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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탐구와 세계와의 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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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는 존재에 대한 물음을 통하여 자아와 세계는 절대적인 불화의 관계에 놓여 있으며, 세계는 적극적인 어떤 전망도 허용하지 않으므로, 자아는 절대 고독의 상황 에 내던져 있음을 확인한다. 그러한 자기 존재에 대한 자각 이후, 시인은 세계와의 화해로운 의사소통적 관계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보여준다. 즉 존재 탐구를 통하 여 새로운 삶의 질서를 모색하고자 하는 것이다.

오전 열한 시의 다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칠한 지 얼마 안 된 말끔한 엷은 연둣빛 벽면에 햇발이 부딪쳐 이따금 거기서 은어의 비늘 같은 것이 반짝이곤 하였다. 나는 눈을 가늘게 감아 보았다.

점점점 포실한 가슴 속에 안기어 가는 듯한 그러한 느낌인데, 나의 귓전에는 찌, 찌, 찌…… 무슨 벌레 같은 것이 우는 소리가 선연히 들려왔다.

그것은 정적의 소린지도 몰랐다.

나는 어디 밝은 그늘 밑에서 졸고 있는 듯도 하였다.

내가 눈을 다시 떴을 때, 그때 나는 나의 왼쪽 뺨에 불같이 달은 시선을 느꼈 다. 나는 처음에 그것이 꽃인가 하였다.

그것은 딸기였다. 쟁반에 담긴 일군一群의 딸기는 곱게 피어오른 숯불같이 그 벌겋게 달은 체온이 그대로 나에게까지 스며올 듯, 진열장의 유리를 뚫고 그것은 연신 풋풋한 향기를 발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손님이라고는 나 한 사람분인 다방 의 오전의 해이해진 공기를 그것들이 혼자서만 빨아들이고 토하고 있는 상보였다.

진열장 근처의 공기는 그만큼 긴장해 보였다.

조금 전의 벌레 우는 것 같은 소리는 어쩌면 그것들이 쉬는 숨소리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딸기를 딸기밭에서 본 일이 있다. 가늘고 키가 작은 줄기에 어울리지 않는 보기 흉한 큰 이파리를 달고, 그 위에 더 무거운 열매가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있었 다. 뿐 아니라 보오얗게 먼지를 쓰고 있는 양이 몹시 더러워 보였다. 그렇던 것이 어찌 또 그리 싱싱하고 풋풋하였을까?

나는 열심히 딸기를 보았다. 그 솜솜이 얽은 구멍이 구멍마다 숨을 쉬고 있는 듯 쟁반 위의 딸기는 생동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 근처를 완전히 제압하고 있 었다. 온 방안의 공기가 유리 안의 한 개 쟁반 위에 모조리 흡수되었다.

딸기는 그날 누구보다도 비장하였다.

-「딸기」전문

존재 탐구를 통하여 새로운 삶의 질서를 확보하고자 하는 시인에게 있어 ‘지금 여 기’는 지금까지의 세계에서와는 다른, 혹은 구별되는 형태와 가치를 지니고 있어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시인은 자신의 시각과 의식을 무한한 새로움을 향해 열어 놓음으 로써, 지금 여기에 실재하는 사물에 대한 지각과 판단 자체를 유보시키거나 거역하 고자 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딸기」는 김춘수의 초기 시작과정에서 나타나는 ‘존재 에 대한 새로운 인식’ 또는 ‘존재의 새로움 탐색’의 도정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작품 이다. 이 작품에서는, “나는 나의 눈에 새로운 것을 담기 위하여 나의 눈을 버렸다”

는 아라공의 말처럼, 관념과 형상을 분리시키고 형상 속에는 그것과는 다른 현실을 참조하기를 일체 거부하는 시적 자아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79)

“나는” “아무도 없”는 “오전” 한 “다방” 에 앉아서 “딸기”를 보고 있다. 생동감과 활 력이 넘쳐야 할 ‘오전’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외부로부터 독립하여 있는 다방 안은 무료함만이 팽배하다. 시공간의 무료함으로 인해 시적 자아마저도 나른한 기운을 느 끼는데, 주변 정황과는 달리 “진열장” 안 “쟁반” 위에 담긴 “딸기”는 싱싱한 생명력을 발산하고 있다. 이 딸기는 이제까지 어떠한 존재에서도 경험해보지 못한 왕성한 생 명력으로 온 다방 안의 “해이해진 공기”를 “혼자서만 빨아들이고 통하고 있는” 듯이 느껴지며, 따라서 시적 자아는 ‘혼자’만의 처절하고 외로운 생을 지닌 “딸기”가 “비장 하”다고까지 생각한다.

그런데 이때 시인이 비장하다고 느끼는 “딸기”가 이미 ‘채과를 끝마친 상태’의 딸 기라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시인이 4연에서 굳이 “딸기밭”의 딸기 와 “다방 안”의 진열된 딸기를 비교하고 있기 때문인데, 시인은 과거 딸기밭에서 보 았던 딸기에 비해 다방 안 쟁반 위의 딸기를 압도적인 생명력을 발산하는 비장함 그 자체로 진술하고 있다. 물론 이는 “먼지를 쓰고 있”어 “더러워 보였”던 딸기밭의 상 태에 비해 깨끗하게 씻겨진 진열장의 딸기가 시각적으로 더 “싱싱하고 풋풋”해 보였 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곧 은밀한 부패의 시작을 의미함을 시인이 간 과했으리라 판단하기는 더욱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그것을 통해 생명이 진동하는 활력을 직감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시인이 한낱 진열되어 시들어가는 딸기 속에서 생명력을 발견하게 되는 계 기는 2연의 “눈”을 감는 행위이다. 작품의 표면상 시적 자아가 눈을 감는 이유는 새 로 칠한 듯한 “벽면”에 비치는 ‘햇살’의 눈부심 때문이지만, 실제로 그가 진열장 속 딸기가 뿜어내는 생명력을 지각해낼 수 있기 위해서는 ‘눈 감음’의 행위란 절대적이 다. 사물을 인지해내는 데 있어 가장 주요한 수단이라 할 수 있는 ‘눈’의 기능을 거 부함으로써 이제까지의 ‘눈’으로는 감각할 수 없었던 존재의 새로운 국면이 열리는 까닭이다.80) 물론 사물에 대한 가장 직접적이며 명확한 판단을 제공해주는 시각을

79) R. 포지올리, 앞의 책, 280~281쪽 참조.

포기하고 청각에 의지하여 그것을 지각해내고자 하는 시도는,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대상을 형상화하고자 하는 시인들에게 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딸기」

에서 ‘눈 감음’의 행위를 통하여 시들어가는 딸기가 토해내는 생명의 숨소리를 듣게 된다는 사실은, 기존의 감각방식을 통해서는 존재가 전개하는 새로움을 발견해내기 어렵다는 의미를 함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눈을 감음’으로써 나는 “점점점 포실한 가슴”과도 같은 존재의 새로움으로 빨려 들어간다. 시적 자아가 인지해내는 그것은 기존 세계에서와는 다른 감각을 요구하며, “밝은 그늘”과 같이 역설과 모순이 상존하는 새로운 시공간을 연출한다. 벌레의 울음소리와 흡사한 “정숙”의 소리를 듣 고 있는 자신이 마치 “졸고 있는” 상태로 느껴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존재의 새로움은 새롭기 때문에 그 자체로 미지의 시공간이라 할 수 있다. 본디 그늘이란 밝음을 지탱할 수 없는 곳이지만, 미지의 시공간인 까닭에 현실에서는 불 가능한 밝음과 어두움의 결합은 가능하다. 시적 자아가 감았던 ‘눈을 다시 뜨는 순 간’의 그곳은 현실세계, 곧 현실에서 ‘눈에 보이던 세계’가 아니라 새로움을 지각할 수 있는 감각을 얻은 후에 획득되는 ‘새로운 시공간’인 셈이다. 이와 같이 시적 자아 가 지각하고자 하는 것은 기존 시각으로 바라본 존재들에게서는 얻어질 수 없었던

‘존재의 새로움’이다. 이는 이제까지의 인식 판단과 기준을 깨뜨림으로써 생성된다.

시적 자아는 현실세계의 무력함이나 안일함과는 다른, 생명으로 진동하는 ‘존재의 새 로움’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김춘수가 이처럼 존재의 새로움을 발견하기 위한 노력을 보여주는 이유는 세계인 식에 대한 회의에 기초한다. 위의 작품에 전제되어 있는 것도 세계의 보편적인 인식 판단에 의지할 수 없다는 시인의 의식이며, 기존의 사물인식은 허상이며 허위일 따 름이라는 부정적 사유이다. 따라서 존재의 새로움을 발견하고자 하는 시인은 희고 가벼운 눈을 “희다고만 할 수는 없다./ 눈은/ 우모처럼 가벼운 것도 아니다./ 눈은 보 기보다는 무겁고,/ 우리들의 영혼에 묻어 있는/ 어떤 사나이의 검은 손때처럼/ 눈은

80) 존재의 새로움을 지각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청각에의 호소’는 이미 김춘수의 초기시의 곳곳에서 확인된다. 죽음과 소멸의 실체는 소리의 상실에서 드러나며(「밤의 시」), 영원으로 통하는 길은 소 리로 현현(「호수」)된다. 따라서 김춘수 시에서 ‘소리’는 진정한 생명에 이르는 도정이자 통로라고 할 수 있다.

검을 수도 있다”(「눈에 대하여」)라고 인식하기에 이른다. 이제까지 규정되어 온 눈은 당연히 희고 가벼운 것이지만, 그것은 “우리들의 말초신경에 바래고 바래져서”

“오히려 병적”이 되어 버린 허상일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재 지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의 진위 여부를 확신할 수 없다. 존재에 대한 판단에 앞서 오히려 의 심하여야 할 것은 우리의 지각능력과 사유능력 자체인 것이다.

이처럼 존재를 바라보는 시인의 눈은 새로움을 향해 있으며, 이는 존재에 대한 기 존의 인식이나 지식, 그리고 상식 대한 도전을 가져온다. 상식의 파기야말로 그 이면 에 감추어져 있던 존재의 새로움을 드러냄으로써 그것이 지니고 있는 진면목을 보여 준다. 하지만 이러한 시인의 존재 탐구의 노력은 본질적으로 어느 정도 한계를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촛불을 켜면 면경의 유리알, 의롱의 나전, 어린것들의 눈망울과 입 언저리, 이런 것들이 하나씩 살아난다.

차차 촉심이 서고 불이 제자리를 정하게 되면, 불빛은 방 안에 그득히 원을 그리 며 윤곽을 선명히 한다. 그러나 아직도 이 윤곽 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 있다. 들 여다보면 한바다의 수심과 같다. 고요하다. 너무 고요할 따름이다.

-「어둠」전문

조금씩 환하게 밝아오는 “촛불”은 “어둠” 속에 묻혀 있던 거울, 장롱의 무늬, 사랑 하는 이들의 사소한 생김새 등을 “하나씩” “살아”나게 한다. 어둠 속의 사물들이 마 치 죽어 있는 물체처럼 딱딱하고 차가운 형상을 하고 있었다면, “불빛”은 그들에게 다시 생명을 안겨준다. 이처럼 불빛으로부터 생명을 얻어 되살아나는 존재들은 점점

“방 안”의 밝고 “선명”한 “윤곽” 안에 자리 잡으며 방 안 전체에 활기를 가져온다. 하 지만 불빛의 뚜렷한 윤곽 안에서 살아나는 존재들의 형상과는 대조적으로 윤곽 바깥 에는 “아직도” ‘살아날 줄 모르는 것들’이 있다. 불빛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그것들 은 “한바다의 수심”처럼 깊고 아득한 “고요”에 잠겨만 있다.

어둠을 밝히는 촛불은 존재들에게 빛을 나누어 줌으로써 그것들을 ‘있게’ 한다. 존 재들은 촛불로 인해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하는 것이다. 하지만 빛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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