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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참가한 IAU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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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설레는 마음으로 지중해를 항해하는 이름 모른 연락선을 탔다. Italia 남부의 어떤 항구를 출발하여 이름도 생소한 Greece의 Patras섬으로 떠난 것은 1982년 8월 X일 저녁이 었다. 하지만 승선할 때의 흥분은 없어지고, 갑판에 올라가 수평선을 본다던지 다른 승객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이나 배의 시설을 구경한다는 식의 최소한의 낭만도 없었다. Sicily 섬의 Catania에서 IAU Colloquium에 참여했던 일행은 모두 나처럼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깊은 잠에 빠졌다. 그리고 새벽이 되니 배는 Patras섬의 작은 항구에 닿았고, 우리는 육지를 밟았 다. Italia남부에서 Greece로 배를 타고 갔다는 것 밖에는 아무 추억도 남아 있지 않다.

항구에서 통관 절차가 있었을 법한데, 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38년이나 지난 세월 때문만 은 아닐 것이다. 유럽이라는 생소함, 아직 촌티를 벗지 못한 몸이었고, 거기에다 배 타기 전에 잃어버린 돈지갑 때문에 마음의 안정을 잃었기 때문이었겠지(별항1 참조).

짐을 들고 건물을 나와 부지런히 대회장으로 사용하는 U. of Patras로 갔다. 저 멀리서 아 내가 손을 흔든다. 나보다 먼저 Roma에서 비행기로 날라와서 LOC의 접수대에서 가족으로 등록하고 우리가 묵을 Alexander Beach Hotel에 Check-in한 다음 대학으로 다시 돌아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내와 나는 LOC가 제공하는 버스를 타고 호텔에 가자마자 제 일 큰 트렁크를 급히 열어 보았다. 그리고 그 속에 넣어둔 양복저고리의 호주머니에서 돈이 들어있는 지갑을 찾아냈다. 나는 나도 모르게 혼자말로 “이제 살았다!”고 중얼댔다. 영문을 모 르고 의아해 하는 아내에게 오래오래 추억할 웃음꺼리를 안겨준 셈이다.

호텔은 이름이 호텔이지, 길게 연달아 있는 단층짜리 여관이다. 이 작은 섬에 번듯한 호텔 이 있을 리 없지. 그래도 아내와 나는 마음이 흡족하다. 공기가 깨끗하고, 몇 발자국만 나가면 남쪽으로 펼쳐진 지중해 바다가 있다. 방이 몇 개나 되는지는 몰라도 아침이 되니 꽤나 많은 학회 참가자들이 아침밥 먹으러 모인다. 반갑게도 내가 잘 아는 Kyoto대학의 Kogure Tomokazu(小暮智一, 1926-) 교수를 만났다. 이전에 여러 번 만난 일이 있었는데, 동경천문 대의 Kitamura Masatoshi(北村正利, 1926-2012) 교수와 절친한 사이다.

Kogure교수에 관하여는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을 지 모르겠는데, 이 총회 이후 약 20년간 여러 차례 만나는 동안 그의 댁에도 저녁 초대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래도 지금 한 가지 언 급해야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이분이 Be stars에 관심이 많아 논문도 많고 저서도 있다는 사 실이다. 어느 날 저녁을 함께 먹는 중에 식쌍성 Epsilon Aurigae가 지금 식을 시작했다고 한 다. Eps Aur는 식쌍성 중에서 공전주기가 가장 긴 27.3년이며, B-type star와 M-type의 Supergiant로 쌍을 이루고 있다. F. B. Wood에 의하면 “이 별을 이해하면 천체물리를 이해 하게 된다!”고 역설한 바 있는 유명한 별이다. 그래서 나는 한국에 돌아가면 곧 광전관측을 시작하고, 그는 Spectroscopic 관측을 하기로 약속을 했다.

사진 2-2. Kogure 교수와 나란히.

별항 1 : Patras로 가는 길에

Patras총회에 참가하기 전에 앞에서 잠깐 언급한 대로 나는 Italy Sicily섬에 있 는 Catania에서 열린 IAU Colloquium에 참석했다. 이것은 그때까지 내가 참석 한 두 번째 Colloquium으로서 광도곡선이 변화하는 근접쌍성의 원인 규명을 주 목적으로 한 학회였다. Roma를 거처 Catania공항에 닿은 날은 일요일이라 공항 의 환전소가 문을 닫고 있었다. 가지고 있던 Dollar로는 전차표도 살 수 없고,

영어도 통하지 않아 회의장으로 가는 길을 물을 곳도 찾지 못해 어찌할 바를 모 르고 한참을 서 있었다. 미국생활을 오래 했으니 유럽 따위는 어디가나 문제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나는 지금 완전한 촌놈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므로 생략하고, 이 Colloquium에 서 만난 Alvaro Gimenez를 잠간 소개해 보자. 그는 나의 가슴에 붙은 이름표를 보더니 반갑게 인사를 한다. 참석자 명단에서 내 이름을 보고 나를 기다리고 있 었다면서 “Apsidal motion을 하는 근접쌍성의 식심시각을 관측한 나의 paper 를 보고 자료를 더 얻어 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세상에 나 같은 초년생을 보자 는 사람이 이런 곳에 있다니 깜짝 놀랄 일이다. 그는 Spain출신으로 영국의 Zdenec Kopal(1914-1993)의 제자이다. 나와는 Colloquium 동안 같은 방에서 지냈는데, 내가 Spain으로 여행가면 Majorca섬에 가 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 런데 그로부터 30년이나 지난 제27차 Rio de Janeiro 총회에서 만났을 때 “언 제 Majorca섬에 가겠느냐?”고 물을 정도로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친구로서 지금은 이 분야의 대가가 되어 있다. Majorca섬은 Majorca Symphony Orchestra의 상임지휘자로 있으면서 우리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선생이 살았 던 곳이며, 그의 유택이 지금도 남아 있는 곳이다.

5일간의 Colloquium은 끝나고, 많은 참가자들이 Patras총회에 함께 가기 위 해 버스를 타고 Italy본토의 남단에 있는 항구로 배를 타고 건넜다. Catania Colloquium LOC 사람들이 이런 배려까지 해 준 것이다. 항구에 닿자 유명한 동굴이 있다면서 저녁배가 떠날 때까지 관광을 시켜주었다. 그런데 관광안내인은

〈소매치기를 조심하라!〉고 여러 번이 아니라 수십 번도 더 했다. 너무 지나치다 싶어서 짜증을 내다가 문 듯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돈지갑이 사라졌다. 여권 이나 다른 서류는 잘 있지만, 돈지갑만이 없어졌으니 아찔했다. 그래서 파출소로 가서 신고를 했다. 순경은 영어를 모르고 나는 이탈리아 말을 모르니 참 기막힌 경험을 한 셈이다. 그때 작성한 조사서는 기념으로 아직도 어디엔가 보관하고 있 다.

저녁에 떠나는 연락선을 탔지만 앞으로가 걱정되었다. 그런데 5일간 함께 Colloquium에 참석했던 대만 학자가 “300 dollar를 빌려 줄테니 걱정말라”는 것이다. 그는 Caltech에서 이론으로 학위를 받고 대만대학에서 교수로 있다는 Ni라는 학자이다. 1982년에 300 dollar는 작은 돈이 아니다. 그러나 적고 많고 가 아니라 학회에서 처음 만난 외국 사람에게 되받을 방법도 없는데 이런 호의 를 베풀다니, 나는 정말 기쁘면서도 놀랐다. 그래서 “Patras에 도착하면 내 아내 가 와 있을테니 그리되면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만, 만약 아내를 만나지 못하면 그때 300 dollar를 꾸겠다”고 말했다.

배에서 내리자 저 멀리 아내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만나자마자 나는 짐을 풀어 양복 호주머니에서 돈지갑을 찾아냈다. 밤새도록 누워 있는 동안 개회식에 입을 양복 호주머니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Ni교수와는 그 후 한 번도 다시 만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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