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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IAU 총회들(1900-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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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IAU 총회들(1900-1979)

IAU의 시작과 그간의 각 총회에 관한 자료는 Internet으로 검색해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글에는 그런 자료와는 다른 관점에서 뒤돌아보기로 한다.

제10차 총회는 소련연방(USSR) 시절인 1958년에 Moscow에서 열렸다. 이때는 한국이 6·25 한국동란에서 복구가 되지 않고 극심한 전쟁 후유증에 시달리던 시기였다. 그런데 북한은 PDRK라는 이름으로 IAU회원국으로 가입한 것이다. 개최지가 Moscow였던 탓에 일찍 정보를 얻은 결과일 것이다. 이 시기에 한국에는 학술단체가 많지는 않았지만 있기는 했다. 하지만, 모두 정부의 승인을 받지 않은 임의단체였다. 학술단체는 모두 등록하라는 정부의 지시가 내 린 것은 5·16군사혁명이 일어난 직후인 1960 년이거나, 그 다음 해인 1961년도였다고 생 각한다. [주: 필자는 이 당시 한국물리학회 총무였던 안세희(安世熙) 연세대 교수의 지시 를 받아 서울시청에 두세 차례 가서 한국물리학회의 등록서류를 접수시킨 일이 있었다.]

이 시기에 국립중앙기상대(현 기상청의 전신)에는 《한국기상학회》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 으나, 당국에 정식으로 등록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당시는 기상업무를 수행하기에도 인력이 부족한 형편이어서 학술활동은 생각할 형편이 아니었다. 중앙관상대는 조선시대의 관상감을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말에 조직되었으나, 일본의 조선총독부가 의도적으로 조선인 기술자를 양성하지 않았던 탓에 그들이 전쟁에 패망한 후 일본으로 철수한 자리를 메꿀 기상인력이 전무한 상태였다. 그래서 일제 때 하급 직원 이었던 소수의 직원들이 기상관측과 예보업무를 힘겹게 담당하고 있었다. 그런 사정으로

《한국기상학회》는 간판뿐인 단체로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편, 《한국천문학회》의 경우는 기상학회 보다 사정이 더 나빴다. 중앙관상대는 옛 관상 감이 하던 대로 매년 책력(冊曆)을 발행해야 했다. 1945년도 책력은 전쟁이 끝나기 전 해 인 1944년 말에 조선총독부가 『약력(略曆)』이라는 이름으로 발행한 것을 사용했었지만,

1946년도를 위한 책력은 중앙관상대가 1945년 말에 발행해야만 했다. 다행히 이 일에는 천문학 박사인 이원철(李源喆, 1896-1963) 초대대장이 직접 계산했기 때문에 제때에 발간 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역서 발간과 천문관측을 위해서 〈천문과(天文課)〉를 신설하는데는 성공했지만 정부의 TO를 받지 못해서 직원 한 사람으로 운용해야 했다. 그러므로 역서 발간 외에 천문관측을 한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는 형편이었다.

천문과 관련있는 일로서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주 초라한 단 두 가지 사건뿐이다.

첫째는 〈천문과(天文課)〉는 IAU Division F가 주관하고 Smithsonian Astrophysical Observatory가 발행하는 Minor Planets and Comets Circular를 받고 있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그런 것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 해였던가, 새로운 혜 성이 나타났다는 소식이 세간에 알려졌는데, 기자들의 질문에 응답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 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가 받아본 일본의 『天文月報』를 보고, 그 혜성의 이름이 Mrkos혜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이름만 겨우 알려 줄 수가 있었다.

사진 1-2. 이원철 박사 흉상과 그가 편집한 광복 후 처음 발행한 병술(1946)년 역서.

역서의 제목 『歲次丙戌曆書』만이 표지에 적혀 있을 뿐 겉모습이 아주 초라하다.

그런데 Mrkos는 혜성을 2개를 발견했기 때문에 Mrkos I과 Mrkos II가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이 혜성은 맨 눈에도 보인 밝은 혜성이었기 때문에 나는 쌍안경으로 혜성 의 머리를 관측하고 성도 책에 그 위치를 찍어 보았다. 나에게는 추억의 첫 혜성이다.

1994년에 지금의 Slovak 공화국의 Tatra Mountain에 있는 Skalnate Pleso 천문대를 내 딸(사라)와 함께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Mrkos가 그 혜성을 발견했을 때 사용 한 아주 큰 쌍안경이 잘 보전되어 있는 것을 보고 몹시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는 부분일식이 1957년 4월 30일 낮에 일어났다. 그러나 이 해에 발간된 국립중 앙관상대의 『檀紀四二九〇曆書』에는 단지 〈陰曆月日〉로 〈四月初一日 合朔〉이라고만 적혀 있을 뿐, 일식예보는 없었다. 신문기자들이 전날부터 귀찮게 문의해 왔다. 드물게 나타나

는 금환일식이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부분일식이었다. 나는 기상관측만 하는 말단 직원이 었지만 이날만은 천문과 직원 행세를 했다. 굴절망원경 앞 렌즈를 색깔이 짙은 세루로이 드(주: 그때는 플라스틱이 없었다) 책받침 두 장을 붙여서 햇빛을 약화시켰다. 그때는 학 생들이 연필로 공책에 글씨를 쓸 때 종이가 찢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런 책받침을 썼었다. Eyepiece 쪽에는 판대기에 흰 종이를 붙여서 태양의 상을 투영시켰다. 망원경의 가대는 수동이기 때문에 장시간 추적할 경우를 대비해서 진북방향에 망원경의 광축을 잘 맞춰야 하는데, 이런 일은 나도 잘 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식이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나는 망원경을 조종하고, 서용화(徐龍和, 생몰년 미상) 과장은 시간을 측정하여 기 록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사진 1-3. 1957년 4월의 부분일식. 15 cm 굴절망원경으로 관측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는 나일성과 기록하는 흉내를 내는 서용화 천문과 과장. 이 망원경은 6·25한국동란 때까지

부산측후소에 있던 것을 환도할 때 서울의 본대로 옮겨온 것이다.

(1957년4월30일자 동아일보 석간에서 옮김)

이렇게 천문관측 업무가 전무한 상태가 계속되던 때에 긴급한 상황이 벌어졌다. 그것은 1961년 봄이었다. Washington, D. C.의 주미한국대사관이 LA에서 천문학에 관계되는 국제 회의가 열리는데 북한은 이 국제조직의 회원 자격으로 대표단을 보낼 예정이니 속히 한국도 이에 대처해야 한다는 전문을 외무부에 보내온 것이다. 외무부는 학술단체에 관한 건이므로 문교부에 전문을 이송했으나, 문교부에는 천문과 관련이 있는 단체가 등록된 바가 없음으로 학술원으로 이송했다. 학술원은 이 통보를 받고 당황했다. IAU총회는 8월이므로 불과 4개월 정도의 여유 밖에 없었던 시점이었다. 다만 다행스럽게도 이원철 박사가 학술원 회원이었으므 로 그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결국 학술원의 황〇〇과장이 시내의 작은 호텔에 방 을 하나 마련해서 몇 사람이 모이도록 했었다. [주: 이때의 이야기는 유경노(兪景老, 1917-1997) 선생께서 내가 어딘가에 썼던 내용을 간추려서 『천문학회보, 제30권, 회고록』에 소개한 바 있으나, 너무 간략하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을 회원들이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

여기에 되도록 자세하게 쓰려고 한다.]

황〇〇과장이 마련한 방에 모인 사람은 이원철, 박철재(朴哲在, 1905-2001), 국채표(鞠埰表, 1907-1967), 안세희, 나일성의 5명이었다. 황〇〇과장은 모든 편의를 다 제공해 드릴테니 조 속한 시일 안에 천문학회를 조직해 주면, IAU에 가입하도록 하고 또 대표단도 보낼 수 있게 하겠다고 말 하면서 속히 처리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고 방에서 나갔다. 박철재 박사는 서 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물리학과 교수였고 연령도 이원철 박사 다음이어서 이분이 주로 발언을 많이 하셨는데, 일단 설립준비위원장으로 이원철 박사를 추천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좋았으 나, 이원철 박사는 유경로, 현정준(玄正晙, 1925-2016) 두 교수께서 공교롭게도 미국에 가 계 시므로 이분들을 대신해서라도 서울대에서 몇 분이 참석해야 한다면서 더 진행을 하지 않으셨 다. 이에 박철재 박사와 국채표 박사는 자기들은 천문과는 별 상관이 없으면서도 선생님이 하 시는 일이기 때문에 도와드리기 위해 참석했지만, “다음에 또 오라고 하시면 사양하겠습니다”

하고 단호했다. 그러나 이원철 박사가 이렇게 소수가 모든 것을 결정해 버리면 뒷 탈이 반드 시 생길터이니 서울대에서 누구든 오시도록 해야 한다고 고집을 꺾지 않았다. 꽤 긴 시간이 지난 후 내린 결론은 당시 나일성이 서울대 문리과대학 천문기상학과와 사범대학 지구과학과 에 시간강사로 출강하고 있었으므로, 권영대(權寧大, 1908-1985)교수, 김성삼(金聖三, 1923-1996)교수, 김철수(金哲洙, 생몰년 미상)박사에게 찾아가서 취지를 설명하고 다음 모임 에 오시도록 말씀드리라는 것이었다(별항1 참조).

---별항1: 朴哲在박사, 金哲洙박사 그리고 ...

박철재 박사는 연희전문을 1930년에 졸업, 일본 교또대학에서 1940년에 『生고무 의 경화(硬化)』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조국의 광복 때까지 일본에서 연구생활 을 하였다. 서울대학교가 설립될 때부터 물리학과에서 3년간 교수로 재직하다가 1948년에 문교부 기술교육국에서 부국장과 국장을 역임하셨다. 그리고 이어 원 자력원이 발족되자 초대 원자력연구소 소장이 되었다. 그의 경력을 생각하면 IAU건으로 천문학회 창설을 의론한 자리에 있었을 때는 아마 원자력연구소 소장 이었을 것이나, 서울대 물리학과에서의 강의는 계속하셨을 것이다.

한편, 김철수 박사는 1944년에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서울대하교 물리학과에 서 학사과정을 마친 다음 일본 동경대학에 유학하여 유체역학 연구논문으로 박 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했다. 그때가 1960년이거나 그 전 해일 것이다. 당시 서 울대 물리학과에는 자리가 없어서 임시로 서울대 문리과대학 천문기상학과에 적 을 두고 있었다. 현정준 선생께서 미국에 가 계신 때여서, 유체역학이 수리적으 로 천문학에 가깝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후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하였으나, 내가

한편, 김철수 박사는 1944년에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서울대하교 물리학과에 서 학사과정을 마친 다음 일본 동경대학에 유학하여 유체역학 연구논문으로 박 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했다. 그때가 1960년이거나 그 전 해일 것이다. 당시 서 울대 물리학과에는 자리가 없어서 임시로 서울대 문리과대학 천문기상학과에 적 을 두고 있었다. 현정준 선생께서 미국에 가 계신 때여서, 유체역학이 수리적으 로 천문학에 가깝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후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하였으나,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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