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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안보의 국제정치적 구조

1차 대전 이후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안전보장, 혹은 안보라는 용어 는 se와 curitas의 합성어로서 "위험, 근심, 불안으로부터의 자유(free from danger, anxiety)"를 의미한다. 근대국제체제에서 모든 국가는 주권을 소유하 고 있기 때문에, 초주권적인 지위를 가진 정치단위가 각 국가들의 안전을 보 장해주지 못한다. 폭력은 국가들에 의해 정당하게 독점되어 있고, 따라서 국 제정치는 폭력을 분산적으로 소유한 단위들간의 무정부적 공존상태라 볼 수 있다. 각 국가들은 자국의 안전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며, 이런 의미에서 모 든 안전보장정책은 자력구제의 원칙에 기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국가단위들의 힘들이 불평등하게 배분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 동북아시아의 강대국들 사이에 둘러 쌓여 있으며, 그것도 각 국가 들이 충돌하는 지정학적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다. 19세기에 개항하여 한국이 근대국제체제에 편입된 이후, 한국은 주변국들의 경쟁과 다툼 속에서 한시도 편할 날이 없었으며, 안전을 확보하기 위하여 지난한 과정을 겪어야 했다.

안전은 결국 주변국들과의 국력격차를 고려할 때만 확보되는 상대적인 재화

52) 이근, 「한국외교의 현안과 과제」, ꡔ외교ꡕ 제64호, 2003. 1.

제 3 장 차기 행정부의 대외 관계

라고 볼 때, 동북아의 상대적 약소국인 한국은 안보를 확보하기 위해 자체적 인 국력을 증가시켜야 하는 과제와, 외교를 통해 안전을 확보해야 하는 이중 적 과제를 항상 안아왔다. 특히 자력으로 주변국의 안보위협을 이겨 나갈 수 없을 때, 동맹을 모색하거나 집합적 안보체제에 의존하는 것이 불가피하였으 므로, 한국의 안보정책에 있어 안보외교, 즉 외교적 방법을 통한 안전확보의 중요성은 실로 지대하였다고 볼 수 있다. 심리학자 매슬로우(Abraham Maslow)는 인간의 동기와 욕구를 생리, 안전, 소속 및 사랑, 지위, 자아실현 으로 위계화하였는데, 이 중 사회의 안전은 상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기초 가 된다. 더욱이 한국과 같은 약소국의 경우 경제, 환경과 같은 생리적 욕구 조차 국제정치적 안보가 확보되는 것과 병행하여 충족될 수 있다고 볼 때, 안보에 대한 한국의 추구노력은 한국인의 행복을 위해 가장 근본적이고 기 초적인 것이다. 국내정치, 국민의 복지 및 행복, 경제의 성장, 문화의 발전 등 모든 정치적 가치가 안전을 기초로 한 것일진대, 한국의 경우 안보, 특히 안보외교야말로 이러한 모든 국가적 목표의 기초가 되는 가장 기본적인 사 항이라 할 것이다.

한국은 동북아의 약소국이다. 안전이 위협을 전제로 한 개념이고, 위협이 국외로부터 파생된다고 할 때, 한국의 안전은 동북아 세력배분구조 속의 상 대적 지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약소국인 한국이 독립된 국 가를 유지해왔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니이버(Reinhold Niebuhr)같은 학자는 동북아에서 한국이 독립을 유지해 온 것은 국제정치논리로 볼 때 실 로 기적에 가깝다고 언급한 적이 있을 정도이다. 한반도 북방의 많은 민족들 은 중국의 중원을 차지할 만큼 강대하였으나, 지금은 국가를 갖지 못한 채 타국에 흡수되어버렸으며, 세계를 제패했던 몽고조차 약소국으로 전락하였 다. 반면 한국은 국가를 유지한 채, 현재 세계적 경제강국으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역사적으로 볼 때, 동북아는 광대한 영토를 소유한 중국과 한반도, 해양세 력인 일본, 한반도 북부의 다양한 이민족들, 그리고 17세기 이후 팽창해온 러시아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9세기부터는 해양으로부터 서구세력들의 침범해 들어옴에 따라 보다 복잡한 양상의 국제정치가 전개되었다. 한반도는 때로는 주변국들과 경쟁하여 승리할 만큼, 중요한 정치세력을 형성하였고, 무력의 측면에서도 동북아의 강자로 군림한 적이 있었다. 강대한 고구려와 상무적인 고려의 경우 동북아 세력배분구조에 중요한 변화요인이 될 정도의 무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동북아에서 한반도가 의미있는 동맹세력이 될 경 우, 한반도의 외교안보의 대안은 증가하였으며, 한국의 행동의 여지도 그만

큼 넓어졌다. 고구려의 경우, 수, 당과의 경쟁에서 북방이민족과의 안보외교 를 통해 자국의 행동의 여지를 넓혔으며, 고려의 경우 상대적으로 쇠퇴한 송 과 거란, 혹은 여진의 사이에서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동맹을 기축으로 한 안보외교를 펼 수 있었다. 반면, 한반도의 군사력이 보잘 것 없거나, 상대 적으로 취약할 때 한반도의 안전은 심각하게 위협받아왔다. 후기 고려의 경 우, 몽고의 군사력에 당하지 못하여 결국 원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조선의 경우 자력으로 안보를 확보하지 못하여 임진왜란 당시 명의 도움을 빌어야 만 하였으며, 이후에도 후금의 세력에 대항하지 못하여 삼전도의 굴욕을 감 수해야만 하였다. 국력이 약한 나라의 안보상황이다.

역사적으로 회고해 볼 때, 한국은 일면 자국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하여, 적극적인 자주국방정책을 사용하기도 하였고, 중국과 북방민족들 사이에서 동맹외교를 구사하기도 하였으며, 중국의 패권이 강할 경우 사대외교를 통해 패권과의 관계를 유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안보외교의 여러 대안들은 동북 아에서 한국이 차지하고 있었던 상대적인 지위에 따라 결정되었으며, 모두가 생존을 위한 치열한 안보외교의 결과였다. 그러나 일면, 주변국들이 한국의 지정학적 가치에 주목하여, 한국을 본격적으로 점령하고자 할 경우, 한국은 패배를 면치 못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고구려의 멸망, 고려에 대한 거란과 여진의 침입, 몽고의 고려침략, 일본과 청의 조선 침략, 그리고 일제시대의 식민지화에 이르기까지, 주변국들이 한국을 본격적으로 도모하고자 했을 경 우, 대부분 이들에 항복하여 고초를 겪어야 하는 운명을 맞이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은 가능하면 주변국들 사이의 분쟁에 끼어들지 않고, 고립주의 적 외교정책을 추진하는 대안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슈뢰더(Paul Schreoder) 는 유럽의 약소국들의 외교정책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약소국의 안보외교의 대안으로 갈등회피전략(hiding), 세력균형전략(balancing), 편승전략 (bandwagoning)을 지적한 적이 있다. 19세기 개항 이전, 한국은 대륙의 끝에 존재한 국가로서, 지정학적으로 중요성이 낮은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갈등회피의 안보전략을 추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실제로 한국은 중국과 북방 민족들이 갈등과 전쟁을 겪는 동안, 이로부터 격리되어 있을 수 있었고, 그 결과 중국과 문화, 경제적 교류를 통해 발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 세력균형의 안보외교도 가능한 대안으로서, 한반도는 주변국들의 세력배분구조에서 의미있는 동맹세력으로 성장하였을 경우, 자국의 힘을 바 탕으로 가변적인 동맹외교를 추진하였다. 또한 동북아에서 전통적으로 패권 국으로 군림해온 중국의 왕조들과 사대자소의 관계를 유지해 왔는데, 이는 패권적 세력배분구조에서 대안이 없는 경우 불가피한 전략적 선택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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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수 있다. 한반도는 거대한 위협의 근원이 될 수 있는 중국과의 관계를 맺 어 편승함으로써, 자율성의 상당부분을 훼손당하는 대신, 안보와 발전을 추 진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갈등회피의 고립주의 전략, 가변적 동맹에 의한 세력균형전략, 패권국에 대한 사대적 관계 유지를 위한 편승전략을 시대에 맞추어 사용함 으로써 한반도는 동북아의 상대적 약소국이면서도 독립국의 지위를 지켜올 수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개항과 더불어 해양의 제국주의 세력이 등장하였 고, 한반도는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이 맞부딪히는 지정학적 요충지로 부상하 게 되었다. 한반도가 미쳐 준비하지 못한 상황에서 닥치게 된 이러한 위기는 안보에 있어서 많은 고난을 가져왔다. 한국은 이후 갈등회피의 고립주의 안 보외교전략을 더 이상 구사할 수 없는 상황에 부딪혔고, 또한 상대적으로 약 소국인 한국이 자립적으로 안전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도 상실하였다. 19세 기 후반을 통해 한국은 세력균형정책, 혹은 균세정책, 중립화 전략, 편승전략 등의 안보외교전략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의미있는 동맹상대국이 될 수 있는 군사력을 결여한 상태에서 한반도는 강대국의 적절한 동맹상대국이 되지 못 하였다. 따라서 균세정책이라 할 때, 한국이 외세에 힘을 보태어 의미있는 동맹상대국이 된다는 의미에서의 균세가 아니라, 한국이 자국의 지정학적 중 요성이나 이권을 외세에게 균형있게 양보한다는 의미에서의 균세정책만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본래적인 의미의 세력균형에 의한 안보외교의 전략 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중립화 전략 역시 주변 외세의 동의 필요성과 중립화 를 위한 최소한의 군사력 유지,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 등을 고려해 볼 때 실현되기 어려운 외교전략이었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위협이 되는 외세에 편승함으로써 안보를 보장받을 수도 있었지만, 2차 대전이 종식될 때 까지는 제국주의가 세계적인 다자주의적 안보규범이었다고 볼 때, 편승은 곧 식민지화를 의미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한국이 개항과 더불어 근대국제체 제에 편입된 이후, 독자적인 안보를 추진할 능력을 결여하고 있었고, 그 결 과 다양한 안보외교전략을 사용하였으나, 그 결과는 식민지화였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독립은 내세와 외세라는 복합적 원인이 작용한 결과였다. 임시정 부의 노력과 광복군의 활동, 다양한 정치세력들의 노력이 있었던 반면, 1940 년대에 들어서면서 다양한 외세들간의 세력균형의 결과 한국의 독립이 초래 된 면도 있다. 태평양전쟁 말기, 한국에 대한 전통적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중국과 제국으로 복귀하기 위해 자신의 식민지 처리의 모범설정을 위해 한 국의 독립을 막으려 한 영국, 만주와 한반도에 대한 전통적 영향력을 회복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