그에 따라 조세 부담을 구 경작자로부터 신 경 작자로 옮길 필요가 있는데, 이래이거는 그렇게 깃기 를 수정하는 작업을 말하였다. 19세기 경상도 ᴯ᲼

ᕒ의 깃기에 의하면 이래이거의 대상이 되는 토지는 매년 전체 토지의 1/3에나 달하였다(᫠ᤎ℧ 1980:

96 127).

거기서 관찰되는 주요 특징의 하나는 이래이거의 범위가 ሷ፦나 Ꮤ을 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동리의 토지는 동리의 주민에 의해서만 경작되지 않 았다. 조선의 동리는 그런 취지로 구획된 내포적인 단체가 아니었다. 이에 어느 동리의 주민이 다른 동 리의 토지를 경작할 수도, 거꾸로 어느 동리의 토지 가 다른 동리의 주민에 의해 경작될 수도 있었다. 면

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어느 면의 토지는 다른 면의 주민에 의해 경작될 수 있다. 그로 인해 이래이거의 범위는 동리와 면을 넘는 수가 많았다. 바로 그 이유 로 17 19세기의 동리와 면은 조세 행정의 자치적 단위로 성립하기 어려웠다. 조세 행정의 주체는 군현 의 서원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래이거 작업이 끝나면 매 농가가 당년에 납부할 조세의 양이 사정되었다. 연후에 서원들은 8༯이라는 과표를 단위로 하여 ᳂ᖶ라 불린 징세조직을 만들었 다. 매 주비에는 ⁴ᝓ라 불린 징세의 책임자가 선정 되었다. 호수는 주비에 속한 농가들로부터 조세곡을 수취하여 지정된 ᱴᶜ까지 운반하여 납부하는 책임 을 졌다. 다시 말해 주비는 조세곡 운반의 편리를 고 려하여 대개 8결로 규격화된 납세 농가의 인적 결합 을 말하였다. 동리 그 자체는 징세 조직이 아니었다.

8결이 넘는 큰 동리에는 여러 개의 주비가 결성되었 다. 또한 주비에는 다른 동리의 토지가 포함되었는 데, 전술한대로 이래이거의 범위가 동리를 초월하였 기 때문이다(᫠ᤎ℧1980: 80 82, 127 132).

도쿠가와(ᇮᷙ) 일본의 경우, 조선의 행심 표재 작부와 같은 조세 행정의 과정은 무라(ḻ)라 불린 동리에 의해 수행되었다. 도쿠가와 일본도 조선왕조 와 마찬가지로 전국의 모든 토지를 ༐ᴆ하여 필지별 로 ᣀ࿆의 과표를 부여하였다. 그런데 이후의 조세 행정은 조선왕조와 판이하였다. 무라의 ḻᢱᬁ과 영 주 권력의 ᇝ࿛은 그 해의 농사상태를 고려하여 무 라가 부담할 연공의 양을 협상하였다. 무라는 결정된 연공을 공동의 책임으로 수취하고 납부하였다. 이를 가리켜 보통 ḻḋ᱌라 하였다. 촌역인은 연공을 무 라의 백성들에게 공평하게 할당하고 징수할 책임을 졌다. 연공의 협상은 작황의 변동이 크지 않은 한 매 년 행할 필요가 없었으며, 이에 영주 권력과 무라의 접촉은 그리 빈번하지 않았다. 무라는 고도의 자치를 누렸다(Tuan-Hwee Sng and Chiaki Moriguchi 2013). 도쿠가와 일본에서 무라는 토지이용, ᧚ᜭ·

(7)

ᩰἑ의 관리, 재산·권익의 방위 등의 제반 공공기 능을 종합적으로 수행하는 생산·생활공동체로서(ᜭ ᔲᒲᢇ 1985: 119), 아오키의 표현 그대로 ‘내포적 멤버쉽’의 ‘포괄적 연대’를 이루었다(Aoki 2013: 245

247).

17 19세기 Ḉ 제국은 도쿠가와 일본과 달리 촌 락이 아니라 개별 농가를 조세 수취의 대상으로 하였 다(Tuan-Hwee Sng and Chiaki Moriguchi 2013). 이 전의 Ꮫ 제국에서는 일본의 ḻḋ᱌와 유사한 제도 가 ᫵ີ᱌ 하에서 운영되었으나, 인구의 급격한 증 가와 높은 지역 간 유동성이 그러한 사회적 연대를 해체하였다고 이해되고 있다. ₴ᳯ의 경우, ‷의 지 방 행정은 6ᒠ의 ᙠፓ와 ᵮᢱ에 의해 수행되었으 며, ―·፦의 조세는 서리·차역의 통제를 받는 ẽ ᢱ에 의해 징수되었다. 향·리의 ―ᡑ과 ᔑᰫ이 조 세 행정을 주체적으로 수행하였다는 증거는 없다(Დ

፹ས᫓2012: 634). 그 점에서 18세기 중국의 조세 행정은 조선과 비슷한 양상이었다고 짐작된다. 그런 데, 아오키에 의하면, 중국의 경우 군현의 지주세력이 조세 행정에 구조적으로 개입하여 황제권력이 군현에 부과한 조세량을 수취하여 상납하였으며, 그 과정에 서 지주계급으로서 자신의 이해관계를 실현하였다 (Aoki 2013: 241 246). 이 같은 중앙권력과 지방세 력의 상호침투적 또는 중개적 관계를 조선왕조의 토 지 지배체제에서 찾아내기는 어렵다.

앞서 소개하였듯이 조선왕조에서 조세 행정의 주체 는 군현의 수령과 그를 대리한 향리 집단이었다. 양 반 신분이, 예컨대 ―န의 ―᠐에 그 이름이 등록 된 양반의 단체가, 군현의 조세 행정에 구조적으로 개입하거나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여지는 거의 없었 다. 조선왕조는 그의 조세 행정에서 지방세력을 중개 적인 협조자로 인정한 적이 없었다. 조세 행정을 담 당한 향리 집단은 2등 신분으로 지방을 대표하는 세 력이 아니었다. 그들은 수령 권력의 충실한 대리인이 었다. 그들은 조세 행정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관행적

으로 용인된 범위에서 그들의 생계소득을 확보하였 다. 결과적으로 조선왕조의 조세 행정은 어떤 지방세 력의 중개를 거치지 않은 가운데 토지에 대한 직접적 이며 개별적 지배체제로 영위되었다. 양반 신분은 조 선왕조의 지배체제를 상호침투적으로 분점했다기보다 왕조의 우대받는 손님과 같았다. 그들이 특별히 우대 를 받은 것은 왕조의 인간에 대한 지배체제에서였다.

2. ૗ӌ

조선왕조는 개별 인간의 노동력을 ᮛᨭ으로 파악 하여 그로부터 ᢱ을 수취하였다. 이 같은 인간 지배 체제는 중국의 경우 9세기 ᇒ까지의 일이며, 10세기 ᜊ이후에는 소멸하였다(ᇒᜊᓸ
). 그에 비해 조선 왕조의 인간 지배체제는 다소간의 이완을 보이긴 했 지만 19세기까지 완강하게 지속하였다. 오히려 조선 왕조에 이르러 인간에 대한 지배체제는 이전의 고려 왕조에 비해 일층 강화되었다. 크게 말해 한국사에서 국가의 지배체제가 오로지 토지에 대한 지배로 ᝱₫

하는, 중국사에서의 당송변혁과 같은, 변혁은 경험되 지 않았다. 그 점이야말로 다른 나라의 역사와 대비 된 ῑၚᗔ가 안고 있는 최대의 특질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의 전 기간에 걸쳐 16 60세의 모든 ᅁ ᰕ은 어떤 형태로든 왕조가 그에게 부과한 ᢱ을 부 담해야 했다. ᡮᬁ 남정에게는 ၤᢱ이 부과되었으 며, ―ፓ와 ᢺፓ에게는 지방행정과 교통·통신의 역 이 부과되었다. 수공업자는 일정 기간 관청에 출두하 여 각종 기물을 제작하였다. 왕실과 정부기관에는 그 에 속한 ྐྵᅣᖔ가 있었다. 그들은 정해진 ᓕᵯ에 따라 소속 기관에 나아가 잡역에 종사하였으며, ᖶ ᓕ시에는 정액의 ࿆ᐾ을 상납하였다. 그 다음에 양 반·관료가 소유한 ᗳᅣᖔ가 있었다. 그들 또한 주 인에 의해 사역되거나 연간 정액의 공물을 상납해야

(8)

했다(᫠ᤎ℧ 1998). 공노비든 사노비든 노비일 경우 16 60세의 여자에게도 신역이 부과되었는데, 이는 조선왕조가 영위한 인간 지배체제의 가장 가혹한 특 질을 이루었다. 이들 천민은 16 17세기에 전체 인 구의 무려 3 4할을 점하였다. 조선왕조는 양반·관 료의 사노비에 대한 지배를 용인하고 지원하였다. 그 점에 관한 한 왕조의 지배체제는 양반·관료에 의해 분점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렇지만 18세기 이 후 노비 인구가 크게 감소함에 따라 이 같은 지배연 합은 약화되고, 왕조의 인간에 대한 독점적 지배체제 가 강화되었다.

농촌사회에서 양반 신분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 은 15세기 이후의 일이다. 왕조의 교체 과정에서 ໤

༸에 집주하였던 고려왕조의 ၚᬁ들, 곧 관료와 중 앙군이 농촌으로 내려가 터를 잡기 시작하였다. 이후 16세기까지 고려의 국인들은 다양한 연고를 찾아 주 로 남부지방에서 그들의 ᛌ໮ᴆ를 마련하였다. 그들 의 가장 소중한 재산은 노비였다. 그들은 노비를 사 역하여 농장을 개척하였다. 15세기 후반 농촌에 정착 한 양반들은 ᩹―ᛜ라는 기구를 결성하여 군현의 행 정을 보좌하는 권리를 취득함에 성공하였다(᫠ỻᵉ

1986). 양반들은 유향소의 권력을 이용하여 토지와 노비에 대한 그들의 지배력을 강화하였다. 그런데 양 반이라 해서 왕조의 인간 지배체제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았다. ࿍໳에 급제하여 관료의 지위로 나아가지 않은 한, 양반에게도 군역이 부과되었다. 그러한 한 에서 양반 신분의 고유한 특권이나 지위는 미확립 상 태였다.

양반 신분의 특권이 성립하는 것은 17세기 이후의 일이다. 성리학의 정치철학이 조선왕조를 완전히 포 섭함에 따라 양반에게는 군역의 부담이 면제되기 시 작하였다. 그들에게는 ᩞ῀ 또는 ῀ᙐ과 같은 오로 지 학문에 종사할 역이 부과되었는데, 그것은 역이라 기보다 특권이었다. 이렇게 양반 신분의 특권이 성립 하자 그로부터 소외된, 군역의 굴레에 매인, 일반 양

인들은 점차 ᘲᑙ 또는 ᘲΈ신분으로 천시되기 시 작하였다. 17세기 이후 한국인들은 ᒀᘲ᱌라는 신분 질서에 얽매였다(김성우 2001: 423 470).

이상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양반의 우월한 신분적 지위는 농촌사회의 안정과 발전을 위한 공공의 질서 나 기능을 창출하고 공급함에 그 정당적 근거를 두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농촌사회와 이해를 같 이 하는 진정한 의미의 지방세력이 아니었다. 그들의 신분적 특권은 왕조로부터의 우대에 그 근거가 있었 다. 중앙에 ᣌᨭ을 두지 않은 양반은 없었다. 농촌 에 정착한 후에도 그들의 시선은 언제나 중앙의 ᱰ ᰟ으로 향해 있었다. 그들은 서울의 ၷᐺᛍᲑ과 인 연을 맺고 이어감에 성의를 다하였다. 그들은 그들만 의 ᙠᨶ과 ᙠᇓ을 세우고 그들의 자제를 교육하여 중앙관료로 출세시킴에 최대한의 투자를 아끼지 않았 다. 그렇지만 주변의 상민 사회에 대한 그들의 시선 은 싸늘하였다. 지위가 고귀한 양반일수록 그들은 왕 조의 우대받는 손님으로서 군현의 지방행정으로부터, 주변의 상민사회로부터, 스스로를 멀리하였다.

그리하여 양반의 단체나 그 연합이 농촌사회의 통 합과 발전을 위해 교육, 수리, 영림, 도로, 교량, 치안 등에 투자를 하거나 새로운 규범을 창출한 사례는 전 국 어디서도 쉽게 관찰되지 않는다. 군현의 양반 연 합으로서 15세기에 성립한 유향소는 17세기 이후 양 반 신분이 확장됨에 따라 ―ᒀ이라 불린 2등의 양반 신분이 참가하는 ―Ḇ으로 변질되었다. 군현에 따라 다양했지만, 17 19세기의 향청은 조세, 환곡, 요역 등 제반 수취를 위한 수령의 형식적인 보좌기구로서 그 역할과 지위가 점점 낮아져 갔다(ᄗ᧢ᇮ 1978:

55 66, ᜊ᳛⁹1987: 148).

양반신분의 이 같은 속성으로 인해 17세기 이후 왕 조의 중앙집권성은 오히려 강화되었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왕조의 지배체제는 상민 신분의 커다란 반발 에 봉착하였다. 1862년의 대규모 농민봉기를 맞아 왕 조는 양반에게도 군역을 수취하는 개혁을 단행하였다

(9)

(⁴Ὦ᱌). 그렇지만 양반들은 왕조의 개혁에 협조하 지 않았다. 양반들은 마지못해 군역을 분담하였지만, 그 부담은 상민에 비해 한결 가벼운 것이었다(ᄗ᧑ ᚸ1984: 278 290). 농촌사회의 구성원을 양반과 상 민의 상이한 인격으로 차별한 반상제는 1910년 조선 왕조가 문을 닫을 때까지 폐기되지 않았다.

,,,ᖓₘᅊᶺ

1. ሷ፦

토지와 인간에 대한 조선왕조의 개별적이며 차별적 인 지배체제는 이전 고려왕조 시대까지 농촌사회가 보존해 온 사회협약의 능력에 큰 제약을 가하거나 그 것을 변질시켰다. 그러한 변화는 인간들의 가장 친밀 한 교섭과 협동의 공간이라 할 수 있는 촌락의 역사 에서 두드러지게 관찰되고 있다. 한국사에서 ፦가 말 단 행정단위로 제도화하는 것은 15세기 조선왕조 초 기의 일이다. 조선왕조는 지방행정체제를 ሓ-ၥ·‷- Ꮤ-፦-ἐ의 위계로 편성하였다. 1통은 5호로, 1리는 5통으로 구성되었다. ፦에는 ፦ᰫ이란 책임자가 있 었다( མၚᇠᯜ ⁴ᯜ⁴ᯋ). 그렇지만 이 같은 15세기의 지방행정체제는 대개 법조문에 불과하였다.

5호를 1통으로 편제함은 17세기 전반까지 일반적으로 행해지지 않았다. ፦는 ሷ, ḻ 등으로도 불리었는데 (이하 ሷ፦로 통칭), 그 편제의 실태는 지방마다 다 양하였다.

15 16세기 동리의 실태에 관해 우리가 아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15세기 전반의 ངᘰሓᴆ፜ᴈ 와 ངᘰሓ᛿ᵾᴆ፜ᴈ 는 동리의 존재를 전하 는 최초의 사료이다. 거기에 나타난 동리는 17세기 후반 이후의 동리와 그 명칭이나 규모에서 연결되지 않음이 보통이다(ᄗ᳛⁏ 1984: 76 77). 15 16세

기 동리의 규모는 17세기 후반보다 컸으며, 17세기 후반 이후의 Ꮤ과 비슷하였다. 그런 가운데 15 16 세기의 동리는 후대의 동리보다 일층 공동체적이었 다. 동리는 일반적으로 ’ᇻ라는 단체로 조직되어 있었다(᫠ỻᵉ 1989). 15 16세기까지 서울과 농촌 에 침투한 ᩗဓ의 사회윤리는 아직 표층적 수준에 머물렀다. 초기의 왕조실록에 의하면 당시의 한국인 들은 부모의 ᮅᬝ을 맞이하여 이웃 향도를 모아 술 을 먹고 노래를 하면서 조금도 애통해 하지 않았다 ( Ỷᱻ៛ዾ 7년 12월 ៖ᑅ; ᛌᲛ៛ዾ 2 년 11월 ៖ᑅ). 향도는 종교단체로서 ᣲᖄ’ᇻ라고 도 하였다. 향도가 행하는 ៌ᗱ에는 ᳖ឿ이 풍성하 게 베풀어져 종종 왕조의 규제 대상이 되었다. 향도 는 동리민이 활발하게 영위한 공동노동의 단체였다.

향도는 왕조가 군현에 부과한 조세, 공물, 잡역 등을 수취해 내는 조직이기도 하였다.

이 같은 향도 공동체를 대신하여 새로운 형태의 동리가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1675년에 반포된

᥃๟ἐᗌᐃ에 의해서이다. 그에 따라 5๟는 1ἐ으 로 편제되었으며, 5 10개의 통은 ᛙ፦, 11 20통은 ᳯ፦, 20 30통은 ᇠ፦로 구분되었다. ፦에는 ᫵

ᰫ과 ᩧᗕ가 있어서 인구 조사와 치안 유지 등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 위에는 Ꮤ이 설치되었다 ( ᖏᓻᗕ቗ዾ ᝠᲛ ᨞ᅘ 9월 26일). 이 같은 지방행정체제의 개혁이 초래한 변화와 관련해서는 경 상도 ᆣᚺ‷의 예가 잘 알려져 있다. 1606년 단성 현에는 6개 동리가 있었다. 현과 동리 사이에 면이 있으나 방위를 구획하는 정도의 의미였다. 그랬던 것 이 1678년에는 8개 면과 60개 동리로 바뀌어 있었다 (᱁ᵌᤢ 1993: 9). 구래의 동리가 면으로 승격하고, 그 아래에 있던 소규모 ᵤቨ이 동리라는 말단 행정 단위로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후 전개된 동리의 역사에서 뚜렷이 관찰되는 한 가지 특징은 동리의 수가 19세기 말까지 증가일로 였다는 사실이다. 단성현의 경우 1678년의 60개 동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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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1825년까지 112개로 증가하였다. 1699년 경상도

ᨙᘍᕒ대현·청량·농소·유포 4개 면에 속한 동리 는 63개였는데, 1801년까지 114개로 증가하였다(᱁ ᵌᤢ1993: 7). 전국의 동리 총수가 파악되는 것은 1790년의 일이다. 동년에 편찬된 󰡔⁴ာṃᜪ󰡕에 의 하면 전국 332개 군현에 속한 동리는 총 39,465개였 다(서울ᇠ῀နႍ᭿๼ 1996: <표2>). 그랬던 것이 1910년까지 62,532개로 1.6배나 증가하였다(ᄗ᫿Έ

1996: 67).

동리 수의 증가는 인구의 증가나 개간의 진전이 아니라 기존의 동리가 둘로 나뉘는 이른바 ᕰሷ에 의하였다. 분동의 주요 원인은 주민 간의 신분적 갈 등이었다. 촌락이 상이한 신분의 ₚ໮로 이루어졌음 은 다른 나라에서 쉽게 찾을 수 없는, 조선왕조 고유 의, 역사적 특질이다. 전술한대로 17세기 이후 반상 제라는 신분 질서가 정착하였다. 동리는 복수의 소규 모 ᵤቨ으로 이루어졌으며, 각 집락에는 상이한 신 분집단과 친족집단이 거주하였다. 양반 신분의 집락 은 동리의 지배세력을 이루었으며, 상민 신분의 집락 을 차별하고 지배하였다. 이러한 신분 구조의 동리를 ᒀḻ이라 하였다.

분동을 야기한 갈등은 반촌의 지배세력인 양반 친 족집단 간에 헤게모니 다툼이 벌어지거나 양반 신분 의 지배에 대해 상민 신분이 반발하는 등, 그 양상이 다양하였다(᱁ᵌᤢ 1993: 12 22). 전자의 경우 하 나의 ᒀḻ이 두 개의 반촌으로 갈라졌으며, 후자의 경우 ᒀḻ과 ᑙḻ으로 분리되었다. 민촌은 상민 신 분의 동리를 말하였다. 갈등은 주로 동리에 부과된

ၤᢱ이나 徭ᢱ을 주민에게 분배하는 과정에서 발생 하였다. 양반 신분은 군역을 면제 받는 특권을 누렸 을 뿐 아니라 요역 부담을 불공평하게 상민 신분에게 전가하였다.

상민 신분 가운데는 친족 결합을 강화하면서 그 경제적 능력과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그룹이 있 었다. 그들은 양반 신분의 지배를 부정하고 그로부터

독립을, 곧 분동을 쟁취하였다. 새로운 동리에서 그 들은 양반 신분으로 행세하였으며(―ᒀ), 이는 또 한 차례의 분동을 예비하는 조건으로 작용하였다. 이처 럼 17 19세기에 걸친 분동의 장기추세는 ᒀᘲ의 대립구조를 안은 반촌이 공간적으로 확산하는 과정이 었다. 양반 신분의 확산을 동반한 농촌사회의 구조적 변동은 그렇게 획일적이지는 않았다. 민촌에 양반 신 분이 침투하여 서서히 ᨟Ჲ 상민을 ᾱᑙ으로 종속 시키는 다른 한편의 추세도 있었다(᫠ᤎ℧ 2001:

251 259).

어쨌든 17 19세기의 동리는 상이한 신분의 인간 들로 구성되고 그들 간의 신분적 통합과 갈등을 구조 적 특징으로 하였다. 동기간 농촌사회에는 유교적 Მ ᓨ으로 결합된 양반 신분의 친족집단이 확산되었으 며, 그 와중에서 인간들의 가장 친밀한 교섭과 협동 의 공간이라 할 수 있는 동리는 지속적으로 유동하고 재편되었다. 1675년에 반포된 ᥃๟ἐᗌᐃ은 동리를

“ₘᘭ에 서로 돕고 ⃄ᄷ에 구휼하고 ᚄ‐을 권면하 는” 공동체로 규정하였지만, 동리 내부의 실상은 그 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17 19세기의 동리가 안정적 구조로 정착할 수 없 었던 다른 한 가지 요인은 ᛙᆀམᤗ의 불안정성에 있었다. 농업기술과 시장경제의 저수준에 규정되어 개별 농가가 자립적 ᛙᆀ으로 성숙한 정도에는 한계 가 있었다. 1717년 경상도 단성현 ᓨᐼᡃᏔ의 ⁴ ᯋ에는 368호가 등록되어 있었다. 이후 이들이 동 호적에서 ๟ཱུ를 계승한 기간은 평균 41년이었다.

신분별로 차이가 있어 양반신분의 가계는 평균 78년, 상민 신분의 가계는 평균 30년 전후였다. 이에 108년 뒤인 1825년까지 존속한 가계는 총 368호 가운데 양 반 신분의 45호에 불과하였다. 이후에도 농가의 안정 성은 개선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악화되었다(이영훈·

조영준 2005: 12 17).

이처럼 18 19세기의 농민들은, 특히 하층 신분의 농민들은 1 2ᛌᇝ 안에 다른 면으로 주거를 옮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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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나 ᰈ๟를 함이 보통이었다. 친족집단도 이 같은 소농경영의 불안정성과 이동성에 규정되어 그 존속이 그리 안정적이지 않았다. 예컨대 1690 1858년 경상 도 ᇠဤᕒᨹᓀ지역에 있어서 장기 존속한 친족집 단은 11개, 소멸한 친족집단은 11개, 거의 소멸 중인 친족집단은 4개였다. 크게 번영하여 그 지역의 지배 세력으로 군림하게 된 친족집단은 3개였다(ᇹ᪓᥍ᢇ

2010: 200 201).

2. ཨ

17 19세기의 동리가 그 내부의 대립적 신분구조 로 인해 도쿠가와 일본의 무라와 같은 내포적 멤버십 의 포괄적인 연대가 아니었음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 시대 나름의 사회협약의 능력을 부정하 거나 그 실태를 과소평가해서는 곤란하다. 제반 공공 기능의 확보에서 동리의 역할은 불충분하였지만, 그 를 보완하거나 대체하는 단체로서 다양한 형태의 ཨ 가 발전하였다.

계는 일반적으로 몇 사람 혹은 수십 인이 특정의 목적을 위해 일정한 규약을 만들고 Ⴥᾗ을 갹출하여 공동재산을 조성한 ༯ᗰḗ를 말한다. 당초 지배신분 의 ᗰဋཨ로 출발한 계는 15 16세기에 ሷཨ와 Ბ ཨ로 성립하고, 17 18세기에는 ῀ཨ, ₘᘭཨ로 발 전하고, 19세기에는 ၤὮཨ 등으로 더욱 분화하였다 (김필동 1999: 369 387). 계는 일반적으로 단일의 목적을 추구하였다. 동계는 동리 내의 신분 질서와 교화를, 족계는 조상의 제사 봉행을, 학계는 ᙠᇓ의 설치와 운영을 목적으로 하였다. 계는 성원들의 약속 과 그를 위한 공동재산의 운영으로 존속하였다. 약속 이 지켜지지 않거나 공동재산이 처분되면 계는 해체 되었다.

17 19세기에 계가 전국적으로 또 형태별로 얼마 나 존재했는지는 짐작하기 어렵다. 그에 대해 1942년

ᐴᰜᶥ이 ‘수십만’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는데(ᐴᰜ ᶥ1942: 304),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추론일 뿐이다.

그에 대한 공식적인 조사가 이루어지는 것은 1926년 의 일이다. ṃም࿛ᒠᐴᙠ࿐의 조회에 대해 각 ሓ 가 회답한 바에 따르면, 당시 전국적으로 19,067개의 계가 있었다. 가입자는 총 814,138명이었다. 목적별 로 분류하면 ሷཨ, ᙠᇓཨ 등 공공 목적이 1,623개 에 82,312명, Ბཨ, ₘᘭཨ 등 부조 목적이 11,696 개에 351,172명이었다. 뒤이어 산업 목적과 금융 목 적의 계가 있었다(ᱰᚠṃምᕒ1926: 28). 이 가운데 산업 목적과 금융 목적의 계는 주로 일제하에서 생겨 난 것이다. 그에 비해 공공 목적과 부조 목적의 계는 그 기원이 19세기 이전으로 올라가는 경우가 많다.

1926년의 조사가 어느 정도 철저했는지는 의문이 지만, 어쨌든 그에 의해 최초로 파악된, 전통성이 강 한, 공공 목적과 부조 목적의 계는 전국적으로 13,319개였다. 당시 한국인의 세대 총수는 348만 정 도였다. 각 세대가 가입한 계의 수를 1개라고 단순화 하면, 당시 총 세대의 12%가 전통적 계에 가입해 있 었던 셈이다. 19세기는 경제적 위기와 정치적 혼란의 시대였다(᫠ᤎ℧ 1997). 그 와중에서 상당수의 계가 해체되었음이 분명하다. 그 점을 고려하더라도 17 19세기의 전통사회에서 계의 보급이 보편적이었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여러 형태의 계 가운데 공공성 이 가장 강한 것은 ሷཨ이다. 1926년의 보고서에서 동계의 수가 알려진 ၥ은 충북 Ḉ᲼ၥ이 유일한데, 모두 33개였다(ᱰᚠṃምᕒ 1926: 151). 청주군의 동리 수는 1912년 이전의 구동리는 948개, 이후의 신 동리는 343개였다(ᨺᴎᩚẮ 1917: 156 167). 이로 부터도 동계의 결성이 ᒛᒛྦྦ의 모든 동리에서 일반적이었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계의 결성과 운영은 일반적으로 양반 신분을 그 주체로 하였다. 동계는 양반 신분의 지배력이 강한 반촌에서 결성되었다. 동계는 반상의 신분 질서를 수 호하고, 상민들을 교화하고, 환난을 구호하고, 혼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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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부조함을 목적으로 하였다. 동계는 ᘨཨ와 ᾱ ཨ로 그 조직이 나뉘었다. 상계는 양반 신분을, 하계 는 상민 신분을 구성원으로 하였다. 이 같은 동계의 구조를 흔히들 ᘨᾱῠཨ라 하였다. 동계 내의 상하 질서는 봄·가을로 소집되는 ሷ⃵의 좌석 배치에서 뚜렷이 드러났다. 예컨대 1756년에 결성된 경기도

࿲᲼ᕒ ང᠌Ꮤ 2፦의 ሷᡑ은 신분에 따라 ᇓ-ཻ- ᰞ의 Წᵯ를 명확히 하였다. 마루에는 양반이, 섬돌 에는 중인이, 마당에는 상민들이 자리를 잡았다(ῑၚ

᰻៌ᐴ₫ᣖ၆ᨶ1990: 198 239).

동계 역시 동리와 마찬가지로 그 존속이 안정적이 지 않았다. 예컨대 위 경안면 2리의 동약은 그리 오 래 가지 못했다. 2리에는 8개의 집락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3개가 1790년까지 별개의 동리로 독립하였다.

전술한대로 상민의 집락이 양반의 지배에 반발하여 분동을 한 것이다. 그에 따라 기존의 동계는 해체되 고 좁은 범위에서 재결성되었다. 동일한 사례는 여러 동리에서 적지 않게 관찰되고 있다. 반상의 갈등만이 아니었다. 공동재산의 운영을 둘러싼 양반 친족집단 간의 갈등이 동계를 해체하기도 했다(᫠ᤎ℧ 2001:

273).

동계의 다른 한편의 기능은 공동노동의 조직과 동 원에 있었다. 동계는 하계의 상민들을 15명 전후의 ὃ로 편성하였다. 큰 동리에는 몇 개의 패가 조직되 었다. ᆀឣ를 맞아 패는 동리의 모내기와 김매기에 동원되었다. 패는 ᆀქ와 징의 인도 하에 동리의 답 을 순차로 신속하게 돌았다. 패의 공동노동에는 ᳖

ឿ이 풍성하게 제공되었다. 그 비용은 상계의 ᇎᲱ 들에 의해 제공되었다. 그 외에 답주들은 ྠᬬ을 분 담하였는데, 이는 공동노동에 동원된 하계원에게 노 동량에 따라 분배되었다.

흔히 두레(ᆀᗰ)로 불린 이 같은 공동노동의 단체 와 관행은 종래 한국인들의 우수한 공동체 문화를 상 징하는 민속으로 알려져 왔지만(ះ᧡᾵ 1984; 이해 준 2005), 근래의 인류학적 연구는 그에 대한 재고를

요구하고 있다. 두레의 전형은 양반세력이 강한 반촌 에서 상계가 하계의 노동력을 동원하는 방식과 그에 부수하는 문화에 다름 아니었다(오창현 2008). 동리 의 양반 ᕑᑙ들은 두레를 통해 가난한 하민들의 노 동력을 수탈하였다. 두레는 소농의 자율적인 노동과 정을 억압하였다(안승택 2007: 416 417). 두레의 출 현은 17 18세기에 걸친 ᫩ᠫᓨ의 보급이 그 주요 계기였다고 이해되고 있는데(주강현 1995: 47 51), 필자의 소견으로는 ᘨᾱῠཨ의 동계의 성립이 그 사회적 계기로서 보다 중요했다고 보인다.

동계가 결성되지 않은, 수적으로는 다수였던, 상민 신분의 민촌에서 어떠한 협약이 맺어졌는지, 거기서 15 16세기의 ’ᇻ는 어떻게 계승되고 있었는지에 관해서는 참고할 문헌이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유교 의 침투가 미약하였던 함경도 등 북부 산간지대에서 는 20세기 전반까지 향도의 유제가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ỻᵉ 1989: 15 16). 나머지 지방에 서 향도가 체현하였던 유교 이전의 전통 신앙과 생활 문화는 양반세력의 억압을 받아 점점 위축되었음이 분명하다. 전술한대로 1675년의 ᥃๟ἐᗌᐃ 이후 새롭게 출현한 동리는 19세기 말까지 지속적으로 분 화하면서 유동하였다. 상민의 상층부가 2등의 양반신 분으로 진입하였던 반면, 상민의 하층부는 침투해 온 양반신분의 하민으로 전락하였다. 이 같은 전반적 추 세로부터 자유로운, 비유교적인, 독자의 협약체로서 민촌이 건재했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동계가 점점 좁아지는 동리의 공간에서 양반의 상 민에 대한 지배 조직으로 그 기능을 단순화하자 교 육, 수리, 영림 등 별도의 공공기능을 위한 계들이 다양하게 발달하였다. 서당은 3 4개 동리에서 하나 가 건립되었는데, 이의 운영을 위해서 여러 동리의 양반들이 연합하는 ῀ཨ가 조직되었다. 수리조직인

ᷙᒳཨ 역시 ᔗ가 여러 동리를 통과하였기 때문에 여러 동리의 연합으로 결성되었다. 동리를 둘러싼 산 림은 양반 친족집단에 의해 소유되었는데, 그의 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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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위해 ᜌཨ가 조직되었다. 동리에 속한 양반 친족 집단이 복수일 경우 복수의 송계가 조직되었다. 이 경우 송계는 학계, 천방계와 달리 동계보다 범위가 작았다. 양반 친족집단은 다른 동리의 친족집단과 Ბ ཨ를 조직하여 조상을 위한 ᮝᗸ를 건립하고 ឣ᱖ 를 봉행하였다. 나아가 Ꮤ과 ၥ의 범위에서는 양반 의 결사체로서 Ꮤཨ와 ―ཨ가 있었다. 개인을 단위 로 해서는 예컨대 주인과 노비 사이에, 양반과 향리 사이에, 의생·약재상과 단골 고객 사이에, 특정 서비 스의 안정적 공급을 위해 2ᬁཨ가 다양하게 체결되 었다(᫠ᤎ℧2001: 269 283).

이처럼 17 19세기 남부 농촌사회에는 양반 신분 을 주체로 하여 범위와 수준을 달리하는 다양한 계가 중첩적으로, 비유컨대 ‘ᆡẑ᫦៟’으로 발달하였다(᫠

ᤎ℧ 2001: 282). 개인이나 친족이나 동리를 구심으 로 하여 단단하게 결속된 단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크게 보아 17 19세기 조선사회는 일본형의 내포적 이며 포괄적인 ᆧḗᗰ⃵가 아니라 중국형의 선별적 이며 구성적인 ࿨ཥᗰ⃵로 진화하고 있었다. 그렇 지만 개인 간의 쌍무적이며 호혜적인 신뢰관계는 인 간들의 사회적 지위를 ᒀ과 ᘲ으로 차별한 신분제에 의해 크게 제약되었다.

,9ᓏᘵૐଅඨ

조선왕조의 5세기에 걸친, 17세기 이후에 가속된, 한국사의 ‘유교적 전환’(Deuchler 1992)은 양반 신분 의 친족집단을 농촌사회에 널리 확산시켰다. 1930년 조선총독부의 ၚᛍᲈᗧ는 1910년대에 개편된 ៈ ሷ፦에서 10세대 이상 거주한 동성 친족집단이 전국 에 걸쳐 16,889개나 됨을 확인하였다(ᱰᚠṃምᕒ

1933: 159 424). 동성 친족집단이 거주한 마을은 그 대부분 반촌으로 분류될 수 있는데, 당시 전국의 6만

2,000여 개 ။ሷ፦ 가운데 대략 4할을 점하였다고 추정된다. 이들 반촌이야말로 17세기 이후의 ‘유교적 전환’이 20세기의 한국사를 위해 남긴 가장 의미심장 한 역사적 유산이었다.

‘유교적 전환’을 상대화하거나 제어했던 다른 흐름 의 역사는 없었던 편이다(ᜊ᳛⁹ 1987: 160 164).

17 19세기에 양반 신분의 위세와 특권이 생산계급 ᑙᳱ의 도전을 맞아 해체되기 시작하였다는 종래의 학설은 설득력을 상실한지 오래이다. 전술한대로 양 반 신분의 발전은 속성상 그에 의해 차별되는 상민 신분을 그 ᇡႧ에 두었으며, 그로 인해 농촌사회의 구조는 지속적으로 유동하였다. 아직도 양반 신분으 로 승격하지 못한, 그러할 용의로 충만한, 상민 신분 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 점에서 ‘유교적 전환’은 미 완의 상태였으며, 한참도 더 진행한 뒤에야 멈출 ᮌ შᴉ᛿이었다.

‘유교적 전환’과 별도로 한국인들은 일제의 지배 하 에서 ‘근대적 전환’이라는 또 하나의 장기지속을 맞이 하였다. 20세기 한국사는 이 두 가지 상이한 시간성 의 문명사적 전환이 ᔬᚒ으로, 상호 규정으로, 전개 하는 과정이었다. 한국인들이 양반과 상민이라는 신분 적 굴레에서 법제적으로 해방되는 것은 1912년의 ᱰ ᚠᑙᗌዑ에 의해서였다. 그에 따라 일본의 이른바 Ꮫẙᑙᓨ이 식민지 조선에 ᫀ᧚되었다. 민법이 상 정하고 있는 인간은 ᗳၷ의 주체로서 ໓ᬁ이다. 인 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은, 자신 의 생명과 신체와 재산에 대해 절대적 권리를 보유한 자유의 존재이다. 유감스럽게도 조선왕조는 그의 백성 을 이 같은 근대적 인간으로 탈바꿈하기 위한 민법의 제정을 끝내 거부하였다. 조선민사령이 빚어낸 근대적 인간에 실체를 부여한 것은 근대적 재산권이었다.

1920년대 전반까지 ᯭ, ᇎ, ᇞ, ᬧᡍ, ᘍᴆ, ࿺ᘍ,

᡹᭬등의 각종 부동산에서, 나아가 각종 ᶲၷ과 ᮶ ᭐ၷ·᫄᭫ၷ 등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인 범위에서 근대적 재산권이 창출되었다(이영훈 2005). 한국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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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사권의 주체로서 근대적 인간은 정신적 가치에서 보다 물적 재산권에서 먼저 성립하였다.

전통 사회조직에 가해진 근대적 충격으로서는 1914 1918년에 행해진 지방행정제도의 개편이 가장 직접적이었다. 총독부는 조선왕조로부터 물려받는 317군을 220군으로, 4,336면을 2,522면으로, 62,532동 리를 27,595동리로 통폐합하였다. 그 결과 인구와 토 지의 규모가 비교적 균일한, 경계가 명확하게 그어진, 지방행정구역이 성립하였다. 새로운 행정체제에서 기 능이 특별히 강화된 것은 Ꮤ이었다. Ꮤᮌ은 ሓᮌ࿛

에 의해 임면되는 관료로서 ἱᬢ࿛의 지위를 부여받 았다. 면은 종래 동리와 그에 부속한 각종 계가 수행 하던 공공기능을 흡수하였다. 면의 행정은 도로, 교 량, 하천, 제방, 관개, 배수, 시장, 조림, 농사, 축산, 묘지, 위생, 소방 등을 두루 포괄하였다. 면사무소를 구성한 Ꮤᮌ과 Ꮤᙠᄆ는 구래의 2등 신분이었던 향 리를 위시한, ໤῱ 이래 그 사회경제적 지위를 상승 시켜 온, 신흥유력자 계층으로 충원되었다(ᄗ᫿Έ

1996: 56 86). 크게 말해 근대 한국의 주도 세력은 양반 신분에서 향리를 중심으로 한 신흥유력자 계층 으로 교체되어 갔다(᫠℠ᘽ1994).

새로운 법제와 행정체제를 주요 경로로 하여 농촌 사회에 침투한 근대문명은 전통 인간관계와 사회조직 을 크게 재편하였다. 무엇보다 반상제가 공식 영역에 서 사라졌다. 동계를 통한 양반의 상민 지배도 동리 의 통폐합에 따라 크게 약화되었다. ။ሷ፦의 ᮌ은 ᛙᗑ와 같은 존재로 천시되었으나, ါᮌ으로 이름을 바꾼 ៈሷ፦의 장은 신흥계층에서 충원된 자들로서 그 권위와 직능이 양반세력의 통제 하에 있지 않았 다. 지역에 따라 그 변화의 양상은 다양하였다. 구래 의 양반 신분이 총독부의 지배정책에 능동적으로 호 응하여 구장 또는 면장에 취임하는 경우도 있었다(강 성복 1992: 101 102). 가장 뚜렷한 변화는 농촌에 이식된 ῀န와 각종 ᲂῠ에서 관찰되었다. 예컨대 종래 동계가 운영하던 ሷᗸ나 ᙠᇓ은 하민의 자제

도 취학하는 학교로 그 용도가 바뀌었다. 그에 따라 학교 Ὑ᫑ᨠ⃵의 구성과 운영은 구래의 동계나 학 계와 다를 수밖에 없었다(᫠ᤎ℧2001: 293).

인간관계와 사회조직의 변화가 단절적인 것만은 아 니었다. 근대는 전통의 형식을 빌리거나 그것을 계승 하는 경로로 이식되었다. 예컨대 ᡹ḻ이 ᴆᚃ᡹᭬

의 어업권을 취득하기 위해서는 ᡹ḻཨ로 조직되어 야 했다. 일본의 ᡹ᢔᲂῠ이 이식되면서 계의 형식 을 빌린 경우이다. ໤ᚺ에서 상인들의 계가 새롭게 조직되었는데, 이는 전통 상인의 조직인 ᯤ이 조합으 로 그 실질을 바꾸면서 계를 칭한 경우이다. 1911년 함경북도는 일본의 ᘑᢔᲂῠ과 조선의 ―ᡑ을 결 합하여 ሷཨ 규칙을 제정하고 이를 관내 전 동리에 서 실행하였다(ᱰᚠṃምᕒ 1926: 69 75, 114 118, 147 149).

이 외에 실로 다양한 형태의 계가 총독부의 농 촌·농업정책의 지원을 받아, 또는 그에 호응하는 민 간의 자발로, 결성되었다. 앞서 소개한 바 있는데, 1926년 총독부가 파악한 전국의 계는 총 19,067개에 814,138명이었다. 그 가운데 ᆀཨ, ᧰ཨ, ᨹᜩཨ

등, 산업·금융목적의 계가 4,260개에 114,582명이었 다. 이들 산업·금융목적의 계는 대부분 1910년 이후 일제의 조선지배와 함께 생겨났다. 1926년 이후에도 계는 증가하는 추세였다. 1938년 전국의 계는 총 29,257개에 903,640명이었다(ᱰᚠṃምᕒ 1938: 88).

근대문명의 이식과 함께 신분제의 굴레에서 벗어난 인간들은 전통의 형식을 빌려 새로운 관계와 단체를 창출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전통적 인간관계와 사회조직이, 그를 둘 러싼 유교적 정신문화가, 일방적으로 쇠퇴하고 소멸 해 간 것은 아니었다. 근대가 전통의 형식을 빌어 이 식된 것과 마찬가지로 전통 역시 근대로부터 스스로 를 변형하고 확장할 계기를 찾았다. ᑙᓨ의 ᫀ᧚이 한국인의 일상생활에서 초래한 가장 중대한 변화는

⁴Ჱ가 성원의 자격과 재산을 통제할 권리를 갖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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⁴Ჱ᱌ ๟Ბ의 창출이었다. 그 일본형의 가족이 쉽 사리 수용되었던 것은 호주제가 ᱖ᗱ를 ᯁᮌ의 권 리로 승계하였던 전통 친족제와 특별히 친화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호주제 가족의 창출은 호주가 된 모 든 남성에게 일본형의 ๟ᕙᮌၷ을 부여하였을 뿐 아니라,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유교적 ᱖ዥ를 그 의 권리와 의무로 보급하는 계기이기도 하였다. ‘유교 적 가족제도’는 오히려 식민지기에 보편적으로 확산 되었다(홍양희 2005: 200).

근대 민법이 창출한 호주제 가족은 전통과의 친화 성에서 자연스럽게 인간들의 친족결합을 강화하였다.

동성 친족집단은 산간의 후진지역으로, 연해의 간척 지로 확산하였다. 친족제에 있어서 식민지기에 나타 난 중요한 변화는 친족집단의 광역적 통합이다. 식민 지 초기의 정치적 혼란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1920 년대에 이르러 Ბᔟ가 활발하게 간행되었다. 족보는 종래의 소규모 Ἡᔟ를 넘어 여러 지역의 친족집단을 통합한 ᇠሲᔟ로 발전하였다. 철도와 버스로 개선된 교통사정은 친족집단의 지역 간 통합을 촉진하였다.

나아가 전국의 유명한 친족집단을 종횡으로 통합한

᎗ᚻᇠሲᔟ가 편찬되었다.(᫠ᤎ℧ 2000: 74 75, 이영훈 2009: 38). 이 같은 문화사적 변화를 거치면 서 상당수의 한국인이 자신의 원 신분을 양반으로 입 증할 족보, 족물, 족제를 취득하였다.

반상제가 공식 영역에서 소멸하였지만, 농촌사회에 대한 양반 신분의 지배구조는 쉽사리 해체되지 않았 다. 반상제의 해체에 조응하여 양반들은 그들만의 지 역 내 결속을 강화하였다. 19세기 말 ሴ῀ᆀᑙᕀᄉ

이후 각지에서 체결되기 시작한 양반들의 ᩗཨ또는

ᩞ῀ཨ가 그 좋은 예이다(᫠ᤎ℧ 2001: 294 295, 정승모 2002). 이들 계는 하민들을 더 이상 동원할 수 없게 된 양반들이 그들만의 상호부조를 위해 조직 한 것이다. 그렇지만 양반세력이 강한 전형적인 반촌 에서는 식민지기에도 여전히 ᾱᑙ들을 상여군으로 동원하였다. 반촌에서 거행된 연례 ሷ⃵의 양상은

전통시대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양반들은 사 랑과 마루에 앉고 하민들은 마당에 섰다. 하민들에게 발언할 기회는 부여되지 않았다(강성복 1992: 99 100).

전술한대로 두레라는 공동노동의 관행은 전통시대 에 상하합계의 반촌에서 상계가 하계의 노동력을 동 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식민지기에 걸쳐 두레는 쇠퇴 하는 추세였다(ះ᧡᾵ 1984: 44 51). 임노동, 품앗 이, ྠᴄᇫ와 같은 대안적 노동형태의 보급과 더불 어 반상제의 해체가 그 중요한 요인이었다. 그렇지만 양반 지주의 세력이 강한 마을에서 두레와 그에 부수 하는 공동체적 민속은 식민지기에도 끊어지지 않았다 (오창현 2008). “조선의 향촌사회는 일제의 침략으로 결코 망하지 않았으며, 일제 치하에서 그 본래의 구 조와 성격에는 근본적인 변동이 없었다”는 ᜊ᳛⁹의 지적은 기본적으로 정당하다(ᜊ᳛⁹1987: 290).

9ᘬἿᖓₘૐोߌ

1937 1953년은 ᯦ᮟ의 시대였다. 총독부는 사회 의 자발적 결사로서 각종 계를 전시동원체제의 일환 으로 강제 편입하였다. 산업 목적과 금융 목적의 각 종 계는 수리조합, 산업조합, 금융조합, ីᘑཨ등으 로 통합되었다. 공공 목적과 부조 목적의 계는 그 활 동이 억압되었다. 일제의 패망과 전시동원체제의 해 체는 거기로 강제 편입된 사회조직의 ᐬᘎ이기도 하 였다. 식산계는 공중 분해되었다. 금융조합 등 각종 조합도 그 기능을 정지하였다. ᴆᚃ᡹᭬의 ᡹ḻཨ 도 해체되었다. 해방과 더불어 사회는 진공상태에 빠 져들었다. 살아남은 단체라고는 동성 친족집단이 거 의 유일하였다.

일제하에서 발족한 한국사의 ‘근대적 전환’은 1948 년 대한민국의 건국으로 그 최초의 정치적 결실을 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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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건국과 더불어 실시된 ᆀᴆ໙
은 ‘근대적 전 환’에 박차를 가하였다. 농지개혁에 의한 ᴆᲱ᱌의 폐지는 그에 부대하였던 반상제의 유제를 최종적으로 해소하였다. 전형적인 반촌에서 잔존했던 ᅣᖔ들이 그 모습을 완전히 감추는 것은 농지개혁 이후였다(정 진상 2000). 반촌에서 하민들을 양반가의 상여군으로 동원하는 관행도 농지개혁을 경계로 소멸하였다. 두 레 관행도 하민들의 반발을 맞아 중단되었다(ṉᮐ  1975: 507). 농지개혁 이후 한국인들은 명실공히 그 신분적 지위에서 자유롭고 평등해졌다.

그렇다고 한국인의 일상적 사회관계에서 ᒀᘲ의 신분감각이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 역사적 잔재는 한 세대는 더 완강하게 지속하였다. 어느 동 리에서는 1980년대까지 장례를 위한 두 개의 계가 병존하였다. 하민들을 상여군으로 동원할 수 없게 된 양반들이 그들만의 장례를 위한 계를 조직하자, 하민 들도 그들만의 계를 대항적으로 결성하였던 것이다 (강성복 1992: 118 123). 이처럼 원 신분을 달리하 는 인간들은 그 사회생활에서 은근히 때로는 노골적 으로 대립하였다.

그 점에서 농지개혁은 하민들의 ‘유교적 인간화’를 촉진하는 계기이기도 하였다. 하민들도 ᐺᳯ을 조성 하고, ឣ᱖를 지내고, 전국적 규모의 Მậ⃵에 가입 하고, 또 부모를 ᘭᢧ로 모심으로써 한몫의 인간으 로서 권리와 위신을 과시하였다(오창현 2008: 112).

한국사의 ‘유교적 전환’은, 그리고 그것의 ‘근대적 전 환’과 어울린 ‘복선의 전환’은, 농지개혁 이후에도 그 진행을 계속하였다. 매우 예외적인 경우이겠지만, 어 느 반촌에서는 1970년대 이후까지도 두레가 행해졌다 (오창현 2008: 100).

‘복선의 전환’이 초래한 농촌사회의 구조적 특질은 1958년 경기도 ࿲᲼ၥ과 ᧢ᬂၥ의 접경부에 위치 한 6개 동리에 대한 사회학적 조사에서 뚜렷하게 드 러났다. 2개의 반촌과 2개의 민촌에서는 협동적 질서 가 그런대로 성립해 있었지만, 반상이 뒤섞인 2개의

동리에서는 전혀 그렇지 못하였다. 반촌 자체도 그리 잘 통합된 상태는 아니었다. 반촌을 구성한 복수의 친족집단 간에는 가문의 위세를 둘러싼 경쟁과 갈등 이 잠복해 있었다. 전통적 형태의 동계나 그에 부수 했던 ሷ᱖, 두레, ᆀ᠅ 등의 민속은 모든 동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6개 동리에서 관찰된 계는 모두 19 종이었는데, 336명의 ๟ᮌ 가운데 1종 이상의 계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은 128명에 불과하였다. 나머지 다수의 208명은 혼자서 고독하게 살았다. 그들이 신 뢰하는 인간과 단체는 가족과 친족이었으며, 그 다음 이 이웃이었다. 이웃효과가 빚어내는 협동은 최소한 의 수준에 머물렀다. 그 밖에 동리에는 학교의 ᗠậ

⃵, 교회, 4H클럽, 산림조합, 정당과 같은 단체들이 있었지만, 관료제적 행정기구에 의한 동원인 경우가 많았다(᫠᎗ີ1960).

1950년대의 한국인을 가장 친밀하게 결속한 친족 집단도 실은 그리 잘 단합된 공동체가 아니었다.

1964년에 이루어진 사회학적 조사는 친족집단의 기본 기능이 제사의 거행과 족보의 편찬 등, 가문의 위세 를 드러냄에 있음을 확인하였다. 공유재산에서 나오 는 적지 않은 수입의 대부분은 그러한 ᩇᚃ 사업에 투여되었으며, 가난한 Ბᨠ을 위한 부조는 거의 없 었다. 친족집단의 내부에는 Მ๟를 중심으로 한 서 열이 형성되어 있어서 갈등의 소지를 내포하였다. 공 유재산의 관리와 ឣ᱖의 봉행은 종가에 의해 수행했 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단지 거기에 참여함으로써 그 들의 원 신분을 과시하는 효용을 누렸을 뿐이다. 진 정한 의미의 생활공동체는 ሲྡྷᱻ의 이른바 ᇓᅒᵤ ᆧ으로 한정되었다(ṉᮐ 1975: 209 278).

동시대의 한국사회를 누구보다 열심히 관찰한 사람 은 1947년과 1963년 사이의 7년간 ᑌᇠᗑ࿩의 ᐴ ᰣ࿛으로 근무한 핸더슨이었다. 전국의 140개 군 가 운데 그가 방문하지 않은 곳은 1개 군에 불과하였다.

반복되는 여행에서 그가 체득한 한국사회의 조직적 특질은 한마디로 ሲᵙᚽ(homogeneity) 그것이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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