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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절 표준과 표준화의 기본 성격

문서에서 R&D연구결과보고서 (페이지 114-119)

◌ 표준이란 사람들이 현실을 구성해가는 수단이다. 이러한 수단은 사람과 사물에 질서를 부 여하는데 기여한다. 이런 점에서 표준은 인간 사회를 형성하는 기술적,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윤리적 인프라라고 할 수 있다.

◌ 표준은 주어진 상황에서 ‘최고의 것’으로 간주되기도 하며, 모범적인 조치 또는 비중있 게 다루어져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 표준은 경우에 따라서 도덕적인 특징을 내포하거나 사물의 성질을 대변하기도 한다. 또한 표준은 이상형을 지향하는 규칙과 규범을 가리키기 도 하며, 때때로 단순한 평균을 의미하기도 한다. 표준이 사람과 사물 모두에 허용되는 관용의 수준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이 다양한 표준의 의미는 서로 연관되어 있 는데, 이를 통해 도덕적, 정치적, 경제적, 기술적 ‘권위(authority)’를 부여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표준에는 올림픽 표준, 필터 표준, 순위 표준, 구분 표준 등 4가지 유형이 있다.

(1) ‘올림픽 표준(Olympic standards)’은 오직 하나 또는 극소수의 행위자만이 승자가 되는 경우이다. 이처럼 특정한 환경 안에서 단수 또는 극소수에게만 승리가 허용되는 이면에는 수많은 패자들이 존재한다. 말하자면 ‘승자독식(winner-take-it-all)’의 접 근법이라고 할 수 있다. 치열한 시장경쟁이 이루어지는 경우 올림픽 표준이 나타날 가능성이 크며, 이러한 표준경쟁에서 패자는 순식간에 잊혀진다.

(2) ‘필터표준(filters)’는 일정한 기준을 통과한 집단과 그렇지 못한 집단을 나누는 표준 을 뜻한다. 필터표준은 사물을 정돈하거나 분류하는 경우, 그리고 특정한 집단에 적합 하지 않은 후보군들을 배제하는데 사용되곤 한다. 한 국가의 시민권과 같은 표준은 이러한 필터표준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3) ‘순위표준(ranks)’은 사람이나 사물을 일정한 순서에 따라 위계적으로 배열하도록

해주는 표준을 가리킨다. 자격요건의 가부를 판단하는 데에만 사용되는 필터표준과 달리, 이 경우에는 집단에 속한 모든 대상에 순위가 부여된다.

(4) ‘구분표준(divisions)’은 순위를 매길 수 없지만 상호 구분되어야 하는 사람이나 사 물에 대해 적용되는 표준이다. 대부분 질적 차이를 보이는 집단들을 구분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며, 사람들의 정체성이나 상품의 차별성을 부각시키는데 활용된다.

◌ 역사적으로 표준은 크게 ‘표준화’의 추세와 ‘차별화(differentiation)’의 추세를 동시 에 겪어왔다. 이러한 양대 추세는 보편주의와 특수주의 사이의 대립적인 양상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표준화의 추세는 인위적인 노력을 통해 이루어져왔다는 점 에서 하나의 ‘프로젝트(project)’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프로젝트는 그것을 추진하 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반작용에 부딪칠 수도 있다. 프로젝트로서의 표준화는 역사적으 로 ‘계몽주의(Enlightenment)’라는 거시적인 보편화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인간의 보편이성에 대한 요구와 경험세계에 대한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노력 은 사회를 보다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변환시킨다는 목표 아래 이루어졌고, 단일성 (uniformity)을 확보하고 예측성(predictability)과 책임성(accountability), 객관성(objectivity) 등을 보장함으로써 진보를 향해 나아가며 합리적 통제가능성을 높이는 것이 계몽주의 프 로젝트의 근본적인 목표였다.

◌ 계몽주의 프로젝트는 ‘표준’의 확산을 통해 사람들의 인식이 널리 호환되게끔 만들고 자 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처한 환경이 가능한 한 유사해지도록 세상을 재창조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런 점에서 보면 마르크스주의에서 추구했던 계급투쟁의 이념 역 시 표준화된 노동자들의 표준화된 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대형 프로젝트의 핵심적인 구성 요소였다. 테일러에 의해 구현된 미국의 표준 노동환경 또는 ‘인종 용광로(melting pot)’도 마찬가지로 표준화된 세상을 만들려는 근대적 기획의 산물이었다. 이러한 프로 젝트를 통해 ‘정상적(normal)’ 개인을 양산해내고 ‘자아(self)’를 표준화된 형태로 규 율하려는 것이야말로 근대 통치체제의 근본적인 목표였다.

◌ 전제정치 시대의 소련과 마오쩌둥 통치 시기의 중국 역시 이런 점에서 표준화된 구성원 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유토피아적 사회주의 국가를 만들어내려 했다는 점에서 ‘표준’

을 위한 프로젝트였으며, 히틀러의 경우에도 인종적 통일성을 기반으로 세계의 통합을 꿈

꾸었다는 점에서 표준화의 프로젝트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말하자면 20세기 초반과 중반 에 걸쳐 히틀러, 스탈린, 마오쩌둥, 프랑코, 무솔리니 등 세계를 뒤흔들었던 표준화의 정 치 기획은 ‘표준’ 통치대상을 현실세계에서 구현하려는 거대한 독재체제의 명암을 적 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이러한 디스토피아(dystopia)의 모습은 앨더스 헉슬리(Aldous Huxley),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조지 오웰(George Orwell), 예브게니 자미아친 (Evgeny Zamyatin)의 문학작품 속에 잘 묘사된 바 있다.

◌ 표준은 그것을 만들 때의 목적에 따라 ‘표준화’를 위해 디자인된 표준과 ‘차별화’를 위해 디자인된 표준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보편주의적인 성향을 가지며, 후 자의 경우에는 특수주의의 성향을 보인다. 보편주의가 시공을 초월하여 동일한 것을 만들 어내려는 것이라면, 특수주의는 사람이나 사물의 특수한 측면을 부각시키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구분은 해당 표준이 만들어지는 상황 또는 주어진 관계 속에서만 의 미를 갖는다.

◌ 근대 이전에는 대부분의 상품과 서비스가 제한된 수의 고객에게 특화된 것이어서 표준적 인 속성을 갖기 어려웠다. 이 경우 경쟁은 공급자와 소비자 사이에 일어나는 것으로서, 해당 상품이나 서비스의 ‘가격’ 또는 ‘품질’ 등 다양한 측면에 관한 협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말하자면 상품이나 서비스를 판매하는 사람들 사이의 경쟁이 아니라 판 매자와 구매자 사이의 경쟁이었다. 그들 사이에 거래되는 상품이나 서비스는 거의 표준화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상 ‘상품(commodities)’이라기보다 ‘단품(singularities)’

에 더 가까웠다.

◌ 근대에 들어와 이와 같은 거래관계의 변화를 이론화한 것은 바로 아담 스미스(Adam Smith)였다. 그는 ‘가격 경쟁(price competition)’이 이루어지는 시장경제가 가장 이상적 인 경제라고 보았는데, 이러한 생각은 훗날 신자유주의의 경제사조로 이어졌다. 이러한 자유주의 또는 신자유주의 사조에서는 모든 경제적 활동이 ‘단일성(uniformity)’을 확보 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고 보았는데, 이러한 특징이 상품 생산에 충분하게 달성될 경 우 가격만을 기준으로 한 거래가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즉 상품이 고 도로 표준화됨으로써 오로지 ‘가격’만으로 차별화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생산자들은 가격을 올리는 대신 생산단가를 낮춤으로써, 또는 기술혁신을 통해서 자신의

이익을 증가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 표준화를 통해 가격을 기반으로 한 거래시스템을 갖추었던 근대의 표준과 비교할 때

‘차별화된 표준’은 가격이라는 기준을 뛰어넘어 비(非)가격 경쟁을 촉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경쟁이 이루어지는 시장에서는 동일하지만 차별화되는 수백, 수천 가지 의 상품이 공존한다. 과거의 시장이 가격을 통한 표준화를 강요하는 측면이 있었던 데 비 해, 비가격 경쟁시장에서는 이러한 강요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누구나가 자발적으로 특수한 형태의 재화를 생산하여 경쟁에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150여년 동안 ‘표 준화된 차별화(standardized differentiation)’의 추세가 전개되어왔는데, 이러한 변화는 교 통과 통신의 발달, 패키지의 개선, 신자유주의적 제도 개혁 등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 표준화된 차별화는 시장의 요구가 다변화되면서 나타나는 ‘롱테일(long tail)’ 현상과 밀 접한 연관성을 갖는다. 크리스 앤더슨(Chris Anderson)이 언급했던 롱테일 현상은 시장의 분포도가 왼쪽보다 오른쪽에서 더 긴 꼬리를 보이면서 매우 다양한 시장의 요구를 반영 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러한 ‘맞춤형 시장(market niches)’이 급속도로 팽창한 것은 앞서 언급한 다양한 발전의 시너지를 통해 나타난 ‘표준화된 차별화’ 현상이라고도 볼 수 있다. 과거에는 교통과 통신, 지식의 제약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선호도에 병목현상 이 존재했지만, 오늘날 이러한 병목이 대폭 줄어들면서 다양하고 풍부한 선호를 반영한 시장의 요구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말하자면 과거와 같은 ‘표준화된 표준’의 차원 을 넘어 이제는 다양한 선호에 맞추기 위한 ‘차별화된 표준’이 함께 등장하고 있다.

◌ 이처럼 ‘표준화된 차별화’의 현상은 여러 가지 메커니즘을 통해 구현되고 있는데, 여기 에는 표준개발기구(SDO: standards development organizations), 컨소시엄(consortia), 일시 적 표준동맹(ad hoc standard alliances) 등이 포함된다. SDO의 경우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형태의 공식 기구로서, 다양한 이해당사자의 관심과 이익을 조정하기 위해 공정한 절차를 기반으로 한 제도적 장치를 갖추고 있다. 또한 참여자들의 합의를 바탕으로 한 결정을 선 호하며, 신중한 논의과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특징을 보인다.

◌ 이에 비해 컨소시엄은 엔지니어와 시장 행위자들을 중심으로 한 조직 협의체로서, SDO와 마찬가지로 공식화된 구조를 갖추고 있지만 정해진 일정 내에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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