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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단계: 민간교류단계(1987년 이후)

문서에서 중국과 대만의 인적교류법제 (페이지 12-24)

중국 개방정책의 가속화에 따른 경제발전과 대만의 정치적 민주화 그 리고 양안정세의 평화기류에 따라서 대만은 1987년 중국에 대한 문호를 개방, 양안교류 활성화를 위한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였다. 1988년 7월 에는 국민당 제13차 전국대회를 통해 현단계 대륙정책안(現段階大陸政 策)을 마련하였고, 8월에는 행정원(行政院)에 양안교류 활성화를 위한

정부기구로서 대륙공작회보(大陸工作會報)를 설치하였으며, 국민당 중앙 상임위원회에 대륙공작지도소조(大陸工作指導小組)설치, 1980년 9월 총 통부에 국가통일위원회(國家統一委員會), 1991년 행정원 산하의 ‘대륙공 작회보’를 대륙위원회(大陸委員會)로 승격, 2월에는 민간단체인 재단법인 해협교류기금회(海峽交流基金會)를 인가하여 양안의 공식적인 업무를 처 리하는 민간중개단체로 운영하는 등 1987년 이후 중국과의 사회, 경제, 문화방면에 있어서의 민간교류는 지속적으로 성장하여왔다.

1970년대 말 이후, 세계조류의 변화 역시 양안관계에 커다란 변수로 작용되었다. 동서냉전의 완화와 미․중수교는 서태평양 지역의 긴장완화 로 이어졌으며, 이를 통해서 양안간에도 화해무드가 자연스럽게 조성되 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 이후 세계조류의 변화가 양안에 미친 영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양안은 급격한 세계조류 변화에 따라서 군사적 대립을 완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군사적 대립완화는 곧 대만의 외교적 고립을 예고하 는 것이었다. 중국의 지도자들은 국제사회에서 외교적으로 입지를 확고 히 다지는 한편 대만문제를 처리하는 방안으로써 앞서 제시한 ‘일국양제’

를 주장하여 대만의 주권이 중국에 있음을 천명하였고, 국제사회에서 대 만의 입지는 급격히 약화되었다.

둘째, 세계조류 변화는 양안의 경제교류를 활성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은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포기하고 개혁과 개방정책을 추진하여 외국 자본과 대만자본을 유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30년 이상 중단된 양안의 교류는 경제와 사회방면 등에서 다시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비록 대만정부의 공식적인 대륙정책은 아직도 여전히 비접촉, 비담판, 비타협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지만 홍콩을 경유한 간접무역총액은 지난 1979년 7천7백만 달러에서 1993년 86억 8천9백만 달러로 급상승하여 14년 간 무려 100배 이상 성장하였으며, 1994년 1월에서 9월까지 70억 5천 8백만 달러(전년도 같은 기간에 비해 약 10% 증가), 1993년 150 억 9천3백만 달러, 1994년 160억 달러, 1998년 184억 달러, 간접수입 총액은 41억 1천 1백만 달러, 대중국투자는 모두 728건에 16억 1천 4 백만 달러, 민간 소액 송금은 103,967건에 3억 5천만 달러에 달하였다.

제 2 장 중국․대만 관계의 변천과 현황

이러한 수치는 단순히 홍콩세관의 통계자료에 의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이보다 더욱 클 것으로 예측된다.

양안간에는 경제적 교류 이외에도 사회, 문화방면에 있어서의 교류가 활 발히 진행되어 왔다. 홍콩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1988년에서 1994년 9월 까지 대만시민의 중국방문자 수는 681만에 달하였고, 서신 왕래는 1988 년에서 1994년 9월에 이르기까지는 9,400여만건에 달했다. 교통부 산하 국제전신국의 통계에 의하면 양안간 전화통화는 1989년 6월에 개통되어 1994년 9월에 이르기까지 1억 4천여만통, 총사용시간은 4억 4천 3백여 만分에 달하였으며, 전보는 40만여통에 달했다. 이러한 수치는 90년대 이 후 더욱 증가하였다. 90년대 이후 대륙방문자수를 연도별로 나타내면 1990년 925,768명에서 1994년 1,150,000명, 1997년 1,848,000명으 로 대폭 증가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활발한 교류에도 불구하고 양안에는 여전히 불안감이 감돌고 있다. ‘대만은 중국의 일부분’이라는 중국정부의 정치적 주장은 여 전히 되풀이되고 있어 대만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으며, 대만의 자본을 유입하여 이를 정치․경제적으로 악용하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 1994 년 발생한 ‘千島湖 학살사건’, 광동지역과 중국의 대도시 곳곳에서 발생하 고 있는 대만기업인 피살사건 등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최근 들어 대만의 경제계 내부에서 중국투자확대에 따른 우려의 소리가 강조 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만약 이러한 문제 가 지속된다면 양안관계는 급속히 냉각될 것이며, 이는 양안관계의 장기 적인 발전에 매우 불리하게 작용될 것이다.

양안관계는 근대사 이후 40여년 지속된 국공내전(國共內戰)과 동서냉 전, 상이한 역사적 경험, 정치․경제․사회제도, 의식구조로 인해 ‘나눌 수 없는 관계, 분명한 차이점’들이 현존하고 있다. 그중 정치적 변화는 양안관계에 있어서 가장 민감한 사안이다.

현재 대만에서는 정치적 급변기를 맞고 있다. 국민당 리덩후이 총통의 뒤를 이어 2000년 임기 4년의 제10대 총통으로 야당인 민진당의 천수 이비엔이 당선된 후 ‘일국양제’에 의한 통일방안을 분명히 거부한다는 의 사를 표명하였고, 중국 역시 같은 날 당 중앙 및 국무원 판공실 성명을

통해 “대만의 지도자 선거와 그 결과가 대만이 중국영토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바꿀 수는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2004년에는 천수이비엔 이 총통에 재선된 후 대만독립 방향을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제 2 절 중국의 대만정책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49년 10월 1일 중국 대륙에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중국과 대만과의 양안관계는 다음 3단계로 구분될 수 있다. 첫 번째 단계인 1949-1978년까지는 상호간의 군사적 대치시 기라고 할 수 있으며 그후 대치왕래시대(1979-1987) 및 민간교류협상 시기(1987년 이후)로 구분된다3).

1971년 이후 중국의 대만 정책은 양안간의 교류확대와 대만의 국제적 고립유도를 통한 흡수통일의 추구라고 요약할 수 있다. 중국의 대만 통 일정책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방식을 통해 추진되어 왔다.

첫째, 중국은 하나의 국가안에 자본주의 체제와 사회주의 체제를 공존 시키는 일국양제(一國兩制)를 실천하는 통일정책을 추진했다. 중국은 홍 콩과 마카오의 반환에 이 원칙을 적용해 왔다. 둘째, 중국은 통상(通 商)․통우(通郵)․통항(通航)으로 표현되는 3통(三通)과 친척방문 및 경 제․문화․과학기술․체육교류로 대표되는 4류(四流)를 통한 적극적인 양안(兩岸)정책을 추진했다.

이렇게 적극적인 교류확대 정책을 추진하면서 한편으로는 대만에 대한 무력불사용의 천명을 거부한 상태에서 대만의 국제적 고립화를 추구해 왔던 것이다.

특히 1978년 개혁․개방 정책의 추진을 선언한 이래 중국은 3통원칙 과 민간교류 확대로 경제협력을 진전시키며 대만을 ‘하나의 중국정책’ 안 으로 끌어 당기는 전략을 구체화해 왔다. 한편 대만은 중국의 대만정책 에 대항하여 중국의 무력사용 포기를 요구하는 한편 1991년 3월 중국과 교류를 증대하고 이를 통해 「민주․자유․균부」의 통일중국건설을 목표

3) 張五岳․張仕賢 “中華民國的大陸政策”, 主編(張五岳), 兩岸關係硏究, (臺北, 新文京開 發出版股份有限公司, 2003), pp.35-39.

제 2 장 중국․대만 관계의 변천과 현황

로 하는「국가통일강령」을 확정했다. 대만의 입장은 중국의 흡수통일 전 략이 대만을 직접적으로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 중국과 민간교류 확대를 간접허용하는 정책을 추진하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중국과 대만의 정치적 갈등은 중국정부의 ‘하나의 중국원칙’과 대 만정부의 ‘대만의 실체 및 국제적 활동인정 우선’이라는 입장이 서로 상 충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 국과 대만은 경제 및 사회교류 면에서 활발한 관계를 맺고 있다.

중국은 1978년 개혁개방정책의 추진이전까지는 “一定要解放臺灣”이라 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만에 대한 적화통일’이 기본전략이었다.

그러나, 개혁․개방이후 一國兩制 통일방안을 제시함으로써 평화통일의 의지를 대외적으로 천명하였다. 1978년 헌법에서는 “우리는 대만을 중화 인민공화국의 지방정부로 받아들여 조국통일의 대업을 완성한다”는 규정 을 두게 되었다. 현단계 중국의 대만정책은 1978년 이래로 강조하여 왔 던 ‘평화통일’, ‘일국양제’를 정책의 기본 틀로 삼고 있다. 일국양제의 구 상과 발전은 대체적으로 3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1978년 소집된 제11차 삼중전회(十一屆三中全會)로서 중국은 양안의 통일이 기존의 무력사용원칙이 아닌 ‘평화통일’의 방법으로 이루 어 져야함에 기본적인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4) 둘째는 1981년 9월 30 일 인민대표대회 위원장이 강조하였던 “대만은 조국의 품으로 돌아와 평 화통일을 실현하자”는 상무위원회의 공식입장 표명이 바로 그것이다.

셋째는 1984년 10월 15일 요망(瞭望)잡지에 실린 덩샤오핑(鄧小平) 의 통일방안이다. 그는 평화통일의 구체적인 실현방안으로써 ‘하나의 중 국, 두 개의 제도’를 제시하였다. 그 후 95년 1월 장쩌민(江澤民) 주석 이 재확인한 바 있다. 이는 ‘일국양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중국과 대만이

하나의 중국 이라는 점을 전제하고, 통일될 경우 대만에 고도의 자치 권을 보장하겠다는 것이다.

4) 1978년 개혁․개방정책추진이후부터 1987년까지의 중국의 대만관련 선언내용을 살 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전국인민대표대회상무위원회 告대만동포서(1979.1.1.), 대만조국으로의 회귀실현과 평화통일방침정책(1981. 9.30.) 자세한 내용은 吳新興, 整合理論與兩岸關係之硏究, (臺北: 五南圖書出版公司, 1998), pp.371-389 참조.

또한 ‘일국양제’의 기본구상을 통해서 볼 때 ‘일국’이 의미하는 것은 중

또한 ‘일국양제’의 기본구상을 통해서 볼 때 ‘일국’이 의미하는 것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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