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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시와 놀이의 세계

문서에서 저작자표시 (페이지 118-130)

김춘수는 탈시간성의 자족적 세계에 몰입함으로써 자신의 허무를 극복하고 완성시 키고자 하는 바, 그 핵심은 ‘놀이의 시학’이다. ‘놀이의 시학’의 미적 특질을 검토하 기 위해서는 그것의 형성 및 체계화 과정에 대한 고찰은 필수적인데, 그 첫 단계가 되는 것이 바로 관념에의 집착에서 이탈하기 위한 시작 기법인 이른바 ‘서술적 이미 지’ 실험이다. ‘서술적 이미지’ 실험이란, 요약하자면, 이미지의 목적성 자체를 무시 하거나 배제함으로써 ‘묘사’의 기능만을 극대화시키는 방식이다. 이미지 표현은 작품 안에서 자연스럽게 무엇인가를 암시하기 위한 사상이나 의도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데, 김춘수에게는 그러한 관념 자체가 허상의 덧씌우기에 불과한 것이라서 목적 또 는 관념은 매우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된다.

묘사의 연습 끝에 나는 관념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다는 자신을 어느 정도 얻

138) 하이데거에 의하면, 놀이는 자유와 규칙을 전제로 한다. 보다 엄격히 말하면, 이 두 가지를 하나로 묶는 것이 바로 ‘놀이’이다. 하지만 놀이는 ‘자유의 규칙’, ‘규칙 있는 자유’라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이율배반 속에서 놀이의 ‘긴장’이 나오며, 자유와 규칙 양자의 가능성을 최대로 확 대·발현시킬 수 있다.(김동규, 『하이데거의 사이-예술론』, 그린비, 2009, 182쪽 참조)

게 되었다. 관념공포증은 필연적으로 관념 도피에로 나를 이끌어 갔다. 나는 사생 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미지를 서술적으로 쓰는 훈련을 계속하였다. 비유적 이 미지는 관념의 수단이 될 뿐이다. 이미지를 위한 이미지-여기서 나는 시의 일종 순수한 상태를 만들어 볼 수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139)

‘관념공포증’이란 관념을 통하여 세계의 가상성을 벗겨내고 존재의 새로움에 다가 갈 수 있으리라는 믿음의 좌절에서 연유한다. 이러한 좌절은 시인으로 하여금 존재 에 부여해 온 모든 가치와 의미를 전적으로 부정하도록 이끌며, 시는 사물을 그려내 는 방식인 “사생”에 몰두함으로써 “순수한 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생각에 도달한다.

이때 관념으로부터 도피 수단인 ‘서술적 이미지’는 그것을 전달하는 도구로써 이미지 를 활용하는 ‘비유적 이미지’와 구별된다. 즉 “이미지를 순수하게 사용하는 것은 사 물을 그 자체로서 보고 즐기는 태도”140)로, 사물의 인상만을 재현해내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극단적인 사고는 관념이 현실에 대한 허상을 심화시키고 또 다른 환상 을 유포하는 도구라는 인식이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즉 「꽃」연작에서 이미 확인하였듯이, 존재의 진실이란 스스로가 만들어낸 허구에 지나지 않으며, 어떤 관념 부여를 통하여 존재의 새로움을 인식할 수 있다는 믿음은 ‘헛수고’에 그치고 말 뿐이 라고 시인은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서술적 이미지’는 존재의 ‘리얼리티’

를 확립하는 일이며, 이러한 “시작 및 시는 구원”141)이 된다. 김춘수에게 있어서 존 재의 리얼리티를 확립하는 일은 세부의 진실성에 기반하여 사물에 반영되어 나타나 는 현실의 전형적 특수성을 조명해내는 일이 아니다. 사물의 형상 자체와는 다른 현 실의 참조를 배제한 다음, 사물의 인상만을 제기해주는 일이 시인의 몫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작업이 시인을 ‘구원’해 줄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때의 ‘구 원’이란 관념과 의미로부터의 구원이며, 궁극적으로는 시인 자신의 구원을 의미한다.

김춘수는 존재의 새로움에 대한 탐색 노력을 통하여 자아와 세계는 근원적인 이원성 의 관계에 놓여 있으므로, 존재에 대한 인식은 다만 인간적 관념과 이상을 덧씌운

139) 김춘수, 「늦은 트레이닝」, 『김춘수 시론전집Ⅰ』, 현대문학, 2004, 534쪽.

140) 김춘수, 「「처용·기타」에 대하여」, 위의 책, 638쪽.

141) 김춘수, 「시작 및 시는 구원이다」, 위의 책, 495쪽.

허구라는 점을 확인한 바 있다. 그러므로 존재의 본래성을 확인시켜 줄 수 없는 무 용한 관념을 벗겨낼 때에만, 존재는 이 세계 오직 단 하나 존재하는 존재 그 자체로 남는다. 지금까지의 모든 가치와 관념이 허구라고 할 때, 오히려 허상만을 나타낼 뿐 이라고 인식되었던 실재의 세계는 이제 인간이 실현해야 할 유일한 가치를 지닌 세 계로서 부상하는 것이다. 이로써 문제는 이제 생에 관한 절망이 아니라, 추구되어 왔 던 ‘이상’으로 전환한다.142) 세계가 무가치하다고 인식하였던 것은 허구와 다를 바 없는 ‘이상’으로써 사물을 이해해왔던 것에 기초한다. 그러므로 이와 무관하게 존재 하는 형상으로 대상을 드러냄으로써 참된 가치를 얻고 시인 자신의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사생이라고 하지만, 있는(실재) 풍경을 그대로 그리지는 않는다. 집이면 집, 나 무면 나무를 대상으로 좌우의 배경을 취사선택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대상의 어느 부분을 버리고, 다른 어느 부분은 과장한다. 대상과 배경과의 위치를 실지와는 전 연 다르게 배치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실지의 풍경과는 전연 다른 풍경을 만들게 된다. 풍경의, 또는 대상의 재구성이다. 이 과정에서 논리가 끼이게 되고, 자유연 상이 끼이게 된다. 논리와 자유연상이 더욱 날카롭게 개입하게 되면 대상의 형태 는 부서지고, 마침내 대상마저 소멸한다. 무의미의 시가 이리하여 탄생한다.143)

그러나 김춘수가 전념하는 ‘사생’은 “사생이라고는 하지만” 그림 그리듯이 사물의 있는 그대로를 형상화하는 방식은 아니다. 그것은 “좌우의 배경을 취사선택”하고, 때 론 대상의 “어느 부분을 버리”거나 “어느 부분은 과장”하기도 하며, “대상”과 그것의

“배경”을 자유자재로 ‘재구성’ 혹은 “재배치”한다. 다시 말해 이러한 ‘묘사절대주의’의 입장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대상의 형상화에만 주력함으로써 기존의 어떤 미적인 질서에서 벗어나겠다는 ‘변형’144)의 의지에 다름 아니다. 시인은 이처럼 이미지를 구

142) 니체에 의하면, 절대불면의 참된 세계를 향한 일념이 한낱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폭로됨으 로써 인간은 당황하고 절망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제 지금 여기의 삶의 영역인 극히 현실적인 세계 만이 유일한 세계이며, 인간은 생에 관해서가 아니라 “‘이상(Ideal)’이라고 불리는 것을 조소적인 분 노를 품고서 멀리 응시”해야 하기 때문이다.(F. 니체, 앞의 책, 35~37쪽 참조)

143) 김춘수, 「늦은 트레이닝」, 『김춘수 시론전집Ⅰ』, 현대문학, 2004, 535쪽.

144) 이 용어는 포지올리가 현대적 이미지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것으로, 그는 ‘변형(deformazione)’

현함에 있어 상상력을 중시하는 바, 이 상상력 발생을 위하여 사물과 시인은 ‘인식상 의 거리’를 필요로 한다. “사생적 소박성”145)이란 그야말로 순수 관찰자의 입장에서 대상을 관조하였을 때 일어날 수 있다. 존재는 ‘체험’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관 찰됨으로써 시인에게 인식의 대상으로만 기능한다. 이 ‘거리를 통한 인식’ 곧 체험된 양상을 포기하고 ‘관찰’ 또는 ‘관조’함으로써 시는 기존의 미적 규범이나 질서로부터 벗어나려는 충동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허상에 불과한 이상을 포기하고 새로운 미적 질서를 구축함으로써 구원 에 이르려는 김춘수의 시적 태도를 뒷받침해주는 것은 바로 ‘시와 산문 분리론’이다.

김춘수는 60년대에 접어들면서 여러 차례 시와 산문이 서로 다르게 인식되어야 함 을 강조하고 있다. 그 이유는 시에서만이 허구적 관념을 도려낸 사물의 구현이 가능 하며, 이를 통해 진정한 새로운 가치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 시작은 생활로부터의 도피가 되고 있는 듯하다. 이것을 긍정적으 로 말하면, 시작은 생활로부터의 해방이 된다는 뜻이 된다. 다시 말하면 비전문 가적 처신을 할 때 시작은 생의 구원이 된다는 뜻이다.146)

때로 나는 시에서 발산을 못한 울분을 산문으로 하는 수가 있고, 시로써 발산 을 하고 나면 그 다음 얼마 동안은 산문에는 별로 그런 면이 나타나지 않는다.

현실에 대한, 역사에 대한, 문명에 대한 관심은 나에게 있어서는 지적·비평적이 라고 하기보다는 감정적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감정이 비평을 가장한다고나 할까147)

내 경우 산문의 세계와 시의 세계를 확연히 구분하고 있습니다. 나 자신도 나 자신의 사상이 있고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을 나는 산문을 통해서 합니다. 시

을 기존의 질서를 거부하면서 하나의 새로운 질서를 복원하고자 하는 어떤 새로운 양식적 의지에 의 해 결정된다고 본다.(R. 포지올리, 위의 책, 256쪽 참조)

145) 김춘수, 「한국 현대시의 계보-이미지의 기능면에서 본」, 『김춘수 시론전집Ⅰ』, 현대문학, 2004, 512쪽.

146) 김춘수, 「시작 및 시는 구원이다」, 위의 책, 496쪽 147) 김춘수, 「「처용·기타」에 대하여」, 위의 책, 638쪽.

는 시 그 자체의 독자적 세계로 전개시켜 나가고, 산문은 메시지의 전달수단으로 써 씁니다.148)

인용한 글들은 시와 산문은 영역이 서로 달라서, 시로서 다루어질 수 있는 것과 산문으로서 이야기될 수 있는 것들이 나뉘어져야 한다는 내용을 요점으로 하고 있 다. 첫 번째 글의 논지는 시를 생활과 구분함으로 해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으 로, 이 해방의 경지에서만이 시는 궁극적으로 본래적 위치를 회복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시가 생활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시적 관심이 일상적인 그것과는 다른 선상에 놓여야 함을 의미한다. 시의 가치는 생활의 이해관계나 목적과 무관할 때 완성될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 글도 첫 번째 것과 관련지어 파악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시와 산문이 분리되어야 하는 이유는 산문이 “메시지의 전달수단”인데 비해 시는 그 자체 의 “독자적 세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현실과 역사와 문명’에 대한 관심이

“감정적”이라는 지적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현실과 역사와 문명에 대해 감정적으 로 대응해 갈 수밖에 없다는 말은 시인이 그것들을 생활적인 영역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가 이들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 세계”를 구축하여야 한다는 주장은 생활적인 감정과는 무관한 가치의 실현에 목적을 두어야 함을 의미하며, 즉

‘시와 산문 분리론’이란 ‘시와 생활 분리론’의 다른 이름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시와 산문 분리론’은 현실 도피적이거나 비사회적인 태도로 이해되어 왔으며, 김춘수 등의 순수시파를 공격하는 하나의 근거로 작용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분리는 김춘수 개인만의 독특한 견해라기보다는 현대시의 한 성격으로 파악하는 것 이 옳을 듯하다. 스피어즈에 따르면, 현대시의 본령이라고 할 수 있는 주지주의는 단 절의식을 그 특징으로 삼는다. 이때 단절이란 ‘불연속성’을 뜻하는데, 인간이 자연과 연속된 존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연속성 개념에 대한 파기를 가져온 이 개념은 비단 예술의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20세기 인문사회과학 전체의 진보와 발전을 이루 는 데 바탕을 제공하였다.149)

148) 김춘수 · 조정권, 「생활과 방법」, 『문학사상』, 1985. 10, 109쪽.

149) 스피어즈는 현대시의 기본적인 단절의 형태를 형이상학적 단절, 심미적 단절, 수사학적 단절,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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