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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역사의 ‘순간’과 무의미시학: 김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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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펴본 바와 같이 김춘수는 현실시간을 몰가치한 것으로 여기면서 시간에 대한 기 대나 전망은 무의미하다는 판단 아래 ‘순간’을 지향해 나간다. 이 같은 시인의 ‘순간’

에의 지향은 허무의식의 극치이자 무의미시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처용단장」

에 이르러 가장 극대화된다. 「처용단장」에는 객관적이며 물리적인 시간의 진행은 무화되며, 오로지 현재의 ‘순간’만을 의식할 수 있는 내적인 시간만이 존재한다. 본 논문은 「처용단장」시편들에 나타나는 이 같은 독특한 시간성을 중심으로, 시인의 허무의식이 빚어낸 시간의식의 의미를 짚어보고자 한다.

아울러 김춘수의 자족적인 세계를 지탱하는 것은, 김춘수 시론의 요체라고 할 수 있는 ‘시와 생활의 분리’와 ‘놀이(유희)의 시학’이라 할 수 있다. 김춘수에게 있어

‘순간’의 시, 즉 현실시간과 무관하고 객관적인 역사의 시간과도 다른 차원의 세계, 생활의 유용성과 분리된 ‘놀이의 시’는 극한의 허무로부터 시인을 구원할 수 있는 유 일한 방식이다. 이로써 김춘수는 그가 평생 동안 화두로 살아온 허무를 완성하려 한 것이다. 이 절에서는 이 두 가지를 중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무의미시의 시간성과 그것이 갖는 의의를 밝혀보고자 한다.

1) ‘처용’, 투명한 시간의 현현

김춘수의 전체 작품세계에서 ‘처용’이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60년대 초부터 창작 되기 시작한 「처용단장」은 9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성된 장편 연작시이다.

대략 30년에 이르는 집필 기간만 보더라도, 김춘수의 작품세계에서의 ‘처용’의 위치

를 가늠할 수 있다. ‘처용’은 단장형식의 연작을 창작하기 이전부터 김춘수의 시적 관심사였다고 할 수 있는데, 그의 말을 빌리자면, 그 동기는 “역사의 상대성과 역사 가 쓰고 있는 탈이 이데올로기”117)라는 것을 인식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이데올로기 의 허울을 쓰고 폭력적으로 다가오는 역사 앞에 내동댕이쳐진 개인적 존재의 무력함 과 억울함이 시인으로 하여금 용서와 관용으로 주어진 현실, 곧 힘과 횡포의 현실을 초탈한 신화적 인물인 ‘처용’을 끌어들이도록 한 것이다.

‘처용’은 김춘수의 중·후반기 작품세계를 해명하는 데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다. 그 중에서도 자유연상 기법을 통하여 이미지들 간의 돌연한 결합을 시도하고 있 는 「처용단장」1부, 의미를 버리고 리듬의 음영만을 취하려는 형식 실험으로 일관 한 「처용단장」2부 등은 시인의 허무의식의 절정을 보여준다.

먼저 모두 13편으로 구성되어 있는 「처용단장」1부(눈, 바다, 산다화山茶花)는 시 인의 유년시절의 감각체험이 돋보이는 편이다. 하지만 어두움과 밝음, 무거움과 가벼 움 등의 서로 상반되는 이미지들이 무작위로 배치되어 있어서 일관된 맥락을 파악해 내기 어려우며, 시간적 인과율이나 통일성 등도 분명치 않다. 그나마 일관성을 유지 하고 있는 것은 시인의 성장과정을 대변해주는 ‘바다’이미지와 독특한 시간성이다.

전자에 해당하는 작품들이 유년시절을 ‘바다’에 견주어 드러내고 있다면, 후자의 작 품에서는 유년을 완결된 기억의 방식으로 현재화함으로써 일상적 시간에서 이탈하려 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바다가 왼종일

생앙쥐 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

이따금

바람은 한려수도에서 불어오고 느릅나무 어린 잎들이

가늘게 몸을 흔들곤 하였다.

-「제1부 ‘눈, 바다, 산다화山茶花’ 중 1」부분

117) 김춘수, 「처용, 그 끝없는 변용」, 『김춘수 시론전집Ⅱ』, 현대문학, 2004, 148쪽.

「처용단장」1부에서 ‘바다’는 시인의 유년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바다’는 태어나서 성장하고 그 시절을 마감하기까지 시인의 체험과 의식을 드러내주는 표상 이다. ‘바다’는 세계에 대한 경이로움의 눈을 뜨고 그것과 충돌하며 갈등하지만, 결 과적으로는 그것에 함몰하여 가는 시인의 ‘유년의 자아’가 투사된 대상이기도 하다.

따라서 유년의 자아가 성장해 가듯이 그것 또한 태어나서 자라고 죽는 존재이다.

인용된 작품에서도 “생앙쥐” 같이 작은 눈을 “왼종일” 뜨고 있는 “바다”는 사물이 나 세계에 대한 인식이 미처 정립되지 않은 상태인 유년의 한때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새앙쥐”처럼 작고 동그란 “바다”의 눈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한 어린 아이의 눈을 닮아 있으며, “바람”에 흔들리는 “느릅나무”의 “어린 잎” 이미지 역시 작 고 여린 바다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그러므로 하루 “왼종일” ‘생쥐 같은 눈을 뜨고 있는 바다’는 세계를 호기심과 동경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시인의 ‘유년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내 손바닥에 고인 바다,

그때의 어리디 어린 바다는 밤이었다.

새끼 무수리가 처음의 깃을 치고 있었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는 동안 바다는 많이 자라서

허리까지 가슴까지 내 살을 적시고 내 살에 테 굵은 얼룩을 지우곤 하였다.

바다에 젖은

바다의 새하얀 모래톱을 달릴 때 즐겁고도 슬픈 빛나는 노래를 나는 혼자서만 부르고 있었다.

여름이 다한 어느 날이던가 나는 커다란 해바라기가 한 송이

다 자란 바다의 가장 살찐 곳에 떨어져 점점점 바다를 덮는 것을 보았다.

-「제1부 ‘눈, 바다, 산다화山茶花’ 중 8」전문

그런데 이 “바다”는 시간의 경과나 계절의 변화와 더불어 “자라”간다. 1~3행에서 바다는 “새끼”, “처음”이라는 시어와 아울러 ‘손바닥에 고일만큼 작다’라는 표현이 환 기해주듯이 인생의 첫 단계를 맞이하고 있다. 또한 이 “처음”의 바다는 아직 “어리디 어”려서, 사물에 대한 지각과 판단이 분명하지 않은 “밤”과 같다. ‘어리디 어리다’라 는 표현이 삶의 모든 여건이 아직 성숙하지 못하여 인식력과 판단력 역시 무르익지 않았음을 의미한다면, ‘밤’은 모든 것이 어둠에 휩싸여 있어서 ‘생앙쥐 같은 눈’을 아 무리 크게 뜬다고 하더라도 주변 사물의 윤곽이나 실체를 명확히 파악해내기 어려운 상황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렴풋하게만 사물들을 감지해낼 수 있는

“밤”은 경험과 판단이 미성숙한 상태인 ‘어리디 어림’과 조화를 이룬다. “바다”는 이 러한 상황적 조건에 따라 아직 넓은 시야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이후 4~7행에 이르러, “봄”과 “여름”이 지나는 동안 바다는 “내 살을 적”실 만큼 자라난다. 바다가 “허리”에서 “가슴”까지 “테 굵은 얼룩”을 남겨다는 표현에서는 마치 해를 거듭할수록 나이테가 하나씩 늘어가는 나무를 연상할 수 있다. 바다는 자 신도 자라나지만 유년의 자아를 성장하도록 돕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그 바다에 서 “나”는 “즐겁고도 슬픈 빛나는 노래”를 부르고 있다. 유년의 자아가 부르던 노래 가 ‘즐거움’과 ‘슬픔’을 함께 배태하고 있는 것은 성장과정이 지니는 이율배반적인 속 성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성장이란 때로는 즐겁기도 하지만, 때로는 아픔과 설 움을 낳기도 한다. 미지의 세계를 향한 설렘과 동경에 가득 찬 걸음을 내딛는 과정 이라는 점에서 성장은 ‘즐거운 경험’일 수 있지만, 또한 성인이 되어 돌이켜 보면 어 린 시절 간직하고 있던 순수함과 무구함을 잃어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슬픈 경험’이 기도 하다. 그리고 순수했던 유년의 한때, 천진난만했던 그 시절로 회귀할 수 없다는

‘슬픔’은 성장이 가진 또 하나의 비밀이다. 그러므로 유년의 자아가 바닷가를 뛰놀며 부르던 노래가 ‘즐거움’과 ‘슬픔’의 이중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한편 여름이 끝나가는 12~15행에서 이르면, “다 자라”서 “살찐” 바다는 “커다란 해바라기”에 “덮”여 버린다. “가장 살찐” 곳을 짓눌려 버린 바다는 더 이상 바다가 아니며, 사실상 이미 죽어버린 존재와 같다. 해바라기로 뒤덮인 바다는 본연의 푸르 름과 생명력을 내비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처용단장」1부에서의 ‘바다’는 시인의 유년과 동일시되거나 성장과정을 대변해준다. 유년의 자아가 세계를 향하여 눈을 뜨듯이 바다도 눈을 뜨며, 유년의 자 아가 성장하여 청년이 되고 장년이 되듯이 바다 또한 자라서 죽어간다. 따라서 ‘바다 의 죽음’은 그 시기를 마감하고 성인이 되는 ‘유년의 자아의 죽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바다가 죽음에 이르는 시기가 여름의 끝, 즉 풍성함의 상징이면서 낭만과 절정 의 계절인 여름의 끝이라는 점 또한 이를 뒷받침해준다. ‘죽은 바다’와 ‘유년의 종말’

에 대한 시인의 사유는 다음 작품에서도 발견된다.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있던 자리에

군함이 한 척 닻을 내리고 있었다.

여름에 본 물새는 죽어 있었다.

물새는 죽은 다음에도 울고 있었다.

한결 어른이 된 소리로 울고 있었다.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없는 해안선을

한 사나이가 이리로 오고 있었다.

한쪽 손에 죽은 바다를 들고 있었다.

-「제1부 ‘눈, 바다, 산다화山茶花’ 중 4」전문

인용된 작품에서 “바다”는 검고 무거운 이미지들이 중첩, 환치되어 ‘군함이 한 척 닻을 내린 바다’, 한 사나이의 손에 들려진 “죽은 바다”가 된다. ‘겨울에 내리는 비’,

‘닻을 내린 군함’, ‘죽은 물새’, ‘바다가 없는 해안선’, ‘죽은 바다를 손에 들고 있는 사나이’ 등의 이미지들 역시 모두 어둡고 무거운 인상을 빚어냄으로써 작품을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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