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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체험과 세계와의 근원적 불화

문서에서 저작자표시 (페이지 70-76)

김종삼이 본격적으로 시창작을 시작했던 1950년대는 사회 전체가 한국 전쟁의 심 대한 영향 하에 놓여 있었다. 상상을 뛰어넘는 물리적, 이념적, 정신적 충격을 몰고 온 전쟁은 당시의 모든 것을 폐허로 만들었고, 사람들은 그 가운데서 힘겹게 삶의 의지를 추스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는 문학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어서, 전쟁이 끼 친 영향을 벗어나서 이 시기 문학을 논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라 할 수 있 다. 특히 식민지의 역사적 체험을 어렴풋한 유년의 체험으로만 기억하는 전후 세대

들에게 전쟁은 선험적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 체험이었다. 따라서 이 시대의 시 인들에게 전쟁은 모든 의식 형성의 밑바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비록 김종삼 시에서 전쟁이 구체적인 이미지를 취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또한 예외일 수는 없다. 다음 작품은 전쟁이라는 화두가 시인의 내면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확인시켜준다.

헬리콥터가 지나자 밭이랑

들꽃이랑

하늬바람을 일으킨다 상쾌하다

이곳도 전쟁이 스치어 갔으리라

-「서시序詩」전문

위의 작품에서 무엇보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제목이다. “서시”란 ‘시를 여 는 시’라는 의미로, 대개 시세계 전체에 걸쳐 길잡이 역할을 하는 시에 붙는다. 그런 데 이러한 시에 전쟁이 직접적으로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더 군다나 이 작품의 발표 시기가 전쟁이 끝나고도 한참이 지난 1970년대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더욱 그렇다.93)

짧은 시형태로 이루어진 위의 시에는 1~5행까지 비교적 평온하고 아름다운 풍경 이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마지막 행에 이르러, 아름다운 풍경 가운데 지금은 사라져 보이지 않는 전쟁의 흔적이 갑작스럽게 전경화됨으로써 상황은 이내 ‘낯설게’ 된다.

이로써 상쾌함을 불러일으키는 “들꽃”과 “하늬바람”의 이면에는 참혹한 과거의 한 때 가 숨겨져 있음이 드러난다. 이처럼 시인은 평화로운 풍경과 전혀 상반되는 마지막 행을 통해 ‘지금 여기’의 밑바닥에 숨겨져 있는 전쟁의 상흔을 갑작스럽게, 그리고 매우 강하게 환기시킨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과거에 겪은 전쟁 체험을 가슴 깊이 품 고 있는 한 시인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는 이러한 기억의 재

93) 정확한 발표일은 알 수 없으나, 『김종삼 전집』(권명옥 편, 나남, 2005)에는 이 시가 1978~1982 년 사이에 발표된 것으로 되어 있다. 본 논문은 이를 참고한 것이다.

생은 어쩔 수 없는 침통함을 느끼게 한다. 전쟁에 대한 기억이 고스란히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든 불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위의 시는 ‘전쟁’이 어떤 특정 시기에 겪은 특별한 체험이 아님을 보여준다.

시간의 흐름과 상관없이 ‘전쟁’은 현재까지 시인에게 중요한 의미를 던지고 있는 것 이다. 그렇다면 김종삼에게 ‘전쟁’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 이는 다음 작품에서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1

어린 校門이 보이고 있었다 한 기슭엔 雜草가.

죽음 털고 일어나면 어린 校門이 가까웠다.

한 기슭엔 如前 雜草가, 아침 메뉴를 들고

校門에서 뛰어나온 學童이 學父兄을 반기는 그림처럼

복실 강아지가 그 뒤에서 조그맣게 쳐다보고 있었다 아우슈뷔츠 收容所 鐵條網

기슭엔

雜草가 무성해 가고 있었다

2

官廳 지붕엔 비들기떼가 한창이다 날아다니다간 앉곤 한다 門이 열리어져 있는 敎會堂의 形式은 푸른 뜰과 넓이를 가졌다.

整然한 鋪道론 다정하게

생긴 늙은 우체부가 지나간다 부드러운 낡은 벽돌의

골목길에선 아희들이 고분고분하게 놀고 있고.

이 무리들은 제네바로 간다 한다 어린것과 먹을 거 한조각 쥔채

-「아우슈뷔츠」전문

위의 시는 원래 각기 발표된 두 작품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연 구분의 번호가 붙은 것인데, 사실 1과 2는 작품 구조나 의미에 있어 크게 변별되지 않는다. 이 둘 모두

“학교”와 “관청”이라는 배경의 차이만 게재되어 있을 뿐, 묘사된 장면들 역시 행복하 고 즐거운 한 때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다만 시 곳곳에 무성하게 자라있는 “잡초”와

“아우슈뷔츠” 혹은 “제네바”와 같은 이질적인 이미지만이 전쟁의 기억을 환기시킬 뿐 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왜 굳이 두 편의 시를 한 작품으로 완성하고자 했을까. 이 작 품은 의미의 해석보다는 바로 유사한 두 편의 시를 의도적으로 한 지면에 담아내고 자 한 시인의 의중에 분석의 초점이 모아져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1과 2에 각기 다른 시제가 사용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일한 구조가 두 시의 의미를 같은 의미로 해석하도록 유도한다면, 시제의 차 이는 읽는 이로 하여금 다른 시간의 관점에서 읽히도록 하는 효과를 낳는다. 즉 김 종삼은 이런 효과에 기대어 전쟁이 현재에도 계속 반복 재생되고 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골목길에서 놀고 있는 “아희들”은 학교에서 쫓겨난 아이들 로, 전쟁 포로와 다름없는 아이들로 역전된다. 또한 하늘에는 비둘기 떼가 날고 푸른 뜰과 부드러운 벽돌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 시 속에 형상화된 “골목길”은 전쟁으로 인해 폐허화된 세계의 한 모퉁이일 뿐임이 드러난다. “관청”은 “학교”의 “제네바”는

“아우슈비츠”의 다른 이름일 뿐이며, 이 거리의 행복과 평화는 단지 “교회당의 형식”

을 가장한 허위와 가상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처럼 김종삼에게 전쟁의 체험은 특정 시기의 겪은 예외적인 체험이 아니라 보편 적인 인간 비극의 체험으로 내면화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체험의 내적 확장은 편 재된 폭력성이야말로 이 세계의 본질적 정체이며, ‘지금 여기’의 현실적 상황임을 인 식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한다. 김종삼이 자신의 전쟁 체험을 주로 ‘아우슈비츠’에 빗

대어 형상화하고 있는 것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94)

‘아우슈비츠’는 잘 알려져 있듯이 2차 세계 대전 당시 유태인의 학살이 자행되었 던 곳으로, 전쟁에 의한 극단적인 파괴와 비인간적 행위가 자행되었던 폭력성의 상 징적 지명이다. 이러한 아우슈비츠 모티프는 단순히 시인이 자기가 살던 시대에 일 어난 세계사적 재난에 대한 관심의 표명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역사에 대한 믿음이 총체적 붕괴에 바탕을 두었음을 시사한다. 시인에게 아우슈비츠는 단순히 먼 나라에 서 일어나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이 땅에서 거듭 그 모습을 달리해가며 되풀이되어 온 비극인 것이다.

따라서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서정시는 가능한가라는 물음이 의미하는 바대로, 이 러한 역사적 비극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살아남음의 죄를 추궁한다. 김종삼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죽은 아이’ 혹은 ‘죽을 아이’는 바로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유죄성을 환기시키는 이미지들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민간인」은 죽은 아이와 살아남은 자 의 날카로운 대비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1947년 봄 深夜

黃海道 海州의 바다

以南과 以北의 境界線 용당浦

사공은 조심 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嬰兒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水深을 모른다.

-「민간인民間人」전문

94) 김종삼의 아우슈비츠 시편의 바탕엔 역사에 대한 공포, 경악, 충격이 자리하고 있다. 세계는 거대한 강제수용소가 되고 그 속에서의 삶은 죄수의 노역으로 인식된다. “인간의 오성이 쓸모가 없어지고, 인간의 언어가 침묵하는” 강제수용소에서의 비극적 체험이 살아남은 세대의 무의식에 미치는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R. 코젤렉, 「공포와 꿈-제3제국에서의 시간경험」, 『지나간 미 래』, 한철 역, 문학동네, 1998 참조)

위의 시는 시인이 전쟁 체험을 다룰 때조차 한국전쟁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시가 전무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매우 예외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김종삼처럼 자기 고유의 시적 영역을 일관되게 유지한 시인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인으로서의 사적인 경험이나 정서조차 보편적인 인간 존재의 그것으로 내면화하는 그의 특징을 염두에 둘 때, 이 작품은 시인이 이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 고 있는가를 살펴볼 수 있는 텍스트로 확장시켜 볼 필요가 있다.

인용된 시는 간략한 정황 묘사를 통해 민족 분단의 비극적 상황과 아픔을 그리고 있다. 1연에는 사건이나 행위 묘사 없이 “용당포”의 공간적 특징만이 제시되어 있고, 2연에서는 용당포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참담한 일련의 사건과 함께 몇 십 년 후의 모습이 나란히 병치되어 있다. 이러한 과감한 생략과 시간의 단절적 제시는 아무런 변화 없이 심화되고 있는 분단의 상황을 강하게 환기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이주(移住)의 자유마저 박탈당한 한계 상황에서 벌어진 한 무 고한 아이의 죽음을 통해 전쟁이란 결국 연약한 존재를 제단에 바쳐야 하는 희생제 의에 불과함을 말해준다. 자신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누군가 갈라놓은 경계선, 그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하하던 그 배에 탔던 대다수의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嬰兒”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울음을 터트린 그 아이의 잘못도, 어쩔 수 없이 자기 자 식을 희생시켜야 했던 그 부모의 잘못도, 그 광경을 지켜보고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 던 다른 동승자들의 잘못도 아니다. 죄는 있지만 죄를 물을 수 없는, 죄값을 치러야 할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선 모든 사람이 죄인일 수밖에 없다. 희생자는 아이 만이 아니라 그 상황으로 내몰린 사람 모두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 시의 주된 이미지인 ‘수심’은 분단의 상황이 빚어낸 우리 민족의 역사적 아픔과 비극의 깊이를 상징하는 것이자, 전쟁 상황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고 있는 이 세계의 비정함과 냉혹함을, 그리고 알 수 없는 깊이로 그것을 은폐하고 있 는 현실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때의 “수심”은 용당포라 는 구체적인 지명의 수심(水深)인 동시에 그런 불행과 죄를 묻어두고서 진행되어 온 전후 한국 역사의 수심인 것이다. 또한 극한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대의적 명분을 내세워 희생을 강요했던 사람들의 수심(獸心)이자 그후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그 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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