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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가 시작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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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Baltimore총회는 나에게는 특별히 의미 있는 회의이다. 그 이유는 1982년의 Patras총회 때는 IAU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 채 참석하였고, 그 다음 New Dahli총회는 아쉽게도 참석 을 하지 못하였지만 이제야 비로소 정식으로 한국대표로 참가하는 총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레는 마음으로 김포 국제공항을 출발한 것은 8월 14일(월)이었다.

Baltimore는 내가 오랫동안 살았던 Philadelphia에서 자동차로 불과 2시간 이내에 갈 수 있는 곳이라서 몇 차례 가 본 적은 있었지만, 이번 총회가 열리는 Convention Hall이 있는 이 바닷가에는 처음이다. 항구에는 여러 가지 오락시설이 있고, 옛날 돛을 달고 대서양을 횡 단하던 배도 전시되어 있어서 볼거리가 아주 많았다. 그래서인지 논문 발표장에는 사람이 적 고, 밖에 나가보면 관광객 틈에서 IAU Name Tag을 가슴에 달고 손에는 IAU Bag을 든 사람 들이 여기저기 눈에 띤다.

이 총회에서 Argentine의 J. Sahade가 IAU President(1988-1991)로 당선되었고, Yoshihide Kozai(古在由秀, 당시 일본국립천문대 대장)가 IAU Vice-President가 되었다. 일 본은 이미 IAU Vice-President로 동경천문대 대장이었던 Hirose Hideo(廣瀨秀雄, 생몰년 미 상)가 있었다. Hirose 박사는 내가 대학 1학년 때 천문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편지를 보냈더니 회답 대신에 일본천문학회가 발행하는 『천문월보(天文月報)』를 약 10년 동안 매월 보내 주신 분이다.

Kozai는 3년 후 Buenos Aires 총회에서 President를 승계했을 때, 수락 연설에서 별로 감 동을 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웃으면서 “앞으로 영어를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라고 솔직하게 언어의 장벽을 고백했다. 서양 사람들은 엉뚱한 이야기를 한다면서도 너그럽게 받아 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가 용기있는 사람으로 보였다. 우리가 얼마나 영어라는 언어 때문에 손해를 보고 있는가? 그리고 이 엄청난 언어의 굴레를 어찌하면 벗을 수 있을까?

총회가 있은 다음 날 돌연히 비보가 날아왔다. 연세대학의 이철주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그분의 아들인 이우백(李愚伯) 박사가 천문연구원 연구원으로 이 총회에 참석하고 있 는데 이 어찌된 일인가? 평소에 늘 “나는 100세까지 산다!”고 말씀하시던 분이신데. 나는 공 식적으로 IAU 한국위원회 위원장으로 총회에서는 대표자 회의와 임원 선출을 위한 회의 그리 고 신입 회원국 인준이나 다음 개최국 선정 등에 참여해야 했으므로 이우백 박사가 서둘러 서 울로 돌아가는 것을 바라볼 뿐이었다(별항1을 참조). 총회에는 Finance Committee에도 각 국 대표가 출석해야 하는데 이 Baltimore총회에 한국대표로 누가 이 Committee에 출석했는 지 기억나지 않는다.

---별항 1 : 이철주(李鐵柱) 박사

이철주(李鐵柱, 1922-1988) 선생님은 나의 은사이시다. 흥선대원군 직계 자손으 로, 그의 조부는 구한말에 노국 공사를 지내셨다. 일제 때 경기제일고보(현 경기

고등학교) 재학 중에 항일운동을 했기 때문에 퇴학당하고, 배재중학교에 편입해 서 연희전문 수물과에 입학하셨다. 광복 후, 연희대학교를 졸업하시고는 이화여 고에서 잠시 교편을 잡으시다가 6·25동란 중에 연희대학교에서 강의하시면서 여 러 가지 중임을 맡으셨다. 원자물리를 전공하셨지만, 천문학에도 관심이 많으셔 서 국립천문대 부지를 선정할 때부터 한국천문대 설립에 적극 참여하셨다. 그는 이 일에 관여하셨던 내용을 『한국천문학회 창립40주년기념 회고록』에 친히 자세 히 쓰셨다.

이 선생님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되셨고, 이곳에 금년 6월에 돌아가신 사모님도 함께 하고 계신다.

Baltimore총회에는 나의 옛 스승 세 분이 사모님과 함께 참석하셨다. 그 중 나의 지도교수 부부는 Robert and Joanne Koch이시고, Koch의 지도교수 부부는 Bradshaw and Elizabeth Wood이시다. 어느 날 우연히 이 네 분과 나 그리고 나의 제자인 김호일(金豪一) 박사가 함께 해변에서 마주쳤다. 박사 집안 4대(Wood⤑Koch⤑나일성⤑김호일)가 한 자리에 서 만난 것이다. 김호일은 Algol쌍성계의 광도곡선을 분석하여 제3체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을 박사논문으로 쓰고, AJ에 기고했으니 그도 유명인사의 반열에 속할 만하다. 그때 함께 찍은 사진을 찾지 못해 아쉽다. 하지만 학위만 받으면 다른 곳으로 다 떠나버렸던 U of Penn 의 옛 친구들이 스승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사진 4-1을 참조).

사진 4-1.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인 10명의 U of Penn 동문들. 앞줄 왼쪽의 William Blitzstein교수는 나에게 Sec z diagram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신 분이다.

중국에서도 내가 아는 쌍성 연구가들이 참석했다. 이때만 하더라도 중국에서 외국 학회에 참석한다는 일이 쉽지 않을 때였다. Madam Ye는 물론 왔었고, 옷차림이나 행동거지가 6년

전보다 훨씬 세련되어 보였다(사진 4-3를 참조). 내가 반갑게 만난 중국 천문학자로는 두 사 람이 더 있다. 그 중 한 사람은 북경천문대 대장이며 중국천문학회 회장인 Li Qibin(李啓斌, 생몰년은 미상)인데, 나 보다는 몇 살 연하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Zhang Er-He(張爾和) 이다. 이 두 사람은 1년 전인 1987년에 북경에서 제4차 IAU Asia-Pacific Regional Meeting에서 처음 만나고 이번이 두 번째 만남이다. 그런데 많은 중국인 친구들 중 유독 이 들이 반가웠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별항2를 참조).

---별항 2 : 싸워야 친해진다.

IAU Asia-Pacific Regional Meeting은 1978년에 New Zealand에서 시작되었 다. 그리고 제2회가 Indonesia의 Bali섬에서 개최된 것은 1981년이었고, 3년 후 인 1984년에는 제3회가 일본 Kyoto에서 열렸다. 한국은 정보가 없어서 처음 2 회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 Kyoto Meeting 때 처음 참여한 셈인데, 처 음 참여한 한국에서 23명이나 되는 많은 참여자가 있다고 해서 일본측에서는 대 단히 기뻐했었다. 그래서 3년 후인 1987년의 제4회는 어느 나라에서 할 것인가 가 문제였는데, 일본 학자 중에서 특히 Asia-Pacific Regional Meeting에 주도 적 역할을 해 온 Kitamura교수와 Kogure교수가 한국이 주최해 주기를 간곡히 원했다. 이 두 분은 《둘째 묶음》의 앞쪽에서 잠깐 소개하기는 했지만, 좀 더 추가해서 소개한다면, 한 분은 Tokyo, 또 한 분은 Kyoto를 대표하여 일본의 문 부성이 지원하는 대외 원조 중 과학 분야를 오랫동안 함께 열심히 담당해 왔었 다. 그래서 인도네시아를 비롯하여 말레이시아와 태국에 망원경도 기증해서 설치 까지 해 주기도 했었다. 그런데 일본은 인도네시아에 특별히 더 배려를 하는 느 낌을 내가 받았는데,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이 Java섬을 점령하고 있 었던 기간에 일본 천문학자가 Lambang천문대 대장으로 있었던 역사가 있기 때 문인 것 같다(이때 대장으로 임명받은 학자의 이름은 미상임). 그래서 Asia-Pacific Regional Meeting이 Indonesia의 Bali섬에서 개최됐을 때 일본이 재정과 회의 진행에 도움을 줬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한국과 많은 인연을 가지 고 있던 Kitamura교수가 격려 차원에서 서울에 찾아오기 까지 하면서 한국이 제4회 Asia-Pacific Regional Meeting을 주최해 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는 이 건으로 서울까지 날아와서는 연세대학교와 서울대학교에 계셨던 교수들을 만 나서 다음 주최국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고 돌아가서는 한국을 재정적으로 도울 수도 있다고 쓴 편지를 나에게 보내왔다(사진 4-3을 참조).

이로 인해서 한국내에서는 이 회의를 유치하는 문제를 의론했으나 찬성과 반 대 의견을 통일하지 못해서 결국 주최권을 중국에 넘기고 말았다. 이것이 중국 Beijing에서 개최된 제4회 IAU Asia-Pacific Regional Meeting이다.

사진 4-2. 1988년 2월 3일자로 쓴 Kitamura교수의 간곡한 편지의 일부.

이 Beijing회의에 IAU의 감독관으로는 IAU Vice-Presidents 중에서 Kozai가 왔었고, 대회의 Chair는 북경천문대 대장인 Li Qibin이 맡고 있었다. 이때 한국 은 중국과의 국교가 수립되기 전이어서 한국 대표단은 사전에 받아야 할 입국

Visa도 없이 김포-Narita-Beijing 노선이나 김포-Hong Kong-Beijing 노선의 두 길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김포-Hong Kong-Beijing 노선의 경우는 Hong Kong의 호텔에 Check-in하면, 누군가가 주는 종이쪽지를 받아 Beijing으로 가 는 비행기를 타게되어 있었다. 국교가 없으니 Visa 대신에 이 쪽지가 visa역할 을 하는 것이다. 우리 일행은 모두 8인이었는데, Hong Kong의 한 호텔에 도착 한 다음날 여행사 사람이라 하면서 쪽지 4장을 가지고 왔다. 나와 나의 지도를 받고 있던 학생 3인(이용삼, 김호일, 전용우)의 것일 뿐, 동행한 4인의 교수(민영 기, 이정복, 천문석, 정장해)의 것은 없다고 한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 에 아무리 질문해 봐도 대답은 “모른다”였다. 할 수 없어서 4인을 남겨두고 나와 학생 3인이 Beijing으로 날라 갔다. 금요일이었다.

나는 Beijing에 도착하자마자 지정된 호텔에 Check-in하고는 대회의 Chairman인 Li Qibin을 찾았다. 호텔 현관에 좀 넓은 공간이 있었는데 접수대 같은 긴 탁자 하나가 있으나, 영어가 완전히 불통인 젊은 사람 몇이 있을 뿐 한 심했다. 그래도 방 배치를 받아놓고 짐을 푼 다음 Li Qibin이 나타나기를 기다렸 다. 저녁 쯤 되어서야 키가 유난히 작은 사람이 나타났는데, 주변의 사람들이 모 두 모시는 시늉을 하기에 Li Qibin일 거라고 생각하고 다가갔다. 인사를 나눴으 나 영어가 신통치 않다. Hong Kong에 4인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으나 알아듣 는지 못 알아듣는지 도무지 반응이 분명하지 않다.

이 일로 밤새 속이 상해서 아이디아를 짜낸 것이 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말은 서툴러도 글자로는 이해가 되겠지 해서 “지금 Hong Kong의 호텔에서 하루 200 dollar씩 써가면서 visa를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발급해 달라”고 썼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이 되자 Lobby에서 만나 건네주었다. 오후가 되니 나를 부른다.

이 일로 밤새 속이 상해서 아이디아를 짜낸 것이 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말은 서툴러도 글자로는 이해가 되겠지 해서 “지금 Hong Kong의 호텔에서 하루 200 dollar씩 써가면서 visa를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발급해 달라”고 썼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이 되자 Lobby에서 만나 건네주었다. 오후가 되니 나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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