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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을 통한 시간의 재구축

문서에서 저작자표시 (페이지 148-179)

살펴본 바와 같이 김종삼의 새로운 세계, 새로운 시간에 대한 희구는 시의 추상화 방식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하지만 김종삼의 추상은 온건한 추상인 까닭에, 시인이 지향하는 ‘새로운 세계’의 실체는 처음부터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처음에 그 것은 이 세계의 ‘공허’와 ‘덧없음’을 가시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다가, 자신이 지향 하는 ‘세계의 상(像)’이 점점 뚜렷해지면서 소극적인 것에서 적극적인 것으로 변화해 간다. 이때 비로소 ‘추상’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상상의 원리가 되며, 이러한 세계야말로 자신이 도달해야 할 최후의 장소이자 ‘지금 여기’의 세계가 나아가야 할 지향점임을 앞당겨 실현한 예술적 고양과 선취의 원리가 된다.

(1) 소극적 의미의 추상과 선적 시간의 해체

소극적 의미의 추상은 ‘새로운 세계’를 형성하는 미적 원리로 나아가기 이전의 것 을 가리킨다. 이런 소극적 의미의 추상은 시적 자아의 정조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새 로운 세계의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미적 원리가 되고 있진 못하다. 하지만 시인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새로운 세계가 이 단계를 거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점 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나는 그동안 배꼽에 솔방울도 돋아

지나 허구적이고 극적이라는 것이다.(김준오, 앞의 책, 281~282쪽 참조)

보았고

머리 위에는 몹쓸 버섯도 돋아 보았습니다 그러다가는

‘맥웰’이라는 老醫의 음성이 자꾸만

넓은 푸름을 지나

머언 언덕가에 떠오르곤 하였읍니다

오늘은

이만치 하면 좋으리마치

리봉을 단 아이들이 놀고 있음을 봅니다

그리고는 얕은 파아란

페인트 울타리가 보입니다

그런데 한 아이는

처마밑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않고

짜증을 내고 있는데

그 아이는

얼마 못 가서 죽을 아이라고

푸름을 지나 언덕가에 떠오르던

음성이 이야기ㄹ 하였읍니다.

그리운

안니·로·리라고 이야기ㄹ 하였읍니다

-「그리운 안니·로·리」전문

시적 자아의 정조가 표면에 드러나는 추상화 방식은 주로 선적 시간의 해체를 통 해 이루어진다. 위 작품의 내용은 난해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이해가 쉽 지 않다. 이미지의 연관성이 약하고, 시제의 사용이 일정치 않기 때문이다. 이런 모 호한 시간 처리는 현실감을 떨어뜨리는 까닭에 추상화 방식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 된다.

우선 위에서는 김종삼 시의 주된 모티프 중 하나인 ‘죽은(죽을) 아이’가 등장한다.

“처마 밑에서 한걸음/ 나오지 않고/ 짜증을 내고 있는” 어린 아이는 별다른 기대 없 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안쓰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러한 아이의 모습은 단절과 소외, 고립의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그리고 병든 아이의 형상화를 통해 시인은 자신 의 내면까지 대상화하는 이중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 다시 말해 ‘아이’는 시의 주된 소재이자 시인의 내면 상태가 투영된 ‘객관적 상관물’181)이다. 따라서 ‘아이’는 생명 을 지닌 살아있는 존재라기보다는 ‘사물적 오브제’에 가깝다.

그렇다면 이 ‘병든 아이’를 통해 대상화되는 시인의 주된 정조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덧없음’이다. 죽어야 할 아이는 성장을 멈춘 것과 다를 바 없으며, ‘미래’를 기 대할 수 없는 상황이다. 삶의 ‘덧없음’과 ‘무의미함’을 환기시키는 이러한 정조는 선 적 시간의 해체를 통해 더욱 심화된다. “맥웰”이라는 “노의”의 음성이 이를 잘 보여 주는데, 위에서는 ‘노의’의 음성이 현재의 것인지 과거의 것인지, 그 음성을 통해 구 체적으로 드러난 내용이 ‘처마 밑에 있는 아이’에 관한 것인지, 아니면 ‘나’에 관한

181) 작가들은 그들의 정서를 외적인 것에, 그들의 상징이 되는 사물 속에 투사시킨다. 예술의 형식으 로서 정서를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객관적 상관물’, 다시 말해 ‘특유한’ 정서를 나타내는 공식이 될 일종의 사물이나 상황, 일련의 사건들을 찾는 것이다. 이를 통해 감각적인 경험으로 끝나게 되는 외부적 사실들이 주어질 때, 정서가 즉각적으로 환기된다.(황동규, 「비평가로서의 엘리어트」, 『엘 리어트』, 문학과지성사, 1989, 68쪽 참조)

것인지 매우 모호하다. 또한 아이들을 본 것이 먼저인지, 음성이 떠오른 것이 먼저인 지도 분명치 않다. 이는 ‘노의’의 음성이 시간의 순차적인 흐름에 따라 이어지지 않 고, 시적 자아의 시선이 옮아가는 공간의 변화에 따라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 결과

‘노의’의 목소리는 과거의 것이 되기도 하고, 현재의 것이 되기도 한다. 계기적 시간 의 흐름이 무화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노의의 음성”이 “언덕가에 떠오른다”에서는 삼차원적 질서에 속하는 ‘음성’이 회화적(시각적) 이미지로 평면화되면서 시간의 공간화182)가 이루어진다. 즉 시간의 경계가 무화되는 까닭에 공간마저 감각가능한 지각의 범위를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리봉을 단 아이들”과 “파아란 울타리”가 있지만, 그것은 추상화된 공간 속에 놓인 사물들일 뿐이다.

이러한 선적 시간의 해체는 궁극적으로 시적 자아가 처해 있는 불안정하고 공허한 상태를 강하게 환기시킨다. 이러한 ‘공허’는 마이어의 말을 빌린다면, 총체적인 세계 상실의 선물이다.183) 세계상실의 상황 속에서는 ‘나’라는 현실은 상실되며, 객체라는 측정 가능한 현실도 상실된다. 따라서 자기 스스로를 느끼지 못하는 세계상실의 재 난은 ‘공허’의 심연을 낳을 수밖에 없다. 시인의 주된 정조로 ‘공허’가 나타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시간 감각이 불명료해지는 것은 세계상실의 결과 현실 감각마 저 상실된 데 따른 것인데, 다음 시는 일직선적인 시간 흐름이 어긋나면서 ‘혼자 있 는’ 아이의 고립감이 심화되는 예를 보여준다.

뾰죽집이 바라 보이는 언덕에 구름장들이 뜨짓하게 대인다

182) 이러한 형식을 가리켜 ‘공간적 형식’이라고도 부른다. 오세영은 조셉 프랑크의 ‘공간적 형식’이라는 용어의 개념을 소개하면서, ‘공간적 형식’이야말로 현대문학, 특히 모더니즘 문학의 근본적인 특징이 라고 설명한다. ‘공간적 형식’이란 언어에 내재하고 있는 시간적 원리를 부정하고 사물을 시간의 지 속성에서가 아니라 한 ‘순간’에 드러내려는 시도를 뜻한다. 즉 시간적 관계성에의 의존을 버리고, 사 물을 동시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시간적 계기성에 대한 독자들의 일상적 기대를 깨뜨리는 형식이다.

이러한 ‘공간적 형식’은 대개 일상의 어순이나 문법적 배열이 지닌 연속의 원리를 깨뜨리는 데서 출 발한다. 공간적 형식의 수사적 기법으로는 생략범, 일상어의 연속성과 경과성 파괴, 이미지들의 병치, 모순되는 질서들에 의한 언어의 통합, 합리성의 포기, 의식의 논리 포기, 불확정의 원칙 등이 있다.

(오세영, 「현대 문학의 본질과 공간화 지향」, 『문학사상』, 1986. 4, 참조) 183) R. N. 마이어, 앞의 책, 138쪽.

嬰兒가 앞만 가린 채 보드라운 먼지를 타박거리고 있다. 놀고 있다.

뾰죽집 언덕 아래에

아취 같은 넓은 門이 트인다.

嬰兒는 나팔 부는 시늉을 했다.

장난감 같은 뾰죽집 언덕에

자주빛 그늘이 와 앉았다.

-「뾰죽집」전문

얼핏 보기에 위의 작품은 사실적인 묘사인 듯 보이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그 배경 이 추상화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아취 같은 넓은 문”, “장난감 같은/ 뾰죽집”은 어딘 가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것들로 현실적인 소재들이 아니며, 무엇보다 “자주빛 그늘”이라는 색채는 현실감을 흐려지게 하는 데 기여한다.184) 결국 「뾰죽집」은 전

184) 이러한 비현실적인 색채이미지는 현대시 전체에 흐르는 하나의 조형 원리로, 김종삼 시의 추상화 방식을 대표하는 또 다른 특징 중 하나이다. 이는 기존 사물에 비현실적 색채를 덧씌움으로써 현실 감을 박탈한다.(R. N. 마이어, 위의 책, 142~154쪽 참조) 특히 ‘푸름’은 김종삼의 시 곳곳에서 포착 되는데, 대부분 ‘공허’하게 비어있는 부재의 공간을 채우고 있다. “사람의 영혼과 같이 개재된 푸름이 한가하다”(「무슨 요일일까」), “뜰이 넓고 푸름이 차 있었다”(「아데라이데」), “환멸의 습지에서 가 끔 헤어나게 되면은 남다른 햇볕과 푸름이 자라고 있으므로 서글펐다”(「평범한 이야기」), “휴식은 무한한 푸름이었다”(「올페의 유니폼」)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푸름’은 근원적 세계, 이상 세계 등을 표상함으로써 절대 자유를 환기하는 ‘흰색’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그것은 부재의 공간을 가득 채운 색으로, 그 속에는 황폐화된 세계를 신비로운 베일로 감추려는 시인의 욕망이 깔려있다. 그리고 현실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시인의 탈출 의지 또한 숨겨져 있다. 하지만 ‘푸름’의 색채는 ‘권태’를 표상한다. ‘권태감’은 시적 자아의 내면을 차지하고 있는 ‘공허’에서 비롯된 것으로, 현실로부터 소외 된 자의 필연적인 감정이다. 이처럼 ‘푸름’은 ‘권태감’에 빠질 수밖에 없는 시인의 ‘공허함’을 감각적 으로 파악하게 하는 색채이자 그것을 간접적으로 환기시키는 색채이다.

체적으로 볼 때, 추상적인 정물화의 모습에 가깝다.

특히 위에서 주의 깊게 봐야 할 것은 시제의 변화이다. 즉 1~3연까지는 대상의 관찰 시간과 시작(詩作) 시간이 동일한 것으로 이어지다가, 4연에서 과거 시제의 등 장으로 인해 그 흐름이 돌연 끊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기대되는 순차적 시간 의 흐름은 뒤엉키게 된다. 이러한 시제 변화는 언뜻 보기에 시간의 역전 구성으로 보이지만, 3연과 4연 사이에는 한참을 흘러간 시간의 간격이 담겨 있다. 현재와 과 거의 순서를 바꿈으로써 시간의 공백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아이’는 오랜 시간 동안 홀로 남겨져 있었음이 드러난다. 즉 「그리운 안니·로·리」의 경우처럼 위 의 “영아”도 사물적 오브제에 가까우며, 이처럼 혼자 남겨진 채 사물화되고 있는 아 이의 모습은 알 수 없는 ‘공허’와 ‘무상함’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이러한 ‘공허감’은 선적 시간의 해체를 통해 더욱 부각된다. 다음 작품은 김종삼 시에 나타난 소극적 의미의 추상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廣漠한地帶이다기울기 시작했다잠시꺼밋했다 十字型의칼이바로꼽혔 다堅固하고자그마했다 흰옷포기가포겨놓였다 돌담이무너졌다다시쌓 았다쌓았다쌓았다돌각 담이쌓이고바람이자고 틈을타凍昏이잦아들었 다포겨놓이던세번째가 비었다

-「돌각담」전문

작품 제목이기도 한 ‘돌각담’의 형상을 시각화하고 있는 이 시의 특징은 시인의 언 어관을 통해 이미 구명된 바 있는 ‘이미지의 자율성’이다. 따라서 “십자형의 칼”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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